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개방서생

제5장 군주(君主)의 순정(純情)

오늘의 쉼터 2016. 6. 1. 15:27

제5장 군주(君主)의 순정(純情)

 

중원 무학의 총 본산이며 태산북두(泰山北斗)로 인정받는 소림사(少林寺).

조사전(祖師殿), 장경각(藏經閣), 달마원(達磨院) 외에도 지객당(知客堂), 나한동(羅漢洞) 등이 

천여 년의 무림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금일 달마원에는 자못 긴장이 감돌았다.

평소보다 배에 이르는 소림 제자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으니…

는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을 암시했다.

달마원 정실(正室)에 십 수 명의 무림인들이 좌정(坐定)하고 있었다.

상석(上席)에는 당금 소림 장문인인 법천선사(法天禪師).

우측으로 천리묵혈동에서 죽음을 당한 기니(奇尼) 설산신니(雪山神尼)를 제외한 강호칠기(江湖七奇)….

기승(奇僧) 천학법사(天鶴法師), 
기도(奇道) 현천도인(玄天道人), 
기괴(奇怪) 마의괴걸(麻衣怪傑), 
기걸(奇傑) 만통자(萬通子), 
기사(奇士) 학령우사(鶴令羽士), 
기재(奇才) 걸신(乞神).

그리고 좌측에는 취옹, 병옹, 귀옹 등 삼옹(三翁), 일선(一仙) 오행불성선(五行佛聖鮮),

무당 장문인 창허자(昌噓子), 화산 장문인 경운유협검(經雲流俠劍).

이들이 좌정해 있었다.

법천선사의 사숙이며 기승으로 일컬어지는 천학법사가 말문을 열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정사마천궁이란, 마종지주(魔宗之主)인 천마존의 후예가 새로 만든 문파외다."

차츰 그의 언성이 열기를 띠어 갔다.

"천존이라 칭하는 정사마천궁주의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무공은 
천리묵혈동의 격전을 통해 널리 알려진 바요. 

하지만 우린 그가 궁극적으로 어떤 목적을 지니고 있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소."

경운유협검 노백(櫓柏)이 헛기침을 하여 자신도 말을 꺼낼 뜻을 비추었다.

그리고 한껏 목청에 무게를 실었다.

"냉막한 표정의 중년인이라고도 하고, 영준하기 짝이 없는 약관의 청년이라고도 하는 등

실제 모습조차도 알고 있지 못한 형편 아닙니까?"

창허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도오종의 진천패도(震天覇刀)도 정사마천궁주의 부하로 여지껏 실체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의 무공 수위는 단언하건대, 여기 계신 분들 중 두어 명만이 평배를 이룰 겁니다."

창허자의 신중함을 잘 알고 있는 중인들은 격앙된 모습들을 보였다.

나서기 좋아하는 노백이 어찌 입 다물고만 있을 것인가?

"천수장, 지옥야차부, 와룡보, 독곡, 광혼혈문, 백골방 등

상당수 문파가 정사마천궁의 휘하에 들어갔음을 선언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분을 숨긴 채 활동하고 있는 정사마천궁의 고수들이 상당수인 모양이니…."

다들 알고 있는 얘기를 길게 늘어놓자, 마의괴걸 육공명(陸空明)이 자르고 나섰다.

"정사마천궁에 관한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 왔소이다.

당장 필요한 것은 대책이니, 혹 묘책이 있는 분은 기탄없이 들려 주시기 바라오."

단 한 사람을 빼놓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시했다.

'망할 영감! 그 얘기도 하려고 했는데, 성급하게 나서고 지랄이야.'

노백은 입술을 실룩였으나 불만에 찬 소리를 뱉어 내진 않았다.

이 때, 창허자가 화제의 방향을 약간 비틀었다.

"빈도의 미흡한 견해로 정사마천궁주가 악랄한 마두는 아닌 듯싶습니다."

당장 현천도인의 반박이 터져 나왔다.

"장문인답지 않게 말씀을 가벼이 하시는구려.

약간의 중원무림인을 구하고 새외 마두 몇을 해치웠다 하여, 어찌 그리 쉽게 단정할 수 있소이까?"

청허자가 면박을 당하자, 노백은 또 입이 근지러워졌다.

"본 장문인도 정사마천궁주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정사를 구별치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듯 보였습니다.

또한 그가 야망이 없더라도 나머지 수하들에게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며…."

문득 육공명의 짜증난 시선과 마주친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나하고 뭐 원한 진 일도 없는데, 공연히 신경질이야.'

노백이 속으로 육공명의 친족(親族) 구대(九代)에 걸쳐 가지가지 욕설을 퍼붓고 있는 동안,

천학법사가 자신 없는 어투로 말했다.

"우선은 정사마천궁과 관계 없는 문파나 고수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쉽지 않겠소?"

걸신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자넨 타초경사(打草驚蛇)라는 말도 모르는가?

공연히 일을 표면에 내세워 정사마천궁을 격동시킬 필요가 없네."

"그럼 어쩌겠는가? 무림첩(武林帖)을 돌리거나 무림맹을 설치할 수도 없는 상황이잖는가?"

가슴이 답답한 만통자는 몇 번이고 입을 열려다 꾹 눌러 참았다.

'천존께선 이들의 의견이 자신의 휘하에 들어오는데 모아질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정반대가 아닌가?

어쨌든 지켜만 보라 명하셨으니, 결과나 기다리자.'

이 때, 학령우사가 무릎을 내리쳤다.

"무림첩을 대신할 좋은 방법이 생각났소."

중인들의 이목이 일시에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무슨 묘책이기에…?"

"어서 속시원히 말해 보구려."

학령우사는 딱 잘라 대답했다.

"강호명화대회(江湖名花大會)!"

다음 순간, 중인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빛났다.

만통자를 제외한 그들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강호명화대회가 보름 정도 남았군. 이번 대회 역시 성황을 이룰 것이 분명하오."

중원 대부분의 문파와 무림인들이 참가하는 강호명화대회를 이용하자는 속셈!

그들은 난제를 풀은 듯 희희낙락했다.

문득 병옹이 걸신에게 물었다.

"개방의 소걸군이란 아이가 제법 쓸 만하다 들었네. 어디에 숨겨 놓았는가?"

걸신은 억울하고 분한 듯 눈을 부라렸다.

"그 불충한 놈 얘기는 꺼내지도 말게. 감히 이 조사(祖師)를 뵙지도 않고 먼저 가 버렸으니… 으휴!"

그는 철지영개의 사부였다.

"저승 문턱을 코앞에 둔 이 늙은이보다도 한 발 앞서 넘다니, 이런 괘씸한 놈이 또 어디 있나?"

제자로부터 천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기재를 얻었다는 전갈을 받고 너무도 기뻐

만사 제쳐 두고 달려왔는데….

그는 허탈감에 병이 날 지경이었다.

그의 표정이 너무도 비통해 보이자,

취옹이 게슴츠레한 눈을 껌벅이며 화제를 바꾸었다.

"정사마천궁주의 재간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가?"

천수장 밖에서 대면한 적이 있는 육공명이 침을 퉁겼다.

"가히 천하제일의 쾌검수(快劍手)라 할 수 있지. 노부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었네."

그의 자화자찬이 말을 재미있게 하기 위한 것임을 만통자가 어찌 모르랴?

하지만 괘씸하단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기 얼굴에 금칠을 해도 분수가 있지.'

법천선사도 화제에 끼여들었다.

"기실 사흘 전에 정사마천궁주가 본사 하원인 대국사에 침입하였습니다."

이어 그는 법인대사로부터 전해 들은 사건의 전모를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그의 말이 끝났을 때, 중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돌처럼 굳어져 있었다.

극라습찰(剋羅拾刹)의 무학은 밀종 총본산인 포달랍궁(布達拉宮)에 뒤지지 않았다.

더구나 삼존불(三尊佛)이라면 극라습찰 최고의 고수들이 아닌가?

귀옹이 히죽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은 더욱 으스스하게 보이도록 할 뿐이었다.

"정사마천궁도 실은 만보공자(萬寶公子)와 한통속일세."

이 말은 취옹과 병옹을 제외한 중인들의 귀를 북처럼 두둘겼다.

"그게 사실이오?"

"어찌 알았는지부터 설명하게."

건수를 잡은 귀옹은 본전을 뽑기 위해 거드름을 피웠다.

"노부가 그걸 어찌 알았냐 하면 또… 가설라무네…."

영양가 있는 뭔가를 대가로 내놓으라는 뜻인데, 이를 병옹이 망쳐 놓았다.

"자네 목에 이상이 생긴 모양이니, 내가 대신 말해 주지."

그는 빠른 음성으로 낙락원에서 벌어진 일을 들려 주었다.

"만보공자가 들어간 후 정사마천궁의 살수(殺手), 즉 지옥야차객들이 매화림을 습격했고…

그 애만이 무사히 나온 것으로 미루어 틀림없을 거요."

만통자가 고개를 저었다.

"만보공자는 정사마천궁과는 무관하오. 노부의 명성을 걸고 보증할 수 있소."

"그렇다면 왜 때맞춰 지옥야차객이 습격했고, 만보공자를 살려 보낸 거요?"

"만보공자는 낙락원주와 씻지 못할 원한이 있어 그 복수를 지옥야차부에 의뢰한 것이오."

"원한이 무엇인지 말해 주겠소?"

"노부도 그토록 자세히는 모르오."

이 때, 법의를 입은 단아한 모습의 승려가 들어왔다.

"아미타불…!"

그는 합장을 한 후 장문인인 법천대사의 곁으로 가 귓속말을 했다.

법천대사의 표정이 의외의 소식에 접한 듯, 미간을 오므렸다 폈다 변화를 보였다.

그는 승려가 나간 후에도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노백이 참다 못해 헛기침을 했다.

"어험! 우리에게 밝히지 못할 내용이었습니까?"

중인들을 믿지 못해 말하지 않는 거냐는 은근한 협박이었다.

"아닙니다. 언뜻 이해가 되질 않아서…."

천학법사가 재촉했다.

"장문인, 어서 들려 주기나 해 보시오."

법천대사가 그의 사질이긴 하나, 당금 장문인이라 하대를 못했다.

법천대사는 여전히 의혹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만보공자가 낙락원을 인수하였답니다."

노백이 히죽 웃었다.

"거저 빼앗다시피 사들였을 겁니다.

재물이 많은 자일수록 자기 재물은 더욱 아끼는 법이니까."

뼈 있는 야유에 참다 못해 만통자가 한 마디 꺼냈다.

"만보공자는 한 푼이라도 더 주면 주었지, 결코 남에게서 이득을 취하지는 않소."

"무불통지(無不通知)라 불리우리만큼 선배의 말을 믿어야겠지요. 
하지만 지옥야차객들을 이용해 싹 쓸어 버렸는데, 대체 누구에게 값을 지불했다는 겁니까?"

"주인 없는 물건은 관아(官衙)에서 거두어 백성을 돕는데 사용토록 되어 있소.

만보공자가 십만 관의 황금과 보주(寶珠) 한 상자를 지불한 것으로 알고 있소."

중인들은 또 한 번 경악성을 토해 내었다.

"무엇? 황금 십만에 보주까지?"

"낙락원의 값어치가 아무리 높다 해도 그 정도엔 절대 못 미칠걸."

"그걸 사서 대체 뭘 하겠다는 거요?"

화제가 옆길로 새자, 법천선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만보공자는 낙락원을 선풍원(善風院)으로 개명하였으며,

의지할 곳 없는 노인과 고아(孤兒)들을 그 곳에 수용한답니다."

취옹의 게슴츠레한 눈이 번쩍 뜨였다.

낙락원의 온갖 미주(美酒)를 공짜로 마음껏 마실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였다.

'봉양해 줄 자손이 없는 나도 따지고 보면 불우한 노인이 아닌가?'

노백이 코웃음쳤다.

"흥! 그건 세인의 이목을 가리자는 수작입니다.

불우한 노인과 고아들을 수용하는 곳이 왜 하필이면 호화롭기 그지없는 낙락원입니까?

보주(寶珠)는 고사하고 황금 십만 관만 가져도

낙락원보다 수백 배 더 많은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할 텐데,

뭔가 꿍꿍이속이 있음이 확실합니다."

순간, 중인들의 입이 일제히 다물어졌다.

육공명도 이번만은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핀잔을 주지 않았다.

잠깐 동안 침묵이 장내를 뒤덮었다.

이 때 돌연, 학령우사가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좋은 기회요!"

중인들은 다시 그를 주시했다.

기사(奇士) 학령우사의 학문과 지혜는 대해(大海)처럼 넓고 깊었다.

"기불택식한불택의(飢不擇食寒不擇衣)…

굶주리면 먹을 것을 맛이 있거나 없거나 가리지 않고,

추우면 옷이 좋고 나쁘고를 가리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지 않소.

불우한 노인과 고아들이 어찌 황제보다 더욱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기 바라겠소?"

그는 중인들의 표정을 찬찬히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만보공자가 이런 당치 않은 선심을 쓰는 데는 뭔가 남 모르는 이유가 있음은 확실하나,

이런 기회를 놓쳐선 안 되오."

"……."

중인들의 이목(耳目)이 완전히 자신에게 쏠려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의견을 내놓았다.

"낙락원을 선풍원으로 개명했으니, 우리도 무림맹 대신 선풍회(善風會)를 만드는 거요.

명분은 만보공자와 같이 불우한 노인과 고아들을 돕는다 해 놓고…."

천학법사도 자신의 무릎을 쳤다.

"기사(奇士)의 생각은 선풍원을 이용하자는 게 아니오?"

"그렇소. 선풍원의 주인인 만보공자를 선풍회주(善風會主)로 내세우는 것이오.

그러면 정사마천궁의 이목을 가릴 뿐만 아니라 만보공자를 감시할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일석이조(一石二鳥)가 아니오이까."

취옹이 손뼉을 쳤다.

"일석사조(一石四鳥)라 해야 맞을 게요.

은자 백 냥이면 지옥의 귀졸(鬼卒)도 부린다 했으니, 만보공자의 재력으로 무엇인들 못 사겠소?

정사마천궁의 고수들도 감히 손을 못 쓸 거외다.

그리고 이 술귀신은 불우 노인에다 선풍회원이니, 미주(美酒)를 곱절로… 으히히…!"

게슴츠레한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 쩝쩝 입맛까지 다시는 그의 모습에 중인들은

 일제히 대소를 터뜨렸다.

아니 단 한 명, 만통자만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귀신을 본 듯 질려 있었다.

'천존께선 이들의 의견이 자신의 휘하에 들어오는데 모아질 것이라고 예측하셨다.

천존의 지혜를 따를 자가 세상 어디에 있을 건가?'

밤(夜).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음모가 싹을 피우는 밤은 이렇게 깊어 가고 있었다.

약간의 소채(蔬菜) 요리와 한매화로(寒梅花露) 한 병,

그리고 청옥잔(靑玉盞) 두 개만이 놓인 주안상(酒案床)을 사이에 둔

만보공자와 소연군주 주예영(朱豫英).

그들에게는 이 밤이 깊어 갈수록 사랑도 따라 깊어만 갔다.

"공자님…!"

소연군주의 배시시 웃는 모습에 냉한웅은 전신의 살과 뼈가 흐물흐물 녹아 나는 듯했다.

"말씀해 보시지요."

소연군주 역시 그의 음성만 들어도 귓불이 붉어지고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해 댔다.

"소녀의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하오리까?"

어찌 갚아야 좋은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가 아닌가.

냉한웅은 덥썩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협의인으로 당연한 도리에 따랐을 뿐이니, 너무 부담 갖지 말아 주시오."

협의인(俠義人)? 도리(道理)?

이게 과연 냉한웅에게 어울리는 말일까?

소연군주는 수줍어 바닥에 깔린 융단으로 시선을 옮기며 옥음을 흘렸다.

"공자님은 저의 아버님을 제외하곤 소녀의 거처에 처음으로 오신 남자분이세요."

냉한웅도 하체로부터 치솟는 욕망을 자제하느라 이를 악물고 냉음을 토해 냈다.

"소생에게 있어서도 이 이상의 영광은 없을 듯 싶습니다."

하나, 소연군주의 귀에 닿은 음성은 차갑기는커녕 온돌 아랫목처럼 따끈따끈하기만 했다.

소연군주는 다시 고개를 들어 별빛처럼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바라봤다.

"소녀는 공자님의 별호 외엔 아는 것이 없어요. 존함을 알려 주실 순 없나요?"

존칭도 약간 낮춘 응석 어린 말투….

얼굴이 확 달아오른 냉한웅은 자신도 모르게 본명을 내뱉었다.

"냉한웅(冷恨雄)! 소생 역시 어느 여인에게 이름을 알려 준 적이 없소. 군주가 처음이오."

그의 말투도 어느 새 존칭을 반 단계 정도 낮추고 있었다.

처음이란 말에 소연군주는 감격해 두 손을 모았다.

"그게 정말인가요? 혹시 소녀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은 절대로 아니죠?"

"만보공자의 부(富)는 신용으로 쌓은 거요. 철든 이후론 단 한 마디도 헛말을 해 본 적이 없소."

그가 '거짓말'이라 하지 않고 '헛말'이라고 한 것을

눈치 못챈 소연군주는 몸까지 비비꼬며 어쩔 줄 몰라했다.

"아이잉… 믿어요. 소녀는 공자님의 모든 것을 믿어요."

반응이 지나친 듯 느껴진 냉한웅은 일순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군주는 누구를 오랫동안 그리워해 본 적이 있소?"

"없어요. 공자님은…?"

"있었소. 매우 아프게…!"

소연군주의 봉목(鳳目)이 비수처럼 예리한 질투의 빛을 발했다.

"필시 아름다운 여인이겠군요. 그 행복한 여인이 누구죠?"

냉한웅은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가 슬프게 느껴진 소연군주의 마음도 울적해졌다.

그녀는 푸른빛 감도는 잔에 청량한 향기 짙은 한매화로주(寒梅花露酒)를

찰랑이게 채워 내밀며 정감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어여쁜 입술을 달싹여 옥음(玉音)을 흘려 내었다.

저 하늘에 달이 있어 몇 해나 지냈는가? 지금 나는 잔 놓고 물어 보노라.
사람은 달을 잡을 길이 없어도, 달은 언제나 우리를 따라오거니.
거울처럼 밝은 빛이 선궁에 다다라, 푸른 연기 헤치고 밝게 빛나네.
밤 따라 바다 위에 고이 왔다가, 새벽엔 구름 새로 침몰하누나.
봄에도 가을 옥토끼 약을 찧고, 선녀는 외로이 누구와 사는가?
옛 달을 바라본 이 지금 없어도, 달은 천추나 두고두고 비치었다오.
인생은 예나 지금 물처럼 흘러도, 언제나 달은 떠서 바라봤으니….
원하거니 노래 부르고 잔 들 때마다, 달빛이여 나의 잔에 길이 쉬어 가오!

자신의 연정(戀情)을 지나치게 드러냈다 싶어진 그녀는

양 볼을 도화(桃花)빛으로 물들이며 화제를 바꾸었다.

"악의 소굴인 낙락원을 선행을 베푸는 곳으로 바꾸신다니, 참으로 훌륭하세요.

소녀도 미력(微力)하나마 돕겠어요."

염불보다 젯밥에 더 마음이 있음을 냉한웅이 어찌 모르랴?

하지만 착 달라붙는 소연군주를 뿌리칠 용기가 그에겐 없었다.

"고맙소. 버림받은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건 아름답고 바람직한 일이오."

냉한웅은 사 년 전 대국사에서의 사건을 떠올리고 있었으나,

소연군주는 그가 칭찬하는 줄만 알았다.

"공자님께 부탁이 있어요."

"무엇이오?"

"소녀도 선풍원에 기거할 수는 없나요?"

"군주, 그건 당치 않소."

하나, 소연군주는 끈질기게 애원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몸은 물러서지 않을 거예요. 으흐응…!"

콧소리까지 섞어 애교를 떨었지만, 냉한웅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낙락원은 황궁 못지않은 사치로 가득 찬 곳이었지만, 선풍원은 다르오.

거친 음식과 편치 못한 잠자리만이 있을 게요."

소연군주도 단호하게 버텼다.

"소녀도 그리 나약하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마주 윽박지를 수도 없는 냉한웅은 부드럽게 입술을 떼었다.

"군주가 도와 주실 일은 다른 데 있소. 그러니 서두르지 마시오."

"소녀의 고집은 부황께서도 꺾지 못하셨어요. 막을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포기하시죠."

"그렇다면 군주 마음대로 해 보시오. 소생은 이만 물러가겠소."

냉한웅이 굳은 표정으로 일어나 나가려 하자, 소연군주도 얼른 따라 일어서며 그를 불렀다.

"공자님…!"

냉한웅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심한 표정. 하나, 속마음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끌어안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무엇이오?"

소연군주는 바램이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소녀에게 좀더 친절히 대해 주실 순 없나요? 이 몸의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안 드시는 거죠?"

두 눈에 맺힌 이슬이 금방이라도 떨어져 도화(桃花)빛 뺨을 적실 것만 같았다.

냉한웅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어 자신의 여린 마음을 채찍질했다.

"군주가 버림받은 사람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느끼고 이해할 때, 나도 군주를 생각하리다."

그는 미련 없는 듯 홱 고개를 돌렸다.

방문 밖으로 나선 순간, 냉한웅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아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야속한 분!"

별빛 총총한  밤하늘을 바라보는 소연군주의 뺨에 이슬이 주르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