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46. 귀향의 뜻

오늘의 쉼터 2017. 7. 1. 01:57

146. 귀향의 뜻



"거기가 법원의 자료집 같은 것들을 정규적으로 발간하는 곳일세."


"법원?"


술잔을 들다 말고 송중원은 홍명준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 눈에 의아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응, 신경에 거슬리는 모양이지? 내 그럴 줄 알았어.

허나 아무 걱정 말게. 자네가 써야 할 글도 없고,

딴사람들한테 글을 청탁하는 일도 없으니까,

자넨 그저 주는 자료들 가지고 책만 만들어내면 되는 거지."


홍명준은 미리 준비했던 말을 한달음에 쏟아놓았다.


"뭐, 재판에 관계되는 자료들인가?"


그러나 송중원의 눈길은 여전이 의아스러웠다.


"대개 그렇지."


"그럼 우리 조선인들 것이 태반이겠군."


"그럴지도 모르지."


홍명준은 말이 나가는 순간 대답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인의 거의 다가 조선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엉터리 재판기록이 많겠군."


송중원의 말은 담담한 듯 낮았지만 입가에 쓴웃음이 얼핏 스쳐지나갔다.


"그런 건 신경쓰지 말어. 자네가 한일도 아닌데…"


송중원은 무표정하게 또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동안 그의 얼굴은 더 마르고 상해 있었다.

그런데 홍명준의 얼굴은 아래가 더 넓어 보일 정도로 살이 찌고 기름기가 번지르르하게 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옷과 함께 그 모습은 너무 대조적이었다.


"형편이 급한데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어. 자식들이 한둘이 아닌데 자식들만 생각하게…"


홍명준은 술잔을 비우며 눈꼬리로 송중원의 기색을 살폈다.


"자식들…"


너무 많았다.

어쩌다보니 다섯이나 생겨나 있었다.

세월은 부질없이 흘러가고 남은 건 자식들이었다.

그것들을 먹이고 가르치고…, 생활의 위기는 심각했다.

점심을 굶긴 지는 벌써 오래였다.


"목구멍이 포도청이 아닌가. 자식들하고 먹고 살아야지."


누구나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건 변명으로 효과가 있었다.

몰론 먹고 살아야 하는 것만큼 절실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변명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글쎄…"


송중원의 핏기 없는 메마른 괴로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여보게, 자네하고 상관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어. 보수도 괜찮으니까 눈 딱 감고 일해 봐."

 
홍명준의 어조에 간곡함이 서려 있었다.


"상관없다고? 글쎄, 엉터리 재판기록들을 책으로 만드는 행위는 뭐지?

그건 잘못된 판검사들의 행위를 인정하고 동조하는 것 아닌가?

지금 독립운동으로 실형을 받고 복역중인 사람들이 2만 명이 가깝지 않은가.

그 형벌의 정당성은 인정될 수 없다.

그런데 그 재판 기록들을 책으로 만들어? 좀더 생각해 보겠네…"


송중원은 한숨을 물며 담배를 빼들었다.


"이봐, 생각하고 말고 할 것 없다니까.

복잡하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걸리지 않을 일이 하나도 없어."


"알겠어. 좀더 생각해 볼 테니까 그 얘긴 그만 하고 술이나 마시세."


송중원은 술잔을 들며 희미하게 웃었다.
홍명준은 섬 한 것을 느꼈다.

송중원의 초췌한 얼굴에 스치고 지나가는 차가운 웃음은 분명 거절이었다.

다만 말을 부드럽게 할 뿐이었다.

그 웃음과 거절은 자신에 대한 경멸이기도 했다.

송중원이가 한마디로 재판을 엉터리라고 하는 앞에서 사실 변호사로서

자신은 떳떳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특히 사상범에 대한 변호사로서 한 일은 없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방관하며 볍조계 물결을 타넘어 왔던 것이다.

설죽이 송중원의 실직을 걱정해서 일삼아 알아본 자리였다

송중원을 만날 때까지만 해도 거절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송중원의 생각과 태도를 아는 터라 미리 고른다고 고른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시 확인한 송중원은 몸이 나빠 다만 활동을 중단하고 있을 뿐이지

조금과 다른 것이 없었다.

생활의 어려움이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 있는데도 보수 좋은 자리를 거절하는 그 독기,

그게 용기 같기도 했고 얼마나 오래갈지 의심스러운 한편 송중원이가

그 깡마른 몸으로 바들바들 떨며 거대한 바위를 떠받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송중원 앞에서 부끄러움은 면할 길이 없었다.


"그래, 그런 자리가 자네 기질에 안 맞을 지도 몰르지."


홍명준은 이야기를 마무리짓듯이 말했다.


"그건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의 문제일세."


송중원이 홍명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눈이 얼굴에 비해 너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 그런가, 근본의 문제라…"


홍명준은 멋쩍게 웃으며 어물거렸다.
둘 사이에는 침묵이 가로놓였다.

홍명준은 다른 이야깃거리를 찾으려고 했지만 마 땅한 것이 없었다.

허탁의 이야기를 꺼내자니 그렇고, 한창 시끄러운 창씨개명이야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다 낡은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었다.
그동안 흘러간 세월의 거리만큼이나 서로의 사이가 멀어져 있다는 것을

홍명준은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있었다.


"그 신여성 박정에는 요새도 여전한가?"


홍명준은 가까스로 박정애를 생각해 냈다.


"음…"


송중원은 비식 웃고는 그만이었다.
그때 방문을 똑똑 두들기고는 설죽이 들어왔다


"술 모자라지 않으세요?"


설죽이 상 옆구리에 앉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송 형이 더 생각해 보겠다는데",


홍명준이 설죽을 보며 씁쓰레하게 웃었다.


"당연하지요. 어디 놀이 가는 것도 아닌데 신중히 생각해야지요."


설죽은 눈치 빠르게 말하며 홍명준에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래, 그건 그렇고, 설죽은 창씨개명을 했나?"


홍명준은 이야기를 빨리 돌리려다보니 불쑥 이렇게 물었다.


"관공서 등쌀에 하긴 해야겠어요. 이 장사도 못해먹게 한 되잖아여."


"이 장사까지도?" 홍명준은 놀라고는,


"그럼 뭐라고 고칠 건가?"


이야깃거리를 제대로 찾았다는 눈치였다.


"그건 쉽잖아요. 향산설자."


"향산설자? 무슨뜻인가?"


"무슨 뜻이긴요,

소설가 이광수가 가르쳐준 대로 성은 향산, 이름 설죽은 설자로 한 거지요.

우리 집 애들은 다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하하하하…"


송중원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참 묘안일세."


홍명준도 따라 웃었다.


"역시 이광수가 가련한 조선민족과 우매한 대중을 위해 공헌을 많이 하는 구만.

그가 바라는 대로 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송중원은 꼭 참말을 하는 것처럼 정색을 하고 있었다.


"아이 송 선생님. 저 같은 바보는 속겠어요."


설죽이 곱게 눈을 흘겼다.


"허, 죽이 잘 맞네."


홍명준이 껄껄거리고 웃었다.
설죽도 함께 술을 마시게 되자 술자리가 어우러졌다.
송중원과 홍명준은 취해서 술자리를 떴다.

밖으로 나와 홍명준은 변소로 갔고, 송중원은 쪽마루에서 걸터앉아 구두를 신고 있었다.


"선생님 이거…"


내실 쪽에서 달려온 설죽이 반으로 접은 편지봉투를 송중원의 주머니에 넣으려고 했다.


"이게 뭐요!"


송중원이 설죽의 손을 내치며 노려보았다.

그 눈이 술 취한 사람 같지 않았다.


"이건 제 뜻이 아니예요."


설죽이 빠르게 속삭였다 .


"…!"


허 선생 뜻이에요.


"허탁, 허탁…"


송중원의 음성은 울음 같았다.
설죽은 봉투를 송중원의 주머니에 깊숙이 넣었다.
홍명준과 헤어진 송중원은 밤 깊은 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자기가 갖춘 지식으로 빌어먹기를 거부하고 포기해야 합니다."


임마누엘 신부의 목소리가 또 들려오고 있었다.
송중원은 비척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몇 군데 취직자리가 나왔었다.
탐정소설이나 애정소설들만 실어대는 삼류 대중잡지,

완전히 친일로 기운 종합잡지, 흥미 위주의 일본소설이나 번역해서 찍어내는 출판사,

 일본글 번역한은 일 같은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알아볼 곳도 없었고,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마지막 남은 길은 하나였다.


"그래 가야지, 서울을 떠나야지…"


송중원은 또 스스로를 일깨우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뿐이었다.

그러나 고향으로 가는 것도 문제였다. 

땅이라고는 단 한마지기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고향으로 가야 했다.

고향에 가면 문중도 있고 처가도 있었다.

서울에 더 있다간 굶어죽든지 지식을 팔아먹든지 막다른 골목이 있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지식을 팔아먹기 쉬운 도시 서울을 버려야 했다.

송중원의 취한 눈앞에는 큰아들 혁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걱정 마세요. 제가 1년 동안 벌어서 대학 가겠습니다."


그래서 준혁이는 제 친구 아버지가 하는 제분공장에 취직을 했다.

준혁이는 일본으로 유학 갈 생각을 하고 있다가 제분공장 직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애비로서 모아둘 수가 없었고, 입학을 하게 되면 회사에서 마련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혁준이는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고, 대학의 꿈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다만 진학 계획을 1년 뒤로 미룬 것이었다.
송중원은 가슴 뜨거움을 느꼈다.

기면서 숨어사는 처지에서도 허탁은 자신에게까지 마음을 쓰고 있었다.

어젯밤에 설죽이 허탁의 이름을 댔을 때만 해도 설죽의 재치이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허탁은 다투듯 시샘하듯 변절하고 있는 실직자들의 꼴을 보면서도 아직 절망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계산대로 하면 그는 영원히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혁명적 낙관주의란 바로 허탁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설죽에게도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허탁을 뒷바라지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자신에게까지 마음을 쓴 것이었다.

통크고 정 많은 여자였다.
복덕방에 집을 내놓고 이사 갈 준비를 시작하게 했다.


"아빠, 왜 시골로 가는데요?"


"아빠, 나 시골 가기 싫은데?"


"아빠, 그냥 서울서 살아요."


어린것들은 이 모양이었다.

송중원은 입을 다물었고, 아내가 아이들의 입을 막느라고 급급했다.
송중원은 윤일랑을 만났다.


"다 그리 마 땅찮은가?"


윤일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뭐."


"그렇겠지. 언제나 떠나게 되나?"


"집이 곧 팔릴 것 같네."


"나도 암담하네. 연애소설을 쓰느냐,

친일을 하느냐, 기로에 선 삐에로야. 역사소설을 써봐,

왜놈들이 조선을 비하하는 조롱거리로 은근히 좋아하는 궁중비사나 권력암투 같은 것 말고,

현진건의 무영탑 같은 방향으로 말야, 무영탑은 문화적 긍지와 애정의 숭고함을

동시에 느끼게 되고 소설적 재미도 잘 갖추었거든."


"그래, 괜찮은 방법이지. 자넨 내려가면 소설 좀 쓰려나?"


"난 재주 없다니까, 노동을 해야지."


"그 나이 몸으로?"


"더 건강해질 수도 있네."


"그건 지식의 환상이지."


"고향이 서울인 자넨 몰라.

난 지게질도 할 줄 알고 낫질도 할 줄 아네."


"양반족보로 그런 걸 다했어?"


"무슨 소린가. 우리 장인어른은 손수 농사를 다 지으셨는데.

투쟁의 한 방법으로 농촌에서 양반이 직접 농사를 짓는 건 흉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네.

이젠 양반이고 뭐고 그런 사고방식을 버려야 하지만 말야."


"난 그런 것도 모르니까 문제가 있어."


"그런 건 별거 아니고 의식과 의지가 얼마나 꿋꿋하냐가 문제야."


"그렇겠지. 요즘엔 혼란이 아주 심해. 박영희가 프로문학을 버리고

친일로 나선 것이야 탓할 기회조차 없지만 임화까지 친일의 깃발을 들고

설치기 시작한 데는 아연할 수밖에 없어."


"다 표리부동한 망동들이지. 적극성을 버렸으면 최소한 침묵은 해야지

침묵이 동조고 묵인인 일면도 있지만 거부고 저항인 일면도 있으니까 말야,

적극 반일에서 친일로 반전하는 그들의 내면을 어떤 방법으로도 이해할 수가 없어.

애초에 기회주의고 박쥐 근성을 가진 놈들이기 때문이야.

용서할 수 없는 행위를 한 놈들을 이해하려고 할 것도 없네.

싸우면서 죽어가고 갇힌 사람들이 엄존하는 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도륙해야 하네."


"그렇지,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리네."


"그런데 자네가 떠나면…"


윤일랑은 눈물을 삼키듯이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보름쯤 지나 송중원은 가족을 데리고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많아 집이 빨리 팔렸던 것이다.

송중원은 기차에 흔들리며 앞으로 살아갈 일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게 논을 몇 마지기나마 마련하게 된 것이 마음을 가볍게 했다.

장인의 편지로도 나도는 집들이 많아 집값이 아주 헐값이라는 것이었다.

만주로 이민 가는 사람들이 집을 내놓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총독부 척시과에서는 2월부터 또 1940년도 만주이민을 1만여 호 목표로 추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다 서울에는 유입 인구가 많아져 집값이 오르고 있었다.

그 차액으로 논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설죽이 준 돈으로는 생활비와 이사비용으로도 너무 유용하게 잘 썼던 것이다.

설죽은 허탁에게 전하는 편지를 받으며 끝내 눈물을 비쳤다.

허탁을 만나보고 싶었지만 무슨 일을 하는지 연락이 오지 않았다.

설죽의 말로는 무슨 새 일을 시작하는 것 같은 눈치였다고 했다.

전시체제 강화와 황국신민화 강행이 맞물려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사상운동 단속은

더욱 가혹해지는데 새로 시작한 일이 무엇인지 불안하기만 했다.

어쨋든 논을 몇 마지기라도 장만해서 식생활부터 안정시키면 정신적 여우도 생길 것 같았다.

그러나 농사를 손수 짓는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지 어쩐지는 자신할 수가 없었다.

일단 시도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장인의 뒤를 이어 처남이 손수 농사를 짓고 있으니

배워가면서 적응하면 한 사람 몫은 다 못해도 반몫은 하지 않으랴 싶었다.
송중원의 가족은 전주에서 내렸다.


"엄마, 저기 외할아버지가 나오셨어요."


큰딸 이화가 먼저 알아보고 하엽이에게 말했다.


"워메, 아부님이!"


하엽이는 개찰구 저쪽에 의관 차림으로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아버지를 보고 놀랐다.

그 옆에는 남동생 기범이도 있었던 것이다.


"저런, 과거급제하고 금의환양하는 것도 아닌데 이 멀리까지…"


송중원이 민망해하며 중얼거렸다.

 
"외할아버지!"


"외삼촌!"


아이들이 출찰구를 먼저 빠져나가며 소리쳤다.


"이 멀리까지 뭐하러 나오셨습니까?"


송중원은 장인 앞에 깊이 절했다.


"멀기넌, 원족삼아 나왔제 원로에 다 무사허고?"


신세호는 온화하게 웃으며 사위와 딸 외손들을 둘러보았다.


"예, 준혁이는 말씀드린 대로 서울에 두고, 다른 애들은 별탈 없습니다."


송중원이 어려워하며 대답했다.


"그려, 잘 내려왔네. 서울살이가 존 것만이 아니지. 가세."


신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송중원은 비로소 처남과 인사를 나누었다.

하엽이도 남동생의 팔을 잡으며 눈물이 글썽거렸다


"매형이 농사짓고 살겄다는 것이 참말잉게라?"


신기범이 누나 옆에 놓인 트렁크를 집어들며 씨익 웃었다.

그 그을린 얼굴이며 골격이 아버지 신세호와는 달랐다.

건강한 것이 외탁이었다.


"그럴 작정이네. 자네가 선생님이 되어 주게."


송중원은 일부러 쾌활하게 말하며 웃었다.


"월사금얼 톡톡허니 내셔야 하는디요."


신기범이 걸음을 옮겨놓았다.


"암, 내구말구."


그들은 소리 맞춰 웃으며 역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따르며 하엽이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아버지와 남동생의 마중이 심란스러움을 다소 가라앉혀 주고 있었던 것이다
송중원은 열흘이 넘게 바뻐 보였다.

처남을 따라 다니녀 집을 구하고 논을 장만하기 위해서였다.

집이 뜻밖에도 헐값이라 논을 여섯 마지기나 살 수 있었다.

송중원은 기묘한 감정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었다.

집값이 싸서 생각보다 논을 많이 장만한 것은 좋았지만 만주로 떠나면서

집을 헐값으로 처분해야 하는 사람들이 딱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민 저거 말이 모집이제 실지로넌 다 강제로 끌어가는 것이구만이라.

지주놈덜이 관허고 한통속이 되야갖고 맘에 안드는 작인덜 소작얼 막 띠부는구만요.

글먼 소작 띠인 작인덜이 어디로 가겠는게라.

안 굶어 죽을람사 만주로 가야제라.

지주놈덜이 아조 고약허니 친일얼 해묵는당게요.

글고 어떤 디서넌 이장이고 면서기가 강제로 몰아대서 신청서럴 내기도 허고요,

아조 난리판굿이랑게요."


신기범이 침을 내뱉었다.


"그런 소문이 사실이었구만."


송중원은 얼글이 찌푸려졌다.


"첨에넌 안 그랬는디 해마동 자꼬 심해지능마요."


"그러겠지, 조선에서는 쌀값이 치솟고, 쌀을 아끼느라고 도정도 심하게 못하게 하는

 법을 연속으로 만들어내고 있는판이니. 만주 땅 개간시켜 군량미 확보하느라고 혈안이 된 거지."


"그나저나 매형은 애초에 농사질 생각은 허덜말고 머심이나 착실허니 부릴 맘이나 묵으씨여.

그 논이먼 식구덜 살 걱정은 면했응게."


"아니네, 이 사람아. 해보지도 않고 그런 법이 어디 있나.

장인어른께서 손수 농사지으신 것 생각 안하나?"


송중원은 정색을 했다.


"똑똑히 매형이 어찌 그리 헛짚는 소리 허는 그런 게라?

아부지가 농사 지신 것언 매형보담 젊었을 적이고, 몸에도 병이 없었단 말이오.

그러고, 아부지도 매형 나이가 되심서 머심얼 부림서 허였당게요.

매형언 이적지 농사져 본 일도 없제,

몸언 성허덜 않제, 나이넌 묵었제.

다 뜬구름 잡는 이얘 긴게 머심 부림서 병이나 낫게 허는 것이 상수요."


신기범도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노동을 하면 몸도 더 건강해지지 않겠니?"


처남의 말이 일리가 있기도 해서 송중원은 기가 한풀 꺽여 들었다.


"노동도 천차만별잉게라. 농사노동언 성헌 몸도 삭아내리게 하요.

삼복더우 땡볕 속이서 논얼 한나절만 매봇시여.

매형 병언 열 배넌 아니라도 두세 곱쟁이넌도질 것이오.

거름내기, 물푸기, 벼베기, 타작, 무신 일이고 매형 병 도지게만 허는 것이제

낫게 헐 것언 암것도 없소."


"이거 참, 무위도식할 수도 없고, 어쨋든 내가 할만한 일이 있을 것이 아닌가."


송중원은 더 풀이 죽어 처남을 쳐다보았다.


"야아, 사람이 활동얼 안허고 손끝 맺고 앉어만 있어도 오만 병이 다 생기는 법이제라.

매형은 병 나슬 정도로만 활동허게 텃밭농사나 짓고, 살포 들고 물꼬 보로 댕기고 그러씨요.

그럼서 매형이 갖춘 학식으로 딴 일얼 차차로 찾아보먼 되덜 안컸소."


"알겠네, 좀더 생각해 보세."


송중원은 농업노동이 심심풀이거나 감상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치열한 생존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처남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의 생각에 감상이 개재되어 있었음을 어느 정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억지로 될 일도 아니었고, 오기로 될 일도 아니었다.

처남과 다시 상의해서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일거리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신세호는 조촐한 술상을 차려놓고 사위를 불렀다.

아들도 옆자리에 앉혔다.


"맘언 어떤가?"


신세호가 사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환갑에 이른 그는 수염이 반백이었고, 주름 잡힌 온화하고 담담해 보였다.

곱게 늙은 보기 좋은 얼굴이었다.


"예, 편안합니다."


송중원은 머리를 조아렸다.
"편헐 리야 있겄능가. 잊어볼 것언 잊어불고 새 맘얼 갖도록 허게.

사람이란 것이 배왔다고 다 옳은 길로만 가는 것이 아니지.

사람의 심성이나 성정은 천차만별이라 배운 사람이 배운 머리로 악행얼 허로 들자면

더 악독하게 하는 법 아니든가.

자고로 간신배덜 중에 무식헌 놈덜 하나도 없었고,

근년에 부쩍 늘어나는 친일배놈덜이 간신배놈덜허고 다 똑겉은 종자네.

그런 인종덜이 늘수록 맘 단단허니 묵고 새 생활얼 찾도록허게."


신세호의 말은 나직하면서도 근엄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러고… 요것은 닷 마지기 문서지. 자네 앞으로 명의럴 바꾼 것잉게 간수허게."


신세호는 두툼한 봉투를 송중원 앞으로 밀어주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장만한 논으로도 밥 걱정은 안하게 됐습니다."


송중원은 당황해서 봉투를 장인 앞으로 밀어놓았다


"어디 밥만 묵고 살아지는가.

진작 기범이하고 의논혀서 자네 몫으로 갈라둔 것잉게 거둬두게."


"아닙니다. 장인어른 사시기도 풍적하지가 못한데 제가 어찌…"


"여러 말 말게. 나야 이만하면 부자고, 사위도 엄연헌 자석이네."


송중원을 이윽히 바라보는 신세호의 눈에는 말보다 더 많은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다.


"자네가 내 사위가 아니고 그냥 송수익의 자식이었다 해도 그런 인사는 치렀을 거야."


신세호가 하고 있는 생각이었다.


"매형, 나 맘 변허기 전에 얼렁 챙기시오,

 나가 턱 오망헌 것이 욕심 많은 것 잘 알제라?"


신기범이 웃으며 호리병을 들었다.


"그려, 술이나 한잔 따러라. 허허허…"


신세호가 수염을 가다듬으며 술잔을 들었다.


"자아 매형도 한잔 받으시제라."


송중원은 술잔을 들며 두서없이 처가 형편을 생각하고 있었다.

처남 아래로는 시집보내야 할 처제가 둘이 더 있고, 처남도 또 아이들이 둘이었다.

처남은 아이들이 더 생길 텐데 남은 논이 얼마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장인어른, 그럼 제가 두 마지기만…"


"어허 사내 맘이 그리 졸해서야 쓰능가. 자아, 술이나 쑥 드세."


신세호는 송중원의 말을 막아버렸다.


며칠이 지나 경찰서에서 형사가 찾아왔다.


"송중원이가 누구여?"


마당 가운데다 자전거를 받치며 사내는 거침없이 내질렀다.
그 자전거에 전시제복이며 말투에서 송중원은 형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작은 아들과 함께 닭장 짜던 것을 멈추지 않고 송중원도 퉁명스럽게 내질렀다.


"나요."


"허, 경성물 묵어서 근가 제법 풀기가 빳빳허시.

척 보먼 3천리라고 나가 누군지 몰라서 그러고 있는겨, 시방?"


그 사내는 송중원 쪽으로 걸어오며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금시초문인 사람이 왜 남의 집에 들어와 이러는 거여. 초면 예절도 없이."


송중원은 상대방의 홈을 찌르고 들었다.

초장부터 밀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방자해지는 이 자들의 기질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허, 초면 예절이라고?"


사내는 멈칫하는 기색이더니.


"그려, 역시 유식헝게 따질 것을 따지능마.

 공무집행 태도럴 정식으르 취허라 그것이제? 그려,

나 다나카 나가미즈 형사여, 인자 되았어?"


그는 놀리는 듯하는 어조와는 달리 독 오른 눈으로 송중원을 노려보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아시다시피 제가 송중원입니다. 저쪽으로 가시지요."


송중원은 그때서야 일어서며 인사하는 척했다.

그리고 마루 쪽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그자의 창씨개명한 이름을 듣는 순간 웃음이 터지려 했다.


"빨건 줄 그어진 신세먼 이사 오듬 저로 신고보톰 히야제 신간 편허게 닭장이나 짜고 앉었어?"


아직 권하지도 않았는데 털썩 마루에 걸터앉으며 형사는 시비조로 말해.


"서울 경찰서에서 20일 이내라고 했으니까 아직 시일이 좀 남았지요."


송중원은 형사와 떨어져 앉으며 눈길을 울타리 밖 먼 하늘로 보냈다.


"글먼, 시일이 꽉 차기를 기둘린다 그것이여?"


형사는 완전한 시비조였다.


"아니지요. 20일간의 시일을 준건 집안 정리부터 하라는 것 아니겠어요?

마지막 날 신고해도 법에 안 걸리고…"


송중원은 나지막하게 또 형사의 허점을 찔렀다.


"무신 소리여, 빨를수록 좋제. 그야 그렇고, 창씨개명인 안 헐 심판이여. 머시여?"


형사는 이야기를 슬쩍 창씨개명으로 돌려댔다.

이 놈이 듣건 대로 예삿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창씨개명이야 8월까지니까 아직도 서너 달 남았는데요."


"자꼬 시일만 따질 일이 아니여!"


형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창씨개명언 동네마동이 이장이 앞서서 단체로 시행허고 잇는디.

이 동네넌 발써 다 끝났다.

그 말이여. 근디 창씨개명얼 안허겼다고 뻗딘 불령선인이 다섯이여.

그중에 질로 악질이 주군지 알어? 바로 당신 장인 영감탱이 신호세란 말이여.

당신도 시방 장인허고 짝궁이 되야갖고 뻗대고 니슬 심뽀제?"


형사는 독이 지를 흐르는 얼굴로 이를 앙다물며 송중원을 노려 보았다.


"그거 첨 듣는 소리요."


송중원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거짓말 말어, 나럴 멀로 보고 아그덜도 안 믿을 거짓말이여. 거짓말이."


형사는 더 크게 소리질렀다.


"안 믿을 라면 그만두시오."


송중원의 말은 냉담했다. 정말 장인의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장인이 창씨개명을 쉽게 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단체로 몰아붙이는

상황 아래서 거부했다는 것은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글먼 당신언 어쩔 셈이여?"


형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송중원을 겨누었다.


"급한 일 아니니까 차차로 생각해 봐야지요."


송중원은 살짝 비켜섰다.


"누구 놀리는 것이여. 시방!

이 동네단체로 끝냈다는 말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부렷어?"


형사는 취조실로 아는지 마룻장을 내리쳤다.


"이거 죄진 일도 없는데 죄인 다루듯 하지 마시오.

동네별로 한 건 사무를 편리하게 하자고 한 것이지 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잖소.

법으로는 기한 내에 아무 때나 자유로 하라고 정하고 있단 말이오."


송중원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하, 이거 법 드럽게 잘 따지네.

어디 보드라고, 나도 앞으로 법얼 짠득짠들허니 따져줄 것잉게."


형사는 벌떡 일어서서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의 뒷덜미에 시퍼런 날이 서 있었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사립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송중원을 쓴 웃음을 문 채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해가 질 무렵 신세호는 사위네 사립을 들어섰다.


"허어, 살림살이 재미가 꼬소하구나."


일에 열중하고 있는 사위와 딸을 보자 신세호는 마음이 흡족하여 절로 웃음이 나왔다.

송중원은 닭장을 마무리하고 하엽이는 텃밭에 호미질을 하고 있었다.


"창씨개명허라고 형사가 왔드라고?"


"예 제 동향을 살필 겸 겸사겸사 온 것 같습니다."


작은아들이 가서 말한 것이라고 송중원을 생각했다.


"왜놈덜이 들이댈 칼이 자석덜얼 학교에 입학 안 시켜주겄다는 것인디.

조선말얼 안 갤치고 없애분 학교 댕기나 마나세."


목소리는 나직하고 부드러웠지만 쇠보다 강한 뼈가 든 말에 송중원은 가슴이 철렁했다.

형사가 간 다음에 그 문제가 걸려 고심을 하고 있었는데 장인의 말은 그 해결책 같았던 것이다.

장인은 하나뿐인 아들을 전문학교나 대학에 보내지 않고 농사에 주저앉혔다.

상급학교 공부 더 해보았자 그걸 써먹는 길이 바로 친일하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그건 옳은 말이었고, 그 단호함에 창씨개명 거부로 이어져 있었다.


"예예…"


송중원은 아직 확실하게 정리가 안 돼 모호하게 대답했다.


"조선말도 없애고 조선성씨도 없애고,

그런다고 조선사람이 다 없어질지 아는 왜놈덜이 가소롭제.

그리 쉽게는 안 되는 것잉게."


신세호는 독백하듯 하며 자리를 떴다.

이틀이 지난 해질녁에 신기범이 송중원의 집으로 뛰어들었다.


"매형, 나허고 경찰에 잠 갑시다."


"경찰서."


담 밑에 호박구덩이를 파고 있던 송중원이 삽질을 멈추었다.


"아부지가 끌려 들어가셨다요."


"엉?"


"머시여?"


송중원의 놀라는 소리와 부엌에서 나오던 하엽이의 소리가 겹쳐졌다.


"술 잡숩고 또 면사무소 앞이다 오짐얼 깔기셨당마요."


"뭐라고?"


"음마, 무신 소리여?"


신기범을 쳐다보는 송중원과 하엽이의 얼굴에는 놀라움보다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더 강하게 드러났다


"못 믿으시겠제라? 아부지넌 술만 잡수셨다 하먼 그러신 지가 벌써 맺년 되았구만요."


"아니. 글먼 병을 고쳐야겠제."


하엽이가 안타까와하며 울상이 되었다 .


"누님언 그것이 노망끼라고 생각허는갑소 이."


신기범은 태평스럽게 씨익 웃었다.

아까 집으로 들어올 때와는 너무 다른 반응이었다.


"글먼 무신 소리여?"


"아부지가 술취혔다고 암디서나 그러는 것이 아니단 말이오.

왜놈덜 점방 앞, 왜놈덜 집, 왜년들 모여 떠드는 디.

요런 디다만 오짐얼 깔기 신당게라."


"글먼 역부러 그러시는 것이여?"


"눈치 빨릉게 좋소."


신기범이 또 씨익 웃었다.


"은제보톰 그러시는디? 그러다가 일 안 당허시능겨?"


"아매 그것이 사둔 어런 별세허신 소식 듣고 한 두달 달 지냄서 시작된 것인디,

경찰서에 끌려간 것이 어디 한두 번이간디여. 그려도 술 취해 헌 일인디다가 연세가 많으시고,

아부지가 통 몰르는 일이라고 잡아띤게 순사덜도 어찌헐 도리가 없는 것이제라."


송중원은 큰 충격을 받고 있었다.

그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장인이 선택한 한 저항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지난날 동네사람들을 중심으로 세금불납운동을 펴기도 했던 장인은

그런 것이 용납되지 않는 상황에 처해 선택한 것이 그 외로운 저항인 것 같았다.

의관을 점잖게 차려입은 장인이 술이 취해 오줌을 갈겨대고 있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송중원은 자꾸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려서 사람덜이 아부지헌티 붙인 별호가 먼지 아시오? 오짐대감이다요."


신기범은 통쾌하다는 듯 웃었다.


"아이고, 어찌 웃고 그려. 근디 어찌서 해필허니 면사무소 앞이다 그러셨능고.

죄가 커지면 어쩌실라고."


"그 뜻얼 모르겄소? 창씨개명 반대허시니라고 그랬겄제라.

 근디 면사무소 앞이라 나도 맘이 찜찜해서 매형보고 항께 가잔 것이구만요."


"그럼, 가고말고 잠시 기다리게. 나 옷 좀 갈아입고 나올테니."


송중원은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오줌대감, 그 별명이 슬프고도 눈물겨웠다.

장인의 그 행위가 창씨개명을 거부한 것보다 더 크고 강하게 느껴졌다.

대감이라는 말 속에는 사람들이 장인의 뜻을 다 알아차리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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