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六 章 百刃莊의 發源地
황혼(黃昏),
짙은
음영을 드리운 황혼이 불타는 강처럼 대지에 빛을 산란(散亂)시키고 있었다.
스스스!
바로
이 황혼의 어지러움 속에서 싱그러운 초원의 물결이 아득한 대양처럼 넘실거리고 있다.
대평원,
일망무제의 대평원을 이루고 있는 푸른 초원의 세계,
바로
낙안평원(洛安平原)이다.
이
광활한 수천만평의 낙안평야를 지나서
멀리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방을 에워싸듯이
우뚝 솟아있는 산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아름답기
그지없다는 파양호(播陽湖)변의 여산(麗山)이었다.
이
여산에서 파양호를 바라보며 여산의 한 기슭을 메우듯이 솟아있는
거대한
녹색의 장원(莊園)이 하나 벌려 서있다.
헤아릴
수 없는 고루거각(高樓巨閣)과 대전(大殿),
인공호수(人工湖水)와 정자(亭子)들...
그리고, 그 엄청난 장원을 두르고 은막의 띠처럼 아스라이 둘러져 있는
십장
높이의 흑옥강석(黑玉鋼石)의 성벽(城壁),
이
장원의 웅장함과 장엄함을 어찌 필설로 다 형용할 수 있겠는가?
<백인장(百刃莊).>
그렇다.
바로 이곳이 지난 삼백년내 강남무림의 패주인 백인장(百刃莊)인 것이다.
신주사패천(神州四覇天)중의 남패천(南覇天)이라고도 불리는...
중원의 평화와 정의가 아름다운 향기로 솟아나는 곳...
이곳에서는 백인장과 함께 위대한 도(刀)의 제왕인 한 인간을 기억해야 한다.
-도왕(刀王) 소선풍(蘇仙風)!
사람들은 그를 이야기할 때 그의 걸출한 용모를 극찬하고...
그의 측정할 수 없으리 만큼 높은 도법을 이야기하며...
그의
엄청난 내공을 이야기한다.
또한,
그가 이루어 놓은 백인장의 찬란한 영광과 축복을 이야기하며...
중원은 마침내 그를 천하십이대고수(天下十二大高手)중에서
일노(一老)
혈기자를 제외한 제일인자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나이 이제 사십오세,
한 자루의 어린보도(魚鱗寶刀)와 눈같이 흰 백의에 백옥요대(白玉腰帶)를 차고
중원을 내려다 보고 있는 백인장의 장주인 이 사람,
정파무림은 이 한 사람의 출현으로 무림일천년사를 통해
최고의
성세기를 이루고 있다 할 수 있었다.
그는
혈기자가 사라진 중원의 새로운 절대자였다.
그러나!
소일초가 삼 년만에 집으로 이상한 괴물들을 데리고 돌아왔을 때,
백인장은 발칵 뒤집어졌으나
정작 그의 아버지인 도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
* * *
소일초는 남황을 떠난지 불과 사흘 만에 백인장에 도착했다.
아직도
그의 마음에는 검마와의 사별로 인한 슬픔이 채 가시지 않아 우울한 표정이었다.
비성성들은
까마득한 허공에 새처럼 떠 있었고,
그는 백인장의 대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문 안쪽에서 지키고 있던 젊은 도객이 그의 모습을 알아보고
기절할
듯이 놀라 인사를 한 후에 부리나케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금방,
사방에서 젊은이, 늙은이, 남자, 여자 구분없이 우르르 뛰쳐나와 그를 맞았다.
"소장주님!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무사하실
줄 알았습니다."
일제히
그의 손을 잡거나 껴안기도 했고, 노인들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소일초는
묵묵히 고개막이며 그들의 인사를 받을 뿐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삼년 전 천방지축일 때와는 태도에서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의
태도를 본 늙은 도객 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소장주님께서도
소문을 듣고 돌아오신 모양이군요?"
"...?"
"정말
잘 하셨습니다. 그러셔야지요."
소일초는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어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보니 백인장의 분위기가 아무래도 조금 이상했다.
자기가
돌아온 것 갖고 이렇게 소란을 피울 백인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 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아아!
초아야, 네가 돌아왔구나!"
장원
안쪽에서 소일초를 향해 질풍같이 날아오는 녹색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아름다운
옥용을 온통 눈물로 뒤덮은 삼십대초반의 절색 미소부,
바로 소선풍의 둘째 부인이고 소일초의 작은 어머니인 천외비연(天外飛燕) 조예진이었다.
"주모님!"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머리를 숙이는데,
"흐윽!
무사했구나. 우리 아기!"
조예진은
와락 소일초를 껴안았다.
"삼년만에야
돌아오다니! 우리 말썽꾸러기...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그녀는
이제 자신보다도 반뼘쯤 커진 양아들의 뺨을 쓰다듬으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소일초도
절로 눈시울이 찡해지는 것을 느끼며 작은 소리로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잘못했어요.
작은 어머니. 앞으로는 어머니 말씀 잘 들을께요."
그말을
듣고 그녀는 더욱 힘주어 소일초를 안았다.
"그래,
우리 말썽꾸러기가 이제 철이 다 들었구나."
그들을
지켜보는 백인장의 남녀노소는 일제히 눈물을 훔쳤다.
생모가
아니고 친아들이 아니지만 그들의 다정한 모습이 심금을 울리는 것이었다.
게다가
백인장에 변고가 발생한 지금에야
그들의
마음은 더욱 감상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부인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자세한
얘기는 안으로 들어가서 듣도록 하자꾸나."
"저...
작은 어머니!"
"왜
그러느냐?"
"제가
친구들을 데리고 왔는데 괜찮겠어요?"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소일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괜찮고 말고... 그래 어디에 있느냐? 네 친구들은?"
소일초는
손가락을 세워 하늘을 가리켰다.
그의
작은 어머니인 조예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어리둥절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말썽꾸러기소장주가
또 무슨 엉뚱한 일을 꾸몄는가 하면서...
그러나,
하늘에는 까마득히 위에 새인지 구름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는 것이 떠 있을 뿐
소일초의
친구로 짐작되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예진의 안색에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저
이상한 짐승들이 네 친구들이라고...?"
"네..."
소일초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예진은
과연 한 눈에 하늘에 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본 것이었다.
그녀는
조금 주저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썽을 부리지는 않겠지?"
"네.
다들 제 말을 아주 잘 들어요. 아주 영리하거든요."
그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면서 말했다.
백인장 내에서는 소선풍의 말보다 더 위력이 있는 것이 조예진의 말이었다.
그녀가
허락하기만 하면 만사형통인 것이다.
그녀는
소일초에게 그 친구들이 말썽을 피우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허락해 주었다.
소일초는
즉시 손바닥을 하늘로 쳐들었다.
번쩍-!
손에서는
수정검우가 저녁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그것이
신호였음인지.
꺄아악!
쐐애애액!
하늘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제히 금강하하여 백인장의 마당으로 내려왔다.
백인장의
사람들은 그 비성성들을 보자 놀라 도를 뽑고 경계자세를 취했다.
비성성들도
많은 사람을 보고 겁에 질린 듯 소일초만을 쳐다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날개가
달린 원숭이...
당연히
어느 누구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소일초의 눈빛에 겁에 질려 있는 그것들의 모습은
이내
백인장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었다.
비성성들도
소일초와 생활한 후에는 사람들의 말을 대부분 알아들을 수있었다.
그것들은
신기하게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있을만한 곳으로 갔고,
소일초는
조예진을 따라서 내당으로 들어갔다.
소일초의
옷은 그의 몸이 자라는 바람에 턱없이 작아져 버렸고 온통 더러워져 있었다.
조예진은
직접 그의 몸을 씻어 주었다.
어느덧
어른 티가 나는 양아들의 몸을 씻겨주며 조예진은 얼굴을 은은한 홍조로 물들였다.
'갓난아이던
이 아이가 벌써 이렇게 자라다니...'
조예진은
세월의 무상함을 깨달으며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순진하여 조예진의 마음을 알리 없는 소일초는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조예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하지 않고 말꼬리를 돌렸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지? 우리 아기..."
"남만에
있었어요.
그때
어머니께서 저를 잡으러 왔다가 돌아간 후 곧장..."
소일초는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고 신나게 이야기했다.
혈기자를
만났던 일...
전설적인
전대거마 검마를 사부로 모시고 지냈던 삼 년의 세월 등등...
조예진은
그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가 고개를 들었다.
"너는
참으로 대단하신 분을 사부로 모셨구나.
너도
그분 못지않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
꼭 그렇게 될께요."
소일초는
정말 철이 든 것 같았다.
조예진은
삼 년 전 보다 한 자나 더 자라버린 소일초가 정말 마음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작은 어머니는 왜 아기가 없어요?"
조예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몸 주석구석을 씻었다.
"여자는
무공이 너무 강한 것도 좋은 것이 못된단다."
"왜요?"
"여자의
무공이 나이에 맞지 않게,
젊어서 너무 강해지면 오랫동안 미모는 유지할 수 있겠지만,
그
대가로 아기를 가질 수가 없단다."
"이상하군요."
"모든
것이 조물주의 섭리라고 해야겠지.
한
손에 두 물건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이 인생이란다."
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우수가 배어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소일초가 말했다.
"작은
어머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내가 잘 모시면 돼잖아요."
"아이쿠,
그래 우리 귀여운 말썽꾸러기야."
그녀는
소일초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네
무공이 아주 깊어진 것 같은데...
이젠
도망가면 나라해도 못잡겠구나."
"칫,
앞으론 도망가지 않아요.
사부님께서 어머니 말씀을 잘들어야 된다고 했다구요."
조예진은 소일초에게 새 옷을 입히다가
한
옆에 놓여있는 어린보도를 안타까운 듯이 바라보았다.
"작은
어머니 왜 그래요?"
"아니다.
일단 쉬고 나서 내일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하자.
네
방을 깨끗이 치워놓았을 테니까 가서 쉬도록 하렴."
소일초는
자기 방으로 갔고 그녀는 무슨 일이 있는지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의
방은 모든 것이 떠날때 그대로 였다.
아마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작은 어머니가 손수 청소했을 것이다.
침상에
벌렁 누워 소일초는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소일초가
아주 어렸을때
그의 생모(生母)인 이씨는 아버지와 크게 다툰 후 백인장을 나가버렸다.
아버지의 말로는 어머니는 친정인 청옥검궁(靑玉劍宮)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때부터 백인장과 청옥검궁이 앙숙이 되었다는 것을 소일초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지금도 청옥검궁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가버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금의 작은 어머니가 들어왔다.
그
당시 작은 어머니는 정말 꽃보다 더 아름다왔다.
그의 어머니도 아름다왔지만 작은 어머니는 훨씬 더 아름다왔다.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가 아니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소일초에게
어머니에 대한 아주 깊은 정이 있지는 않았다.
더욱이
어려서 떠나버려 정들 시간이 부족했는지도 몰랐다.
지금까지도
친어머니가 그다지 보고싶다는 생각은 달지 않았다.
남황의
그 밀림 속에 있을 때,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은 아버지도 친어머니도 아닌 작은 어머니 조예진이었다.
조예진은
아버지에게 시집온 후,
끝없이 말썽을 부리는 자기를 한 번도 꾸짖는 법도 없이 사랑으로 돌봐왔던 것이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며 속을 태운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인데도
그녀는 꾸준한 사랑으로 그를 대했다.
아버지
작은 마누라라고 그렇게 놀려도 웃음으로 대하던 그녀였다.
소일초에겐
어쩌면 아버지보다도 친어머니보다도
더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 작은어머니인지도 몰랐다.
하녀가
인기척을 하면서 저녁을 가지고 들어왔다.
"작은
어머니는?"
"급한
일이 있어서 외출하셨을 겁니다."
저녁을
혼자서 먹은 후 오랜만에 돌아온 집의 아늑함을 느끼며
소일초는
일찍 잠들고 말았다.
그러나,
남황에서 올라온 비성성들은 인간의 문명을 처음 대하고
호기심에
가득차서 백인장의 이곳저곳을 끽끽대며 밤새 기웃거렸다.
덕분에,
수비를 맡은 무사들은 성가셔서 혼이 났고...
그날밤 백인장에서 편안하게 잘 잔 사람은 오직 소일초 한 사람 뿐이었다.
* * *
깊은
밤,
백인장의
깊은 심처에 자리 잡은 하나의 내실(內室)만이 불을 밝히고 있는데,
바닥은 푸른 청석(靑石)이고,
그
위로 눈부신 페르시아의 융단이 깔려져 있다.
내실의
사방엔 검은 빛의 휘장들이 쳐져 있고
실내에는 온갖 약초(藥草)의 향기가 가득하다.
이곳은
바로 백인장의 의약실(醫藥室)이었다.
지금,
차탁을 사이에 두고 아름다운 부인과 백발의 노인이 마주 앉아 있었다.
만인을
압도하는 기품을 흘려내는 미소부는 백인장의 여주인인 천외비연 조예진이었다.
조예진,
정숙하면서도
도도한 기품을 지닌 그녀의 옥용은 지금 수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천하영걸인
도왕 소선풍의 아내이며 중원최고의 명문의 안주인인 그녀였으나
그녀의
신상에 관한 것은 일체 신비와 비밀의 장막에 가려져 있기도 했다.
천하
그 누구에게나 물어 보더라도, 그녀의
이름이 다만 조예진이며,
금기서화(琴棋書畵)에 관한 한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고,
그녀가 도왕 소선풍의 둘째 부인이라는 사실 외에 더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조예진의 신분내력은 비밀에 휩싸여 있다.
그리고,
백발백염백미에 물처럼 잔잔한 눈빛을 지니고 있는 노인,
평범한 속에 칼날처럼 예리한 비범함을 지니고 있는이 노인이 바로
무산신의(巫山神醫)
서공화(徐供華)란 인물이었다.
백인장의
일원으로서 도객이 아닌 유일한 인물이며
중원무림
최고의 의술을 지니고 있다는 신의(神醫)가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조예진과
서공화!
옥탁을 사이에 두고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질식할 것만 같은 침묵의 벽이 드리워져 있었다.
"불행한
일입니다."
문득
서공화의 입에서 무겁고 침중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
서공화가
흘려낸 단 일곱마디의 음성,
하지만 그 음성에 보이는 조예진의 반응은 컸다.
냉정하게 수려한 자태를 지키려고 애를 쓰고는 있으나...
그녀의 교구는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입이라도 열면 금방이라도 전신이 허물어질 것 같아서인지,
한
마디의 말도 흘려내는 법이 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
이때,
서공화의 무겁게 침중한 음성이 다시 흘러내렸다.
"장주께서는
지금까지는 전혀 차도가 없습니다.
만약 범인(凡人)이셨다면 이미 고인이 됐겠지요.
하지만,
지금의 상태도 도저히 살아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이니..."
말을
이어가는 무산신의 서공화의 낯빛이 더욱 침중히 굳어졌다.
조예진은
백인장의 여주인답게 꿋꿋이 자신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물결처럼 떨고 있었고 얼굴은 암담한 절망의 빛으로 물들었다.
이윽고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았던 조예진의 입술이 열렸다.
"그렇다면
그동안 더욱 상세가 악화되었음을 이르시는 것인지.!"
"그렇습니다."
"아...!"
창망한
신음을 터뜨린 조예진의 교구가 허물어질 듯 비틀거렸다.
서공화도
어두운 낯빛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본시
인간의 힘으로는다스릴 수 없는 심한 중상이었소.
내 그동안 온갖 노력을 기울여 보았소이다만...
결국 허사로 그치고 마니..."
서공화의 허탈이 배인 음성의 여파에 밀려
조예진의 매화처럼 냉염한 얼굴에 암담한 절망이 밤꽃처럼 피어났고,
그녀의
섬연한 교구는 화석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나를 유심히 보던 그 청년은 바로 반노환동하신 사부님이었어.
아아!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알아차렸어도...
아니
그분에게 어린보도만 쥐어져 있었어도...'
그때
돌연 서공화의 노안에 의혹이 번져 나왔다.
"한데
기이한 것은 그분의 체내에 있는 알 수 없는 잠경(潛勁)의 정체입니다.
더이상
상태를 악화시키지 않고 유지시키는 그 힘은 도저히 연원을 알수가 없습니다."
석상처럼
전신을 굳히고 있던 조예진이 고개를 들었다.
"기이한
잠경이라니요?"
무산신의
서공화는 조예진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하며 음성을 흘려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그 전에는 없었던 기운이었소이다.
어쩌면
그 기운이 그분의 병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신의께서는
어느쪽으로 이야기하는 것인지.?"
서공화는
탄식을 깊이 토했다.
"길(吉)이
될지 흉(凶)이 될지는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오히려 기운이 스스로 몸을 해치는 결과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늘의 자비가 그분에게 내리기만 바랄 뿐..."
조예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신의께서는
이밤으로 다시 돌아가실 것입니까?"
서공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해질 무렵에 소장주가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건강하고 철이 들어서요."
"오! 소장주께서 돌아오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제가
돌아가는 대로 전하겠습니다."
조예진은
소일초를 떠올리며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그럼
밤길 조심하십시오.
내일
소장주와 함께 그곳으로 찾아가 뵙도록 하지요."
그녀는
무산신의와 함께 일어서며 말했다.
그곳이라!
!
과연
백인장에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 * *
호수(湖水),
시선을
들어 저 편의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호수다.
바로 천하제일대호인 파양호(播陽湖)인 것이다.
백인장은
이곳 파양호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 파양호 안에 거대한 인공부주(人工浮舟),
즉
인공으로 만들어진 섬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졌다고 믿기지 않는 이 거대한 인공섬의 중앙에는
암청색으로
우거진 원시림(原始林)이 펼쳐져 있다.
까마득한
시야에 간신히 잡혀오는 신기루같은데
자세히 헤아려 보면 그것은 다분히 인공적(人工的)인 질서를 보이고 있으나,
일견해
보면 자생하여 제멋대로 자라난 자연림(自然林)을 연상케 했다.
한데
그 원시림을 둘러싸고 있는 검푸른 암초와 수초들을 보라.
백여겹,
족히 백여 겹은 되리라.
원시림을 둘러싸며 원경(遠景)을 멀리해 가는 암초와 수초의 기이한 방벽...
거기다가
암초와 수초의 겹을 따라 기이한 회오리를 일으키는 호수의 물살,
쿠우우우!
싸싸싸싸!
부딪쳐
되돌아 가는 물살의 소리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전율스러웠다.
만일
어떤 자가 저 원시림을 목표로 하여 배를 저어간다면
그
자는 맹세코 저 암초와 수초의 기이한 물살의 회돌이에 흔적도 없이 목숨을 잃고 말리라!
설사
그 자가 배를 모는 솜씨가 신기에 가까와 암초와 물살을 간신히 헤쳤다 해도
부주의
중간중간에 은밀히 숨겨진 백 팔십 곳의 기관진식(機關陣式)만은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이 모든 기관진식이 일시에 발동한다면
망망한 파양호가 한꺼번에 뒤집히고 말테니까.
밤(夜),
달빛도
별빛도 짙은 먹장구름 속에 숨어버린 칠흑 같은 심야였다.
돌연
이 파양호의 물결을 해치며 부주의 원시림에 접근하는 한 척의 배가 있었다.
스스스슷!
배는
맹렬히 휘도는 물살을 헤치며 빠른 속도로 원시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노를
젓고 있는 사공은 수초와 암초와 무수한 기관매복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알고 있는 것인가?
사공은
신기(神技)에 가까운 솜씨로 노를 저어 가고 있는데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전형적인 어부(漁夫)의 차림이었으며,
어지럽게
흘려내리는 백발을 아무렇게나 휘날리고 있는 칠십 정도의 노인이었다.
또한
어둠 속에서 불꽃같은 안광을 발하는 노인의 몸에선
기이하게도 고기비늘 냄새가 자욱이 뻗어나고 있었으니...
-무간어옹(無竿漁翁),
강호인들은
이 노인을 무간어옹이라 부른다.
장강(長江)의
험악한 물살 중에도 태고 때부터 인간의 숨결을 거부해온 비룡폭류하(飛龍瀑流河),
바위라면 바위를, 태산이라면 태산을 일시에 소용돌이 치는 격류로 박살을 내버릴
그 비룡폭류하의 물살을 유유히 하나의 돛단배로 헤치며,
신선(神仙)처럼
죽간도 없이 천잠사 한 가닥으로 낚시를 즐기고 살았다는 사람...
그리고
십 년 전 백인장이 생긴 때부터
이
파양호로 옮겨와 살고 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스스스슷!
아무렇게나
노를 저음에도 배는 마치 잘 길들여진 말처럼 정확한 진로로 원시림을 다가간다.
이
속에 무간어옹의 눈빛은 한곳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 모르고 있었다.
(오호!
참으로 수려한 모습이로다. 장주님을 그대로 빼어 닮았다.)
그렇다.
무간어옹의 시선이 닿고 섰는 곳에는
고귀함과 우아함과 성결함 속에 수심과 우수가 가닥가닥 터져 오르는 조예진과,
그녀의
품에 평화로히 잠이 든 소일초가 안겨 있다.
조예진의
시선은 어두운 허공을 향하고 있으나
그
두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 뜨릴 것 같은 수심(愁心)이 가득하다.
문득,
소일초의 수려한 얼굴을 헤아리던 무간어옹이 조예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주모!
참으로 소장주께서 늠늠하시지요.}
이때
망연히 허공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던 조예진의 서늘한 시선이 내려졌다.
그리고 탄식인 양 흐르는 음성,
{불쌍한
애지요.}
탄식!
한 줄기 탄식이 조예진의 붉디붉은 입술 새로 앙금처럼 흐르는가 싶더니...
조용히
백옥(白玉)의 소수(素手)를 들어 잠들어 있는 소일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
아버지가 이 애를 무척 보고 싶어 했지요.
이
애가 지금까지 피웠던 말썽도 애 아버지는 마음속으로는 조금도 탓하지 않았답니다.}
조예진의
두 눈에 서린 우수가 더욱 짙어졌다.
순간
무간어옹의 널찍한 등이 무겁게 흔들렸다.
{그렇다면
주모... 혹시 소장주께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조예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깜깜한 야공으로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원망하듯 중얼거렸다.
{불쌍한
것...! 어찌 운명은 우리에게 가혹한 것인지.}
무간어옹은
허공을 향해 더욱 수심을 두리운 채
굳어 있는 조예진을 향해 더이상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필요 이상으로 슬퍼보이며 필요 이상으로 소일초를 가련하게 여기는
조예진의
행동에 비록 많은 의구심이 있었지만...
어둠은
더욱 어지럽게 쏟아져 내렸고,
출렁...출렁...
뱃전에서
부딪치는 물결소리는 서러운 상심의 강(江)처럼 애닯다.
그 속에 무간어옹은 그저 묵묵히 노를 저어갈 뿐이었다.
× × ×
원시림은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빽빽했다.
무릎까지 빠져드는 늪의 낙엽과 기기묘묘한 형태로 살아있는 수목,
그리고
아무렇게나 길을 가로막고 있는 마른 나뭇가지.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일정한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면 과연 믿어질까?
그렇다.
그 무질서 속에 질서를 감추고 있는 원시림의 모든 것은
모두
완벽한 진세(陣勢)를 이루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모이고... 나뉘어지고...연결되어
이백 팔십여 개의 가공할 대소의 진(陣)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진세속에 또 진세...
이
세상에 어떤 자도 누군가의 길 안내가 없이는 이 가공할 진세에 갇혀 생명을 잃고 말리라.
한데
보라!
그
원시림 속에 솟아 있는 거대한 석조건물을!
원래는
흰 백색의 건물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검푸른 이끼가 잔뜩 드리워 있어 검은 악마의 서식처 같아 보이기도 했다.
<백인장(百刃莊)>
석조건물의
현판에 천하를 삼킬 듯 휘갈겨져 있는 세 글자!
이곳인가?
바로
이곳이란 말인가?
절정의
도객만도 일백을 헤아리고,
소속된 자 어느 누구하나 고수 아닌 사람이 없으며,
수 백 년의 장구한 세월을 지켜온 절대의 도문(刀門), 백인장!
그
본래의 근거지였단말인가?
그렇다.
이 인공섬의 어마어마한 석조건물은 분명
백인장의 선조들이 면면히 이어온 진짜백인장의 뿌리였던 것이다.
그 어떤 자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일대금역(一大禁域)이며,
백인장에 의한 중원정의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슈!
슈우우!
배는
석조건물을 향해 곧바로 다가가고,
어느
새 눈을 뜬 것인가?
소일초는 호기심과 기대가 꽉 찬 눈빛으로
어둠
속에 움츠리고 있는 거대한 석전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곳인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우리 선조들이 살아왔다던 곳이 바로 이곳인가?)
소일초의
몸은 강한 기대감으로 떨기조차 했다.
{작은
어머니! 어머니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어요?}
조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들어서는 자주 오지는 못했지. 장원의 일이 바쁘니까.}
{그런
일은 아버지가 다 하셨잖아요?}
{지금
우리는 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란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소일초의 안색이 홱 변했다.
{아버지는
어쩌면 나를 죽이려 들지도 몰라요.}
{그런
일은 절대없을테니 안심하거라.}
불안해하는
소일초의 머리를 스다듬어주는 조예진,
그리고
안스러운 듯이 소일초를 바라보는 무간어옹...
× × ×
석전(石殿),
석전의
내부는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수 십 명의 장정이 팔을 힘껏 버리고 붙잡아야 간신히 안을 수 있는
거대한 대리석기둥 수백 개는 석전을 받치고 있었고,
아득할
정도로 높은 천정에는 온갖 색의 야명주들이 다투어 빛을 뿌려내고 있다.
뿐인가?
바닥은 어찔어찔 하도록 윤이 나는 운남의 대리석이었고...
사방에 내려진 휘장은 천축산(天竺産)의 비단이었으니...
그
장엄함과 화려함은 실로 형용을 불허했다.
바로
이 석전의 내부에서 소일초는 두 눈을 휘둥그래뜨고 사방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데
일순간,
{백인장의
내총관(內總管) 독고행(獨孤行)이 주모와 소장주님을 뵙습니다.}
스스!
한
소리 장중한 음성과 함께 빛처럼 조예진와 소일초의 앞에 나타난 사람,
그는
백발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팔십 세 가량의 노인이었다.
한데
모든 것이 흰 것으로만 치장되어 있는 이 사람은
도대체 천상의 선인인가? 인세의 속인인가?
신선과
같은 단아한 풍모를 지닌 노인의 모습은 가히 어디에 비겨 볼 데가 없다.
헌데
백인장에 내총관(內總管)이란 직책이 있었던가?
그렇다.
독고행이라는
이 노인은 쓸쓸히 비워져 있는 백인장의 본거지를 관리하고 지켜온 사람이었다.
이
순간 조예진도 같이 노인을 향해 예를 보내고 있었다.
이어
그녀는 빤히 독고행을 올려다 보고 있는 소일초를 향해 입을 열었다.
{독고총관을
처음보지?}
조예진의
음성에 소일초는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피워올렸다.
그리고
침착하고 의연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오랫동안
이곳에 와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총관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군요. 반갑습니다.}
(오...!)
독고행은
비범한 풍도를 뿌려내는 소일초를 바라보며 내심으로 감탄의 탄성을 터뜨렸다.
이어
조용히 소일초를 향해 마주 허리를 구부렸다.
{본
총관도 소장주의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직접 보게 되어 기뻐군요.}
소일초의
점잖은 말에 조예진이 오히려 놀랐다.
언제나, 자기와 소선풍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나 하대하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던 소일초였기에
지금같은
의젓한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가출했다거나 무슨 말썽피웠다는 그런 소문들 이겠지요?}
소일초의
말에 독고행은 미소를 지었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소장주께서 너무 장난이 심하다 해서 걱정을 금치 못했었는데...
한낱
그 모든 것이 기우였음을 오늘에야 깨달았소이다.}
독고행의
인자한 얼굴에 서린 그림자 사이로,
언뜻
참을 수 없는 기쁨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지요?}
{제가
안내를 해드리지요}
독고행은
먼저 걸음을 옮겼고,
{어차피
맞을 매라면 일찍 맞는 것이 낫겠지?}
소일초는
혼잣말 처럼 중얼거렸다.
하나
이내 그가 그토록 무서운 아버지를 만난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힐끗 조예진을 바라보았다.
조예진이
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안심하라는 표시를 하면서 눈물을 글성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일초의 걸음걸이는 평소보다 훨씬 느린 것 같았다.
신행마동이란 별호를 가진 그가 그처럼 느릴 수 도 있다니 참으로 별난 일이었다.
그런
소일초를 등을 돌려 봄빛처럼 따사로운 눈길로 쓸어보던 독고행의 시선이 조예진를 향했다.
{훌륭히
키우셨습니다. 주모.}
{별
말씀을...!}
{장주님께서도
무척 만족하실 것입니다.}
순간
조예진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훌륭한
애지요.}
탄식처럼
이 말을 내뱉은 조예진이 대화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
분의 상세는 어떠신가요?}
{다행히도
오늘 아침에 들어 약간의 차도가 있는 것 같다는 무산신의의 말이 있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되묻는
조예진의 얼굴에 모처럼 희색이 감돌았다.
{장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겠습니다. 어서...}
조예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일초가 걷고 있는 곳을 향해 조용히 걸음을 옮겨갔다.
소일초는
조예진과 독고행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흠칫 놀랐으나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의
깊은 내공을 그들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아버지가 상처를...? 말도 안돼.)
소선풍의
무공의 고강함은 소일초가 잘알고 있었다.
당금
무림의 그 누가 소선풍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이 나눈 대화의 내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 분의 상세라니?
차도가
좋아지고 있다니?
내총관
독고행,
그 사람은 백인장을 통틀어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고수로
이곳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지만
어떻게 해서 무산신의와 아버지가 이곳에 들어와 있단 말인가?
복도,
진홍빛 융단이 그림처럼 덮여있는 복도였다.
그리고
이 회랑은 어찌나 긴지 마치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미로를 연상케 했다.
바로
이 미로처럼 이어진 회랑의 끝에
역대
백인장주들의 집무실이자 폐관실(閉關室)이 위치하고 있었다.
만년온옥으로
새겨진 쌍봉조각이
멋들어지게
조화된 문을 들어서면 하나의 실내가 시야에 드러난다.
천정에는
야명주가 대낮처럼 불을 밝히는데
벽은 당대(當代)의 유명한 화가들의 산수화가 걸려 있고,
바닥에는 밟고 지나기가 송구스러운 비단이 깔려있었다.
때문에,
실내는 장중하고 무겁고 화려하며 부귀롭다.
한데
이것은 또 무슨 일인가?
이토록
화려한 실내가 더없이 더둡고 침울하며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니...
그렇다.
이 무거운 분위기는 세 사람으로부터 기인된 것이었다.
하나의
침상과 두 개의 호피 의자에 각기 자리를 달리한 세 사람으로부터...
침상에
누워 있는 사람,
삼십
오륙 세나 되었을까?
붉은
침상은 호화롭기 그지없었고,
너무도 희어서 오히려 슬프기까지 한 살결과...
손과 옷과 치렁치렁 늘어진 흑발을 뒤로단정히 묶은 백건(白巾)과
도대체
침상의 그에게서 선명한 것이 아닌 것을 찾아 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에다
밀납처럼 희고 창백한 얼굴에 신의 작품처럼 자리한 이목구비(耳目口鼻)에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사내의 아름다움...
누구든 일단 이 사내를 대하고 나면 그가 지닌 아름다움과
그의
일신에서 은은히 풍겨나는 고아한 기품에 압도되어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리라.
한데
이것은 또 무슨 일인가?
천정을 우러르며 치켜 떠져 있는 그의 두 눈은
아무런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담고있지 않은 몽롱한 것이 아니가?
마치,
모든 영혼과 모든 심령은 이미 이 사내의 몸에서 달아나 버린 듯한,
한 마디로 그의 동공이 힘없이 풀려
그저
의무처럼 천정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는 조각품을 연상케 했다.
바로
이 침상의 사내를 침울한 안색으로 지켜보고 있는 호피의자의 두 사람은
둘
다 나이를 헤아릴 수 없는 노인(老人)이었다.
두
사람 모두 푸른 장삼을 입고 있었다.
그
중의 한 노인은 머리에는 와룡관(臥龍冠)을 썼으며...
심해처럼
깊고 교요한 눈빛에 전체적인 분위기를 현기로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에다
이 노인을 특징지을 수 있는 미심에 박힌 푸른 반점,
허나 그것이 오히려 고고한 대유학자를 연상케 하며 노인의 기품을 돋보이게 한다.
-무심군자(無心君子),
이
하늘 아래 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자 그 누구겠는가?
이
시대의 최고의 삼 현자 중의 하나 이며
천하에 깔려 있는 대소사(大小事)를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훤히 알고 있는
지혜에
관한 한 그 능력을 견줄 사람이 드문 사람이다.
그뿐
아니라 천하십이대고수 중 한사람이기도 한 그의 얼굴에
홍안은 아직도 그를 오십대의 노인으로 보이게 하나,
기실 그의 세수는 백을 훨씬 넘겼다.
그리고,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인물은
수려한
용모에 도도한 기풍을 지니고 있는 노인이었다.
중원은
이 사람을 수혼도객(收魂刀客)이라고 일컫는다.
수혼도객!
그는
지닌 바 외호 그대로 한 때 중원 십팔만리를 주유하며
마두들의
혼을 거두어들이고 다녔던 절세적인 도객이다
도객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리 속에는 천하의 무수한 무학이 담겨져 있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수혼도객을 일컫기를,
-수혼도객의 도는 무서운 것이지만 그의 뇌(腦)속에 든 무학들은 그의 도 보다 더욱 가공하다.
그것들 중 백분지 일만 얻으면 능히 천하에 고수로서 입신할 수 있으리니...
이 신화적인 두 기인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을 줄이야.
세상은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까마득한 무지(無知)가 아닌가?
아니,
꼭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은 삼 년전에 가출한 소일초를 잡으려 하던 바로 그 두 노인이었으니...
그 당시 그들이 했던 말로 보아,
백대선생같은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들은
도왕 소선풍의 좌우공봉(左右供奉)이기도 하다.
지금
두 사람은 인간의 감정이라곤 하나도 드리우지 않는 채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사내를 향한 채 조각처럼 굳어져 있었다.
질식할
것 같은 침묵과 정적이 잠겨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시간은 물흐르듯 흘렀다.
깜깜한 밤하늘의 먹장구름이 걷혔음인가?
화안히
달빛이 창문에 부딪히고 있음을 느꼈다.
바로
이때였다.
자박자박!
사박사박!
조용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무서운 분위기가 젖어 있는 실내에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예진과
소일초, 그리고 내총관 독고행이었다.
때를
같이 하여 조용히 몸을 일으키는 수혼도객과 무심군자,
그들은
일제히 조예진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구부렸다.
{좌우공봉!}
{주모께
인사드리오이다.}
조예진도
수심에 찬 얼굴에 한 줄기 미소를 피워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두
분 공봉께서는 어서 예를 거두세요. 한데 무산신의께서는 안보이시는 군요.}
{아마도
지금 약실에 있을 것이외다.}
허리를
편 두 기인의 눈빛이 소일초의 한몸을 더듬었다.
동시에 두 사람의 동공으로 언뜻 놀람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소일초가
많이 변한 듯 했기 때문이다.
어딘지
모르게 자기들을 골탕만 먹이던 그 꼬마가 조금은 변한 것 같았다.
이때,
소일초가 환한 미소를 피워 올리며 수혼도객과 무심군자를 향해 다가섰다.
{두
분 봉공께 인사드립니다.}
의젓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소일초,
두
기인도 어리둥절하며 소일초를 향해 손을 가볍게 맞잡아 보였다.
{삼가
좌우공봉도 소장주를 뵈오이다.}
소일초가
자기들에게 이처럼 인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서로의 눈빛을 마주하는 묘한 대치,
그
침묵을 타고 한 소년과 두 기인의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그들에게
더 이상 말이 필요없고,
그들에게서
서로가 무엇인가를 주고 받을 필요가 없다.
소년은
마음으로 다시는 말썽피우지 않겠다는 맹세를 보내고 있었고,
두
노인은 소일초가 확실히 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말
대신 환한 미소와 가벼운 미소의 주고 받음으로 모든 것은 흡족한 것이다.
문득
수혼도객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침상의 백의사내를 가리켰다.
실내의 이 모든 상황을 아예 도외시 한 채
풀린
동공으로 그저 허공을 바라보고만 있는 조각상과 같은 사람을...!
{장주님이십니다.}
오오
장주라니...?
그렇다면
모든 신체기능이 마비된 채 허공만 멀건히 바라복 있는
식물인간과
같은 사람이 바로 도(刀)의 제왕(帝王)인 도왕 소선풍란 말인가?
한데
왜?
이
시대 최고의 도왕(刀王)인 그가 어째서 이토록 처참한 상태로 병상을 지키고 있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 소일초는 아버지의 모습을 쳐다보고 도저히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곳에
들어오면서 얼핏 들은 이야기가 있기는 했지만 설마하고 말았다.
하기야,
어찌 선뜻 이러한 사실를 믿을 수 있겠는가?
늘 햇살처럼 찬란한 신위로
천하를
한눈에 굽어 보고 있으리라고만 생각해 왔던 자신의 부친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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