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일그러진 과거 2
- 첫날밤후, 나는 그녀에게서…
나의 장구한 생애에 단 한 명뿐이었던 아내. 그녀의 존재를 깨닫는 순간 나의 마음은 저항했다.
과거를 보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모든 생들이 기억되어 내 앞을 지나간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체험인가. 나는 삼장법사가 불러일으킨
영시(靈視)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쳤다.
그러자 스승이 주입하는 영력(靈力)은 더욱 강해졌다. 전류가 내 몸 안을 노도처럼 통과했고 안구가 심하게 진동했다. 정수리에서 쏟아져
내리는 하얀 빛은 우렁이껍질처럼 둥글게 빙빙 돌면서 눈 앞을 지나, 턱으로, 가슴으로, 명치를 거쳐 배꼽 아래로 떨어졌고 꽁무니뼈로부터 허리
주위에 심한 열기가 일어나 위로 솟구쳤다. 스승의 소리 없는 말이 귓전에 울렸다.
“생의 모든 일들은 꿈 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반짝이는 이슬 같고 번갯불 같으니 그대는 마땅히 이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
심장이 격렬하게 고동치면서 나의 혼은 다시 1248년으로 끌려갔다. 나는 그 때 키프로스 섬에 있었다. 그곳은 루이 왕부터 천민들까지
모두가 둥글게 모여 무릎을 꿇고 예배를 보는 십자군의 기지였다. 몽골군 사절로서 나는 두려움이 섞인 환대를 받았다.
당시 십자군에게 ‘타르타르스’라고 불린 몽골군은 지옥에서 온 악마들이었다. 그러나 많은 병사들을 잃은 루이 9세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절박한 처지였다. 그는 우리의 동맹 제의를 즉각 받아들였고 수도사 앙드레를 비롯한 사신들에게 국서와 공물을 지참시켜 몽골 황제 앞으로
파견했다. 나는 이들이 사히 돌아올 때까지 인질로 섬에 억류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이 지겨웠던 나에게 인질 생활은 즐거웠다. 올리브 나무와 삼나무가 우거진 키프로스 섬은 아름답고 우아했다. 나는
감시병들을 돈으로 매수해서 섬 곳곳을 돌아다니며 항구의 뱃사람들과 사귀고 포도주에 맛을 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놀러 간 시골 마을에서
나는 사슴처럼 날씬한 열 여덟 살의 아가씨를 보았다.
하얀 피부에 크고 검은 눈을 가진 그 아가씨는 웃는 얼굴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낯선 남자들을 보고 겁이 나 달아나는 뒷모습을 보자 온
몸의 피가 달아올랐다. 저 여자구나, 하고 생각했다. 단 한 번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내 인생은 두 토막 난 것 같았다. 그녀를 보기 전과
그녀를 본 후. 그녀가 바로 내가 이 별에 온 이유라고 확신했다.
엘로이즈는 메사오리아 평원에서 밭농사를 짓는 경건한 가정의 딸이었다. 종교적 열정에 불타는 그녀의 조부모들이 살림살이를 짊어지고 십자군을
따라 내려왔다가 이 섬에 정착했다고 한다. 나는 그녀의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명랑함, 기독교적인 겸허함, 그녀를 키워낸 작은 마을의 소박함에
매료되었다.
나는 여러 별에서 전해들은, 연애의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심오하며 가장 오래된 계율에 충실했다. 그것은 여자에게 돈을 아끼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고결한 신앙심을 가진 여자도 가난한 성자보다 멋진 선물을 주는 애인을 더 많이 생각한다. 왜냐하면 선물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그녀가 이런 선물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조부에게 가죽 장화를 바쳐 경의를 표했고 그녀의 모친께 가장 좋은 옷감을 드렸으며 그녀에게 섬 전체를 뒤져서 구한 금 목걸이를
선물했다. 그 뒤에도 나는 선물하고 또 선물했다. 그리하여 그녀의 사랑을 얻는 데 성공했다.
한 여름밤의 눈부신 초록 아래서 환상처럼 몽롱한 시간이 지나갔다. 그러나 달빛보다 눈부신 나의 여인에게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운명은 다름 아닌 나였다.
첫날 밤을 같이 지낸 후 나는 심경의 변화를 느꼈다. 몸을 허락한 엘로이즈는 더 이상 내가 최초로 매혹을 느꼈던 순진한 처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나를 향한 자신의 새로운 감정과 자신을 둘러싼 낡은 사회 사이의 불화를 인식하고 나와 더불어 살아갈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성숙한
여인이었다. 그녀에게 새로운 유형의 자존심이 생겨났다.
반면에 나는 그녀가 점점 부담스러워지고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녀를 사랑하는데 어째서 이런 마음이 생겨나는가? 생전
처음 여자를 경험한 나로서는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언젠가 여자에 관해 나보다 훨씬 전문가인 저팔계와 이런 대화를 나눈 것이 생각났다.
“알다가도 모를 게 내 마음이야. 같이 자기 전까지는 여자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어. 그런데 한 번만 자고 나면 아휴, 지겨워. 저년
어디 가서 안 죽어버리나, 늘 이런단 말야.”
“팔계야, 그러니까 여자는 천하에 쓸데 없는 거라고 하지 않았어. 드넓은 세계에 둘러싸여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행동을 원한다면 여자라는
장애물을 멀리해야 해.”
“그러니까 형이 유치하다는 거야. 내 아이를 임신한 여자가 이렇게 말하더군. <나는 당신에게 인생과 쾌락의 상징이지만 세상은 나에게
고통과 불안일 뿐입니다.> 라고 말이야. 이 얼마나 오묘한 화두(話頭)야.
이걸 연구해야지.”
초보 연구자는 괴롭다. 엘로이즈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녀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나는 방황했다. 엘로이즈는 절망하여 눈물로 밤을
지새게 되었다. 그러다가 파국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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