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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거룩한 죽음, 이름 없는 꽃들

오늘의 쉼터 2017. 6. 30. 22:28

144, 거룩한 죽음, 이름 없는 꽃들


관동군은 만주 3개년 치안숙정계획 마지막 해를 맞이하여 동변도치안숙정계획을 구체화시켰다.

그것은 간도, 통화, 길림의 동남만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항일연군 제1로군을 완전히 소탕해

버리기 위한 작전이었다.

관동군 제2독립수비대 사령관인 노조에 소장을 토벌대장으로 한 그 작전은

1939년 10월부터 41년 3월까지 실시하며, 7만 5천 명의 대병력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관동군이 그렇게 대병력을 동원하는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한만국경지역에서 활동하는 제1로군이 아직까지도 항일연군 중에서는 제일 강력했고,

둘째는 39년 노먼한에서 소련군과 무력충돌이 생겼는데 일본군이 패한 사건이 생겼다.

그 패배는 일본군에게 큰 충격이었고, 만약에 소련과의 전쟁을 생각할 때

후방기지 겸 작전기지로서의 만주가 완벽한 치안을 확보한 가운데 안정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이 토벌작전에서 병력만 어마어마하게 동원된 것이 아니었다.

그전의 포위, 차단, 섬멸작전을 강화하는 한편으로 진드기 전법을 새로 전개했다.

진드기 전법이란 토벌전 특수전 같은 데서 단련되고 숙달된 강한 병사들로 특수공작대를

조직하여 항일연군을 찾아다니며 추격하고 또 추격해서 일각의 여유도 주지 않고 지쳐

쓰러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건 포위작전에서 유격대의 소부대가 쉽게 빠져나가는 허점을 보완해 유격대를 잡는

또다른 유격전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은 그들의 오래된 작전 중의 하나인 현상금도 내걸었다.

1로군 간부들에게 막대한 현상금이 붙은 전단이 사방에 뿌려졌다.

 양정우, 방대근, 조아범, 김일성, 진한장, 최현에게는 1만원, 박득범 방진성은 5천원,

위증민, 전광에게는 3천원씩 붙어 있었다.

1941년 1월로 토벌 4개월째를 맞은 1로군들은 많은 피해를 입은 채 소부대로 분산하여

일본군을 피하고 있었다.

부대 규모가 클수록 피해가 크기 때문이었다.

제3방면군 12단장 천상길은 5명으로 줄어든 부하들을 이끌고 노숙할 만한 곳을 찾고 있었다.

아침나절에 포위망을 뚫느라고 사력을 다한 데다 하루종일 추위 속에 눈길을 걸어 부하들은

기진맥진해 있었다.


"단장님, 저거, 저거 뭡니까?"


꽁꽁 얼어붙은 부하 하나가 말을 제대로 못하며 바위 쪽을 가리켰다.


"음, 왜놈들이 또 투항권고문을 붙인 거겠지!"


바위에 붙은 종이를 보며 천상길은 픽 웃었다.


"그래도 뭔지 가봐야지요? 찢어버려야 하니까요."


다른 부하의 말이었다.


"그러지."


천상길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하들을 앞장섰다.
바위 앞에 다다른 그들은 모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제1로군 군장 양정우가 체포되었다.'


주먹만큼씩 크게 쓴 글씨였다.


'이제 항일연군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두 번 째 줄이었다.


'일분군은 최강의 무적의 군대다.'


세 번 째 줄이었다.


'아래 편지를 장본인에게 전해 주라.'


네 번 째 줄 밑에는 봉투 하나가 붙어 있었다.


"단장님. 이게 정말일까요?"


"군장님이…"


부하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부하들도 불안하고 두려운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


"아니야!"


천상길이 일단 부정했다 군장이 체포되면 1로군은 끝장나는 것이었다.

1로군이 끝장나면 항일연군은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로군 대원들은 누구나 1로군이 항일연군 제일 강하다는 것을 자부심으로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왜놈들의 조작이야. 지금 동지들은 불안해하고 무서워하고 있지!

바로 그점을 노리고 왜놈들이 조작한 거야.

우리 대원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동요하고 실망하게 만들려고 말야.

왜놈들이 얼마나 악질적인지 겪어봐서 잘 알잖아. 절대로 속아서는 안 돼!"


천상길은 부하들 하나하나를 응시하며 강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조작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욱 강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부터라도 그 부정의 힘에 의지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살을 에는 추위와 눈구덩이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예, 맞습니다. 이건 틀림없이 왜놈들이 꾸며낸 거짓말입니다.

우리 경호여단이 얼마나 강한데 군장님이 체포됐겠어요."
한 부하의 말에 천상길은 살아난 기분이었다.

자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것보다는 부하 쪽에서 하는 것이 더 믿음이 가는 것이다.
천상길은 아까보다 더 힘차게 말하며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그의 손을 감싸고 있는 벙어리장갑은 장갑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낡고 찢어져

속에서 솜이 드러나고 있었다.

때 절고 헐어빠진 그들의 옷도 나뭇가지며 가시 같은 것들에 찢겨져 장갑 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헌데 이 편지는 뭘까요?"


"어디 또 수작을 했는지 보자."


천상길은 기세좋게 두껍고 큰 종이를 북 찢으며 말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 편지를 부하들 앞에서 보고 싶지 않았다.

또 무슨 내용으로 대원들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마음을 동요시킬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편지를 못 보게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더 궁금해지고 의심스러워해 오히려 상호간의 신뢰가 깨질 수 있었다.
천상길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봉투에서 편지를 꺼냈다.

한 장의 편지는 연필로, 그 씌여져 있었다.


간청서
소인의 차남 전춘생은 19살 철없는 젊은 혈기로 가출하여 항일연군에 가담하였습니다.

하오나 항일연군은 대일본군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나날이 수없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더욱이나 항일연군은 속산에 갇혀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고, 입을 것이 없어 이 엄동설한에

떨고 있다는 소문도 전해 듣고 있습니다.

그런 소문들을 듣고 부모로소 차마 밥을 넘길 수가 없고, 불 땐 더운 방에서 잠도 잘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가망 없는 싸움에 귀한 목숨 헛되게 바릴까봐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애가 타고

피가 마릅니다.

그리고 더욱 몸이 나는 것은 옆집 김용칠이가 투항해서 아무벌도 받지 않고 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춘생이도 용칠이같이 살 수 있도록 어서 찾아주시기를 간절히 간청드리면서 이 글월을 올립니다.
천상길은 머리가 띵해지면서 이 편지가 사실인지 아닌지 혼란이 일어났다.

어찌 살다보면 사실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조작 같기도 했다.

비틀비틀 잘 쓰지 못한 연필글씨와 애타하는 부모의 마음을 보면 사실이었고,

그 글이 막히는 데 없이 매끈하게 잘 지어진 것을 보면 조작이었다.

그러나 어느 쪽인지 자신 있게 분간이 되지 않았다.

천상길은 그 편지를 찢어 버리지 않고 본 것을 후회했다.

자신이 분간이 잘 될 때 부하들은 더 말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고, 단장으로서 태도 결정만 남아 있었다.


"이런 흉악한 놈들, 제 놈들이 쓴 편지를 베끼게 했구나,

글씨를 이렇게 못 쓰는 사람이 어떻게 글을 이렇게 잘 짓나.

우리를 잡지를 못하니까 이제 별놈의 짓을 다하는구나."


천상길은 분노에 찬 얼굴로 말하며 편지를 부하들에게 내밀었다.
편지를 받아든 부하들은 서로 얼굴을 내밀었다. 천상길은 돌아서며 밤을 둘러보았다.

깊은 산에 적설만 가득하고 바람이 없으니 정적은 깊었다.

왜놈들에게 쫓기고 포위망을 뚫고 하면서 지난 석 달 동안 남만주에서

동만주를 오간 것이 네 차례였다.

이제 1월 한 달만 더 버티면 추위는 고비를 넘기게 되는 거였다.

추위만덜해도 버티기가 한수 쉬웠다.

그러나 문제는 식량과 물자였다.

금년에는 식량과 물자가 더욱 달렸다.

왜놈들이  많은 병역으로 더욱 철저하게 차단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쪽이 고통스러우면 왜놈들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차이가 있다면 왜놈들은 옷을 좀더 두툼하게 입고, 세끼 밥을 굶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왜놈들을 계속 끌고 다니며 고통을 당하게 하는 것이 이기는 방법이었다.
천상길은 아버지와 동생들의 모습을 지우며 어금니를 맞물었다.


"아직도 다 안 읽었나?"


천상길은 부하들 쪽으로 돌아섰다.


"아 예, 다 읽었습니다."


부하 하나가 편지를 내밀었다.


"어떤가, 내말이 맞나 틀리나?"


천상길은 편지를 북 찢으며 부하들을 휘둘러보았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은 시무룩하고 슬픈 기색이 드러나 있었다.


"왜 집 생각들이 나나? 당연히 나겠지.
그래, 맘놓고 집 생각들 해도 좋아.

그러나 정신 똑똑히 차려야 해. 지금 동지들이 집 생각을 하며 슬퍼하는 것,

그게 바로 왜놈들이 노리는 거야. 이런 약탈한 수법을 향수에 젖게 하고,

마음을 약하게 만들고, 전의를 잃게 하려는 것 아닌가. 내말이 틀리나?"


천상길은 편지를 겹치고 계속 찢어대며 부하들은 주시하고 있었다.


"예, 단장님 말이 맞습니다."


"그래요, 글씨에 비해 글이 너무 잘 지어진 것이 수상해요. 틀림없이 조작된 겁니다." 


응답은 이렇게 했지만 부하들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자아, 모두 편지는 잊어 보리도록 해. 왜놈들은 무슨 수를 써서든

우리를 망치려고 하니까 거기에 속아 넘어가선 안 돼.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고생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거니까. 알겠나!"


천상길은 엄한 눈초리로 부하들을 훑었다.


"옛."


"알겠습니다."


부하들이 차려 자세를 취했다.


"좋아.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노숙처를 찾자. 자아, 출발"


천상길의 판단은 틀리는 데가 없었다.

1로군 군장 양정우는 체포되지 않고 엄연히 경호원 보호 속에 부대를 총지휘하고 있었다.

다만 소부대로 유격전을 전개하고 있는 대원들이 양정우를 직접 보기가 어려울 뿐이었다.

편지도 가족에게 베껴 쓰기를 강요해서 만들어낸 조작이었다.

일본군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토벌전과 심리전을 병행시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참을 더 걸어 남쪽 박힌 바윗덩이들을 찾아냈다.

북풍막이에 안성맞춤이었고 등성이가 가까워 만일의 사태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들은 바위 밑의 눈을 발로 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져야만 그 위에 누워도 눈이 눅어지지 않았다.

눈이 다져지자 솔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

하얀 눈 위에서 솔잎들은 유난히도 푸르러 보였다.

그 솔잎들이 그들에겐 요였다.

솔가지를 깔면 눈의 냉기가 한결 덜했다.
그들은 바위를 등지고 웅크리고 앉았다.

천상길이 배낭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조그마한 광목자루였다.


"자아, 저녁들 먹어야지."


천상길이 자루에 손을 넣었다.
부하들이 헐어빠진 장갑들을 벗고 두 손을 모아 바가지를 만들었다.

 천상길이 옆의 부하들의 손바가지에 자루에서 꺼낸 것을 한 주먹 홀려주었다.

손가지에 담긴 것은 수수였다.

천상길은 부하들에게 차례로 수수한 주먹씩을 나눠주었다.

그러고 나니 자루는 훌쭉했다.


"자아, 다들 먹지."


그들은 손바가지에 입을 대고 날수수를 먹기 시작했다.
어둑살과 함께 바람이 일어나고 있었다.

잎 다 떨어진 실가지들 사이로 별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수수를 다 먹은 그들은 눈을 한 덩어리씩 뭉쳐서 먹었다.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어둠 저 멀리 나란히 줄을 선 불빛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군들의 야영지였다.

일본군들은 어두워지기만 하면 행동을 멈추고 횃불들을 밝혀댔다.

추워서 불을 피우는 것은 아니었다.

항일연군의 야간기습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누구 나하고 보초를 같이 설 사람."


천상길의 말에 부하 하나가 나섰다.


"다른 사람들은 이제 자도록."


네 사람은 솔가지 위에 나란히 누웠다.

그리고 두루마리 담요 한 장을 펴서 덮었다.

그들은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곧 잠이 들었다.
보초는 한 시간 간격으로 두 사람씩 교대했다.

동사를 방지하기 위해서 시간 간격이 짧았다.

자정 무렵이었다.


탕!

탕!


두 보초가 잠든 누군가를 향해 총을 쏘아댔다.

그리고 그들은 어둠 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 뭐냐, 뭐냐!"


"무, 무슨 일이냐!"


놀라고 당황한 목소리들이 뒤엉켰다.


"으으으…, 으윽…"


어둠 속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단장님이다!"


"아니, 단장님을!"


"단장님…"


"단장님…"


신음소리가 끊어 다.

어둠속에서 바람소리만 거칠었다.
한편, 경위여단에서는 긴급사태가 벌어져 있었다.

포위망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참모장 정수룡이 일본군에 체포된 것이다.

1로군의 정보가 토벌대에게 고스란히 넘어가게 된 위기였다.
방대근은 긴급연락대를 편성해 직접 지휘하고 나섰다.

참모장의 정보로 토벌대가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각 방면에게 이동명령을 전달해야 했다.

각 방면군의 사령부 밀영 위치가 토벌대에게 알려지는 경우 치명타를 입게 되는 것이었다.

촌각을 다투는 긴급작전이었다.
방대근은 2명 1개조로 짠 연락병들을 각 방면군에 띄웠다.

그리고 행군을 계속하며 2차로 연락병들을 보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연락병의 임무란 중요하고도 위험했다.

정보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행동도 혼자나 많아야 둘이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돌발사고가 빈번한 유격전에서 찾아간 부대가 어디론가 이동해 버린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때부터 연락병들에게는 더 심한 고통과 위험이 따르게 되었다.

이동한 부대를 찾으려고 산속을 헤매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길을 잃고 조난당하기도 하고, 포위에 걸려 사살당하기도 했고,

식량이 떨어져 굶어죽기도 했다.

그래서 연락병들을 몸이 튼튼하고 정신무장이 견고하며,

산속의 지지를 잘 알아야 하는 것을 기본 조건으로 했다.

 임무의 중요성만큼 연락병들은 특별대우를 했고,

일반 대원들도 연락병이라면 다르게 생각했다.
방대근은 부하 네 명을 데리고 미리 저 둔 두 군데 비상지점에서 연락병들을 규합했다.

예정된 엿새째까지 무사히 돌아온 연락병들은 8명이었다. 2

개조 4명이 변을 당한 것이었다.
방대근은 10일 만에 경위여단의 밀영으로 새로 정한 곳을 찾아가씨다.

그런데 그곳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었다.

또 돌발사태가 터져 어디 다른 곳으로 옮겨갔는지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사람들이 머물렀다 떠난 흔적은 없었다.


'이게 어찌 된 것인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방대근은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 지금부터 본대를 찾아나선다. 모두 각오를 단단히 하도록!"


방대근은 부하들에게 비장하게 말했다.


부하들도 차려 자세로 총을 굳게 잡았다.


방대근은 열흘 전의 활동지역으로 은밀하게 접근해 갔다.

위험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부대의 종적을 찾아내자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대장님, 저것 좀 보십시오."


옆을 따르는 부하가 방대근에게 낮게 속삭였다.

그 부하가 손가락질한 비탈에는 완전히 발가벗겨진 시체 세 구가 눈 위에 나뒹굴어져 있었다.


"음, 탐색조가 기습을 당헌 모양이군."


방대근의 담담한 대꾸였다.


그들은 경계를 하며 시체 옆으로 다가갔다.


"이삼 일 지낸 것 같군."


시체와 그 주위를 살피며 방대근이 중얼거렸다.

 시체들 위에는 눈가루가 살얼음 끼듯 덮여 있었고,

핏자국들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눈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시체에 내린 눈은 거센 바람에 쌓이지 못하고 날아간 것이다.


'탐색조가 나슨 것이 이상헌디…'


방대근은 사방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발가벗겨진 일본군의 시체는 가끔 볼 수 있었다.

그건 물자가 부족한 유격대들이 총에서부터 양말까지 모조리 벗겨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일본군이 시체를 놓고 도망칠 만큼 다급해지는 경우는 대개 10명 미만의 정찰대가

탐색을 하다가 기습당할 때였다.

그러나 대규모 병력으로 포위작전을 시도하고 있는 일본군이 정찰대를 투입하는 것은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건 유격대의 활동거점들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에서 섬멸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취하는 작전이었던 것이다.


'이상하다…, 정작 경위여단의 이동상호아이 적에게 포착되었단 말인가?

제일 먼저 대비하고 나선 경위여단이 그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적의 탐색조가 투입된 것은 무엇인가?…'


방대근은 혼란이 일어났다.
어쨌든 탐색조가 투입된 것은 이쪽 정보가 누설되었다는 것이다.
방대근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 결론과 함께 방대근의 머릿속에서는 불길한 생각이 스쳐갔다.

탐색조 뒤에는 대부대가 따르게 마련이었다.

새로 정한 밀영에 자취도 없는 부대와 일본군 대부대가 정면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대근은 머리를 흔들며 그 불길한 생각을 떼치려고 했다.


"자아, 출발!"


방대근은 전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부대를 출발시켰다.
방대근 부대는 이틀 동안 산줄기를 넘고 또 넘었다.

그러나 부대의 종적은 묘연하기만 했다.
사흘째 되는 날 방대근은 어느 등성이에서 20여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건 바로 경위여단 대원들이었다.

어지럽게 흩어진 그 시체들은 포위상태에서 싸우다가 죽은 것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방대근은 정신없이 시체들을 확인해 나갔다.

혹시 조카 삼봉이가 있지 않나 해서였다.

삼봉이가 후방대에서 전투대로 옮긴 것이 1년 반이었다.

방대근은 막혔던 숨을 토해냈다.

다행히 삼봉이는 없었다.
20여 명이 한꺼번에 죽었다는 것은 경위여단의 정보가 누설되었다는 확증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많은 사람이 몰살을 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어떤 간부가 체포된 것인가? 누가 또 투항을 한 것인가?…'


방대근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부하들은 두려움에 찬 얼굴로 대장의 눈치만 살폈다.


"다덜 심내. 본대가 어디든 있을 것잉게"


방대근은 부하들에게 이 말밖에 할 것이 없었다.
이튿날 열 구가 넘는 시체를 발견했다.

방대근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절망을 느꼈다.

경위여단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 너무 뚜렷했던 것이다.

그 시체들의 위치로 보아 경위여단은 이동 중에 집중적인 공격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그건 정보 누출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는 증거였다.
방대근은 또 시체를 확인해 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삼봉아!"


어느 시체의 얼굴을 들어보던 방대근이 부르짖었다.
오삼봉은 눈에 엎드린 채 죽어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방아쇠에 걸려 있었다.

 방대근의 흐려진 시야에는 큰 누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생으로 시든 꽃이 되어 있었던 그 모습이 가슴을 쓰라리게 했다.

방대근은 눈으로나마 조카를 덮어주었다.
방대근 부대는 한 주먹씩 하루에 나누어먹던 잡곡마저 바닥이 났다.

그들은 눈으로 배를 채워가며 이틀을 헤맨 끝에 10여명의 대원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 부대는 정치위원인 중국사람 한인화가 이끌고 있었다.


"말도 말아요, 우리 경위여단은 산산조각이 난 겁니다.

글쎄 호위분대장놈이 부대자금 1만원까지 훔쳐가지고 투항을 해버렸지 뭡니까.

그놈 때문에 포위를 당하는데…, 참 우리 중국놈들 하는 짓하고는,

조선동지들한테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정치위원의 침통한 말이었다.


"그럼 군장님은 어찌 됐습니까?"


방대근은 너무 큰 충격과 함께 양정우 장군의 안부를 물었다.

정치위원이 고개를 떨구었다.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사력을 다해 찾아 헤매고 있는데 행방불명입니다."


방대근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대장을 잃고 행방불명된 부대… 경위여단은 이미 난파선이었고 바퀴 빠진 수레였다.

호위분대장은 바로 양정우 장군의 호위를 맡은 책임자였다.

그리고 경위여단의 기관총대장이기도 했다.

그는 많은 공을 세우기도 했는데 어째서 변심을 하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앞날이 그렇게도 가망 없이 느껴졌던 것일까? 부대자금 1만원까지 훔쳐가다니,

도대체 그게 어디 인간인가. 아니, 그런 돈 욕심으로 그놈은 양 장군과 나한테

붙은 현상금까지 타먹으려고 했겠지?

아니야, 어쩌면 그놈은 애초에 왜놈들 첩자로 잠입했던 것은 아닐까?'
방대근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방 동지.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정치위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예, 계속 군장님을 찾고 대원들을 찾아야지요. 군장님도 우릴 찾고 계실 겁니다."


방대근은 지체 없이 힘주어 말했다.


"고맙소, 그렇게 합시다. 이제 방 동지와 합류했으니 경위여단은 재생하게 된 것이오."


정치위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럼요, 경위여단은 건재합니다."


방대근은 정치위원의 손을 잡았다.

정치위원도 방대근의 손을 맞잡으며 부를 떨었다.
그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집단부락을 습격해 가며 열흘이 넘도록 양정우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양정우의 자취는 묘연했다. 2월도 중순에 이르러 있었다.


"우리 병력이 너무 약하니까 1방면군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을 것같소."


어느 날 정치위원이 꺼낸 말이었다.

그 말은 양정우 찾기를 그만 포기하자는 뜻이었다.

그건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예, 그러지요."


방대근은 아무런 이의 없이 동의했다.

그동안 산속을 무작정 해메 다닌 것이 아니었다.

그전에 사용했던 자신들의 비밀통로를 따라 뒤질 만큼 다 뒤졌던 것이다.

살아 있다면 못 만났을 리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더라도 정치위원 결정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1방면군쪽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통화현에서 환인현 일대의 지역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옳기는 것이었다.

그동안 이 지역을 고수한 것은 양정우 군장의 뜻이기도 했다.

양정우 군장은 자꾸 서쪽으로 진출해서 8로군과 연결을 맺으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다름아닌 당중앙과 연결하려는 의도였다.

다시 국공합작으로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공산당의 홍군은

홍군 깃발을 내리고 국민당군 내의 제 8로군으로 변모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양정우의 그야말로 끔에 지나지 않았다.

 8로군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고, 그 사이에는 일본군들이 첩첩이었던 것이다.

그 시도로 병력을 꽤나 잃었고, 특히 조선대원들의 반발을 샀다.

조선대원들은 조선 땅이 멀어지는 곳으로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1방면군 쪽으로 이동한 방대근은 송가원으로부터 찾아보았다.


"송 동지, 무사혔소 잉!"


"아니, 방 대장님 아니십니까!"


송가원이 반가움 넘치는 얼굴로 물었다.


"도망 왔소."


방대근이 씨익 웃었다.

 
"이쪽보다 공격이 심한 모양이지요?"


"아니오, 변절자 땜시 경위여단은 궤멸상태가 되야부렀소."


"그것 참…, 워낙 견뎌내기가 어려우니까요."


송가원은 놀라지 않았지만 괴로운 듯 얼굴이 찡그려졌다.


"왜놈덜 작전이 맞어 들어가고 있소."


"그놈들, 영리하다고들 해야 할지 교활하다고 해야 할지.

금년부터는 여자 사진에다 옷까지 내걸지 않았습니까.

최악의 조건에서 시달리는 젊은 사람들 앞에 그따위 짓들을 하니…"


송가원은 고개를 저었다.
일본군들은 풍만한 여자들의 알몸 사진을 투항권고문과 함께 붙였고,

옷들을 나무에 걸어놓기도 했던 것이다.

갈수록 그 방법이 자극적이고 다양해지고 있었다.


"참, 왜놈덜헌티 요상시런 것 많이 배 운게 좋소."


방대근은 쓰디쓰게 웃고는,


"근디 말이여. 이,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먼 길림으로 가시오."


목소리를 낮추며 송가원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렇게 전망이 안 좋은가요?"


송가원은 부대들이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런 말을 들으니 더 절망스러웠다.


"짐작언 허겄지만, 시방 어떤 부대고 풍전등화요."


방대근은 말을 끝내기 바쁘게 자리를 떴다.
그런데 수국이가 속해 있는 이동후방대는 이틀 전부터 일본군들에게 기고 있었다.

최대한의 안전지대를 골라가며 어렵게 구한 물자로 전투병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던

후방대의 아지트가 일본군들에게 발각된 것이었다.

후방대 23명 남자는 여섯뿐이었다.

그들도 전투하기에는 어렵게 부상치료를 받았거나 몸이 약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고 있는 일본군들은 2백여 명이었다.

후방대원들은 눈보라 속을 밤낮없이 내닫고 있었다.

그들은 산을 넘고 넘으면서 뒤따오는 일본군들에만 신경 쓰는 것이 아니었다.

앞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일본군도 살펴야 했다.

무턱대고 내닫기만 하다가 다른 일본군 부대와 맞딱뜨리면 꼼짝없이 포위당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일본군들을 떼치기 위해 이틀 밤을 한숨도 자지 않고 줄기차게 산을 타넘었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끈질기게 따라오고 있었다.

진드기 전법이었다.

그들은 사흘째는 더 견디지 못하고 한숨씩 자기로 했다.

눈보라는 치고 먹는 것은 날곡식을 씹을 뿐인데다가 잠까지 자지 못하니

기진맥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바위를 등지고 서로 붙어 앉아 절반씩 교대로 붙이기로 했다.

보초도 서야 했고, 오래 잠들어선 안 되었던 것이다.

총을 끌어안은 수국이와 필녀는 눈보라치는 혹한은 아랑곳없이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었다.
두 시간 정도씩 눈을 붙인 그들은 다시 출발을 서둘렀다. 그런데 두 사람이 모자랐다.

바위에 등을 기대고 쪼그려 앉은 두 사람의 몸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몸이 약한 두 남자는 괴로워 추위를 더 이겨내지 못한 것이었다.


"양식은 떨어져 가고, 이러다간 안 되겠소. 유인작전을 써봅시다."


날이 밝자 후방대장이 말했다.
발이 빠르고 총을 잘 쏘는 사람으로 8명을 골라냈다.

제일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필녀였다.

나이든 필녀가 나서자 젊은 여자들이 다투어 나섰다.


"니넌 안돼야."


필녀가 한 여자의 가슴을 손으로 막았다.


"…"


수국이는 필녀를 노려보았다.


"젊은 것덜 삭신만허겼냐."


필녀가 달래듯이 웃으며 말했다.



수국이는 표정 없이 물러섰다.


"자아, 나머지 대원들은 왼쪽 등성이를 타고 가시오. 이따가 다시 만납시다."


후방대장이 선발대 출발을 명령했다.
유인조는 선발대의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며 자신들의 모습을 노출시키기 시작했다.

일본군들이 보이자 유인조는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군들은 즉각적으로 응사해 왔다.

유인조는 계속 선발대의 반대방향으로 이동하며 사격을 했다.
일본군들의 추격은 맹렬해지고 있었다.

유인조는 더욱 빨리 이동하며 산등성이 하나를 넘었다.

그리고 총소리를 뚝 끊었다.

그들은 골짜기 쪽으로 위장 발자국을 냈다.

그런 다음 방향을 반대쪽으로 틀어 사력을 다해 대닫기 시작했다.

유인조가 선발대와 합류해서 다소 안심하고 하룻밤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따돌려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줄기차게 쫓아오고 있었다.

그런대 후방대에 위기가 닥쳤다. 아껴가며 먹은 양식이 동나고 말았다.


"참 요상허이, 어째 우리 편얼 요리 만날 수가 없당가."


필녀가 안타깝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만날 때도 되었는데…"


다른 여자대원이 초조한 기색으로 말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말할 기운도 없는 것처럼 묵묵히 걷기만 했다.

유격대를 만나기를 바라는 것은 그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유격대의 수는 현격하게 줄었고, 산악은 골골이 첩첩이 깊고 넓기만 했다.
날곡식이나마 입에 넣은 것이 없게 되자 그들은 표나게 지쳐갔다.

행군 속도가 느려지고 쓰러지는 사람이 자주 생겼다.

그럴수록 일본군의 위협은 가까워졌다.
그들은 다시 유인작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몇 시간의 여유를 가졌을 뿐 일본군은 계속 쫓아오고 있었다.


"동지, 강 동지 정신차려요."


뒤따르던 대원이 그 대원을 흔들었다.

눈에 얼굴을 박은 그 대원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니, 강 동지!"


그 여자대원의 몸은 거짓말처럼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다.

혹한 속에서 몸이 얼고 얼어 숨이 끊어진 것이었다.
7일째 되는 날 그들은 일본군과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굶주림과 피로에 지칠 대로 지쳐 일본군에게 따라잡히게 된 것이다.


"다들 힘내시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갑시다."


앞장선 후방대장이 대원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지점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일본군들은 벌써 총을 쏘아대며 산비탈을 오르고 있었다.


"됐소, 여기 엎드리시오, 다음 대원…"


후방대장은 대원들의 사격위치를 정해 나갔다.

눈보라는 줄기차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가로로 산개한 일본군들은 아무런 거침없이 진격해 오고 있었다.

그건 포위대형이었다.


"여러분, 저놈들 하는 짓 잘 알지요? 여자들 잡으면 강간하고 나서 죽이는 거.

내가 총을 쏠 때까지 모두 기다리시오."


후방대장의 외침이 눈보라 속에 흩어지고 있었다.
일본군들이 차츰 사격권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필녀는 총을 더 바짝 끌어당기며 광대뼈를 밀착시켰다.

바로 그 옆에서 수국이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있었다.


탕!


"사겨억 개시!"


대원들은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눈보라 속에 총소리들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산이 울리면서 겹메아리가 파장짓고 있었다.

바람소리에 섞이는 그 메아리들은 슬픈 울음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대원들은 뭐라고 소리치며 돌진을 감행하고 있었다.
대원들은 정신없이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일본군들이 여기저기서 픽픽 쓰러지고 고꾸라지고 있었다.


"그려, 그려, 느그덜 죽고 나 죽자!"


필녀는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이를 갈아붙였다.


"엄니, 엄니…"


수국이는 일본군들이 쓰러지고 비탈을 굴러 내릴 때마다 어머니를 불렀다.

비로소 어머니의 원수를 제대로 갚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쾅!


수류탄이 터졌다. 섬광이 치뻗어 오르고 비명소리가 뒤엉켰다.


"워메!"


필녀가 소리치며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쾅!


필녀와 수국이의 몸이 들썩했다.
수류탄은 연거푸 터지고 있었다.
후방대원들 쪽에서는 더 이상 총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일본군들이 환성을 지르며 내닫고 있었다.
일본군들이 푸방대원들 쪽으로 몰려들고 있을 때였다.


탕! 탕!


두 방의 총성과 함께 일본군 두 명이 나뒹굴어졌다.
두 다리가 절반씩 없어진 여자가 바위에 기댄 채 총을 쏘고 있었다.

그건 필녀였다.
일본군들의 총이 필녀에게 집중되었다.

필녀는 총을 떨구며 눈 위에 머리를 박았다.


"서언사상니임…"


필녀는 철망 사이로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송수익 선생을 보고 있었다.
3월 중순을 넘기면서 날씨는 완연히 풀리고 있었다.

깊은 산중의 눈도 녹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군들의 토벌은 늦추어지지 않았고 방대근은 6명으로 줄어든

부하를 이끌고 동만주 돈화 북쪽에 이르러 있었다.

적과 싸우고 피하면서 산악 1천 5백리를 이동해 온 것이다.
어느 날 방대근은 항일연군 1개 분대를 만났다.

그들은 제5로군 소속이었다.


"이 길로 쏘련으로 이동하시오. 우리도 한 가지 임무만 끝내면 쏘련으로 갈거요,"


중국인 분대장의 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누가 그런 결정을 내렸단 말이오?"


방대근은 믿을 수 없는 말이라서 연달아 물었다.


"우리 군장님이시오. 그걸 대원들에게 알려 주라고 하셨소."


"주보중 군장님께서…"


방대근은 항일연군의 활동이 이제 막을 내렸음을 알았다.

주보중 장군의 결정이라면 당의 결정이었다.

주보중 장군은 5로군을 맡고 있는 동시에 동북항일연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것이다.

그는 당중앙의 핵심인 주은래가 만주로 파견한 인물이었다.


"쏘련으로 후퇴…"


방대근은 고개를 저었다.

혹하사변의 기억이 너무나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다시는 그런 일을 당할 수는 없었다.
방대근은 하룻밤을 골똘히 생각했다.

항일연군은 이제 궤멸상태였다.
쏘련으로 가지 않으려면 단 한 군데. 그 반대쪽으로 가야 했다.

그쪽 어딘가에 지난날의 의열단 세력과 김원봉이 있었다.

그쪽으로 간다면 부하들은 어찌할 것인가.

그쪽은 중국과 일본이 한창 전쟁 중이었다.

무장한 7명이 일본군의 경계를 뚫고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총을 다 버린다고 해도 일곱이 한꺼번에 행동하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위험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이었다.


"동지덜, 잘 들으시오. 어지께 이얘기 들어서 다 알고 있겄지만 우리 항일연군은

쏘련으로 후퇴하고 있소.

인자 항일연군이 만주서 헐 일인 끝난 것이오.

헌디 나가 생각허기로넌 쏘련으로 가봤자 환영받을 것 같지 않고,

그리 할 일도 없을 것 같소. 그려서 난 안가기로 작정혔소.

그러면 동지덜헌테 남은 길은 두 가지요.

 첫째는 쏘련으로 가는 것이고,

둘째는 각자 집으로 돌아가 후일얼 기약하는 것이오.

그것은 동지덜 자유의사에 맺길 것이니 좋을 대로 하시오."


대원들은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은 오래 계속되었다.


"어째 말들이 없소?"


"말하나마나지요. 대장님이 안 가시는데 누가 쏘련엘 가겠습니까?"


어느 대원의 단호한 말이었다.
방대근은 대원들을 살펴보았다

모두 같은 뜻을 나타내고 있었다.


"알갔소. 그러면 우리 후일얼 기약하도록 합시다.

총을  땅에 묻고 여그서 뜹시다.

동지덜 노자라도 장만헐 사람얼 찾어가야 헝게."


방대근은 착잡하게 말했고, 대원들은 모두 고개를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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