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개방서생

제3장 천존령(天尊令)

오늘의 쉼터 2016. 6. 1. 11:10

제3장 천존령(天尊令)

 

천리묵혈동의 입구를 수많은 무림인이 철벽처럼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검은 복면 아니면 고루 가면으로 가리워져 있었다.

그 중 유난히 시선을 끄는 인물들이 있었다.

두 명의 금고루가 좌우에 공손히 시립(侍立)해 있는 가운데 거만하게 서 있는 곤룡포의 괴인.

기이하게도 그가 쓰고 있는 고루는 먹처럼 검은색이었다.

또한 두 눈에서는 음산한 녹광(綠光)이 줄기차게 뿜어져 주위 분위기를 공포스럽게 했다.

고루대교의 교주인 강시마제(彊屍魔帝)였다.

그는 피처럼 짙은 홍의(紅衣)를 걸친 복면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홍의복면인(紅衣覆面人).

눈알을 쉴새없이 굴려 대고 있는 그는 불사천마교주 불사군(不死君) 방고갈(方高葛)이었다.

이들 외에 다른 두 명의 인물….

한 명은 잘 발달된 어깨에 원숭이처럼 잘룩한 허리 등 체격이 미끈하게 빠진 은고루였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눈처럼 새하얀 복면을 쓴 백의인이었는데, 
눈빛이 매우 차갑고 음흉스런 느낌을 주었다.

백의복면인이 말문을 열었다.

"장강어옹의 딸에게 막혀 있지 않은 수로의 지도를 넘겨 주었으니,

대귀선 외엔 그 어느 배도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우연히 그 수로를 발견하여 빠져 나올 수도 있지 않겠소?"

문득 생각난 듯 강시마제의 눈빛이 흔들리자, 백의복면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나오는 길에 배가 눈에 띄기만 하면 가리지 말고 전부 박살내 버리라는 명령도 내려 두었습니다."

방고갈이 부엉이 우는 듯 목쉰 웃음소리를 내었다.

"크흐흐흐… 대귀선이 지나는 자리에는 물밖에 그 어느 것도 남아나지 않겠군.

신산묘인의 공이 제일 크오."

천수장의 구유명탑주이자, 천기령에 속했던 인물.

신산묘인은 눈알을 데르륵 굴려 곁의 은고루에게 눈짓을 보냈다.

"과찬이외다. 사실 진악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 일을 이토록 원만히 처리해 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럼 은고루가 태검장의 비룡서생 남궁진악…?

방고갈은 거듭 찬사를 늘어놓았다.

"호부(虎父)에 어찌 견자(犬子)가 있을 수 있겠소.

태상호법(太上護法)의 영식은 참말로 준재(俊才) 중의 준재외다."

신산묘인을 태상호법이라 부른 것으로 미루어 영식이란 남궁진악이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이들이 부자지간이었다니….

천기령주이자 천수장주인 천수제갈(千手諸葛) 유연(兪蓮)조차도 까맣게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 때 왜소한 체구의 금고루가 날아와 앞에 내려섰다.

"대귀선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순간, 신산묘인의 눈빛에 음흉한 살기가 감돌았다.

"이젠 장강어옹이 황금혈랑을 암습해 처지하고 파천혈륜을 가져오는 일만이 남았군요."

미끄러지듯 대귀선이 동굴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와! 고루대교! 불사천마교!"

"혈맹천하웅패(血盟天下雄覇)!"

양교(兩敎)의 인물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맞이하는 가운데, 은고루인 남궁진악이 엄명을 내렸다.

"혹 대귀선의 뒤를 따라 나오는 무림인이 있거든, 장강어옹을 제외하고 모조리 주살하라."

이어 그는 신산묘인을 바라보았다.

"황금혈랑을 장강어옹이 처치할 수 있을까요?"

"심계가 깊은 자니 암습을 가할 적절한 기회를 만들어 낼 게다. 
만약을 대비해 뇌화탄(雷火彈)을 두 개 주었고, 천망으로 만든 호신의까지 입고 있으니…."

그는 모르고 있다. 

지금 장강어옹 차비운의 사체(死體)가 독물들에게 뜯어 먹히고 있음을….

만약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하지 않은가?

음흉한 자의 속셈이 까뒤집어지는 것은 언제 보아도 재미있다.

대귀선은 입구를 통과하여 양대교주가 바라보이는 곳에 이르자 닻을 내렸다.

웡위잉-!

천망이 스르르 휘말리며 벗겨질 때, 신산묘인의 눈빛이 야릇하게 빛났다.

"진악아!"

"부르셨습니까?"

"저기 천망이 찢겨진 게 보이느냐?"

"저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중입니다. 보검으로도 베어지지 않는 물건인 줄 알았는데…."

"후후후… 저 자들이 이토록 대담하게 나오는 것은 그만한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냉소를 흘리는 신산묘인의 입가에는 음산한 살기가 배어 있었다.

"아버님, 그게 무슨 뜻입니까?"

신산묘인은 나직이 명하였다.

"멀리 물러나 있거라. 의외의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

비룡서생이 의혹 어린 눈빛을 발하며 머뭇거리자, 신산묘인의 어조가 더욱 단호해졌다.

"신중을 기해서 손해날 일이 없다. 어서 물러서지 못할까!"

심산묘인은 아들이 백 장 가까이 물러선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대귀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귀선의 천망이 완전히 걷혀지고 선상에 있는 고루인과 흑의복면인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와아! 불사천마(不死天魔) 영원불멸(永遠不滅)!"

"우와! 만세무궁(萬世無窮) 고루대교( 賜大敎)!"

양 교의 인물들이 앞을 다투어 자신이 속한 교파의 구호를 외쳐 대자,

선상의 고루인과 흑의복면인들도 마주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이들이 대귀선 밖으로 몸을 날려 뭍에 내려서자, 강시마제와 불사군은 걸음을 옮겼다.

수하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상례였으나,

이번의 성과가 너무도 커 특별히 치하를 해 주려한 것이다.

하나 체면을 생각해 신법을 전개하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두 명의 교주가 다가오자, 신산묘인은 얼른 비킨 후 슬쩍 그들의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이 때 돌연 대귀선에서 앙칼진 외침이 들려 왔다.

"속지 말아요! 그 자들은 적입니다!"

강북화 차연화의 음성이었다.

찰라, 대귀선에서 내려섰던 은고루의 신형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았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찬란한 광채가 폭사되었다.

츠츠츠츳-!

전광석화(電光石火)란 말 이외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몸놀림이었다.

강시마제와 불사군은 놀라 외쳤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파천혈륜!"

순간, 그들은 초절정고수답게 유령과 같은 신법을 펼쳐 십여 장 밖으로 피했다.

먹이감을 놓친 파천혈륜의 검기는 그대로 뒤에 있던 신산묘인을 덮쳤다.

"헉!"

두 명의 교주를 방패로 삼아 안도하고 있던 그는 다급한 김에 양 소매를 떨쳤다.

퍼펑-!

장력과 검기가 충돌하는 굉음이 일며 주위의 모든 것들이 경력에 휘말려들었다.

작은 돌들과 흙들이 소용돌이치며 허공을 날고,

비교적 무공이 떨어지는 인물들은 낙엽처럼 나뒹굴었다.

신산묘인의 복면과 옷도 갈기갈기 찢겨 일부는 나비처럼 허공을 날았다.

은고루로 위장했던 냉한웅 역시 크게 이익을 본 듯싶지 않았다.

고루가면은 두 쪽으로 갈라져 바닥에 떨어졌고 옷자락도 일부 찢겨져 나가 있었다.

하나 피투성이인 신산묘인과는 달리 단아(端雅)한 용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신산묘인, 네놈이 천기령을 배반(背反)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천상에서 내려온 듯 준미(俊美)하기 짝이 없는 청년의 입에서 터져 나온 호통.

그것은 신산묘인에게 수천 개의 검날에 베이는 것보다 더한 공포를 안겨 줬다.

'천살령에서 보낸 자객인가?

파천혈륜이 저 자의 손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황금혈랑과 장강어옹 모두 죽었음이 분명하다.'

신산묘인의 얼굴이 사색(死色)으로 변했으나, 눈알은 재빠르게 좌우로 굴렀다.

이 때 갑자기 두 명의 금고루가 냉한웅을 덮쳤다.

그들의 도기(刀氣)가 일으키는 빛과 음향은 천둥번개가 치는 듯 대단했다.

번쩍- 콰릉릉-!

이 갑자(甲子)에 가까운 공력을 지니지 않고는 보일 수 없는 위력이었다.

"흥!"

냉한웅은 코웃음을 치며 파천혈륜의 방향을 바꿨다.

"천존유섬단(天尊幽閃斷)-!"

천존칠선(天尊七扇)의 초식은 두 자루 금도(金刀)가 뿜어 내는 도기에 부딪치자 용틀임을 하였다.

순간, 금광(金光)으로 형성된 도막(刀膜)이 두부를 베듯 갈라지며 

그 속으로부터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악!"

"우욱!"

한 명의 금고루가 가슴팍에 있는 중정혈(中庭穴), 

다른 한 명의 금고루는 아랫배의 천추혈(天樞穴)에서 혈전(血箭)을 내뿜으며 서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코를 땅에 처박듯 엎어져 다시는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들의 손에는 각기 반 토막만 남은 금도의 손잡이가 쥐어져 있었다.

파천혈륜의 가공할 예리함이 아니었더라면, 냉한웅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냉한웅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신산묘인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어느 새 삼십여 장 밖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또한 교활하게도 고루인과 흑의복면인들 사이로 신법을 전개해 그들을 엄폐물(掩蔽物)로 삼았다.

하지만 냉한웅의 살기는 극에 이르러 전혀 꺼릴 것이 없었다.

파천혈륜은 마치 잡초를 베어 내듯 고루인과 흑의인들을 갈라 쓰러뜨리며 추적을 시작했다.

이 광경은 마치 그가 피바다를 헤엄쳐 나가는 듯 보일 정도였다.

그러니 세상에 이런 생지옥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 끔찍스런 참극에 적들은 물론 지켜보는 중원 무림인들조차 몸서리를 쳤다.

질주를 거듭하던 신산묘인은 문득 가슴이 섬뜩해져 힐끔 고개를 돌려 보았다.

바로 그 순간, 냉한웅의 외침이 귀에 와 닿았다.

"천존마극참(天尊魔極斬)-!"

강렬하게 쇄도하는 무형의 강기….

기겁을 한 신산묘인은 혼신의 힘을 다해 지면을 박찼다.

휘리릭-!

백삼자락이 바람에 떨며 예리한 파공음을 일으켰다.

그러나 파천혈륜의 강기( 氣)는 악귀와도 같이 따랐다.

"크으윽!"

혈무(血舞).

그의 신형이 등으로부터 붉은 안개를 뿜으며 땅바닥에 처박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쾅-!

천지를 진동시키는 폭음이 일며 그의 육신이 산산조각 나 허공 높이 날아올랐다.

몸에 지니고 있던 뇌화탄이 터짐으로 인해 온전한 뼛조각 하나 찾을 수 없는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당연한 인과응보(因果應報)였으나, 아비 잃은 자식의 심정이야 어찌 그러하겠는가?

피눈물(血淚).

죽음을 목격한 한 쌍의 눈에 핏발이 섰다.

고여 있는 물기와 충혈된 안구(眼球). 그것은 죽음을 넘어선 살기를 뿜어 냈다.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

어차피 나는 너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세불양립(勢不兩立)의 사이였으니… 내 손에 죽으리라.'

그는 이 말을 곱씹어 삼키며 슬그머니 격전장을 떠났다.

이러한 그를 냉한웅은 모른다.

강시마제와 대치하고 있는 그가 어찌 일개 은고루,

그것도 인파에 파묻혀 사라지는 것에 신경 쓰겠는가.

냉한웅이 팽개치듯 파천혈륜을 만통자에게 던지고 천존선을 꺼내 들었다.

차르르륵-!

펼쳐진 순간, 눈같이 흰 백옥이 검은 광채를 발하며 흉상(胸像)을 수놓았다.

아수라파천귀(阿修羅破天鬼)!

이를 본 강시마제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분간이 안 가는 외침을 터뜨렸다.

"크흐흐흐… 천마존, 네놈이 결국 본좌의 천 년 대업을 망쳐 놓고야 마는구나."

그의 분노와 원망이 뒤섞인 음성은 냉한웅의 호기(豪氣)를 가일층 높였다.

냉한웅은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새 패천군 뇌웅은 불사천마교주를 상대로 자신의 안위를 생각지 않는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패천군 대 불사군.

이 오랜 숙적(宿敵)들은 육장(肉掌)만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 갑자(甲子)를 상회하는 공력과 새외(塞外)의 기학들은 
인간의 능력이라곤 믿어지지 않는 위력을 발휘했다.

이들은 막상막하의 접전을 벌이고 있었으나,

중원 무림인들은 다수의 적을 맞아 악전고투(惡戰苦鬪)를 면치 못했다.

'속전속결(速戰速決)을 하지 않으면 대세(大勢)를 뒤집기 어렵겠군.'

냉한웅은 구결을  암송하며 진기를 사지백해(四肢百骸)로 퍼뜨렸다.

'만물은 만듦에 마다치 않고, 생겨남에 있지 않으며, 행함에 집착치 않고, 공성(功成)에 머물지 않는다.'

불문 최강신공인 천극오행심법(天極五行心法)!

동시에 그는 사공(邪功)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것으로 소문난

인귀염공(殘忍鬼閻功)을 극에 이르도록 끌어올렸다.

진기가 둘로 나누어지고, 그것이 다시 상반된 신공이 되어 하나로 모아지자…

천하에 다시 없을 괴이하기 짝이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

냉한웅의 얼굴 우측이 백옥(白玉)인 양 새하얀 광채를 띠었다.

그리고 나머지 반쪽인 좌측은 먹처럼 새카만 윤기로 번들거리는 게 아닌가?

강시마제는 흠칫 놀라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네놈이 무슨 사술(邪術)을 부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소용 없는 짓이다."

하지만 즉각 퉁겨지듯 정면으로 신형을 날리며 쌍수를 휘둘렀다.

"백골수라빙혼령(白骨修羅氷魂靈)-!"

순간, 녹광(綠光)을 띤 장영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쿠르르르릉-!

천지를 가르는 듯한 굉음이 연이어지며 잠력 또한 배가되어 냉한웅의 숨통을 압박했다.

무한철벽(無限鐵壁)과도 같은 진공의 벽에 갇힌 냉한웅이 연한 웃음을 흘렸다.

아, 한 얼굴에 담긴 두 가지 미소!

불타(佛陀)의 자애존엄(慈愛尊嚴)함과

아수라파천귀의 사악(邪惡)스러움이 어우러진 표정에도 공통점이 있었으니…

바로 탈혼(奪魂)!

"잔폭(殘暴)-!"

먹물처럼 검게 변한 좌수(左手)의 천존선이 억겁(億劫)의 살풍을 날림과 동시에

백옥 같은 우수(右手)가 웅후한 장력을 내뿜었다.

"복마앙불(伏魔仰佛)-!"

사 초(招) 칠십이 식(式) 항마수미신장(降魔須彌神掌).

사마(邪魔)의 기운을 전문으로 제압하는 신력(神力)이 사공과 함께 펼쳐진 것이다.

그 효과는 실로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백골수라빙혼공(白骨修羅氷魂功)으로 이루어진 강막( 膜)은 항마수미장력에 의해 눈 녹듯 스러지고, 

그 틈으로 잔혼도법(殘魂刀法)의 강기( 氣)가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헛!"

이 한 번의 공세에 전력을 기울였던 강시마제는 미처 피할 여유가 없었다.

그가 호신강기를 펼쳐 대항한 순간.

퍽-!

둔탁한 음향이 가슴에서 일며 뜨거운 그 무엇이 몸 밖으로 세차게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끝없는 어둠….

하늘을 향한 강시마제의 두 눈은 크게 떠져 있었다.

하나, 묘강의 패주(覇主)답게 비명은 토해 내지 않았다.

아랫 입술에 깊숙이 박혀 있는 윗니(齒).

이것이 불사천마교주 최후의 자존심이었다.

 냉한웅은 묵묵히 강시마제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실은 치밀어오르는 기혈을 억누르기 위해 선 채로 운기(運氣)하는 중이었다.

'갈수록 더욱 고강한 상대를 만나게 되는군.

아직도 길은 까마득 멀기만 한데….'

가벼운 내상이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냉한웅은 양 팔과 허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본 후,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이 때 중원일괴(中原一怪) 공문건(孔文建)의 다급한 비명이 들려 왔다.

그와 어떤 인연인가?

실질적 도움을 받은 것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감정(感情)의 빚을 지었단 생각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냉한웅이었다.

그의 신형이 반사적으로 땅을 박차고 공간을 갈랐다.

쉭쉭- 쉬익-!

혈광 어린 쌍수(雙手)가 철봉을 휘두르는 듯한 음향을 일으키며 

공문건을 포위 공격하던 흑의복면인들의 머리통을 차례로 박살냈다.

하지만 움직임이 너무도 빨라 공문건이 사경(死境)에서 벗어났음을 깨달았을 땐,

냉한웅이 십여 장 밖에서 참살극(斬殺劇)을 벌이고 있었다.

피를 보면 더욱 흥분하는 게 인간의 본성인가?

살심(殺心)이 치솟은 냉한웅은 신출귀몰하게 날뛰며 파리 목숨을 빼앗듯 마구 살수를 펼쳤다.

그가 스쳐 지나는 자리마다 비명 소리가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았고,

피는 지옥까지 스며들 듯 흥건히 땅을 적셨다.

이 때였다.

불사군의 비명이 터진 것이….

그의 복부에 뇌웅의 우수(右手)가 비수처럼 꽂혀 있었다.

손목이 안 보일 만큼 깊숙이 파고든 우수가 다시 뽑혀져 나왔을 땐,

검붉은 색을 띤 그 무엇이 한 움큼 쥐어져 있었다.

불사군은 꺼져 가는 눈빛으로 뇌웅을 응시하였다.

"백… 년 전에도 너의 무공…은 한 수 위…였지. 변함없이 강…하구나."

하지만 입가엔 가느다란 핏줄기와 함께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승… 부가 완… 전히 가려진 것은 아니… 다.

천 명에 달… 하는 본… 교의 고수… 들이 너를 결코 놓아 주지 않을… 테니까."

뇌웅의 안색도 정상은 아니었다.

한쪽 무릎을 땅에 기댄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대꾸했다.

"흥, 내가 원한 것은 승부가 아니라 복수다."

그러나 내심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중원 무림인들의 목숨을 걱정해서였다.

뇌웅의 시선이 장중을 무인지경으로 휘집는 냉한웅에게 가 닿았다.

'아, 천존이 계시잖는가! 청산(靑山)이 있는데 어찌 땔 나무 걱정을 하랴.'

불끈 힘이 솟은 그가 벌떡 몸을 세웠을 때, 불사군은 고개를 떨구었다.

"교주님의 복수를…!"

"불사천마(不死天魔) 영원불멸(永遠不滅)!"

분노한 흑의복면인들이 뇌웅을 향해 밀물처럼 달려들었다.

뇌웅의 무공은 그들보다 월등했다.

하지만 내상을 입은 몸으로 그들의 인해전술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죽음의 그늘이 이마에 드리워진 찰나….

슉-!

파공성이 들리며 어디선가 금빛 찬란한 장창이 날아와 거대한 암석에 불꽃이 일게 했다.

두 뼘도 넘을 만큼 깊숙이 박은 그 공력도 놀랍지만

자루 끝에 달려 있는 깃발은 중인들을 더욱 경악케 했다.

<정사마천령(正邪魔天令)>

분명 정사마천궁주의 집령기(集令旗)였다.

이어 수많은 장소성(長嘯聲)이 천지를 질타했다.

지옥야차부주와 천수제갈(千手諸葛) 유연(兪蓮)을 선두로

하나같이 절정 신법을 구사해 날아오는 정사마천궁 이백여 명의 고수들….

그들 중에는 백골방주인 백골마제도 끼여 있었다.

하남성(河南省)의  낙양(洛陽) 삼대명소 중 하나인 낙락원(樂樂院).

금환궁(金幻宮)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환락장(歡樂場)은 산해진미(山海珍味)와 미주(美酒),

미기(美妓)는 물론 중원 최대의 도박장까지 갖춰 다른 두 명소보다 월등히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낙락원은 손님의 신분과 지닌 금전(金錢)에 따라 각기 들어갈 수 있는 곳이 구별지어졌다.

죽화림(竹花林).

입구에 위치한 삼층 누각으로…

일층은 도박장, 이층은 음주가무(飮酒歌舞)를 즐기는 주루,

그리고 삼층은 이십여 칸의 밀실(密室)로 나누어져 있다.

죽화림은 타(他) 화림들에 비해 비용이 가장 적게 들었으나,

성내(城內)의 괜찮은 집 한 채 값인 은자 육십 냥 이상을 지니지 않고는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국화림(菊花林).

천하 각지의 다양한 국화들이 사방 오 리(里)에 달하는 정원을 메운 곳으로,

한가운데 호화로운 이층 누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곳이 죽화림과 다른 점은 비용이 열 배 이상 더 들고

기녀(妓女)들 역시 월등히 뛰어난 자색(姿色)과 침실 재주를 지녔다는 점이다.

난화림(蘭花林).

국화림 절반 정도 넓이지만 이 곳은 호수(湖水)였으니…

주위에 심어진 난초는 진귀한 것들 뿐이었다.

그리고 호수 위엔 선궁(仙宮)인 양 아름다운 누각이 세워져 자신의 그림자를 수면에 드리우고 있었다.

이 곳의 미녀들은 미색을 이용한 특별한 훈련을 받았다.

나녀무(裸女舞).

춤이 극에 이르면 뼈와 살을 녹이는 듯한 즐거움을 직접 맛보여 주는데,

그 기교란 국화림의 기녀 따원 전혀 비교가 안 되었다.

하나 이 곳은 제아무리 많은 은자를 지녀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가 없었다.

신분이 명문세가(名門世家) 출신이거나 무림의 고수이어야 하며, 

대신 그들의 비밀을 철저히 지켜 주었다.

매화림(梅花林).

이 곳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세인들이 아는 바가 없었다.

풍문에 의하면 매화림이 받아들인 손님이 지난 수십 년 동안 겨우 서너 명에 불과했단 것이다.

또한 이 곳에서 즐기려면 일반 재물이 아닌 값어치를 따지기 어려울 만큼

진귀한 보물을 주어야 한다는 것 등 모든 것이 신비에 가려져 있었다.

죽화림의 이층 주루에서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요리와 술을 들고 있었다.

그 수가 백 명이 넘었지만 규모가 대단히 넓어 자리의 절반도 채우지를 못했다.

주향(酒香)이 진동하는 가운데 나삼(羅衫) 차림의 소녀들이 술과 안주를 받쳐 들고 바쁘게 움직였다.

얼핏얼핏 드러나는 그녀들의 살결과 그 때마다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는 사향(麝香) 내음은

유혹의 도를 넘어서 뇌살시키는 듯했다.

여기저기서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도 빼놓을 수가 없었다.

창가의 자리에 세 노인이 마주보며 술잔을 주고받았는데,

그들의 음성은 다른 취객들의 것보다 더욱 크고 어지러웠다.

"크아, 죽화림의 죽엽청(竹葉靑)은 역시 일품이야. 특히 장저육(醬猪肉)을 곁들여 먹는 맛이란…."

홍안학발(紅顔鶴髮)의 노인, 혈색 좋은 얼굴에 주독(酒毒)이 올라 새빨간 코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의 곁에는 머리카락을 산발한 마른 노인이 듣거나 말거나 혀 꼬부라진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주카… 림의 수… 울 맛  보온… 지가 어… 마더라…

제기랄, 너무 오래 되어 기어… 억도 안 되… 느구나……."

억양이 분명치 않은데다 음침한 기운이 역력하였다.

맞은편의 노인은 중병을 앓고 있는 듯 안색이 파리하였다.

핏기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는 것이 당장 숨 넘어갈 듯 보였다.

"우리 취(醉), 병(病), 귀(鬼)의 회합이 반 갑자(甲子)만이니… 당연하지."

그의 음성은 생긴 그대로 다 죽어 가는 소리였다.

취(醉), 병(病), 귀(鬼).

이들은 일선(一仙), 이제(二帝), 삼옹(三翁), 사패(四覇), 오마(五魔), 육혈(六血), 칠기(七奇), 팔군(八君)…

이들 삼십육 인의 기인 중 바로 취옹(醉翁), 병옹(病翁), 귀옹(鬼翁)이었다.

삼십 년 전에 은거한 그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뭘까?

취옹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외쳐 댔다.

"정사… 마천궁주가 얼마나 대단… 하길래… 소림의 늙은 중이 우… 릴 부른 건… 가?"

귀옹이 더욱 혀 꼬부라진 소리로 핀잔을 주었다.

"이 술 귀신아, 천리묵혈동의 소문도 듯지 못했어?"

"그야 들었지. 정사마천궁이 묘강 삼대교(三大敎)를 괴멸… 시켰다는 걸."

병옹은 안주로 나온 요리만을 집어 먹을 뿐 술잔엔 별로 손을 대지 않았다.

그는 바삭하게 튀긴 개구리 뒷다리를 으적으적 씹어 먹으며 말을 했다.

"그렇지만 묘강에 남아 있는 세력들 또한 쉽게 물러서려 들지 않을 걸세."

귀옹이 마구 양 손을 내저었다.

"그 빌어먹을 교주 노옴들도 모옹땅 해치웠다는데 뭐가 걱정이야?"

취옹도 마주 손을 내저어 대항했다.

갑자기 꼬부리진 혀가 펴졌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냐. 정사마천궁주의 앞으로의 행보(行步)가 문제라구."

귀옹의 음성도 명확해졌다.

"소문에 듣기로는 중년인이라고도 하고, 약관의 애송이라고도 하는 등 종잡을 수 없던데…

어떻게 그토록 엄청난 무공과 세력을 지니게 된 걸까?"

병옹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어렸다.

"귤화위지(橘和爲枳)… 귤이 화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란 말이 있지 않은가. 

사악하기 그지없는 지옥야차부와 백골교도 휘하에 들었다니, 정도(正道)만을 걸을 듯싶진 않군."

취옹과 귀옹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의 늙은이가 대단히 걱정하는 것도 당연해.

아마 이번 소림 집회엔 은거했던 친구들 거의가 얼굴을 보일 걸세."

병옹이 문득 생각난 듯 화제를 바꿨다.

"혹시 자네들 소걸군이란 청년에 대해 알고 있나?"

"소걸군? 개방의 일결제자로 박학다식(博學多識)하단 소문을 듣긴 했는데…."

취옹에 뒤질세라 귀옹도 한 마디 덧붙였다.

"구파일방(九派一幇)에서 그 아이를 공동제자로 키우려 한다더군."

병옹이 탄식을 내뱉었다.

"안타까운 일이야. 듣던 바에 의하면 백 년에 한 명 태어나기 어려운 기재였다던데…."

이 때, 갑자기 주루 안이 크게 술렁거렸다.

"자네 혹시 저 청년이 누구인지 아는가?"

"기품과 차림새로 보아 왕손공자(王孫公子)인 듯싶은데,

난화림(蘭花林)이나 매화림(梅花林)에 가질 않고 어째서…?"

"아, 짐작가는 인물이 있네. 만보공자(萬寶公子)!"

삼옹이 급변한 주위 분위기에 시선을 돌려 보니, 일순 시야가 번쩍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넉넉잡아 보아도 올해 겨우 약관(弱冠)에 이른 듯싶은 청년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삼옹의 눈도 주위 다른 인영들 마냥 화등잔(火燈盞)만하게 떠졌다.

그들이 이 갑자(甲子)를 살아오는 동안, 이토록 탈속영준(脫俗英俊)한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금의(錦衣)에 각종 진귀한 보옥이 박힌 옥대를 두르고 휘적휘적 걷는 모습이란 참말….

하지만 이 호사스럽기 짝이 없는 차림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들은 조금도 사치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취옹의 두 눈에서 취기가 싹 사라졌다.

"골격(骨格) 좋고…."

병옹의 흐릿한 눈동자에 섬광이 일었다.

"관상(觀相) 좋고…."

귀옹이 벌떡 일어섰다.

"심지(心志)가 있어 보이니, 저 놈을 내 제자로 삼겠다!"

취옹과 병옹이 동시에 노려보았다.

"누구 맘대로…?"

그러자 귀웅은 인상을 쓰며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제기랄, 그럼 공동제자로 하자."

이어 그는 금의공자를 향해 손짓했다.

"얘야, 이리 좀 오거라."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간 냉음은 중인들의 몰골을 송연케 만들었다.

하나, 금의공자의 표정은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노인장, 부르셨습니까?"

그는 병옹 옆의 빈 의자를 가리키며 재촉했다.

"불렀으니까 들었지. 잔말 말고 어서 와 앉거라."

금의공자가 주저 없이 와 앉자, 병옹은 가래 들끓는 기침을 토했다.

"켁켁… 어린 놈이 겁이 없구나."

금의공자는 말뜻을 이해 못한 척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소생은 노인들께 죄 지은 것이 없는데, 무슨 이유로 겁을 내야 합니까?"

귀웅이 까마귀 우짖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큭! 맞다. 너는 크게 기뻐해야 마땅하니라."

"어째서 입니까?"

금의공자가 묻느라 벌린 입에 취옹의 지독한 주기(酒氣)가 쏟아져 들어왔다.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재주와 인품을 지닌 삼옹(三翁)의 눈에 들었으니까."

"삼옹이라구요?"

금의공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병옹 이마의 주름살이 더욱 깊게 패였다.

"설마 우리 삼옹의 명성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겠지?"

금의공자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만… 바로 그렇습니다."

"괘씸한 놈! 그 동안 무얼 하였기에 천하에 명성 드높은 우릴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소생은 장삿일을 하는데 워낙 바빠 다른 일에 귀를 기울일 틈이 없습니다."

"장사? 그런 짓거리는 소인배나 하는 것이다."

귀옹도 맞장구를 쳐 댔다.

"아암, 그렇고 말고. 그보다는 무공을 배우는 것이 훨씬 더 품위와 실속이 있지."

"무… 공…?"

취옹이 은근하게 속셈을 드러냈다.

"우리의 제자가 되어라. 그럼 중원제일(中原第一)의 고수를 만들어 줄 테다."

다음 순간, 금의공자의 입에서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그런 것을 배워서 어디다 씁니까?

자고로 사내는 재물이 많아야 미인을 얻을 수 있고, 또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터인즉"

그는 갑자기 음성을 낮춰 속삭이듯 말했다.

"세 분 노인이 성을 살 만한 재물을 지니셨다면 죽화림(竹花林)에서 술을  마시고 계셨겠습니까? 

국화림(菊花林)이나 난화림(蘭花林)에서…."

취옹이 노기 찬 음성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신외지물(身外之物) 따위를 생명과  맞바꾸다니… 이제 보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놈이었구나!"

하나, 금의공자는 빙긋 웃었다.

"그렇다면 당장 눈앞의 일을 놓고 비교해 보시지오.

노인장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술을 드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생 옆의 노인장께선 좋은 약을 사용하여 병을 치료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귀옹이 날카롭게 호통쳤다.

"그것이 생명을 지켜 주지는 못한다."

"은자만 많이 준다면 무림고수들을 고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소생의 몸과 재물을 지켜 주는데 구태어 무공을 익힐 필요가 없지요."

한 마디도 지려 들지 않자, 취옹이 우수(右手)를 치켜들었다.

"노부가 당장 네놈의 머리통을 박살내 놓을 수도 있다. 그것도 부정하겠느냐?"

금의공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노인장께서 소생을 죽일 이유가 전혀 없는데 뭐하러 쓸데없이 손에 피를 묻히겠습니까?

억지 소리 마시고 재물이 필요하시다면 말씀하십시오."

"……."

졸지에 협박범(脅迫犯)으로 몰린 귀옹은 기가 막혀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 때 금의공자가 품에서 은자 이십 냥에 해당하는 금원보(金元寶)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부르지도 않았는데 잽싸게 점원이 달려왔다.

"공자님, 분부를 내려 주십시오. 당장 소인의 머리를 바치라 해도 시행해 올리겠습니다."

낙락원에 드나들 정도라면 씀씀이가 큰 손님임이 당연하다.

그러나 기녀에게라면 모를까 누가 점원에게 금원보를 주겠는가?

평생 은자 부스러기만을 챙겨온 점원은 넋 나간 듯 금원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금의공자는 거보라는 듯 삼옹에게 미소지어 보인 후, 큰 음성으로 명했다.

"냄새나는 네 머리를 뭐에 쓰겠느냐.

비파행(琵琶行)을 듣고 싶으니, 낙양성 제일의 가수(歌手) 왕유(王裕)를 데려오너라."

금의공자가 금원보를 가볍게 흔들어 보이며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얼마나 빨리 데려오느냐에 따라 이것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으니…."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점원이 쏜살처럼 달려나갔다.

일다경(一茶頃)도 채 못 되어,

헐레벌떡 나타난 점원의 뒤로 뚱뚱한 중년 사내와 비파를 껴안은 중년 여인이 뒤따랐다.

금의공자가 먼지를 털어내듯 즉각 점원에게 금원보를 던져 주었다.

그는 왕유에게 노래를 부르라 명한 뒤에, 역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본 공자의 마음에 들게 노래를 부른다면 열 배 이상을 지불하겠네."

순간 빙글빙글 아첨의 미소를 띄우고 있던 왕유의 표정이 신중하게 바뀌었다.

왕유는 여인이 비파줄을 고르는 것까지 참견하는 등

세세히 신경을 쓴 뒤 땀을 뻘뻘 흘려가며 열창을 했다.

"심양강두야송객 풍엽추화추고고 주인하마객재선 거주욕음무관현 취불성환참장별…."

陽江頭夜送客楓葉萩花秋瑟瑟
主人下馬客在船擧酒欲飮無管絃
醉不成歡慘將別別時茫茫江浸月
忽聞水土瑟琶聲主人忘歸客不發
尋聲闇問彈者誰瑟琶聲停欲語遲
移船相近邀相見添酒回 重開宴
千呼萬喚始出來猶抱琵琶半遮面
轉軸撥絃三兩聲未成曲調先有情
絃絃掩抑聲聲思似訴生平不得志
低眉信手續續彈說盡心中無限事
輕 慢撚抹復挑初爲霓裳後六 
大絃  如急雨小絃切切如私語
切切錯雜彈大珠小珠落玉盤
閒關鶯語花底滑幽咽流泉水下灘
水泉冷澁絃凝絶凝絶不通聲漸歇
別有幽愁闇恨生此時無聲勝有聖
銀甁乍破水漿 鐵騎突出刀槍鳴
曲終收撥當心畵回絃一聲如裂帛
東船西舫 無言唯見江心秋月白
沈吟放撥揷絃中整頓衣裳起斂容
自言本是京城女家在蝦 陵下住
十三學得琵琶成名屬敎坊第一部
曲罷常敎善才服 成每被秋娘 
五陵年少爭纏頭一曲紅 不知數
鈿頭銀 擊節碎血色羅裙飜酒汚
今年歡笑復明年秋月春風等閑度
弟走從軍阿姨死暮去朝來顔色故
門前冷落車馬稀老大嫁作商人婦
商人重利輕別離前月浮梁買茶去
去來江口守空船繞船明月江水寒
夜深忽夢少年事夢啼 淚紅欄干
我聞琵琶已歎息又聞此語重  
同是天涯淪落人相逢何必曾相識
我從去年辭帝京謫去臥病 陽城
陽之僻無音樂終歲不聞絲竹聲
佳近 城地低濕黃蘆苦竹繞宅生
其間旦暮聞何物杜鵑啼血猿哀聲
春江花朝秋月夜往往取酒還獨傾
豈無山歌與村笛嘔啞嘲 難如聽
今夜聞君琵琶語如聽仙樂耳暫明
莫辭更坐彈一曲爲君蒜作琵琶行
感我此言良久立 坐促絃絃轉急
凄凄不是向前聲滿座重聞皆掩泣
座中泣下誰最多江州司馬靑衫濕


심양강 저문 날에 손을 보낼 제,
갈꽃 단풍잎에 갈 바람 불어,
주인은 말을 내리고 손은 배에 올라,
잔 들자니 피리도 거문고도 없어라.
하염없이 잔 놓고 떠나려 할 제,
아득한 강물에 달이 적시어,
문득 비파 소리 물을 타고 들려와,
주인도 손도 갈 길을 잊었구나.
비파 소리 따라서 타는 이 물어 보니,
소리는 그쳤어도 미처 대답이 없어,
배저어 가까이 따라가 대고,
등불 돌려 술을 다시 갖추어 놓고,
천만 번 부르니 겨우 나오는데,
비파 안은 채 수줍어 고개를 숙여,
줄 골라 두어 소리 퉁겨 보는데,
제 가락 아니지만 어딘지 끌려,
줄줄이 타는 소리소리마다 생각이라,
평생에 못 이룬 뜻 하소연하는 듯하구나.
머리 수그린 채 비파를 손에 맡겨,
덧없는 심사를 쏟아 놓는 듯,
지그시 눌렀다간 되쳐 퉁기니,
예상 뒤이어 육요를 타누나.
큰 줄을 쏟아지는 소낙비라면,
작은 줄은 속삭이는 말소리 같아,
큰 줄 작은 줄이 어우러지는 소린,
큰 구슬 작은 구슬 옥반에 구르는 소리.
꽃 아래 주고받는 꾀꼬리 소릴런가.
흐느끼며 여울물을 돌아가는 시냇물 소리,
높고 낮던 소리가 그 어디 엉기어,
막힌 채 이슥히 소리가 죽어,
깊은 한 소스라쳐 일어나는데,
되려 없는 소리가 한결 좋아라.
은병이 깨져 쏟아지는 물소리,
철기가 뒤끓어 창칼 쓰는 소리,
한 곡조 끝내고 줄을 퉁기니,
네 줄이 한데 합쳐 비단 째는 소리.
여기 저기 배에선 숨소리조차 없고,
가을달만 희구나 강 위에 희구나.
흥 그리며 발목을 줄 사이에 꽂고,
옷깃을 여미며 고이 일어나서,
스스로 하는 말이 서울 사는 계집으로,
고향은 하막릉 아래이었노라고.
열세 살에 비파를 처음 배워,
교방에 있었노라 이르고,
줄 골라 소리 내면 칭찬하는 소리.
단장하고 나오면 추랑도 시새웠어.
오릉에 사는 귀공자 서로 시새워,
내 한 곡 끝나면 비단도 선사했다오.

흥겨워 은비녀 비치개로 장단도 치고,
술 엎질러 비단 치마 적셔도 봤소.
해마다 이러여니 즐거이 보내며,
가을달 봄바람을 그저 보냈소.
아우는 수자리로 수양어머닌 저승으로,
세월이 가고 오고 나도 또한 늙었고,
문전엔 찾아오던 말도 드물고,
장사치의 아내가 되고 말았소.
사랑보다 이 끝에 밝은 장사친,
지난 달 차 사러간 뒤 소식이 없고,
강 가에 오가며 빈 배를 지키노라면,
뱃전을 감도는 달빛 차게 빛나고,
이슥한 밤 꿈꾸는 내 지난 청춘이며,
흐느껴 우는 꿈에 눈시울도 뜨겁구나.
내 듣노니 비파 소리 탄식일레라.
중얼대는 그 소린 더욱 설워라.
모두다 천애에 떠도는 외로운 사람,
어쩌자고 만나서 알게 되었으리.
지난 해 제경(帝京)을 떠나온 이후,
귀양살이 심양에 누운 몸이라.
궁벽한 고장이라 풍류도 없어,
해가 다하도록 한 곡조도 못 들었지.
더더구나 나 사는 곳 습기가 많아,
집을 싸고 갈과 대 우거졌지.
왼종일 이 곳에서 무슨 소리 들리리.
두견이 피를 토하고 원숭이 슬피 울어,
꽃 피는 봄 달 밝은 가을 밤에,
흥겨우면 홀로 잔을 기울여 봐도,
초동의 노래와 목동의 피리 뿐이여.
제가락 찾아서 들을길 없더니,
오늘밤 그대의 비파 소리 들으니,
꿈결에 들려 오는 신선의 주악인듯,
원하노니 그대여 한 곡조 더 타 다오.
그대를 위해 비파행 지으려거니,
내 말에 느껴 이윽고 다시 일어나,
줄 골라 비파를 급히 타누나.
먼저보다 설워라 타는 그 소리.
모두다 눈물없이 들을 길 없어,
게서도 누가 가장 섧어하는가.
내 옷깃 적시네, 눈을 적시네.

왕유의 노래 솜씨는 소문 이상으로 뛰어났다.

그것이 은자의 효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주루 내의 모든 이들이 숨 죽여 가며 들었고, 끝난 후엔 아낌없는 감탄과 찬사를 늘어놓았다.

금의공자도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전표(錢票) 두 장을 꺼내 나누어 주었다.

왕유와 여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어헉!"

"어멋!"

그러나 숨 넘어가는 듯한 소리만이 짧게 흘러 나왔을 뿐이었다.

슬그머니 왕유가 쥔 전표를 엿본 점원의 눈알이 튀어나올 듯 변했다.

"백… 냐아앙…."

여인의 손에 쥐어진 전표가 새어 들어오는 바람도 없는데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점원의 눈이 다시 왕방울만해졌다.

"오십… 씩이나…."

그는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금의공자를 바라봤다.

금의공자는 자신의 횡재(橫財)에 만족 못하는 그가 몹시도 불쌍해 보였다.

'평생 점원 노릇이나 하다 죽을 자로다.'

왕유와 여인은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한 기색으로 자리를 떴다.

이 때 병옹이 나직이 물었다.

"혹시 자네가 만보공자(萬寶公子)…?"

"그렇습니다. 소생은 여지껏 재물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만보공자, 그는 바로 정사마천궁주 냉한웅이 아닌가?

취옹은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모처럼 마음에 드는 물건 하나 발견했다 싶었더니만… 낙양엔 뭐하러 왔나?"

"그야 물론 더 많은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지요."

"전충(錢蟲)! 네놈은 훗날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냉한웅이 그의 말에 반박하려 입을 여는 순간, 향풍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풍염(豊艶)한 몸매의 궁장미부였다.

그녀는 냉한웅의 귀에 닿을 듯 입술을 가까이해 나긋나긋 속삭였다.

"원주(園主)께서 만나시겠답니다."

냉한웅은 천천히 술잔을 비운 후 일어섰다.

"소생은 매화림(梅花林)에 볼일이 있어 가야겠습니다."

"……."

삼옹은 어안이 벙벙해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병옹은 멀어져 가는 냉한웅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축록자불견산(逐鹿者不見山)…

사슴을 잡기 위하여 그 뒤를 쫓는 사람은

산이 깊고 험한가를 보지 않는다 했거늘 아쉬운 쪽이 쫓아갈 수 밖에…."

하지만 이 말은 그의 입 안에서만 뱅뱅 돌다 사라져, 곁의 친구들 귀에조차 들리지 않았다.

매화림 내의 별실.

냉한웅은 우람한 체구의 금포중년인(錦袍中年人)과 마주 앉아 있었다.

"매화림에 묵으려면 천하 귀보를 주어야 한다 들었습니다.

대체 어느 정도의 값어치를 지닌 물건을 원하십니까?"

금포중년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으허허허… 나는 아직 공자를 손님으로 맞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소."

냉한웅도 마주 웃어 젖혔다.

"하하하… 지금 매화림에 귀빈(貴賓)이 기거하는 중 아니오?"

금포중년인이 움찔  놀라움을 드러냈다. 

그러나 일순간에 원래의 표정을 회복했다.

"공자를 속일 수는 없겠군요."

"옳으신 말씀이오. 그럼 더 이상 헛되이 입술과 혀만 수고롭게 말고 원주(園主)를 불러 주시오."

금포중년인이 안면을 잔뜩 찌푸렸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요?"

"흥, 본 공자의 재력은 중원이라도 능히 살 수 있다.

일개 환락장(歡樂場)의 하인(下人)과 말장난질칠 신분이 아니니, 냉큼 주인이나 불러 내거라."

금포중년인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네놈이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분노가 극에 달해 음성마저 덜덜 떨렸다.

이 때 홀연, 호탕한 웃음과 더불어 은염(銀髥)이 가슴까지 내려온 노인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만보공자의 안목이 범상치 않을 줄 짐작은 했지만, 이토록 빨리 눈치챌 줄은 몰랐소."

금포중년인은 황급히 일어나 은염노인의 곁에 시립했다.

은염노인은 눈짓으로 그를 물러가게 한 다음 포권을 했다.

"시험해 미안하외다. 노부는 틀림없는 낙락원주요."

냉한웅도 마주 포권을 하여 예를 차렸다.

"뵙게되어 반갑습니다. 그럼 흥정에 들어가 볼까요?"

낙락원주는 찻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신 후 물었다.

"공자께선 낙락원에 매우 흥미를 지닌 듯싶은데… 화채(花債)는 무엇으로 갚으시겠소?"

냉한웅은 싱긋 웃으며 되물었다.

"이 곳에서 일평생(一平生) 묵으려면 어떤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까?"

낙락원주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찻잔을 들어 단숨에 모두 들이켰다.

"낙락원을 아예 사들이겠다는 뜻이오?"

음성에 불쾌함이 역력히 배어 있었다.

하나 냉한웅은 아랑곳 않는 표정이었다.

"그렇습니다. 본 공자의 처첩(妻妾)들이 기거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좋소. 값은 무엇으로 치루겠소?"

낙락원주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은염이 부르르 떨렸다.

냉한웅은 품에서 한 자루 백옥섭선(白玉摺扇)을 꺼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외다."

차르르륵-!

섭선이 공작의 날개처럼 활짝 펼쳐진 순간, 아수라파천귀의 흉상이 살기를 뿜었다.

"천마존의 명을 거역하거나 대항하는 자는 지체 없이 멸(滅)하리라."

"……."

낙락원주의 두 눈이 공포와 경악으로 휩떠졌다.

그는 부들부들 떨며 손가락질했다.

"천존선(天尊扇)! 하지만 당신은 천마존이 아니니 명을 거역… 한 것이 아니잖소?"

냉한웅은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천독령주(天毒令主), 그대는 또 한 가지 규칙을 어겼구나.

천존선은 곧 천마존이니, 이를 모독하는 자는 그 누구라도 형벌을 가한다."

냉한웅은 천리묵혈동의 혈풍을 종식시킨 후,

사대영주를 단명곡(斷命谷)의 지옥야차부로 불러들였다.

한데 천독령주는 오지 않았으니….

낙락원주는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변명을 했다.

"지옥야차부주, 아니 천신령주(天神令主)가 수하를 속였습니다. 
공자께서 천존이신 줄 알았더라면 어찌 명을 따르지 않았겠습니까?"

"천존밀령이 그대에게 전달되지 않았단 말인가?"

"그게 아니오라… 약 한 달 전에 보내온 정보에 의하면

정사마천궁주와 천마존의 화신은 각기 다른 인물이며,

만보공자는 이들과 무관하단 내용이었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뭔가 다른 음모가 있단 생각에 사대영주 중에 그대만이 유독 불참을 한 것이로군."

"옳습니다. 수하가 어찌 감히 명을 거역하오리까?"

냉한웅은 믿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누가 널 도와주러 오리라는 생각은 마라.

우리의 음성이 외부로 새어 나가지 못하게 무형강기를 펼쳐 두었다."

냉한웅의 눈에서 섬뜩한 혈광이 폭사되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네게 뭔가 믿는 것이 없다면 본존을 배신할 결심을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뭐냐?"

천독령주가 갑자기 목에 힘을 주었다.

"크흐흐흐… 본좌 역시 무영지독(無影之毒)인 단혼공심(斷魂空心)을 뿌려 두었다. 

이 비약은 천하제일의 독중지독(毒中之毒)이라, 
네가 금강불괴지체(金剛不壞之體)를 지녔더라도 이젠 공력을 모을 수 없는 종이 호랑이에 불과…."

순간, 천존선이 섬광으로 변해 공기를 갈랐다.

"혈섬(血閃)-!

쇄애액-!

파공음과 단말마의 비명….

폭죽처럼 터져 나온 것이 동시인 듯 빨랐다.

허리 위아래로 완전히 분리된 천독령주, 하나 얼굴엔 의혹 어린 표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의 토막난 사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냉한웅의 표정도 이와 흡사했다.

'방 안에 들어서기 전부터 호신강기를 두르지 않았더라면 단혼공심에 당했을 것이다.

강호비사록엔 이 독이 천 년 전 인물인 만독성군(萬毒聖君)의 독문비약으로

강호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적혀 있지 않았던가!'

그의 입술이 가늘게 벌려지며 신음과도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이 자의 배후에 과거의 천마존보다 강한 세력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