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41, 입속의 노래

오늘의 쉼터 2017. 6. 26. 19:48

141, 입속의 노래



김건오는 중국인 대원과 함께 눈보라치는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

눈보라는 어찌나 심한지 몇 발짝 앞이 안보일 정도였다.

눈보라는 공중에서만 휘몰아치는 게 아니었다.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에 바람은 휘돌고 맴돌면서  땅에 쌓인 눈을 휩쓸어대며 눈발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눈보라가 하늘에서 내리는 것과  땅에서 솟는 것이 뒤엉키며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시야를 막고 있었다.
눈발은 무슨 가루처럼 작고 가늘었다.

너무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결에 산산이 바스러져 내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주나 시베리아에서는 함박눈을 보기가 어려웠다.

영하 40도의 혹한을 품고 휘몰아치는 바람은 그대로 칼날이었다.

바람이 세찬 만큼 잎이 다 떨어진 밀림의 가지들을 올리는 바람소리는 요란하고도 기괴했다.
온몸이 눈으로 뒤덮인 두 사람은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 해가며 산중턱을

 타고 있었다.

골짜기에는 거센 바람에 휘몰린 눈이 그 깊이는 알 수 없도록 쌓여 있었고,

자칫 잘못해서 굴러 떨어지게 되면 눈 속에 파묻혀 목숨이 위태로웠던 것이다.

두 사람은 포위망을 뚫다가 부대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사흘째 아무것도 못 먹고 지칠대로 치쳤으며 정신마저 혼미해져 있었다.


"김 동지, 저거…, 뭐지?"


중국인 대원이 비틀거리며 총끝으로 앞을 가리켰다.


"뭐? 저거…, 저거 뭐지?"


눈썹과 짧은 수염에 눈이 잔 묻은 김건오가 눈을 껌벅이며 되물었다.
몇 발짝 앞의 아름드리나무에 무언가가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무슨 종이가 붙어 있었다.
두 사람은 누가먼저라고 할 것 없이 그 쪽으로 허덕거리며 다가갔다.

그들의 눈에 먼저 띈 것은 종이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아, 아니, 이게 뭐야?"


"아니, 이게, 이게!"


그들의 말은 서로 겹쳐졌고, 서로를 쳐다보는 놀란 눈에는 묘한 광채가 어려 있었다.

조금 전의 흐리고 풀린 눈들이 아니었다.
종이에는 음식을 걸게 차린 상 앞에서 한 남자가 발가벗은 미녀를 안고 술을 마시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은 나무 앞으로 더 바짝 다가섰다.

그림 밑에는 글씨가 씌여져 있었다.
지금 곧 투항하라,

쌀밥과 미녀와 돈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다.

아래의 쌀밥을 먹고 원기회복해서 곧 투항하라.

절대로 처벌하지 않고 우대한다.
중국인 대원과 김건오의 손이 거의 동시에 나무에 걸린 망태기를 붙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길이 부딪혔다.

서로를 노려보는 눈에서는 적의가 뻗치고 있었다.


"진 동지, 나눠먹어야지."


김건오가 흐리게 웃었고


"그래 김 동지, 똑같이 나눠."


중국인 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망태기를 떼 내렸다.

과연 망태기에는 쌀밥덩어리가 담겨 있었다.


"정말 밥이다. 쌀밥!"


중국인 대원이 환성을 지르며 망태기에 손을 집어넣었다.
쌀밥덩어리는 크지 않았다.

딱 주먹만했다.

그건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얼어 있었다.
두 사람은 칼을 꺼내 둘로 나누려고 낑낑 힘을 썼다.


"똑같이 나눠, 똑같이!"


중국인 대원이 숨차게 말했고


"글쎄, 걱정말어."


김건오가 주먹으로 칼자루를 내려치며 내쏘았다.
두 사람은 바람을 등지고 얼음덩어리와 똑같은 밥덩이를 허겁지겁 먹어대기 시작했다.

눈보라는 그칠 줄 모르고 휘몰아치고 밀림은 기괴한 소리로 울어대고 있었다.
그렇게 자극적인 그림과 함께 쌀밥까지 매달아 놓은 것은 일본군이 새로 시작한 유인술이었다.

일본군은 항일연군 대원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얼마나 고통받고 시달리고 있는지를 꿰 어보고

그런 자극적인 심리전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작년에 이미 투항권고문을 계속 붙여서 꽤나 효과를 보고는 이렇듯 자극적인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었다.


"김 동지, 가자."


"그래, 가야지."


김건오는 눈앞이 좀 트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그러나 일어나 기운은 나지 않고 그대로 앉아 한숨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얼어 죽지 않으려고 그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이거 말이야!"


중국인 대원의 목소리가 커졌고 김건오는 그에게 눈길을 돌렸다.

중국인 대원은 종이를 흔들고 있었다.

 김건오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뭐, 뭐라고?"


"이거 말이야, 투항, 투항하자고."


종이를 흔드는 중국인 대원의 목소리는 좀더 커졌다.


"…"


"우리 이러다가 죽고 말거야."


"…"


김건오는 눈앞에는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어죽은 대원들 많이 봤잖아."


"…"


지삼출 아저씨의 얼굴도 떠올랐다.


"이젠 더 싸워봤자 가망없어."


방대근 대장의 얼굴도 떠올랐다.


"대원들은 절반도 훨씬 더 넘게 줄어버리고, 먹을 것도 없고, 무슨 수로 싸워 이기냐."


양세봉 장군의 얼굴도 떠올랐다.


"정빈 대장이 괜히 투항했겠냐."


"안 돼, 그래도 안 돼!"


김건오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난 이제 개죽음 하고 싶지 않아. 이걸 봐,

쌀밥, 고기, 여자, 술, 돈, 따뜻한 방, 왜 대답이 없냐, 넌 싫으냐!"


"진 동지, 그래선 안 되잖아."


김건오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중국인대원을 응시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가망이 없다는 줄 알면서도 개죽음 하겠다는 거야?"

 
"간부들을 생각해봐. 철통같은 간부들…"


"다 소용없어. 굶어죽고 얼어 죽는 판에 마음만 철통같으면 무슨 소용이양.

간부들도 결국 굶어죽고 얼어 죽고 말건데 난 그런 개죽음은 싫어."


"그래, 다 그렇게 될지도 몰라…"


김건오는 풀뿌리를 캐so고 나무껍질을 벗겨먹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김 동지는 싫으면 관둬. 나 혼자 갈 테니까."


중국인 대원이 일어섰다.


"이 산중에서 나 혼자!…"


김건오는 덜컥 겁이 났다.

바위틈이며 나무에 기댄 채 죽어있는 대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직도 입안에 남아 있는 쌀밥의 맛이 새롭게 진동했다.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옛날의 정빈 대장은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가!

왜놈들의 길잡이 노릇을 하며 우리 항일연군을 토벌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건 얼마나 무서운 배신이고 더러운 행위인가.

왜놈들이 우대한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투항자들을 다 그렇게 악용하고 있다 남아들이 그렇게 더럽게 살아야 하겠는가.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당당히 죽어야 하겠는가.

여러분은 조국을 위해 당당히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것만이 자랑스러운 남아의 길이의, 우리가 왜놈들에게 이기는 길이다.
방대근 대장이 조선과 중국의 부하들에게 해온 훈시였다.
김건오는 어금니를 맞물며 눈을 감았다.


"정말 안 가겠어? 좋아, 그럼 나 혼자 간다."


중국인 대원이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중국인 대원은 눈보라 속을 허우적거리며 가고 있었다.

김건오는 나무에 몸을 기대며 총을 겨누었다 .
그런데…, 얼어 죽은 동지들이 모습이 다시 눈앞을 가렸다.

추위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굶주림이 떠올랐다.

 아까 보았던 그림이 그 위에 겹쳐졌다.


"진 동지를 죽이고 나서 나 혼자… 결굴 부대를 못 찾게 되면…"


눈 위에 난자당해 죽은 대원들의 모습과 함께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김건오의 마음은 와를 무너지고 있었다.


"진 동지, 진 동지, 함께 가, 함께!"


김건오는 소리치며 눈보라 속을 허겁지겁 뛰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집단부락을 이용한 차단 작전과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포위작전은

항일연군에게 치명적인 인명피해를 가속화시켰다.

배고픔과 추위라는 최악의 상황속에 몰린 항일연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또한 대원들의 사기도 날로 저하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대원들의 사기를 더욱 떨어뜨린 것은 투항권고문이었다.

배고픔과 추위를 이겨내지 못한 대원들이 투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빈은 투항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군의 길잡이가 되어 토벌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는 며칠 전까지 동지이고 상사였던 양정우의 목을 겨누고 나선 것이었다.

그것은 일본군의 강요였건 어쨋든 간에 그는 이중 배신을 한 것이고 1로군 대원들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정빈의 투항을 알게 된 양정우는 급히 부대를 재편성시키고 활동지역도 바꾸었다.

부대의 모든 기밀이 송두리째 일본군으로 넘어간 거에 대비한 조치였다.

그래서 1로군의 제 1사에서 제6사까지 경위여단과 3개 방면군으로 재편성되었다.

방대근은 경위여단의 부여단장으로 직위가 바뀌었다.

그건 다른 방면군 군장과 같은 직위였다.
1로군 병력은 1년 사이에 반 이상 줄어들었다.

 대부분의 동계토벌동안 얼어죽고 굶어죽고 총 맞아 죽어 빨치산의 숙명적인

죽음의 행로를 걸어간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투항자들이었다.

그들 중에 7,80퍼센트가 중국사람들이었다.

작년 11월 무렵 또다시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본군의 동계토벌은 해가 바뀌어도 끝나지 않았다.

혹한이 절정을 이루는 1월이라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일본군의 차단작전으로 항일연군은 식량난만 극심하게 겪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물자 고갈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심각한 것이 신발과 약품이었다.

매일같이 험한 산을 몇십리씩 오르내리고 이동ㅎ사다 보면 신발은 금세금세 밑창이 드러났다.

가죽장화는 아예 바라지도 않고 일본말로 치카다비라고 부르는 신발을 구하는 것도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그리고 약품도 거의 구할 수가 없어 안 죽어도 될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산 아래 집단 부락들을 습격하는 것과 산중의 토벌대를 지원하고 있는 보급부대를 기습하는 것이었다. 그건 적들에게 타격을 가하는 동시에 필요한 물자를 구하는 이중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한 가지 문제는 적진으로 뛰어드는 위험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목숨을 내건 사움이었고,

그 길을 택하지 않으면 아사와 동사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바로 일본군의 작전에 굴복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작전의 위험만큼 유리한 점도 없지 않았다.

일본군은 포위작전에 혈안이 되어 병력을 산중에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런 곳은 후방으로 경계가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 허점을 찌르는 것이었다.
방대근은 눈보라치는 밤을 택해 출발시켰다.

눈으로 발자국을 지워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목적지는 미리 탐색을 끝낸 보급부대였다.

그 부대는 두 겹의 산줄기를 벗어나 분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통나무로 엮은 임시방편의 큰 창고가 있었고,

동서 양끝 문에 경비초소와 함께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었다.

눈보라치는 밤의 어둠은 비 쏟아지는 밤의 어둠보다 더 먹물이었다.
방대근의 작전명령이 개시되었다.

제1단과 제2단 20명씩 분산되었다.

방대근은 제 3.4단의 장비를 다시 점검했다

담을 타고 가시철망이나 구덩이 위에 걸치기 위한 사다리가 각 단에 두 개씩이었다.


"일단 담얼 넘으면 3단은 경계, 4단이 창고 습격, 그담에 임무교대헌다.

3단 각 분대넌 방화럴 잊지 말도록."


방대근은 제3.4단을 이끌며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광민은 제 2단을 신속하게 몰하 서쪽 문 주위에다 분대별로 배치시켰다.


"만일의 사태가 돌발 하더러라도 분대의 대오는 철저히 지키도록!"


이광민은 네 분대장들에게 속삭이듯 낮은 소리로 명령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외칠만큼 강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만일의 돌발사태란 포위공격을 당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분대의 대오를 철저히 지키라는 것은 낙오병이 생기지 않게 함과 동시에

투항자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분대단위 대오 고수는 모든 부대에 내려진 명령이었다.


탕!


타당 타앙…


눈보라 속에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공격준비!"


이광민은 분대장들에게 명령하며 손짓했다.

분대장들은 기민하게 흩어져 갔다.


따다다다 따르륵…


기관총 사격이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터지는 외침과 함께 새로 생겨난 불빛들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이광민은 그 불빛들을 응시한 채 빠르게 셈을 세고 있었다.


쿵! 쾅!
따다다다 따르륵…
타당 탕! 탕!


수류탄 기관총 소총소리들이 어지럽게 뒤엉키고,

바람소리에 겹겹의 메아리가 실리고 있었다.

 
"공겨억 개시!"


이광민은 명령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 총소리를 신호로 서쪽 문에도 불이 붙었다.
서쪽 문에서도 공격이 시작되자 보급부대 안은 고함소리와 호루라기소리,

뜀박질소리로 야단법석이었다.

3단과 4단 대원들은 빠른 동작으로 통나무 담을 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담을 넘어온 방대근은 구덩이와 가시철망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 것 없습니다."


3단장의 보고였다.


"다시 한번 확인 하시오."


방대근은 자신의 눈에도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지만 재차 명령했다.

집단부락에 비해 너무 허술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역시 아무것도 없습니다."


"됐소, 그렇다고 아조 안심허지넌 마시오. 혹시 다른 덫이 있을지 모롱게."


방대근은 왜놈들도 이리 허술한 데가 있나 생각하며 주의를 시켰다.

양쪽 문에서는 총소리들이 요란하고 뜨거웠다.

보급부대 안의 시끌벅적하던 소란은 가라앉아 있었다.

병력이 양쪽으로 분산된 것이 분명했다.

방대근은 앞장서며 부대를 이끌었다.

창고에 접근할 때까지 다른 장애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허술함에 방대근은 저으기 놀랐다.

전선과는 멀고, 임시 주둔이라서 담 이외에는 장애물을 설치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또한 그 허점은 항일연군을 앝잡아 본 데서 나오기도 했다.

방대근은 묘한 쾌감을 느끼며 재빠르게 지휘하고 있었다.
4단 대원들은 분대별로 창고를 하나씩 맡았다.

각 창고의 큰 문에는 빗장만 질러져 있을 뿐 자물쇠는 채워져 있지 않았다.

창고로 들어간 대원들은 미리 준비한 홰에 불을 붙였다.

횃불이 밝아지면서 창고에 쌓인 물건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쌀. 신발, 약품, 총알을 갖기 시작했다.
양쪽 문에서는 총소리가 치열했다.

총소리 속에 날카로운 비명이 섞이기도 했다.

4단 대원들은 3단 대원동무들과 교대했다.

총을 겨눈 방대근은 창고에서 창고로 뛰기 시작했다.

그는 창고에 불지르는 것을 지휘해 나갔다.

부하들이 물건을 챙겨 담는 동안 그는 직접 불 잘 붙을 것들을 모았고,

횃불을 거기 놓고 나오라고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3단과4단 대원들은 다시 담을 타 넘기 시작했다.

양쪽 문에서는 여전히 총소리들이 난무하고 수류탄이 폭발하고 있었다.
짐을 무겁게 진 3단과 4단 대원들을 숨을 씩씩거리며 눈보라 속을 걷고 있었다.

그들은 보급부대의 불빛이 한참 멀어진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들은 명령에 따라 총을 한 방씩 쏘며 외쳤다.


우와아아-
퇴각 신호였다.


"분대별로 퇴각한다. 1분대 퇴각!"


이광민은 급히 명령을 내렸다
3분대까지 퇴각을 확인한 이광민은 마지막으로 명령했다.


"4분대 퇴각!"


쾅!


폭음과 함께 섬광이 부챗살처럼 뻗쳐올랐다.

그리고 비명들이 찢어지고 있었다.

4분대에 수류탄이 날아든 것이었다.
이광민은 등에 강한 충격을 느끼며 눈 위에 퍽 엎어졌다.

눈에서 불꽃이 튀는 현기증과 함께 그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양쪽 문에서 총성이 멎었다.

부대 안에 다시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본군들이 고함지르고 소리치며 창고로 뛰어가고 야단법석이었다.
이광민은 정신이 깨어났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신음소리가 났다.

그는 그때서야 수류탄 공격을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고개를 들 수도 없었고, 손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눈에 묻힌 횐쪽 볼의 차가움이 한없이 시원하다고 느꼈다.

그 시원함이 온몸으로 퍼지면서 몸이 하얗게 표백되어 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청산리전투가 끝나고 퇴각한 산속의 소나무 가지에 내걸었던 태극기였다.

그 태극기 위에 겹쳐지는 얼굴이 있었다.

 어머니였다.

그 모습들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1로군에서는 긴급사항을 결정했다.

치료가 불가능한 중환자와 병약자들을 하산시키는 것이었다.

치료시설과 약이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에 있다는 것은 무모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것일 뿐이었다.

그런 죽음을 막고 집을 찾아가 치료를 받게 하자는 조치였다.
그런 환자들은 여러 곳의 비밀아지트에 수용되어 있었다.

비밀아지트는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판 굴이 대부분이었다.

송가원은 비밀아지트를 돌기 시작했다.

송가원도 오른쪽 발의 새끼발가락과 네 번 째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옥녀는 두 손 손가락이 전부 동상이었다.

자꾸 물을 만지게 되는 탓이었다.


"정말 조심하시오. 이러다가 큰일 나겠는데…"


송사원은 남들 보지 않는 틈만 생기면 옥녀의 손을 열이 나도록 문질러 주며 말하고는 했다.

그것이 유일한 치료법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옥녀는 오히려 동상 걸리기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송가원이 손을 그렇게 문질러 줄 때마다 한없이 달고 그지없이 황홀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대 거인 토벌작전으로 병원이 비밀아지트로 변하면서 단 한 번도 깊은 사랑을 나누어 보지

못했던 것이다.

토벌을 피해 다니느라 둘만의 잠자리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송가원과 옥녀를 호위하는 무장대원은 넷이었다.

그건 군장 지위와 맞먹는 특대우였다.

그런데도 송가원은 또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사령부에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고 총을 지급해 주었던 것이다.
송가원은 환자들에게 사령부의 결정을 전달했다.


"…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앞으로 이삼일 안에 하산할 준비를 하십시오.

집에 가서 치료를 하면 여기 보다 훨씬 나을 것입니다."


송가원은 자신이 맡고 있는 수용소의 환자들을 모두 하산시킬 준비를 하였다.

사령부에서 선별을 하라고 했다.

그러나 선별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수용소에 머물러야 하는 그들은 이미 중증이었고 다시 총을 들고 싸울 가망성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환자들은 놀란 기색으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저는 안 갈랍니다. 내려가 봐야 찾아갈 집도 없어요,"


한사람이 불쑥 말했다.

두꺼비라는 별명을 가진 강원도 사람이었다.

스물대여섯쯤 되는 그 사람은 동상에 총상까지 심했다.

산밭을 일구며 나뭇짐을 져내 살아오던 그는 일본순사를 죽이고 도망 온 것으로 유명했다.

어느 날 철원으로 나뭇짐을 지고 나왔다가 순사가 무작정 지게를 걷어차 넘어뜨리는 바람에

결기가 솟아 그 순사를 떠밀었다.

그런데 벌렁 넘어지는 순간 순사는 그대로 죽고 말았다.

그 길로 줄행랑을 친 것이 만주였다.

항일연군에 들어온 그는 어찌나 용맹스럽게 잘 싸웠던지 분대장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허벅지에 총상을 입어 수용소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지 말고 내려가서 어쨌든 병원엘 찾아가도록 하시오.

병원에 가면 곧 나을 병인데 여기 이러고 있어서는 결국 죽게 된단 말이오."


송가원은 일부러 몰악스럽게 말했다.


"왜놈들한테 죽긴 왜 죽어. 난 여기서 죽겠소."


그의 말은 퉁명스러웠다.


"잡혀 죽긴 왜 잡혀 죽어. 가짜로 투항하는 척하면 되는데,

어쨌든 귀한 목숨은 건져얄 것이 아니오."


"아니, 상부에서 그러라고 했나요?"


그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그렇게 라도 해서 목숨을 보존해야 한다고 결정했어요."


투항자들이 계속 생겨 따로 지켜야 할 기밀이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부대가 상황에 따라 빈번하게 이동하고 있어서 투항자들의 제보로

피해를 입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령부에서는 투항을 역이용해서 환자들을 살리자는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그것도 좋은 방책이구요. 왜놈 덕에 몸 나아가지고 다시 들어오면 되겠군요."


그 사람은 정말 두꺼비처럼 눈을 깜박거렸다.


"예, 그러면 더욱 좋겠지요."


송가원은 미처 그런 생각까지는 못했던 터라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별이 목전에 닥쳤는데 우리 옥비 명창 노래나 한 가락 들어보면 좋겠는데요."


딴사람이 불쑥 말을 했다.


"그래요?"


송가원은 고개를 돌렸고, 무슨 유인물을 읽고 있던 옥녀가 고개를 들면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송가원은 옥비가 읽고 있던 것이 <3·1월간> 인 것을 알아보았다.

그건 옥비가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환자수용소마다 비치된 것이었다.


"이건 다들 읽었습니까?"


송가원이 옥비의 손에서 <3·1월간>을 가져가며 물었다.


"예, 달달 월 정도로 읽었어요."


"그럼요, 읽을 것이 뭐가 또 있나요."


환자들은 모두 당연하지 않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 <3·1월간>은 재만한인 조국광복회의 기관지였다.

조선사람들은 중국사람들과 연합하여 조선의 해방을 위해서 투쟁한다는

취지의 코민테른 결의가 나오면서 그 구체적인 실천으로 항일연군 안의

조선사람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것이 재만한인 조국광복회였다.

그리고 그 기관으로 동사본이나마 <3·1월간>이 매달 발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내용은 반일과 해방투쟁, 민족단결이 주를 이루었다.

그 <3·1월간>은 조선대원들의 정신무장을 위한 학습자료이기도 했다.


"그럼 옥비 명창이 한 곡조 불러야겠소."


송가원이 조금 옆으로 비켜 앉으며 말했다.


"무신 노래로…?"


옥비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임막하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많이 야위고 거칠어진 얼굴에 잔잔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타향살이요."


두꺼비가 재빨리 곡목을 댔다.

그건 조선대원들이면 누구나 애창하는 노래였다.
적에게 애워싸이다 시피 하고 있는 유격투쟁에서 소리 내어 노래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항

일연군 내에서 세 가지 절대금지 사항이 있었다.

소리. 불빛. 연기가 그것이었다.

그 세 가지는 적과 직결되는 것인 동시에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그 사항을 어기는 것은 바로 적을 부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박수도 손바닥이 서로 엇갈려 소리가 안 나게 박수를 치듯 노래도

소리가 퍼져나가지 않게 부르는 요령이 있었다.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입 안에서만 굴리면 가까이 앉은 사람들에게만 들릴 뿐 전혀 들리지 않았다.
타아햐앙사아리 며엇해에더언가아아…
두 손을 가슴에 포갠 옥비는 눈을 사를 감은 채 노래를 시작했다.

환자들도 눈을 내려감으며 낮게 흐르는 노랫소리에 귀를 모았다.

그들의 입은 소리를 내지 못 한 채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옥비는 눈물 젖어오는 가슴으로 절절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나마 노래를 부를 때가 사는 것 같고 행복하게 느껴졌다.

환자들이 자기노래를 듣고 기뻐하는 것이 옥비는 무척 흡족하기도 했다.


"옥비 노래가 어떤 명약보다 낫소. 아픈 것도 잊고 저리들 좋아할 때 병이 낫는 법이니까."


송가원의 이런 말에 옥비는 더욱 보람을 느끼며 어는 환자수용소에서나 노래 청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재청이요, 재청!"


환자들이 공박수를 치는 가운데 어떤 사람이 재청을 불렀다.

그들의 눈에는 물기가 젖어 있었다.


"예, 이번에는 아리랑을 불러주시오."


옥비는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앉음새를 고쳤다.

아아라라앙 아아리라앙 아아라아리오오…
소리가 낮고 가늘어 더욱 애절하고 서럽게 느껴지는 가락이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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