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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금각대왕 은각대왕 4 - 은각이가 바로

오늘의 쉼터 2016. 6. 27. 16:48

 제11장 금각대왕 은각대왕 4


- 은각이가 바로


그 날 밤 독수리성의 드넓은 홀은 평정산 곳곳의 근거지에서 날아온 마법사들로 붐볐다.

우아한 의상의 무희 열세 명이 조용하고 감미로운 반주에 맞추어 군무를 추었다.

조명이 바뀌자 곡은 빠르고 경쾌하게 바뀌었다.

 

“요한 스트라우스의 왈츠라네. 지구에서 다운로드 받은 거지.”

 

금각대왕은 나를 한적한 발코니로 안내하며 말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멋진 궁전이야. 그런데 은각대왕은 어디 있나?”

 

“출타 중일세.”

 

나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 생각하고 더 묻지 않았다.

나는 형인 금각과 더 얘기가 잘 통하는 편이었다.

독선적이고 자만심이 강한데다 새파란 주제에 까다롭기만 한 동생 은각은 언제나 내 신경을 거슬렸다.

나는 독한 술을 홀짝거리면서 이 별의 날씨가 무더워졌고, 강물이 마르고 수풀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금각대왕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격전을 벌이고 있어. 괴물들과.”

 

“괴물들?”

 

“어마어마하게 큰 사룡들, 강대하고 더러운 괴수들, 온 몸의 살이 허물어지고

얼굴이 악성 종양투성이로 변한 괴인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온갖 마법을 동원했지만 방법이 없네.

결국 이 평정산을 지키기 위해 파초선의 불길로 사방 팔천 리를 모두 불바다로 만들어버리지.

그런 지가 벌써 10년 째니 무슨 초목이 있고 강물이 있겠나.”

 

“요즘 온 우주가 요마들의 재앙을 겪고 있다네.

내 서역에 가면 관세음보살님의 감로수(甘露水)를 얻어다 주지.

그걸로 산하를 씻으면 초목도 소생하고 꽃들도 다시 피어날 걸세.”

 

“감로수도 소용없네.

초공간의 구멍으로 우리 별에 스며든 요마는 바로 방사능이었어.

핵폭탄이 터져 산산조각 난 봉래 행성이란 별에서 방사능이 들어와 무서운 돌연변이들이 생겨났네.

우리 별의 사룡과 괴수, 괴인들은 원래 이 별에 살던 생명체들이었어.”

 

“그럴 수가 …… 끄, 끔찍한 일이군.”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나 자신이 야기한 과오의 결과를 보아야 한다는 사태는

찝찝하기 짝이 없었다.

금각대왕은 내가 봉래 행성 폭발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가 구태여 캐묻지 않았기에 나도 고백하지 않았다.

나는 화제를 돌려 수렴동에서 당한 천상군의 습격, 지구에서 치른 디지털 전쟁, 삼장법사와의 재회,

야마 행성, 건달바 전투를 이야기했다. 금각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하늘을 보며 말했다.

 

“자네가 천상에 쫓기고 있다는 말은 들었어.

오늘 이 독수리성의 밤하늘에는 역장(力場)의 마법이 걸려 있네.

우리의 대화는 오늘밤 도청되거나 천상에 송신되지 않을 거야.

그러나 이런 상태는 잠시뿐일세. 자네 일행들은 날이 밝으면 떠나야 해.”

 

“무슨 소리인가?”

 

“여기도 위험하단 말일세. 나는 천상에 찍힌 몸이고 이 평정산은 24시간 도청되고 있어 …… ”

 

금각은 그렇게만 말했을 뿐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대화는 와장창 깨어지는 소리에 의해 중단되었다.

만찬이 시작될 때부터 춤추는 무희 아가씨에게 추근거리던 팔계가 실수로 유리창을 부수고

정원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술에 만취된 상태였던 것이다.

퇴짜를 맞은 팔계는 속이 상한 듯 고래고래 화를 내었다.

나는 마법사들과 함께 팔계를 멀찌감치 떨어진 방으로 옮기고 좋아하는 술병을 안겨주어

밤새 중생이 겪는 욕정의 공허함에 관해 고찰하도록 했다.

 

오정과 스승은 뼈가 부러졌고 모처럼 스승의 감시를 벗어난 팔계는 곤드레만드레 취해버렸다.

다음 날 길을 떠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혼자 잠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금각대왕과 함께 늦은 아침을 먹었다.

 

“우리는 독립적인데다 육체적으로 초인에 가깝고 초자연적이리 만큼 오래 사는 존재야.

옛날에는 나 같은 존재라면 나중에 가서 거의 신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

 

“끊임없이 배우고 지식을 쌓는다면 당연히 그렇겠지.”

 

“우리 둘 다 뭐 변한 게 있나?”

 

금각대왕이 냉소를 날렸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어.

우리 둘이 처음 격돌한 이후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우리는 여기 똑같은 사람으로 앉아 있고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어.

중요한 사실이 약간 변하기는 했지. 내가 비밀을 한 가지 얘기해도 되겠나?”

 

껄걸 웃던 금각대왕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차를 마시면서 무슨 말이든지 해보라고 했다.

 

“초공간의 재앙, 방사능 오염, 천상의 도청. 이 모든 것이 처음엔 각각의 우연으로 보였네.

그러나 나는 이건 현실이 아니라 마법이야, 마법 하고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진상을 알아차렸지.

마법이 제대로 작용하려면 모순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네.

마법은 과학 이상의 정교한 체계가 있어야 하며 뭐든지 다 되는 초자연적인 것은 아니라는 거야.

그런 점에서 우리 별에서 일어난 마법 같은 사태는 모두 연관되어 있네.”

 

“당연히 나도 그렇다고 생각해.”

 

“이 모든 사태들의 배후에는 내 동생 은각이가 있네.”

 

“누, 누구?”

 

“은각대왕 말이야. 그 아이가 바로 현직 옥황상제. 당신을 뒤쫓는 천상의 지배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