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48. 정인들의 열매

오늘의 쉼터 2017. 7. 3. 19:42

148. 정인들의 열매



중경의 5월은 온갖 꽃들의 흐드러진 웃음으로 화사했다.

녹음을 이루기 시작한 고목들과 가지가지 꽃들은 한데 잘 어우러져

오래된 도시의 봄정취를 무르익게 하고 있었다.

포근한 햇살 속에 세월의 흐름 같은 것은 무감한 듯 고적들은 의연하게 서 있었고,

꽃과 벌 나비 들은 한가롭게 벗하며 고도의 봄을 한껏 아름답고 풍성하게 꾸며내고 있었다.
그러나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그런 봄정취와는 대조적이었다.

어딘가 불안한 기색들이었고 지친 모습이었다.

그 누구도 봄을 즐기는 느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군인들을 가득 실은 트럭 한 대가 경적을 요란하게 울려대며

큰길을 질주해 갔다.

그 순간 봄의 정취가 산산이 깨져나가고 있었다.

그 트럭이 남겨놓고 간 것은 전운이었다.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그 트럭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며 눈들에 더욱 짙은 불안이 서리고 있었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지 어느덧 5년째가 되고 있었다.

일본군이 북경과 남경을 점령할 때까지만 해도

그 기세로 중국대륙을 곧 손아귀에 넣을 것 같았다.

그러나 중국대륙의 중간 부분에서 전선은 남북으로 걸친 채 장기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건 속전속결을 계획했던 일본군의 작전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일본군은 전력을 소비하게 되고 중국군은 전력을 강화해 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속전속결을 하지 못하고 장기전에 말려들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이 내전을 중단하고 일본에 대항해 국공합작을 한

것이었다.

둘째는 만주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이 투쟁하면서 일본군의 세력을 양분시켜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북항일연군이 1940년 중반에 이르러 거의 소멸되었다고 해서 일본군은 만주지역의

병력을 대대적으로 중국전선으로 이동시킬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소련이 만주의 국경선을 따라 병력을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중국과 소련을 적으로 삼아 계속 병력을 양분시켜 놓아야 하는 궁지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장기화는 면할 수가 없고, 병사들은 죽어가고, 병력은 보충해야 하고,

군비는 계속 소모되고, 군장비는 끝없이 필요하고, 완전히 구렁터이에 빠진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조선에서는 군인 지원제며 징용제를 강행하게 되고, 식량 배급 등

온갖 규제법들을 만들어내기에 급급하고, 친일단체까지 동원하여 5억 원 강제저축운동을

전개시키는가 하면, 41년 2월에는 급기야 내선일체 정신대라 하여 소학교 6학년 졸업생인

조선어린이들 6백 명을 뽑아 일본의 군수공장에 보내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상해의 임시정부는 그동안 전세에 따라 여러 곳으로 이동하다가 이제 중경에 머물러 있었다.

임정에서는 작년 9월에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방대근과 송기원은 해룡병원 복도의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신 담배럴 그리 꼬실리요? 의사도 속타는 법 있는갑소 이."


연달아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송가원을 보며 방대근이 비식 웃었다.


"아 예… 실은 의사들이 더 겁이 많은지도 모릅니다."


"아니, 고것이 무신 소리요?"


방대근이 의아스러워했다.


"예, 이런 일이 있어요.

제가 대학 다닐 때 교수 한 분이 맹장수술에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권위자였어요.

그런데 그분 아들이 맹장에 걸렸지요.

그러자 그분은 자기 손으로 수술을 못하고 동료 의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남의 손에 수술을 맡겨놓고 그분은 수술실 밖에서 수술이 끝날 때까지 식은땀을 흘리며

벌벌 떨었다는 겁니다."


"허, 중이 지 머리 못 깎는 격이로시."


"그런 셈이지요."


"병이 무서운지 다 아는디다가, 자기 혈육잉게 그럴 만도 허겄소.

허나 맹장이야 배럴 째는 것이고, 애 낳는 것이야

그저 된똥 누는 것이나 똑같은 게 아무 걱정헐 것 없소."


송가원은 푹 웃음을 터쳤다.


"아니, 어째 웃소?"


"아니, 방 대장님이 애 낳아보셨습니까? 여태까지 장가도 못 드신 분이."


"이, 그야 우리 아부지덜이 늘 허시든 말씸잉게."


방대근이 헤식게 웃었다.


"그것이야 당해 보지 않은 남자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쉽게 하는 소리지요.

여자들이 하는 말은 못 들어보셨어요?"


"여자덜이? 글씨, 머시라능고?"


"진통할 때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 손에 쥔 차돌이 녹아내릴 정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애 날라고 댓돌에 신 벗어놓고 들어감서 나가 저 신얼 또 신을 수 있을랑가 허는

생각얼 헌다는 말도 안 있소."


"잘 아시는군요."


"그야 다 들은풍월잉게."


방대근이 씨익 웃었다.


"그러니까 된똥 누는 것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되지요."


"에이, 다 여자덜 엄살이오."


"아니라니까요. 의학적으로 볼 때도 출산은 여자들 생사가 걸린 문젭니다."


"그러요? 그나저나 산에서 요 일 안 당허기 천만다행이오.

산에서 애 낳고 죽은 대원도 서넛 있었는디.

송 선생은 의사라 재주가 좋았는갑소이."


방대근은 송가원을 빤히 쳐다보며 묘하게 웃었다.



"참, 의사라고 별 재주 있나요, 잠자리 피하는 것밖에."


송가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허! 참말로 부전자전이시."


방대근이 놀라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전자전이라니요?"


"이, 송 선생이 옥비 명창 대헌 것이 똑 춘부장 어러신이 필녀 아짐씨 대헌 것허고 같으다 그 말이오."


"글쎄요, 저야 뭐… 헌데, 방 대장님은 장가 안 드세요? 윤주헙 선생이 걱정을 많이 하시던데요."


"이 시절에 장개넌 무신…"


방대근이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송 선생님, 축하합니다. 딸 낳았습니다."


여자의 명랑한 목소리였다.


"아, 예!"


송가원이 벌떡 일어섰다.


"산모도 건강하구요."


간호원이 밝게 웃었다. 중년의 간호원은 윤주협의 아내 민수희였다.


"잘되았소, 첫딸 살림밑천인디."


방대근이 일어서며 뚜벅 말했다.


"예, 딸이 키우기 재밌지요. 방 대장님이 산모 데려오느라 수고 많이 하셨어요."


민수희는 천성적이다 싶은 친화력을 밝은 웃음으로 감싸 나타내고 있었다.


"지야 무신…, 산모가 상상크제라."


"고생은요, 된똥 한번 싼 것뿐인데."


송가원이 픽 웃으며 말했고


"네에?"


민수희가 눈이 동그랗게 커졌고


"아이고 참, 쯧쯧쯧…"


방대근이 민망해하며 몸을 돌려세웠다.


"아닙니다. 수고하셨는데 오늘 저녁은 제가 한턱내면 어떻겠습니까?"


송가원은 얼른 말을 둘러 붙이고 있었다.


"네에, 좋아요. 한턱내세요."


민수희는 재치 있게 받아넘겼다.


"예, 장소는 다시 연락드리죠."


민수희가 바쁘게 뛰어갔다.


"왜 그리 돌아서 계십니까?"


송가원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아이고, 송 선생 믿고 어디 농담허겄소?"


방대근이 뒷덜미를 쓸며 눈총을 쏘았다.


"농담을 해도 하도 이상하게 하시니까 저도 한번 써먹으려고 그런 거죠."


송가원은 계속 쿡쿡거렸다.

그 흥겨운 기분에는 옥비가 순산을 했다는 기쁨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쨌그나 이리 맘놓고 우슬날 날이 있응게 참 좋소. 나 인자 가봐야겄소."


방대근은 빙긋이 웃으며 돌아서려고 했다.


"어디로 가시게요?"


"거그 의용대말고 또 있겄소."


의용대란 김원봉이 38년 9월에 조직한 조선의용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따가 디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저녁을 함께 하시죠."


"예, 그래 봅시다."


방대근은 걸음을 빨리 하기 시작했다.
널찍한 병원 뜰을 가로지르던 방대근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벽돌담을 따라 이어진 화단에는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꽃이 있었다.

짙고 엷은 가지가지 보랏빛 꽃송이들이 뭉클뭉클 무게구름 피어나듯

풍성하고 탐스럽게 피어 잇는 수국꽃이었다.

그 꽃송이들에 수국이 누나의 얼굴이 겹쳐지고 있었다.

수국이 누나는 이름 그대로 수국꽃처럼 곱고 예뻤었다.

여지껏 수국이 누나처럼 예쁘고 참한 여자를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정을 주고 싶은 여자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수국이 누나는 어디서 당한 것일까…'


방대근은 또 그 생각에 마음이 어두워졌다.

누나가 살아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살았다면 두 달이 되도록 동네로 돌아오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송가원이와 옥비가 찾아온 것이 누나의 변고를 더 확실하게 해주었다.
농사꾼으로 변장하고 동네를 찾아온 송가원과 옥비의 건강은 오랜 굶주림과 고생으로

형편없이 나빴다.

그들이 몸을 회복하기 기다리면서 길 떠날 준비를 갖추어나갔다.

송가원에게 몇 번이고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권했다.

그러나 송가원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도 말라는 듯 아예 일언반구 대꾸를 하지 않았다.
뜨내기 장사꾼으로 변장을 하고 셋이서 길을 떠났다.

남자만 둘인 것보다는 여자 하나가 끼어 있으니 눈속임하기가 한결 좋았다.

더구나 옥비가 명창이라 노래로 손님들을 끌어 모으는 뜨내기 장사꾼으로서는

 아주 그럴싸하게 격을 갖춘 것이었다.

옥비는 네 차례나 검문하는 일본군들 앞에서 노래를 뽑아댔던 것이다.
중경까지 다다르는 데는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기차를 타면 3일 정도의 길이었지만 왜놈들을 피하느라고 기차를 마음대로 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전선이 가로막혀 중경까지 직통으로 가는 기차가 있지도 않았다.

걱정했던 전선 통과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무적의 대군이라고 큰소리치는 일본군이었지만 전선 전체를 군인들로 울타리를 치지 못하는 한

그 어디엔가 구멍은 뚫려 있게 마련이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요지경속이라 그런 길안내를 해주고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김원봉은 중경에 자리잡고 있었다.

김원봉은 지난날부터 줄기차게 독립운동의 통일전선을 꾀해 왔으므로 임정이 있는 곳에

김원봉이 있으리라는 예측은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원봉은 이제 의열단 단장이 아니었다.

의열단은 지난 1935년 7월에 다른 네 개의 독립운동단체들과 통합하여 민족혁명당을 조직하면서

발전적 해체를 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이 윤주협과의 만남이었다.

윤주협은 그동안에 자식을 둘이나 두고 있었다.

그러나 돈을 한 푼도 벌지 못하는 윤주협은 허울 좋은 아버지에 지나지 않았다.

살림은 아내인 민수희가 버는 돈으로 꾸려가고 있었다.
송가원은 우선 취직을 하기로 했다.

독립군 내에 병원이 없었고, 생활대책을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송가원의 취직은 아주 손쉽게 이루어졌다. 양의사가 부족한 탓이었다.

그 취직을 주선한 것은 민수희였다.

그건 주선이라기보다는 자기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끌어간 셈이었다.

그런데 소가원은 밤낮없이 일하다시피 하는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과가 끝나고 나면 왕진가방을 들고 독립군이나 조선사람들의 진료에 나섰던 것이다.

그 무료진료를 남의 병원 내에서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진료에 옥비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옥비는 명창이 아니라 이제 어엿한 간호원 노릇을 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옥비가 아이를 낳았으니 송가원의 고생이 더 커지게 되었던 것이다.


"수국이나 필녀나 다 편헌 맘으로 갔을 거이다. 나겉이 쓰잘디 읍는 늙은이가 너무 오래 산다."


길을 떠나오던 날 지삼출 아저씨가 한 말이었다.

이제 백발이 된 지삼출 아저씨의 눈가장자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방대근은 콧날이 시큰해지는 걸 느끼며 병원을 나섰다.

수국이 누나를 생각하면 군산에서부터 만주까지 가슴 시리고 쓰라린 일들뿐이었다.

저녁때 송가원이 한턱을 내는 자리에 윤주협 부부와 방대근이 모여앉았다.

애 아버지 된 기분이 어떻습니까?


윤주협이 찻잔을 들며 물었다.


"뭐…, 얼떨떨하고…, 그렇습니다."


송가원이 어색하고 쑥스럽게 웃으며 어물거렸다.


"나는 첫애를 본 순간 아,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란 말이 맞구나 하는 생각밖에 떠오른 것이 없습니다."


"아이, 당신은…"


민수희가 남편에게 눈을 흘겼다.


"아닙니다, 저도 아까 애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딸인지 아들인지 구별도 안 되도, 누굴 닮았는지도 모르겠고,

기분이 아주 이상했는데 윤 선생님 말씀 듣고 보니 저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송가원이 좁 짓궂게 웃었다.


"보시오, 의사 선생님도 저러시는데…"


윤주협이 아내를 곁눈질했다.


"고상하지 못하게 그런 말 말고 방 대장님 총각 신세 면하게 해드릴 궁리나 해보세요."


민수희는 재빠르게 화제를 바꾸어버렸다.


"에이, 그런 말씸 마시게라. 이 나이에 무신…"


방대근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이 사람아, 그러니까 더 장가를 들어야지."


윤주협이 정색을 했다.


"말 마소. 총얼 들어야 허는 우리 처지도 그렇고, 또 무신 재주로 믹여살릴 것잉가."


방대근은 이제 고개를 내둘렀다.


"그리 생각지를 말게. 우리도 우리 입장을 냉정하게 생각해 볼 때가 됐네.

이젠 우리도 총 들고 앞에 나서기는 어려워진 나이가 아닌가.

나이에 맞춰서 사는 법도 배워야지. 옆으로 좀 비켜서서 다른 일을 맡는다고 해도

직접 총 들고 앞장서는 것보다 못할 것도 없고 말야.

그리고 독립운동은 우리 대에서만 하고 말건가? 자식 대에도 해얄 것 아닌가.

그러니 나처럼 돈벌이 하는 여자를 얻으면 될 거야."


윤주협의 진지한 말이었다.


"예, 맞는 말씀입니다. 백전노장의 경험을 살려 해야 될 다른 중대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방 대장님께서는 연세를 고려하셔서 인생 전체를 살펴보실 때가 됐습니다."


송가원은 더욱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아아…, 내 나이가 벌써 마흔다섯이 넘었구나!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갔나.

마음은 지금도 신흥무관학교 시절 그대론데…"


방대근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었다.


"저어…, 이러면 어떻겠어요.

 제가 방 대장님께 어울리는 마 땅한 신부감을 골라 중매를 서는 게요."


민수희가 본격적으로 나섰다.


"아이고, 아닙니다. 이 볼 것 없는 늙다리헌티 누가 시집올라고 허겄능가요."


방대근은 두 손을 내저었다.
주문한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아, 자아, 주객이 전돈디 인자보톰 축하주나 맛나게 마십시다."


방대근은 서둘러 백주병을 들며 자기 이야기를 덮고 피하려고 했다.


"괜히 대장님 얘기 피하려고 그러지 마세요.

생녀 축하주 마시면서 노총각 결혼문제 의논하는 건 아주 합당하게 잘 어울리는 일이니까요."


민수희가 노련하게 방대근의 의도를 파괴하고 들었다.


"거 가다가 쓸 만한 한마디 잘하네. 그럼 축하주부터 한잔씩 듭시다."


윤주협이 방대근을 건더다보며 놀리듯이 웃었다.


"이 사람아, 이 나이에 자석 낳아 어쩌라는 것이여?"


방대근이 술잔을 들며 눈을 부라렸다.


"걱정도 팔자로군. 늦자식 두면 오래 산다는 말 듣지도 못했나?"


윤주협이 술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맞대거리를 했다.

그들은 술잔을 높이 들어 중국식 건배를 했다.


"방 대장님, 이 자리에서 한 가지 분명하게 약속하세요."


민수희가 백주의 독한 맛에 진저리치며 말했다.


"무신 약속?…"


방대근이 안주를 집다 말고 민수희를 쳐다보았다.


"제가 신부감을 골라오면 피하지 마시고 그때그때 선을 보시겠다구요."


"차암, 억지 춘향이도 유분수제…"


"아니, 그렇게 적당히 넘기지 마시고 확실하게 대답하셔야죠."


민수희가 다그치듯 했고


"저것이 전라도식으로 그러겠다는 대답입니다."


송가원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얼랴, 이 사람 사람 잡네 그랴."


방대근이 헛웃음을 쳤다.
윤주협이 더 말하지 말라고 자기 아내에게 눈짓했다.


"그나저나 요새 김원봉 동지가 너무 의기소침해 있어서 문제 아닌가?"


윤주협이 방대근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글씨, 문제넌 문제제."


방대근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김원봉 동지를 알고 나서 그렇게 의기소침해 있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네."


"그야 당연지사 아니겄능가. 김 동지 세력이 그리 약화된 것이 일 시작허고 첨잉게."


주량 큰 방대근은 술잔을 남들보다 빠르게 비우고 있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고 날개 부러진 독수리란 말이 근자의 그분을 보면 실감나요."


민수희가 측은한 얼굴로 말을 거들었다.


"자네가 보기로는 어쩌등가. 그리 분산을 막기가 에로웠등가?"


방대근은 미간이 찌푸려지는 심각한 얼굴로 술잔을 들었다.


"글쎄, 사면초가라고 할 수밖에 없지.

전에도 잠깐 말했지만 나나 자네가 김 동지였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거야.

보게, 독자적인 지휘권을 갖는 무장부대를 만들자니 어디 그만한 재력이 확보되나,

기존대로 활동하자니 중국군의 휘하에 든 보조군으로 대원들의 불만은 높아지지 않나,

조선독립군으로 독립된 상태에서 중국군과 협동한다는 명목으로 중국군의 재정지원을

받으려고 고위간부들을 계속 접촉했지만 그럴 필요가 뭐 있느냐는 반응으로

일이 풀리기를 하나, 그런 상황 속에서 연안 쪽의 중공당은 조직적인 유인을 계속 해오지 않나,

그런 난감한 상태를 제갈량인들 어찌 풀어나갈 수 있겠나. 김 동지는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무장독립부대를 운영할 수 있겠나.

김 동지는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무장독립부대를 운영할 수 있는 재원을 확보하지 못했고,

그리 되자 불만이 커진 공산주의 간부들이 부하를 이끌고 연안 쪽으로 이탈하는 것도

막을 도리가 없었던 것 아닌가."


"그려, 결국은 이짝에 우리 동포덜 수가 작아서 생긴 병통이시.

동포 덜 수가 만주만 같앴어도…"


방대근은 침통하게 술을 들이켰다.
김원봉은 1938년 9월에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는 곧 중, 일 양군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무한 전선에 참전했다.

그러나 무한은 함락되었고, 조선의용대원들은 중국군 부대에 배속되어

일본군에 대한 선전활동, 일본군 포로들의 신문, 일본군 점령지에서의 첩보수집,

암살, 파괴활동 같은 것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중국군의 보조군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군의 지휘를 받는 그런 역할에 불만을 품은 대원들은 독자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조선독립군으로 무장하기를 주장했다.

그러나 김원봉 앞에 닥친 현실은 냉엄했다.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자기네 군대의 운영에도 정신이 없는 중국정부에서는

조선도립군의 지원을 냉정하게 외면했다.

김원봉은 중국정부를 상대하는 현실과 대원들이 주장하는 이상 사이에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공산주의 간부들이 이탈하면서 김원봉의 세력은

그 어느 때 없이 약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김 동지가 참 안됐네."


윤주협이 한숨을 쉬었다.


"그려도 조선의용대 조직헌 것이 헛일헌 것이 아니시."


얼굴에 술꽃이 핀 방대근의 어조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무슨 말인가?"


"생각해 보소, 한국광복군이 어찌 그리 독립조직얼 표방허면서 창설되었능가.

그건 조선의용대의 체험이 귀중헌 바탕이 된 것 아니겄어."


"그야 두말할 것 없지."


"어쨌그나 김 동지가 무신 주의고 분파럴 초월해서 독립운동에 한덩어리로 뭉치자는

통일노선은 백번 옳은 것인디, 요새 참 외롭게 되았어."


"그러게 말야. 어떤 보수적 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하고,

급진적 공산주의자들은 기회주의자라고 매도해대니 원…"


윤주협이 쓰디쓴 얼굴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야 다 깊은 속 모르는 극단주의자들의 입방아제.

김 동지의 성분얼 꼭 말허자면 머시라고 헐까…,

혁신적 민족주의자거나 진보적 민족주의자제."


"김 단장님이 약간 의기소침해 있으니까 인간적인 매력은 더 있어 뵈서 좋아요."


민수희의 말이었다.


"심각한 얘기 하는데 거 무슨 싱거운 소리요."


윤주협이 아내를 마 땅찮게 쏘아보았다.


"싱겁긴요, 사실대로 말하는 건데.

그전에는 너무 강건하고 굳센 무사시라 사람 같지가 않고 겁나고 그랬거든요."


그렇지 않느냐는 듯 민수희는 방대근을 쳐다보았다.


"그 말 일리가 있구만요.

김 동지도 험헌 풍파에 시달리고 나이도 나이고, 안 변헐 수가 없겄지요."


방대근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왼손을 긁어댔다.


"방 대장님, 그 손 긁으면 안 된다니까요."


송가원이 술잔을 기울이다 말고 의사답게 방대근을 지적했다.


"이, 그렇제 참. 술기운이 돈께로 근지러와 죽겄는디."


방대근이 머쓱해져 중얼거렸다.


"예, 열이 나서 그런 겁니다. 참으세요, 저도 참는데요."


송가원이 손을 내밀어 보였다.

그 손이 의사 손 같이 않게 마디마디가 군살이 박인 것처럼 거칠고,

푸르죽죽한 피부는 들떠 오르는 듯 여기저기 껍질이 벗겨져 있었다.

마치 심한 피부병을 앓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항일연군 시절에 동상이 걸렸던 흔적이고 후유증이었다.

그런데 전투부대를 지휘했던 방대근의 손은 송가원보다 훨씬 더 심했다.

또한 그들의 발가락은 손보다 더 심해 늘 진물이 흐르는 형편이었다.


"지기럴, 이기지도 못헌 쌈, 동상만 남고…"


방대근이 쓴웃음 지으며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아닙니다, 방 대장님. 항일연군은 당당하게 이긴 겁니다.

만주에서 대토벌이 시작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쪽에서는

그 겨울로 항일연군이 소멸될 거라고 걱정들 했거든요.

그런데 세 해를 더 싸워냈으니 얼마나 장한 승립니까.

저는 방 대장님이나 송 선생님도 자랑스럽지만,

 송 선생님 부인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 혹한 속에서 견디어냈는지

믿어지지가 않고, 그 앞에서는 감히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민수희가 진정어린 얼굴로 겸손하게 말했다.


"그렇구말구. 항일연군이 없어서 만주의 왜병놈들이 다 이쪽으로 몰려 왔어봐.

중국대륙은 진작 왜놈들 것 되었을지도 모르지."


윤주협이 코를 벌름거리며 아내의 말에 호응했다.


"허, 찬물도 상이라면 좋드라고 비말이라도 그리헝게 듣기에 과히 나쁘덜 않네.

말만 그리허덜 말고 여그 술이나 담뿍 따르소."


방대근이 혼쾌하게 웃으며 빈 술잔을 들었다.


"네에, 술을 제가 따라올리죠."


민수희가 날렵하게 술병을 들었다.


"아, 아아니, 요거 황송시러바서 당최…"


술기운 불콰한 방대근이 과장된 몸짓으로 읍하는 시늉을 하고는,


"기왕 허신 일인디 우리 송 선생헌티도 한잔 따르는 것이 으쩌시겄소?"


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네에, 그러잖아도 따르려고 했어요.

송 선생님은 항일연군의 용맹스러운 군의관일 뿐만 아니라

현재 저의 상사이시니까 제가 밉보여서 되겠습니까.

제가 쫓겨나면 우리 윤주협 동지 굶어죽는걸요."


민수희의 막힘없는 농담이었다.


"아하하하…"


"어허허허…"


술자리는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옥녀는 산후가 좋아 사흘 만에 퇴원을 했다.

옥녀는 송가원의 아이를 낳은 넘치는 기쁨 한구석에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아들이 아니고 딸인 까닭이었다. 아들을 낳았더라면 박미애의 생각을

깨끗이 지울 수 있었을 거였다.

그런 옥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가원은 아이를 안고 병원을 나서며

그저 싱글벙글했다.
열흘쯤 지나 민수희는 방대근에게 맞선볼 날짜를 알려주었다.

다른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원 노처녀를 물색했던 것이다.


"나이는 서른둘이구요,

광주에서 시발된 학생운동 때 평양에서 시위를 주동했다가 검거를 피해

동료들과 북경으로 탈출한 겁니다. 독립의지가 강하고, 교양있고, 인물도 예쁜 편입니다.

평소에는 결혼 같은 것 별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방 대장님 같으신 분이라 마음이 동한 것 같아요.

그 날 시간 꼭 지키셔야 해요."


민수희의 빠른 설명이었고, 방대근은 그저 덤덤하게 앉아 있기만 했다.
사흘 뒤에 민수희는 신부감을 데리고 약속한 음식점으로 나갔다.

 약속 시간 5분 전이었다.

그런데 방대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시가 되었다.

그래도 방대근은 나타나지 않았다. 5분이 지났다.

그래도 방대근은 나타나지 않았다. 10분이 지났다.

그래도 방대근은 나타나지 않았다. 30분까지… 방대근은 끝끝내 나타나지 않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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