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50. 악법

오늘의 쉼터 2017. 7. 4. 10:14

150. 악법



김제읍은 아침부터 떠들썩하고 술렁거렸다.


빰빠라 빰빠
쿵작쿵작
빠라빠라 빰빠
쿵작 쿵작작


읍사무소 경찰서 동척 같은 것이 있는 본정통에서는 악대가 신명나게 울려대고 있었고,

아이들은 소리치고 앞다투며 그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어른들도 이삼십 명씩 떼지어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무덤덤한 얼굴들이었고, 발걸음이 빠르지도 않았다.
김제 읍내에서 악대가 울려대는 것은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었다.

1년에 서너 차례 곡마단이 천막을 칠 때였다.

그러나 오늘은 곡마단이 들어 온 것이 아니었다.

김제 읍내 잔치가 벌어지는 날이었다.


경축 하시모토 소장님 읍장 취임
경축 하시모토 의원님 읍장 취임


크게 내걸린 현수막들이 잔치 내용을 알려주고 있었다.

다름 아닌 죽산면의 하시모토가 김제읍장이 되는 날이었다.

소장님이란 하시모토의 군산상공회의소 소장 감투를 말하는 것이었고,

의원님이란 그의 도회의원 감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참, 눈감고 야옹이라등마 딱 요 일얼 두고 허는 말이시."


"참말로 가관이여. 읍장 감투 쓰고 잡으먼 그냥 고이 쓸 일이제."


"그 낯짝 뻔뻔허기가 곰발바닥이제. 읍민덜에 여망으로 읍장얼 허는 것이라니."


"좆 뽈고 짜빠졌네. 나넌 꿈에라도 그놈이 읍장 되는 것얼 바랜 적이 는디

어찌서 읍민덜 여망이여, 여망이."


"어허, 몰르먼 말얼 허덜 말어. 소작질허는 우리가 무신 읍민 자격이 있기난 허간디.

세금 많이 내시는 분네덜이나 읍민인 것이제."


"그려, 우리야 맨날 홍어좆으로 둘러리나 스자고 이리 끌려나오는 신세 아니드라고."


"공자님 말씸이여. 그나저나 그넘 감투가 너무 많애서 목이 뿌러지겄는디."


"걱정 말드라고. 감투가 어디 근수 나가는 물건이간디.

그놈 욕심에 백 개라도 마다 안헐 인종 아니여."


"허기사 그려."


스물댓 명으로 무리를 이룬 남자들이 느리게 걸어가며 나누는 말들이었다.


읍민들의 여망에 따라 부득이하게 읍장에 부임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시모토 쪽에서 조직적으로 퍼트려온 말이었다.

그런데 그 선전에는 엄연한 근거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건 읍민 대표 100여 명이 도지사 앞으로 보낸 청원서였다.

그 청원서는 하시모토가 친일지주들과 이장들을 조종해서 꾸며낸 것이었다.
하시모토는 벌써 오래 전부터 단순한 지주가 이니었다.

고무공장이며 솥공장 같은 것들을 경영하는 사업가로서 군산상공회의소에 들어갔고,

결국 소장이 되면서 상공회의소를 장악했다.

그리고 몇차례의 전쟁기부금을 걷어내 부윤은 물론이고 총독의 표창까지 받게 되었다.

그 영향력으로 그는 도회의원이 되는가 하면 여러 가지 사업적 이권도 따냈다.

그이 지위와 함께 재산도 자꾸만 불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마침내 곡창 중의 곡창인 김제읍장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중일전쟁으로 쌀값이 계속 치솟고 있는 상황에서 더 큰 실속을 차리자면

그 자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결코 부윤이나 도지사에 비해 하찮기 그지없는 읍장자리를 탐낸 것이 아니었다.

김제지역을 일단 해정력으로 장악해 그 실속을 빼먹자는 거이었다.
읍사무소의 넓은 마당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읍민들의 여망에 따라 읍장이 된 인물의 취임식다웠다.

전주에서 행차한 악대는 계속 뿜빠뿜빠 쿵작쿵작 신나게 연주를 해대고 있었고,

식장으로 들어가지 못한 아이들은 읍사무소 정문 앞에서 바글거리고 있엇다.

식단 양쪽으로 쳐진 네 개의 커다란 차일 아래는 여러 지역의 유지들이 빽빽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 사람들 속에 맘껏 멋을 부린 장칠문이가 두 턱이 지도록 거드름을 피우며 앉아 있었다.

그는 상공회의소 회원 자격으로만 온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친일조직으로 전국 최대 규모인 국민총력연맹 군산지부장 자격으로 초청된 것이었다.

그는 그 지부장자리를 탈취하듯이 남먼저 맡고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그 유지들 속에 뜻밖의 사람이 끼어 있었다.

눈을 내려 감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정도규였다.

그는 장칠문과는 정반대로 그 감투를 써야 했다.

경찰에서는 그의 전향을 시험이라도 하듯이 그 감투를 뒤집어씌웠던 것이다.

그는 고통스럽고 괴로웠지만 웃는 얼굴로 그 감투를 받아썼다.

위장전향을 위장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씌워진 감투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반일세력 제거와 전시체제 강화를 위한

전국 조직인 경방단 만경부지부장, 만경면의 발전을 위하여 자문하고 지원하는

면의원 감투까지 써야 했다.

그건 일본에 충성을 강요하는 올가미인 동시에 대중을 향한 전시효과를 노린 행위였다.

위장을 위한 위장으로 감수해야 하는 고통인 것을 알면서도 정도규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소극적으로라도 친일행위을 하게 되는 것도 그렇지만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속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내는 비웃음과 손가락질이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지하투쟁보다 더 어려운 투쟁입니다.

그러나 견디셔야 합니다.

그런 고통을 감내하고 계시니까 저희들의 지하투쟁도 유지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언젠가 활동자금을 받아가면서 이현상이 한 말이었다.


"아무리 내 고통이 크다 한들 지하투쟁하는 후배동지들보다 더하랴."


정도규는 이렇게 마음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같은 처지에 있는 유승현을 가끔 만나 술을 마시면서 허허롭게 웃어야 했다.
하시모토의 읍장 취임식은 길고 길게 이어졌다.

도지사의 치사, 전주부윤의 축사, 군산부윤의 축사, 도경찰국장의 축사,

경방단 전북지부단자의 축사, 국민총력연맹 전북지부자의 축사로 이어지는

어슷비슷한 장광설이 끝이 없었다.

뙤약볕 속에 서 있는 사람들은 덥고 지루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한편으로 저으기 놀라고 있었다.

말로만 들어왔던 그 감투 큰 사람들은 한꺼번에 구경하게 된 것이었고, 하시모토가 저리도

대단한 인물인가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일개 읍장의 취임식을 그렇게 거창하게 벌인 것부터가 전에 없었던 일이었다.

더구나 고급관직들이 하급관직의 취임식에 그렇게 대거 참석하는 것도 격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시모토는 자신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취임식을 거창하게 벌이고 고급관직자들을

다 끌어 모은 것이었다.

총독의 표창을 받은 자였고, 앞으로도 전쟁헌금 같은 것을 계속하게 해야 했고,

그동안 슬쩍슬쩍 받아먹은 돈도 있고 해서 고급관직자들은 꼼짝없이 끌려와 하시모토를

추켜세우기에 열을 올리고 침을 말렸야 했다.
축사들이 다 끝나고 마지막으로 연단에 나선 하시모토는 머리카락만 약간 희끗거릴 뿐

아주 건강해 보였다.

그는 60을 넘겼으면서도 10년은 더 젊어 보였다.


"저놈언 나이럴 꺼꿀로 묵능가?"


"금매, 저 혈색 좋은 것 잠 보소."


"무신 뜸금없는 소리여.

몸에 존 보약이란 보약언 다 쳐묵는다는 말 듣지도 못혔어."


"그렇기야 허제. 근디 목청도 짱짱허덜 안혀?"


"개자석, 작인덜 피 뽈아 온갖 보약 다 처묵고 아흔꺼정 살겄구마."


"힝, 예순 넴긴 목심 지 것 아닌 법이여.

이리 지랄발광허다가 오늘 저녁에 꼬드라질지 누가 알어."


사람들이 진땀을 흘리며 수군거렸다.
대일본제국의 번영과 천황폐하의 만수무강 그리고 일군의 승전을 위한

만세 삼창을 끝으로 읍장 취임식이 끝났다.


"식에 참석한 읍민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읍민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하시모토 읍장님께서는 취임 기념으로 여러분에게 설탕가루 한 포대씩을 선사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시모토 읍장님의 높으신 후의에 감사드리며 질서정연하게 설탕가루를 받아가시기

바랍니다."


"저, 저, 저것이 먼 소리여?"


"설탕가리럴 한 푸대썩?"


"아니, 참말잉겨?"


"거짓말얼 그리 광고허겄어?"


"와따, 하시모토 뱃보가 씨기넌 씨다."


"허허, 시상 오래 살고 볼 일이랑게."


사람들은 서로의 귀를 의심했고 그리고 이내 화색이 돌았다.


"설탕가루 한 포대씩!"


그건 서민들에게 너무나 큰 횡재였다.

사람들은 모두 들뜨고, 서로 빨리 정문 쪽으로 가려고 다투면서 밀치기가 시작되었고,

사람들이 밀리면서 읍사무소 마당은 아우성과 소란으로 들끓었다.


"저, 저 조센징들 꼴 좀 보시오."


"짐승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지요."


"그러게 짐승과 조센징들은 패야 말을 듣는다니까요."


"예, 그 말은 만고에 명언이지요."


"조센징들은 앞으로 백년이 가도 개화가 안 될 겁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우리가 가르친 지 30년이 넘었는데도 저 꼴들 아닙니까."


"별 수 없지요. 우리가 힘들더라도 계속 지도해 나가는 수밖에."


"예에, 그렇지요."


"허허허허…"


"하하하하…"


하시모토와 고급관리들은 읍사무소로 들어가며 이렇게들 입을 맞추고 있었다.


설탕은 정문 앞에서 읍사무소 직원들이 나누어주고 있었다.


"아니, 요것이 머시여?"


"한 푸대라등마 한 봉다리 아니여?"


설탕을 받아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놀라고 어이없이 했다.

설탕은 사회자가 말한 것처럼 한 포대씩이 아니라

담배쌈지를 다 펼쳐놓은 크기만한 한 봉지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뒤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서로 빨리 받으려고

계속 밀치기 해대면서 얽히고 설켜 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밀지 말어, 밀지 마!"


"밀면 다 안 줄 것이여!"


읍사무소 직원들이 작대기를 휘두르며 외쳐대고 있었다.
사람들이 절반쯤으로 줄어들었을 즈음이었다.


"아니, 저 늙은이 저것!"


"아니, 어디다가 오짐얼!"


높직하게 쌓인 설탕봉지들을지키고 있던 읍사무소 직원 서너 명이 눈길을 한곳으로 모았다.

모시두루마기로 점잖게 의관을 차린 어떤 노인이 설탕봉지 쌓인 데다 소변을 보고 있었다.


"요런 쌍놈으 늙은이!"


눈을 부릅뜨고 쫓아온 직원 두 명이 노인을 사정없이 떠밀었다.

노인은 벌렁 뒤로 넘어갔다. 

땅바닥에 쓰러진 그 노인은 술취한 신세호였다.


"어디다 오짐얼 깔기고 지랄이여!"


읍사무소 직원 하나가 신세호를 걷어찼다.


"뒤질라고 환장얼 혔제."


다른 직원이 신세호를 짓밟았다.


"저 늙은이 술취헌 것 아니여?"


"그렇구만, 술취헌 개라고. 가세."


그들은 손을 털며 돌앗섰다.


"아이고 , 저 양반 오짐대감 아니라고?"


"그려, 설탕봉다리에다 오짐 싸다가 저리 당허능구마."


"잉, 지대로 찾어오기넌 찾어왔네."


"긍게 말이시. 술취해도 정신언 멀쩡허당게."


"그렁게 오짐대감이시제. 가세, 가세, 설탕가리 받어가는 우리도 나무래는 것잉게."


사람들이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신세호는 무겁고 더딘 몸놀림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의 깨끗했던 모시두루마기는 흙범벅이 되어 있었다.

신세호는 술취한 눈으로 설탕봉지들을 바라보며 허리끈을 묶고 있었다.

넘어지는 바람에 삐딱하게 기운 갓을 고칠 생각도 하지 않고

신세호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시상이 참말로 드럽고 한심허게 변혀 가네.

요것이 무신 징조인지 자네넌 아능가?

왜놈덜이 망해 가는 징존지 더 승해 가는 징존지 자네넌 아느냔 말이여.

이 멍청이넌 아무것도 몰르겄고 앞질만 그냥 답답허고 캄캄허시.

자네가 맘 강단진지 진작에 알었제만, 이 사람아,

죽어서꺼정 고향 땅으로 안 돌아올지넌 몰랐었구만.

자네 그 곧은 항심에 나넌 사람도 아니란 것얼 알었제.

나가 자네 뒤받침서 나스자고 히도 삭신 다 늙어불고 헐 일이 머시가 있것능가…"


신세호는 또 살아 있다는 부끄러움 속에서 송수익을 만나고 있었다.

그이 눈앞에 떠오르는 송수익의 모습은 언제나 의기청청한 20대의 의병장이었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반딧불이 날고, 개구리들이 바글바글 울어대기 시작했다.

송중원은 아이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모깃불을 돋우고 있었다.


"진지 잡수셨능게라?"


신기범이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응, 앉게. 돼지는 좀 어떤가?"


송중원은 평상을 가리켰다.


"돼지고 머시고, 아부지 땜시 속상해 죽겄소."


신기범은 불퉁스럽게 말하며 쌈지를 꺼냈다.


"왜 또 무슨 일 있었나?"


송중원은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 또 김제 나가셔갖고 어쩌크름 넘어지신 것인지 팔목이 팅팅 붓게 접질렀구만요."


"저런, 어쩌시다가?"


"말씸얼 안허시는디,

옷이 흙범벅인 것허고, 오늘이 김제읍장놈 취임식인지 먼지가 있는 날이고,

보나마나 거그서 또 그 일 벌이다가 당허신 것 아니겄능게라."


"가보세, 일어나게."


송중원이 모깃불을 돋우던 막대기를 내던졌다.


"그냥 앉으씨요. 시방 지무신게."


말이 담배를 입꼬리에 물며 신기범은 혀를 찼다.


"심하시면 병원엘 가든지 의원을 부르든지 해얄 것 아닌가."


"아부지 고집이 아심서 그러요. 된장이나 볼르라고 히서 그리 해디렸구만요."


"그것 참…"


송중원은 착잡한 마음으로 평상에 걸터앉았다.


"매형이 요분에넌 단단허니 말 잠 혀서 지발 그 일 그만두게 허씨요.

연세넌 들어가시는디 자꼬 그러다가 팔이나 뿐질러지든지,

아니헐말로 큰일얼 당허시면 어찌 되겄능게라.

아부지가 그런다고 왜놈덜이 오짐에 떠내래가는 것도 아니것고,

독립이 되는 것도 아니덜 않은게라. 그러다가 변얼 당허먼 개…"


신기범은 얼른 말을 멈추며 빽빽 빨아댔다.

그는 개죽음이란 말을 삼킨 것이었다.


"……"


송중원이 처남의 쌈지를 끌어당겼다.

처남의 말에 무어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처남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런 행위로 독립이 될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장인에게 그 행위의 무의미함을 따져가며 그만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건 장인이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저항이고 투쟁이었다.

그리고 그 행위는 창씨개명 거부와 함께 결코 무의미한 것도 아니었다.

집단성과 실효성이 없을 뿐 많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고,

투쟁의 상징성 같은 것을 띠고 있었다.
만해 한용운이 집을 지으면서 총독부 쪽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그 반대쪽인 북향으로 집을 앉혔다는 이야기가 묘한 파장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었다.

운동의 실효성만으로 따진다면 만해의 그 행위야말로 소극적이고 무의미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행위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던 것은 만해가 표현한 투쟁의 상징성 때문이었다.

만해의 행위에 비해 장인의 행위는 훨씬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일 수 있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명망성이었다.

만약 만해가 장인과 같은 행위를 몇 년에 걸쳐서 계속해 오고 있다면 어찌 되었을 것인가.

아마 전국이 떠들썩했을 것이다.

아니, 그 영향력으로 만해는 1년을 넘기지 못하고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 행위는 장인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막고 나설 만한 명분도 논리도 없었다.

처남의 말마따나 장인이 유치장에 갇히고 주먹다짐을 당하고 해가며

그런 행위를 한다고 왜놈들이 오줌에 떠내려갈 것도 아니고 독립이 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장인 앞에 내세울 논리가 될 수 없었다.

장인이 그 사실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장인은 그 사실을 엄연히 알면서도 그 행위를 선택한 것이었다.


"워째 말이 없으신게라?"


신기범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알았네, 좀더 생각해 보세."


송중원의 대꾸는 무겁기만 했다.


"선상님, 진지 잡수셨능게라우?"


세 아이가 사립을 들어서며 목소리를 맞추어 인사했다.


"그래, 어서들 오너라."


송중원이 아이들을 맞이했다.
아이들은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 송중원의 반대쪽 평상 끝에 가 앉았다.


"아부지가 저러시다가 재수 드러우먼 옥살이럴 헐란지도 모르는구만요."


신기범은 매형의 시원찮은 태도가 마 땅찮아 이렇게 대질렀다.


"알겠네, 무슨 방도를 강구해 보세."


송중원은 처남의 심중을 눈치 채고 말에 힘을 실었다.


"선상님, 안녕허신게라우?"


네 아이가 사립을 들어서며 인사했다.


"그래, 밥들 먹었느냐."


송중원이 아이들이 인사를 받았다.


"쟈덜 갤치는 것 또 말썽 안 나겄능게라?"


신기범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가르치는 게 뭐 있어야지. 그저 옛날얘기나 해주는데."


송중원이 픽 웃었다.


"그리 예사로 생각헐 일이 아니구만요.

그놈덜이 트집얼 잡으먼 다 죄되덜 안튼게라.

그놈덜이 이래저래 매형얼 옷 속에 든 등게로 생각허고 있응게 조심히야 헐 것이구만이라."


신기범이 뽀오옹 방귀를 뀌며 몸을 일으켰다.
평상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키킥 쿡쿡 웃어댔다.


"옛끼 이 놈덜아, 보리밥 묵고 터져나오는 여름방구 첨 들어보냐!"


신기범이 호통치듯 말했고, 아이들은 더 웃어댔다.

그때 두 아이가 또 들어오며 인사했다.


"어두운데 살펴 가소."


송중원은 사립 앞에서 처남을 배웅했다.


"야아, 편히 쉬시씨요."


송중원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처남을 지켜보며 스산하게 웃었다.

옷속에 든 등겨라…,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야학을 개설하려고 했었다.

손수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아 머슴을 부려가며 일을 돕기로 하고

그 대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로 마음 정한 것이 야학이었다.

그 일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자신이 책임있게 할 수 있는 일이었고,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야학도 허가를 받아야만 했고, 야간 개설이 금지된 것이 오래 전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렇다고 작정한 일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법만을 피해 아주 소규모로 아이들을 집에서 가르치는 것이었다.

소학교 적령기에 있는 사내아이들만 열서너 명을 골라냈다.

그리고 야학이라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아침나절에 한글과 산수를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그런데 서너 달이 못가서 경찰서로 불려갔다.

그들이 추궁에 한동네 아이들이 간단한 셈도 못하는 것이 딱해 가르쳐준 것뿐인데

법을 어긴 것이 뭐가 있느냐고 맞섰다.

경찰에서는 주간이든 야간이든 사람을 둘 이상 모아 가르치는 것은 범법이라며 당장 중지를 명령했다. 다른 방범을 궁리해 보았다. 둘 이상 안 된다니까 하나씩 불러다가 가르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공부 가르치기를 중지하고 옛날이야기를 해주기로 했다.

옛날이야기를 통해서 아이들의 의식을 깨우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또 서너 달 만에 경찰서로 불려갔다.

아이들이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모여드는 것인데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따졌다.

경찰에서는 아이들을 상대로 공부를 가르쳤는지 어쨌는지를 조사했다.

전혀 공부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경찰에서는 더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꽤나 효과가 있었다.

왜놈들이 나쁘다는 말을 하마디도 하지 않고서도 그 사실을 깨닫게 하고

민족의식을 주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송중원은 평상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호박꽃을 서로 귀에 대보려고 다투고 있었다.

반딧불을 호박꽃 속에 잡아넣은 호박꽃 초롱이었다.

송중원은 아이들의 그 천진스러운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건 30여년 전의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자아,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하기로 했더라?"


송중원은 평상으로 올라앉으며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삼국지요."


어떤 아이가 또랑하게 대답했다.


"그렇지, 삼국지지. 그런데에, 삼국지 얘기는 길어서 한 반년은 걸릴텐데

너희들이 다 기억할 수 있을까?"


소중원은 부채질을 하며 아이들의 반응을 떠보려고 넌지시 물었다.


"야아, 다 기억허능구만이라우."


어떤 아이의 다급한 대답이었다.

그 아이는 삼국지가 너무 길어서 이야기를 안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눈치가 역연했다.

다른 아이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래, 정신을 똑똑하게 차리면 다들 기억할 수가 있다. 잘들 들어라."


송중원은 앉음새를 고치며 허리를 폈다.

그동안 홍길동전에서부터 시작해서 을지문덕이며 강감찬을 거쳐 세종대왕과 단종의 이야기까지

더듬다보니 얘깃거리가 동나다시피 해 삼국지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아이들은 춘향전은 물론이고 심청전, 흥부와 놀부, 콩쥐팥쥐, 나무꾼과 선녀 같은 것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열 살을 먹기 전에 벌써 여기저기서 다들은 것이었다.

모두 고달프고 힘겨운 생활 속에서도 아동교육을 얼마나 철저하게 시키고 있는지

송중원은 새삼스럽게 느꼈던 것이다.
8월이 중순을 넘기고 있는 어느 날 송중원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뜻 밖에도 설죽한테서 온 것이었다.

송중원은 설죽의 이름을 본 순간 가슴이 쿵 울리는 충격을 받았다.

그 까닭 모를 불길한 예감으로 편지를 뜯는 손이 떨렸다.
긴 인사 줄이옵고 두서없이 몇 자 올립니다.

그분께서 지금 재판을 받고 계십니다.

일을 당하신 다음 미력이나마 손을 써보려고 너무 경황없이 보내다보니

반년이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신문에서 보셨는지 모르겠사오나 경성콤그룹 사건입니다.

현재 면회 같은 것은 일절 안 됩니다.
건강하시고, 이만 총총.


경성에서 설죽 배상


송중원은 편지를 떨구었다.

허탁이 결국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고 만것이었다.

경성콤그룹 사건을 신문에서 보긴 했지만 허탁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었다.

누구누구 외 몇 명에 포함되었던 것인지, 가명을 썼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경성콤그룹은 종전의 파벌을 초월하여 1939년에 경성된 사회주의 단체였다.

그런데 40년 말부터 41년 초에 걸쳐서 구성원 대부분이 검거된 것이었다.
송중원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면회 같은 것은 일절 안 됩니다.

송중원의 눈길은 그 문구에 박혀 있었다. 허탁을 만나볼 길은 없고,

경성콤그룹이 마지막 사회주의 단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송중원을 편지를 접었다.

당조직 재건 같은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허탁이 왜 그런 데 가담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필연적인 사유가 있었을 거였다.
송중원은 며칠째 우울한 마음을 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총을 든 경찰들이 송중원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경찰들이 다짜고짜 송중원의 팔에 쇠고랑을 채웠다.


"뭐요! 왜들 이러시오!"


송중원이 거칠게 저항했다.


"잔소리 마라!"


"경찰서에 가보면 다 알아."


순사들은 송중원의 팔을 꺾으며 윽박질렀다.
송중원의 아내와 자식들은 안절부절못하며 발만 동동거렸다.


"아무 걱정들 말어라."


송중원은 사립을 나서며 자식들을 둘러보았다.
햇볕 쏟아지는 들길을 걸으며 아무리 생각해 보았지만

송중원은 쇠고랑을 차야 할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해오라기 한 마리가 하얗고 큰 날개를 느리게 펄럭이며

초록빛 속으로 유유하게 날아가고 있었다.


"저 자유…"


송중원의 눈길은 해오라기를 따라가고 있었다.


"넌 전향서 쓰기를 거부했고, 창씨개명까지 거부한 악질 불령선인이야.

거기다가 근자에는 아이들한테 기묘한 방법으로 배일사상을 전파하고 있단 말야.

너같은 지능적이고 교활한 악질분자들을 위해 제정된 법이 뭔 줄 아나?

그게 바로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이다.

널 그 법에 의하여 오늘부로 구금조치한다."


사찰과장의 살벌한 외침이었다.
송중원은 허탈하게 웃었다.

아까 보았던 해오라기를 떠올리며.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이 전국적으로 발동되는 속에서 총독부는

전국 총호수의 87.4퍼센트가 창씨개명을 했다고 그 실적을 발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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