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52. 세 가지 풍경

오늘의 쉼터 2017. 7. 6. 17:55

152. 세 가지 풍경



꽃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들녘 저 멀리 있는 산에 보얀 바람꽃이 일고 있었다.

푸른색이 감도는 들판에는 벌써 농사일이 시작되어 있었다.
정상규는 꽃바람을 맞받으며 부산스럽게 걷고 있었다.

그는 외출을 하면서도 의관을 차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하늘을 뚫을 만큼 욕심만 많았지

부자로서의 체면이나 위신 같은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 체면치레에 들어가는 돈이 아까워서였다.

그의 빨리 움직이는 발에는 아직도 짚신이 꿰어져 있었다.

만석을 진작 넘긴 부자가 검정고무신 하나 사신지 않은 것이었다.

그의 집에서는 쥐도 굶어죽는다는 소문이 과장이 아닐 법도 했다.

그러니 그의 집에서 밥 한 끼 얻어먹은 소작인이나 거지가 있을 리 없었다.
정상규는 동생 동규네 집 대문을 마구 두들겨댔다.

정도규는 신문을 읽고 있다가 작은형을 맞이했다.


"어쩐 일이시오?"


정도규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 없이 찬바람이 돌았다.

뒤 에 큰형이 죽게 된 이유를 안 다음부터

그는 작은형한테 완전히 마음을 닫아버렸던 것이다.

지난날 큰형이 아무리 잘못했다 한들 큰형을 그렇게 야박하게 내몰아

논두렁에 쓰러져 죽게 한 것은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작은형이 갖게 된 만석꾼 재산은 큰형이 갈라준 재산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큰형이 주색잡기에 미쳐 욕심을 부리긴 했지만 정말 악한 마음먹었더라면

재산을 전혀 분배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큰형이 그런 식으로나마 재산을 분배한 것은 그래도 큰형 노릇을 한 셈이었다.

작은형 욕심 같았으면 틀림없이 혼자 독차지했을 거였다.


"아아니, 나가 못 올 디 왔으라냐?"


정상규는 눈을 치뜨며 동생을 노려보았다.


"너무 느닷없으니까 하는 말이오. 앉으시오."


정도규는 자리를 잡고 앉으며 점잖게 인사치레를 했다.
"집안에 벨일은 없제?"
"예…"
마지못한 듯 대답하는 정도규의 기색은 여전히 냉랭했다.


"나가 왜 왔능고 허니 말이여, 동현이 취직 잠 시켜도라고 왔다."


정성규는 동생의 태도가 못내 불쾌해 명령하듯 용건을 내뱉었다.


"나 그런 재주 없소."


정도규는 잠시의 여유도 없이 내쳤다.


"아니, 감투럴 그리 많이 쓰고 관청얼 즈그 집 안방 드나들디끼

험스로도 재주가 없어? 동현이가 딴 넘이냐!"


정상규는 눈을 부릅뜨며 소리질렀다.


"감투? 그것이 힘쓰는 감툰 줄 아시오?

그게 다 허깨비김투니까 동현이를 대학에나 보내시오."


정도규는 쓰게 웃었다.


"대학언 무신 대학. 고보꺼정 갤찼으먼 갤칠 맨치 갤틴 것이고,

인자 면서기고 금융조합이고 취직히고 돈벌이 허는 거시 질로 실속있는 일이제.

그러덜 말고 존 감투 쓰고 있을 적에 손 잠 써도라."


정상규는 태도를 바꿔 싸악 웃으며 사정조로 말했다.


"동현이도 의현이처럼 돈 훔쳐서 달아나기 전에 대학을 보내주는 게 좋아요.

 돈은 돈대로 없애면서 괜히 자식들하고 척지지 말고요."


정도규는 작은형의 아픈 데를 찔렀다.

작은형은 큰아들 방현이에 이어 작은아들 의현이도 대학을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자 의현이는 거금을 훔쳐서 종적을 감춘 뒤로 벌써 몇 년째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머시여? 니 시방 누구헌티 악담허는 것이여?

동현이도 돈 돌라갖고 도망가기럴 바래는 거이냐 머시냐!"


정상규는 마치 또 돈을 도둑맞기라도 한 것처럼 질색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 기세는 동생을 곧 후려칠 것처럼 거칠고 사나웠다.


"동네 창피하게 소리지르지 말아요. 형님, 제발 생각 좀 해보시오.

지금 형님 나이가 몇이오? 환갑이 다 돼가지고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소.

욕심 그만 부리고 자식들이 원하는 대로 가르치기나 하시오.

죽으면 그 재산 다 놓고 맨주목으로 가는 것 잘 알잖아요."


"헹, 니가 나럴 훈계허냐 시방. 나넌 아흔다섯꺼정 산다.

죽을 날 당아 멀었응게 고런 새 날아가는 소리넌 허덜 말어.

정상규는 눈을 꼬느며 손을 내젓고는, 어쩔 것이여?

취직얼 시켜줄란지 아닌지 딱 짤라서 말히여."


그는 동생으 다그치고 들었다.


"더 할말 없어요. 딴사람한테 부탁하세요."


정도규는 내정하게 잘랐다.


"하! 자알 알 다. 오늘로 성제간 의절이다. 어디 두고 보자."


분이 끓는 얼굴로 정상규는 자리를 박차고 있어났다.
정도규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의절?…'


정도규는 쓰디쓰게 웃었다.

새삼스럽게 의절이니 뭐니 할 것이 없었다.

그동안 벌써 의절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로 얼굴을 대하지 않은 것이 오래되었고,

수시로 저질러대는 못된 행투에 형제간이란 것이 창피할 뿐이었다.

소작인들에게 그렇게 모질게 하는데도 아무 일 당하지 않고

사는 것을 보면 소작인들이 참 선량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흔히 마음씨 좋은 사람을 가리켜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라고 말하낟.

그러나 작은형은 법이 있어야만 살 사람이었다.

법이 없었더라면 누구한테 어떤 해코지를 당했을 지 모를 일이었다.
정상규는 숨을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딴사람한테 부탁하세요."


동생의 매정한 말이 계속 귓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그려, 이눔아! 낙 부탁헐 사람이 없을지 아냐.

요런 인정사정없는 눔아, 니눔이 사람이여. 조카 일얼 그리 몰인정허니 짤르다니,

니눔이 천벌얼 받을 거이다. 요런 느자구없고 싹수머리없는 놈!"


정상규는 솟기는 분을 참지 모새 성깔 뻗친 발걸음에 맞추어 큰소리로 외치듯 하고 있었다.

들길을 혼자 걸어가며 그러는 것을 누가 보면 천상 술 취한 사람이거나 실성한 사람의 꼴이었다.
정상규는 그렇게 큰소리를 티고 있었지만 그러나 마음은 허전했다.

막상 찾아가서 부탁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돈이 아까워 평소에 교분을 트고 지낸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너무 당연한 결과였다.


"빌어묵을, 도규 그놈 코럴 납짝허니 맨글게 돈얼 쓰고 혀?…"


정상규의 머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돈을 쓰면 면서기도 되고 금융조합이나 수리조합에 취직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액수가 문제였다. 쌀 50가마닌가 100가마니가 오간다는 소문이었다.


'그 거액을 들여 취직을 시켜야 하는 것인가? 그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 돈을 아끼려고 도규를 찾아간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무정하고 박절하게 자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동생이 자신을 마 땅찮게 생각한다는 것은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조카 일이니 어쩔 수 없이 봐주리라는 기대를 했던 것이다.

인정있는 동생의 마음을 이용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동생은 그놈의 공산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를 하면서 심성이 변한 것인지

어쩐지 조카도 안중에 없이 칼로 무치듯 해 버렸던 것이다.
어쨌거나 골칫거리는 아들놈이었다. 어쩌자고 층층이 무작정 대학을

가겠다고 나서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것도 망할 놈의 신풍조 중의 하나였다. 지주자식들은 무조건 대학을 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건 지주들이 서로 다투듯 경성으로 이사를 가는 풍조하고 다를 것이 없었다.

육칠 년 전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그 풍조로 이제 이름난 지주들 얼굴은 아무 때나 대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경성살이가 얼마나 좋은지는 모르지만 그런 지주들은 다미민친놈들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도 소출을 속이는 판인데 떠나 있으니

작인들은 작인대로, 마름들은 마름대로 눈속임을 해댈 것이니 그 손해가 얼마일 것인가.

허나 그것이야 남의 일이니까 알 바 아니지만, 자식놈들을 무작정 대학에 보내는 풍조는

자신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골머리가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이라는 걸 다녀봤자 아까운 돈만 펑펑 써댔지 대학을 나오고 나서

무슨 큰 출세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왜놈들에게 치여 본전도 못 찾고 비실거리기 일쑤였고,

동생 도규처럼 못된 물이나 들어서 감옥 드나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작은아들 의현놈이 저지를 일은 너무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학 그만두고 취직이나 하라고 했더니

그놈이 다락 깊이 숨겨둔 돈궤를 어찌 알아냈는지 몇천 원의 거금을

몽 땅 털어가지고 도망을 가버렸던 것이다.

마누라를 닦달해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실 마누라가 미리 알았다고 해도 몇 번의 주먹다짐으로 실토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사람이 더 환장할 일은 마누라와 큰아들놈의 반응이었다.
마누라는 고소해하는 눈치였고, 큰아들놈은 아주 내놓고,


"아, 꼬시다. 고것 참 깨소금맛이다"


해대는 것이었다. 작은아들놈은 어디서 대학을 다니는지

어쩌는지 4년째 얼굴 한번 비치지를 않았다.

그나저나 셋째아들놈도 그 짓을 할까봐 돈을 다 은행에 맡겨버리고

취직자리를 구하러 나선 것인데 그만 첫판에 일이 깨지고 만 것이었다.


"에이 빌어묵을, 어디 보자.

쌀 백 가마니럴 딜여 취직얼 허먼 얼매나 있어야 본전이 빠지는 것이다냐…"


정상규는 걸어가면서 손가락셈을 하기 시작했다.
정도규는 찜찜하고 언짢은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아무리 마음에서 지우고 있는 형이라 하더라도 핏줄이 무엇인지

신경 쓰이고 속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형은 재산욕심만이 아니라 수명욕심까지 가지고 있으니

도저히 개심할 여지는 없었다.

형을 잊고 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정도규는 고성완에게 가시 위해 군산으로 나갔다.

그 길에 유승현의 미곡상회에 들르기로 했다.

유승현의 미곡항회는 튼실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유승현이 철저하게 관리를 하는데다가 눈에 보이지 않게 관의 비호를 받기 때문이었다.
유승현과 미곡상을 동업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위장전향을 위장하기 위해서였고,

둘째 조직의 활동자금을 확대하고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였고,

셋째 친일적 감투를 쓰고 관에 이용만 당할 것이 아니라 관의 힘을 이용하자는 것이었고,

넷째 관리들을 매수해 가며 필요한 정보를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이, 마침 잘 왔네."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유승현이 돋보기를 벗으며 일어났다.
정도규는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상회에 나와서는 서로 말을 삼갔다.


"밥때넌 되고 뱃속언 출출허고…"


유승현이 나가자는 눈짓을 했다.


"한 사날 전에 살짝 들은 이예긴디, 미곡상회도 인자 사양질에 들어섰대."


유승현이 걸으면서 말했다.


"무슨 소린가?"


정도규는 얼핏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부청서 귀띔허는 소린디,

얼매 안있어 쌀얼 전부 총독부서 통제허게 될 것 겉응게 서서히 발얼 빼라는 것이네."


"흠, 쌀값을 통제해도 소용이 없고, 군량미는 더 들어가게 생겼고, 그거 일리있는 말이로군."


"어찌허먼 좋겄능가?"


"별 수 있나. 전쟁판에 크게 벌였으니 그게 틀림없는 말인 것 같네. 손해보지 않게 정리를 해야지."


"그런 담에넌?"


"글쎄…, 전쟁판이 커지는 데서 뭐 재미볼 만한 게 없을까?"


"몰라…, 총이나 맨글어 파아묵는 사람덜이나 호시절일지…"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그렇지 뭐가 있긴 있을걸세.

그걸 찾아내 돈을 벌면 이중효과 아니겠나.

총독부 돈을 울궈내서 우리 일 하는 거니까 말야."


"그런 일이 있기만 험사 좋제."


"부청 사람한테 술 사줘가며 살살 긁어보믄 뭐가 있을 걸세."


"그려, 머시가 있기넌 있겄제. 근디 회사 정리넌 언제보톰 허는 것 좋을랑고?"


"총독부 하는 일이야 꼭 미친년 널뛰듯이 하덜 않던가.

그런 냄새 풍기기 시작했으면 어제 또 갑자기 시행할 줄 모르니까 빠를수록 좋을 것같네."


"나가 생각히도 그렇구마. 금방 정리허도록 허겄네."


"그거 서운한데…"


정도규가 입맛을 다셨다.


"그려, 재미가 쏠쏠혔응게."


유승현이 자리 잡고 앉으며 이야기를 바꾸고 있었다.


"응, 며칠 전에 고서완 선생한테서 연락이 왔네.

그 일 시작한 지 몇 년 되는 날이라 기념잔치를 하니까 와달라고."


유승현은 무슨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정도규는 유승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자네넌 체력검사 받을 아덜이 없응게 좋겄네."


유승현이 불쑥 꺼낸 말이었다.


"음, 자네는 차남이 거기에 걸리게 되나?"


정도규는 마음이 쓰여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놈이 큰딸년허고 바꽈 태이든지 및년 늦게 태이든지 헐 것이제 꼭 그 나이에 걸려부렀구만."


유승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게 말야. 이게 예삿일이 아닐세."


정도규는 괜히 유승현에게 미안해 담배를 빼들었다.

 자신의 큰아들은 수학 선생을 하고 있었고 그 밑으로 딸이 셋에 막내가 아들이었다.

그게 이제 11살일 뿐이었다.


"그것이 지원병이 모지래서 다 군대 끌어가라고 시작허는 일이겄제?"


"아마 그럴걸세."


"참 갈수록 태산이고 태산이지. 청년덜이 무신 죄가 있다고…"


유승현이 짙은 한숨을 토해냈다.
총독부에서는 3월 들어 만 18, 19세 청년들에 대해서 체력검사를 일제히 실시하고 있었다.

그 강압조치는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확대시킨 직접적인 영향이었다.
점심을 마친 정도규는 고서완에게로 발길을 서둘렀다.

고서완은 기독교 신자로서 작은 독립사회를 이룩하고 있었다.

그가 실현시킨 사회는 비록 작을지라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농토를 전부 집단화시키고, 사람들을 최대한 끌어들였다.

그가 표방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박애생활이었다.

관에서 보기는 종교운동이었고, 예수교인들의 공동생활이었다.

 사실 고서완은 그 공동생산, 공동소비의 조직을 이끌면서 관에서 시비를 걸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비정치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그 조직을 보호하자는 것이었다.

그건 사회주의 운동의 한계를 체험한 고서완다운 대응방법이었다.

관에서 물리는 세금 다 내고, 반일이나 배일 활동을 하지 않으니

관에서는 눈독을 들이고 있으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만약 그 조직을 강압적으로 해체시키면 기독교 탄압으로 비화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조직이 함께 생산하고 함께 소비만 하는 단순 사회가 아니었다.

기독교를 통해서 미묘하게 민족의식이 전파되고 있었다.

고서완은 기독교의 민족종교화를 실행하고 있는 김교신과 관계를 맺고

그가 발행하는 성서조선이란 월간지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묶고 있었다. 공

회당은 있어도 교회당은 없는 예수교인들의 마을, 그것이 고서완이 이룩한 세계였다.

처음에 교회 겸 공회당으로 지었던 건물을 공회당으로만 쓰는 것을 보면

고서완이 얼마나 김교신의 영향을 받은 무교회주의자인지 알 수 있었다.
정도규는 회의적이었던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그런 결실을 맺어놓은

고사완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건 비록 미온적이고

소수에 국한된 것이라 하더라도 거미줄 치듯 한 일제의 강압체제 속에서

그래도 한줄기 숨통을 틔운 새로운 방법이었던 것이다.
정도규는 고서완을 생각하면 그때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위장전향을 하고 1년이 가까워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미곡상회를 차려놓고 군산 걸음이 잦던 어느 날이었다.

유승현과 함께 부청에서 나오다가 고서완과 마주쳤다.

분명 서로 알아보았는데 고서완은 외면을 하고 그냥 지나쳐 갔다.

그 차가운 외면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면서도 그대로 헤어질 수는 없었다.


"고형, 고형!"


정도규는 뛰어가 고서완을 붙들었다.


"서로 아는 체하지 맙시다."


고서완이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정도규를 노려보는 그의 눈에는 싸늘한 불꽃이 일고 있었다.


"고형, 나를 맘껏 경멸하시오."


정도규는 고서완의 의기가 청청한 것을 확인하며 웃음지었다.


"누굴 지금 놀리는 거요? 더럽고 뻔뻔스럽게."


고서완은 침을 내뱉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정도규는 꼿꼿하게 선 고서완의 뒷덜미를 바라보며 속을 털어놓고 싶은 유혹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 그를 들었을 때부터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저자가 누구여?"


유승현의 저자라는 말에 감정이 묻어 있었다.


"음, 고서완이라고…, 지난날 우리 동지였네."


정도규는 쓴 듯 떫은 듯 웃고 있었다.


"저자넌 시방 멀허는디 저리 당당헌가?"


유승현은 정도규를 편드는 게 아니라 공동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응, 그럴 만하네. 진작 방향전환을 하긴 했지만 우리처럼 깃발을 들고 나서지는 않았으니까.

원래 예수교 학교 선생이었는데 지금은 예수교인들과 함께 공동농장이랄까 협동농장이랄가

그런 것을 잘 해나가고 있네. "


"허! 왈 기독교사회주의자로시. 그렇트라도 그 태도가 원…"


유승현은 몹시 언짢은 기색이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우리 속을 내보일 수 없으니.

어쨌거나 저 사람이 저리 당당하고 꿋꿋한 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자네가 기분 나빠하는 건 우리 사명에 충실하지 못한 것인 줄이나 알게."


정도규는 픽 웃으면서 유승현의 어깨를 쳤다.


"허기사 그렇기도 허시."


유승현도 픽 웃었다.
정도규는 그 뒤로 며칠 동안 고서완을 지우지 못했다.

그건 그에게만은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유혹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침을 뱉을 수 있을 정도로 굳건한 의지를 지녔다는 것이 유혹의 뿌리였다.

그가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진실을 알리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를 외롭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정도규는 결국 그를 찾아가씨다.
거름지게를 지고 가는 고서완을 논두렁에서 만났다.


"할 말이 있어 왔소."


정도규는 고서완의 눈을 응시했다.


"들을 말 없소."


고서완도 정도규의 눈을 쏘아보고 있었다.


"우리가 활동을 시작했던 그때의 진실로 말하겠소.

수박을 보되 겉만 보지 마시오. 할 말 다했소."


정도규는 돌아섰다.

그건 아내에게도 장성한 자식에게도 하지 않은 말이었다.

고락을 같이했던 동지에게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며칠이 지나 고서완이 찾아왔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손을 움켜잡았다.
정도규는 20리 길을 빨리 걸어 고서완의 동네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안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동안 몇 차례 낯을 익힌 이경욱이 정도규를 맞이했다.

그의 얼굴에는 명창 옥비를 쫓아다니던 때의 젊음은 다 스러지고 없었다.


"안 올 리가 있소."


정도규도 반갑게 인사했다.
잔치는 조촐하고 실속 있게 차려져 있었다.

막걸리에 돼지고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이거 뭐 잔치랄 게 있나요.

 1년 농사 앞두고 단합 잘하자는 뜻이지요."


고서완이 막걸리를 따르며 말했다.


"그거 꼭 필요한 거요. 인간이란 복잡하고도 단순한 동물 아니오.

인간이란 어쩌면 의식의 동물이고, 양식의 동물인지도 모르잖소."


정도규는 술잔을 들었다.


"예, 그런 일면이 다분하지요."


고서완도 술잔을 들었다.
두 사람은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 안주로 마련된 돼지고기를 집어 양념된장에 찍었다.

그 순간 정도규와 고서완의 눈길이 마주쳤다.

그 눈길에서 똑같은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들의 뇌리에는 고서완이 최초의 동정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나서 비밀장소에서

술상을 같이 했던 그 날 밤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맛은 그날 밤 그대로요."


정도규가 돼지고기를 씹으며 서글픈 듯 웃었고


"그렇군요."


고서완도 돼지고기를 우물거리며 쓸쓸한 듯 웃음을 흘렸다.

열흘쯤 지났을까. 정도규는 작은형이 쓰러져 위태롭다는 연락을 받았다.


"몰르것구만이라우. 시찌아덜이 대학인가 소학인가럴 가고 잡아 환장얼 허고,

아부지라는 양반언 못 보내겄다고 환장얼 험서 취직이나 시키겄다고 발얼 놓고 댕기고,

그러다봉게 시찌아덜이 대학 가기넌 그른 것이라고 생각혔등가 아부지가 날마동

취직자리 알아볼라고 눈에 불쓰고 나돌아댕김서 정신 팔고 있는 판에 큰일얼 저질러부렀는디,

고것이 어찌 되었능고 허니, 안방이고 다락이고 세세허니 뒤지고 뒤져 멫백 마지기 논문서럴

빼내갖고 군산에 낙 똥값에 처분헌 돈 챙게서 삼십육계 줄행랑얼 쳐부렀구만이라.

아덜이 없어진 담에사 그 탈얼 알게 된 아부지가 눈 뒤집어져 발광허디끼

펄펄 뛰다가 입에 거품 물고 퍽 넘어가서 하로가 지냈는디도 정신이 안 돌아오는구만이라."


심부름 온 머슴은 마치 뱃속이 시원하다는 듯 가락까지 맞춰가며 이야기를 엮어댔다.
정도규는 그런 머슴의 태도를 나무랄 수가 없었다.

그건 작은형이 인심을 잃고 잘못 살아온 결과였고,

 마음이 그렇게 굳어진 머슴을 나무라 보았자 아무런 효과가 날 리 없었던 것이다.


"알았으니 가보게."


정도규는 머슴에게 일렀다.


"저어, 머시라고 전헐께라우?"


손을 모아 잡은 머슴이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옆눈질을 했다.


"곧 간다고 여쭙게."


정도규는 머슴이 대문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넌 아흔다섯꺼정 산다."


작은형의 어기찬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입바른 소리를 한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말한 대로 동현이도 제 형 의현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아버지에게 저항한 것이었다.

아니, 아버지 몰래 돈을 가지고 달아난 것만 같을 뿐 논문서를 훔쳐낸 것을 보면

작은형이 집에 현찰을 전혀 두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저러다가 죽게 되면 그게 뭔가…"


정도규는 허망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은형은 끝없는 욕심에 치여 결국은 자식들한테까지 버림받은 것이었다.

참 한심스럽고 불쌍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었다.

큰형도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지만 작은형은 더한지도 몰랐다.

그날 끌고 가던 짚신이 자꾸 눈앞에 떠올랐다.
정도규는 내키지 않으면서도 작은형네 집에 안 갈 수가 없었다.
작은형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 거친 숨소리며 가래 끓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안되겠는데요.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되겠는데요."


정도규는 형수에게 말했다.


"머 벵원에 가고 말고 혀라. 저라다가 어찌다가…"


정도규는 형수의 그 냉랭한 반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얼굴에는 남편을 걱정하는 기색이 거의 없었다.


"작은성님언 맺힌 한이 많구만요.

평상 광목옷 한 벌 맘대로 못해 입고 사닝게요."


정도규는 아내의 말을 떠올렸다.

작은형은 아내한테까지도 버림받고 있었던 것이다.


"방현아, 빨리 군산에 연락해서 다꾸시 불러라."


정도규는 큰조카에게 일렀다.


"가다가 숨넘어 가불먼 일만 더 서가시제라 이."


정방현은 술냄새를 풍기며 아주 불퉁스럽게 내쏘았다.
정도규는 아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카는 형수보다 더 노골적으로 제 아버지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왜 나를 부른 것인가?"


정도규는 그때서야 자신을 부른 것이 환자의 응급책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임종이나 지키라는 것임을 알았다.


"이 놈아, 당장 연락하지 못해! 감히 누구 앞이라고 그 따위 소릴 지껄이는 거냐."


정도규는 치솟는 울화와 함께 고함을 쳤다.

그는 당장 조카의 따귀라도 후려칠 것 같은 기세였다.


"야아, 야아…"


당황한 정방현이 몸을 일으키며 제 어머니 쪽을 살폈고


"그려, 그려. 얼렁 가그라, 얼렁."


정상규의 아내도 당황해 손을 저어댔다.
정도규는 작은형을 병원에 입원시켰다.

응급처치를 한 의사는 좀더 두고 보자고 했다.
정상규는 나흘 만에 정신이 깨어났다.

그러나 왼쪽 반신이 마비상태였고 말도 잘하지 못했다.

정도규는 그만하기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의사의 말로는 상태가 더 혼전될 수도 있고 악화될 수도 있어서 안심할 수 없다고 했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병원에 장기간 입원해서 치료를 받는 것이라고 했다.

정도규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런데 형수나 조카는 전혀 달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인간이 정이 떨어지면 처작식도 저 모양이 되는가 싶었고,

정도규는 그들을 더 보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정도규는 일단 한시름 놓고 집에서 이삼일 쉬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전해져 왔다.


"고 선생님이 체포되셨습니다."


이경욱의 말이었다.


"아니, 무슨 일로?"


"예, 성서조선 사건으로 김교신 선생께서 체포되시고,

전국의 고정독자들까지 가택수색을 하고 사상을 조사한다고 잡아간 것입니다."


"이거 미안한데, 성서조선 사건이란 게 뭐요?"


전혀 모르는 사건이라 정도규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 성서조선 이번 3월호의 권두언에서 조선의 민족혼을 고취하고

반일사상을 전파했다고 잡지를 폐간시키고 주필 김교신 선생을 비롯해서

 함석헌 같은 연루자 13명을 체포한 것입니다."


'조선의 민족혼을 고취했다…'.


이 험한 시절에 참 놀랍다는 생각을 하며 정도규는 그 말을 곱씹다가,


"그 3월호를 좀 볼 수 있소?"


고개를 치켜들며 이경욱에게 물었다.


"가택수색에서 뺏겼습니다."


이경욱이 침통하게 말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갑시다, 군산으로."


정도규는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김교신은 사대주의에 빠져 있는 식민지 교회의 타락상과 교권주의에 반기를 든 무교회주의자였다.

그는 조선기독교의 식민지성을 거부하며 조선의 기독교는 조선민족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민족종교론을 내세웠고, 그 실천을 위해 월간지 성서조선을 발간해 왔던 것이다.
공산당도 조선공산당은 다른 나라의 그것과 다른 특이한 것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기독교도 조선김치 냄새가 나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밤 청년회 성서반에서 세계일주한다는 미국종교인의 침입을 당하여 일좌가 혼란에 빠졌다.

내가 불운하여 아직 경의를 표할만한 미국종교인에 접하지 못하였음을 탄하였더니,

오늘 또다시 세계일주식의 미국기독자를 대하니…

치기, 젖냄새 분분한 미국식 기독교! 조선 기독교가 완전히 발육되려면

우선 미국과의 관계를 그 교회와 교육기관에서부터 절연하여야 하리라.

미국 능사란 1일 황금, 2일 스포츠, 3일 토키(유성영화).
김교신은 직접 쓴 이런 글들은 거침없이 성서조선에다 실었다.

그러니 미국의 원조 아래 운영되고 있는 교회들은 그를 이단자로 몰아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실현시키고자 하는 기독교의 민족종교화 정신은 결국 조선의 독립에 연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투철한 민족정신은 기독교의 주요 교파들이 신사참배라는 종교적 굴욕을

받아들이는 상황 속에서 끝끝내 신사참배는 물론이고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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