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이그러진 과거 9
- 아들아 나는 이 별을 낙원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구질구질한 외교적 절충을 일체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전쟁 과정은 가상 현실의 입체 영상과 각종 실사 영상을 통해 모든 행성에 중계되었다.
먼저 숙신 공화국의 양자폭탄 미사일 기지에 대한 ‘자위적 선제공격’이 행해졌다. 숙신 주변의 우방국 공군 기지로부터 발진한 수백 대의 전략
핵폭격기들이 인공위성과 무인정찰기가 포착한 미사일기지를 정밀폭격했다. 우리는 미리 촬영한 숙신 독재자의 연설 장면과 미사일 실험 장면을 방영하여
숙신이 극도로 위험하고 잘 무장된 정권임을 홍보했다.
그런 뒤 사단 규모의 해병대가 해상의 항공모함으로부터 헬리콥터와 상륙용 함정을 이용한 야간 상륙 작전을 감행했다. 해병대는 일거에
해안선으로부터 약 240킬로미터 떨어진 내륙의 거점들을 공격, 점령했다.
이 공격은 ‘식량 지원 기지 확보 전쟁’이라고 명명되었다. 나는 세계 각국에 중계된 연설에서 이 점을 강조했다.
“숙신은 만성적인 식량 위기로 매년 수백만이 죽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동안 우리의 자선 단체들이 원조한 식량은 굶주린 민중에게 가지 않고
테러리스트들의 군량미만 늘여주었습니다. 우리 연방 공화국은 인도적 차원에서 숙신의 민중들을 구출하려고 해안지역에 식량 지원 센터를
확보했습니다.”
우리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연방 공화국은 전쟁 개시 20일만에 숙신의 수도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사단 규모 이상의 집단적
저항을 모두 분쇄했다. 전쟁은 확대되지 않았다. 아라샤의 대국 차인 연방은 강도 높게 항의했지만 그 이상의 도발은 할 수 없었다. 숙신이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명분에서도 패배했기 때문이다. 33일째 되는 날 덩색 일당은 국경을 넘어 차인 연방으로 망명했고 전쟁은 끝났다.
이 전쟁을 계기로 행성 문명의 제도적 기반이 창출되었다. 극한의 폭력 이미지는 인간의 상상력에 깊은 교훈을 준다. 인구의 75퍼센트가
죽거나 중상을 입은 숙신의 참상이 텔레비전으로 전 행성에 방영되자 연방 공화국의 무자비함에 온 세계가 벌벌 떨었다. 숙신의 죄는 양자 폭탄과
장거리 탄도 미사일을 개발해서 허세를 좀 부려본 것뿐이었다. 겨우 이 정도의 일로 나라가 완전히 멸망하고 만 것이다.
손오공 같은 놈과 싸우다간 끝장이다, 십중팔구 저런 꼴을 당하고 말 것이라는 공포가 모든 나라에 번져갔다.
행성의 정치는 중앙집권화되고 완벽하게 통합된 하나의 세계 시장이 출현했다. 여권과 비자가 사라지고 모든 무역 장벽이 사라졌다. 민족 국가는
약화되어 껍데기만 남았다.
정보 고속도로가 만들어놓은 새로운 경제는 욕망과 경쟁을 확대했다. 대기업들은 급변하는 시장에 맞춰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직원 10명 내외의 소기업들로 분할되었다. 수 만 개의 온라인 상점들이 생겨났고 수백 만 개의 오프라인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 행성 문명은
생활의 모든 면에 정열을 환기시키고 활기를 불어넣었다. 종교와 민족과 국가와 인종과 지역으로 분할되어 있던 견고한 벽들은 모조리 무너져 역사
속으로 흘러갔다.
은하계 최고의 행성 <천상>에서는 나에게 사절을 보내 ‘새로운 문명의 개척자’라는 명예를 수여했다. 사절단은 자주 빛의 수정
구슬을 헌상했다.
“이 크리스탈은 천상과 접속하는 송신기입니다. 행성의 최고 지도자께 드리는 선물이죠. 여기에 소망을 말하시면 천상은 그 소망을 꼭
들어드립니다.”
그렇게 4년이 흘러갔다. 그 사이 나는 몇 번 문제를 일으킨 국가 원수들을 만나 무앗딥 황제에게 했던 것처럼 심야의 설득을 하기도 했다.
나의 암살을 기도했던 한 장군은 목뼈가 부러졌고 두 명의 국왕은 전신 불구가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원만히 마무리되었고 전쟁까지 가야
했던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대통령 임기의 마지막 달에 나는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는 큰 파티를 열었다. 나는 12살 난 아들 오반을 껴안으며
호기롭게 말했다.
“어떠냐, 오반아? 네 엄마는 불안해 했지만 나는 이 별을 낙원으로 만들었다. 모든 인류가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란다. 대담하고
부지런한 사람은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지. 아빠가 이 별에 남긴 흔적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거야.”
아들은 나의 팔에 매달리며 아빠가 자랑스럽다고 외쳤다. 엘로이즈는 내 연미복의 나비 넥타이를 바로잡아주며 한숨을 쉬었다.
“엘로이즈, 아직도 근심이 있소? 당신은 늘 걱정꾸러기의 얼굴이로군.”
“행성 문명이 생겨났지만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울타리가 있어요. 기업들이 몸무게를 줄이면서 정규직 일자리가 줄어들고 임시직만 늘었거든요.
부자는 한없이 부자가 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가난해진 것 같아요.”
“여보, 어디서 사회민주당 놈들의 헛소리를 들은 모양이군. 자유와 복지는 그것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열려 있어요. 대열로부터
낙오될 위험도 있지. 그러나 그런 위험 때문에 아이도 어른도 노인도 매일 같이 건실한 자기 개발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 거요. 운동도 하지 않고
경제신문도 읽지 않고 첨단 기술도 배우지 않고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겐 미래가 없어요. 사회에는 항상 낙오자가 있는 법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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