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개방서생

제2장 패천군(覇天君) 뇌웅(雷雄)

오늘의 쉼터 2016. 6. 1. 11:08

제2장 패천군(覇天君) 뇌웅(雷雄)

 

진천패도(震天覇刀) 피천웅(皮天雄).

그가 사파의 거물인 사도오종(邪道五宗)에 끼인 인물이라 하나 이럴 수는 없다.

묘강쌍마의 무공 수위는 정도십종(正道十宗), 

사도오종(邪道五宗), 마도오종(魔道五宗)에 비하여 한 단계 위였다.

그런데 어찌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쌍마를 이토록 가볍게 해치울 수가 있는가?

분노가 극에 이른 황금혈랑은 이 점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덮쳤다.

"감히 본좌의 수하들을…!"

파천혈륜이 혈광이 번뜩이는 검기를 종횡으로 비산(飛散)시켰다.

카카르르륵-!

악령(惡靈)의 호곡성인 양 동굴 안을 진동시키는 음향에 맞서

천웅도 수룡음(水龍音)을 토해 내며 쌍장을 휘둘렀다.

"아오우우…!"

음(音)과 음, 그리고 검기와 장력!

이 모든 것이 뒤섞인 대결은 주위 십여 장 이내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에 충분했다.

콰쾅쾅-!

수만 근의 화약이 일시에 폭발한 듯 천장이 마구 무너져 내리고, 
잘게 부수어진 암석의 파편들은 돌풍에 휘말려 사방으로 흩어져 날았다.

일부 돌조각들이 암기인 양 석벽에 박힐 만큼 그 세찬 경력은 형언키 어려울 정도였다.

하나 어찌 된 것인지 냉한웅의 옷자락은 미미한 흔들림조차 없었다.

무수히 날아온 돌조각들 역시 그의 몸 한 치 앞에 이르러선 무형의 벽에 부딪친 듯 

퉁겨 날아가거나, 더욱 미세하게 부서져 공기와 뒤섞였다.

칠흑의 어둠이 자욱하게 휘날리는 석분(石粉)으로 인해 잿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얼굴에 석분을 뒤집어쓴 양 안색이 창백해진 피천웅.

황금혈랑은 이리 가죽을 뒤집어써 안색을 살필 수가 없었다.

하나 그의 눈빛이 당혹감에 일렁이는 것은 감춰질 수가 없었다.

"맨손으로 본 교주의 파천혈륜을 막아 내다니… 네놈의 정체가 뭐냐?"

피천웅은 손등으로 입가의 핏자국을 쓰윽 문질러 닦은 후 냉소를 흘렸다.

"막대후(幕大侯)! 네놈이 파천혈륜을 지니지 않았다면 벌써 송장이 되었을 것이다."

황금혈랑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그 이름…은 본 교…주가 지난 백 년 동안이나 사용하지 않… 은 것인데 어떻게…?"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것으로 미루어

그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피천웅 역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격동(激動)은 놀람이 아니라 분노였다.

"나의 모습이 크게 변하여 못 알아본다 해도 무공조차 잊었단 말이냐?"

"그럼, 너… 너는 패(覇)… 천군(天君)!"

황금혈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비틀비틀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섰다.

패천군이 어떤 내력을 지닌 인물이기에

하늘 두려운 줄 모르는 그마저 이토록 두려워하는 걸까?

패천군(覇天君) 뇌웅(雷雄).

원래 그는 묘강의 삼대세력 중 하나인 불사천마교의 인물이다.

백 년 전 그가 지닌 무공과 명성은 당시 중원 무림을 공포에 떨게 했던 잔인사황(殘忍邪皇)이나 

혈살신마(血殺神魔)보다 결코 아래가 아니었으니….

당시 교주였던 천마대제(天魔大帝)에게 두 명의 후계자가 있었다.

패천군 뇌웅과 불사군(不死君) 방고갈(方高葛)이었다.

방고갈은 심계(心計)가 깊고 음흉하며 야심도 대단한 위인이었다.

이에 비해 뇌웅은 용맹하며 충성스러웠다.

뇌웅을 시기한 방고갈은 치밀한 음모를 진행시켰다.

방고갈은 음계(陰計)에 친구인 막대후와

자신의 정부이자 젊은 사모(師母)인 호청화(胡靑花)를 끌여들였다.

그리고 사부가 불사천궁(不死天宮)을 비운 어느 날, 실행에 옮긴 것이다.

호청화의 부름을 받고 들어가 얘기를 나누던 뇌웅은

갑자기 그녀가 옷을 벗어 던지며 품에 뛰어들자 기겁을 했다.

"사… 모님…!"

당황한 그는 호청화의 몸을 떼어 내려 했으나,

그녀는 거머리처럼 찰싹 끌어안은 채 마구 비명을 질러 댔다.

"패천… 군, 이 짐승… 만도 못한… 놈아! 네가 감… 히 내 몸을……!"

이 때 방문이 열리며 막대후와 시녀 두 명이 들이닥쳤다.

당사자인 호청화, 그리고 막대후와 시녀들…

이들은 뇌웅에게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증인들이었다.

또한 방고갈은 그를 두둔해 주는 척하며

더욱 궁지에 몰아넣어 용서받을 한 치의 틈마저 남겨 주지 않았다.

뇌웅은 모든 무공을 폐쇄당하고 사문에서 축출당하는 치욕을 맛봐야 했다.

하나 독하기 짝이 없는 방고갈은 자객들을 보내 그를 살해하게 했다.

이 때, 천마존 독고기가 나타나 구원의 손길을 뻗친 것이다.

천마존은 그를 자객으로부터 구해 줬다.

뿐만 아니라, 희세의 영약인 공청석유(空淸石乳)를 먹이고

제호관정(提糊灌頂) 수법을 시전해 무공도 회복시켜 주었다.

감격한 뇌웅은 천마존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지난 백 년 간 다양한 신분으로 위장,

극비조직인 천살령주(天殺令主)의 직책을 수행해 온 것이다.

황금혈랑은 복잡다단한 감정이 서린 눈빛으로 뇌웅을 바라봤다.

"내가 너무도 어리석었어. 불사군 그 놈이 간교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암계를 꾸밀 줄은…."

이는 자기도 피해자란 뜻이 아닌가?

"그게 무슨 말이냐?"

뇌웅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황금혈랑은 땅바닥이 무너질 듯한 탄식을 토해 냈다.

"그 자가 진정으로 노린 것은 묘강의 패권을 다퉈 온 본 교주일세.

더구나 중원의 정예고수들을 한꺼번에 쓸어 버리고 파천혈랑교마저 수중에 넣을 수 있으니…

이야말로 일석삼조(一石三鳥)가 아니겠는가."

돌연, 맥없이 중얼거리던 황금혈랑의 신형이 번개처럼 짓쳐들었다.

"내 과오(過誤)를 뉘우친다.

그러나 복수하기 전엔 죽을 수 없어! 
파(破)- 천(天)- 무(舞)-!"

카르- 카르르륵-!

파천혈륜이 현란한 빛을 발하며 검기가 그물처럼 뇌웅의 전신을 뒤덮었다.

하나 이는 속임수였다.

심검합일(心劍合一)!

혼신의 내력이 실린 파천혈륜은 단 한 줄기 검강(劍 )으로 변해 뇌웅의 미간(眉間)을 노렸다.

불사천마교의 교주로 신처럼 군림해 온 황금혈랑이

이런 비열한 기습을 가할 줄 그 누가 짐작인들 하겠는가?

무기를 뽑아들 사이도 없었다.

뇌웅의 얼굴에 절망의 그늘이 드리운 찰라, 폭갈과 함께 또 다른 섬광이 공간을 갈랐다.

"천존경혼(天尊驚魂)-!"

염라천존수(閻羅天尊手)를 장법으로 변화시킨 천존경혼장(天尊驚魂掌).

그의 장심(掌心)에서 쏘아진 것은 장력이 아닌 장강(掌 )이었다.

두 줄기 섬광은 뇌웅의 미간 한 치 앞에서 충돌하였다.

붉고 푸른 섬광이 불꽃처럼 작렬한 순간, 두 마디 비명이 동굴 안에 메아리쳤다.

"아앗!"

"헉!"

여파에 의해 충격을 받은 뇌웅의 거구가 뒤로 넘어지며 토해 낸 음성과

의외의 사태에 놀란 황금혈랑의 음성이었다.

하나, 황금혈랑은 노련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신형은 어느 새 삼십여 장 밖을 날고 있었으니….

냉한웅 입에서 다시 폭갈이 터져 나왔다.

"천절멸겁(天絶滅劫)-!"

백여 장이나 떨어진 생물까지도 격살(擊殺)할 수 있는 천존경혼장(天尊驚魂掌)의 두 번째 초식.

순간, 녹색 섬광이 어둠을 밝혀 허공에서 헤엄치듯 몸을 뒤트는 황금혈랑의 신형을 비추었다.

아니, 관통(貫通)하여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어둠으로 채워진 공간으로부터 가슴을 찢기우는 듯 고통에 찬 외마디 비명이 들려 왔다.

"크윽!"

냉한웅은 아무 일도 없는 듯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본존에게도 쓸 만한 무기가 생겼군."

뇌웅이 어찌 말뜻을 모를 것인가?

어둠 속으로 쏘아졌다가 퉁겨지듯 제자리로 돌아온 그의 손엔

기(冷氣) 어린 이빨을 드러낸 파천혈륜과 비도가 들려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으며 두 가지 물건을 받쳐 올렸다.

"범인에겐 이리의 이빨이나 천존께는 날개가 될 것입니다. 받으시옵소서."

왠지 그의 음성은 밝기만 하진 않았다.

절반의 복수가 이루어지긴 했으나 그 마저도 자신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니잖는가.

이 때, 냉한웅의 부드러운 음성이 귓전에 와 닿았다.

"막대후(幕大侯)의 신법이 너무도 뛰어나 어쩔 수 없었소.

불사군은 영주에게 넘겨 주겠으니, 너무 섭섭해 마오."

대귀선(大龜船).

비단천처럼 얇고 투명한 막으로 덮인 거북 모양의 배가 유유히 수로를 지나고 있었다.

선두(船頭)엔 강렬한 불빛을 내뿜는 기이한 화통(火筒)이 달려 있어 앞길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나갈 길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던 수십 명의 무림인들이 이를 발견하고 고함을 질러 댔다.

"우릴 구해 주시오! 제발…."

하나, 대귀선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양 옆에 주먹만한 구멍을 드러내 소나기 퍼붓듯 장전(長箭)을 쏘아 댔다.

무림인들은 기겁을 해 분분히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비좁은 육로를 따라 피하려니 납짝 엎드리거나 우왕좌왕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콰콰쾅-!

좌우(左右) 동굴 벽에서 폭음이 연달아 일며 무수한 석편(石片)들이 암기처럼 무림인들에게 퍼부어졌다.

화살의 촉에 화약을 달아 석벽과 부딪히면 폭발하게끔 만든 것이었다.

"크큭!"

"아아악…!"

비명 소리들도 동굴 벽에 부딪쳐 아수라지옥의 귀곡성 같은 음향을 일으켰다.

이 때, 좌편의 수로에서 선박 한 척이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선수에는 풍채 좋은 인물들이 서 있었다.

무당 장문인 창허자(昌 子),

무당사자(武當四者),

화산장문인 경운유협검(經雲流俠劍) 노백(櫓柏),

아미 장문인 혜인대사(慧仁大師),

소림사(少林寺) 장경각주(藏經閣主)인 법성대사(法成大師),

개방방주 철지영개(鐵地靈 )….

하나, 그들이 타고 있는 선박은 물 위에 떠 있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질 만큼 성한 곳을 발견할 수 없었다.

선실에서 두 명의 노인이 근심스런 기색으로 나섰다.

성수마의(聖手魔醫) 여소량(呂紹梁)과 그의 친구인 중원일괴(中原一怪) 공문건(孔文建)이었다.

"만통자 선배 말씀대로 이 참상이 신산묘인(神算妙人)의 계책에 의해 빚어진 것이라면… 아니, 저건…."

혼잣말을 하듯 낮게 중얼거리던 여소량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공문건이 우렁찬 외침을 토해 냈다.

"대귀선이다!"

다음 순간, 흥분된 표정의 인물들이 우르르 선실 밖으로 몰려 나왔다.

하지만 곧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부딪친다! 피해라!"

순간, 경운유협검 노백의 신형이 빛살처럼 이십여 장 어둠을 갈랐다.

천망(天網) 한 자 앞에 이르른 그가 허공에 몸을 띄운 채

장홍경천(長虹經天)의 검초를 전개, 힘껏 내리찍었다.

펑-!

엄청난 반탄력이 검신을 타고 노백의 손아귀에 전해졌다.

"윽!"

짤막한 비명을 터뜨리며 노백의 신형이 다시 허공으로 퉁겨 올랐다.

그는 한 바퀴 회전하여 몸의 중심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머리가 아래로 향했을 때, 갑자기 진기가 이어지질 않았다.

그대로 물 속에 처박힐 찰라, 창허자가 오른손을 내밀어 부드러운 경력을 밀어 냈다.

슈욱-!

수면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노백의 신형이 다시 빙글 뒤집혔다.

"타앗-!"

연청십팔번(燕靑十八番).

제비가 물을 차고 날 듯, 그는 미끄러지듯 수면을 차 신형을 퉁겨올렸다.

간신히 선상에 돌아온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변명 비슷히 말했다.

"천… 망은 듣던 것 이상의 물건… 이오. 쇠를 무 자르듯 하는 보검으로도 흠집 하… 나 낼 수 없다니……."

만통자가 눈살을 찌푸린 채 대귀선을 노려봤다.

"지금은 파천혈륜을 지녔다 하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을 듯싶군."

이들이 말을 주고받을 때, 대귀선은 십 장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대귀선은 정면으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기세를 조금도 늦추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충돌시킬 속셈이 분명했다.

창허자의 입에서 탄식 어린 침음(沈吟)이 흘러 나왔다.

"배를 떠나 육로로 피신하는 것이 좋을 듯싶소이다."

혜인대사도 연방 불호를 읊어 댔다.

"아미타불… 대체 저들이 누구길래 이토록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짓을 저지르는 게요?"

만통자는 분노 섞인 음성으로 대꾸했다.

"불사천마교나 고루대교의 무리들일 게요.

하지만 더욱 괘씸한 놈은 신산묘인이오.

노부의 목을 걸고 단언하거니와, 이 모든 연환독계(連環毒計)는 그 자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외다."

중원일괴 공문건의 입가에 씁쓰레한 미소가 흘렀다.

"먹이를 던져서 상대를 유인하고 그 틈을 이용하여 목적을 이루는 것은 병법의 기초이거늘… 

이토록 어이없이 속아 넘어가다니…."

이 때 어디선가 청아한 음성이 들려 왔다.

"때로는 가장 단순한 계책이 가장 큰 효과를 얻기도 하지요.

나, 인인설사(因人設事) 인인폐사(因人廢事)… 

일이란 사람에 따라 성사될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다 했소. 낙담들 마시오."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고개를 돌린 중인들 모두가 움찔 놀랐다.

수면(水面)을 평지(平地)인 양 딛고 선 냉한웅과 패천군(覇天君) 뇌웅(雷雄).

"진천패도(震天覇刀)…!"

뇌웅을 사도오종의 인물인 피천웅으로만 알고 있는 중인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뇌웅은 가볍게 몸을 날려 선상에 오른 후, 좌우로 포권을 해 보였다.

"상황이 좀 안 좋긴 하지만, 뵙게 되어 반갑소이다."

혜인대사(慧仁大師)가 형형한 안광으로 냉한웅을 주시하였다.

"저분 시주께서 뉘신지 소개해 주시겠소?"

중인 시선들이 냉한웅에게로 집중되었다.

'저토록 비범한 풍모는 노부 평생에 처음 보는군.'

'약관의 나이를 갓 넘긴 정도인 듯싶은데,

신광이 안으로 갈무리되고 신법 또한 부유무풍(浮遊無風)의 경지에 이르다니….'

이들은 냉한웅에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목전까지 다가든 위험마저 잊고 있었다.

이 때 추추귀개(醜醜鬼 )의 돼지 멱 따는 듯한 고함이 번뜩 정신을 들게 했다.

"어서들 피하시오!"

어느 새 대귀선과의 거리가 불과 서너 장 차이로 좁혀져 있었다. 
더 이상 망서릴 여지가 없었다.

중인들이 배에서 떠나기로 마음 먹은 순간….

"천존패혈류(天尊覇血流)-!"

냉한웅의 신형이 야조처럼 쏘아져 나갔다.

미처 말릴 겨를이 없었던 중인들은 그가 무모한 짓을 한다고 생각했다.

'쯧쯧, 객기(客氣)만으로 될 일이 아닌데….'

다음 순간, 그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카카캇캇-!

철심장(鐵心臟)을 가르는 듯한 기음이 일며 천망이 쭈욱 갈라져 나가는 게 아닌가?

천존칠선(天尊七扇)이란 명칭이 붙여진 칠 초(招)의 선법(扇法) 중 두 번째 초식.

그러나 냉한웅의 손에 쥐어진 무기는 천존선(天尊扇)이 아니었다.

"파천혈륜이다!"

중인들이 흥분하여 목청에 힘을 주었을 때, 냉한웅의 신형이 갈라진 천망 안쪽으로 사라졌다.

"침입자를 막아라!"

당황한 외침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며 각종 병기가 냉한웅의 전신을 덮쳤다.

"흥!"

냉한웅은 코웃음을 치며 휘젓듯 파천혈륜을 휘둘렀다.

파카캇-!

파천혈륜은 천고의 기병답게 일반 검을 사용했을 때보다 수 배의 위력을 발휘했다.

검강(劍鋼)이 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벌 떼처럼 달려들던 흑의복면인들의 허리 또는 사지는 분시되어 비명과 허공에 뿌려졌다.

"우악악…!"

"크아악…!"

대귀선이 갑자기 심한 진동을 일으켰다.

중원 무림인들이 타고 있는 선박을 들이받은 모양이었다.

이 때 선실에서 다섯 명의 고루인이 병기를 번뜩이며 뛰쳐 나왔다.

"혈섬(血閃)-!"

냉한웅의 신형이 검강과 함께 짓쳐들었다.

피보라를 일으키며 쾌속하게 선실 안으로 사라지는 광경은 산뜻하게까지 느껴질 만큼 절묘했다.

휙- 휙휙-!

뒤이어 대귀선에 뛰어든 중원  무림인들의 눈에 비친 것은

사지가 처참하게 잘라져 나간 흑의복면인과 고루인들의 사체(死體)뿐이었다.

만통자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촌각도 지체 않고 몸을 날렸거늘…

그 청년의 내력이 뭐길래 노부가 평생 두 번째 보는 광세의 무학을 지녔단 말인가?'

중인들이 넋을 잃고 바라볼 때, 냉한웅이 선실 안에서 한 여인을 데리고 나왔다.

"대귀선의 기관을 조종한 장본인입니다."

이를 본 중인들이 저마다 격앙된 음성을 토해 냈다.

"저 아인… 장강어옹(長江漁翁)의 여식이 아닌가?"

"강북화(江北花) 차연화(車蓮花)! 그 애비에 그 딸이로군."

"새외(塞外) 사마외도들과 결탁해 수많은 동족을 학살하다니… 찢어 죽일 계집!"

차연화는 단 한 마디의 변명도 없었다.

그저 두 줄기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분광월아도와 함께 신비이객(神秘二客)으로 불리우는 무풍신룡(武風神龍).

남장여인(男裝女人)인 그녀를 사랑하는 불행한 여인.

냉한웅은 그녀를 안다. 

또한 그녀가 무풍신룡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는지도 안다.

하지만 몰라도 별 도움 안 되는 것은 알고, 꼭 알아야 할 것은 모르고 있다.

그는 무풍신룡이 여인임을 강호비사집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또 하나의 자신,

즉 분광월아도(分光月牙刀)를 끔찍하게 사모하고 있음은 모르고 있으니….

불현듯 냉한웅이 묵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차낭자를 용서해 주시오."

하나, 차연화는 추호도 반기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몽롱한 시선으로 냉한웅을 바라보며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을 뿐이었다.

"왜죠?"

냉한웅은 시선을 물소리 찰랑이는 어둠 속으로 돌렸다.

"그대가 목숨보다 더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원할 것이기 때문이오."

그가 생전 처음으로 자신에게 다정히 대해 주었던 무풍신룡을 떠올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자신이 생전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소연군주(素蓮君主) 주예영(朱豫英),

그녀의 선녀와도 같은 용모를 떠올리고 있는 걸까?

이 때 경운유협검(經雲流俠劍) 노백(櫓柏)이 노기등등하여 나섰다.

"그럴 수는 없소. 저 요물은 절대로 살려 둬선 안 돼오."

다음 순간, 뇌웅이 인상을 으그러뜨리며 그를 막아섰다.

"네놈의 목숨이 열 개라도 되느냐?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당장 물러서지 않는다면 부지하기 어려우리라."

중인들은 아연실색을 금치 못했다.

진천패도(震天覇刀) 피천웅(皮天雄)은 확실히 사파(邪派)의 거물이다.

그러나 무공이나 지위, 그 어느 것도 중원 대문파인 화산 장문인에 비할 바가 아니잖는가?

더욱이 그는 평소 별로 말이 없고 예의가 바른 인물로 알려져 왔으니….

이 돌연한 변화는 충격 이상의 것이었다.

노백은 분노로 인해 콧구멍에서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이… 이런 네놈이 감히…."

냉한웅의 음성이 끼여들었다.

"두 분의 감정은 이 곳을 벗어난 다음에 풀어도 늦지 않을 게요."

냉한웅은 중인들의 표정을 두루 살피며 말을 이었다.

"차낭자가 대귀선을 움직인 것으로 미루어 필시 봉쇄되지 않은 수로도 알고 있을 것이오. 

또한 우리 역시 대귀선밖엔 이용할 선박이 없지 않소이까?"

추추귀개가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대귀선의 조종법을 아는 사람이라곤 차낭자밖엔 없으니… 해쳐선 절대로 아니 되오."

그리고 자신의 명석함을 자랑하는 듯 히죽 웃어 보였다.

만통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일세."

이어, 그의 시선이 냉한웅을 향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구려.

이젠 만통자란 별호를 무통자(無通子)로 바꿔야 할 듯싶소."

그가 넌지시 신분을 묻자, 뇌웅이 냉큼 입을 열었다.

"천하의 정사마(正邪魔)를 지배하는 천존(天尊)이시오."

순간, 만통자는 혼비백산하여 무릎을 꿇었다.

"정사마천궁주! 소인의 눈이 어두워 미처 알아보지 못했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중인들의 표정도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용모가 듣던 바와 너무도 다르지 않은가? 시체처럼 음랭한 인상의 중년인이라던데….'

'천수장에서 보았던 정사마천궁주가 아니다.

대관절 어느 쪽이 진정한 모습일까?'

'새파란 애송이가 얼마나 대단한 내력을 지녔기에

대 선배인 만통자마저 무릎을 꿇는단 말인가?'

냉한웅은 이들의 의혹에 찬 시선을 외면하며 차연화에게 부드러운 음성을 들려 주었다.

"차낭자, 우리를 위해 대귀선을 움직여 주시겠소?"

사연을 모르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한 쌍의 연인이 사랑을 속삭이는 것으로 오해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