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신행마동

第 十九 章 술독 앞에서 낳지도 않은 아기로 脅迫하는 請託

오늘의 쉼터 2016. 6. 2. 11:57

第 十九 章 술독 앞에서 낳지도 않은 아기로 脅迫하는 請託


유월(六月)...
때는 하늘에서는 찌는 듯한 태양이 천지를 가득채우고,

들판에는 뜨거운 열기를 식히는 바람이 이따금 분다.
산하(山河)는 짙푸른 색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동선장(童仙莊),

북경성 외곽에 일년전부터 자리잡고 있는 한 채의 아담한 장원이다.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이 동선장은 북경에 살고 있는 모든 아이들의 놀이터로 제공되고 있다.
귀천을 가리지 않고 고관대작의 자식들로 부터 빈민의 아이들 까지

이곳에 오면 언제나 식사를 제공받고 단정한 옷을 입을 수 있다.
부모가 없는 고아들은 아예 그곳에서 숙식을 하기도 한다.
글을 가르치는 글선생도 있고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곳은 아이들의 천국이나 다름이 없는 곳이다.
일약 동선장은 북경성의 명물로 자리 잡았고 관민(官民)이 치하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도둑도 동선장에는 들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동선장은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는 곳이다.

하나 그런 동선장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가 어디 출신이며 나이가 얼마나 되었으며,

무슨 이유로 동선장을 창설하게 되었는지, 모든 것이 철저한 신비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신비를 애써 밝히려 하는 인물도 없었다.

이 삭막한 현실에 동선장 같은 인정의 샘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인물들이 위안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깔깔깔!}
{핫하하!}
{히히히!}
동선장을 울리는 이 천진무구한 웃음소리,

이 웃음소리 하나만으로 얼마나 평화스러운 곳인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지금, 십여 명의 아이들과 한 명의 청년이 어우러져 뛰어놀고 있었다.
따가운 햇살이 온유하게 부서져 내리는 넓다란 녹지(綠地)는

더위도 잊은 그들이 뱉아내는 환호성과 웃음소리에 뒤덮여 있었고...
그 광경을 조금 떨어진 한 화목(花木)에 비스듬이 기대어 바라보고 있는 한 명의 미녀가 있었다.

마치 선녀가 잘못 하계로 내로온 것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이었다.
인간 세상의 존재가 아닌 듯한 그들 두남녀는

헌데 어딘지 부조화스러우 보이면서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약관의 청년과 미녀!

그들 두사람의 모습은 매우 기이했다.

용모는 기가 막히게 준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나

웬지 사이한 냄새가 진하게 풍겨지는 까닳은 무엇일까?
또한 그들의 머리카락을 보면 더욱 기이한 느낌을 전해받는다.

백발(白髮)!

그들은 분명 얼굴은 젊은이건만 머리카락은 눈처럼 흰 백발이 아닌가?
그것은 보통의 백발이 아니라 죽음의 향기를 진하게 뿌리는 백발인 것이다.
문득, 백발 미녀의 입술이 무겁게 떨어졌다.
{이런 무료한 생활은 일찌기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이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그녀의 허무한 중얼거림이었다.
{육십 년의 세월을 한(恨)과 저주(詛呪)의 일념으로 살아온 우리 한천이기이 아닌가?

한데 무엇이지!?

이 땅에 잔혹한 저주를 뿌려야 할 우리들이 그 자들의 농간에 놀아나

천지파멸의 뜻을 점차 잃어 가고 있으니...}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건 말도 안된다. 이건 완전히 계획적이다.

그 자는 우리의 가공할 저주를 이런 식으로 스러지게 하려는 것이다.

저 아이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우리 한천이기의 잔인과 저주의 심성을 없애고 있으며

우리를 자신의 완전한 수족으로 부리려 하는 것이다. 실로 무서운 사람...}
한천이기(恨天二奇)...!
그렇다.
이들 백발청년과 백발미녀는 바로 마교에 의해 납치되어

마장탑(魔藏塔)에 갇혔던 칠십이기재들 중 두 명인 한천이기인 것이다.
이들이 마장탑의 붕괴와 더불어 사라진 후 반 년 만에 북경에 나타난 것이다.
{원천기! 저자는 철저하게 한으로 점철된 인간이 아닌 저주의 화신이 아닌가?

한데... 불과 반 년만에 저렇듯 타락해 버린 것이다.}
그녀는 다분히 회의적인 시선으로 원천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단 일푼도 지니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원천기...
그가 충격적이리만큼 변해 버린 것이다.
{원천기 만을 탓할 수 없다.

나 역시 칠십이기재의 한과 야망 망각하고 있었지 않았는가?}
그녀의 회색 동공에 천진한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이 들어온다.
{그렇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다는 것은...죽음을 의미하는 것...

더이상 이런 식의 삶을 지속할 수는 없다.}
돌연, 한천녀의 얼굴에 어떤 결연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오직 죽음이라는 말 외에는 할 줄 모르던 그녀의 얼굴에...
{때가 된 것이다. 등마제가 벌어지려고 하는 지금...

예정대로 우리 한천이기는 마교지존을 이끌고

무림에 우리의 복수와 한을 펼쳐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결단(決斷)을 누구에겐가 전하고자 화원을 가로질러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의 백발이 허허롭게 날리우고...
문득 아이들과 노닐고 있던 원천기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어린다.
{때가 되었는가? 이 땅에 나의 저주를 뿌릴 때가...}
이 말은 너무 나직하여 그의 몸에 매달려 있는 어린아이들도 듣지 못한다.
{마교지존!

그는 이 원천기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런 식의 장난으로 이 원천기를 지옥에서 끌어내리려 했다면 어리석은 짓이지!}
원천기는 아이들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웃었다.
{까르르! 아저씨는 바보다. 혼자 중얼거리다가 혼자 웃는다.}
천진하게 웃는 아이들...
원천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는 바보다.

그러나 세상에서 바보는 살아남아도

똑똑한 척 정의로운 척 하는 자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햇살이 어둡게 그의 몸에서 부서진다.
아이들이 목소리를 맞추어서 물었다.
{왜?}
{내 뜻 이거든...}

-까르르

다시 터지는 귀여운 웃음들...
원천기!
칠십이기재 중 가장 무서운 지혜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뛰어남을 철저하게 감추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칠십이기재 중 살아남을 수 있는 두 명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잃어 버린 것처럼 행동하며

은밀한 가운데 자신의 뜻을 실행해 나가는 것이다.

헌데 멀리서 그런 원천기를 주시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일신에 눈부시게 흰 백의(白衣)를 걸치고

그 옷자락이 표표히 날리는 가운데 만상에 자욱이

내면의 신비로운 기운을 풍겨내고 있는 이 인물!
문사건을 단아하게 두른 그 용모는 탈속한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투명하도록 맑은 동공에 가득 머금고 있는 어두운 그늘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소일초였다.
그는 한천이기의 가공할 잠재력을 인식하고 있었다.

하나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는 소일초다.

까짓 놈들 정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버리면 그만 인 것이다.

* * *

<마교지존이시여!

칠십이기재의 이름으로 이제 당신에게 첫번째 임무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 임무는 바로 등마제에 참석하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첫번째 저주를 내리는 것입니다.
지난 반 년의 세월을 당신들의 뜻대로 따랐으니,

이제 우리 한천이기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주소아는 서탁에 놓인 한 장의 밀지를 읽은 후 조용히 시선을 황촉불에 두었다.
서실(書室)의 창 밖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황촉불만이 은은히 서실을 밝히고 있었다.
그 불빛 아래 주소아의 아름다운 얼굴은 타는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때가 되었는가? 일초는 어떻게 하길 원할까?)
그녀는 밀지를 들어 황촉불에 태운다.
(등마제와 함께 시작되는 칠십이기재의 첫번째 안배라!)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하나 그녀의 마음은 어둡기 이를 데 없었다.
지난 반 년의 세월,

그녀가 이 동선장에서 보내며 한 일은 소일초와의 어른스런 장난도 있지만

환상처럼 사라진 백인장의 종적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동안에 백인장의 실종에 대해서 알아 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소아와 소일초가 세상에 다시 나왔을 때는 이미 백인장은 사라진지 이 년이 지난 때였다.
짐작이 가는 곳은 다 뒤졌다.

백인장의 파양호 고장(古莊)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파양호를 이잡듯이 뒤졌건만 부주(浮舟)마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들은 한천이기의 협력을 얻어 그들은 북경에 동선장을 세웠다.
사라진 세력들을 찾기위한 정보를 얻기 위해

무사들을 고용할 작정을 소일초가 했으나 주소아가 고집을 부렸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로 만들자고...
그녀의 의견인 즉 백인장이 사라진 것은 스스로의 뜻에 따른 것 같으니

궂이 힘들게 찾지 않아도 때가 되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며칠을 소일초를 못살게 굴며 떼를 썼다.

침상에서도 한잠도 자지 못하게 괴롭히고, 울고 불고 하였기에

마침내 소일초가 항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불쌍한 아이들을 꼭 도와 주어야 겠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에 가까웠던 것이다.

황촉불은 그녀의 마음처럼 고요히 흔들리고...
(문제는 등천마세와 정천보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이 신비롭다.

백인장과 삼성무림청, 그리고 청옥검궁이 사라지고

그 두 세력이 출현한 것이 어찌 우연일 리가 있겠는가?)

드르륵!
그때 문이 열리면서 소일초가 들어왔다.
{그들이 움직였지?}
주소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어떻게 하면 좋겠어?}
{특별히 해야할 일도 없을 것 같은데 한번 미친 척 하고 시키는 대로 해줘보지!}
{그래도 될까?}
{그러다 수 틀리면!}
소일초가 자신의 목을 손으로 치는 흉내를 낸다.
{등마제에 참석하라고 했어.}
{우리한테 딱 맞는 역활인데 왜, 아무리 생각해도 우린 착한 사람은 아니야.}
갑자기 주소아가 소일초에게 바싹 다가앉는다.

그리고 얼굴을 가까이 대면서 말했다.
{우리 술이나 마실까?}
{또 갑자기 왜 이럴까? 불안하게...

전 번에 시달린 이후로 난 너한테 학을 뗐어.}
{그러지 말고 우리 술이나 마시자 응? 내가 가지고 올께, 잠깐만 기다려.}

곧 소일초와 주소아는 침상 한가운데 술독을 놓고 마주 앉았다.

그들의 몸이 작지 않아서 침상이 꽉 차는 것 같았다.
술이 몇 순 배 돌고 나자 주소아가 침울한 표정으로 소일초에게 말했다.
{나... 이젠 예쁜 아기를 낳겠다는 꿈은 포기해야 할까봐.}
{?}
{네가 전에 이야기 했잖아, 고모가 말했다면서...}

{아! 그거...}
{그래, 실은 내가 그 말을 들은 후에 불안해서 내공을 세 군데 분산시켜 놓았거든...!}
{...!}
{그러니까. 내가 전력을 다 하려고하면 그걸 다시 단전으로 되돌려야 할 거란 말이야!}
{...}
{그래서 말인데... 너는 내가 아기를 못갖는 걸 택하겠니?

아니며 혼자서 등마제에 참석하는 걸 택하겠니?}
은근하게 물어오는 주소아의 말을 들으며 소일초의 안색이 홱 변했다.
{결국 그 소리였구나.

나 혼자 등마제에 가라고? 싫어. 절대 혼자는 안가.}
{이 바보야! 거기서 삼수(三秀) 같은 고수를 만날 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돼서 내가 아기를 못낳게 되는게 그렇게 좋아?}
소일초가 심트렁하게 말했다.
{꼭 그렇다고 도 할 수 없잖아!}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주소아는 강경하게 나왔다.
이제 소일초는 주소아 없이는 어디에도 가려고 하지 않았다.

주소아가 옆에 없으면 도무지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다 싸우면 돼잖아! 같이 가자, 응?

손가락하나 까닥하지 않아도 되게 해줄께... }
{흥, 난전이 벌어지면 어떻게 나를 지킬 수 있단 말이야.

어쩌면 한 몸지키기도 바쁠텐데.}
갑자기 소일초가 술잔을 바닥에 팽개쳤다.
{좋아, 그럼 나도 등마제에 가지 않겠어. 까짓 년놈, 뭐라하면 죽여버리겠어.}

{그러지마. 우리도 등마제에 가볼 필요는 있어.

그곳에서 어떤 단서를 찾을 수도 있단 말이야.

꼭 그들의 말이 아니라도 나도 생각 중이었어.}
주소아가 달랬다.
{그리고... 거기 가면 무림의 여자악당들도 많이 올거야. 너 여자 좋아하잖니?}
{그래도 너만큼 예쁜 여자는 없을 거야.}
소일초의 시무룩하게 하는 말에 주소아가 픽 웃었다.
{알긴 아는구나.}
{난, 못가겠어! 어떻게 너도 없이 혼자가?}
{어린애 같은 소리말구,

네가 돌아 올때 까지 나는 아예 지하실에 들어가서 혼자서 책만 볼께.}
{좋아, 그럼 빨리 갔다 올테니까,

아예 얼굴에 면사를 가리고 있어, 아무도 못보게.}
겨우, 소일초가 마지못해 승낙했다.

* * *

동선장의 밤이 깊었다.
소일초는 알몸으로 주소아의 몸위에 올라가 있었다.

침상에는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주소아 역시 알몸이다.
이미 완전한 성인(成人)인 그들의 몸,

소일초의 나이는 이제 십팔 세, 주소아는 이십세이니

백송균화의 신비한 효과가 아니라도 완전히 발육했을 나이다.
주소아의 몸은 완벽한 미의 여신의 것이었고,

소일초 역시 놀랄만큼 크고 강한 남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서로의 몸을 마찰하며 흥분에 젖어들고 있었다.

부드러운 살과 살이 미끌리듯 스치면서 짜릿한 흥분을 일으킨다.
이런 순간마다 주소아는 역설적으로 심한 고통에 빠지게 된다.

강한 육체적 욕망이 끌어올라 스스로 몸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되기 때문이다.
소일초의 몸을 으스라져라 끌어안으며 뜨거워진 부분을 마찰했다.
소일초 역시 그러한 사정은 마찬가지,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며 주소아의 나신에 자신의 알몸을 비벼댄다.

주소아와 소일초의 침실에서 이십 여장 떨어진 한칸의 아늑한 규방(閨房),
은은한 황촉불 불빛 아래 한천녀는 동경(銅鏡)을 넋나간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야심한 시각, 달빛도 조용히 나래를 접는 이 시각,

왜 이 여인은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하염없이 동경 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
문득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살포시 양손으로 감싸쥐었다.
(아름답다.)
요즘엔 부쩍 자주 보게 되는 자신의 얼굴때문인가?

그녀는 새삼 자신의 아름다움에 스스로 심연같은 충격마저 느꼈다.
자신이 느끼기에도 동경에 비추인 그 아름다움은 극에 달해 있었다.
과거 얼마나 많은 사내들이 이 얼굴 하나에 울고 웃었던가?

그녀의 얼굴 자체가 슬픔이요 환희였으며, 또한 절망이었기에...
하나, 이젠 과거의 일이다.
지금 그녀의 나이는 팔십 하고도 하나, 지나간 세월이 안타깝기만 하다.

(세월은 이미 가버렸다.

나의 아름다움은 그대로이나 나는 너무나 많은 세월을 살아버린 것이다. 한과 저주로...)
그녀의 길고 섬세하며 아름다운 손은 조용히 백발(白髮)을 쓸고 내린다.
백발...,

마장탑에 있을 당시에만도 그것은 흑발(黑髮)이었다.
하나 반 년 전 마장탑의 붕괴와 더불어 밖으로 나서면서

그녀의 흑발은 급격한 변화를 일으켰다.

오랜 세월 햇빛을 볼 수 없었던 생활에서 변화하자

그녀의 흑발은 백발로 화하고 말았던 것이다.
원천기 역시 이 경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무정무심한 여인에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다만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 것 외에는 달리 의미가 있을리 없지 않은가?
한데 보라!

치렁치렁한 백발을 쓸어 내리는 그녀의 손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지 않은가?
(이해할 수가 없다.

팔십 하고도 하나인 살아온 그 긴 세월 동안

스스로 여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지 않았던가?)
그렇다.

그녀는 마장탑에 잡혀가기 전에는 남자를 우습게 알았기에,

또한 그곳에서는 한과 저주로 세월을 보냈기에...

자신이 여자임을 느낄 때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한데 마장탑을 나온 후 밤마다 나는 고통에 몸부림 친다.)
그녀의 눈빛이 황촉불빛 아래서 흐려진다.
(한천녀! 네가 이래야 하는가?

진정 이래야 하는가?

너는 이 땅 이 하늘을 파멸시킬 저주의 칠십이기재의 하나가 아닌가?)
그러나 그녀의 내심과는 달리 온통 죽음의 기운으로 뭉쳐진

그녀의 회색빛 동공에 심한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

한 사람...!
여인이기를 거부하는 그녀의 내심에 끊임없이 여인을 깨우고 있는 사람...!
바로 다름아닌 같은 여자인 주소아였다.
주소아가 청사무로써 그들을 깨웠을 때 두 여인 사이에는 영혼의 깊은 연대가 구축되었다.
그리하여 밤마다 소일초와 잠자리를 갖이하며,

서로의 몸을 강렬히 애무하는 그녀로 인해

수동적(受動的)인 영혼의 교감을 가진 한천녀는 고통스러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능동적인 교감을 가지는 주소아는

한천녀가 느끼는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지만

한천녀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매일밤 주소아와 함께 흥분하고 주소아와 함께 몸을 떤다.
한천녀는 지금 동경과 씨름하며 백발을 바라보고 있지만...
소일초와 주소아!
그렇다.
거울 속에서 아니,

그녀의 뇌리에서 환히 맴돌아 영혼을 적셔오는 모습은

이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한 쌍인 소일초와 주소아의 끌어안고 있는 나신이었다.
한천녀는 몸을 세차게 떤다.

환상 속에 나타나 보이는 주소아와 소일초를 느끼면서

그녀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흥분으로 전율하기 때문이다.
(하필이면...하필...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가?)
황촉불이 흔들리고,

그녀의 마음 또한 몸처럼 무섭게 흔들린다.

몸으로 전해오는 흥분을 짓누르느라 고통스러운 것이다.
(마교지존!

그들은 우리 칠십이기재의 노예일 뿐인데...

그는 단지 우리 칠십이기재들의 천지파멸을 대신할 이용물일 뿐인 데...)

이 밤도 소일초와 주소아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한천녀...

그녀의 아미가 무섭게 경련을 일으킨다.
(팔십이 넘은 몸으로...

이렇게 육욕(肉慾)에 몸부림쳐야 하다니...)
순간,
쨍그랑...
그녀는 거칠게 동경을 집어던진다.

밤의 정적을 깨며 금속성이 여운처럼 길게 울렸고...

한천녀의 눈빛은 파도처럼 한동안이나 흔들렸다.
그녀는 다시 황촉불을 껐다.

순간 실내는 죽음과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어둠...

그녀는 밝음보다 어둠에 익숙해 있었다.

지난 세월을 그녀는 거의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 속에서 그녀는 마교에 의하여 파괴당한 육체를 되살리기 위해

인간의 한계를 넘는 수련을 쌓았고 온갖 마공을 익혀 왔던 것이다.
또한 죽음과 저주, 한(恨)를 온통 그녀의 영혼에 채웠던 것이다.
그래서 육욕이 몰아치는 밤마다

그녀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되새기곤 했다.
이 밤도 그녀는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
어둠 속에서 과연 그녀의 마음은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달빛은 무심하게 실내로 흘러들고...

그녀는 달빛 만큼 자욱하게 자신의 영혼 속에 가득 차오르는

죽음과 저주의 기운을 느끼고 진한 회색빛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는 죽음의 미소였다.

그리고 저주의 미소였다.

한데, 문득 그녀의 영혼을 조용히 적셔오는 기운이 하나 있었다.
그 기운은 오직 그녀만이 느낄 수 있는 무심무정(無心無情)한 것이었다.
(이런 기운을 풍길 수 있는 인물은 천하에 오직 한 사람 뿐이다.)
그렇다!

바로 원천기다.
한천녀는 지금 자신이 있는 이 규방을 향해 다가오는 인물이

바로 원천기라는 사실을 감지하고,

어둠에 동화되어 있는 그녀의 두 눈에 강한 의혹의 빛을 떠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두 눈에 어떤 동요의 빛이 일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그녀는 한 장소만을 뚫어지게 주시할 뿐이었다.
한쌍의 눈망울...

유리처럼 투명하고 심연처럼 고요한 죽음을 담고있는 회색 눈망울!
그 눈망울의 주인공은 바로 원천기다.
한데 이게 웬 일인가?

그 죽음을 담은 회색 눈망울 깊숙한 곳에서

무섭게 꿈틀거리는 저 욕정(欲情)의 물결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의 전신에서 풍겨오는 뜨거운 유혹의 기운의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한천녀의 회색빛 눈동자에 언뜻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원천기! 너도 겨우 이 정도 였던가?)
다가선다.

뜨거운 음욕의 숨결을 토하며 원천기가 그녀를 향해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이미 마장탑에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모든 한과 저주를 가졌던 원천기가 아닌가?
한데, 그런 원천기가 발정난 짐승처럼 어둠을 헤치며

소리없이 한천녀의 곁으로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저 자도 주소아와 수동적 교감을 갖기 때문에 정욕이 다시 되살아 난 것인가?

아니면 나의 미태에 현혹이 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녀의 내심 깊숙한 곳으로부터 죽음의 기운이 무섭게 솟구쳐 오른다.
그녀가 생각한 원천기란 이런 정도의 인물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최소한 자신의 미에 현혹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는 완벽한 육욕의 한계를 넘은 인물이리라 생각했거늘...

그래서 자신에게 언제나 무심함을 보여왔던 그이거늘...
그리하여 그녀의 가슴에 알 수 없는 실망과 분노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른다.
그때 원천기의 숨결은 끈적끈적한 열기(熱氣)를 담고 가까와지고 있었다.
한천녀의 그에 대한 대한 실망은 무서운 살기로 변해갔다.
(우리 칠십이기재들의 최고 인물로 선택된 자가 이정도에 불과하다면...

죽여야 한다.

그것이 처절하게 죽어간 칠십이기재들의 뜻일 것이다.)
살기!

그리고 그 속에서 뜨거운 숨결이 흐른다.
그리고 숨막히는 긴장이 흐른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한 그루의 청송(靑松)에 기대어

달빛을 벗삼아 반짝이는 눈빛으로 한천녀의 방을 주시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눈보다 흰 백의에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한 쌍의 남녀!

바로 소일초와 주소아였다.
언제 옷입고 나왔는가?

그들은 왜 이 밤에 그 장난(?)을 일찍 멈추고

기대에 가득찬 눈으로 하염없이 한천녀의 방을 주시하고 있는 것인가?
소일초가 긴장을 이기지 못하는 듯 꼴깍 침을 삼켰다.

그렇다.

그는 지금 긴장하고 있었다.

한천녀의 방에 불빛이 사라지면서 그는 급격하게 긴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불이 꺼졌다.)
씩----!
음흠한 웃음을 얼굴가득 띄면서 주소아를 힐끗 보았다.
주소아는 가만 있으라는 듯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불이 꺼진 방,

그 방에 원천기가 들어선다.
시간이 흐른다.
웬지 숨이 가빠져 오는 것이다.
그는 숨을 가다듬으며 주소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살그머니 그녀에게 몸을 밀착시킨다.

원천기,
그의 회색 눈동자는 욕정으로 번들거리면서 기억을 더듬기 시작한다.
(우리가 최후의 두 사람으로 선택된... 그때 이후로,

나는 단 한번도 그녀를 타인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나의 일부분이라 생각했다.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린다.
(이 밤...

소일초와 주소아가 침상에 누웠던 순간부터

나는 처음으로 한천녀가 나에게서 너무 멀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비로소 그녀를 여인이라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내가 얼마나 한천녀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는 주먹을 으스라져라 움켜 쥔다.
(한천녀! 한천녀!)

부서진다.
어둠이 부서지고...

그의 모든 쌓아 올렸던 한과 저주가 소리없이 무너지고 있다.

원천기는 한천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불덩이였다.
턱 끝에 차오르는 뜨거운 김처럼 더운 숨결이 한천녀의 얼굴에 자욱이 뿜어지고...

그의 눈빛은 더욱 혼탁하게 타오른다.
하나 침묵으로 이어지는 어둠 속에서 한천녀의 눈빛은 더욱 어둡게 가라 앉는다.
(이 자를 죽이면 우리 칠십이기재들의 한과 안배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동공에 떠오르는 심한 갈등의 빛...
그때였다.

원천기가 거칠게 그녀의 몸을 끌어 아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합쳐진다.

수 십 년의 시공을 넘어서 두 개의 운명의 끈이 하나로 합쳐지고 있는 것이다.
입술이 하나가 되고 두 사람의 몸이 하나로 합일된다.
하지만 한천녀의 입술은 차갑다.

원천기의 몸은 뜨거웠건만 그녀의 몸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이 악마의 그림자가 더욱 진하게 원천기의 전신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죽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