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4
- 우리다,이 말썽쟁이 돼지야
“도대체 왜 이런 일을 꾸몄지?”
나는 한숨을 쉬며 사오정을 노려보았다.
“내 부하 원숭이로 변신해서 나를 감쪽같이 속인 이유가 뭐야?”
“난 오래 전에 해킹을 하다가 극락의 검색엔진을 망가뜨린 죄로 추방되었어. 그 래서 덧없는 뜬세상들을 떠돌며 괴로움을 겪고 있었는데 얼마
전 관세음보살님의 부탁을 받게 되었어. 그래서 큰형이 도착하기 직전 원숭이 별로 잠입해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원숭이로 가장하고 형을
기다렸지.”
“부탁이라니? 나를 설득해서 서역에 가게 하라는 거?”
“그것도 있고. 큰형이 진짜 큰형인지 알아보라는 말씀도 있었어.”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사오정은 <유사하>인이었다. 유사하인들은 타인의 마음과 무의식을 읽을 수 있는 독심술(讀心術)의
능력이 있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 내 마음을 들여다 보니 진짜 같나, 가짜 같나?”
“모르겠어. 형 자신도 혼란스러워 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형은 기억을 잃어서 도심(道心)의 싹이 생겼는지도 몰라.”
“무슨 소리지?”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는 말이 있잖아. 이 세상 만물이 있다는 것은 없다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없다는 것 또한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어. 큰형에게 ‘나는 이것 때문에 손오공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어떤 장소에서 서로 인연을 맺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내가 나이게 되는 거야. 큰형은 서역길에서 나와 팔계 형, 스승님과 함께 있었기에 손오공이었어. 나 역시 그래. 우리 자체는 텅 빈 것(空)이고
없는 것(無)이야.”
“그럼 날더러 계속 이렇게 흐리멍텅한 상태로 있으란 말이야?”
“그렇게 자신의 정체가 궁금하면 나랑 유사하에 가보지 그래. <무의식의 강>에 들어가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 있으니까.”
나는 훅 하고 숨을 몰아 쉬었다.
옛 책에 사오정이 사는 유사하는 물의 입자가 너무나 가벼워서 헤엄칠 수 없는 강으로 나와 있다. “가벼운 새털 하나 뜨는 일이 없는 물.
갈꽃도 잠겨선 밑바닥에 가라앉는다” 고 한 이 말은 무의식을 비유한 것이다. 우리가 경험한 많은 것들은 무의식으로 가라앉고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생명체의 기억이란 신경섬유와 신경세포에 나트륨 이온이 달라붙은 것이다. 유사하 행성에는 무의식에 잠긴 기억이 되살아나는
플라스마(이온화된 기체)의 강이 있었다.
“그래, 나중에 시간을 내서 가보자. 지금 당장은 무기를 구해야 하니까.”
내가 대답하자 사오정은 턱짓으로 저팔계를 가리켰다.
“당장은 둘째 형부터 살려야 해.”
사오정과 나는 의식을 잃은 저팔계에게 다가갔다. 먼저 부러진 팔뚝에 부목을 대어 고정시키고 터진 머리통에 붕대를 감아 지혈했다. 그리고
우리는 손바닥에 기를 넣어 그의 사지를 주물렀다. 우리가 그렇게 부산을 떨자 알몸으로 비명을 지르며 어느 구석으로 달아났던 여자들이 대충 옷을
걸치고 나타나 앙앙거리기 시작했다.
“당신들 뭐야? 엉? 싸울 일이 있으면 벌건 대낮에 할 것이지 왜 남들 재미 보는 밤에 와서 난리야!”
“순 미친 놈들 아냐. 니네들 실수한 거야. 우리가 누군 줄 알아?”
나는 불타는 눈으로 여자들을 응시하며 따귀를 한 대씩 갈겼다. 여자들의 입술이 즉시 닫혔다. 고태공 선장의 큰 딸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여자들은 벌벌 떨면서 1층 구석의 창고 같은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방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 보니 그냥 자물쇠도 아니고 열쇠구멍에다 구리를 녹여 부어서 도저히 열 수 없도록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여의봉으로 문고리를 부셔버렸다.
문을 열어보니 그 안은 그믐밤과 같이 깜깜했다.
“고태공의 큰 따님이 여기 계시오?”
안에서 인기척이 났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아버님 부탁을 받고 온 사람이오. 있으면 어서 나오시오.”
그제서야 안쪽에서 모깃소리 만한 대답이 들려왔다.
“저 여기 있어요.”
나는 눈꺼풀을 깜박거리면서 어둠 속을 더듬어 보았다. 눈이 어둠에 적응되면서 이불을 쥐고 침대에서 떨고 있는 여자 하나가 보였다.
머리카락은 수세미처럼 변해 있고 얼마나 야위었는지 사람 꼴 같지가 않았다. 여자는 기어 나오다가 부끄러움을 느꼈던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 나는 여자를 들쳐 안고 바람처럼 달려가 저택 정문 밖의 고태공에게 안겨주었다.
“노인장, 이제 딸을 저쪽으로 데리고 가서 천천히 쌓였던 얘기나 하세요. 난 요괴와 담판을 지어야 하니까.”
거실로 돌아온 나는 팔계와 놀아나던 여자들도 집 밖으로 내보냈다. 사오정과 둘이 다시 저팔계의 팔다리를 주무르자 그제서야 팔계는 푸르륵,
하고 입으로 김빠지는 소리를 내면 정신을 차렸다. 이미 새벽이 돌아와 창 밖이 밝아오고 있었다. 저팔계는 나와 사오정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손오공 형 …… 사오정!”
“그래, 우리다. 이 말썽꾸리기 돼지야.”
저팔계는 어깨를 움츠리고 우리 눈치를 보았다. 잠시 후 그는 입술을 씰룩거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어쩌자고 이렇게 날 무작스럽게 때리는 거야. 왜 남의 수행(修行)을 방해 하냐고.”
“수행?”
“석가모니도 하지 않은 최고의 고행(苦行)이지. 여자와 함께 사는 것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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