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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현세의 정점 2 - 천상을 제세상으로 바꾸려 했다

오늘의 쉼터 2016. 6. 29. 17:28

제14장 현세의 정점 2


- 천상을 제세상으로 바꾸려 했다


은각을 보자 온갖 종류의 예감이 마음 속에서 술래잡기를 했다.

은각은 젊어지고 키도 더 커졌으며 전체적으로 무척 고상한 품격을 획득하고 있었다.

나는 몇 가지 이목구비의 특징과 몸짓, 말의 억양으로 간신히 그를 알아보았다.



“좀 앉지, 제천대성. 한 때는 같은 동지로서 나란히 우주를 주유하던 사이가 아니었나.

내가 자네에게 친애의 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 되겠지.

우리가 조금씩 고집을 버리고 솔직해진다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거야.”



우리가 티 테이블에 앉자 은각은 손뼉을 쳤다.

은은한 음악이 울리면서 얇은 실크 드레스를 입은 날씬한 미녀가 나와 귀빈을 환영하는 춤을 추었다.

완벽하게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그녀는 실상 홀로그램 영상이었다.

나는 좌우로 시선을 던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천상이 상당히 현대화되었네. 건물도 그렇고 무희도 그렇고.”



“세상은 변한다네.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만이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이지.

우리 모두는 더 발전하고 더 많이 배우고 더 다르게 살아가야 해.

자, 여러분의 앞길에도 무한한 발전이 있으시기를.”



은각은 허공 속으로 손을 뻗어 잔을 들어올리는 시늉을 했다.

순간 그의 손에는 와인이 담긴 유리잔이 나타났다.

우리 앞에 있는 티 테이블에도 각각 와인 잔이 나타났다.

우리는 홀로그램처럼 보이는 그 유리잔이 실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리잔에는 우리를 배려하여 와인 대신 물이 담겨 있었다.

나는 갑자기 은각의 도력이 내가 상상하는 수준을 능가할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나는 잔을 들고 의연하게 화답의 미소를 지었다.



“옥제께서 결혼하신 줄은 몰랐소. 아름다운 황후께 늦게나마 축하 드립니다.”



은각 옆에 앉아 있던 여인이 손을 뻗어 와인 잔을 들었다.



“고마워요. 과거를 돌아보면 피차 할 말이 많겠지만 모두 잊기로 해요.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 사이에도 새로운 우정이 맺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시다.”



황후의 목소리는 맑은 음악과 같았고 여인의 목소리치고는 깊이가 있었다.

나는 억지로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당황했다.

황후의 말을 들으면 그녀는 나와 안면 있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누구지? 도무지 누군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깊은 눈매를 제외하면 어디에도 그녀의 나이를 가늠할 만한 표시가 없었다.

그녀의 눈은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깊은 추억을 담고 있는 우물처럼 심오했다.



나는 황후가 ‘우리 사이에도’ 라고 말할 때 스승과 팔계에게도 시선을 던진 것을 상기했다.

그렇다면 옛날의 서역행에서 만난 여자?

그러자 황후의 서늘한 눈매가 내 안에서 기억과 감정을 함께 불러 일으켰다.



“황후께서는 혹시 …… 취운산에 사시던 철선(鐵仙) 공주가 아니십니까?”



“이제야 나를 알아보십니까?”



“공주는 우마왕의 …… ”



“오래 전에 갈라섰습니다.”



철선 공주는 얼굴에 핏기를 올리고 매섭게 말을 끊었다.

은각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철선 공주는 과거 인간과 신들을 습격한 죄로 지하에 추방된 나찰 종족의 나찰녀(羅刹女)였다.

나찰 종족은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살며 공중을 빠르게 날아다니는데,

요마 중에서도 최하층으로 취급된다.

머리 열 개에 팔이 스무 개씩 달리거나, 따로 머리가 없고 상반신이 얼굴처럼 되어

젖꼭지에 눈이 있고 배꼽 밑에 커다란 입이 있는 흉측한 모습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 완전한 인간의 몸을 하고 재색이 빼어난 여자가 태어날 때도 있는데

철선 공주가 그런 예였다.



철선 공주는 일찍이 우마왕과 결혼하여 홍해아(紅孩兒)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와 이혼하고 은각과 사는 모양이었다.

은하계에서 가장 격이 낮은 나찰 종족의 이혼녀가 천상의 황후라.

시대의 변화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전인자니 뭐니 헛소리를 하는데 모두 보수세력의 흑색선전이오.

나는 황후의 나찰 혈통이 천상에 강한 활력을 주리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어요.

지금은 모든 방면에서 새로운 피를 주입 받을 시기입니다.

그렇지 않소, 제천대성?”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제 자식 제 맘대로 낳겠다는 데 누가 뭐라고 하나. 그러나 은각의 구차한 설명에서

천상 정계의 복잡한 갈등들이 느껴졌다.

은각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천상은 더욱 더 강해져야 해요.

천상 연방의 리더십이 흔들리면 은하계의 평화가 흔들리고 모든 별들의 복리(福利)가 위협받게 됩니다.

지금 우주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삼장법사님?”



갑작스런 물음에 스승은 긴장했지만 조용히 합장을 하고 입을 열었다.



“옥제님, 부처님께서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서 비롯된다고 하셨습니다.

한쪽에서는 욕망에의 휘말림이 있고 또 한쪽에는 해탈이 있습니다.

욕망은 악업(惡業)과 선업(善業)을 만들고 업은 다시 욕망과 거짓된 자기를 만듭니다.

결국 스스로 함정에 빠져 옴짝달싹 못 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해탈에 두고 세상의 헛된 욕망들을 무시하는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은각은 한참 동안 삼장법사를 노려보았다. 그는 노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법사님, 욕망이란 우리 자신의 숨겨진 정체성이고 모든 행위는 그것의 성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