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새로운 전쟁
일본이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에 대헤 선전포고를 했다.
1941년이 다 저물어가는 12월 8일 일어난 사건이었다.
다음날인 9일 동경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신문마다 그 사건을 대서 특필했고, 사진들을 그야말로 대문짝만하게 실어놓고 있었다.
그 사진은 일본공군의 공격을 받아 시꺼먼 화염에 휩싸여 있는 미국의 군함들이었다.
그 자극적인 사진은 일본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일본이 신생 강대국인 미국을 이겼다는 승리감에 들뜨고 있었다.
그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그 사건이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라는 우려는 찾아볼 수가 없고
일본은 세계 최강국으로 둔갑해 있었다.
"이 꼴 좀 보게. 군함들이 이렇게 다 불타버렸으니 미국은 꼼짝달싹 못하게 생겼지."
"그러게 말야. 어느 세월에 군함 만들어 덤비겠어. 선전포고 할 것도 없이 이긴 전쟁이지."
"그렇다니까. 미국도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야. 큭큭큭…"
"그렇게 말하면 되나. 우리 대일본제국이 어마어마하게 강한 거지."
"옳아, 옳아, 자네 말이 맞어."
"그런데 이젠 어떻게 될 건가. 중국처럼 미국도 치고 들어갈 건가?"
"암, 그러겠지. 그래서 중국도 미국도 모두 뺏어야지."
"그렇게 되면 우리 일본의 영토가 얼마나 넓지는 건가?"
"그야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정도지. 아마 지구의 절반이 되지 않을까?"
"햐아, 그렇게 되면 우리 일본이 세계 최대강국 아닌가."
"이 사람아, 지금도 세계 최강국이야.
그렇지 않고야 어떻게 미국을 하루아침에 이렇게 이겨버리나."
"맞어, 맞어. 중국과 미국을 다 차지하면 어디 가서 살지?"
"그야 기왕이면 미국 가서 살아야지. 신식이 그쪽이 더 많으니까."
"글쎄, 중국도 살 만하다던데. 여자들이 쓸 만하다잖아."
"그거 구미 당기는군. 뭐 걱정할 것 있겠나. 양쪽에 왔다갔다하면서 살면 되지."
"그거 좋은 생각이네. 양쪽에 첩들 두고 말야. 흐흐흐흐…"
"그래, 그래, 그거 좋지. 크크크크…"
제각기 신문을 든 서너 사람이 전차 안인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짝지어 그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어서 서로 흉일 것이 없었다.
전동걸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성질대로 하자면 아가리들 닥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꾹꾹 참아내고 있었다.
그의 심정은 복잡했다.
승승장구하는 일본의 기세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일본사람들의 꼴에
울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한편으로 우리 신세는 어떻게 도리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은 우울하고 착잡했던 것이다.
전동걸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지도를 보면 태평양은 너무나 넓었고, 일본과 하와이까지는 까마득한 거리였다.
그런데 일본 비행기들이 하와이를 공격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비행기들이 일본에서 떠서 하와이까지 날아간 것은 아니었다.
항공모함에 실려 태평양 어느 지점까지 가고, 비행기들은 거기서 발진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비행기들을 실은 배며, 배에서 뜨고 내리는 비행기며, 그 모든 것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일본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과학이 발달한 것인지 그것 자체가 불가사의했다.
조선과 일본의 차이는 어디서부터 생긴 것일까? 그 의문은 더 커지기만 했다.
"에이 개좆 겉은 쪽바리새끼덜아, 베락이나 맞고 다 꼬드라져라!"
전차에서 내리며 전동걸은 거칠게 내뱉었다.
"어머머…"
전차에서 우루루 내리는 사람들 속에서 한 여자가 놀라며 전동걸을 쳐다보았다.
전동걸도 갑자기 들린 조선말에 고개를 획 돌렸다.
그들의 눈길이 마주쳤다.
학생 차림의 여자가 당황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전동걸은 그냥 갈까 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두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여학생의 모습이 눈을 사로잡았고 , 어머머라는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던 것이다.
"어머머라니, 내가 못할 말 했소?"
전동걸은 여학생에게 불쑥 말했다.
"어머…"
여학생이 놀라며 눈길을 돌렸다.
"조선사람이 당연히 할 말 한 것 아닙니까?"
전동걸은 한 발짝 다가서며 정중하게 말했다.
굵은 듯 맑은 그의 목소리가 울림이 좋았다.
"네, 그런 것이 아니고…"
여학생의 눈길이 빠르게 전동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저기 차 옵니다. 그런 것이 아니면 어떤 다른 뜻이 있습니까?"
전동걸은 여학생에게 인도로 오르라고 손짓하며 물었다.
횐 피부에 곱게 생겼으면서도 온순하고 연약해 보이는 여학생의 인상에
전동걸은 마음까지 사로잡히고 있었다.
"저어… 저어…"
여학생이 고개를 숙이며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 전동걸은 퍼뜩 깨달았다.
자신이 너무 심한 욕을 했다는 것을.
"예, 이제 알았습니다.
어머머가 내 말을 부정한 것이 아니고 욕에 해당하는 걸 말입니다.
왜놈들 좋아하는 게 너무 화가 나서 그만…, 이거 참…"
전동걸은 민망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멋쩍게 웃으며 손이 뒷머리로 갔다.
"네에, 그럼…"
여학생이 고개를 까딱 하고는 돌아섰다.
"아니 저어, 그 문제로 이렇게 알게 됐으니 어디 가서 차나 한잔하면서
그 문제에 대해 얘길 좀 나눴으면 합니다.
그게 우리 조선사람들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전동걸은 여학생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비위 좋게 말했다.
"친구분들 계시잖아요. 전 여잔걸요."
여학생이 옆걸음질 치듯 하며 말했다.
"여자는 조선사람이 아닙니까. 동경에 유학까지 오신 분이…"
여학생이 발길을 멈추며 전동걸을 올려다보았다.
"가십시다, 난 지금 조선사람이면 누구하고나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일단 움직인 여학생의 마음을 간파한 전동걸은 이렇게 마무리 수를 놓았다.
"전 그런 데 잘 안 가봐서…"
여학생이 수줍어하며 엷게 웃었다.
"예, 내가 안내하지요.
저쪽에 조용한 까페가 있습니다. 가십시다."
전동걸은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야릇한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조선사람이라는 그 한마디가 발휘하는 호소력은 의외로 컸던 것이다.
"저는 전동걸이라고 합니다."
자리를 잡고 나서 전동걸은 먼저 인사를 했다.
“네에, 저는 이미화입니다.“
여학생이 고개를 약간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아름다운 꽃, 얼굴에 어울리는 이름이구나. 꼿은 꽃이되 저게 무슨 꽃이어야 할까.
야한 기는 전혀 없고 말끔하고 연약해 보이는데 저런 꽃이 어떤 꽃이 있던가…
전동걸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뭘 드시겠습니까?"
종업원이 다가섰다.
"예, 커피 두 잔 주시오."
전동걸은 생각에서 깨어나며 얼떨결에 말해 버렸다.
"이거 괜찮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데 잘 안 오신다고 하시는데 그만…"
종업원이 돌아서자 전동걸은 계면쩍게 웃었다.
"네, 괜찮아요."
눈길을 떨군 채 이미화는 조용히 대꾸했다.
그러면서, 여학생을 많이 다뤄본 솜씨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까 전차 안에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게 너무 듣기 싫어서 말입니다."
전동걸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듯 이미화를 쳐다보았다.
눈을 올려뜨다가 눈길이 마주친 순간 이미화는 무슨 잘못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황급히 눈길을 떨구었다.
그 때 종업원이 커피를 내왔다.
"왜놈들한테는 낮이 왔는지 모르지만 조선사람들한테는 새로운 밤이 닥쳐온 것입니다."
커피를 저으며 독백하듯 하는 전동걸의 목소리는 침통했다.
"어머나!…"
이미화는 문득 놀랐다.
순간적으로 예배당과 목사님이 떠올랐다.
그의 울림 좋은 목소리에 실린 색다른 말은 마치 목사님의 경건한 음성에 실린
성경 구절 같았던 것이다.
"저어, 혹시 문학 하시나요?"
이미화는 그런 감정에 실려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닙니다. 철학과에 다닙니다."
전동걸의 눈이 왜 그러냐고 묻고 있었고, 이미화는
그 눈길을 피하며 자신의 예상이 적중한 것에 야릇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문학이나 철학이나 이웃사촌이었던 것이다.
"그 말씀이 너무 특이해서…."
이미화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인상적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호감을 드러내는 것 같아 특이하다고 바꾸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 비해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나쁜 것 같아 말을 크게 할 수가 없었다.
"뭐 특이할 건 없고 현실 그대로를 말한 것이지요.
조선의 암흑은 심야가 무색하고, 조선사람들은 로마시대의 노예들이 무색하게 도리 것입니다."
전동걸은 한숨을 쉬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머, 꼭 예언자같이 말하네. 저 사람 혹시 독립운동을 꿈꾸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 비밀결사 같은 것을 조직하고 있을지도 몰라.'
이미화는 이런 생각을 하며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조선의 독립같은 것은 단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었고,
은행의 부장자리에 흡족해 하며 황국신민이 되려고 애섰다.
불현 듯 그런 아버지가 부끄러웠고, 자신이 가사과에 다닌다는 것도 부끄러웠다.
자신은 무언가 예술을 하고 싶었는데 여자는 가사과가 제일이라며 아버지가 밀어붇여던 것이다.
"저어… 조선은 독립이 될까요?"
이미화는 자신도 모르게 이 말을 입 밖에 냈다.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전동걸의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어서…"
전동걸의 부리부리해진 눈을 더 쳐다보지 못하고 이미화는 눈을 내리 깔았다.
"됩니다. 믿어야 합니다. 조선사람이 그것을 안 믿고 무엇을 믿겠습니까."
'주여, 주여, 인도하소서. 이 어린 양들을 인도하소서.'
힘이 실려 울림이 더 좋은 그의 목소리는
마치 목사님의 절정에 이른 기도처럼 흡입력을 갖고 있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리도 자신이 있는 것일까?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하고 있어서 그럴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바로 저런 사람이 비밀결사를 하는 것인가?'
이미화는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경이롭고도 두려웠다.
동경에 와서 1년 동안 독립에 대해서 그렇게 확신을 나타낸 학생은 처음 대하는 것이었다.
거의가 포기상태거나 회의적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런 확신을 갖게 되었는지 경이로운 존재로 느껴졌다.
그런데 그 목소리와 함께 이사아한 마력을 발산하고 있는 그에게 끌려 들어가게 될까봐
두려움도 느꼈다.
"네,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 이만…"
이미화는 일어나려고 했다.
"예, 하숙이 이 근방이십니까? 저는 친구 하숙에 자주 옵니다.
다시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전동걸은 만년필과 수첩을 거침없이 이미화 앞으로 밀어놓았다.
이미화는 순간적으로 어떻게 할까를 생각했다.
그 경이로움을 1회로 끝내기는 너무 아쉬웠고,
그 두려움을 단 한번으로 피해 버리자니 너무 아까웠다.
이미화는 만년필과 수첩을 끌어당겼다.
'그렇구나! 하얀 치자꽃이거나 흰 도라지 꽃이다.'
전동걸은 고개를 숙임막한 채 글씨를 쓰고 있는 이미화를 바라보며
소리 나지 않게 무릎을 치고 있었다.
송준혁은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 뒤로 웃음을 잊어버렸다.
고학을 하는 고달픈 생활 속에서 웃을 일도 별로 없었지만 아버지가 예방구금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부터는 웃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감방에서 폐병을 앓고 계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송준혁은 분노가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그 분노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외로운 절망에 떨고는 했다.
할아버지가 의병장으로 나서고, 아버지가 3·1운동에 나선 것이 20대 전후였다.
자신도 이제 20대에 들어서 있었다.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송준혁은 아버지가 구금당한 것을 계기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공부에만 열중해라. 특히 일본에서 어설프게 행동할 시기가 아니다.
열정만 가지고 투쟁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건 귀한 목숨을 왜놈들에게 밥으로 바치는 무모함이고 어리석음이다.
적을 이기려면 적을 알아야 하고, 적을 안 연후에 싸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소수로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다. 은인자중하며 공부에 최선을 다해라.
자신있게 실력을 기르는 것, 그것도 투쟁의 무기 중의 하나다."
일본으로 떠나올 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었다.
그 말씀을 충실히 지키고자 했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흔들리려 하고 있었다.
송준혁은 신문지를 구겨던지고 방을 나섰다.
하와이를 공격하고 선전 포고를 한 것이 조선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채 멀리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조선사람들이 살기가 더 어렵고 고통스러워지리라는 예상만은 확실했다.
송준혁은 김민근의 하숙집으로 들어섰다.
신문배달이니 물건배달이니 한는 것들에 비하면 가정교사는 고학으로 한결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공부에 별로 뜻이 없는 학생을 상대로 날마다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꽤나 힘겨운 고역이었다. 성적이 올라야 한다는 부담감이 언제나 목을 조이고 있었던 것이다.
송준혁은 2층 김민근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야 이제부터 싸워봐야 아는 것이 아닌가."
"물론이지. 요새 전쟁이야 육박전이 아니라 과학전이니까."
최문일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말이었다.
김이도의 걸걸한 목소리도 들렸다. 하와이 공격에 대한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송준혁은 들여다볼까 하다가 그냥 지나쳤다.
그 이야기에 끼어들 마음도 없었고, 김민근의 보호자인 김이도에게 책임감이
약한 것으로 보이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송중혁은 김민근의 방분을 두들겨 인기척을 냈다.
"예, 들어오세요 선생님."
송준혁은 방문을 옆으로 밀었다.
"선생님, 좀 빨리 오시지요."
김민근이 방 가운데 서서 말했다. 그
는 털 달린 반코트에 털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부잣집아들답게 값비싼 옷을 걸친 그는 공부할 낌새는 전혀 없이
어디로 나갈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왜 이러고 있지?"
송준혁의 말은 냉랭해다.
"선생님, 오늘은 쉬도록 해요."
김민근이 아부하는 웃음을 지었다.
"왜?"
송준혁은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모르세요? 오늘이 하와이 진주만 공격한 날이잖아요."
"공격은 어제다. 헌데,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아이 선생님, 시험도 다 끝났잖아요."
"시험 끝났다고 벌서 하루 놀았잖아."
"선생님, 사람이 기분이라는 게 있잖아요. 친구들하고 약속 다 해놨는데요."
"약속을 해? 작은아버지한테는 허락 받았나?"
"허락 받으나마나 작은아버지는 오케이지요. 뭐."
"가자, 작은아버지한테."
송준혁은 앞서 방을 나갔다.
웬일인지 공부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이도 했다.
"민근이가 외출할 태세를 다 갖추고 또 저에게 하루 휴가를 주려고 합나다."
송준혁은 김이도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또 무슨 바람이냐?"
김이도가 조카를 꼬나보았다.
"시험도 다 끝나고, 오늘 하와이바람이 불고 있잖아요."
김민근은 힐끗힐끗 눈치를 살피면서도 말은 또렷하게 했다.
"하와이바람? 말은 잘도 둘러 붙인다.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
"마음이 뒤숭숭한데 책만 펴놓고 있으면 뭘해요. 괜히 시간낭비지요."
"짜식, 말은 번드fm하게 잘해. 조심하고 늦게 들어오지 말어."
머리를 길게 기른 김이도가 어서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김민근은 철없는 십대답게 부리나케 방을 뛰쳐나갔다.
"저게 언제나 철이 들래나 원. 공부에는 마음이 없고 매냥 저 꼴이니."
김이도가 손가락빗질을 하며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그야 당연지사 아닌가. 부잣집 손자에, 권세가의 아들이 뭐가 부족해서
기를 쓰고 공부를 하겠나. 소설 쓴다는 사람이 그런 심리학도 몰라?"
최문일이 담배연기를 훅 내뿜었다.
"공부가 지겨운 건 나도 잘 알지만 그래도 정도 문제지. 내 체면은 세워줘얄 것 아닌가."
"자네야말로 이젠 철든 것 같군. 그거야 송 형이 딱 책임지고 있잖나."
최문일이 송준혁을 보며 웃었다.
송준혁은 겁북스런 입장을 비하려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담배를 빼들었다.
"참 송 형 수고가 많으시오. 저런 말썽꾼 데리고."
김이도는 조카의 일을 털어내듯 고쳐앉고는,
"송 형은 미국과의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어느 쪽이 이길 것 같은가요?"
그는 아까 하던 이야기로 말머를 돌렸다.
"글쎄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고…, 미국의 힘을 전혀 모르는 형편이라서요…"
송준혀은 모호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그것이야말로 예측이 불가능한 문제인데다가,
김이도네 집안의 친일성 때문에 말을 삼가야 했던 것이다.
"자넨 뭐가 그리 다급한가.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최문일이 김이도를 핀잔하듯 말했다.
"무슨 소리야? 전쟁은 이미 시작된 거고, 전쟁처럼 결과가 중요한 게 어디 있나.
국가 대 국가의 흥망이 걸린 문젠데."
최문일이 심드렁한데도 김이도는 사뭇 진지했다.
"흠, 국가 대 국가의 흥망이라…, 그걸 놓고 따져볼 문제가 있긴 있네."
최문일은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담배를 비벼끄고는,
"둘 중에 하나는 전쟁에 지게 돼 있는데 말야,
누가 이기고 누가 져야 우리 조선에 우리할까? 이걸 좀 생각해 보세."
그는 김이도와 송준혁을 번갈아 보았다.
"그야 말하나마나 아닌가."
김기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송준혀은 최문일이가 마을 잘못 꺼낸 거라고 생각했다.
김이도가 달가워할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마나라니?"
최문일은 김이도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네 소학생 수수께끼 하고 있나? 그야 미국 아닌가."
김이도의 말이 더 퉁명스러워졌다.
"그럼 됐어. 우린 그저 미국이 이기기만 바라고 구경하면 되는 거야."
최문일은 이야기 다 끝났다는 듯 벽에 등을 기댔다.
"흥,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앉았네.
이게 자네 마음대로 구경이나 하고 떡이나 얻어먹는 무당굿인 줄 아나?
창씨개명 한 우리들은 다 어느 나라 국민이지? 명색이 황국신민일세.
그럼 전쟁이 터졌는데 어떻게 해야지? 젊은 놈들은 다 전쟁터에 끌려 나가게 될 거네.
그럼 좋으나 싫으나 미국은 우리의 적이 되는 거고, 조선에 유리 불리를 따지기 전에
우린 미군들 총에 저승객이 될 팔자야. 그래도 구경이나 할 텐가?"
김이도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송중혀은 김이도의 상황인식에 다소 놀랐다.
김이도는 부잣집 아들로서 예술병에 걸려 어느만큼 방탕하고 퇴폐적인 반면에 민족의식이나
민족적 갈등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예술가 지망생답게 뜻밖의 예리함이나 의외의 투시력을 나타낼 때가 많았다.
"그게 그렇게 되나? 그럼 어떻게 돼야지? 일본이 이겨야 하나?
그런다고 우리 조선한테 유리할 건 없는데.
군대에 끌려 나가 끝까지 살아남으리란 보장도 없고 말야.
이거 참 골치 아픈 일 아닌가."
최문일이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뭐 골치 아플 건 없네. 그게 우리 조선사람들의 운명이니까.
우리가 이렇게 따지고 앉았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네.
거룩하고 위대한 일본은 바야흐로 미국과 영국에 싸움을 걸어
세계적인 강국으로 위력을 과시하고 있고, 전쟁은 착착 진행되고 있네.
이 마당에 우리 세 사람이 할 일은 무엇인가!
고난이 닥치기 전에 맘껏 술이나 마시는 것 아니겠나? 가세, 술 마시러."
김이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거야. 자넨 역시 현명해."
최문일이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치며 송준혁에게 눈짓했다.
"씨팔 난 말야, 남극이나 북극, 히말라야나 아마존강 밀림으로 가버리고 싶어."
김이도는 긴 머리칼을 두 손으로 마구 빗질해대며 부르짖듯이 말했다.
"또 황당한 상상인신가? 그런 몽상 하지 말고 술값이나 잘 챙겨."
술 좋아하는 최문일이 실글벙글이었다.
송준혁은 김이도를 옆눈길로 보며 혼자 웃음지었다.
그의 순간적인 몸부림과 그 말이 현실인식이 약한 예술가 지망생의 공허한 상상 같기도 하고,
현실 속에서 그 어떤 돌파구도 찾을 수 없는 조선 젊은이로서의 암담함을 표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도 어느 순간 김이도 같은 허황한 탈출유혹에 빠질 때가 있었다.
최문일이 그렇듯 송준혁도 아무런 부담감 없이 김이도를 따라나섰다.
"우린 술값 걱정 같은 것은 전혀 할 필요가 없다구.
저 친구네 재산으로 보면 우리가 마시는 술값 정도는 표주박으로 대동강물 떠내기야.
내가 저 친구하고 친구가 될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나?
난 예술적 기질이 전무해서 저 친구와 부딪칠 일이 없는 거고,
두 번 째는 내 주량이 저 친구 주량을 받아낼 수 있기 때문이지.
난 저 친구 따라 고보 때부터 대동강에서 뱃놀이하며 술을 마셨는데,
몇백 석 하는 우리 집 재산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
술이 만취해 최문일이 한 말이었고
"에에, 거짓말 말어. 자네가 내 친구가 된 건 순전히 자네가 내 컨닝구를 도와줬기 때문이야.
송 형, 저 친구 고상한 말 믿지 말고 내말을 믿으시오.
난 저 친구 아니었으면 고보도 졸업 못했을 거요.
수학이다 물상이다 하는 시험지는 전부 저 친구 것 베낀 거요.
그 빌어먹을 것들은 왜 배워야 하는 건지 원."
김이도가 팔을 내저으며 한 말이었다.
"그런 소리 말어. 그렇게 말하자면 난 자네 일본어 시험지 안 보고 썼나.
일본어 글짓기는 다 자네가 해주고 말야."
"하 이거, 추악한 과거 다 들통나는구만.
그래, 그래, 우리의 우정은 그런 부정한 행위 속에서 싹텄던 거디었다."
그러나 송준혁이 보기로는 김이도와 최문일은 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조국에 대한 고민이나 민족적 갈등 같은 것은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
나쁘게 말하면 친일주의였고, 좋게 말해서 순응주의였다.
그러나 송준혁은 그런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최문일은 그저 동급생이었고, 김이도는 자신에게 급료를 주는 사람 정도로만 대하면 그만이었다.
자신은 학비를 버는 것이 시급했고, 가정교사 자리는 고학 중에서도 편하고 보수가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마음의 한편에는 그들의 의식은 차츰 시간을 보내면서 서서히 바뀌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기도 했다.
가정교사 자리를 소개해 준 것은 최문일이었다.
같은 과외 몇 안되는 조선학생 중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자신뿐이었고,
최문일도 친구 조카의 가정교사를 물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양에서 몇째 안 가는 거부의 집안이고, 아버지는 이름 날리는 변호사요.
보수도 다른 데보다 괜찮을 테니까 송 형이 잘만 가르쳐주시오."
최문일이 소개하기 전에 한 말이었다.
거부의 손자답게 김민근이는 고등학교부터 일본으로 유학을 온 것이었다.
그런데 공부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는 김이도가 조카를 엄히 다루는 것도 아니었다.
공부를 가르치러 가면 김이도는 집에 없는 날이 더 많았다.
어찌 보면 최문일이가 보호자 역할을 더 성실하게 하는 편이었다.
"어떤 술집으로 갈까?"
큰길에 나선 김이도가 버릇처럼 또 긴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질하며 최문일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왜년들 끼고 한판 돌아가는 거 어때?"
"왜 또 근질근질해?"
"맥박 뛰는 청춘인 줄 몰라?"
"좋아, 가지."
김이도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최문일은 택시를 불러댔다.
바로 그날 임시정부에서는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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