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53. 강제징용

오늘의 쉼터 2017. 7. 7. 00:33

153. 강제징용



아슴푸레한 초승달빛 속에 박꽃이 하얗게 피어 있었다.

모깃소리가 앵앵거리고,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낭자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아아리라앙 아아리라앙 아라아리이요오 아아리라앙 고오개에로 너머어가안다아아…


물 끼얹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노랫소리가 가늘고 낮게 흐르고 있었다.

한 사내가 집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그 소리를 따라 살금살금 움직이고 있었다.
나아르를 버어리고 가아아시는 니이므은…
물 끼얹는 소리와 여자의 노랫소리는 묘하게 어우러지며 여름밤의 무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그 소리는 부엌 쪽의 뒤란에서 들리고 있었다.
집 모퉁이에서 움직임을 멈춘 사내는 고개를 조심조심 뒤란 쪽으로 내밀었다.
흡!
사내는 숨이 멎는 것을 느꼈다.

흐린 달빛 아래 물을 끼얹고 있는 처녀의 알몸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사내는 가슴에서 불길이 확 일면서 샅이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아리라앙 아아리라앙…


처녀는 느리고 부드러운 노랫가락에 맞추듯 한가롭고 여유롭게 바가지로

물통의 물을 떠서 알몸에 끼얹고는 했다.

물을 뜨느라고 허리를 굽히면 굽히는 대로,

 물을 끼얹느라고 곧바로 서면 서는 대로 풍만한 알몸의 움직임은 더없이 관능적이었다.

더구나 달빛이 아슴푸레하게 비치고 있어서 젖가슴의 흔들림이며 둔부의 윤곽은

더욱 신비스럽고 자극적이었다.
사내는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저고리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또 바지마저 벗어버렸다.

여름이라 더 입은 옷이 없어서 사내는 그대로 알몸이 되었다.

사내가 다시 처녀 쪽을 살폈다.


나아르를 버어리고 가아아시는 니이므은…


처녀는 물을 뜨려고 허리를 굽힌 참이었다.
사내는 처녀를 향해 내달았다.
엄…
처녀의 소리가 막혔다.

 사내가 입을 틀어막은 것이었다.

사내는 입만 막은 것이 아니라 다른 손으로는 처녀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니 서로 맞바라보지만 않았을 뿐 처녀의 뒷몸과 사내의 앞몸이 완전히 맞붙어 있었다.
처녀는 그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라나 사내의 힘은 더욱 강하게 처녀를 윽조였다.


"놀래지 말어. 나여 나, 필룡이."


사내가 뜨겁고 빠른 소리로 처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워메, 요런 잡놈으 새끼가!"


금예는 분통이 터지면서 소리질렀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금예는 이를 응등물며 몸부림쳤다.


"더 발광히야 아무 소양 없어. 니넌 인자 나 것잉께로.

정신이 어서 안직 몰르는갑는디 나도 깨벗고 있다는 것이나 알아두더라고.

 내 물건이 시방 어디 닿고 있는지나 알어? 여그여, 여그!"


홍 씨네 머슴 배필룡은 이렇게 말하며 엉덩이를 앞뒤로 마구 흔들어댔다.


"아이고메, 엄니! 엄니! 엄니!"


뻣뻣하고 뜨거운 것이 엉덩이 바로 밑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가 빠져나가고

다시 파고들고 할 때마다 금예는 엄니를 불러댔다.

그런 금예의 눈앞에는 대학생복을 잎은 늠름한 모습의 전동걸이 떠오르고 있었다.


"니넌 인자 헌지집이여. 니넌 인자 내 것이여. 낼이먼 소문날겨."


이 말에 맞추기라도 하듯 배피룡은 더욱 세게 엉덩이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금예는 그 말에 따라 차츰 기운이 빠져가고 있었다.

이건 물동이를 이고 입술 도둑질을 당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던 것이다.
금예의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배필룡은 금예를 집 쪽으로 밀어붙였다.

금예는 반쯤 들리듯 해서 밀려갔다.

그러나 배필룡은 금예의 입을 틀어막은 손을 떼지 않았다.
집벽에는 빈 독이 붙여져 있었다.

배필룡은 금예의 머리를 그 독에 쑤셔박기라도 하려는 듯 우악스럽게 허리를 굽히게 했다.

금예는 얼떨결에 독 아가리를 두 손으로 붙들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이었다.

금예는 눈에서 불이 번쩍하며 아래가 치받치고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아이고메 엄니, 나 죽네!"


금예는 이 외침과 함께 신음을 물었다.

그러나 입을 막았던 손은 풀리고 없는데도 그 외침은 가슴속에서만 울렸다.


"니넌, 니넌 인자 내 것이여!"


"워메, 엄니, 엄니…"


"니넌 인자 헌지집이여, 헌지집!"


배필룡의 엉덩이 흔들어대는 것이 빨라질수록 숨소리도 거칠어지고 있었다.

금예도 자신도 모르게 독의 아가리를 더욱 힘주어 붙들고 있었다.


"니럴 호강시킬 겨, 호강시킬 겨!"


"요런 잡놈아, 요것이 호강이냐…"


"으흐흐! 으흐! 으흐!"


배필룡이 두 팔로 금예의 아랫배짬을 감아잡고 몸을 붙이며 부들부들 떨었다.


"염병헌다, 뒤질라고 어런다냐…"


금예는 등에 찰싹 붙은 배필룡의 뜨끈뜨끈한 몸을 느끼며 그런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배필룡이 막혔다 터지는 것 같은 긴 숨을 토하는 순간 금예는 등에 얹힌 뜨거운 무게감이

 걷히는 것과 동시에 아래가 허물어지는 것 같은 것을 느꼈다.

그건 시원한 것 같이도 하고 허전한 것 같이고 한 느낌이었다.


"아이고 씨언허다. 도장 팍 찍어부러서."


배필룡이 금예를 안으려고 들었다.


"문딩이!"


금예는 배필룡을 사정없이 떠밀었다.


"히히, 그렁게 더 이쁘시."


배필룡은 후다닥 집 모퉁이를 돌아가씨다.

금예는 얼굴을 감싸고 쪼그려앉았다.

이렇게 허망하게 당할 줄 몰랐다.

필룡이놈은 어머니가 홍 씨네에 마을 간 것을 보고 이쪽으로 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동안 위태로운 고비를 여러 번 넘겨왔었는데 이제 다 허사가 된 것이었다.

 전동걸이와 꼭 혼인이 되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품에 한번이라도 안겨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그 꿈도 산산이 깨어지고 만 것이었다.
금예는 한동안 훌쩍거리다가 몸을 다시 씻고 옷을 챙겨입었다.

금예는 걱정 가득한 마음으로 마루에 걸터앉아 초승달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한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일이라도 필룡이가 소문을 내면 큰일이었다.

아까 필룡이한테 소문내지 말라고 다짐을 할 걸 잘못했다 싶기도 했다.

그러나 필룡이가 어서 혼인할 욕심으로 말을 안 들으면 그만이었다.
또, 필룡이 그것이 남편감으로 눈에 차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전동걸과 비교해서가 아니었다.

필룡이가 마음씨 무던하고 부지런하기는 했지만 머슴이라는 것이 딱 싫었다.

머슴의 마누라라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스러웠다.

아무리 소작을 부치며 가난하게 살더라도 초가삼간 하나는 있어야 했다.

그런데 새경으로 그만한 돈을 모아놓았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못생긴 편인 것도 싫었다.

그러나 몸을 망쳐버렸으니 날고 뛸 재주가 없었다.
어머니는 밤늦게 돌아왔다.

금예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무신 일이다냐, 이 밤중에."


보름이는 질색을 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엄니이, 나 죽어야 쓰겄네. 아까 목간허다가 피룡이 놈헌티…"


금예는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머시여!"


보름이는 머리가 쿵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필룡이의 얼굴이 쑥다가들었다.
보름이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목간했던 딸을 꾸짖을 수도 없었다.

한여름에 목간을 하는 것은 예사가 아닌가.

목간을 하지 않았더라도 혼자 있었으니 안 당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잘못은 자신에게 있었다.

과년한 딸을 밤에 혼자 두고 마을 간 에미가 어디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도, 묻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걱정이 불쑥 솟았다.

필룡이가 혼인할 마음으로 그런 것인지,

 불장난으로 저지른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보름이는 필룡이가 금예를 좋아해 온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으쩌냐, 필룡이가 니럴 좋아허냐?"


"…야아…"


"니허고 혼인헐 맘이 있냐 그것이여."


"…야아…"


보름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려, 벨 수 있겄냐. 궂은 소문 나기 전에 혼인히야제."


보름이가 한숨 섞어 한 말이었다.

보름이는 뒤늦게 자신의 불찰을 또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필룡이가 딸에게 눈독을 들여오고 있었다면 에미로서 그런 눈치를 챘어야 했던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한집안식구처럼 살아왔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리 가까웠기 때문에 방심했던 것이다.
사윗감으로서 필룡이는 처지고 마음에 안 드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을 따지고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딸의 팔자거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보름이는 밤새도록 뒤척이며 잠을 설쳤다.

윗방의 딸도 잠을 못 자는 기색이었다.

큰딸을 시집보낼 때만 해도 그래도 살림이 포실했었다.

점방의 이문이 쏠쏠해서 시집보낼 채비를 차근히 갖추어나가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남에게 얹혀사는 처지이고 보니 횃댓보 하나 제대로 갖추어진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애비없이 키운 것도 안쓰러운데 시집보낼 준비마저 허술하기 짝이 없으니

에미로서 너무 면목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필룡이가 혈육이 전혀 없는 근본 모르는 외톨이라는 것이 흠이기보다는

오히려 다행인지도 몰랐다.

만약 형제간 많고 사촌 많은 집이었다면 그 뒷감당을 어찌했을 것인가.

봉사 마누라 하늘에서 점지하고, 곱추 남편 부처님이 점지한다더니

그게 자신의 형편을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닐까도 싶었다.

그저 다행인 것은 필룡이가 심덕이 무던하고 몸 튼튼한 것이었다.

젊어 고생 사서도 하더라고 저희들 뜻 맞추어 부지런히 살면 서른 안에

논마지기 장만 못할 것도 없었다.

홍 씨가 마음 후하고 인정 많으니

머슴 새경에 한 톨이라도 보탰으면 보탰지 축낼 리 없었던 것이다.
보름이는 에미 노릇 제대로 할 수 없는 아픈 시름 속에서도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려고 애썼다.

사람의 생각이란 묘한 것이어서 그렇게 생각하니 필룡이가 괜찮은 사윗감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금예가 턱없이 동걸이 학생한테 마음 내보이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가까이 살게 된 것도 마음놓이는 일이었다.
보름이는 이슬아침에 집을 나섰다.

필룡이가 무슨 소문을 낼지 몰라 이슬이 걷히기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홍 씨를 만나 사정을 토로하고 필룡이의 입단속을 시켜야 했던 것이다.


"필룡이가 다 컸구만요…"


홍 씨는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그저 잔잔하게 웃기만 했다.
홍 씨는 그런 반응에 오히려 놀란 것은 보름이었다.

보름이는 홍 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필룡이넌 머심이기보담 내 자석맨치로 생각혀 왔구만요.

필룡이가 각시감언 지대로 골른 상싶고,

요것이 다 부처님 인연잉게 우리 혼인시키는 것이 으쩌겄소?"


홍 씨는 여전히 웃음지으면서 보름이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야아, 지야 머…"


일이 너무 쉽게 풀려 보름이는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필룡이가 일 저질러놨응게 금세 일 치러야겄고,

혼례넌 나가 다 알아서 헐 것잉게 보살님언 아무 걱정 마시게라."


홍 씨가 더 환하게 웃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지가 갖춘 것이 암것도 어서…"


보름이는 그 도량 넓은 마음씨에 감읍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금예가 겁묵고 필룡이 꺼릴란지도 몰릉게 그 맘이나 잘 다둑이고 풀어주시게라.

필룡이가 그간에 새경 받어 장리로 질군 것만으로도 집이고 살림살이 다 장만헐 수 있구만요.

필룡이가 원체로 맘이 여문게라. 나가 심이 될 일언 벨라 없응게 보살님언 통 딴맘 쓰덜 마시씨요."


홍 씨는 이렇게 말을 막음했다.


보름이가 올 때와는 달리 밝은 얼굴로 돌아가자 홍 씨 마음은 바빠졌다.


"이 놈이 애기중으로 절밥얼 얻어묵고 크다가 파계럴 헌 놈이오.

애기 중으로 큰 중덜이 대각얼 얻어 큰시님이 된 일이 드문디,

에레서보톰 절밥에 쩔고 절일에 넌더리가 난디다가,

멀리서만 보는 속세가 신기허고 그리워 파계럴 많이 혀서 그렇소.

그려서 부처님께서 오욕칠정얼 다 고 나야 득도으 길로 접어들기 쉽다고 허셨고,

늦깎이 중에서 큰시님덜이 많이 나오는 것도 그 이치요.

요놈도 오라는 사람 없는 속세마귀에 씌어 절에서 도망 나온 놈인디,

지가 이 험헌 시상서 멀 매묵고 살 것이오. 거렁뱅이 허는 놈얼 붙들었는디,

절에넌 죽어라고 안 가겄다 허고, 어디 인심 후헌 집서 머심살이라도 허게 히도라고

통사정잉게 두고 부려 보시오.

심성언 바르고, 나허고 다단허니 약조럴 혔응게 딴 말썽언 안피울 것이오.

요것도 다 부처님 인연 아니겄소."


공허 스님이 필룡이를 데려와 한 말이었다.

공허 스님 말씀대로 필룡이는 착했고 부지런했다.

절에서 배운 한문까지 갖추어 다른 머슴들하고는 달랐다.


"시님, 지 손으로 필룡이 장개럴 보내게 되았구만요…"


홍 씨는 가만히 속으로 뇌었다. 그리움이 물살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필룡이와 금예는 열흘 후에 혼례시을 올렸다.

홍 씨의 말마따나 필룡이는 몇 년 동안 새경을 받고 그것을 장리 놓아 불린 돈으로

집과 신접살림을 거뜬히 해결했다.

홍 씨는 혼례식과 잔치를 차리는 등 다른 뒤치다꺼리들을 다 맡았다.

보름이는 홍 씨에게 너무 많은 폐를 끼쳐 몸둘 바를 모르고 서성거렸다.
필룡이는 몇 번씩이고 장모를 모시고 살겠다고 했다.

 보름이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아직 사지 멀쩡한데 사위에게 얹혀살고 싶지 않았고,

또 필룡이를 자식처럼 생각하는 홍 씨에 대해서도 도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필룡이가 마음을 그렇게 써서 그런지 금예도 처음보다 필룡이를 훨씬 좋아하는 눈치였다.

보름이는 그게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엄니 모신다는 맘 10년, 20년 뒤에도 변허능 것 아니제?"


금예가 다짐하는 말이었고


"하먼."


필룡이는 눈을 흘겼고


"변허먼?"


금예가 다잡고 들었고


"나가 부모가 따로 기신간디. 그 맘 변허먼 부처님이 불지옥에 보내실기여."


필룡이는 맹세라도 하듯 말했다. 금예는 몸을 바를 떨 정도로 좋아했다.
보름이는 그런 사위와 딸을 보면서 더없이 고맙고 흐뭇했다.

둘이는 홀로 남은 장모와 에미의 노년을 걱정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보름이는 언젠가 죽을 자리가 마련된 것이 다행스럽기도 했다.


"어이, 보살림이 자네럴 자석으로 생각허지는 것 알제?"


보름이는 사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야아."


"그려, 혼인혔응게 더 열성으로 일해야 허네 잉?"


"야아, 알고 있구만이라우."


"하먼, 그래야제. 보살님 은덕얼 갚어나가야제.

글고, 금예 니도 더 부지런히 보살님댁에 일손 보태고."


"엄니넌 참말로, 나가 애기요?"


금예는 눈을 흘기며 입을 삐죽했다.


"시집감서 게을러지는 여자덜이 많은디, 고것언 천하에 밥 빌어묵을 일이니라."


보름이는 엄하게 일렀다.
필룡이는 장모의 말을 새겨들은 듯 전보다 더 열심히 일을 했다.

홍 씨는 장가든 것을 계기로 필룡이의 새경을 더 올려주었다.

금예도 홍 씨네에서 일손을 더 재게 놀렸다.


"보시오, 참 잘 어우러진 인연이제. 금실 좋다고 소문도 짜아허고."


홍 씨는 필룡이와 금예를 바라보며 무척 흐뭇해했다.


"다 보살님 덕이제라."


보름이는 이 말밖에 할 것이 없었다.
금예는 아침마다 우물가에서 놀림감이 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하이고, 하이고, 어지께 밤에 얼매나 깨가 쏟아졌으먼 저리 입이 찢어 질그나."


무심결에 하품만 해도 이런 말이 대뜸 터져 나왔다.


"하먼, 서로가 잠자라고 냅두겄어."


"그려, 밤마동 구들장 무너지는 소리가 우리 집꺼정 울린당게."


"글안해도 짧은 여름밤이 얼매나 짧을꼬 이."


"달구새끼 목얼 열두 번도 더 비틀고 잡겄제."


"근디 깨 너무 털다가넌 애가 늦어진다는 것얼 알아야 써."


"하이고, 저 함박꽃맨치 피는 얼굴얼 보소. 애 바래게 생겼능가."


여자들은 킥킥대고 히히덕거리며 말이 끝이 없었다.

그런데 금예는 그런 놀림이 다소 부끄럽기는 해도 전혀 노엽지 않았고,

오히려 야릇하고 은근한 행복감을 느꼈다.
신혼 한 달이 후딱 지나갔다.

배필룡은 어느 날 면사무소에서 호출을 받았다.

내키지 않았지만 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배필룡, 모레 징용을 떤난다!"


면서기가 내쏘듯 한 말이었다.


"야아?"


배필룡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모레 징용을 떠나게 됐다니까.

아침 8시까지 면사무소 앞으로 집합한다.

만일에 피했다가 잡히면 평생 콩밥 신세니까 똑똑히 알아둬. 아침 8시야!"


면서기의 싸늘한 외침이었다.


"나가 징용얼 나거먼 우리 식구덜언 멀 묵고 살으란 것이오."


김장섭은 열이 받쳐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었다.


"그야 걱정 말어. 노임을 월 18원서 20원썩 주닝게 소작질보담 나슬 것잉마."


얼굴 핼쑥한 면서기가 펜촉에 잉크를 찍으며 말했다.


"고것이 머시가 낫소.

처자석덜허고 갈라져 타국서 고상허는 것에 비허먼 아무것도 아니제."


김장섭은 얼핏 돈계산을 해보며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러나 그 말은 다 믿을 수 없어 말은 여전치 불퉁스러웠다.


"여러 소리 말고 2년만 댕게오시오.

니나없이 2년썩 다 나가게 되야 있응게."


면서기는 손버릇인 듯 자꾸 펜촉에 잉크를 찍었다.


"글먼 담 파수로 밀어주시게라."


"그리 못허요.

우리 면에 할당 나온 것얼 채와야 허고, 그간에 발써 떠난 사람덜이 많애 바꽈칠 수가 없소."


"참말로 환장허겄네."


김장섭은 한숨을 푹 쉬었다.


"나 바쁜게 일봐야 쓰겄소."


면서기가 의자를 되돌려 앉았다.

김장섭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낼 아칙 7시꺼정 나와야 허요 잉.

밤새 맘 변히서 도망갔다가 잽히는 날에넌 평상 감옥살인게."


어제 저녁때 집으로 찾아왔던 낯선 사내가 큰소리로 말했다.


"야이 씨부랄 눔아, 좆이나 뽈아라!"


김장섭은 욕질을 해대며 사무실을 나섰다.

면직원도 아닌 그 사내가 무슨 일을 맡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김장섭은 맥이 풀려 턱벅터벅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벌써 삼사 년 전부터 사람들이 징용에 끌려가기 시작했었다.

해마다 그 수가 불어나서 조마조마하며 살았는데 결국 자신에게도 닥친 것이었다.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은가…"


김장섭은 이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그러나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까 다음 번으로 미루어달라고 했던 것은 그동안 무슨 궁리를 해볼 참이었던 것이다.

어떤 수를 써서든 징용에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징용에 끌려가느니 차라리 만주이민단에 끌려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만주로 가는 것은 그래도 처자식들과 헤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식구들과 2년씩이나 헤어져 있다는 것은 너무 불안스러웠다.

노임을 준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속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토지조사로 빼앗긴 농토는 지금까지도 찾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관청에서는 심사한다는 똑같은 거짓말을 수백 번도 더 했던 것이다.

그리고 간척지를 개간하고 나서 속은 다음부터는 왜놈들의 말이란 전혀 믿지 않게 되었다.

만주이민에 눈끝 한번 돌리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면

고향 땅을 뜨지 말아야 했고, 왜놈들이 선전해대는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민 간 사람들이 죄인들처럼 갇혀 살고 감시받고 농사지으며 온갖 고생들을 다한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었다.

지금 말로는 노임을 18원에서 20원을 준다지만 총부리 들이대고 일시키며 안 주면 어쩔 것인가.

식구들은 꼼짝없이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떠나는 날로 소작은 떼이고, 자신이 돈을 보내주지 않으면 아내는

혼자 자식들 넷을 데리고 살아갈 방도가 없는 것이었다.


"어느 도회지로 야반도주를 해?"


그러나 징용이 실시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또 도회지로 뜨기에는 식구들이 너무 많았고, 수중에는 무일푼이었다.

기약없는 날품팔이로는 자식들 굶겨죽이기 꼭 알맞았다.


"덕유산이나 지리산 같은 데로 깊이 들어가?"


그러나 그것도 옛날이야기였다.

벌써 몇 년 전부터 산불 내고 산을 망친다고 화전민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관의 눈길이 닿지 않게 깊이 들어간다면 산이 험해지고 농토를 구하기가

어려워 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장섭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토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움치고 뛸데라고는 없었다.

김장섭은 더 걸을 기운이 없어서 논두렁 풀섶에 털퍽 주저앉았다.

허리츰에서 곰방대를 빼내 담배를 담고 부싯돌을 쳤다.

김장섭은 저 먼 들녘끝을 넋놓고 바라본 채 담배연기를 깊이깊이 들이마셨다.

도무지 살고 싶지가 않았다.

세상살이가 너무 막막하고 암담하기만 했다.


"아부지, 요 일얼 으째야 쓰겄능게라우?

고상고상 험서 살아도 더 팍팍해지기만 허는디,

참말로 환장허겄구만요.

아부지넌 요런 때 어찌허실랑게라?…"


무슨 응답이 있을 리 없었다.

김장섭은 또 뭉텅진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떨구었다.
두마안가앙 푸른 물에 노젓는 배앳사아고옹옹…
멀찍이서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슬픔 깃들인 가락이 자연스럽게 넘어가고 있었다.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니이이므을 시일고오오…
 
노랫소리는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그 가락에는 더 슬픈 흥이 실리고 있었다.

김장섭은 자신도 모르게 콧소리로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이삼 년 동안에 유행하고 있는 노래라서 자연스럽게 익히기 된 것이었다.
떠나아아가아안 그 배에에느은 어데에로오 가아았소오오…
노랫소리는 한결 가까워져 있었다.

김장섭은 고새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총각인 듯한 사내가 지겟작대기로 지겟목발을 쳐가며 제 흥에 겨워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그리운 앤에 니미이이여어어 그으리이운 내에 니미이이여어어 언제나 오오오려어어나아아…
총각은 목을 하늘로 뽑아늘여 슬픔의 절정에 취해 노래를 흐드러지게 불러대며

건너편 논두렁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노랫소리에 따라 감정이 고조되며 김장섭은 콧날이 시큰해지고 있었다.

그 노래에 서린 사연과 자신의 신세가 뒤엉키면서 감정이 뭉클해졌던 것이다.
언젠가 사랑방에서 들었던 그 노래의 사연은 기구하고도 가슴 저린 것이었다.
어느 극단에서 만주를 순회공연하고 있었다.

그 극단은 여러 곳을 돌아 두만강변의 국경도시 도문에 이르러 있었다.

도문에서 공연을 마친 단원들은 투숙하고 있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넓고 넓은 대륙 만주의 수 많은 거리에서 거리로 마을에서 마을로 바람에 시리듯

순회를 하고 다닌 피로 탓인지 단원들은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잠이 들지 못하고 일어나 앉았다.

밤이 깊어가고 있는데 어떤 여인이 옆방에서 오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런데 그 울음소리는 너무나 슬프고 절절해서 그 사람의 마음은 온통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여인의 오열은 밤새껏 그치지 않았고, 그 사람도 밤을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했다.

아무래도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아 그 사람은 날이 밝자마자 여관 종업원에게

그 여인의 사연을 물어보았다.

그 여인의 남편은 독립군에 가담했는데 남편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두만강을 건너왔다가

남편이 이미 싸우다 죽은 것을 알고 그토록 슬프게 우는 것이라는 종업원의 대답이었다.

그런데 밤을 울며 새운 그 여인은 다음날 두만강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 안타까운 소식까지 듣게 된 그 사람은 굽이치는 두만강 물결을 바라보며 노래를 짓기 시작했다.

그것이 눈물 젖은 두만강이었다.
그 사연 속의 그 사람이란 젊은 음악인 이시우였다.
그 애달픈 사연에 젖어 있던 김장섭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붙들었다.


"그렇게 독립군이 되어 죽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리고 또 들리는 말이 있었다.


"조금도 무서워하지 마시오.

여러분들이 철통같이 뭉치면 왜놈들도 꼼짝을 못합니다.

이건 여러분들만 잘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소작료도 깎아내리고 독립운동도 하는 것입니다.

독립운동이란 초응ㄹ 들고 싸우는 것만이 아닙니다.

조선사람 하나하나가 왜놈들의 압제와 핍박을 견디고 이겨내는 것은 모두 독립운동입니다.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들을 제외하고 모든 조선사람들이 고생을 견디고 고통을 견디고

고통을 이겨내며 사랑가는 것, 그것이 다 독립운동이다 그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조선사람들이 모두 편하고 쉽게 잘살겠다고 왜놈들의 밀정으로,

앞잡이로, 끄나풀로 나서게 되면 조선은 영영 되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과 같이 왜놈들에게 고통을 당하면서 맞서고 견디고 반감을 품은 사람들이 있어야만

조선을 되찾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다 당당한 독립운동가들입니다.

다만 총을 들고 싸우는 분들에 비해 그 공이 좀 작을 뿐입니다."


10여 년 전 소작쟁의을 일으키기 전에 간부들을 모아놓고 정도규 선생이 한 말이었다.


"그려, 자석덜얼 생각히서라도 나가 심얼 채래야제.

나가 휘둘리먼 그 것덜 앞날이 어찌 되겄냐."


김장섭은 이를 맞물며 마음을 공글렸다.

피할 수 없는 길이면 참고 견디면서 2년만 이겨내면 되는 것이었다.

혼자서만 당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장섭은 집으로 가기 전에 한기팔의 집부터 들렀다.


"아재, 시방 면사무소 댕개오는 질인디, 징용 나가게 되았구만요."


"머시여!"


한기팔이 소스라쳤다.


"아이고메, 고것이 은제당가?"


월전댁이 부엌에서 뛰쳐나왔다.

 
"낼 아칙 7시다요."


김장섭은 마루에 엉덩이를 걸쳤다.


"빌어묵을 놈덜이 하로 짬도 다 안 주고…."


한기팔이 침을 내뱉으면 담배쌈지럴 와락 펼쳤다.

그도 이제 소작살이도 얼마 못할 만큼 늙어 있었다.


"기왕 깅람사 하로라도 얼렁 떠서 2년 채와야제라."


김장섭의 표정없는 말이었다.


"글먼 오늘 저녁 우리 집서 묵세."


월전댁이 서둘러 말했다.


"그려, 그리라도 히야제 달리 어디 짬이 있겄다고."

 
한기팔이 잇따라 혀를 차댔다.


"송산댁이고 아그덜도 다 딜고 오소.

 송산댁 심란시러 밥이고 머시고 헐 맘이 있겄능가."


월전댁이 치마끝을 뒤집어 나오지 않는 코를 풀려 말했다.


"야, 가볼랑마요."


김장섭은 몸을 일으켰다.

이튿날 아침 김장섭은 보퉁이 하나를 들고 면사무소로 나갔다.

그는 아내고 누구고 아무도 따라 나오지 못하게 했다.

오래 마음을 상하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찾아왔던 낯선 그 사내가 나서서 차례로 이름을 불러나갔다 모두 50명이었다.

그 사내가 자신들을 인솔할 반장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그때서야 알았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부산항에는 다른 지방에서 온 징용자들까지 합해서

4백여 명이 모이게 되었다.

일본사람들이 나타나 인원점검을 실시했다.

그들은 국민복을 입은 민간인들이었다.

인원점검이 끝나는 대로 배에 올랐다.

시모노세키로 가는 배라고 했다.

일본사람들은 50명 단위로 된 각 지방별로 선실 하나씩을 배치했다.
그런데 김장섭은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서야 그 반장이라는 자가 돌아가지 않고

함께 간다는 것을 알았다.

선실 창문 밖으로 항구가 느리게 멀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눈시울 젖은 눈으로 서로 내다보려도 했다.

김장섭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담배만 빨고 있었다.
배필룡은 다른 선실에서 자꾸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어디인지 모를 곳으로 가는 것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정을 맘껏 다 풀지 못한 아내와의 이별이 서러웠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아무래도 금예가 마음이 변해 버릴 것만 같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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