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十一 章 馬車속에서의 실랑이
찌는
듯한 폭염(暴炎),
유월의
태양은 그 맹위를 떨치고 머리를 덮지 않으면 골이라도 익혀버릴 작정인 것 같았다.
숨막히는
더위,
이따금 부는 바람이 없었더라면 아마 길가는 사람은 몽땅
일사병으로 쓰러져 죽고 말았을 것이다.
-양양(讓陽),
이곳
역시 태양은 콩깍지를 튀길 뜨거운 햇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황혼(黃昏)의
노을을 감상하며 오래 전에서 부터 양양의 요로에 자리잡은
한
객점(客店)의 창가에 앉아 바쁘게 술잔을 기울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몸에는
백의를 걸치고 있었으며 문사건을 아무렇게나 두른 그는
일견하기에도 지독한 술꾼같은데 나이는 대략 이십 삼사 세 가량으로 보였고
용모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객점에는
수십여 명의 주객들이 있었지만
누구
하나 이 청년을 주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백의
청년은 바로 소일초였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역근천골공으로 바꾼 후 이곳 양양까지 온 것이다.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등마제에 참석하고자
주소아에게
억지로 떠밀렸던 것이다.
자기가
가면 아기를 낳을 수 없게 된다는 둥,
정말 가지 않겠다면 도망쳐 버리겠다는 둥,
오만협박과 회유에 넘어가 하는 수 없이 길을 나섰던 소일초,
주소아가 옆에 없으니 도무지 갈비라도 한대 빠진듯 가슴이 허전해서
길을
나서자 마자 술로 빈 가슴을 채우고 있는 그였다.
객점의
인물들은 대부분이 무림인들이었다.
정파무림인들보다
사파의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때,
그들의 화제는 모두 등마제였다.
소일초의
술먹는 귀도 그런 소리는 알아들어서 그들 중 상당수의 인물들이
등마제에
초대받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등마제가
이틀 남았던가?)
그는
술 한 모금을 삼키고 아예 눈을 감았다.
무림인들이
떠드는 소리를 더이상 듣고 싶지도 않았고
아무
것도 보고 싶지도 않았다.
눈을
감으나 뜨나 오락가락하는 것이 주소아의 얼굴인데...
옆에
있을 땐 당연했던 것들이 없으니 미칠 것 같았다.
{내
이럴 줄 알았어! 그래서 안올려고 했는데...}
중얼거리며
오직 주소아의 환상만 잡고 있었다.
천하의
소일초도 결국 주소아와의 애정의 ?에 깊이 걸려들고 만 것인가?
그는
오직 빈 속을 술로 채우기만 한다.
그때였다.
{함께
앉아도 되겠어요?}
교태가
흐르는 여인의 음성이 그의 귀에 들려왔다.
소일초가
성가신듯 눈을 떠 보니
면사로
얼굴을 가린 홍의의 여인이 맞은 편에 서 있었다.
소일초는
무관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술을 들이키면서 다시 눈을 감아 버린다.
맞은
편에 앉은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사연없이
마시는 주객(酒客)은 아닌 듯 싶군요.}
{당신
역시 사연없는 사람은 아닌 듯 싶은데... 취풍녀(吹風女)!}
아무렇지도
않게 주정처럼 내뱉는 소일초의 말,
헌데
취풍녀라니...
홍의의
여인의 두 눈에 경악의 빛이 지나갔다.
그러나 주위에서 떠들며 이야기 하는 소리에
소일초의
말은 거의 옆으로 퍼져나가지 않았다.
{부인할
수 없군요. 어떻게 나를 알아보았죠?}
홍의여인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취풍녀(吹風女)!
그녀의 물음은 곧 자신이 취풍녀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천하십이대고수중 한명으로
몸에서
피리를 부는 듯한 소리를 낸다는 신비한 여인 취풍녀!
헌데
지금 이 여인의 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를 않았다.
아마도
어떤 특이한 무공이나 방법으로 소리를 없앤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일초는 용케 그녀가 취풍녀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아마도
역시 몸에서 피리 소리가 끊이지 않는 주소아와 오랫동안 지내온 덕분일 것이다.
소일초는
취풍녀는 무시하고 여전히 술을 들이켰다.
{제길
앞에 소아가 있어야 되는 건데...}
취풍녀는
무슨 소린 지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한다.
그녀는
이내 비워진 그의 술잔에 술을 따라부어 주면서 은근하게 말한다.
{당신은
무척 신비한 사람이군요.
당신에
대해서 제가 알 수 없을 까요?}
소일초의
눈이 부릅 떠졌다.
{알릴
것도 없고 알고 싶은 것도 없어. 단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
{집에
돌아가지 못할 사연이라도 있어요?}
소일초의
태도에 아랑곳 없이 친근하게 취풍녀는 물어오고...
{마누라에게
쫓겨났어!}
{혼인을
하셨군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일하러
가지 않으면 도망가 버리겠데!
도망가
버리면 어떻게 나 혼자 살아!}
소일초의
목소리는 점점 처량해져 갔다.
{저런!
부인께서 무척 아름다우신 모양이죠?}
{아니
정반대야, 아무도 그녀를 쳐다보려하지 않아.}
취풍녀가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그런데도
부인이 그렇게 좋아요?}
{그래,
나는 모자라는 사람이라 그 여자 없으면 못 살아.}
{부인
성함이 무엇이지요?}
소일초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흘렸다.
{취풍녀(吹風女)!}
{네?}
취풍녀는
자신의 이름을 소일초가 부른 줄 알고 의아하게 대답한다.
그녀야 꿈에도 소일초의 마누라가 자신과 똑같이 몸에서
피리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 턱이 없고,
{취풍녀야!}
소일초는
다시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고
{호호호호...}
취풍녀는
그제서야 알아듣고 교소를 터뜨렸다.
{당신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농(弄)이 아주 재미있어요.}
그녀는
다시 소일초의 빈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당신
이름은 뭐죠?}
{무적검(無敵劍)
승취풍(乘吹風)!}
{진짜
이름 말이예요.}
취풍녀가
살짝 눈을 흘기면서 말한다.
승취풍이란 취풍녀를 올라탄다는 뜻이 아닌가?
당연히
취풍녀는 소일초가 자신을 희롱하는 줄로 이해할 수 밖에!
{무적검
압취풍(壓吹風)!}
하지만
소일초의 입에서 나온 다른 이름이란 것도
승취풍이란
이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올라타는
것(乘)이나 누르는 것(壓)이나 매일반이니...!
{못
말릴 분이시군요. 좋아요 더 묻지 않겠어요. 술이나 마셔요.}
하지만
취풍녀는 화를 내지 않고
비워져
있는 소일초의 잔을 가득 채워주며 점소이를 불렀다.
{여기
술 좀더. 그리고 이 분이 지금까지 술을 얼마나 드셨지?}
{죽엽청
한 병 하고 구운 닭 한마리입죠.}
{이
주담자는?}
{그건
물입니다. 손님께서 물을 많이 마시니까
아예
채로 갖다 달라고 하신거죠. 벌써 두 주담자 째죠.}
{술이나
더갖다 줘.}
점소이를
보낸 취풍녀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주담자에
가득 담겨져 있는 것은 분명히 소일초가 부어마시던 술이었다.
그런데
점소이는 물을 갖다 줬다고 하니...
(점소이가
물을 갖다준다는 게 잘못해서 술을 갖고 왔나?)
자칭
무적검 압취풍이라고 밝힌 소일초는
여전히
주담자를 기울여 술을 마시고 있다.
{저도
한 잔 주세요.}
취풍녀가
잔을 들이 밀며 소일초에게 말했다.
{직접
따라마셔. 나는 술을 남에게 따라주는 사람이 못돼.}
{너무
냉정하게 굴지 마세요. 잔은 주고 받는 거라잖아요.}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직접 부어서 잔을 채웠는데,
아무리
봐도 죽엽청은 아니다.
향긋한,
이름도 모르는 술이었다.
맛도
착 감기는 것이 그녀는 아직 그처럼 좋은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다.
취풍녀는
단번에 마시고 다시 따라부었다.
{대체
무슨 술이길래 이렇게 맛이 좋죠?}
그때
점소이가 그녀가 주문한 술을 가지고 왔다.
소일초의
몸이 건덜 거리면서 잔을 들이키고,
{술은
무슨 술, 점소이가 맹물이라지 않았나?}
취풍녀는
술을 마시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향기도 맛도 사라지고
닝닝한
맹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왠
도깨비 장난인가 싶어 다시 주담자를 따라보니 분명히 맹물이다.
그런데도
소일초는 천연덕스럽게 주담자를 기울여 잔을 채워 마시는데
그때보니
또한 영락없이 자기가 마셨던 술이다.
{당신은
정말 신기해요. 무슨 요술이죠?}
그녀는
주담자를 기울여 나오는 물을 부어버리며
소일초를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네
술이나 마셔.}
말을
끌면서 소일초는 푹석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드르렁!
드르렁!
그리고
코를 골기 시작했다.
취풍녀는
난감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부축하여 객실(客室)로 데리고 올라갔다.
× × ×
객점에 있는 무림인들이 모두 사파의 인물들 만은 아니었다.
상당수의
정파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을
철저하게 감춘 채 말없이 음식과 술을 마시고 있는 인물들...
그들의 몸에서는 가공할 기도가 풍겨지고 있었으며
두
눈에 감도는 은은한 정광은 그들이 정파의 고수라는 사실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정천보에서 파견한 정천수호군에 속한 일부 인물들이었다.
원천기와
한천녀는 시선은 황혼에 두고 있었으나,
객점의
인물들을 빠짐없이 살피고 있었다.
한데
그들이 보기에,
정파인들은
누군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듯 하지 않은가?
원천기와
한천녀의 눈망울에 언뜻 진한 호기심의 빛이 떠올랐다.
한데
그때였다.
원천기와
한천녀의 얼굴에 미미한 변화가 인 것은...
그들의
시선이 알게 모르게 창 밖의 대로(大路)로 향했다.
대로,
그곳에
소녀(少女)가 나타남으로 인해서
객점의 많은 정천보의 인물들의 얼굴에 떠올라있던
초조의
빛이 사라짐을 느꼈던 것이다.
(보통
신분의 소녀가 아니겠군.)
원천기와
한천녀는 그 소녀를 유심히 살폈다.
나이는
이십여 세 안팎으로 보였으며 일신에는 녹의(綠衣)를 걸치고 있었다.
누가
봐도 그 소녀는 무림인이 아니라고 느낄 것이다.
하나,
원천기와 한천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소녀는 자신의 기도를 감추고 있을 뿐 분명히 가공할 무림의 고수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소녀의 용모는 또 어떠한가?
결코
한천녀에 뒤지지 않는 듯 하지 않은가?
그
소녀는 빠른 걸음으로 객점을 향해 걸어 들어오고 있엇다.
한데
그때였다.
두두두두!
대로의
저쪽으로부터 뿌연 황진을 일으키며 다가서는
한
대의 사두마차가 있었으니...
시야에
들어왔다고 느낀 순간 마차는 이미 대로의 중앙을 거쳐
반대편으로
아득히 사라져 갔다.
한데
마차가 사라진 것은 문제가 아니었으나...
놀랍게도 그 엄청난 기도를 안으로 내포하고있던 소녀가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이 아닌가?
원천기와
한천녀는 눈을 마주 보았다.
(납치?)
그것은
분명히 납치였다.
한데
객점 안의 고수들이 그것을 보지 못했을 리 없건만,
정천보의 인물들의 표정은 마치 이런 일을 예견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몸을 일으켰다.
원천기와
한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된
납치...!)
그
납치는 정천보의 인물들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군.)
그들은
묵묵히 객점의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상인
차림을 한 한천이기 중 원천기가 무심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누가
먹힐 것인가? 입 큰 놈인가 배 큰 놈인가?}
* * *
휘장이 드리워진 객점의 한 방,
소일초가
정신없이 침상에 골아떨어져 있다.
그리고
침상 옆에서 그를 지켜보는 홍의면사녀,
바로
천하십이대고수중 한명인 취풍녀(吹風女)였다.
{정말
신비한 사람이야! 마치 요술장이같아!}
그녀는
손뼉을 딱딱 쳤다.
스스스!
그러자
그 방의 한쪽 귀퉁이에서 한명의 검은 복면인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여기에
있다가 시간이 되면 이 사람을 데리고 합류해라.}
말을
마친 후 취풍녀는 창 밖으로 튀어나가 버렸다.
흑의인은
해가 저물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 * *
밤(夜),
달빛도
별빛도 없는 칠흑의 밤을 가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일신에
칠흑같이 검은 흑의를 걸친 무심냉막한 눈빛의 복면인이었다.
한데
그의 옷 소매을 보라!
하나의
붉은 꽃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지 않은가?
여섯
개의 꽃잎을 가진 섬?한 혈화(血花),
그것의 심에는 끔찍하게도 작은 해골이 그려져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도 붉은 꽃잎 속에서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악마화(惡魔花)!
그것은
바로 악마화가 아닌가?
등마제(騰魔際)의 신물(信物)과 같은 그것은
오직 등마제에 참석하는 인물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지금 그 악마화는 복면인 검은 소매에 새긴듯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복면인의 어깨에는
한 명의 청년이 축 늘어진 채 매어져 있었다.
바로
소일초였다.
소일초는
물론 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
객점에서 나온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는
줄곧 복면인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다.
(이
자가 악마화의 표기를 갖고 있는 것으로보아
등마제를
관장하는 무리와 연관이 있음이 분명하다.)
한데
복면인의 신법은 놀라우리만큼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발
끝이 지면에서 한 자 이상 뜬 채 허공을 부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절정의 내가고수가 아니면 전개할 수 없는 절정허보(絶頂虛步)였던 것이다.
(취풍녀!
이자가 취풍녀의 일개 하수인이라면
등마제를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인물들은 취풍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말인데...)
한편
복면인은 막 한 절곡에 이르고 있었다.
사방이
울창한 송림에 휩싸인 절곡이었다.
한데
그곳의 중앙에는 한 대의 사두마차가 어둠 속에서 우뚝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마차
동체가 검은 빛인 그 마차는
얼마
전 양양의 한 대로상을 스쳐갔던 바로 그 마차였던 것이다.
(악마의
사두마차...)
소일초는
한천이기의 전음을 생각하며 복면인이 느끼지 못하게 마차를 살폈다.
그때
복면인은 마차에 바짝 접근한 후 공손히 부복했다.
{등마제주(騰魔祭主)를
배알하옵니다.}
고오오!
순간
천지사방이 일시에 멈추는 듯한 적막과 함께 어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어둠의 움직임은 바로 검은 사두마차로부터 시작이되고 있었으며...
어둠의
폭풍은 소일초를 휘감더니 곧장 마차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실로
놀라운 변화였다.
그리고
처음에는 송림을 울리고
차츰
어둠을 울리고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으니...
{수고했다.}
이
소리는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는 것이엇다.
그리고
여인의 음성인지 사내의 음성인지조차도 구별이 안간다.
{이제
그대는 돌아가도 좋다.}
스스스!
이
말이 떨어지자 하나의 핏빛이 사위에 진하게 뿌려지고...
어둠을 해치며 들려오던 그 신비한 음성은 이 마차의 전면에 그려진
악마화
속의 푸른 해골에서 부터 흘러나오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
흑의복면인은 더욱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더니
이내
몸을 날려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두두두!
그러자
사두마차도 절곡을 빠져 나와 무서운 속도로 어디론가 질주하기 시작했다.
어둠의 폭풍을 날리며...
× × ×
마차
안,
사두마차의
안은 상당히 넓었다.
사방은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철창으로 완전히 막혀 있어마치
사방이 완전히 외부와 차단된 하나의 뇌옥(牢獄)을 연상하리만큼 음침했고 칙칙했다.
어둠의
공간은 질주하는 마차의 흔들림에 따라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 떠있는 열 쌍의 눈동자가 있었으니...
그
눈빛은 모두 어둠속에서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단
한 쌍의 눈동자를 제외하고는...
소일초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꾸무럭 거리고 있었다.
어둠을 대낯처럼 환하게 볼 수 있는 소일초는
광채없는
눈으로도 마차의 내부를 선명하게 살필 수가 있었다.
마차
안에는 그를 포함하여 정확히 열 명의 남녀가
이리저리
쓰러져 있거나 눕혀져 있었다.
그들
중에는 양양의 대로상에서 납치당한 소녀도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무심하고 초연한 표정을 짓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인물들의 나이는 불과 약관 전후로 보였는데
그들의
용모는 천하에 짝을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수려한 것이었다.
남자가
넷, 그리고 여인이 넷...
소일초를
포함하여 열 명의 남녀들은 어둠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살피느라 애쓰고 있는 표정이 역력했다.
두두두!
마차는
어디론가 질풍처럼 질주하고 있었고
마차의
유리문을 통해서 흐릿한 달빛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소일초는
생각했다.
이들
모두가 납치당한 인물들이며
일견하여 서생과 여염집 규수들인 것처럼 보이는 것 같지만
실로
절정의 고수들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군.
저들에게는 제각기 가공할 무공이 있는 것 같은데...
스스로의 무공을 애써 감추려 하고있다.
아마도
다들 일부러 잡혔겠지!)
짧은
순간 마차 내부의 인물들에 대해 어느 정도를 살핀 소일초는
이곳의 대부분의 인물들이 어쩌면 자신과 같이
어떤 목적을 두고 계획적인 납치를 당한 것이라 짐작했다.
문득
그는 마차 안에 감돌고 있는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모두가
구렁이 입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두꺼비들이었군,
같은데
몸을 두고 있으니 통성명이나 하지!}
그의
음성은 술이 들 깬 듯 일정한 높낮이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눈동자가 흠칫하면서 그를 주시했다.
하나
그의 물음과는 상관없이 없다는 듯
마차
안은 여전히 눈을 빛내는 침묵 만이 흐르고 있었다.
{음!
구렁이가 혹시 먹지 않을까 두려운 모양인데...}
그는
더욱 더 마차 안의 인물들에 대해서 호기심을 느꼈다.
(정천보인가
뭔가 하는 데서 파견한 놈들 이겠지?
신분이
드러날까 두려워 말도 못하는 겁장이들...)
그때
그는 다시 불쾌한 듯 물었다.
{어차피
우리는 한 배를 탄 신세가 아니가?
사람이
통성명을 청했으면 무슨 말이라도 있어야 되지 않나?}
문득
소일초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대는
이곳이 어디인지나 알고 그 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것인가?}
전음입밀(傳音入密)의
수법으로 발해진 음성이었다.
소일초는
자신에게 전음을 발한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
인물은 바로 양양의 대로상에서 납치당한 소녀였다.
물론
그 장면을 보지 못한 소일초로서는
그 소녀가 대로상에서 납치를 당한 소녀인지
침실에서 납치당한 소녀인지 알 수가 없지만...
소일초는
빙그레 웃었다.
{물론
알고 지껄이지!
여기가 사두마차의 안이라는 걸 왜 모르겠나.
우리를
편안히 목적지 까지 데려다 주려고 하는 마차를...}
이
말에 마차 안의 인물들은 침음성을 토했다.
은은히
그들의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떠오른다.
소녀의
음성이 다시 무게를 담고 이어졌다.
{역시
이 마차가 등마제로 가는 것을 알고 있었군.
그런
것을 알면서도 통성명을 하자는 것은... 어떤 의도인가?}
그녀의
전음은 서릿발처럼 차가왔다.
하지만
소일초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역시
겁장이들이야!
큰
일하긴 힘들겠어, 배포들이 너무 작아!}
순간
마차 안의 인물들의 얼굴에 일제히 차가운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말을
함부로 하는군.
그대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목숨이
아깝다고 생각한다면 그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
역시
전음으로 들려오는 이 말은 한 청년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때
청년의 눈빛은 하늘을 닮고 있었으며
일파종사의
위엄을 담고 있었다.
소일초는
다분히 놀라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쓸만한
내공이군. 단지
저 눈빛 하나만으로도
정천보에서
지위가 높은 인물이라는 걸 느끼겠는데...)
소일초는
시종일관 불규칙한 높낮이로 주사(酒邪)처럼 말했다.
{과연 정천보의 인물다운 면모가 있어.
겁이
많은 것이 흠이지만...}
순간,
{죽으려고
환장했군.}
파아!
차가운
냉소와 함께 좌측 맨 끝에 앉아있던 한 명의 청년이
한
손을 쭉 뻗어 소일초의 목을 노리고 덮쳐왔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즈음 이미 청년의 투명한 손은
소일초의
목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감히
정천보라는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다니 죽어 마땅하다.}
검미를
찌푸린 채 냉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청년의 눈빛은 물처럼 고요하다.
소일초는
자신의 목을 잡아오는 상대방의 손 힘에서
그는
가공할 내공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심은 가소로왔다.
순간
그의 비웃음이 터지기도 전에
소일초의
목을 잡으려던 청년의 손이 딱 멈추어지고,
{으으...
이럴 수가...}
그
청년의 얼굴 위로 식은 땀이 맺힌다.
그 식은 땀은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을 타고
마치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손...!
소일초의
힘없이 늘어져 있던 손에 언제 뽑혀져 있었는지
둔중해
보이는 붉은 검이 그 청년의 가슴에 대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마황검(魔皇劍)이었다.
소일초
그의 몸 어디에도 검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이순간
그는 둔중해 보이는 붉은 마황검을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검에서 뻗어나오는 미증유의 살기!
그것은 청년의 사지백해를 타고 흘러들며
무서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준다.
{으아악!}
비명이
그의 목젖을 울리며 참혹하게 터져나왔다.
그러자
마차 안의 나머지 인물들은 그만 경악하고 만다.
그들은
청년의 무공이 얼마나 가공한 것인가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아무 기척도 흔적도 없이 검을 손에 든 소일초의 무서운 쾌검에
그만
질려 버리고 있는 것이다.
소일초는
빙그레 웃었다.
{더
크게 짖어봐!
등마제주에게는 아직 들리지 않은 모양이야!
등마제주라는
인물이 아직까지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으니까.}
역시
높낮이가 불규칙한 말을 하자,
[으아아아!]
청년의
비명은 더욱 크게 터져나왔다.
청년은
아예 사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경악과 불신을 가득 담고 있었으며...
이런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어떤 항거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그는
생애 최초의 회의를 뼈저리게 맛보아야 했다.
그때였다.
스슷!
어둠의
신분처럼 앉아 있거나 누워있던 나머지 인물들이
안면
가득 살기를 담고 소일초를 향해 밀려드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마차 안은 진한 살기에 휩싸이고...
그
속에서 소일초의 음성이 살기를 억누르며 터져나왔다.
{이제보니
나쁜 놈들이군,
동료가 나를 죽이려 할때는 방관하더니
내가 고통을 줬을 뿐이데 나를 죽이려 하다니...
정천보도
확실히 썩은 곳이야!}
몰려드는
인물들은 단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를 향해 다가설 뿐이었다.
소일초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고 살수를 쓰려하다니...
좋아! 한 발작만 더 다가 온다면...
아마도
이 마차 안은 아홉 개의 머리가 뒹굴게 될거야!}
순간
소일초의 말에 자극을 받은 듯
그들의
동작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멈추었다.
펄럭!
소일초의
마황검이 일렁거렸다 싶은 순간
그들의 소매자락이 일제히 베어져 나갔던 것이다.
세상에 이처럼 빠른 검이 있을 수 있는가 싶어 경악하며
그들은
꼼작도 못하고 있었다.
{좋아!
그렇게 가만히 있어!
그래야
겁장이 정천보의 인물들이라 실감할 수 있지!}
소일초의
말은 결코 전음이 아니었다.
그의 말은 조용한 것이었으나
마차
밖에서도 들을 수 있으리만큼 큰 소리였다.
한데
마차 밖은 고요하다.
마차 안의 동태가 어떻게 되어가는 지는 전혀 모르는 듯
다만
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등마제주라는 인물이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
이
의혹은 정천보의 인물들 역시 크게 의아해 하고 있었다.
문득
이 의문에 답변이라도 하듯 소일초가 말했다.
{이곳은
외부와 차단이 돼 있어.
흡음판(吸音板)이 설치돼있어서
비명소리하나
빠져 나가지 못하게 만들어진 곳이야.}
그랬던가?
그래서 아직까지 등마제주라는 인물이
마차
안에서 일어나는 소요를 짐작하지 못한 것이란 말인가?
{이제
조용히 이름이나 밝혀 보시지!}
두두두!
마차는
어둠을 가르며 거침없이 달리고...
마차
안에서는 이제 통성명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강요에
의한 통성명...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의 이름과 무림의 위치를 밝혔고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자신을 밝혔다.
그녀 바로 대로상에서 계획적으로 납치당한 소녀와
일파
종주와 같은 기도를 풍기던 청년이었다.
먼저
청년이 입을 열었다.
{본인은
정천수호군(正天守護軍)에 소속되어 있으며...
북궁헌(北穹憲)이라
하오.}
소녀의
입을 열었다.
{역시
정천수호군에 소속이 되어 있으며...
왕혜려(王慧黎)라
한다.}
북궁헌과
왕혜려!
비로소
그들의 이름 석자와 소속이 밝혀졌다.
그리고
나머지 인물들의 소속 또한 정천수호군이라는 것도 드러났다.
소일초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북궁헌과
왕혜려... 지위는?}
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 동시에 떠오른 것은 망설임...
하나
그들은 소일초의 검에 가슴을 갖다대고
고통에
떨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며 나직이 탄식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많은 것을 알려 하는군.
대체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훗날
그것이 죽음을 재촉하는 것일지라도 후회하지 않겠는가?}
싸늘한
왕혜려의 말이었다.
그녀의 수정처럼 맑은 눈망울에 떠오른 분노의 빛은
어둠을 부르르 떨게 하고 있었다.
소일초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그의 평범한 얼굴에 사이한 아름다움이 햇살처럼 영롱하게 피어오른다.
{너무
정중한 협박이야!
그러나 죽음은 나를 피해가지.
그러니
그런 걱정은 접어두고... 신분이나 확실하게 밝혀.}
순간
그는 더이상 청년을 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듯이 한쪽 벽으로 밀어붙였다.
어둠,
그리고 그 가운데의 소일초...
평범가운데
비범을 보이고 있는 소일초의 신색에
정천수호군의
인물들은 알 수 없는 경외감을 느꼈다.
특히
여인이면서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권좌에 올라있는 왕혜려의 마음은
이
낯선 사내에게 어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충격을 느끼고 있었으니...
(언제
내가 이런 홀대를 당한 적이 있었던가.
이 자는 추측할 수 없을 정도의 신비한 사람이다.
또한 고수! 무림에 이같은 인물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진정한
정체가 무엇이기에...)
그녀는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정천수호군의
군주(軍主)다. 이만하면 됐는가?}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차가왔다.
순간
소일초는 의외라는 듯한 기색이 떠올랐다.
{군주?
당신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정천수호군의 군주(軍主)!
그 존재는 무림에 알려진 바 없는 인물이 아닌가?
헌데 그 정천수호군의 정체가 처음으로
소일초에 의해서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정천수호군이
어떤 곳이던가?
정천보의
최고의 중추세력 중 하나가 아니던가?
한데
불과 약관의 그녀가
그 신비의 정천수호군의 군주라는 엄청난 직위에 올라있는 것이니...
더이상 그녀의 뛰어남에 대해 가타부타 논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리고
북궁헌이란 청년은 정천수호군의 부군주(副軍主)였다.
소일초는
새삼 두 사람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대단한
인물들이로군.
이런 곳에서 정천보의 최고 인물들 중
두
사람을 대하게 될 줄이야! 그다지 나쁘지 않군.}
그는
비스듬히 마차 벽에 기대며 계속 입을 열었다.
{이젠
됐어! 그 정도면 어느 정도의 통성명은 이루어진 것 같으니...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은 하지 않겠어!}
그는
할 말을 다했다는 듯이 입을 다물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때였다.
부군주
북궁헌이 검미를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통성명을
했다는 말은 어딘지 모순이 있는 것 같군.
그대는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러자
소일초는 조용히 눈을 떴다.
{나?}
그는
기이하게 웃으며 주위의 인물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나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인물이야! 말한다 해도 모를거야!}
{...}
{하지만
그대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라도 말해야 겠지!나는...}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된다.
{무적검(無敵劍)이라
부르지!}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성명 삼 자는 함구한 채...
한편
소일초의 말을 듣고난 인물들의 표정에 진한 의혹의 빛이 흘렀다.
(무적검?)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 아닌가?)
그들의
의혹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쾌검으로 볼 때 적당한 이름 같기도 했다.
무적검(無敵劍)!
오직
이 이름을 알고 있는 인물은 그를 제외하고는 두 사람 뿐이다.
바로
주소아와 취풍녀...
아무튼
이들의 만남은 우연한 것이었고...
한
배를 탄 듯한 마차를 타고 있는 이들의 목적은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었지만...
마차는
달린다.
두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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