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개방서생

제6장 새외천무경(塞外天武經)

오늘의 쉼터 2016. 6. 1. 15:32

제6장 새외천무경(塞外天武經)

 

냉한웅은 지금 부영산(浮影山) 고봉(高峰)에 쏟아지는 달빛을 맞고 있었다.

소연군주의 거처에서 나온 후,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느라 목적 없이 신형을 날렸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이 곳에 오게 된 것이다.

사 년 전, 바로 이 곳에 북해칠혼살(北海七魂殺)의 시신이 있었다.

자결을 결심하고 산봉에 올랐던 그 때,

마치 여인의 호선(弧線)인 양 아름답게 굽어진 한 자루 기형(奇形)의 도(刀)를 줍지 않았던가?

분광월아도(分光月牙刀)!

그것은 냉한웅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 전기가 되지 않았던가?

쉬윙-!

차가운 밤바람이 옷자락을 펄럭였다.

천리묵혈동 입구의 격전에서 휘날리던 정사마천령기(正邪魔天令旗),

그리고 정사마천궁 고수들의 천지를 질타하던 장소성(長嘯聲).

그의 입가에 자조의 미소가 머물렀다.

'자신의 내력조차 모르는 것이 천하군림(天下君臨)의 야망을 품다니…

냉한웅, 너야말로 진정 분수를 모르는 놈이다.'

아, 저 표정 또한 사 년 전 이 곳에서 죽음을 앞두고 지었던 것과 똑같지 않은가?

하나, 만월(滿月)만은 그 때처럼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월녀개(月女 )의 미소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난히 달을 좋아하던 그녀, 소걸군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강호제일화가 되겠다던 그녀….

지금 소월선부(少月仙府)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천리묵혈동 안에서 흑의중년인의 모습으로 그녀를 만나 함께 들어간 비경(秘境).

운몽오우(雲夢五友)의 위패가 모셔진 그 곳을 그녀는 소월선부라 이름을 붙였다.

당시 냉한웅은 그녀에게 불귀해 천존비동에서 가져온 개방의 비급,

즉 마영절개(魔影絶 )의 무공이 적힌 책자를 넘겨 주고 혼자 나왔던 것이다.

비급을 연성하면 강호명화대회에서 각 파의 여협들과 겨뤄 이길 수 있단 말에

그녀는 마치 소걸군을 대하는 듯 책자를 꼭 껴안았었다.

'지금쯤 많은 진전을 보았겠지.

강호명화대회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데려와야겠군.'

순간, 냉한웅의 신형이 달빛을 가르며 사라져 갔다.

"안 돼요."

야적(夜寂)을 할퀴는 듯 앙칼진 음성!

냉한웅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매화원에서 가비랍에게 겁탈당할 뻔한 소연군주도 그랬지.

요즘은 안 된다는 여인들이 꽤 많군.'

그는 지체 없이 빙글 몸을 돌려 외침이 들려 온 곳으로 날았다.

산골 아낙으로 보이는 중년여인(中年女人)이 한 사내를 등 뒤에 감춘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초라한 옷차림에 평범한 용모. 하나, 순박미(淳朴美)가 돋보이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등 뒤에 웅크리고 있는 사내의 모습은 초라하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했다.

기름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피부에 산들바람에도 흔들릴 듯 앙상한 체구,

게다가 실명(失明)을 한 듯 두 눈이 감겨 있었다.

이들 남녀의 맞은편에는 보기 드물게 영준한 청년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입꼬리가 치켜 올라간 것이 교만함을 느끼게 해 주는 이 청년은 바로 비룡서생 남궁진악이 아닌가?

'후후후…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그런데 왜 저 자가…?'

여인의 용모로 보아 남궁진악이 색(色)을 탐낼 리는 없고, 차림새로 보아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진귀한 재보(財寶)는커녕 세 끼 끼니 잇기도 어려워 보이지 않는가?

남궁진악은 독 안에 든 쥐를 대하듯 여유 있게 손을 내밀었다.

"본 공자를 화나게 하지 말고 냉큼 꺼내 놓아라!"

여인은 애원했다.

"공자님, 그런 물건을 어찌 저희 같은 촌부가 지니고 있겠어요?"

남궁진악은 냉소를 흘리며 다가갔다.

"여지껏 본 공자가 헛소리를 지껄인 줄 아느냐! 정 못 내놓겠다면 할 수 없지."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자신의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

"네년의 몸이라도 흠씬 주무르지 않는다면 본전 생각이 간절해 잠을 못 이룰 게다."

"아… 안 돼요."

"싫으면 물건을 내놓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거라."

이 때, 눈먼 사내가 여인을 옆으로 밀쳐 냈다.

"물러서요. 더 이상 수모를 당하고 살 수는 없소."

여인은 기겁하여 그를 부둥켜안았다.

"아니 되오이다. 차라리 소첩 먼저 죽이십시오."

남궁진악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외쳤다.

"본 공자가 원하는 것은 너희의 목숨이 아니다. 어서 비급을 내놓아라."

눈먼 사내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물었다.

"그대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는가?"

남궁진악은 코방귀를 날렸다.

"몰랐다면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하나, 너는 예전의 분광월아도(分光月牙刀)가 아니다."

그가 바로 신비이객(神秘二客) 중의 분광월아도(分光月牙刀)라니…!

눈먼 사내의 허리가 다시 굽어졌다.

"맞소. 분광월아도 신기옥(申其玉)은 사 년 전에 죽었소.

지금은 술주정뱅이의 장님만이 남아 있을 뿐이오."

남궁진악은 미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사 년 전이라… 그렇지, 분광월아도는 그 때 불귀해에서 죽은 것으로 소문났지."

신기옥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불귀해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북해칠혼살(北海七魂殺)과 대결하다 절벽 아래로 실족한 후, 이 곳을 떠난 적이 없는데…."

여인도 말을 거들었다.

"이분께선 지난 사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소첩의 간호를 받아 오셨습니다.

중상을 입고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는데… 
그런 몸으로 대체 어딜 갈 수 있단 말입니까?"

남궁진악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응큼 떨지 말고 그 곳에서 가져온 비급을 내놓아라!

분광월아도와 함께 불귀해를 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순간, 음랭한 음성이 이들의 대화 사이에 끼여들었다.

"분광월아도는 분명 불귀해에 갔었지. 본존이 그걸 증명하겠다."

차가운 인상의 중년인. 하지만 흑의가 아니라 금의(錦衣) 차림이었다.

"정사마천궁주!"

전에 대면한 적이 있는 남궁진악은 사신(死神)을 본 듯 경악했다.

냉한웅은 음산한 미소를 흘리며 이죽거렸다.

"그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니까, 반복할 필요 없겠지.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것이 두 가지 있다."

"……."

"하나는 본 궁주도 분광월아도며, 불귀해로 떠났던 분광월아도라는 것. 그리고…."

냉한웅은 흘낏 고개를 돌려 눈먼 사내의 표정을 살폈다.

신기옥은 전혀 영문을 모르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다른 하나는 본 궁주가 냉한심이란 것이다. 한심이란 이름을 잊진 않았겠지?"

한심….

"그럴 리가…?"

남궁진악은 뒤통수를 호되게 맞은 듯 눈을 휩떴다.

냉한웅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믿어지지 않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세상엔 기연(奇緣)이란 게 있다."

남궁진악은 퍼렇게 질린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서 사제들 모두에게 독수를 썼…."

말을 하던 그의 눈빛이 갑자기 탐욕스레 변했다.

"기연이란 불귀해를 말하는 것이냐? 그래서?"

순간, 신기옥의 가슴도 두근거렸다.

무공이 사라지고 눈까지 멀기는 했지만, 불귀해의 전설만은 그의 가슴에 계속 담아 두고 있었다.

이 때 돌연, 남궁진악의 쌍수(雙手)가 번뜩였다.

"잡종아, 죽어라!"

끝이 뱀의 혀처럼 갈라진 무수한 암기.

호신강기만을 전문으로 깨는 백골상문침(白骨喪門針)이 아닌가?

냉한웅은 꼼짝하지 않았다.

그가 피할 경우 뒤편에 서 있는 분광월아도 신기옥과

여인이 고스란히 침벼락을 맞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냉한웅의 쌍수가 합장을 하듯 하나로 모아졌다 다시 펼쳐졌다.

항마수미신장(降魔須彌神掌)의 동자배불(童子拜佛).

펑-!

공기벽에 찬 바람이 부딪칠 때 나는 것 같은 음향과 비명이 야공(夜空)을 찢었다.

전신 곳곳에 쇠털같이 가느다란 은침이 박힌 남궁진악이 이 장 밖에 뒹굴고 있었다.

자신이 날린 은침들 중 일부가 되돌아 박힌 것이다.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품속에서 해약이 든 병을 꺼냈다.

냉한웅은 못 본 척 등을 돌렸다.

그는 눈먼 사내를 착잡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대가 진정 분광월아도요?"

신기옥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시 물었다.

"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오?"

뜻밖의 말에 신기옥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지난날의 영명은 뜬구름과 같은 것.

이제 모든 것을 잊고 이 여인과 남은 생을 마치는 것만이 소원이외다."

냉한웅은 문득 옥봉(玉鳳)의 미염(美艶)한 모습을 떠올렸다.

특히 그녀 가슴의 옥봉(玉峯)….

그리고 자신의 목숨 이상으로 옥봉을 아끼는 일도경혼(一刀驚魂) 강무웅(姜武雄)도….

'분광월아도가 무공을 되찾기 원하다면 회복시켜 주려 했는데,

쩌면 지금의 선택이야말로 진정 현명한 것일지도 모르지.'

그는 품에서 은표 석 장을 꺼내 여인에게 내밀었다.

"이 정도면 두 분이 남은 여생 동안 풍족히 지내실 수 있을 게요."

은표를 받아 든 여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믿어지지지 않는 듯 은표와  냉한웅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랗게 떨리는 음성이 흘러 나왔다.

"삼천 냥…."

삼천 냥이란 은표에 적힌 액수였으니, 도합 구천 냥이 아닌가?

이 정도면 도박(賭博)에 미치지 않는 한, 삼대(三代)에 걸쳐 호의호식하고도 남을 것이다.

소리를 들어 사태를 짐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신기옥은 전혀 희색(喜色)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요?"

그의 물음에 냉한웅은 한 마디로 잘라 대답했다.

"냉한웅."

자신이 너무 딱딱하게 대했다고 생각된 그는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풀어 빙긋 웃어 보였다.

"신형(申兄), 냉모의 도움이 필요하다 생각될 때는 언제든 선풍원으로 찾아오십시오."

실명을 한 그가 어찌 자신의 미소를 보겠는가?

하지만 진심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냉한웅은 뒤돌아본 후, 여인에게 물었다.

"부인은 어째서 사악한 자가 도망치는 걸 보고도 알려 주지 않았소?"

냉한웅이 남궁진악의 움직임을 감지 못할 리 없었다.

좀더 오래 고통을 겪게 하기 위해 모른 척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여인은 머뭇거리며 대꾸했다.

"그 사… 람은 피를 몹시 흘리… 고 있었어요. 많이 다친 모양이니, 그만 용서… 해 주셨으면…."

그녀의 선량한 마음씨를 파악하고는 있었지만, 냉한웅은 다시 한 번 감동했다.

"사실 소생도 알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놓아 보낸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신기옥의 표정에도 감동의 물결이 일었다. 

하나, 그것은 여인의 착한 심성 때문이 아니었다.

"음성으로 짐작하건대, 그대의 나이는 이십 전후인 듯싶소.

그런데도 신모가 난생 처음 대할 만큼 고절한 무공을 지녔고 자비심 또한 깊으니, 진정 탄복하오이다."

냉한웅은 자비심이 일어 남궁진악을 놓아 준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는 품에서 한 권의 고서를 꺼내 내밀었다.

"본문의 비학이 수록된 책이오. 본인의 사부는 새외일투(塞外一偸)라 불리는 당대제일의 신투였소."

"새외일투… 귀에 익지 않은 별호인 듯하오."

"그럴 게요. 사부께선 중원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으니까.

천축, 서장, 묘강 등지를 돌며 각종 귀보(貴寶)와 무공비급들을 휩쓸었지요.

이 비급엔 그 곳 문파들의 비전절기들이 수록되어 있소."

냉한웅은 두 눈과 귀가 번쩍 뜨이는 듯했다.

"그게 확실하오?"

신기옥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다만 본인의 자질이 부족하여 이 비록의 무공 중 겨우 이 성(成)만을 터득했을 뿐이오."

냉한웅은 얼른 고서의 표지를 살폈다.

<새외천무경(塞外天武經)>

양피지에 주사로 쓴 글씨가 웅건한 필체를 드러냈다.

"신형, 당신은 냉모에게 두 번이나 큰 도움을 주는구려."

신기옥은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어 피식 웃었다.

"두 번이라니… 당신의 말은 들을수록 어지럽게 느껴지오."

냉한웅도 구태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는 신형을 날리며 외쳤다.

"분광월아도, 당신의 염복(艶福)이 참으로 부럽소."

신기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촌구석의 평범한 여자와 사는 내게 뭔 놈의 염복? 참으로 이상한 친구로군.'

이 때, 여인이 와락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소첩을 버리시진 않겠지요?"

신기옥은 팔을 그녀의 등 뒤로 뻗어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게요."

그의 닫혀 있는 눈까풀이 부르르 떨었다.

전(前) 부인 옥봉이 생각나서일까?

"어헉!"

술 취한 사람처럼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신법을 펼치던 남궁진악이 경악해 멈춰 섰다.

어느 틈엔가 냉한웅이 그의 면전에 떠억 버티고 서 있지 않은가?

"후후후… 어떻게 요리해 줄까?"

냉한웅은 살기 어린 음성을 흘리며 비스듬히 우수(右手)을 휘둘렀다.

팟-!

백광(白光)이 번뜩 공간을 헤집는 순간, 남궁진악은 허리 어림을 움켜쥐며 나뒹굴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손놀림이며 쾌도식(快刀式).

수도(手刀)로 도초(刀招)인 잔혼(殘魂)을 전개한 것이다.

"크윽!"

불같이 화끈 달아오르는 통증에 남궁진악은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무공에 대한 열정은 조금도 사그라 들 줄 몰랐다.

"권법 같지는 않은데, 이것은 어떤 무공이냐?"

"……."

냉한웅은 무심한 시선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불귀해엔 무엇이 있었느냐? 한심한 놈! 죽음을 앞둔 내게도 밝히기 두려우냐?"

남궁진악이 격장지계(激將之計)를 사용했으나, 냉한웅의 입술은 요지부동이었다.

"네가 냉한웅이란 걸 믿을 수가 없다.

역용약이나 인피면구를 사용했다면 그토록 완벽할 수가 없다."

순간, 서서히 냉한웅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약간 마른 몸매엔 살이 붙고 냉막한 중년인의 얼굴은 천상에서나 볼 듯 영준한 청년으로….

후기지수들 중에 자신의 용모를 따라올 자는 없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남궁진악.

그로선 상대가 냉한웅이건 아니건 간에 여간 마음 상하는 일이 아니었다.

남궁진악은 비명과 같은 외침을 토해 냈다.

"아, 천환역골공(千幻易骨功)이다. 하지만 그 한심한 놈일 리가 없다!"

음성에 질투의 감정이 짙게 배어 있었다.

사실 지금 냉한웅의 모습은 과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변해 있지 않은가?

이런 마음을 꿰뚫고 있는 냉한웅은 냉소로 답했다.

"불귀해의 기연이란 무공 뿐만이 아니지. 당금중원에서 가장 부유한 자가 누구냐?"

"그럼 네가 만보공자…?"

"그렇다. 네가 한심한 놈이라 구박하던 냉한웅이 바로 정사마천궁주며 만보공자이니라."

남궁진악은 피가 거꾸로 솟구치고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듯 심신의 충격이 극도에 달했다.

"냉한웅! 네놈이 내 아버지인 신산묘인을 죽이다니…!"

그는 마지막 기력을 다하여 좌수를 휘둘렀다.

순간 냉한웅의 눈빛이 검처럼 번뜩였다.

"혈참(血斬)-!"

남궁진악의 비명이 이어졌다.

냉한웅의 우수가 가르고 지나간 곳은 그의 좌측 어깻죽지였다.

쾅-!

오 장 밖으로 날던 남궁진악의 오른팔이 허공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냉한웅은 알고 있었다는 듯 피식 웃었다.

"뇌화탄(雷火彈)의 위력은 역시 대단하군. 이번엔 왼손으로 하나 더 던져 보겠느냐?"

남궁진악은 우드득 이를 갈았다.

"태검장에서 아니, 부영산에서 네놈을 없애 버릴 것을…."

냉한웅은 그의 허리와 오른팔 어깻죽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핏물을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이제 네게 그런 기회는 없다."

남궁진악이 겨우 들릴 듯 가느다란 음성을 흘렸다.

"팽지연을 어찌 했지?"

그가 죽음에 이르러서도 팽지연을 떠올리자, 냉한웅은 잔혹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그 계집은 내 손에 죽은 지 오래다."

다음 순간, 냉한웅의 표정이 급변했다.

남궁진악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워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희미해져 가던 남궁진악의 눈빛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그게 정말이냐?"

냉한웅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으나,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거짓말을 하겠느냐."

다음 순간, 남궁진악의 목구멍으로부터 가래 끓는 듯한 웃음소리가 토해져 나왔다.

"크큭큭… 네놈만을 그리워하며 기다린 여인을 네놈의 손으로 죽이다니…."

냉한웅은 놀라 버럭 고함쳤다.

"무슨 개 짖는 소릴 하는 거냐?"

남궁진악은 남은 기력을 다해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네놈을 사모하고 있었다.

예전에 태검장… 약실… 에서 많은 약초들이 없어진 것도 모두 네… 놈에게 먹이려고

그녀가 저… 지른 일이었다."

냉한웅의 몸이 비틀 중심을 잃었다.

천하가 뒤집어진다 해도 끄덕 안 할 그가….

사람의 마음(心), 그 중 여심(女心)은 천하를 움직이는 것보다도 더 강한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팽지연은 날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어. 그렇지?"

그는 큰 소리로 부정하며 거칠게 남궁진악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남궁진악의 숨은 끊어져 있었다.

문득, 천수장 밖에서 그녀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 낭자의 정인은 누구요?

- 왜요? 그 사람마저 찾아 내 해치려는 건가요?
- 물론이오. 낭자 혼자라면 보복의 의미가 적으니까.
- 후훗… 당신은 영원히 그를 찾지 못할 거예요. 영원히….

"그녀가 나를… 비천했던 한웅이를…!"

뜻밖의 충격에 냉한웅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우연히 만난 백의청년에게 팽지연을 넘겨 주지 않았던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이름이 백일기(白一奇)라는 것뿐.

그는 하늘에 대고 마구 고함을 질러 댔다.

"바보 같은 놈! 자신의 여인을 다른 남자에게 주어 버리다니,정사마천궁주 냉한웅!

네놈이 총명하다고? 소걸군, 네놈이 무슨 신기묘산이냐? 푸하하하하…!"

냉한웅은 미친 듯 광소(狂笑)를 터뜨렸다.

그리고 곧 통곡으로 변하였다.

"으흐흐흑… 미움과 사랑이란 백지 한 장 차이에 불과한 것도 모르고…."

세월(歲月)은 유수(流水)라던가?

만추(晩秋)의 고즈넉한 풍경이 어느 새 은백색의 아름다움을 이루는 설경(雪景)을 바뀌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했다.

하나, 그 사이 강호(江湖)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흥분과 전율의 도가니에서 광란하고 있었으니….

수많은 사건들 중에서도 세인(世人)들을 가장 경악케 한 것은,

오차 강호명회대회(江湖名花大會)였다.

오 년마다 개최되는 이 대회에서 전혀 예상치 않았던 여인이

강호제일화(江湖第一花)의 영예를 차지한 것이다.

개방의 세 명의 소괴 중 하나인 월녀개(月女塏).

꾀죄죄하며 막돼먹은 것으로 소문난 그녀가 뽑혔으니….

이는 중원무림에 수많은 의혹과 화제를 불러일으킬 만하지 않은가?

정파(正派)인 구파일방의 장문인, 사파(邪派)와 녹림(綠林)의 거두들과

중원의 남칠북육(南七北六) 십삼 개 성에서 추대된 무림명숙들이 어째서 두말 않고

그녀를 선택했단 말인가?

의문(疑問)은 의문을 낳고, 그 의문은 추측들을 낳았다.

또 그 추측들은 수없이 가지를 쳐 무성한 소문의 숲을 이루었다.

한데, 입에서 입으로 옮겨진 말들 중 가장 신빙성 있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 구파일방이 신비인으로부터 물건을 전해 받았다.

그 안에는 월녀개를 강호제일화로 뽑아 달라는 내용의 서신과 한 권의 비록이 있었다.

비록은 석년에 구파일방이 동해무성에게 탈취당했던 것들이다.

나머지 각 성의 대표들은 엄청난 가치의 보화(寶貨)를 받았다.

구파일방이 신비인의 부탁을 수락한 진정한 이유는, 정사마천궁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신비인의 세력은 결코 정사마천궁에 뒤지지 않는다.

구파일방은 왜 신비인이 정사마천궁과 관련이 없다고 판단한 걸까?

정사마천궁이 각 문파의 절기가 수록된 비급을 그들에게 돌려줄리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강호독패(江湖獨覇)를 꿈꾸는 정사마천궁이 적들의 무공을 크게 높여 주는

그런 얼빠진 짓을 할 리 있겠는가?

불귀해와 가장 관련이 깊은 정사마천궁, 그들은 침묵만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또 한 가지 충격!

그것은 선풍원(善風院)으로 명칭이 바뀐 낙락원이었다.

그곳은 명칭뿐만이 아니라 늙어 갈 곳이 없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은 고아들,

병자들을 위해 아낌없는 도움을 베푸는 곳으로 바뀌었다.

일반 강호인들에게 이런 일은 별 관심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무림의 대소방파(大小幇派)가 여기에 가담하였으며,

이 단체를 주축으로 막강한 조직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선풍회(善風會).

더구나 구파일방 장문인들도 적극 협조를 약속하며 선풍원주인 만보공자(萬寶公子)를

회주로 추대한 것이다.

만보공자!

그의 명성은 구파일방의 장문인들보다도 더욱 높아만 갔다.

선풍원의 깃발이 꽂힌 곳마다 헐벗고 굶주린 자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선풍회에 속해 있는 문파들이 선풍전(善風殿)을 설치하고 빈민들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인데,

이 역시 만보공자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각 문파들은 어쩔 수 없이 선풍전을 마련한 것이었다.

만보공자가 식비(食費)를 대 준다곤 하나,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을 하자니… 오죽 쓰리겠는가?

그들은 겉으로는 웃었으나, 속으로는 울었다.

슈슈웅-!

칼날처럼 예리한 한풍(寒風)이 눈가루와 함께 휘날렸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 어디선가 한 줄기 소음(簫音)이 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삘릴리… 삘릴릴리……!

바람에 실려 멀리 전해져 오는 음률은 창자를 도려내는 듯 단장(斷腸)의 아픔을 느끼게 하였다.

이윽고 설원 위에 일 인(人)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덕누덕 기운 의복에 볼품없이 깡마른 체구, 그는 낡은 퉁소를 입에서 뗄 줄 몰랐다.

마정소(魔情簫).

그렇다면 목전의 거지는 소걸군(少乞君)이 아닌가?

천하군림의 지위에 선 그가 무엇 때문에 이 삭막한 설원을 배회하는가?

퉁소에서 흘러 나오는 음률도 후회와 번민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세상을 희롱하던 소걸군답지 않다.

퉁소를 불며 걸음을 떼어 놓는 그의 면전에 세 개의 점이 드러났다.

까마득한 거리였다.

세 개의 점은 순식간에 세 노인으로 바뀌어 소걸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울긋불긋 요란한 복장으로 모두가 피풍의(皮風衣)을 두르고 있었다.

중앙의 노인이 물었다.

그의 가슴엔 오색 실로 만(卍)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중원에서 왔느냐?"

소걸군의 퉁소가 입술에서 떼어졌다.

"대막에서 왔느냐?"

좌측 외눈박이 노인이 하나밖에 없는 눈알로 흉광(兇光)을 발했다.

"어르신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이 무슨 버르장머리냐?"

소걸군은 히죽 웃었다.

"심사가 좋지 않은 판에 시비를 걸다니, 당신들은 정말 재수 없군."

중앙의 노인이 뭔가 짐작한 듯 손을 흔들어 제지했다.

"잠깐 기다리게."

그는 소걸군을 세심히 훑어보며 물었다.

"너는 우리에게 악감정을 지닌 듯싶구나."

소걸군은 딴청을 부렸다.

"천만에, 난 그런 감정 전혀 없어. 당신들에게는 있을지 몰라도…."

세 노인이 움찔 놀란 기색을 보였다.

이번엔 우측 노인이 냉갈을 터뜨렸다.

"우리는 사람을 찾고 있다. 그가 누군지는 이미 알고 있을 듯싶은데…."

소걸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정사마천궁주 아닌가?"

세 노인의 표정에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신기묘산 소걸군,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다."

중얼거리던 노인들의 표정이 순간, 확 바뀌었다.

장난기 어린 소걸군의 얼굴이 어느 새 냉랭한 중년인의 모습으로 변해 있지 않은가?

우득- 우드득-!

뼈가 부딪치는 음향이 일며 그의 몸집과 키도 더욱 늘어났다.

세 노인은 반사적으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천면환영공(千面幻影功)이 공력으로 얼굴을 바꿀 수 있단 소릴 들었지만, 이건…!"

정사마천궁주로 화신한 냉한웅이 득의의 미소를 머금었다.

"천면환영공은 절기라 할 수 없지.

본존의 천환역골공(千幻易骨功)은 골격까지도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

중앙의 노인이 분노에 찬 외침을 터뜨렸다.

"네놈이 정사마천궁주냐? 그럼 창룡신로(蒼龍神老)도 네놈의 손에…."

냉한웅은 담담하게 응답했다.

"본존의 손에 죽었지.

당신 가슴의 표식을 보아하니, 그가 말했던 만신각(卍神閣)의 삼대각주 중 한 명인 듯싶군."

"그렇다. 노부는 셋째인 만신괴주(卍神怪主)이며, 

내 옆에 있는 두 명은 화룡신로(火龍神老)와 수룡신로(水龍神老)이다."

창룡신로와 겨뤄 본 적이 있는 냉한웅은 상대가 합공를 가할 경우 악전고투(惡戰苦鬪)를

면치 못할 것을 예측했다.

그는 지체 없이 파천혈륜을 뽑아 들었다.

순간, 만신괴주의 눈에 탐욕의 빛이 스쳤다.

"파천혈륜!"

"본존을 죽일 수 있다면 당신의 것이 될 수 있지.

하나, 그렇지 못하면 당신의 목숨을 대신… 흐흐흐…!"

냉한웅이 음산한 웃음을 흘리자, 세 노인은 분노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애송아, 만신각의 혼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 주마."

그들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냉한웅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환심멸멸(幻心滅滅)-!"

만신괴주의 외침에 그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다.

슉- 슈슉-!

울긋불긋한 옷 색깔이 둥근 모양의 무지개 고리를 만들어 냉한웅을 가두었다.

그 현란한 색채가 눈가를 어지럽히자, 냉한웅은 지그시 눈을 내리감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화룡신로와 수룡신로의 무공은 창룡신로와 비슷할 것이다.

만신괴주의 무공은 이보다 더 높을 것이다. 파천혈륜의 예리함을 이용한 속전속결 전법으로….'

냉한웅이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만신괴주의 외침이 또 터져 나왔다

"귀혼멸멸(鬼魂滅滅)-!"

순간, 색채의 고리가 소용돌이로 변해 무시무시한 압력을 가해 왔다.

세 노인의 공력을 합하면 여섯 갑자(甲子)를 상회하는 것이었으니….

더구나 만신멸멸진(卍神滅滅陣)은 진력을 가속시키는 방법으로 파괴력을 배가(倍加)시켰다.

주위 이십여 장 내의 눈들이 맴돌며 허공으로 치솟아 바닥을 드러냈으며….

타타탁-!

지진이 난 듯 땅바닥마저 갈라져 나가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인가?

주변의 집채만한 바윗덩이들도 쩍쩍 금이 갔다.

'으읏, 예측 이상이다!'

냉한웅은 무상보리신공(無上菩提神功)을 최대한 끌어올려 압력에 대항했으나,

눈에 핏줄이 서고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세 노인이 내력을 돋운 듯 압력이 더욱 강해졌다. 아니, 미친 듯 요동을 쳐 댔다.

슈와앙-!

바위가 으스러져 파편이 암기처럼 날았으며,

이것들은 거대한 흙먼지 폭풍과 함께 냉한웅의 전신으로 짓쳐 들었다.

"크윽!"

냉한웅은 전신의 핏줄들이 짓이겨져 터질 듯한 고통에 휩싸였다.

고막이 터져 나갈 것 같고, 심장이 당장이라도 폭발해 버릴 듯 견디기 어려웠다.

그는 후들후들 떨리는 두 다리를 세우기 위해 천근추(千斤錘) 수법을 사용하였다.

다음 순간, 냉한웅의 얼굴 우측이 새하얀 광채를 띠었고…

나머지 반쪽인 좌측은 피처럼 붉은 광채로 덮였다.

불문의 무상보리신공과 극음마공(極陰魔功)인 혈살한빙공(血殺寒氷功)을 동시에 시전한 것이다.

"만상환멸멸(萬象幻滅滅)-!"

심상치 않음을 느낀 만신괴주의 입에서 폭갈(暴喝)이 터져 나왔다.

천지에 종말(終末)이 오는 듯 광폭한 기류가 사면팔방으로 휘몰아치며

주위 삼십여 장 이내를 지척도 분간 못할 암흑으로 물들였다.

냉한웅의 놀라움도 극에 달했다.

'크으윽… 새외천무경(塞外天武經)에 적혀 있길,

새외십문(塞外十門) 중 만신각의 무공은 중간이라 했는데….'

만신각이 이 정도이니, 상위(上位)에 해당한 문파들은 대체 어느 만큼이나 강하단 말인가?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던 바윗덩이들이 뇌성벽력과 같은 음향을 일으키며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석편(石片)들은 우박처럼 냉한웅의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렸다.

정순한 내공과 진식(陣式)이 이뤄 낸 괴이무쌍한 합공(合攻).

그 기세는 귀혼멸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순, 냉한웅의 우수에 꽉 쥐어진 파천혈륜이 맹렬하게 떨쳐졌다.

"혈참(血斬)-!"

드디어 천하에 못 가를 것 없는 파천혈륜이 무변중만변(無變中萬變)의 이기어검강을 쏘아 낸 것이다.

파천혈륜의 날이 악귀의 이빨처럼 번뜩인 순간.

츳츳츳츳-!

압력의 벽이 갈라지는 음향과 함께 주위의 어둠도 눈 녹듯 사라졌다.

이어 변화 속에 숨겨진 무수한 변화.

검강(劍 )이 종횡으로 난무하며 오히려 만신멸멸진의 변화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파혼(破魂)-!"

우수의 파천혈륜이 잔혼도법(殘魂刀法)의 살초로 바뀌었다.

동시에 좌수의 손가락이 퉁겨졌다.

소리가 없고(無音), 형태가 없으며(無形), 흔적이 남지 않는다(無痕)는 잔양수라지(殘陽修羅指).

냉한웅이 강호 출도 이후, 언제 이토록 진지하고 맹폭한 공세를 취했던가?

콰르릉- 쾅쾅-!

다음 순간, 냉한웅은 전신의 혈맥이 모조리 파열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상반신이 뒤로 젖혀져 두 눈동자에 잿빛 하늘이 와 닿았으나,

틀 물러서며 허리에 힘을 줘 자세를 바로했다.

이 때 세 마디 비명과 함께 허공에 반달 모양의 혈선(血線)들이 그어졌다.

"윽!"

"크윽!"

"아악!"

그리고 지면에 부딪치는 둔중한 음향들.

하나, 세차게 휘몰아치고 있는 기류는 좀처럼 잠들 줄 몰랐다.

냉한웅은 넋 나간 듯 꼼짝 않은 채 세 구의 사체(死體)를 바라보았다.

아니, 뭔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 맞으리라.

백짓장처럼 창백한 얼굴에 한 가닥 담백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이 순간 그의 미소는 대설원 위로 떠오른 태양이 찬란한 빛을 발하는 듯, 

소녀들의 방심(芳心)을 뒤흔들어 놓던 마소(魔笑)와는 또 달랐다.

"이제야 진정한 정사마천존(正邪魔天尊)의 비학(秘學)을 깨달았다.

동해무성이나 천마존의 것이 아닌…!"

미소가 점점 짙어져 그의 얼굴이 환희에 휩싸였다.

이어 웅후한 장소가 설원의 끝을 향해 달려갔다.

"푸하하하하…!"

기실 냉한웅은 파천혈랑교주, 극라습찰(剋羅拾刹)의 삼존불(三尊佛) 등 강적들과의 대결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했었지 않은가?

그는 틈틈이 무공정진에 힘써 왔으나, 별다른 성취를 이룰 수가 없었다.

이미 신화경에 들어선 무학이라, 재질만으론 새로운 단계로의 도약이 어려웠는데….

생명이 경각에 이르는 대결에서 이를 깨우치게 된 것이다.

그는 희열에 들뜬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신형을 날렸다.

'이번 천축행(天竺行)은 내게 있어 행운일 수가 있다.

팽낭자, 그대와 함께 무사히 중원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가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급히 신형을 세웠다.

그렇다. 무사히 돌아갈 수만 있다면…!

자신의 무학이 새로운 단계로 도약했다지만, 그 일만은 미지수 아닌가?

그는 한 권의 고서를 꺼내 보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새외천무경(塞外天武經).

여기엔 십대겁난에 연관되어 있는 듯한 문파들의 비공절학(秘功絶學)이 수록되어 있었다.

서장일궁(西藏一宮)… 포달랍궁(布達拉宮).

천축이사(天竺二寺)… 보리밀사(菩提蜜寺), 극라습찰(剋羅拾刹).

묘강삼교(苗彊三敎)… 고루대교( 賜大敎), 파천혈랑교(破天血狼敎), 불사천마교(不死天魔敎).

대막사문(大漠四門)… 만신각(卍神閣), 명부사혼전(冥府死魂殿), 지옥갱(地獄坑).

이들 중 그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묘강삼교와 천축의 극라습찰, 
그리고 대막의 만신각과 명부사혼전이다.

나머지 네 문파, 그들 역시 호시탐탐(虎視耽耽) 기회를 노리며 야욕의 이빨을 갈아 대고 있을 것이다.

하나, 냉한웅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곳은 보리밀사(菩提蜜寺)였다.

새외천무경에 의하면, 그 곳은 비구니(比丘尼)들의 사찰이라 했다.

특히 순음지기(純陰之氣)를 이용한 내공의 신묘함은 세외 어느 문파의 것과도 비교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냉한웅을 관심을 끈 이유는 따로 있었다.

냉한웅에게서 낙양일색 팽지연을 넘겨 받은 백일기가 보리밀사의 제자일 거라는 추측 때문이었다.

'그 자는 여인을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존재인 양 다루었다.

것은 그녀들로부터 배우고 겪어 온 것이니 당연하다.

만약 그 자가 보리밀사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면, 천외천궁(天外天宮)이 유력하다.

그 곳은 한 쌍의 부부가 지배한다니, 그들의 자식일 수도 있다.

때로 어머니들은 여인을 아껴 주라는 가르침을 내리기도 하니까.

그들은 금슬이 좋은 원앙이라 하니, 아버지가 일러 주었을 수도 있을 게야.

여인이란 꽃과 같으니, 꽃처럼 보호하고 가꾸라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냉한웅, 그의 생각에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이는 부모가 아들을 교육하는 방법에 관한 것으로, 책에서 얻은 피상적(皮相的)인 내용이 아닌가?

그리고 생각의 고리를 필요 이상 부모라는 존재로 연결해 가고 있는 점이다.

부모의 내력조차 모르는 그에게 있어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사랑하는 여인 팽지연과 부모의 정.

휘몰아치는 한풍도 지금 그의 열기를 시키기에는 부족하였다.

냉한웅은 계속 걷는다.

광막(廣漠)한 설원에 발자국을 남기는 그의 뒷모습은 더 이상 외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