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신행마동

第 八 章 신나는 武林出道

오늘의 쉼터 2016. 6. 2. 11:23

第 八 章 신나는 武林出道


이상스럽고 잡다한 물건들과 그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장식,

그리고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먼지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한 정실(靜室)이다.
백인장의 수 많은 정실 중 하나인 이곳에는 지금 황촉불이 은은히 타고 있었다.
한데,
{드르렁! 푸아!}
너무 신나게 노느라고 지친 아이가 잠들어 있는가?

깊고 부드러운 숨소리가 한 편의 태사의에서 흘러나왔다.
[휘이이이!]
그 숨소리와 함께 어디서 울려 퍼지는지 알 수 없는 낮은 휘파람 소리가 있엇다.
여기는 신행마동 소일초의 방이다.

호피(虎皮)로 씌워진 커다란 태사의에 깊숙이 묻혀있는 사람은

감히 무림정벌을 선언한 소일초가 분명했다.
한데 바로 그의 앞에는 나무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 탁자앞에는 지금 한 가지의 물건과 책을 펼쳐보고 있는 한명의 소녀(少女)가 앉아있었다.
이 소녀가 보고 있는 하나의 물건은 손바닥 크기의 만년청옥(萬年靑玉)으로 된

하나의 청옥소도(靑玉小刀)였다.

그 옥도(玉刀)에서는 무어라 형용해 낼 길이 없는 신비한 광채가 서기마냥 피어 오르고 있었다.
청옥소도를 만지작거리며 두툼한 책을 넘기고 있는 소녀는

소일초보다 두세살 많은 십 오륙 세 가량 되어보였다.
헌데 이 소녀가 지닌 아름다움을 무어라 말해야하는가?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무수한 비유를 찾고 무수한 형용(形容)을 한다.

그러나 정작 아름다운 것 앞에는 아무런 비유도 아무런 형용도 못한 채

그저 숨을 죽이고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을 뿐이다.
그렇다.

바로 이 소녀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은 그 어떤 비유를 거부했고 그 어떤 형용을 불허하는 아름다움이었다.
거기에다 눈보다 하얀 백의에 쌓인 그 소녀의 성결함과 고아함은

이 세상을 온통 그 두 가지의 기운으로 표백시켜 버릴 만큼 강렬했다.
한데 이것은 또 무엇인가?

밤하늘 천만 가지 뭇 성좌(星座)를 담아

흘려내는 듯한 그 신비로운 동공은 보석처럼 반짝이는데,
[휘이이! 휘이!]
소녀의 몸 어디에서인지는 몰라도 쉴 새없이 흘러나오는 낮은 휘파람소리,

마치 그 소녀의 깊은 영혼 속에서 울려나오는 듯 했으니...
{휘이! 휘이! 휘이이!}
한 번의 멈춤이나 간격도 없이,

입술을 벌리지도 않는 그 소녀는 휘파람새처럼 이 낮은 소리를 되풀이해 흘려내는 것이니,

그 소녀에게는 오직 이 휘파람만 존재하는 듯 싶었다.
{으음! 음냐!}
태사의에 앉아서 잠이들었던 소일초는 입을 벌리고 큰 하품을 하면서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물끄러미 청옥소도와 정신없이 책에 빠져 있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의 뇌리에는 조예진의 말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 얘야! 이 청옥소도는 패도구룡인(覇刀九龍刃)으로써 어린도와 함께

바로 백인장의 장주의 신분을 나타내는 이대(二大) 신물(信物) 중의 하나이다.
어린도는 몸에서 놓을 수도 있지만,

이 패도구룡인은 절대 외부인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어린도가 장주가 사용해야 할 병기라면,

이 패도구룡인은 당연히 장주를 대변하는 것!

그 어떤 자건 백인장의 사람이라면 이 패도구룡인을 대하면

장주를 직접 대하는 것처럼 경복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비밀이지만

이 구룡은 하나하나가 백인장주의 독문무공인 마도구식(魔刀九式)을 담고 있다고 한다.
네 무공도 이제는 충분히 마도구식을 펼치고 남음이 있으니

틈이 나는 데로 비밀을 알아내 익히도록 해라.
패도구룡인을 만든 분은

칠백여 년 전 우리 백인장의 일대기인이었던 신수기장(神手奇匠)이라는 분으로서

무공에 대해선 전혀 문외한 이었음에도,

그 당시 장주이셨던 네 선조의 명을 받아

패도구룡인이라는 절세의 신물을 만드신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마도구식의 원래 명칭은 패도구식(覇刀九式)이었으나

너무나 강맹일변도이고 한 번 발출되면 기어이 피를 보고야 마는 도법이었으므로

마도(魔刀)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조예진의 말을 생각하고 있던 소일초의 눈에서 빛이 반짝 거렸다.
그리고 그 눈빛은 인간이라 여길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절새의 미소녀의 숙여진 얼굴로 옮겨졌다.
별 빛 같은 눈망울로 입이 아닌 몸의 어디에선가로

잔잔한 휘파람소리를 쉬임없이 흘려내며 책을 보고 있는 소녀(少女)...!
그 소녀를 향한 소일초의 눈빛이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또다시 뇌리에 떠오르는 그의 작은 어머니 조예진의 음성...

- 이 아이는 삼 년 전 네 아버지께서 엄청난 내상을 입고 돌아오셨을 당시

품에 안고 온 아이로써 내 사부 혈기자의 손녀인 주소아(周小阿)다.

옛날 우리 네 사형제가 석송림을 떠날 때 소아는 세 사형이 데려갔었다.

헌데 십년만에 네 아버지가 이 아이를 어디선가 데려온 것이다.
당시 소아의 나이는 열 두 살이었는데 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역시 피투성이 몸이었고,

게다가 이 아이 또한 어떤 정신적인 충격으로 기억이 상실된 터라 신분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다 싶었는데...

바로 내가 사부밑에 있을 때 직접 돌보았던 불쌍한 소아(小阿)였던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때 이 애의 체내에는 무려 삼갑자의 내공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외다.
네 내공은 이미 그당시 오갑자였으니 대단치 않은 것으로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만

무림를 통틀어 보아도 삼갑자 이상의 무공을 지닌 자는 일백 명 내외일 것이다.
피투성이이면서도 소아의 몸에서는 신비한 휘파람 소리가 울려나와

혹시 소아가 십이대고수의 하나인 취풍녀(吹風女)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대봉공께서 자신들이 한 번 만나본 취풍녀는 이십대 여인이었다고 증언을 했다.

그렇긴 하지만 소아가 취풍녀와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소일초는 조예진의 말을 생각하면서 더욱 세밀히 절색의 미소녀 주소아를 살피기 시작했다.

주소아는 비록 지금은 과거의 기억을 상실하고 있기는 했으나 총명하기 이를데 없는 소녀였다.
(음! 이 계집애는 어떻게 해서 입을 벌리지도 않고 휘파람을 부는 묘한 기술을 가지고 있을까?)
주소아는 그녀를 판히 바라보는 소일초를 느끼고 고개를 들며 생긋 웃어보였다.

주변이 온통 환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기에 소일초는 정신이 아찔했다.
(제길... 되게 예쁘군!

작은 어머니 만큼 예쁜 것 같은데, 혹시 머리가 이상해 져서

기억을 상실해 버리면 몸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닐까?)

주소아의 얼굴에서 눈을 떼면서 소일초는 중얼거렸다.
{집을 나서기 전에 꼭 서공화 영감에게 한 번 물어봐야지.}
조예진은 주소아가 기억을 되찾기만 하면

그의 아버지를 그 지경으로 만든 삼수(三秀)와의 어떤 갈등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허나 해석하게도 그녀는 기억이 상실되어 있으니...

지금 주소아가 보고 있는 책은 생사보록(生死寶錄)이란 무공비급이었다.

이것은 그녀가 소선풍에게 안겨왔을 때 그녀의 품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예전에 그녀가 생사보록을 익힌 적이 있는 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주소아는 생사보록을 다시 익히고 있었다.
조예진의 말을 따르자면 그녀의 무공에 대한 자질은 소일초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주소아의 아버지는 글만을 좋아하던 문사였으나,

그녀의 조부는 무림의 일대기인 혈기자인 것이다.
조부의 혈통 때문인지, 그녀의 엄청난 무공에 대한 안목에

백인장의 모든 사람들이 지난 삼 년 동안 적지 않게 놀랐었다.
조예진은 소일초에게 두 살 연상인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다.
지은 죄가 많은 소일초는 마지 못해 응락했으나 내심 불만이었다.
(겨우 나보다 두 살 많은 계집애인데...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비성성(飛猩猩)으로 혼을 내 줘야지.)
그러나 소일초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순진무구한 비성성들은

영악한 주소아의 꼬임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있기나 하고 하는 소린지.

* * *

백인장,
이곳의 정예 백인도객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새롭게 정비하기 시작했다.

신행마동 소일초의 출현과함께 그 동안 발뒤꿈치를 들고

장주의 흉수와 소일초를 찾아다니던 그들이 마침내 거대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이다.
새벽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백인장의 동녁 하늘에 고스란히 동이 터오고 있었다.
이 희미한 여명은 소일초와 장주인 도왕 소선풍의 해후가 있었던 그날로부터 열흘 후,

그리고 정식으로 신행마동 소일초의 무림정벌(武林征伐)을 선언한 칠일 후의 여명이었다.

아침의 싱그러운 여명에 쌓인

백인장 깊숙한 국화원(菊花園)에는 사방이 온통 국화의 천국이었다.
화향이 천지를 진동하고 온갖 국화의 색깔이 다투어 핀 이 국화의 바다.
이 화원에서 이른 아침부터 듬성듬성 솟아난 잡초를

손수 제거해 가던 백인장 원로 십팔도객(十八刀客)의 제일 원로인 동평선생(東平先生),
은은히 흐르는 비범한 기질도 기질이려니와

절정의 도객답지 않게 지혜로 충만하여 고요로운 눈빛을 지닌 인물이다.
돌아온 소장주로 말미암아 모든 근심이 다 사라져 버렸는가?

그의 한몸에 여유가 충일하여 넘친다.
{봄에는 매화, 가을엔 국화, 이 어찌 꽃 중의 으뜸이 아니겠는가?}
한데 돌연 무심히 국화에 취해 잡초를 제거해 가던

동평선생의 손이 빠르게 허공에 휘저어졌다.
동시에 어느 곳, 어느 방향에서 날아든지 모를

하나의 서찰(書札)이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이니...

동평선생은 조용히 그 비찰을 펼쳐 읽었다.

순간 동평선생의 무처럼 잔잔한 얼굴에 빠른 경악이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 부로 백인장은 일체 강호활동을 중지함.

단 본인은 제외. 불복자는 엄벌에 처할 것임.

외부에서 활동하는 백인장의 가족들도 조속히 귀환조치 할 것.

특히 십팔원로는 일체 잔소리하지 말 것. 이상.
신행마동 소일초.>

{이런...이런...!}
동평선생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서찰의 내용을 읽어내렸다.

이어 제거해 가던 잡초를 내던지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 말썽꾸러기! 이제 철 좀 들었나 했더니 고작 며칠 만에 본색을 드러내?

무림에 혼자 나가서 뭘 어쩌겠다고! 그리고 나보고 일체 잔소리 말라고?}
여명 아래 그의 신형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원로십팔도객의 우두머리다.

소일초가 날 때부터 손자처럼 귀여워 했던 그였다.
{안될 소리...! 안될 소리...!}
그의 심해처럼 맑은 눈은 떨림 속에 다시 한 번 비찰의 내용을 더듬었다.

분명 비찰의 마지막에 찍힌 것은 패도구룡인(覇刀九龍刃)의 흔적이다.
{이 무슨 얼토당토 않은 짓인가?}
이어 동평선생은 국화원의 한곳을 향해 다급한 음성을 던졌다.
{사호동(四護童)은 즉각 다른 원로들에게 알려라!

노부가 직접 소장주께 확인할 것이다.}

스스스!
동시에 짙은 화향이 밀려오듯이 국화밭의 한 편에서

황색(黃色)의 작은 그림자들이 소리없이 솟아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마도 그들이 사호동인 모양이었다.
동평선생도 첩지를 재빨리 품속에 넣고 손에 묻은 흙을 털었다.
스스스슷!
이어 그는 사호동보다 더욱 빠르게 허공을 땅처럼 밟고

순식간에 국화원 저편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 ×

정실,
정실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소박하면서도 정결한,

그리고도 귀풍에 흠뻑 젖어 있다.

이 정실은 바로 장주인 소선풍이 병상에 누운 이후로 그의 부인인 조예진이 거처하는 곳이다.
지금 조예진은 치렁치렁한 소일초의 흑발을 가지런히 빗겨주고 있는 중이었다.
더 없이 자상한 손길과 더없이 자애로운 눈빛이 하나의 동경(銅鏡)속에 비치고 있다.
한데 문득 조예진의 따사롭고 자애로운 눈빛에 가득한 염려의 빛이 피어올랐다.
{그래 꼭 혼자 떠나겠단 말이냐?}
{예! 저 혼자 그들을 상대하고 싶어요 작은 어머니.}
소일초의 음성엔 묵직한 의지가 흐르고 있었다.

비록 그의 악동같은 얼굴은 변함이 없으나

지금 내뱉는 소일초의 음성은 옛날과 확연히 틀려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즉 말썽만 부리던 그 음성도 아니었고

옛날처럼 대소구분 없이 마음내키는 대로 내뱉던 음성도 아니었다.

굳은 의지가 살아 끔틀거리고 있는 당당한 어린 장부(丈夫)의 음성 바로 그것이었다.

검마에게서 받았던 삼 년의 수행은 그를 조금은 진지한 아이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 순간 소중히 소일초의 머리를 빗겨가던 조예진의 입에서

가득 염려가 깃든 음성이 흘러나왔다.
{애야! 이번 일은 지극히 위험할 텐데...!

더구나 지금 삼성무림청은 장강 일대를 장악하고 끝없이 팽창하고 있는 실정이라

우리 백인장의 힘이 아니라면 막기 힘든 상대야!그런데 넌...}
순간 소일초의 얼굴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서 더욱 혼자 가야하는 것이지요.}
{아! 네 뜻을 나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구나!}
{작은 어머니! 나는 백인장의 소장두가 아닙니까?

중원을 지켜야 할 신행마동 소일초입니다.

당연히 삼성무림청 정도는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백인장의 위세도 더욱 높아 질 것입니다.}
{우리 말썽꾸러기가 삼 년 만에 정말 협객이 되어버렸구나!

이제 신행마동이 아니라 신행협동(神行俠童)이라고 불러야 겠는걸...!}
조예진이 걱정스럽던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헤헤! 그건 좀 어색하고...

아무튼 앞으로 최소한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 앞에서는 장난 치지 않겠어요.

지난 번에 작은 어머니가 막 울때 얼마나 놀랐다구요.}
{그럼 우리가 없을 때나 밖에서는 여전히 장난치겠다는 말이구나!}
{그건 작은 어머니도 이해해주셔야죠. 나는 아직 어린애니까 당연히...}
{그래! 우리 말썽꾸러기야. 그건 그렇고 원로들이 펄쩍 뛸텐데 어떻게 하지?}

조예진은 백인장의 옛 터전에서

소일초의 무공이 혈기자로 오해될 만큼 고강했던 것을 직접 격었으므로

혼자 나가겠다는 데 대해서 크게 염려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어린애를 혼자 보내는 안스러움이 조금있을 뿐이었다.
{제가 첩지에 원로들은 찍소리 말라고 했으니 괜찮을 겠죠뭐.}
{맙소사! 정말로 그렇게 썼단 말이냐?}
조예진의 아름다운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거기에다 백인장의 누구도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다고 했죠.}
소일초는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조예진은 어쩔 수 없는 말썽꾸러기를 보면서 한숨을 지었다.
{네가 가만 있으라고 가만있을 원로들이냐?

벌써 내 귀가 따가운 것 같구나! 정중하게 알려도 듣지 않을 원로들인데...}
{어? 정말 그럴까요?}
소일초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리고,
{그럼, 이러다 원로들이 몰려오면 야단이잖아요.}
조예진은 머리를 끄덕였다.
{아이쿠, 작은 어머니. 저 이만 갈래요.}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애야! 행장은 갖고가야지. 그리고 소아도 데려가거라!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지도 모르니까!}
{네! 그렇게 할께요.}

벌써 소일초는 자기 방문 앞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묶지도 않은 머리가 어지럽게 날리고 있었다.
{내가 따라가지 않아도 될까?}
조예진은 덤벙대는 소일초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과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녀석! 어쨌거나 크기는 커버렸구나!}

× × ×

십팔원로도객이 일제히 내전으로 몰려들었다.

갑작스런 무림활동금지령의 부당성과 혼자서의 무림행보는

단지 만용에 불과한 것일 뿐이라는 것을 간언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들이 간언을 하러왔던 잔소리를 하기위해 왔던지 간에

조예진의 말에 그들은 입도 떼지 못하고 비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며 돌아가야만 했다.

- 소장주는 벌써 떠났습니다.

원로들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소장주가 돌아온 후 그에게 하십시오.

설마 그 전에 이미 패도구룡인(覇刀九龍刃)으로 내려진 명(命)를 어길 생각은 아니겠지요?

그 무렵,

소일초는 이미 주소아와 함께 아침 햇살에 머리카락을 빛내며

백인장에서 이백여리 떨어진 곳에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 허리에는 머리통 만큼이나 큰 검은 목탁이 매달려 있고,

왼쪽에는 집도 없이 걸려있는 날이 빠져 쇠몽둥이에 가까운 시커먼 철검(鐵劍)이 걸려있었다.

어린도는 꺼림직해서 아버지의 병상옆에 살그머니 갖다놓았던 것이다.
붉은 띠로 질근 묶은 소일초의 머리칼은 말꼬리같았다.

{야! 주소아, 네 젊은 할아버지 만나면 내 이야기 잘해줘야 해!

전에는 내가 어려서 장난이 좀 심했었다고...!}
주소아는 입을 삐쭉했다.
{흥! 누나라고 부르지도 않으면서 부탁은 잘해.}
{겨우 이 년 먼저 났다고 너무 그러지마.

남자 여자는 나이를 따지지 않고 사귀는 거야!}
{네가 남자니? 말썽꾸러기 꼬마지.

나도 백인장에 있으면서 네 악명을 충분히 들었다고...!}
{내가 꼬마라고? 웃기는 말씀. 그리고 나는 내 악명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구.}
{뭐...?}
{먼저 내가 꼬마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지.}
갑자기 소일초는 자기보다 한뼘은 더 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매달려

그녀에게 강하게 몸을 밀착시켰다.
순간 주소아의 안색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변했다.

그녀의 몸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던 낮은 휘파람소리도 갑자기 높아졌다.
{어때? 이래도 꼬마라고 할거야?}
주소아는 자기의 배꼽어림에 와닿은 단단한 무엇을 느끼고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두팔을 돌려서 소일초의 허리를 와락 움켜쥐고는

홱소리가 나도록 뒤로 집어던져버렸다.
그러나 소일초는 기분이 좋은지 연방 콧노래를 부르며 가랑잎처럼 날아갔다가

그녀의 옆으로 다시 너울너울 날아와 내려섰다.
주소아는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올라서 몸으로 연방 높은 휘파람소리를 냈다.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분노의 표시방법임에 틀림없다.

{흐흐! 내 사부 중의 하나가 색귀(色鬼)였다구. 여자에 관한한 나는 모르는 게 별로 없어.}
주소아는 입을 꼭 다물고 자기 몸에서 나는 휘파람 소리가 싫은 듯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일초의 이 말은 사실이었다.
비록 이론상이기는 하지만 색귀는 어리나 당돌한 그에게 여자에 관한 모든 것을 이야기 해 주었고,

그것들을 소일초는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는 적당한 대상을 만나지 못해서 그 지식들이 그의 몸에서 썩고있었지만,
지금, 아름답기 그지없는 주소아가 나타난 이상

그의 장난기와 더불어 그 지식들이 슬슬 몸으로 구현되려고 하는 것이었다.
주소아는 이미 열 다섯 살,

총명한 그녀는 이미 알 만한 것은 다 알고 있었다.

그녀는 소일초와 말도 하기 싫었다.
(이 나쁜 놈하고 언제까지 같이 있어야 하나? 확 집으로 돌아가 버릴까?)
집이란 물론 백인장이다.

삼 년 동안 지냈으니 자기집이나 다름없었다.
(아니야! 이 자식이 자기집이라고 우기면 곤란하지.

아무래도 나에게는 고모집일 뿐이니까 내가 밀릴 수 밖에 없어.)
소일초의 작은 어머니인 조예진이 사승(師承)으로 본다면 주소아의 고모가 된다.

그녀는 이미 조예진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분의 제자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주소아가 생각에 빠져있을 때,

소일초는 소일초대로 그녀의 뒤에 따라걸으면서 신나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색귀사부의 말이 정말인것 같은데! 기분이 묘했어. 히히히!

이제 적어도 몇 달은 같이 먹고 자고 할테니까 철저한 실험정신을 발휘해야겠지.)
신행마동 소일초,

그의 생각은 멋대로 가고 있었다.

그는 생각에 도취되어 자기도 모르게 끽끽거리는 소리를 냈다.

앞서가던 주소아는 그가 뒤에서 이상한 소리로 웃자 더욱 속이 끓었다.

그자리에 딱 멈추며 소리를 질렀다.
{이봐! 네가 앞에 가! 엉큼한 꼬마같으니...}
{싫다. 네가 앞에 있으니 그대로 가.}
소일초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기위해서라도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흥! 저런 막 되먹은 꼬마가 뭐 삼성무림청을 쳐부수고 아버지 복수를 해?

고모 말도 웃기는 소리지.}
{그러면 내가 넘어갈 줄 알고?

잔소리 말고 앞에서 걸어. 누군가 지켜봐준다는 것은 즐거운 일아니겠어?}
그의 무덤덤한 말에 주소아의 얼굴이 발개질 정도로 화가 났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휘파람소리는 다시금 높아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 휘파람소리도 어디서 나는지 궁금하고...!}
야릇한 어조로 말하는 소일초의 그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소아 빽 소리를 질렀다.
{너 정말 나하고 싸워볼래? 조그만 녀석이...}
두 팔을 쫙 벌리며 공격자세를 취하는 그녀를 보면서 소일초는 자기가 너무 심했나 싶었다.

그는 뭐가뭔지도 모르는 철부지로 무엇이 적당한 정도인지도 당연히 몰랐다.
그러나 이내 그도 태도를 바꾸었다.

정말 화가 나서 집으로 돌아가버리기라도 하면 좋은날은 다가버린 것이다.
{누나! 정말 화난 거야?

난 어린애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한테 그렇게 화내면 어떡해?}
그의 돌변한 태도에 화가 꼭지까지 올라갔던 주소아는 어이가 없었다.

일부러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에게 몸을 기대오는 소일초의 속셈을 뻔히 알면서도,

그 깜직하게 귀여운 모습에 화가 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주소아는 기가막혀 하면서도 이미 화는 풀려 그를 노려보며 한마디 했다.
{다시는 까불지마!}
영악한 소일초는 이미 자기의 수단이 성공한 줄 알고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몸을 슬슬 주소아에게 비비면서 응큼하게 말했다.
{그런데 말야, 이렇게 있으니 왠지 기분이 좋은데 그래.}
[너 이 망나니!]
순간 주소아는 열이 확 뻗혀 그를 확 밀쳐버리려 했다.
그러나 소일초는 오히려 그녀를 답싹 들어올려 어깨위에 앉히고는

무중일전(霧中一電)의 경신법을 펼쳐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 나쁜 놈! 당장 날 내려놔!}
목마를 탄 주소아의 외침따위는 귓전을 스치는 바람소리에 흩어버리고 소일초는 신나게 달려갔다.
뿌연 안개에 휘감긴 채 한덩어리의 구름처럼 날아가는 그들을 보고

관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본의아니게 소일초의 어깨에 얹혀 달려가고 있는 주소아는 어느덧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더 이상 앵앵거리지 않자 소일초는 달려가는 중에 그녀를 어깨에서 내려

두팔로 앞으로 안아 달리면서 그녀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우리 그냥 편하게 지내자.

우리가 가릴게 뭐 있겠어? 기분내키는 대로 행동하면 되지.}
주소아는 아무말도 하지 않다가 심각한 어조로 한마디 했다.

{어디 가서 아침이나 먹자.}
그리고 소일초의 귀를 잡아당겨 버렸다.
{아야야야! 귀떨어지겠네!}

* * *

-장강(長江),

파란만장한 중원의 역사와 함께 그 흥망성쇠를 같이 해 온 대장강(大長江),
광활한 중원대륙을 남북으로 갈라 놓은 채 중원의 젖줄기로,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써 날로 그 중요성이 더해가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이 장강을 장악한 무림의 신흥세력 삼성무림청이

자신들의 세력팽창을 위한 무수한 혈겁이 자행되고 있었다.
보이는 곳에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군소방파들과의 치열한 전쟁이

도왕 소선풍이 병상에 누운 후 삼 년동안 계속되어 왔다.
이미 장강 주변의 수백리는 삼성무림청의 수중으로 들어가 버려서

강북의 청옥검궁, 그리고 강남의 백인장, 이렇게 천하를 삼분하고 있는 세력이 된 그들...
지금 장강은 그야말로 시산혈하(屍山血河)와 아수라지옥도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게 되었다.

삼성무림청의 힘은 강대하고 무인(武人)의 자존심을 잃지 않고 끝없이 저항하는 군소방파들로 인해서...

* * *

황혼(黃昏),
금빛의 황혼이 서편 하늘에서 아름답게 타고 있었다.
바로 그 황혼 아래,
피!피!피! 겹으로 쌓여 떠내려 가는 시신(屍身)!
이 피와 시신으로 인해 장강의 수위(水位)는 무려 한 자나 불어난 듯했다.

실로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대참상의 현장이었다.
어느 방파가 또다시 멸문의 참극을 격었는가?
바로 이 처참한 황혼의 장강이 내려다 보이는 야산(野山)의 한 그루 천년노송(千年老松)의 그늘 아래

한 소년과 소녀가 비스듬히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희디흰 백의에 고아하고 고결한 귀풍이 아득한 대양 너머의 햇살처럼 넘실거리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대범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짖궂은 데가 있는 것 같은 깜찍하기 그지없는 소년,
오른쪽 옆구리에는 그의 백의(白衣) 때문에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짙은 묵빛의 목탁,

왼쪽에는 날이라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는 집도 없는 시꺼먼 장검,
이런 모습, 무림 하늘 아래 이런 모습을 지닌 소년은 오직 하나,
신행마동 소일초!
백인장의 소장주인 소일초를 제외하고 또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의 옆에 있는 소녀는 소일초보다 몇 살 더 많은 듯 한데 맑은 눈동자는 지혜로 가득차있다.

넋이라도 빼앗겨 버릴 듯 예쁜 얼굴에는 어엿한 기품이 어려있는데

그 가날픈 허리는 저 황혼의 금빛 노을보다 사람의 눈을 더욱 부시게 했다.
{휘이! 휘이이!}
붉은 입술은 벌어지지도 않는데 그녀의 몸 어느 곳에선가 휘파람소리가 울려나오고

백옥처럼 흰 그녀의 손에는 큼직한 술병이 들려있었다.

주소아!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위해 소일초와 함께 백인장을 나온 주소아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소일초의 미간이 크게 찌푸려져 있었다.
{이거 장난이 아니잖아.

사람도 무더기로 죽어있으니 이토록 잔인, 처참할 수도 있구나!!}
소일초는 아주 기분이 상한 듯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말과는 달리 속으로 그는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어리기는 하지만 무림에 뛰쳐 나왔을 때마다 시체를 보기 예사였고

직접 협행을 한답시고 살인을 한 적도 있는 그 였지만

이렇듯 처참한 광경을 보자 그 충격이 적지 않았다.
그만큼 아직은 그가 세상의 비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애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저 죽은 인물들은 입고 있는 옷으로 보아

대부분이 녹림맹(綠林盟)에 소속된 인물들인 것 같은데...!}
옆에 있던 주소아가 아미를 살픗 찡그리며 말했다.
{나도 그정도는 알고있어. 괜히 아는 척은...!}
뿌루퉁한 소일초의 말에 주소아는 피식 웃었다.
{삼성무림청의 힘은 듣는 것 이상으로 엄청날 지도 몰라!}
그녀는 얼마나 강심장인지 피가 되어 흐르는 강을 보면서도 생글생글 웃고있었다.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야! 내 손에서 삼성무림청은 끝장이 나게돼있어.}
{어떻게...?}

소일초가 오른쪽 허리에 걸려있는 검은 목탁을 툭툭 두드렸다.
{이거면 만사형통이지.}
그는 주소아의 손에 들려있는 술병을 받아서 한모금 들이켰다.
{목탁만 두들기면 금강역사(金剛力士)라도 나타나서 싸워주기라도 하니?}
{나중에 다 알게 돼. 너는 구경만 하면 돼.}
술병을 건네주면서 소일초는 그녀의 왼손을 끌어당겨 손가락을 빨았다.

그러나 이미 그동안에 그런데 익숙해졌는지

그녀는 궁금하게만 여길뿐 그의 행동에 개의치 않았다.
주소아는 소일초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그러자 소일초,

그 역시 마다하지 않고 호수처럼 맑은 주소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언젠가 시간을 내어 네 머리통을 한 번 열어봐야겠어.

그 속에 얼마나 황당한 것들이 들었는지.}
{언젠가 네 몸을 샅샅이 조사해 봐야겠어. 몸 어디에서 휘파람소리가 나오는지.}
[요 새끼음적이...!]
한마디도 지지않는 소일초의 말에 주소아가 술병으로 그의 머리를 막 후려치려고 했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잠깐, 주소아!}
소일초의 시선이 재빨리 돌아가 한곳에 고정되었다.
슈슈슈!
장강을 떠내려 가고있는 무수한 시신의 위를 밟고

날렵한 인영(人影) 하나가 그림자처럼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