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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삼장법사 최후의 전생(轉生) 5 - 극락에서 생명패턴을…

오늘의 쉼터 2016. 6. 13. 17:28

제6장 삼장법사 최후의 전생(轉生) 5


- 극락에서 생명패턴을…



삼장법사가 있는 방문에는 ‘세균 감염’이라고 쓰인 노란 테이프가 둘러져 있었다.

방안에는 병자의 악취를 가리기 위함인 듯 여러 개의 향이 타고 있었다.

스님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스님의 시선에서 딱 소리가 나는 것으로 착각했다.

그것은 사실 나 자신의 맥박 소리였다.

그만큼 스님의 눈빛은 강렬했다.

옛 스승의 수행이 비상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느낄 수 있었다.

 

스승은 검은 눈동자에 키가 큰 여성이었다.

현생에서는 동유럽 쪽의 슬라브계 부모로부터 육신을 받은 듯 했다.

검은 색의 짙은 눈썹은 갈매기의 날개처럼 날카롭고 선명했다.

입도 작고 턱도 작았으며 광대뼈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어두운 방에 검소한 승복을 입은 채 사경을 헤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얼굴은 승리자처럼 보였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그대가 나를 아는데 내가 그대를 모르겠습니까?”

 

스승은 우리 하나 하나와 눈으로 인사했다.

팔계는 뚱뚱한 몸을 최대한 공손하게 굽히면서,

오정은 삐쩍 마른 얼굴을 숙이면서 스승을 향해 합장했다.

오정이 스승의 파리하게 야윈 얼굴을 살피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열이 심하게 나서 어젯밤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세균 무기에 감염되신 것입니까?”

 

“알 수 없답니다. 그래서 제가 죽으면 시신을 연구소로 기증할 예정입니다.

이런 식으로 현대 과학에 기여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스승은 소탈하게 웃었다.

그녀의 이마에서는 쉴 새 없이 땀이 흐르고 있었는데

보통 사람이면 비명을 지를 정도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스승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시간이 얼마 없군요.

죽기 전에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다시 만난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이것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모든 덧없는 것들이 우리를 부르고 인연(因緣)의 끈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이 만남은 단 한 번,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도 오로지 한 번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 한 번 존재했다는 것, 그것은 반복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스승은 눈을 내리깔고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고 손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우리는 1300년 전에 한 번 만났습니다.

그 때 나는 당나라의 젊은 승려였고 여러분은 인간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때 함께 먼 길을 걸어서 부처님 나라에 도착했었습니다.

그리고 1300년 후 우리는 이곳 한국의 전쟁터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나는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他心通)이 좀 생겼기 때문에 여러분이 나를

 삼장법사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정말 삼장법사입니까? 여러분은 정말 손오공이고 저팔계이며 사오정입니까?

우리는 한 번 밖에 존재할 수 없고 하나의 세계밖에 살 수 없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야 우리는 초공간을 이동할 수 있고 그 때마다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스승님은 그동안 인간으로 환생을 계속하셨구요.”

 

오정이 대답하자 스승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들은 몸소 <겹쳐진 세계>를 걸어왔으면서도 진실을 모르고 계십니다.

이 우주는 한 송이 거대한 생명의 꽃이랍니다.

무수한 꽃잎들이 서로 겹쳐져 있는 꽃.

천상의 은하계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지구에서도 일어납니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한 인간의 마음 속에서도 일어나요.

시간 역시 기차가 달리는 철길처럼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뻗어있는 것이 아니라

봉오리를 머금은 연꽃처럼 지금 이 순간에 함께 있습니다.

하나의 실(實)시간 위에 억만겁의 허(虛)시간이 겹쳐 있어요.

이것을 부처님은 연화장(蓮花藏) 세계라 하셨습니다.”

 

숨가쁘게 열변을 토한 뒤 스승은 말을 멈추었다.

나는 불안한 경련이 스승의 얼굴을 스쳐감을 보았다.

 

“지금 이 전쟁은 남의 전쟁이 아닙니다.

은하계의 재앙 또한 남의 재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의 파멸을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고통이 우리에게 닥치고 맙니다.

우리의 이웃이 비명에 죽으면 우리 속에 있는 소중한 무엇도 죽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연기(緣起)라고 말하는 총체적 관계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이타행(利他行)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법사님, 말씀을 그만 하시지요. 좀 누우셔야겠습니다.”

 

오정이 허둥대며 스승을 부축하려고 했다.

스승의 얼굴은 알 수 없는 초조에 들떠서 발갛게 달아 있었고 그의 장삼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아닙니다. 여러분의 대답을 듣기 전까지 누울 수 없습니다.

내게 약속해주세요.

초공간의 재앙을 뚫고 극락으로 가서, 은하계의 끝없는 재앙,

지구의 끝없는 전쟁을 그치게 할 황금의 연꽃, 모든 생명체들의 패턴을 가져오겠다고.”

 

마지막 말과 함께 힘겹게 깜박거리던 스승의 눈이 감겨졌다.

삼장법사의 몸이 스르르 옆으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