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43. 변절자는 용서 말라

오늘의 쉼터 2017. 6. 26. 23:30

143. 변절자는 용서 말라



"안녕하시오, 주간 선생."


야유조와 시비조가 뒤섞인 목소리에 송중원은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예상대로 형사 우자마였다.

그는 작달만한 키에 어울리지 않게 거만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물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송중원은 반가운 척하며 펜을 놓고 일어섰다.
직원들이 일을 하는 척하며 우지마에게 빠른 눈총을 쏘고 있었다.


"앉으시지요."


송중원은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별일 없소?"


우지마가 의자에 털썩 앉으며 형사 특유의 상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의 눈길은 재빠르게 송중원을 훑고 있었다.


"예, 아무 일도 없습니다."


송중원은 우지마의 눈을 쳐다보며 아주 우호적인 웃음을 보냈다.

그런 자들을 대할 때는 눈길을 피해서는 안 되고,

그러면서 당신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송중원은 잘 알고 있었다.

눈길을 피하면 당장 의심을 하려고 들었다.

고문하는 자들이 고문에 굴복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해

으레 사적 감정을 돌발시켰다.

그때부터 고문은 극치를 이루는 것이었다.


"당신은 항상 아무 일도 없지."


아까의 주간 선생이라는 호칭도 묘한 시비조였지만 당신이란 호칭은 노골적인 시비조였다.

 
"예, 아시다시피 잡지만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송중원은 더욱 부드럽게 웃으며 일본식으로 머리를 연거푸 조아렸다.
누가 아나, 그 속을 우지마는 흘리듯 말하면서도 눈은 싸늘하게 송중원을 노려보았다.


"무슨 말씀을 그리 서운하게 하십니까. 모범적으로 살고 있는 것 다 아시면서."


송중원은 정색을 했다. 이런 경우 어물거렸다간 영락없이 트집거리가 되는 것이었다.


"거 이번에 공포된 조선인 씨명에 관한 건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우지마는 묘하게 웃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야 내선일체를 촉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조치로 시기적절한 거지요."


송중원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그게 진심인가?"


"예, 그게 사실 아닙니까."


"그럼 창씨개명을 실시하게 되면 당신은 뭘로 바꿀 거야?"


우지마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야 좋고 마음에 드는 것을 더 생각해 봐야지요.

자식들한테까지 전해 줄 건데 함부로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흥, 네놈 얕은 수에 내가 걸려들 것 같으냐.'


송중원은 여유 있게 말했다.


"아, 그건 그렇지. 자식들한테까지 전해 주려면 성이 좋아야지."


우리마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잡지에 뭐 이상한 건 없고?"


그는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예, 없습니다."


"그래 없어야지, 총독부에서 걸려 날 뒷북치게 만들면 우리 좋은 사이가 박살나는 거니까."


우지마는 노골적으로 협박하고 있었다.


"그런 염려 전혀 하지 마십시오."


송중원은 능란하게 받아넘기고 있었다.


"사장은 어디 갔소?"


"예, 외출했습니다."


"송 상이 사장만 같아도 좋은데…"


우지마를 배웅한 송중원은 뜨거운 탕 안에 들어앉았다가 나온 것처럼

전신에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곤혹스럽고 복잡한 심정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놈이 더럽고 징그럽기도 했고, 그러지 말자고 하면서도

그놈을 대하는 것은 전혀 숙달되지가 않았다.


"창씨개명에 우지마로 하겠다고 그러시지 그랬어요.

그놈 좋아하는 꼴좀 보게 말입니다."


한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흠, 미처 그 생각을 못했었군."


송중원이 담배를 빨며 쓰게 웃었다.


"그랬으면 의형제 삼자고 덤비자고? 아유, 징그러."


다른 직원이 과장되게 어깨를 떨었다.


경리담당 여직원이 킥 웃으며 입을 가렸다.


"그 얼마나 영과이냐.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를 아우로 두는 건데."


처음의 직원이 정색을 한 척 말했고,


"그도 그렇네. 주간님께서 신세 편해질 절호의 기회를 놓치셨습니다.

아참, 아깝고 아깝습니다."


다른 직원이 가슴을 치는 시늉을 했다.


"그거 아깝네, 허허허…"


송중원은 일부러 소리 내서 웃었다.

직원들의 마음씀에 화답하려는 것이었다.
우지마가 한바탕 휘젓고 가면 직원들은 꼭 그런 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했던 것이다.
송중원은 여직원에게 수화기를 받아들였다.


"송 형인가? 나 일랑이네, 여기 길 건너 다방인데 좀 나올 수 있나?"


"자네가 다방에? 응, 곧 가지."


송중원은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윤일랑은 다방이고 카페를 영 싫어했다.

꼴사나운 서양풍이라는 것이었고, 맛도 없는 물 한잔에 두부 서너 모가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늘 궁색한 살림을 꾸려가는 소설가의 실감나는 계산법이었다.


"이 사람아, 차 두 잔이면 보리쌀이 반 되고, 두부가 대여섯 모고,

장작이 서너 다발인지 모르진 않겠지? 어디서 눈먼 던 생겼나?"


송중원은 자리 잡고 앉으며 윤일랑을 놀리듯이 말했다.


"흥, 찻값을 자네가 내지 않을 수 없을걸. 내 정보나 들어보고 그런말 하게."


윤일랑이 거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보? 어째 으스스하군…"


송중원은 담뱃갑을 윤일랑 앞에 놓으며 어서 말하라는 눈짓을 했다.


"놀라지 말게, 이 편지부터 읽어봐."


윤일랑은 다 낡은 외투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봉투를 꺼내 탁자에 던지고 담배를 빼들었다.
송중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를 쿵쿵 울리는 충격이 연속되고 있었다.


"이 사람아, 눈 떠 내가 놀라지 말라고 미리 말했잖은가."


윤일랑이 놀라듯이 말했다.


"아, 정말 해도 너무하는구나…"


송중원은 신음을 어금니에 물며 더디게 눈을 떴다.


"어떤가, 내가 굉장한 존재로 뵈지 않나? 자칭 조선의 톨스토이요,

조선의 대문호라고 하는 거물한테서 그런 편지까지 받으니 말이야."


윤일랑은 거드름을 피워 보았다.


"그렇군…"


송중원의 핏기없는 얼굴이 더 핼쓱했다.


"과연 자네한테 찻값을 물릴 만한 정보 아닌가."


"그래, 내가 밥까지 사지."


눈길을 떨구고 있는 송중원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자넨 역시 사리판단이 빨라서 좋아."


윤일랑이 필요 이상으로 키들키들 웃었다.


송중원은 담배를 빼들었다.


"이봐, 자네한테 그거 사약이야."


윤일랑이 답배를 뺏으려고 했다.


"빌어먹을, 어서 죽기나 했으면 좋겠네."


송중원은 거칠게 성냥을 그어댔다.


"현진건은 술권하는 사회라더니 자네한테 담배권하는 사회로구먼."


윤일랑은 연상 키들키들 웃었다.


"이런 편지… 자네한테만 보낸 건 아니겠지?"


송중원은 비로소 눈길을 들어 윤일랑을 빤히 쳐다보았다.


"물론이지, 등사만 안했다뿐이지 이름 바꿔가며 여럿한테 보냈지."


"어떤 반응들일까?


"어떠긴, 소설가 한우섭은 득달갈이 달려가 <만선일보>에 취직하는 추천서를 받았다는데."


"뭐라고!"


송중원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부렸다 .


"뭐 그리 놀랄 것 없네. 그보다 더한 사람들도 마구 친일파로 넘어가기 바쁜 판인걸."


윤일랑이 피식 웃었다.


"도대체 그 양반은 왜 그 모양일까. 친일을 하려면 혼자서나 할 일이지."


"참 순진하긴. 단체를 만들었으니 이젠 거느리는 세력이 있어얄 것 아닌가."


"그 세력 뭐하려고?"


"영리한 사람이 자꾸 왜 이러나. 그 편지에 자명하게 나와 있지 않은가.

자기 자신의 전도와 출세를 위해서지."


"글쎄, 그런 편지를 써야 할 정도로 압력을 받은 건가?"


"천만에, 그 사람은 솔선수범해서 충성을 하는 거야 진저,

 진심으로 일본사람이 되고 싶어한단 말일세. 자네도 보면 모르겠나?"


"빌어먹을, 무슨 그런 개같은 인종이 다 있어."


송중원은 담배를 잉끄리며 내뱉었다 .


"그렇지, 이제야 속 시훤한 말 한 마디하는군.

그러니까 그자를 친일파라고하는 건 큰 실례를 범하는 것인지나 알아두게나."


윤일랑은 특유의 비꼬는 어투가 나오고 있었다.


"그래, 우리가 아직도 조선사람 대접을 하고 있어서 그리 부르는 거지.

헌데 혹시 한우섭이 만나봤나?"


"뭐하러 만나, 노모가 중병이라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을 더 이상 굶주리게 할 수가 없었다. 출산한 아내가 굶고 있다.

자식들을 맹무식 만들 수 없느냐,

문학가가 지사는 아니지 않느냐,

예술과 지조는 별개 아니냐,

이따위 변절자들의 판에 박은 괴설이나 들어주려고 만나?"


윤일랑은 아이들이 숨가쁘게 구구단을 외워대는 것처럼 줄줄이 엮어대고는,


"자네 혹시 그놈한테 원고료 선불한 것 없나?"


그는 송중원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글쎄, 좀 있긴 있는데…"


"나 그럴 줄 알았어. 얼만데?"


"글쎄, 한 50원 되나…"


송중원의 얼굴이 곤혹스러웠다.


"야단났군, 아니 가만있자.

그런 놈들한테는 악착같이 받아내야 하네.

이젠 월급도 많이 받아야 될텐데… 그 돈 떼먹게 둘 수는 없잖은가.

결국 자네가 변상해 내야 할 판인데 그게 말이 되나?"


"글쎄,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북간도 용정으로 가버리는 건데 무슨 수로…"


"이 사람아, 자넨 그놈의 인정이 탈이야.

 용정 아니라 북경이라도 그렇지.

사흘거리로 편질 보내는 거야.

 제 놈도 열 번 받으면 토해내지 별수 있겠나."


"글쎄, 그 짓을 그거…"


"이보게, 자네가 못하겠으면 내가 자네 이름으로 편지를 대신 써주지.

 이건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응징이지.

그 돈 받기를 포기하고 자네가 뒤집어쓰는 건 값싼 인정주의도 못되고 악의 조장이야. 악."


윤일랑은 악을 쓰듯 악에다가 힘을 썼다.


"응징이라…, 알겠네 내가 편지하지."


송중원이 어이없다는 둣 웃었다.


"이 사람아, 자넬 위해서만이 아니야. 나도 분풀이 좀 하려고 그래,

그놈이 만주에 가서 독립투사들을 비적이니 공비니 해가며

필을 놀려댈 것을 생각하면 미치겠단 말이네.

그 짓해서 받은 돈으로 그 유명한 용정색주가에게 계집들 끼고 술이나 처먹고."


윤일랑의 눈에서는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윤일랑의 청결하고도 강건 의지를 보고 있었다.

궁핍한 생활조건으로 보자면 그도 얼마든지 한우섭처럼 될 수 있었다.

그가 마음대로 소설을 써내지 못하는 것도 그 청결하고 강건한 의지 때문이다.

나운규의 아리랑 같은 작품만을 머릿속에 수십 편 담고 있으니

소설로 써보았자 발표될 리가 없었다.

이미 잡지사마다 자체 검열 기준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알겠네, 자네한테 검열을 받도록 하지."


"흐흐, 느닷없이 검열관 감투 썼군."


낡은 외투깃을 타고 흐르는 윤일랑의 웃음이 쓸쓸하고도 허탈했다.


"그렇지 않아도 눈치 빠른 젊은 놈들이 자진해서 가입한다는 소문이던

그런 식으로 매수까지 하니 조선 문인협회도 총독부의 돈독한 사랑을 받을 날도 머지않았군."


간부 나리들 살판나게 생겼지.
두 사람은 마주보며 떫고 쓴 웃음을 지었다.
조선 문인협회는 두달 전인 10월 29일 이광수 최남선 김동환 이태준 박영희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친일문학단체였다.


"그나저나 자넨 요새 어떤가?"


윤일랑이 이야기를 바꾸었다.


"글쎄, 사장이 잡지 발행에 흥미가 식어 가는지.

내가 자꾸 싫어지는 것인지… 하여튼 좋지가 않네."


"젠장, 딴 사업에 손댄다는 소문은?"


"무슨 돈벌이 회사를 차리긴 차릴 모양인데, 난 전혀 관심 없네."


"그자도 친일파 다 된 건가?"


"뭐, 친일파까지는 모르겠고, 처음과 달라서 마음이 변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


"그자도 별 수 없는 속물이로군."


"어쩌겠나. 윗물이 더러워져 있으니."


"그래, 아랫사람들이 핑계 대고 변명하는 게 대 유행이니까,

혹시 잡지를 그만두는 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만하면 만석꾼 자식으로 돈 바르게 쓴 셈이고, 잡지도 오래 해온 편 아닌가."


송중원의 말은 담담했다.


"그리 되면 자네가 문제 아닌가."


"나도 친일 하지 뭐."


"농담도 아니고, 자넨 나보다 장가를 일찍 들어 한창 돈 들어갈 때 아닌가."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지."


"잇몸이 있어야 말이지."


"그 얘긴 그만해. 발등에 떨어진 불도 아닌데."


송중원이 괴로운 듯 말했다.


"알겠네. 좌우간 숨 막히는 일들뿐이니 어찌 살지.

이상처럼 자식 없이 일찍 죽는 게 제일이야,"


"체, 왜 갑자기 경멸해 마지않던 이상 타령이야.

자네도 염세주의로 기우나? 그것도 문인협회 가입 동기의 하나가 될 수 있는데…"


"웬일인가. 그럴듯한 농담을 다 하고, 이상의 글 태반은 서양놈들 것 모방이지만

죽음 하나는 산뜻한 게 창조적인 데가 있거든."


"가세,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하지."


"역시 내 정보가치가 술까지 뻗치는군."


윤일랑은 쿡쿡거리며 일어섰다.


"그걸 갑자기 그대로 실어버리는 못하는 게 한이네."


"염려 말게. 내 자식한테까지 물려줄 테니까.

내 자식대에 가서는 설마 이 놈의 세상이 끝장나지 않겠어?"


"응, 그것도 참 좋은 방법이군.

우리 다 죽고 나서 그 편지가 공개되면 참 가관이겠네.

해방이 된  땅에서 얼마나 비판을 당하고 얼마나 조롱거리가 되겠나. 잘 보관해 두게."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내려가면서 송중원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기다려라 역사의 심판을!"


윤일랑이 팔을 뻗치며 웅변조를 흉내냈다.
해거름의 거리에 몸을 웅크린 사람들이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길가에는 지저분한 눈이 쌓여 있었다.


식민의 거리에 겨울바람은 차고
묶인 삶들은 신음하는데
외로운 영혼의 방황은
오늘도 어느 거리에 그림자를 드리우는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길을 건너며 윤일랑이 읊었다.


"그거 괜찮은데. 누구 신가?"


"누구 시긴, 그냥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거지."


천상 문인인 윤일랑이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하는 괴로움과 외로움이

그 즉흥시 속에 있음을 송중원은 가슴 아프게 느끼고 있었다.


"또 한해가 다 가는군."


윤일랑이 외투깃을 세웠다.


"그러게…"


"곧 나오려나?"


"응 퇴근 시간이 다 됐네."


"그럼 나 여기 있겠네."


"추운데 들어가지."


"인사하기도 귀찮고, 여기가 좋네."


송중원은 편지를 가져온 윤일랑의 심정을 헤아리며 혼자 사무실로 올라갔다.

한해가 저물고 있었다. 윤일랑은 술병이 났는지 어쩐지 며칠째 아무 연락도 없었다.

그는 위장이 별로 좋지 않아 가끔 소다를 먹으면서도 술자리가 생기면 폭음을 했다.

그 폭음은 괴로움의 크기요 분량이었다.

송중원은 날마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말이고 해서 다소라도 원고료를 챙겨주려고 손쉽게 쓸 수 있는 글감을 마련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점심을 먹고 온 사장이 불렀다.


"주간님, 오늘 밤에 시간 어떠세요?"


"예, 별일 없습니다."


"잘됐군요. 몇 분하고 술자리를 하기로 했으니 주간님도 동석하시지요."


"예…"


송중원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사장은 더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되짚어 무슨 술자리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쪽에서 기다리는 예의를 갖추었으면 사장은 의당 누구와 무슨 일로 만나는

술자리라는 설명을 하는 것이 예의였던 것이다.

송중원은 그냥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석연찮기도 했고 기분이 언짢기도 했다.
그런데 술집에서 세 사람을 만나보고 송중원은 너무 놀랐다.

철학교수 황인곤, 소설가 이석진, 사회비평가 문신행이 전혀 뜻밖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두 가지 공통점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신문들에 자주 토막글을 쓰며 이름이 오르내리는 유명인사들이었고,

글에 아주 모호하고도 기묘하게 친일냄새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사장이 왜 이런 사람들에게 술집에서 술을 사는 것인지

송중원은 그 의도와 속셈을 찾아내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사장은 전에도 유명필지나 유명인사들과 더러 술자리를 같이 해왔었다.

그건 사장의 사교인 동시에 자기 과시였다.


"오늘도 그런 것인가?"


송중원은 그 이상을 짚어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꺼림칙한 기분은 가셔지지 않았다.

그 사람들의 성분이 마음에 걸렸고, 전에는 미리 의논을 했었던 것이다.


"중국은 언제쯤이나 다 차지하게 되겠습니까?"


사장 민동환의 말이었다.

일본이 당연히 이긴다는 전제로 한 그의 말투에 송중원은 어이가 없었다.


"그야 냉정하게 말하면 시간문제 아닙니까.

벌써 중국의 중요한 지역은 다 점령한 상태이니까요."


사회비평가 문신행이 자기 말의 신빙성을 높이려는 듯

냉정하게 라는 말을 내새워 내놓은 대답이었다.


"그렇습니다. 중국은 애초부터 일본의 적수가 못되었지요."


"늙고 병든 호랑이가 중국이고, 젊고 총 잘 쏘는 포수가 일본인가요,"


철학교수 황인곤이 유식을 과시하듯 말했다.


"그 비유가 참 철학적이고 문학적입니다.

일본이 아세아의 맹주가 될 날도 머지 않았지요."


소설가 이석진이 말했다.

기생들을 앞세우고 술상이 들어왔다.

술상 두 개가 옆구리를 붙이 나란히 놓았다.

기생들까지 10명이 둘러앉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거 문 빨리 닫아라."


민동환이 호령했다.
바깥날씨가 너무 추워 유리창 달린 마루가 있는데도 방으로 통바람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넓은 온돌방은 모두가 양복을 벗었음 만큼 방바닥이 따끈따끈했다.
기생들 다섯이 윗목에 나란히 서서 나비춤을 추듯이 차례로 인사를 했다.

손님 세 사람이 기생들을 고르고, 술자리가 짜여졌다.

기생들이 날렵하게 술을 따랐다.

두 개의 큰 교자상에는 온갖 술안주들이 자리다툼을 하듯 빽빽하게 차 있었다.
사장 민동환이 술잔을 치켜들며 목청 높여 말했다.


"자, 내선일체를 위하여."


'뭐라고…!'


송중원은 머리가 쿵 울리면서 정신이 아찔해지는 현기증을 느꼈다.


'나를 이렇게 몰다니!'


"자아, 앞으로 잘해 봅시다."


"예, 새 마음 새 뜻으로!"


"조선계는 잘됩 겁니다."


송중원은 왼손으로 상끝을 붙들었다.

가슴이 화끈거리며 열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목에서 피냄새가 났다.

그러나 그들을 따라 술잔을 비웠다.

술을 넘기자마자 구역질이 왈칵 솟아올랐다.

송중원은 다시 어금니를 맞물려 구역질을 참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기침까지 터지려고 했다.

도저히 더 참을 수가 없어 송중원은 입을 막고 일어섰다.
송중원은 변소로 가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기생이 종종 걸음 치며 따르고 있었다.
송중원은 숨을 헐떡이며 토악질을 했다.

술이 다시 넘어왔다.

그 술냄새가 마치 민동환의 말인 것처럼 역하게 느껴졌다.

 더 넘어오는 것은 없으면서도 구역질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송중원은 한 손으로 가슴을 다른 손으로 베를 싸잡고 몸부림했다.

가슴은 뜨거웠고 배는 뒤틀리고 있었다.

송중원은 거울을 보고 있었다.

거울도 웃고 있었다. 웃으니까 그 모습이 한결 좋아 보였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눈을 훔치고 얼굴을 닦았다.

머리카락도 간추렸다.

민동환이가 야비한 수법을 썼으면 이쪽에서는 당당한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기는 것이었다.

송중원은 옷차림까지 손질하고 변소에서 나왔다.


"선생님, 어디 많이 편찮으세요? 술이 얹히셨나요?"


그때까지 멀찍이 지켜서 있던 기생이 뛰어오며 하얀 손수건을 내밀었다.


"아니 괜찮아. 추운데 방에 들어가 있지 뭘…"


송중원은 수건을 받아들며 웃었다.

수심 깃들인 인상인 기생의 얼굴에 추위가 오소소 묻어 있었다.

전에 민동환이 벌인 술자리에서 한두 번 본적이 있었지만 이름 같은 것은 기억이 없었다.

 
"선생님, 무슨 약 좀 드릴까요?"


"아니, 됐소."


송중원은 걸음을 옮겨 놓았다.
양복 윗도리롸 외투가 방안에 있었다.

기생을 삼킬까 생각했다.

그러나 괜히 번잡해질 것 같았고, 당당한 태도도 못되었다.

손수 옷을 입고 나오기로 했다.


"이젠 잠꼬대 같은 독립 운운할 때가 아닙니다. 일본과 화합 방법을 모색할 때지요."


"그렇구말구요. 일본이 아세아의 맹주가 될 날이 닥쳤는데 눈치가 있어야지요."


"일본이 내선일체를 내세운 건 우리 입장에선 고맙기도 한 거지요."


"예, 천만다행입니다.

우리 조선사람들을 종으로 취급하지 않고 동등하게 받아들이는 건데,

우리가 의지할 데는 더 이상 좋은 게 없지 않습니까."


방에서 들려오는 거침없는 말들이었다.


'똥통에 구더기만도 못한 놈들…'


송중원은 방문을 옆으로 밀쳤다.


"아니, 어디 불편하신가요?"


황인곤이 기생을 껴안은 채 눈치 빠른 척 물었다.

술기운 내비친 그의 두톰한 얼굴에는 능란한 사교적 웃음이 는적이고 있었다.


"아닙니다."


송중원은 무표정하게 벽 쪽으로 걸어가 윗도리를 내력서 입고 외투를 팔에 걸었다.


"아니 주간님, 왜 이러십니까?"


민동환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의 처사를 파면으로 받아들이겠소."


송중원은 냉정한 대꾸였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변명할 것 업소. 서로 거북하니까."


송중원은 방을 나섰다.


"아니 주간님, 그게 아니고…"


민동환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그러나 민동환은 따라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 외투 입으세요."


대문까지 따라 나온 기생이 말했다.


"응, 그래야지."


송중원은 외투를 걸치려고 했다.

그런데 기생이 외투를 잡고 거들어주었다.


"선생님!…"


송중원은 느낌이 이상해서 고개를 돌렸다.

기생이 눈물 글썽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 수심이 더 깊어 보였다.

송중원은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기생은 정 많게도 파면당한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고맙소, 들어가시오."


송중원은 자신도 모르게 존대로 말하고는 돌아섰다.
어두원진 거리의 겨울바람은 차가웠다.

송중원은 몇 번이고 찬바람을 들이켰다.

가슴의 열기는 가셔지고 없었다.

어디 가서 술을 마시고 싶었다.

윤일랑이 있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집에까지 찾아가기는 너무 멀었다.

윤일랑은 뭐라고 할까?
기발한 독설을 퍼부어대겠지.

그는 이제 어느 잡지사를 찾아가나?

잡지마다 친일로 기울고, 문학지들은 순수문학이란 포장지로 친일을 눈가림하고,

 대다수의 문인들은 예술의 순수성을 내세우며 현실을 교묘하게 기피하며

자기합리화의 변명거리로 삼았다.
임마누엘 신부는 역시 예건을 정확히 했다.

그 인터뷰는 민동환의 반대로 게재하지 못했던 것이다.
송중원은 걸음을 멈추고 설죽의 술집 앞에 와 있는 것을 알았다.


"어머 선생님, 어서 오세요."


설죽이 반색을 했다.


"나 외상술 좀 마시러 왔소."


"예, 얼마든지요. 헌데 혼자세요?"


"가능하면 술동무도 좀 해주고요."


송중원은 허물어지듯이 주저앉았다.


"아니, 무슨 일이세요?"


"흥, 아주 조오은 일이오."


송중원은 허물거리고 웃었다.


"무슨 일이세요?"


설죽이 바싹 다가앉았다.


"나 파면당했소."


"어머!"


"오늘 술값 못 받을지도 모를 거요."


"왜 그랬어요? 그 사장도 변심했나요?"


"하, 귀신이 따로 없군. 허 형이 어째서 반했는지 이제 알겠소."


"너무 상심 마세요, 취직이야 또 하면 되니까요. 제가 곧 술상을 들여올께요."


설죽이 다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송중원은 눈을 감았다.

허탁이 못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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