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신행마동

第 十 章 綠林盟을 찾아온 망나니

오늘의 쉼터 2016. 6. 2. 11:38

第 十 章 綠林盟을 찾아온 망나니

 

성(城),
그것은 실로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하나의 성이었다.
성 둘레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이십여 리도 넘을 것 같고,

황혼의 노을 아래서 보자니 물빛보다 더 새파란 녹빛이 마치 세외선경(世外仙 景)을 보는 듯 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놀라운 것은 성의 크기라든가 아름다운 경관 때문이 아니었다.
성은 놀랍게도 깊은 산속 계곡 속에 떠있었다.
만경창파(萬頃蒼波)의 바다에 떠다니는 낙엽처럼 푸른 숲의 바다 속에

하나의 섬처럼 자리하고 있는 성(城)은 호리병 처럼 입구가 좁은 계곡의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 거대한 산속의 녹색 성은 바로 수천만 개의 바위들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그 위에는 수많은 고루거각과 전각은 물론이요,

인공호수도 있었고 울울창창한 과수림(果樹林)도 있으니...
이것은 성이 이토록 깊은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기상천외(奇想天外)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황혼 아래, 서녁에서 이는 저녁 바람으로 인해,

나무들의 만경창파를 유유히 헤치며 장엄히 떠다니는 듯한 녹색의 성,

<녹림맹(綠林盟)>

바로 이것이다.
장강 일대의 일천팔백대소 녹림채(綠林寨)를 관장해 왔으며

백만 녹림도(綠林徒)들의 총 본산으로 우러러지는 푸른 숲(綠林)의 제왕 녹림맹(綠林盟)의 총단이...!

백인장(百刃莊)과 청옥검궁(靑玉劍宮), 삼성무림청(三聖武林廳)이 땅의 지배자들이라면,

녹림맹은 숲을 지배하는 하늘 중의 하늘이다.
땅은 통일되어 있지 않았지만 숲은 통일되어 있었다.
그런데 무림에서 손을 뻗친 적이 거의 없었던 녹림을 잠식해 오기 시작한 세력이 있었으니,
삼성무림청!

바로 그 악명 높은 장강 일대의 삼성무림청이다.
땅에서는 몰라도, 숲에서는 언제나 하늘은 오직 하나였다.

그런 만큼 이 두 세력은 서로 숲을 빼앗고 지키기 위해 이미 수없이 전쟁을 벌여온 상태였고,

아직도 그 피의 전쟁은 끝나지 않은 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 부언해 둘 것은 녹림맹의 대맹주(大盟主)인 황녹천(黃綠天)은

그 이름만 전해지고 있을 뿐 일체가 비밀에 쌓인 중원제일의 신비인(神秘人)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누굴까?
아무리 그 의혹을 해결하려 해도 여전히 신비로 가려져 있는 장막의 인물 황녹천은?

× × ×

-녹왕전(綠王殿)!

녹림맹의 심장부요 핵심인 곳이다.
스읏!
헌데 돌연 삼엄한 경비와 무수한 기관장치로 엄중히 지켜지고 있는 녹왕전으로

한 줄기 검은 그림자가 바람처럼 스며들었다.

그런데 이것은 또 무슨 일인가?
스스스!
바람인 양 검은 그림자가 스쳐지나간 사이로 몸서리치는 푸른 빛이 소리도 없이 폭사되는 것이었고,

일시에 녹왕전은 그 푸른 빛으로 인하여 밝게 변해버린 듯했다.
뿐인가?

그가 스쳐지나는 뒤로 녹왕전의 곳곳에서 우수수 낙엽이 지듯이 떨어져 나뒹구는 경비고수들...
스___ 슷!
문득 한 줄기 바람처럼 유령과 같은 흑영(黑影)은 녹왕전 가장 깊숙한 내전에 소리없이 스며들었다.

내전(內戰),
능라휘장, 상아빛 침상, 용봉촛대와 백옥탁자,
내전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화려했고 넓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아찔아찔한 광택을 내고 있어 지고한 기운과 귀풍이 물살처럼 쇄도하고 있었다.
바로 이 화려의 극을 치달리는 내전의 한편에 드리워진 능라휘장,

소리없이 스며든 흑영은 그 능라휘장을 향해 불꽃 같은 시선을 쏟아내고 있는데...
오오 이런 일이라니...?
슈슈슈슈!
그 흑영은 전신에 검은 기운을 가득 피워올린 채 자신의 한몸을 감추고 있는 게 아닌가?
동시에 이 검은 인영의 몸에서 쏟아지는 기운이 너무도 가공해서인가?
돌연 능라휘장 속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그림자의 호흡소리가 크게 부풀기 시작했다.
한 순간 눈을 새파랗게 빛내며 휘장을 향해 바라보던 흑영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흘려냈다.
{황녹천! 나와라!}

아름다운 목소리!

흑영은 여자였던가?
아무튼 그가 부른 이름 황녹천!
황녹천이라니?

그렇다면 중원제일의 신비인인 황녹천이 저 휘장 속의 그림자란 말인가?
어쨌든 휘장 속의 그림자은 일체의 대답도 해오지 않았다.
그러자 더욱 가공할 검은 기운을 일으키며

흑영은 제삼 아름답기 그지없는 옥성(玉聲)을 소곤거리듯 내뱉었다.
{이곳을 비워라! 이제부터 이 녹림맹은 잠시간 내 처소가 되어야 한다. 황녹천! 빨리 나와라.}
이때 돌연, 지금껏 침묵만을 고수하던 휘장 속의 그림자가 최초의 음성을 터뜨렸다.
{그대는 누구인가? 남자도 아닌 것 같고 나이가 많은 것 같지도 않군.}
소리, 더할 수 없이 청아하고 맑으나,

어디서도 느껴보기 힘든 위엄이 서린 음성이 최초로 터져나왔다.
그런데, 그 음성은 도저히 성별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이었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신비로움 그 자체일 뿐이었다.

사방에서 울려오는 듯한,

아니 어쩌면 자신의 영혼에서 들려오는 듯하기도 한 음성이었다.
이때 섬뜩한 검은 안개에 휩싸인 채 형체를 분간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목소리의 침입자가 가볍게 콧웃음을 치면서 옥성을 흘려냈다.
{흥! 시시한 육합전성(六合傳聲)이군!

스스로 신비인을 자처하는 황녹천이 남의 이름을 묻다니 웃기는 노릇이야.}
{본좌는 당신의 신분을 물었다.}
{호호호! 궁금하면 직접 한 번 맞추어 보지 그래!

하지만 내가 황녹천 당신에게 그다지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도록 하지.}

순간 청아하고 아름다우나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음성이 능라휘장 속에서 신음인양 새어나왔다.
{그대의 몸에서 휘파람 소리가 끊이지 않는군!}
{호호! 맞았네. 그렇다면 그대는 내가 누군지 알았나!?}
{천하십이대고수중의 취풍녀(吹風女)...!}
{틀렸어! 나는 취풍녀가 누군지도 몰라. 한 가지 더 알려 주지.

우리 집은 여산에 있어. 완전히 우리집이라고는 말하기 좀 뭣하지만...!}
{백인장(百刃莊)!}
순간 예의 그 맑고 청아한 음성이 능라휘장 속에서 비명처럼 튀어나왔다.
{맞았어. 잘도 알고 있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누군지 알 수 있을까?}
{혹시 신행마동...?}
{천만에! 당신은 설마 내가 징그러운 남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신행마동은 남자애란 말이야!}
순간 또 다시 예의 그 음성이 비명과 신음을 섞어 터져나왔다.
{그...그럼 조부인?}
{쯧쯔 틀렸어. 중원제일의 신비인을 자처하는 자가 상당히 머리가 나쁘군 그래!

그분이 어떤 분이신데 한 밤 중에 당신같은 자의 침전에 뛰어들겠어.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그렇지.}
{...}
{백인장에 또다른 절세고수가 한 사람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지.}
{으음!}
{다시 한 번 맞춰봐.}
{백인도객 중의 한 사람인가?}

{또 틀렸군. 그들은 분명 고수들이지만...

호호호 나한테는 늘 한 수 양보하는 처지야!}
그 소리를 들은 능라휘장 속의 여인, 황녹천은 더욱 혼란스러운 듯 했다.

세상에 그런 고수가 백인장에 있었나?
{우리 녹림맹은 백인장에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것 같은 데...!}
{나를 모른다는 것만으로도 죄가 될 수 있어.}
순간 녹왕전의 일편에서 분노를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나 황녹천을 너무 무시하는군.}
찰라 검은 안개막을 치고 있던 인영의 몸이 세차게 요동쳤다.
{호호호! 그렇군. 이제보니 내가 당신을 너무 무시했어.

중원제일의 신비인 귀하! 호호호!}
맑고 아름다우며 건방지기 짝이 없는 듯한 어린 여자의 웃음소리가

묵빛 기류 속에서 한동안 터져 나왔다.
휘이이이!
그 소리에 따라 높은 음으로 울려퍼지는 휘파람 소리!
한데 바로 이때였다.
{어쨌던 반갑소. 당신이 누구이든!}
돌연 지금껏 혼란속에서 흑영의 정체를 알기위해 커졌던 음성이 조용히 가라앉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비웃는 듯한 음성을 흘러내는 게 아닌가?
{본좌보다 더 신비한 척하는 귀하와 조용한 해후는 잠시 후에 하도록 하겠소.}
{뭐...?}
흑영이 뾰족한 음성으로 반문을 화살처럼 퍼부을 때,

{흥분하지 말기 바라오.

귀하! 내가 마련한 곳에서 잠깐만 기다리면 될 게요.}
황녹천의 음성이 은근한 어조로 가라앉았다 싶을 순간!
쩍!
{헉!}
흑영이 밟고 있던 대리석 바닥이 지각할 수 없는 사이에 갈라지고

흑영은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흡입력이

무섭도록 빨아들이고 있음을 느끼고 다급한 비명을 터뜨렸다.
그러나 곧바로,
{호호! 황녹천 당신 따위가 감히...}
한 소리 간드러진 소성과 함께 흑영은 길게 몸을 뽑아올렸다.

하나 이것은 또 웬일인가?
{아악!}
흑영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몸이 더욱 깊숙이 빨려든 것이니...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는 대신에 다급한 비명을 내지른 것이다.
꽈앙!
동시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대리석 바닥은 다시 원위치를 회복해 버렸고...
이때 휘장 속의 그림자가 다시 심하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경악을 가라앉히는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서운 고수였다. 백인장에서 무슨 일로 우리 녹림맹에 고수를 파견했을까?

그것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고수를...}
휘장이 다시 흔들렸다.
{또 다시... 누군가가 오고 있다.

한 둘이 아닌 것 같은데... 이들이 정말 백인장의 고수들일까?}
끅끅! 끽---끅!
이어 한 소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섬뜩한 괴성과 함께 네 개의 흑영이 성광처럼 날아들었고...

푸스스스!
휘장 속의 그림자가 형체도 없이 소멸된 것은 동시였다.
찰나간,
{캑!}
{끅...! 캐객!}
흑영들의 입에서 헛바람을 삼키는 듯한 비명이 터지나왔다.

동시에 털썩털썩 짚단처럼 나뒹구는 네 흑영...
한데, 오오 그 흑영들은 섬뜩하리만큼 검은 털이 전신에 돋아있고

겨드랑이에는 박쥐처럼 날개가 달려있는 인간을 닮은 괴물(怪物)들이아닌가?
스스스!
이 순간 흩어졌다 모이는 휘장 속의 그림자,

그리고 침통하게 터지는 경악성,
{믿을 수 없는 일!

어떻게 남만에서 멸종했다고 전해지는 비성성(飛猩猩)들이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쓰러져 있는 비성성들은 털북숭이 손에 각기 한 장씩의 종이를 펼쳐든 채였다.

-아도래영(我到來迎)

{내가왔다 맞이 해라! ?}
대체 누가 왔다는 말인가? 도대체...
믿을 수 없는 경악에 찬 음성이 내전에 울려퍼질 때,
고오오오오...
돌연 기이한 영혼의 울림과 같은 소리가 사위를 진동하는가 싶더니...
스스스스으...
내전에 신비롭고 상서로운 광휘가 천신의 하강을 기다리는 것처럼 자욱히 피어오르지 않는가?

그리고 어느 순간 어떻게 나타났는지 모를 희미한 광휘에 휩싸인 인영 하나가 있었다.

그 인영 뒤에는 두 마리의 하얀 비성성이 각기 아름다운 미녀를 한 사람 씩 지키고 있었다.
물빛옷의 미녀와 피처럼 붉은 노을빛 옷의 미녀,

물론 이 미녀들은 인질이 되어 잡힌 사은상과 사옥상이었다.
한데 놀라운 것은 희미한 광휘가 감사인 인영은 뒤에있는 비성성들과는 달리

허공을 땅처럼 밟고 있으니...
이때 능라휘장 속의 그림자가 심하게 떨고 있음을 그곳에 있는 사람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휘장 속의 그림자를 향한 안개속에 휩싸인 인영의 음성이 터졌다.
{내가 왔다.}
음성! 더할 수 없이 장중하고 사람을 내리누르는 위엄이 깃든 나직한 음성이었다.
{으음! 귀하는 누구시오?}
휘장 속의 그림자가 다소 경악한 음색으로 물었다.
{그대 황녹천의 녹림맹을 잠시 빌리고 싶어하는 사람!}
순간 휘장 속의 그림자,

아니, 정확히 말해 황녹천의 의혹 서린 음성이 다시 터지고 있었다.
{빌린다.?}
{그래, 잠시...}
{후훗! 대체 당신은 누구이길래,

그리고 무엇때문에 본좌가 당신에게 이곳을 빌려주겠소?}
황녹천의 물음에 안개 속에서 만인을 압도하는 음성이 항거할 수 없는 힘을 담고 흘러나왔다.
{투귀(偸鬼)는 요즘 어디에 있는가?}
{투...투귀?}

투귀!
신행마동 소일초에게 백인장의 정뇌(井牢) 속에서

도둑질의 온갖 수법과 매화지를 가르쳤던 사마귀(四魔鬼) 중의 하나!
이 이름을 중원에 살고 죽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모를손가?

중원의 도둑들의 우상이며 신이고 절대자이며 모든 보물의 주인인 이 이름을!
황녹천의 경악 서린 음성이 반문하듯 튀어나온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이때 안개 속에서 음성이 이어졌다.
{그대가 투귀와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아무말 말고 본인에게 이곳을 빌려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게 바로 녹림맹을 살리는 길이기도 할 것...}
{...}
{투귀는 백인장에서 탈출했다.

천하에 숨을 곳이 이곳이 아니고 어디겠는가?

나는 백인장의 전권을 지닌 사람, 사마귀를 죽이고 살리고는 오직 그대의 결정 하나에 달려있다.

빨리 사마귀에게 연락을 취하고 바로 이 곳을 잠시 동안만 넘겨라. 그러면...!}
{그러면...?}
{빌리는 기간은 단 열흘, 그 후에는...

그대들의 녹림맹이 삼성무림청을 물리치고 영원히 녹림맹 단독으로 숲을 장악하도록 해 주겠다.}
안개속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천하의 말썽꾸러기 신행마동 소일초가 아니고 또 누구이겠는가?
하나 지금 만인을 잡아끄는 위엄과 힘을 지니고 흘러나오는 음성은

절대 소일초의 음성이 아니었다.
과거의 어떤 자가 신행마동 소일초의 음성을 들어보았던 자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필경 저 안개 속의 음성이 죽었다 깨어나도

신행마동 소일초의 음성이 될수 없다고 단언하리라!

{...!}
침묵,

황녹천은 이 엄청난 제안에 한 동안 침묵을 지켰다.
하나 이 순간 그는 자신의 수하들과 취할 수 있는 모든 연락을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허나 그 정교한 기관장치에 의한 연락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곧 녹림맹의 모든 기능이 바로 저들에 의해

이미 장악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음...!}
능라휘장 속의 황녹천의 입에서 침음성이 튀어나왔다.
바로 이때,
슈____슛!
안개속에서 번쩍이는 소일초의 한 손,

그리고 백색의 광채가 네 줄기...

바로 화산파의 절기인 매화지(梅花指)가 아닌가?
아도래영이라 적혀진 종이를 한 장씩 들고 쓰러져 있는 네마리의 비성성의 몸에

백색 매화지가 소리없이 가격되었다.
동시에 혈이 타동된 듯 벌떡 몸을 일으킨 네 마리의 검은 비성성!

그들의 눈에 흉악한 광망이 폭출되었다 싶은 순간 소멸되고,
슬금슬금...
그들은 소일초의 안개에 가려진 몸 뒤로가서 조심스럽게 시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슈______슛!
안개속의 소일초의 손에서 어느새 맑은 빛이 반짝하며 폭출되어

대리석 바닥을 쩡쩡 때리고 있었다.
쿠르르릉...!

찰라 흔적도 없이 닫혔던 대리석 바닥이 열리고,
{이 간교한 놈! 가만 두지 않겠다.!}
슈하악!
한 마디 날카로운 음성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벼락같이 치솟아 올랐다.
소녀(少女)!

그 인영은 도저히 인간이라 여길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소녀였다.

그 소녀는 물론 몸을 가리고 있던 검은 안개가 어딘지 사라져 버려

선명하게 모습이 드러난 주소아였다.
그녀의 몸에서 서려나오는 살기는 일시에 휘장을 펄럭거리게 하며

황녹천을 조각내 버릴 것처럼 엄청났다.
이 순간 그녀의 눈이 한 쪽에 서있는 소일초와 두 포로를 발견하고,
{응...왔어? 재수가 조금 없었어.}
이때 안개가 스르르 사그라지면서 소일초의 모습이 나타났다.
{킥! 허풍 잘 떨던데...

나보다 먼저 무림에 나왔으면 신행마녀(神行魔女)라는 호칭은 따고도 남았을 거야!}
본래의 장난꾸러기 목소리였다.
황녹천은 그 모습을 보고 얼떨떨 해 져 버렸다.

그는 나타난 인물이 백인장주인 도왕(刀王) 소선풍이 아닌가 의심했었던 것이다.
주소아는 함정에 빠졌던 지라 자존심이 상당히 상해있었다.
{황녹천! 대체 어떻게 할거야?

우리에게 녹림맹을 빌려주겠다는 거야 아니야?}
중원제일의 신비인 황녹천에게 고함을 치면서 분풀이를 했다.

{이런 꼬마들이었다니... 기가막힐 노릇이군.}
황녹천이 중얼거렸다.
{이봐! 황녹천, 괜히 신비한 척 하지마.

나도 네 비밀을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에 하나야.

설마 내 입으로 밝혀야만 믿는 것은 아니겠지.?}
소일초가 친구에게 하듯이 말했다.
{어떻게 해서 사마귀를 잘 알고 있지?}
{하하하. 한때 사마귀와 내가 서로 교류한 적이 있었지.}
{...?}
{사마귀는 나에게 자신들이 알고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주고

나는 그들에게 정뇌를 탈출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지.}
{...}
{한데, 나는 교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나에게 사부라고 부르라고 하더군,

제기랄! 가르쳐 주는 것은 똑같았는데 자기들이 가르친 것은 뭐 무공이라나?}
{...}
{?, 그때는 따로 사부라고 부르는 사람도 없어서 불러줬지,

하지만 이제는 안돼, 물려야 되겠어,

그 후로 훌륭하신 분을 사부로 모시게 ?거든...}
사부를 무른다?

한 번 사부면 영원한 사부지 무르는 법이 세상에 어디있단 말인가?

황녹천은 어이가 없었다.
{자, 그럼 이제 사마귀에게도 연락을 좀 해주실까?

할 것이 있으면 빨리 하는 것이 좋은 습관이거든,}
{사마귀는 지금 이곳에 없다. 그러나 연락은 해 주지.}
이때 주소아가 소리를 질렀다.
{사마귀진 당랑(螳螂)인지 엉뚱한 소린 그만 두고 당장 내 물음에 대한 답변부터 해!}

잠시의 긴장과 침묵이 흘렸고 이윽고 알 수 없는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도대체 성별조차 구별할 수 없는 황녹천의 음성이 떨렸다.
{좋소. 대신 그 기간은 열흘 뿐이오.}
{흥! 그 대답이 당신을 살렸어,

그럼 빨리 다른 곳에 가서 잠이나 마저 자라구.}
차갑게 흘러나오는 주소아의 음성에 휘장속의 황녹천의 몸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너무 기분나빠 하지마.

사귀다 보면 그 여자도 좋은 구석이 있는 여자야.}
소일초의 달래는 듯한 말이 나오자 황녹천은 더욱 어처구니 없어지고...
아뭏든 이 밤은 기이한 의미를 함축한 채 깊어가고 있었다.

* * *

주소아(朱小阿),
그녀는 백인장에 있을 땐 결코 이렇지 않았다.
얌전하고도 영리하며, 신비했기 때문에 누구나 좋아하던 소녀였다.

사람들을 대할 때도 어른을 꼭 알아보았고 행실이 발랐다.
그런데 그런 주소아가 소일초와 함께 다니는 요 얼마동안 성격이 많이 변한 것이다.

마치 소일초를 닮아 가기나 하듯이

그녀의 심술도 늘고 무림인들을 아무렇게나 무시하고 했다.
어쩌면 소일초와 맞서 싸우자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듯도 한데,

아직 그녀는 나이 말고는 소일초를 이길 만 한 것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고찰에서의 치욕적인 패배이후로 그를 정면으로 반박하기가 힘들었다.

또 싸우고 난 후에 무슨 짓을 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도 소일초의 행실이 미운 점이 있기는 했지만, 마냥 미운 것만은 아니었다.

소일초의 짖궂은 짓도 그렇게 싫지 많은 않았다.
더우기 전혀 장난을 받아 주지 않는다면

소일초는 또 사은상이나 사옥상에게 짖궂은 짓을 할 것이다.
그것은 정말 참을 수 없이 싫은 그녀다.

차라리 자기에게 하는 것이 낳지.
지금 주소아는 한 다발의 국화를 꺽어서 요생각 조생각 하면서 꽃들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녹왕전(綠王殿),

사방 백여 장의 반경에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 있는 꽃의 천국(天國),

바로 이 꽃의 바다에 날아갈 듯 서있는 한 채의 누각(樓閣)을 일컬음이다.
그리고 전에는 녹림맹주 황녹천의 거처였으나,

지금에 이르러선 신행마동 소일초의 거처가 된 곳이기도 하다.
아니 신행마동 소일초가 잠시 빌린 곳일 뿐 완전한 거의 거처는 아니다.
그러나 그 어떤 자도 녹왕전의 이십 장 이내엔 접근이 불허되는 절대금역(絶對禁域)이 되었다.

왜냐하면 접근의 대가는 곧바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심지어는 죽음(死)으로 까지 지불되었으니까

녹왕전의 실내,

사방이 깨끗하게 정돈된 아담하고 고아하기 이를 데 없는 실내이다.
하나의 침상에 자단피의 의자가 두 개...

[낄낄낄!]
바로 이 실내에서 듣기만 해도 고약한 악동의 웃음소리가 휘장을 진동시켰다.
그리고 부르르 온 몸을 떠는 탁자에 앉은 두 미녀,

장강 변에서 포로로 잡았던 바로 사은상, 사옥상 자매였다.

또 소일초가 주소아가 없는 틈을 타서 무슨 장난을 한 것인가?
그 동안 얼마나 심하게 시달렸는지 사은상은 노을 빛 얼굴은 초췌하여

처음의 모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핼슥했다.
고민따위는 모르는 사옥상은 단지 소일초의 웃음이

또 무슨 짓을 하기 전의 전주곡이라는 것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뿐,

먹기도 잘 먹어서 건강해 보였다.
덜컥!
그때 방문이 열리면서 주소아가 한 아름의 국화를 들고 들어왔다.
{얌전히 침상에가서 잠이나 더 자.}
그녀를 보고 두 미녀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고,

소일초는 두손을 등뒤에 감추었다.
{지금 숨긴게 뭐야? 빨리 꺼내놓지 못해?}
{헤헤헤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없어.}
두 손을 앞으로 숙 내밀었는데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주소아는 분명히 소일초의 손에 뭔가가 들려 있는 것을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보았었다.
물증을 잡지 못하자 사은상 자매를 홱 돌아보았다.

그러자 사은장은 질끈 눈을 감을 버렸고 사옥상이 자기의 가슴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내게서 이걸 가지고 갔어. 그리고 언니에게서는 이걸...}

사옥상의 한 손은 사은상의 하체를 가리켰다.

말로 하지 않아도 주소아는 소일초가 두 여자에게서 무엇을 훔쳤는 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당장 돌려줘. 아무튼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해어휴 골치야!}
{벌써 돌려줬어, 발 옆에 다 놓여 있을 거야.}
소일초가 어느새 도둑질 솜씨를 발휘한 것이다.
{흑흑...!}
이 세상에 존재하여 미(美)란 이름의 굴레를 쓴

그 어떤 것에도 비유를 해낼 수 없는 노을 빛 피부를 가진 미녀 사은상,

바로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안타까운 흐느낌이었다.

분노와 수치로 죽고만 싶은 그녀였다.
주소아는 도끼눈을 뜨고서 소일초를 한 번 노려보았다.
이어 사은상의 가슴에 그녀가 꺽어온 국화를 한 아름 안겨주면서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주었다.
{미안해요. 이번 일 만 끝나면 풀어드릴께요.

이제 내가 한 시도 눈을 떼지 않고 저 말썽꾸러기를 지킬께요.}
본래 심성이 고왔던 주소아다.

비록 요즘들어 많이 악랄해 지기는 했어도,

사은상의 눈물과 사옥상의 자신의 처지마저 깨닫지 못하는 천진함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도 순진한 감상적인 소녀였기에...
찰랑...찰랑!
세상의 온갖 비리(非理)와 추악함을 잊어 버린 동공에 눈물이 솟아났다.
여인의 감정이라고는 오직 색귀에게서 들었던 육체적 반응 외에는 모르는 소일초는

이러한 사정을 이해할 수 조차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것을 지켜보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또 한쌍의 눈빛이 있었다.

천진한 아기같은 심성의 사옥상, 바로 그녀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 × ×

{내 말 잘들어. 오늘 낮에 백인장에서 고모가 편지를 보냈어.}
{나는 못 봤는데...}
휘장이 드리워진 침상에서 소일초와 주소아 마주보고 있었다.
{내가 치웠어.

고모부의 상세가 지난 번에 사옥상에게서 받은 약을 복용한 이후로 급속도로 나아지고 있데...}
{그럼 언제 쯤 다 나을 수 있는데?}
{그건 나도 잘 몰라.

하지만, 너는 아무래도 지금 행동을 좀 고쳐야 해.}
{또 잔소리...!}
{고모부는 사옥상에게 받은 약으로 빨리 치료되고 있는데

너는 그들 자매를 괴롭히기만 한잖아. 그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거라고...}
소일초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내가 그것도 모르고 있는 줄 알아?

그 여자들은 녹림맹도들을 무수하게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삼성무림청의 요인들이야.

아버지가 그렇게 다친 건 삼성무림청때문일 가능성이 십중 팔구고!

그렇다면 네가 인질로 잡혀있었다는 곳도 그곳이라는 이야기야.}
{...}
{그런데도 그 여자들에게 관대해지라고?

흥, 더 잔인해 질 수 도 있어.}
{하지만, 그녀들이 고모부를 해친 것은 아니잖아?

또 더우기 여자로서 치욕을 주지는 않을 수도 있잖아?}

주소아도 마주 소리쳤다.
소일초는 잠시 입을 다물고 주소아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럼 더 이상 그 여자들을 건드리지 않겠어.

대신, 그들에게서 삼성무림청이 사수 중의 삼수(三秀)와 관련이 있다는 자백을 책임지고 받아내.}
{알았어.}

침상에서의 두 어린 남녀답지 않은 장난기라고는 전혀 들어있지않은 어른스러운 대화,
그들은 어리지만 무섭도록 치밀한 계획하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 × ×

소일초와 주소아가 같은 침상을 쓰는 방에서 멀지 않은 다른 방,

무공을 폐쇄당한 사은상 자매가 침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저녁이 오면 그녀는 문에 빗장을 걸고 철저하게 문단속을 하지만

소일초는 도둑고양이 처럼 스며들어와

두 자매를 만지고 쓰다듬고 짖궂은 장난을 하다가 가곤 했다.
사옥상은 그냥 두면서도 자기는 꼭 아혈(啞穴)을 집어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였다.
지금 사은상은 한과 증오의 눈빛을 가닥가닥 실어내면서 이를 악물고 있었다.
(천하의 사은상이 이런 초라한 몰골로 잡혀있어야 한다니...

저 젖비린내 나는 꼬마에게 성(性)적인 수모까지 당해가면서...)
문득 자조의 새파란 광망이 그녀의 두 눈에서 불을 뿜고

그녀는 하얀 이가 바스러지도록 이빨을 가라붙였다.

(되돌려 준다. 오늘의 이 수모에 천배 만배를 더하여 되돌려 준다.

한데, 도대체 저 꼬마놈의 의도는 무엇일까?)
소일초를 생각하던 사은상의 눈빛이 파릇한 경련을 일으켰다.
사실 그녀는 며칠 동안 소일초를 지켜보면서 한두 번 놀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철부지 장난꾸러기라고하나

세상의 어떤 빙심(氷心)의 여인도 흔들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귀여운 얼굴...

그얼굴의 아름다움을 타고 도도히 대하처럼 흐르는 신비한 기질은

타인으로 하여금 절로 적대감을 느낄 수 없게 한다.
거기에다 그와 함께 있는 주소아라는 계집아이는 또 어떤가?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기품을 지녔으면서도

사악할 정도의 기괴한 무공을 구사하는 그녀...
천상의 선동들인 듯 한 두 어린 남녀의 의도는 아무래도 무림에 알려진 것 처럼

삼성무림청과 무림정벌이라는 것과는 다른 무엇이 있는 것같았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기로서니 절세고수로 알려진 백인장의 장주 도왕 소선풍이 있는데

백인장에서 두 어린 아이가 밖에 나와서 마음대로 날뛰게 하는 것도 이상했다.
들리는 바로는 여태까지 신행마동 소일초가 집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마다

백인장의 여주인인 그의 작은 어머니가 직접 무림에 나와서 잡아갔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오기도 전에 정식으로 출두를 선언하고 나왔지 않은가?
사은상, 그녀는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자기들과 꾸준히 싸워오던 녹림맹의 맹주마저

소일초에게 그토록 쉽게 안방을 내주었는지도 이해할 수 없는 그녀였다.
그때,
{아직 자지 않으면 문좀 열어줘요.}
문이 덜컹거리며 주소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은상은 바짝 긴장했다가 문을 열어주었다.
주소아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 있었고,

거기에는 탐스럽게 구워진 닭고기와 음식들이 놓여져 있었다.
한 순간 사은상의 눈이 의아심에서 크졌다.
{이제 괜찬아요 언니!}
주소아가 빛이 날 정도로 흰 얼굴을 갖다대면서 말했다.
{이제 그 꼬마가 더이상 언니들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주소아의 말투는 낮에 이후로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한이 골수에 사무친 사은상은 쌀쌀맞게 돌아서

사옥상이 누워있는 침상으로 걸어가 버렸다.
천천히 주소아는 사은상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어 사은상의 앞에 준비된 음식을 한 숟갈 떠 사은상의 입에 들이 밀었다.
{먹어요.}
순간 사은상의 그 차가운 눈빛에 강한 욕구가 배어났다.

들이 밀어진 음식을 삼키고 싶은 짐승 같은 욕구가...
그러나 끝내 사은상은 찬바람이 들도록 싸늘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주소아는 숟갈은 내릴 생각도 하지 않고 부드러운 음성을 흘려냈다.
{언니! 언니는 바보야! 언닌 벌써 나흘 째 굶었어.

이대로 계속 굶는다면 무공도 폐쇄된 그몸으로는 죽게 돼.}
{...}
{언닌 죽는 것이 억울하지도 않아?

이렇게 초라하게 말이야? 그 꼬마에게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주소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언니, 아니 삼성무림청의 소공녀... 어서 이 음식을 먹어요.그리고 사는 거야!!}
순간 냉엄히 고개를 돌리고 있던 사은상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치워! 더 이상 추근대면 그 음식에 침을 뱉겠다.}
주소아는 얼굴에 핀 미소를 지우지 않고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사은상! 나나 일초에 대한 저주가 크다면 왜 더이상 발악을 해보지 않는 거지.?}
그녀의 어투는 다시 달라졌다.
{삶을 체념하지 않았다면 먹는 거야! 더구나 이곳은 녹림맹이야!}
{...!}
{나는 몰라도 그 꼬마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변하면

당장이라도 당신을 이 녹림맹의 사람들에게 넘겨버릴 지도 몰라! }
{...!}
{그럼, 녹림맹에서는 우리에게 크게 감사하겠지?

무수한 녹림인들을 살해한 당신들을 잡아주었다고...

그들이 당신들을 어떻게 할지는 아마 쉽게 상상할 수 있겠지?}
사은상은 도무지 어린애 같지 않은 주소아의 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일초 등은 자기들의 정체를 녹림맹에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당신들은 우리에게도 이용할 가치가 없는 몸이 되었어.}
찰나 사은상은 싸늘히 소일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 따위 꼬마들에게 죽을 이 사은상이라면...?}

{사은상이라면?}
{이 땅에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문득 그녀의 싸늘한 냉음에 주소아는 얼굴에 핀 미소를 거두어 들였다.
{말해 두겠는데...

우리 아니 그 꼬마의 목적은 당신들을 이용하여 삼성무림청의 주력을 이곳에 끌어 들이는 것이었어.

그리고 그 계획대로 오일 만에 삼성무림청의 정예고수들을 이곳으로 끌어 들이게 됐어.}
찰나, 사은상의 두 눈에서 파릇한 광망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너희들도 끝장이다.}
{왜...?}
{삼성무림청의 정예인 삼혈단(三血團)이 힘을 합치면 천하에 당해낼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은상의 득의와 싸늘함이 풀려나는 음성에 주소아는 지웠던 웃음을 피워올렸다.
{호호 그것은 두고 보면 알 일이지.

더구나 내 일이 아니고 소일초가 처리할 일이니까.

허나 분명한 것은 당신들은 우리게 이미 이용가치가 없어졌다는 거야.

게다가 난 일초가 당신들을 집적거리는 것이 영 싫어.}
{...}
{정 그렇게 버틴다면 아무 쓸모도 없는 당신들을 한 시라도 빨리 죽일 수 밖에 없는 일이지.}
순간 사은상의 싸늘한 얼굴에 가는 놀람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주...죽일지도...모른다.

저 계집애의 아름다운 웃음 속에 무서운 살심이 숨어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 꼬마놈은 소름이 끼치는 괴물들을 끌고 다니는

무림에 악명이 자자했던 신행마동이 아닌가?)
그녀의 등줄기를 후벼파는 오싹한 전율이 온몸을 걷잡을 수 없이 치달렸다.

생명!

단 하나 뿐인 생명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엄청나다.

더구나 독기와 원한을 가슴에 품고 있는 자라면 어떤 방법으로든 생명을 얻고자 할 것이다.
사은상,

아무리 차가운 빙심의 그녀라 해도 역시 인간임에는 틀림없다.
일단, 그녀는 생명의 애착이 가슴에 피어오르자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공포가 자신의 팔만사천모공에 팽만하여 터지는 충격을 느꼈다.
이런 그녀의 가슴을 더욱 서늘하게 만드는 주소아의 미소,

어쩌면, 이 계집애도 그 꼬마 못지않은 독심의 소유자 일 것이다.
{자! 먹어.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일순 한기로 뭉쳐진 사은상의 얼굴에 단호한 결심의 빛이 흘렀다.
(그래 좋아. 먹자. 그리고 살자.

그리하여 받은 것에 천만배를 되돌려 주자.

이 악마같은 계집애... 꼬마놈... 애송이 꼬마놈... 이 어린 마물들...!)
사은상은 그녀의 입에 들이밀어진 음식을 덥석 삼키기 시작했다.
주소아의 미소 띈 얼굴이 끄덕여지고 또 한 숟갈의 음식을 떠 사은상의 입으로 가져가니...

이것은 마치 어미가 새끼에게 밥을 떠먹이는 광경이었다.
한 순간, 또 한 숟갈의 음식을 떠먹이던 주소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니, 저 사옥상 언니와는 쌍둥이야?}
사은상은 음식을 삼키며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삼성무림청의 주인이 언니 아버지야?}
{사부!}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도 사은상은 내심 낭패한 심정이 되엇다.
(이 계집애가 나를 들었다 놨다 마음대로 하는구나. 또 말투를 바꿨어.)
{하면 언니의 사부는 삼수 중 세째인 사진성(史震聲)이겠네?}
단정짓듯 말하는 주소아의 음성에 사은상의 고개가 다시 무심코 끄덕여졌다.

동시에 주소아의 얼굴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미소가 피어났다.
{언니, 고마워!}
단 세 마디의 음성과 더불어 주소아가 몸을 일으키자

돌연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사은상의 전신이 부르르 떨었다.
거기에다,
{우욱...!}
씹어 삼키던 음식까지 토해내는 것이니...
{아니다. 나의 사부은 사진성이 아니다.!}
사은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고개를 내저었다.
허나 더이상 주소아는 그녀를 상대로 말을 하지 않았고 사박사박 걸음을 옮겨 방을 나갔다.
{문단속 잘하고 자요. 혹시 모르니까}
문밖에서 주소아의 음성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