소설방/아리랑

155. 결의

오늘의 쉼터 2017. 7. 7. 00:36

155. 결의



박용화는 일요일 아침 일찍 하기방학 동안 알아둔 에이꼬의 하숙집을 찾아가씨다.

주택가 골목을 몇 번 돌아 쪽지에 적힌 번지수의 집을 찾아낸 박용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집이 하숙을 쳐서 먹고 살기에는 안 어울리게 너무 좋았던 것이다.


"값비싼 하숙집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떵떵거리고 잘사는 검사 딸년이니까."


박용환은 떨떠름한 웃음을 입에 물며 집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모자를 고쳐쓰며 자신의 용모를 내리훑었다.

아침에 손수 다려입은 교복에는 티끌하나 묻어 있지 않고 말끔했다.

칼날처럼 날카롭게 선 바지선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했다.
박용화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대문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점잖게 대문을 두들겼다.

그런데 대문 안쪽에 달린 종이 강아지가 갑자기 짖어대듯이 호들갑스럽게 딸랑딸랑 울려댔다.

박용화는 문득 놀랐고, 다음 순간 그 따위 소리에 놀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큼큼

헛기침을 하며 거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구세요?"


조선 앞치마하고는 달리 어깨걸이 앞치마를 걸치고 쪼르륵 달려 나온 것은 한눈에 식모였다.


"실례하겠소. 여기가 이시하라 에이꼬란 학생 하숙집이오?"


박용화는 약간 점잖고 약간 거만하게 반말투로 물었다.


"아닌데요. 하숙이 아니고 이모집이에요."


여자는 경계하듯 무시하듯 하는 태도로 대답했다.


"아차, 그러면 그렇지!"


박용화는 아까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이 적중함과 동시에 자신의 불철저를 느끼며 당황했다.

그러나 박용화는 그런 감정을 싹 감추고 더 거만스럽게 물었다.


"에이꼬 있소?"


"누군데요?"


"난 다께다 히데오란 사람이오."


"조선사람이군요?"


그 여자는 조선놈이 왜 이래 하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박용화는 가슴이 뜨끔해졌다.

이본사람들은 조선사람들의 생김보다는 일본말을 하는 발음으로 조선사람들을 더 잘 가려냈다.

그러나 박용화는 식모년이 건방지게 하는 반감을 느끼며 말했다.


"그렇소, 나 조선사람이오. 빨리 에이꼬한테 사람이 찾아왔다고 전해 주시오."


"기다려보세요."


여자는 아니꼽다는 얼굴로 돌아섰다.


박용화는 더 기분이 상하며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그러나 꾹 눌러 참았다.


"어머머, 박 상!"


박용화를 알아본 에이꼬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난 이제 박상이 아니라 다께다 히데오요."


박용화는 일부러 거만스럽게 웃으며 에이꼬를 깔아보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에이꼬는 반가움과 놀라움이 엇갈리는 얼굴로 대문을 열고 나왔다.


"어떻게 되긴. 보다시피 대학생으로 됐소."


박용화는 거드름을 피우며 법학부라는 말은 아껴두었다.


"어머, 언제부터요?"


에이꼬는 새삼스럽게 박용화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그 얼굴에는 놀라움과 호감이 드러나고 있었다.

지난날 냉혹하게 돌아섰던 얼굴은 찾을 수가 없었다.


"금년부터요. 일요일인데 어디로 산보 안하겠소?"


박용화는 부드럽게 태도를 바꾸었다.


"좋아요.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에이꼬는 생끗 웃으며 돌아섰다.


박용화는 그 웃음에서 문득 발가벗은 에이꼬를 보았다.

그런데 그 웃음은 그때보다 더 세련되고 색정적으로 변해 있음을 느꼈다.


"그래, 또 어떤 놈들하고 놀아나고 있겠지.

이젠 이종사촌하고 붙어먹는 건 아닌가?"


박용화는 침을 내뱉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몇 모금 빨고 있던 그의 머리에 불현 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상하네. 몸을 그렇게 함부로 내돌리는데 어찌 임신을 안하지? 저게 혹시 석녀 아닌가?"


그러나 하필 석녀일 리가 없었다.

석녀란 결혼생활을 하면서 아이를 기다리다가 판명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품행이 방종한 일본처녀는 에이꼬만이 아닐 거였다.

그 처녀들이 남자관계를 하면서도 임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박용화는 일본여자들, 특히 배운 여자들이 월경주기를 이용한 피임술에 능하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일본여자들의 성이 개방되어 있고, 성행위도 야하고 요란하게 하는 것처럼 피임방법도

능란하게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 기다렸지요?"


에이꼬가 대문을 나서며 활짝 웃었다.


"아니, 괜찮소."


박용화는 새로운 눈으로 에이꼬를 쳐다보았다.

진달래빛 후레아 원피스에 뾰족구두를 신은 에이꼬는 교복을 입었던 여학생 시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박용화는 제법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나 어때요?"


에이꼬는 박용화의 눈길을 의식하며 사를 눈웃음을 쳤다.


"옛날보다 더 예뻐졌소. 뭐랄까, 한 떨기 장미 같소."


그 어떤 여자든 예쁘다는 말과 보석이면 다 정복된다.

어떤 책에서 읽은 대로 박용화는 인심 좋게 말했다.

장미 같다는 말은 어떤 소설의 대화를 그대로 본뜬 것이었다.


"아이 좋아라. 정말이에요?"


에이꼬는 깡충 뛰듯이 하며 좋아했다.

웃음꽃 핀 얼굴이 달알올라 있었다.


"정말이구말구요.

나한테 돈이 있다면 다이아반지를 해주고 싶을 정도로 예뻐요."


흉내낸 말이 직효를 나타내자 박용화는 또다른 말을 흉내내며 푹푹 선심을 쓰고 있었다.


"어머머, 너무 뜻밖이에요. 절 미워할 줄 알았는데…"


에이꼬는 곁눈질하며 약간 어색하게 웃었다.

그건 지난날에 대한 미안함의 표현이었다.


"에이, 남자가 그까짓 일 가지고 옹졸하게. 난 다 잊어버렸소.

에이꼬도 그때 일은 잊어버려요. 여긴 동경이오."


박용화는 아주 통 큰 호남아처럼 혼쾌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건 한껏 바람 품고 날아가는 투망이었다.


"어쩜…, 역시 박 상은 멋있어요."


에이꼬는 눈을 치떠 흘기듯 하며 눈웃음쳤다.

그 웃음에 색정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 잘 돼간다."


박용화는 옛날의 감정이 회복되는 것을 확인하며 다정하게 말했다.


"우선 이 근방 어디서 차나 한잔합시다."


"네에, 저쪽 큰길에 고상한 다방이 있어요."


에이꼬는 박용화를 처음 보는 순간 일어났던 불안감을 완전히 씻어냈다.


"이게 조선놈치고는 아주 제법이야.

머리도 좋고, 통도 크고, 그리고 그건 또 얼마나 근사해."


에이꼬는 남모르게 어깨를 바를 떨었다.
그들은 마치 사랑 깊은 연인들처럼 나란히 다방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에이꼬가 물었다.


"진로를 바꿨소.

사나이의 일평생을 소학교 선생으로나 보낼 수 없어서."


박용화는 그 이름도 드높은 동경제국대학 모자를 벗어 조심스럽게

탁자에 놓으며 거드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잘했군요. 무슨 과예요?"


에이꼬는 박용화가 원하는 순서대로 묻고 있었다.


"법학붑니다."


"어머나, 동경제대 법학부!"


에이꼬는 두 손을 활짝 펴며 박용화가 만족할 마큼 탄성을 터뜨렸다.


"우리 아버지 후배가 됐군요. 그럼, 선생을 하면서 시험공부를 하신 거예요?"


에이꼬의 태도는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기가 죽었을 뿐만 아니라 박용화를 바라보는 눈은 놀라움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동경제국대학 법학부는 천재들만 모인다고 일찍부터 소문나 있었고,

그건 바로 판검사가 되는 길이었던 것이다.


"…"


입을 꾹 다문 박용화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그의 태도는 에이꼬에 비해 너무나 거만스러워 보였다.

그는 지금 지난날의 모독감을 갚는 일차적인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어쩜 그럴 수가 있어요. 고보생도 아닌 소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에이꼬는 계속 감탄하면서 박용화의 쾌감을 긁어주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까짓 공부처럼 쉬운 게 어딨소."


박용화는 코웃음치며 손짓으로 종업원을 불렀다.

그라나 말과는 달리 박용화는 시험공부를 하느라고 1년 넘게

하루 3시간 이상을 잔 일이 없었고, 코피를 10번도 더 흘렸던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넌덜머리가 났다.


"전 도무지 그런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우리 아빠도 매냥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데, 공부처럼 하기 싫고 어려운 게 어딨어요."


에이꼬는 의기소침해져 말했다.

박용화의 의도적인 자만 앞에 그녀는 순진하고 단순하게도 완전히 기가 죽어버린 것이었다.


"그건 뭐 별거 아니오.

 인생이 공부가 다 아니니까.

자아, 기분좋게 커피나 마십시다."


박용화는 멋진 소리는 다 골라서 하며 잔을 들었다.


"아, 네에…"


에이꼬는 헬쑥하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


'저 남자가 어쩌면 저렇게 멋지게 변했나.

그런데 왜 나를 찾아왔을까? 나를 사랑해서, 못 잊어서 왔을까?

그럴 수도 있는데 … 아니야, 무슨 부탁이 있어선가? 그럴지도 몰라…'


에이꼬는 자꾸 졸아드는 자신을 느끼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나날 그를 희롱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저어…, 일본유학은 학비가 많이 들 텐데, 고학하시나요?"


에이꼬는 조심스럽게 더듬이의 촉수를 내밀었다.

그가 왜 찾아왔는지를 알아야 했고, 고학하는 일자리가 나쁘면 가정교사 같은

자리를 구해줘서 지난날과는 다른 방향으로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이 솔깃했던 것이다.


"아, 학비요? 그건 충분해요. 선생 노릇 하면서 월급을 다 모았으니까요."


박용화는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이렇게 받아쳤다.

이것도 지난날의 열등감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꽤 과장되어 있었다.


"어머, 대단하시군요."


박용화가 더 크게 보이면서 에이꼬의 단순한 머리는 더욱 아리송해지고 있었다.


"그까짓 게 뭐 대단하긴. 그간에 동경생활도 익숙해지고, 마음에 여유도 생기고 하니까

에이꼬 생각이 나지 않겠소. 옛정이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소."


에이꼬의 마음을 눈치 빠르게 꿰뚫은 박용화는 투망을 서서히 잡아당기고 있었다.


"어머, 저도 박 상이 그리울 때가 많았는데…"


에이꼬는 박용화의 말에 휘말리며 너무 쉽게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갑시다, 어디 산보하기 좋은 곳으로…"


박용화는 에이꼬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에이꼬의 얼굴이 붉어지며 눈에 묘한 빛이 일렁거렸다.

그 눈빛은 발가벗고 색정에 취했을 때의 바로 그 눈빛이었다.

박용화는 투망을 걷어올리듯 의자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온 에이꼬는 무작정 택시를 붙들었다.

박용화는 이제 느긋한 마음으로 에이꼬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택시는 곧 시내를 빠져나갔다.

에이꼬는 어느 한적한 곳에서 택시를 세웠다.

나무숲 사이의 오솔길을 따라 이삼분쯤 걸어 올라가니 거짓말처럼 여관이 나타났다.


"역시 방탕한 년은 다르군."


박용화는 전형적인 일본식 조각을 이마에 붙이고 있는 2층 여관을 둘러보며 코웃음을 흘렸다.


"너무 조용하고 좋지요?"


에이꼬는 어리석게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색정만 타고 있었다.


"응, 아주 좋군."


박용화는 에이꼬의 어깨를 감싸잡았다.


그들은 방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옷을 벗기 시작했다.

곧 알몸이 된 그들은 한 덩어리로 엉클어졌다.


"박 상, 박 상, 보고 싶었어요."


에이꼬의 목소리가 뜨거웠다.


'이년아, 거짓말하지 마.'


박용화는 그래, 그래, 응답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렇게 욕해대고 있었다.

또한 그러면서도 젊은 여자의 알몸을 끌어안고 있는 수컷의 본능은 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이꼬는 꼭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일본남자들을 상대해 보았지만 그들은 과히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문득믄득 떠오른 것이 박용화였다.

하룻밤에 대여섯 번은 예사로 치러냈던 박용화…
그들은 요 위로 쓰러졌다.


"아우, 아우, 진작, 진작 오지…"


박용화를 받아들이며 에이꼬는 뜨거운 소리를 토해냈다.

그리고 그 몸놀림도 격렬했다.


"으흐으, 박 상, 아흐으, 사랑해요…"


에이꼬의 소리는 불덩이가 되고 있었다.

박용화는 더욱 화려해지고 세련된 몸놀림에 실리며 쾌락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아흐흐, 박 상, 아으아으, 사랑해요…"


박용화는 넘칠 듯 넘칠 듯 절정에 이른 고비에서 엉덩이를 뒤로 쑥 뺐다.


"으아, 나 몰라!"


에이꼬의 입에서 터진 소리였고, 박용화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 돼, 안 돼, 가져와, 빨리 가져와…"


상체를 일으킨 에이꼬는 색정에 흥건하게 취한 채 제정신이 아닌 얼굴로

박용화의 그것을 곧 움켜잡기라도 하려는 듯 허둥거렸다.


"야 이년아, 정신차려!"


박용화는 에이꼬를 사정없이 떠밀었다.

에이꼬는 뒤로 벌렁 넘어갔다.
박용화는 한 발로 에이꼬의 젖가슴을 밟았다.

그리고 제 물건을 손으로 흔들기 시작했다.


"아니 박 상, 왜, 왜, 이래요…"


에이꼬는 아직도 색정에 취한 눈으로 어리둥절해서 박용화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올려다보이는 박용화도 그 물건도 어머어마하게 커 보이고 있었다.


"맞어, 새 방법으로 하려는구나. 그래, 이러 것도 멋있어."


그때 박용화의 물건이 물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정액은 에이꼬의 머리며 이마며 눈이며 코며 입이며 가리지 않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에이꼬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정액이 떨어지기를 멈추며 박용화가 긴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내쏘았다.


"이 더러운 년아, 날 가지고 놀아? 내가 물건이냐? 개같은 년, 잘 있거라."


박용화는 옷을 꿰입기 시작했다.
에이꼬는 그때서야 박용화가 복수를 하려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우며 몸을 오그렸다.

얼굴에 묻은 것 때문에 눈을 뜰 수도 없었다.

그리고 박용화를 보고 싶지도 않았다.
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 마루를 밟는 발소리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에이꼬는 그때서야 몸을 일으키며 얼굴 닦아낼 것을 찾아 두 손을 더듬거렸다.
전동걸은 지정된 전차청거장에서 지요꼬를 확인했다.

지요꼬도 이쪽을 환인한 눈치였다.
전차 한 대가 왔다.

그러나 지요꼬는 타지 않았다.

 전동걸은 신문을 읽는 체하고 있었다.

군가 합창이 들려왔다.

전동걸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군용차량들이 줄지어 달료오고 있었다.

그런에 그들은 군복 차림이 아니었다.

어느 훈련소로 가고 있는 입영자들이었다.

트럭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트럭에 탄 젊은이들은 앉지도 못하고 빽빽하게 서서 군가를 외치고 있었다.

그들은 군인이 되기 전에 벌써 군가를 힘차게 부를 줄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방송에서 아침저녁으로 군가를 틀어대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까지도 다 군가를 부를 줄 알았다.

아이들은 어느 골목에서나 전쟁놀이에 군가를 불러댔다.

그리고 노인들까지도 모여앉으면 그저 전쟁 이야기였다.

라디오에서 날마다 다른 일본군의 승리를 보도해대니

새로운 이야깃거리는 끝없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노래를 외쳐대는 젊은이들을 향해 양쪽 길가의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젊은이들의 노랫소리가 드높고 힘찬 만큼 사람들의 박수소리도 힘차고 뜨거웠다.

젊은이들이고 시민들이고 오로지 전쟁의 승리에 취해 힘이 솟구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일본 전체는 전쟁의 승리에 흥분되어 있었고 최면되어 있었다.
트럭은 모두 12대였다.

전동걸은 자신도 모르게 그 수를 센 것이었다.

그런 광경은 하루가 멀다 하고 목격할 수 있었다.

전동걸은 그때마다 트럭수를 세게 되었다.

그건 일종의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저렇게 일본청년들이 끌려가다가 동이 나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청년들이 동나기 전에 전쟁이 끝나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조선청년들도 무사할 리 없었던 것이다.
트럭들이 지나간 거리는 공허할 만큼 조용해졌다.

그 공허함을 메우기라도 하듯 저차가 종을 땡땡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전동걸은 재빨리 지요꼬 족으로 눈길을 보냈다.

지요꼬가 사람들과 함께 전차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동걸도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요꼬는 앞문 쪽으로 가고 있었다.

전동걸은 뒷문으로 갔다.

지요꼬가 전차에 오르는 걸 확인하고 전동걸은 전차에 올랐다.
전차가 출발하자 전동걸은 천천히 가운데로 옮겨갔다.

지요꼬도 가운데로 옮겨오고 있었다.

전차에는 비좁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이 차 있었다.

양쪽에 떨어져 있다가는 내릴 때 신호가 곤란하기 때문에 서로 가운데로 옮겨온 것이었다.
전동걸과 지요꼬는 서로 눈길만 교환했다. 전동걸은 또 신문을 읽는 척했다.

그런데 그의 뇌리에는 두 여자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지요꼬와 눈길이 마주친 순간 이미화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미화와 지요꼬. 두 여자는 조선여자와 일본여자라는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차이만큼이나 인물도 성격도 의식도 차이가 현격했다.

이미화는 흰 꽃처럼 예쁘고 연약하게 생겼는데

지요꼬는 야생화처럼 개성적이고 강인하게 생겼고,

이미화가 수줍고 내성적이라면 지요꼰느 활달하고 외향적이었으며,

이미화는 감상적이고 사회적 관심이 미약한데 지요꼬는 논리적이고 사회주의 의식이 확고했다.
전동걸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수시로 지요꼬 쪽에 눈길을 돌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미화와 지요꼬를 그렇게 비교하기 시작한 것은 벌써 서너 달이 되었다.

이미화도 지요꼬도 자신에게 색다른 감정을 표시해 오면서부터였다.

그러니까 이미화와 지요꼬의 유일한 공통점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으로서는 둘 중에 누구 하나를 고를 수가 없었다.

이미화는 만나면 아늑하고 푸근한 여자였고, 지요꼬는 국적과 인종을 뛰어넘은 동지였다.

어쩌면, 두 여자를 다 탐내는 것이 아니라 아직 골라야 할 단계가 아니라 그러는 것인지도 몰랐다.
여섯 번 째 역에서 지요꼬가 눈짓을 했다.

 전동걸은 천천히 뒤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요꼬는 앞문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에 섞에 전차에서 내렸다.

지요꼬가 앞서 걸었고 전동걸은 20여 미터 떨어져 뒤따랐다.

지요꼬는 길안내자였고, 전동걸은 미행 감시자인 동시에 지요꼬의 보호자였다.
지요꼬는 빈촌으 골목골목을 돌았다.

전동걸은 빈촌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다소 안심을 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길에서는 미행자를 간파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지요꼬는 허름한 창고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전동걸은 미행자가 없다는 것을 완전히 확인한 다음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은 집회장소가 아니었다.

무슨 상자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는 틈을 지나서 뒷문이 나왔다.

지요꼬는 그 문을 열고 나갔다. 다시 골목 두 개가 나타났다.

왼쪽 골목을 따라 왼쪽으로만 몇번인가 돌았다.

그러다보니 그 창고의 정반대방향이 되었다.

그때서야 지요꼬는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집도 집회장소가 아니었다.

뒷문을 통해 나가 또 하나의 골목을 꺾어 돌아서야 집회장소에 이르렀다.
만약 미행자가 창고까지 따라왔다 하더라도 거기서부터 종적을 찾을 수 없도록 대비한 것이었다.

그렇게 철저한 대비를 하지 않고서는 안 되었다.

경찰들의 감시는 갈수록 삼엄해지고 있었다.

조선학생들은 저부 감시 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 지경이었다.

조선학생들의 하숙집 주인이나 자취방 주아니들은 하나같이 경찰과 연결되어 있었다.

경찰에서 조선학생들에 대한 신고를 해당 파출소에 하도록 의무화시켜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형사들이 수시로 점검을 했다.

그러니까 하숙집 주인이나 자취방 주인들은 좋거나 싫거나 간에 조선학생들의

감시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하숙방이나 자취방에 여럿이 모여 앉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지요꼬와 전동걸이 들어가면서 집회장소에는 여섯 명이 모여 앉게 되었다.

10분 정도의 간격을 두고 두 명씩 짝지어 네 명이 더 나타났다.

사혁회회원 전부가 모인 것이었다.

사회주의 혁명 실천을 위한 그 비밀조직에는 일본학생들이 셋이었다.

여자가 둘이었고 남자는 하나였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은 모두 조선남학생들이었다.


"동지들이 다 모였으니 그럼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회장 최우한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는 일본회원들을 위해 일본말로 말했다.

회원들은 모두 엄숙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오늘 전원회의를 소집한 것은 두 가지 문제 때문입니다.

첫째는 우리들의 향후 투쟁방향 문제이고,

둘째는 회원 배가 문제입니다.

두 번 째 문제는 첫 번 째 문제의 결정 여항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문제이므로

첫 번 째 문제부터 철저한 토의가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현재의 상황은 동지 여러분들이 직시하고 있다시피 완전한 전시체제 아래

일본에나 조선에나 국민총동원령이 발동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남자들이 전쟁터로 무기를 생산해 내고 있고,

심지어 미성년자나 여자들까지 탄광에서 채탄작업을 시킬 수 있는 법을 공포한 지도 오랩니다.

또한 연일 수천명씩이 징집영장을 받고 전쟁터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시국의 이러한 급변은 군국주의 파쇼의 광분한 모습 그 자체이며,

언제 우리 학생들에게도 징집영장을 받고 전쟁터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시국의 이러한 급변은 군국주의 파쇼의 광분한 모습 그 자체이며,

언제 우리 학생들에게도 징집영장이 날아들지 모르는 상황이 가속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꼭 나쁘지만을 않습니다.

왜냐하면 파쇼를 분쇄하고 인류공존의 사회주의 건설을 도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난관에 봉착하기 전에 우리의 행동방향을 정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철저하고 완벽한 토의를 통해 건설적이고 효과적인 결론을 얻을 수 있도록

상호 협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회장의 개요 설명이었다.
회의장에는 침묵이 흘렀다.

회원들은 모두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앉아 있었다.


"어렵게 생각지 마시고 의견들 개진하시기 바랍니다."


회장 최우한이 회원들을 둘러보았다.


"예, 현재 급변해 가고 있는 상황으로 보아 대학생들에 대한 징집도 틀림없이 실시될 것입니다.

그에 대처하는 우리의 태도는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징집에 응하느냐 거부하느냐 그겁니다.

또, 이 두 가지 중에서 선택은 하나뿐입니다.

징집 거붑니다.

그럼 징집을 피하며 투쟁을 하는 경우와, 국외로 탈출하여 국제연대 속에 투쟁을 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일본이나 조선이나 경찰 수사망은 거미줄 치듯 되어 있고, 앞으로 강화되었으면 강화되었지

약화될 리는 없습니다.

그런 견지에서 볼 때 국내에서 징집을 피하며 투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국외로 탈출하는 길밖에 없지 않은가 봅니다."


"예, 대학생들도 전쟁터에 끌려갈 거라는 판단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 경우 징집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우리의 근본 이념입니다.

또한 징집을 거부한 다음의 행동방향인데, 징병을 기피한 지하투쟁이란 완전히 불가능하고,

그건 투쟁의 포기가 될 뿐입니다.

결론은 국외로 탈출하여 국제연대투쟁을 모색하는 길인데,

연대세력으로는 첫째 쏘련, 둘째 중국공산당이 있습니다.

그러나 쏘련은 현재 파쇼투쟁을 공개화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남은 건 중국공산당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선택이 아닌가 합니다."


"예, 그 유일 선택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로는 중국 공산당의 홍군은 국민당군과 합작을 하면서 제8로군으로 바뀌었고,

그외에 여러 부대들이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 부대들 중에 어느 부대와

연계를 해야 하는지도 문젭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회원들은 그 부대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실상을 잘 모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혹시 회장님이 그 정보를 가지고 계시면 공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 이 상태에서 논의를 구분했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발언자 전원이 국외연계투쟁을 제안했습니다.

이에 대한 가부를 묻고, 중국공산당의 문제는

그다음 단계의 구체안으로 논의했으면 어떨까 합니다."


회장의 말이었다.


"예, 좋습니다."


"동의합니다."


"예, 가부를 묻겠습니다.

찬성하시는 분 거수해 주십시오."


모두가 손을 들어올렸다.


"예, 가부를 묻겠습니다.

 찬성하시는 분 거수해 주십시오."


모두가 손을 들어올렸다.


"예, 만장일치로 국외연계투쟁이 결정되었음을 밝힙니다."


그들은 손바닥이 서로 엇갈려 소리 안 나는 공박수를 쳤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여성동지들은 어떻게 합니까."


"또 여성차별인가요? 의식교육 새로 시직해야 되지 않겠어요?"


싸늘한 대꾸가 날아가씨다. 그건 지요꼬였다.


"그건 차별이 아니라 우대지요.

남자들이야 어차피 어느쪽으로든 나가야 하니까

가는 거지만 여자들이 어떻게 전쟁터에 나간다는 겁니까."


"그런 우대 사양하겠어요.

그 우대는 여자는 약하다는 차별의식이 전제되어 있으니까요.

그런 의식이나 빨리 뜯어고치세요."


"이거 생각해 주다가 뺨맞는군."


남자들이 소리 죽여 웃었다.


"예, 여성의 문제는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남녀 평등을 규정한 우리 규약에도 맞지 않습니다."


회장이 결론을 내렸다.


"중국공산당군 문제로 넘어갑시다."


"예, 그 문제는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이 몇 년에 걸쳐 치열하게 싸우다

괴멸상태에 빠졌다는 것과, 그 외의 부대들이 중국 관내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 알 뿐 정확한 정보는 저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앞으로 최단시일 내에 정확한 정보를 확보하도록 하겠습니다.

회장은 계면쩍은 듯 웃고는, 그럼 국외연계투쟁의 결정에 따라

회원 배가 분제를 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자리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예, 회원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많이 확대시키지 못하는 건 회원이 곧 조직의 존폐를 좌우하는 생명선이기 때문입니다.

종전과 같이 신중을 기할 것을 제의합니다."


"예, 신중을 기하자는 의견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반파쇼 선전사업을 암암리에 전개해 오는 동시에 회원 물색에도

노력해 왔습니다.

국외세력과의 연대가 결정된 마당에 한 사람이라도 더 국외로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자체가 적극적인 반파쇼투쟁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국외로 탈출하는 것은 파쇼군대의 인원을 한 명 줄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전투에서 파쇼군을 많이 죽일수록 그 효과는 10배, 20배로 증폭됩니다.

그러므로 신중을 기하되 그동안 회원들이 심중에 두었던 사람들 중에서 엄선했으면 합니다."


"예, 두 동지의 의견은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두 의견에 각기 장단점이 있습니다.

신중을 기하자는 것은 조직의 안전을 보호하는 데는 좋지만 조직의 확장을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엄선하자는 것은 조직을 확장할 수는 있지만 조직의 생명에 위험이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안을 절충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조직을 확장하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그 시기를 우리가 국외로 탈출하기 직전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럼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더 발언자가 없이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예, 신중론과 확장론, 그리고 절충론이 나왔습니다.

이 세 가지 의견을 표결에 부치면 어떨까 합니다."


"예, 좋습니다."


"찬동합니다."


"예, 그럼 발언의 역순으로 절충론부터 묻겠습니다.

찬성하시는 분 거수해 주십시오."


신중론과 확장론을 내놓은 두 사람을 빼고 전부 찬성을 표시했다.


"예, 발언자를 제외한 전원일치로 절충론이 채택되었습니다.

이상으로 오늘의 중요 안건 두 가지의 결의를 마칩니다.

보류한 두 가지 문제, 중국공산당 부대들의 실태 파악과 우리의 탈출 시기에 대해서는

추후 논의키로 하겠습니다.

기타 문제점이나 논의사항이 있으면 발언해 주십시오."


회장이 총정리를 했다.

회원들은 긴장을 풀며 앉음새를 고치고 담배를 피워 물고 했다.


"이건 그냥 의문점입니다.

일본군이 계속 승리하고 있다는 보도는 사실일까요?

그게 도대체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요?"


누군가가 말을 꺼내놓았다.


"글쎄요, 초반이니까 그게 사실일지도 모르죠.

진주만 기습하는 식으로 전쟁터를 확장시키고 있는, 뭐랄까 기습작전 시기니까요."


"모두 예측하기 어렵겠습니다만, 이 전쟁의 승산을 어떻게 보십니까?"


"예, 저는 중국과의 전쟁을 보면서 이번 전쟁의 답을 찾습니다.

중일 전쟁은 벌써 몇 년이 되었습니까.

다 아시다시피 만 5년이 넘었습니다.

그때 정부와 군부에서는 뭐라고 큰소리 쾅쾅 쳐댔습니까.

몇 개월이면 중국대륙을 완전 장악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몇 개월이 몇 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서도 중국대륙은 반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이 공업이 발달한 나랍니까?

현대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랍니까?

다 아시다시피 농업국에 현대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공업발달은 없습니다.

중국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많은 인구뿐이고 현대무기는 구라파 쪽에서 사들여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 나라를 상대로 일본은 예상보다 10배가 훨씬 넘는 세월을 소모해 가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또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럼 영국은 어떤 나랍니까.

세계 최초의 산업혁명을 일으켜 공업을 발전시켰고,

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 자칭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고 자랑하고 있는 나랍니다.

미국은 또 어떤 나랍니까.

거대한 신대륙의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영국의 공업기술을 받아들여 세계 강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나라 아닙니까.

과학기술로 볼 때 중국은 영국과 미국에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원시상태의 나랍니다.

그런 나라를 상대로 일본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과 미국에 전쟁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찌 되겠습니까.

일본은 분명하고도 확실히 패망 합니다.

 파쇼통치의 광기가 저지른 이번 전쟁으로 일본의 무고한 인민들만 희생의 제물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빨리 국외로 탈출해 이민구출전쟁에 가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 그것 참 탁견이오."


"아, 속이 다 시원하오."


"자아 그럼, 여기도 너무 오래 머물 장소는 못됩니다.

모두 아쉽지만 오늘 회합은 이것으로 끝냈으면 합니다."


회장의 말에 회원들은 모두 소리 없는 박수를 쳤다.

그리고 서로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올 때처럼 그들은 둘씩 짝이 되어 시간차를 두고 앞 뒤 문으로 흩어져 갔다.
전동걸과 지요꼬는 아까와는 반대로 뒷문을 통해 두 번 째로 나섰다.
전동걸과 지요꼬는 큰길까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나왔고, 전차도 서로 다른 것을 탔다.

그리고 그들은 1시간쯤 뒤에 긴자의 어느 카페에서 다시 만났다.

누가 보아도 그들은 흔히 있는 다정한 연인 사이였다.


전동걸은 자리에 앉자마자 물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것도 너무 표나는 짓이에요."


지요꼬가 눈을 샐쭉 흘겼다.

그 눈은 아까와는 달리 여자의 눈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 그게 또 그렇소?"


전동걸이 비식 웃으며 담배를 꺼냈다.


"아까 그 마지막 발언, 압권이었어요."


지요꼬가 성냥을 켜서 내밀며 전동걸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이고, 이거 황송하게."


전동걸은 황급히 상체를 굽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그 얘긴 하지 말아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낮게 말했다.


"그 얘길 하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요."


지요꼬는 진득한 느낌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픈데 빈민구제부터 합시다."


"네, 고기로 드세요. 제가 살게요."


"에이, 무슨 돈이 있다고."


"돈벌이 했어요. 교수님 원고를 정서해 드렸거든요."


"그런 양심적인 교수도 다 있소?"


"양이 많아 미안했나봐요."


"아이고, 얼마나 양이 많았으면 돈을 다 줬겠소.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데."


"그러게 말이에요."


지요꼬가 쿠쿡거리고 웃었다.


"그 짠 돈으로 산 밥맛이 어떤가 어디 먹어봅시다."


전동걸도 웃으며 말했다.

지요꼬는 공장노동자의 딸이었다.

도저히 대학을 다닐 형편이 못되었지만

그 명민한 머리 덕에 가정교사로 학비를 해결하고 있었다.

지요꼬를 만날 때마다 돈은 거의 전동걸이 썼다.

저녁을 사지 못하게 하고 그 돈을 딴 데 쓰게 하고 싶었지만

지요꼬의 마음을 다치게 할까봐 전동걸은 모처럼의 제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노래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요?"


지요꼬가 성냥을 만지작이며 물었다.


"가수라는 것 말이오?"


전동걸이 의아스럽게 되물었다.


"아니, 대중노래말고 성악가라는 것 말이에요."


지요꼬는 약간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왜 갑자기 성악가는?"


"갑자기가 아니라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그 목소리 때문에."


지요꼬는 아까 그 마지막 발언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넓은 안목과 종합적 논리도 탁월했지만 그것이 울림 좋은 목소리에 실려

전동걸의 발언은 발언은 좌중을 압도했던 것이다.

그런 종합적 인식과 판단은 유난히 책을 빨리 읽는 많은 독서량과 철학도다운

깊은 사고의 결과로 얻어진 것일 거였다.
그런데 전동걸은 일반 철학도들이 갖는 병적인 나약함이나 비위 상하는 현학취미 같은 것은

전혀 없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상서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동지로서는 물론 이고 남자로서도 마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 또 무슨 소리라고. 고보 때 창가 선생이 그런 말을 하긴 했지요."


그때 종업원이 음식을 날라왔다.


"언제 강변 같은 데서 노래하는 걸 한번 듣고 싶어요."


전동걸을 바라보는 지요꼬의 눈에 안개 같은 기운이 서리고 있었다.


"어디 기회를 봅시다. 자아, 시장한데 어서 먹읍시다."


전동걸은 탁자에 바짝 다가앉으며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들었다.
며칠이 지나 전동걸은 이미화를 만나 활동사진을 보았다.

애절한 사랑 이야기였다.

전동걸은 사랑이야기 같은 활동사진에는 별 취미가 없었다.

감상적인 이미화가 너무 좋아해 동무해 주는 것이었다.


"또 울었소?"


길을 걸으며 전동걸은 이미화를 쳐다보았다.


"아이, 몰라요."


이미화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전동걸은 또 얼핏 어머니의 모습을 느꼈다.

이미화의 여자다운 어떤 모습들은 언뜻언뜻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니도 다 장성혔응게 알겄지만 독립운동언 못혀도 친일얼 해서넌 안된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런 강한 면이 있었다.

일본으로 떠나오기 전날 밤 어머니가 하신 한마디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말은 독립운동을 하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이었던 것이다.
전동걸은 이미화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건 활동사진을 보고 나면 으레껏 따르는 순서였다.

활동사진에 취한 이미화가 그 감정을 수습할 때까지 이런저런 감상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전동걸은 그 대화의 시간이 활동사진을 보는 것보다 더 좋았다.

이미화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기회였고, 의식을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어머!…"


길 건너에서 다정하게 걷고 있는 전동걸과 이미화를 보고 소스라치는 여자가 있었다.

그건 지요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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