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서장(西藏) 혈겁(血劫)
서역 밀종(蜜宗)의 총본산인 포달랍궁(布達拉宮).
오랜 세월, 중원무림에 격동과 신비를 안겨 준 환상(幻想)의 문파.
천환역골공(千幻易骨功)을 사용하여
냉막한 중년인의 모습이 된 냉한웅은 설원과 사막을 지나 서장(西藏) 땅을 밟았다.
배부터 채울 요량으로 그는 객점을 찾았다.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이 갑자기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서장어로 '착한 바람의 집'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한자로 풀이해서 선풍원(善風院)!
냉한웅은 내심 가슴이 뿌듯했다.
선풍원의 자비(慈悲) 물결이 수만 리 떨어진 서장에까지 미치고 있다니….
유리 구슬을 이어 만든 주렴을 걷고 들어서니,
비교적 깨끗이 치장된 실내에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냉한웅은 일부러 구석진 자리에 앉은 후, 점원에게 가장 빨리 만들어지는 요리를 가져오게 했다.
실내의 객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냉한웅을 힐끔거렸다.
누덕누덕 기운 너절한 의복에 냉막한 표정은 여러 사람의 입담에 충분히 오를 만한 외모였다.
냉한웅은 가져온 양고기 요리를 먹기에만 급급했다.
약간 역겨운 듯 느껴지는 서역의 향신료(香辛料)와 양고기 특유의 누린내.
하지만 꼬박 하루를 굶은 그는 허겁지겁 입 안에 쑤셔 넣기 바빴다.
냉한웅은 두 개의 커다란 접시를 깨끗이 비운 후, 점원에게 건량(乾糧)을 싸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나서 계산을 치루기 위해 품안에 손을 넣은 그의 안색이 싹 변했다.
종이들만 수두룩 붙잡히는 게 아닌가?
은자 부스러기조차 하나 없이 몽땅 중원에서 신용 있게 통용되는 전표들뿐이었다.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발견한 점원이 인상을 우그러뜨렸다.
"설마, 은자가 없는 건 아니겠지?"
유창한 한어였다.
그는 한족인 듯 보이는 점원에게 담담히 대꾸했다.
"그런 것 같네."
계산대에 앉아 있던 뚱뚱한 주인이 이 말을 들기 무섭게 튀어나와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 뻔뻔스런 놈! 돈 한 푼도 없는 주제에 건량까지 싸 달래고…."
냉한웅의 아래위를 훑어보던 그는 허리춤에 걸려 있는 기형의 병기에 눈독을 들였다.
"이 놈아, 가진 게 없으며 이거라도 내놓아라."
파천혈륜을 달라니?
냉한웅은 어이가 없었다.
'중원제일의 부자인 만보공자가 은자 몇 닢이 없어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하나, 어린 점원 놈까지 주인과 합세해 이 놈 저 놈 몰아세우자 은근히 부화가 치밀었다.
'이 놈들을 당장에 요절내 버릴까?'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쥔 순간, 등 뒤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려 왔다.
"참으시오. 초행이라 이 곳을 잘 모르시는 듯한데,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오."
국경을 넘나들며 물건을 맞바꾸는 한족 보부상(褓負商)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오?"
구릿빛 피부에 건강이 넘쳐 보이는 중년인이였다.
그는 빙긋 웃음으로 대답한 뒤, 주인에게 물었다.
"음식값이 얼마인지 내가 대신 치뤄 주겠소."
주인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두 눈을 부라렸다.
"네놈이 무슨 상관이냐? 썩 물러가거라."
보부상은 유들유들 미소를 짓지 않고 달래었다.
"허, 너무 화내지 말고 내 말 좀 들으시오. 두 배로 갚으리다."
뚱보가 계속 완강히 고개를 흔들어 댔지만 그도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그럼 세 배, 네 배는 어떻소? 그것도 싫으면 다섯…."
이 때, 냉한웅이 그를 밀치며 나섰다.
"호의는 고맙지만 이 자가 탐내는 것은 내 무기요.
아무래도 호된 맛을 보여 줘야만 정신을 차릴 것 같소."
보부상이 기겁을 해 그를 말렸다.
"여기는 밀교(蜜敎) 세력이니, 함부로 나섰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하오."
냉한웅이 멈춰 서자, 그는 자신부터 소개했다.
"호북성(湖北城) 하오현(河五縣)의 진강(眞江)이외다.
이 곳은 포달랍궁의 지배하에 있어 소동을 벌인 외지인들은 죽음을 면치 못하오."
"이건 착한 바람의 집이 아니라 악한 바람의 집이군."
냉한웅이 비웃음을 흘리는 것을 본 진강이 펄쩍 뛰었다.
"참으십시오. 반년 전에도 저 자에게 우리 동료 네 명이 아무런 잘못 없이 호되게 당했습니다.
저 자보다 힘이 없어 맞은 줄 아십니까?"
순간, 냉한웅의 주먹이 진강의 턱을 후려쳤다.
"저런 악질은 혼내 주어야 하는데, 왜 자꾸 말리느냐."
퍽-!
사실 때렸다기보다는 부드러운 경력으로 밀어냈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이쿠!"
무형의 힘에 의해 뒤로 밀린 진강의 몸이 요란하게 술독을 깨부수며 나뒹굴었다.
이를 본 주인은 더욱 길길이 날뛰었다.
"이 놈아,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행패를 부리…."
하나,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냉기 감도는 기문 병기가 그 예리한 이빨을 목줄기에 들이대고 있는 게 아닌가?
"계속 지껄여 봐라."
냉한웅이 담담한 시선으로 노려보자, 주인은 더듬더듬 뒷말을 읊어 댔다.
"… 십니까?"
사태가 험악해지자,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갔다.
냉한웅은 슬쩍 파천혈륜의 광채를 떨쳐 보였다.
"이 물건이 그리도 탐나느냐?"
주인은 벌벌 떨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냉한웅은 파천혈륜을 거두어들였다.
"갖기를 원치 않겠다면 할 수 없지. 음식값은 나중에 주도록 하겠다."
"그… 그러… 십시오."
냉한웅은 나자빠진 진강을 힐끔 살피며 문으로 향했다.
이 때, 네 명의 라마승들이 흉흉한 기세로 쏟아져 들어왔다.
"어느 놈이 행패를 부린 거냐?"
주인이 반색을 하며 그들에게 달려갔다.
"저 한인입니다. 저 놈이 절 죽이려 했습죠."
라마승들 중 정면의 위인이 씨익 살기 띤 미소를 지었다.
"이 땅은 부처님이 보살피는 성지(聖地)다.
함부로 날뛰어 더럽히는 자들은 전부가 지옥에 떨어졌지."
"……."
냉한웅이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자,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외쳤다.
"저 죄인을 잡아라.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찰나, 파천혈륜도 악귀의 울부짖음을 토했다.
쇄애액- 쇄액-!
수천 수만의 검기가 폭발하듯 사위(四圍)를 베어 가는 광경은 모골이 송연할 정도였다.
다음 순간, 폭죽처럼 터져 나온 네 마디 비명.
그리고 네 구의 사체가 그 자리에 남겨지자,
득의양양하게 지켜보던 주인의 얼굴이 다시 사색으로 변했다.
객점 내 남아 있던 중인들은 냉한웅이 눈 깜박할 사이, 벌어진 상황에 그저 어리둥절해 할 뿐이었다.
"어르신, 살려 주십시오. 뭐든지 원하시는 것 다 드릴 터이니, 제발…."
냉한웅은 무릎 꿇고 애원하는 주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소리쳤다.
"꺼져 버려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인의 모습은 객점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냉한웅은 다시 흘낏 진강의 표정을 살폈다.
그 역시 저승 사자라도 본 양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냉한웅은 그에게 내심 사죄하였다.
'미안하오.
앞으로 계속 이 지역을 드나들며 장사해야 할 터이니,
후일의
보복을 피하게 해 주기 위해 부득이하게 저지른 일이외다.'
냉한웅이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이번엔 흰 눈썹이 귀밑까지 늘어진 노라마가 성큼 문 안으로 들어섰다.
"웬 소란인고?"
그가 화려하기 그지없는 금장가사(金裝袈裟)를 걸친 것으로 미루어,
포달랍궁 내에서도 신분이 상당할 듯싶었다.
냉한웅을 제외한 중인 모두가 얼른 꿇어 엎드렸다.
"각존(覺尊)이시여, 복을 내려 주소서!"
포달랍궁은 주지를 제외하고는 사대각존(四大覺尊)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
밀종무학과 불경을 깊이 깨달았다는 네 명의 존인들은
서장인들에게 있어서 신(神)과도 같은 존재였다.
노라마는 핏덩이로 변한 포달랍궁의 제자를 보자,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떤 악마의 소행이냐?"
객점의 그릇들이 진동을 일으키며 떨어져 깨어졌다.
하지만 중인들은 짐작하고 있었는지, 엎드린 순간부터 양 귀를 두 손으로 꽉 틀어막고 있었다.
냉한웅은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불 같은 성격이로군.'
이를 본 노라마가 더욱 쩌렁쩌렁한 사자후(獅子吼)를 토해 냈다.
"오호라, 바로 네놈의 짓이었구나!"
선반 위에 남아 있던 그릇들이 쩍쩍! 금이 그어질 만큼 대단한 음파(音波)였다.
냉한웅도 버럭 폭갈을 터뜨렸다.
"그렇다!"
순간, 바닥에서 흙먼지가 일며 엎드려 있던 중인들이 울컥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욱!"
"우욱!"
노라마의 두 눈에서 횃불과 같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무명지배(無名之輩)는 아닐 터인즉, 정체를 밝혀라."
"정사마천궁주!"
노라마는 냉한웅의 명호를 듣고도 별로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긴 하군.
하나, 철라각존(鐵羅覺尊)에게 걸려든 것을 후회해야 될 것이다."
철라각존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육박해 들었다.
"천불참육(千佛斬戮)-!"
동시에 연속 삼 장을 가해 왔다.
위우웅-!
멀리서 천둥이 치듯 음향이 은은히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밀려오는 잠력 또한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급한 성격과 크게 다른 지극히 온화한 무공이었다.
냉한웅도 마주 삼 장을 발출하였다.
"천불폭영(千佛暴影)-!"
반대로 그의 장심에서 격출된 잠력은 성난 파도와도 같았다.
쿠르르릉-!
양측 잠력이 충돌하자,
묵중한 울림이 생겨나며 식탁과 의자가 마구 부서져 천장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중인들의 몸은 별로 흔들리지 않았으며, 작은 상처조차 생기지 않았다.
천축 불문무공답게 신비막측할 뿐만 아니라, 깊은 자비심이 배어 있었으니….
겁을 먹은 중인들은 한 명 남김 없이 객점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막상막하(莫上莫下).
일 장의 격돌은 누가 우위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이 때, 천라각존의 두 눈이 귀신을 본 듯 휩떠졌다.
"본궁의 천불신공(千佛神功)을 네가 어찌 아느냐?"
분명 포달랍궁의 비전지학(秘傳之學)이었다.
모방한 것이 절대로 아닌….
냉한웅도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갈 길이 급한데, 이런 강적을 만나다니….'
그는 묵묵히 대나이신법을 전개해 천라각존의 등 뒤로 돌아갔다.
하지만 천라각존도 절세고수들과 수없이 겨뤄 온 백전노장이 아닌가?
상대의 모습이 유령처럼 사라진 순간, 빙글 몸을 돌리며 쌍장을 휘둘렀다.
"천불패마겁(千佛覇魔劫)-!"
이번엔 청천벽력과 같은 굉음이 장중을 진동했다.
노도와 같은 경력이 좌충우돌 휘몰아쳤으며,
천지가 흑암(黑暗)에 싸여 마치 만겁(萬劫)의 윤회(輪廻)가 이루어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냉한웅의 입에서도 일갈이 터졌다.
"탕마보리(蕩魔菩提)- 보리무상(菩提無上)- 무상범천(無上汎天)-!"
우수(右手)에 쥔 파천혈륜으로 무상검도(無上劍道)인
반야보리검법(般若菩提劍法) 전삼초(全三招)를 연속으로 전개한 것이다.
하지만 너무도 빨라 동시에 펼쳐진 듯싶었다.
아니, 사실 탕마보리(蕩魔菩提)와 보리무상(菩提無上)은 좌수와 우수가 동시에 펼친 것이다.
좌수(左手)를 검 대신 사용한 것만이 다를 뿐….
신검합일(身儉合一).
탕마보리의 초식은 천불장력을 흔들어 놓았고,
보리무상의 이기어검강(以氣御儉慷)은 약화된 천불강기를 갈랐다.
그리고 마지막 초식인 무상범천…
즉 무형어검강(無形御儉慷)이 상대의 호신강기마저 깨뜨린 순간,
좌수가 장법으로 변화해 천하에 부수지 못할 것이 없다는 사극무형강(邪極無形 )을 뿜어 냈으니….
듣기만 해선 결코 믿어지지 않는 분심공(分心功)이 아닌가?
천지개벽(天地開闢)하는 광음(狂音)이 인 후에 객점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자리에 금강불괴지체를 연성한 천라각존의 몸만이 균열된 처참한 형태로 나자빠져 있었다.
쩍쩍 갈라진 살 틈으로 허연 뼛조각들과 더불어 검붉게 덩어리진 핏덩이들이 밖으로 드러나 있는…
더없이 끔찍스런 종말이었다.
그럼 냉한웅의 모습은 어째서 보이지 않는가?
자신이
만들어 낸 처참한 광경에서 한시바삐 벗어나고 싶었는지,
아니면
급한 볼일로 확인할 겨를이 없었는지… 본인만이 알 일이었다.
천축(天竺)의 보리밀사(菩提蜜寺).
누덕누덕 기운 옷을 걸친 비쩍 마른 사내가
서산으로 기우는 태양이 잔양(殘陽)을 뿌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등에 업고 걸어왔다.
사원(寺院) 앞에 이른 그는 거침없이 문을 두드렸다.
"소걸군이 찾아왔으니, 문을 여시오. 빨리 열란 말야."
끼익-!
천 년(年)을 두고도 열리지 않을 듯싶은 고색 짙은 문짝이 빠끔히 열려졌다.
안에서 소녀의 앳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백일기."
"……."
"나는 그와 절친한 친구요."
소녀의 음성이 약간 차가워졌다.
"거짓말! 그분에게는 남자 친구가 없어요."
순간, 냉한웅은 가슴이 뜨끔했으나 능청스런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어찌해 자신의 행방을 가르쳐 주었겠소?"
"……."
상대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냉한웅은 쐐기를 박았다.
"소걸군이 왔다면 기뻐 맨발로 달려나올 게요.
이렇게 문전박대를 계속한다면, 그냥 돌아가겠소."
그러자 문이 조금 더 열리며 열댓 살쯤 되어 보이는 비구니가 얼굴을 비추었다.
"따라오세요."
그녀는 재빨리 등을 보이며 앞서 걸었다.
가녀린 목의 선과 날씬한 허리로 이어지는 능선이 제법 균형이 잡혀 있었다.
냉한웅은 실실 웃으며 그녀의 뒤를 빠싹 따랐다.
발길에
끌리는 치맛자락은 구름을 생각하게 하고,
얼굴은
꽃을 닮아 더 어여쁘구나.
봄바람
살며시 난간을 스치는데,
이슬도
꽃처럼 짙어 곱기만 하다.
군옥산
산머리에 못 만날 양이면,
요대
휘영청 밝은 달 아래 거닐 때라도 만나 보리.
슬슬 희롱까지 해 대자, 비구니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졌다.
너의 농염한 자태는 흡사 향그러운 이슬 같아라.
무산에 비 머금은 구름만 떠돌아 홀로 애끓노니….
더 참지 못하겠는 듯 그녀가 홱 고개를 돌려 노기 띤 얼굴로 노려보자,
냉한웅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보리밀사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비구니는 그를 선방(禪房)으로 안내한 후, 조용히 합장(合掌)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걸군은 그녀를 웃길 요량으로 원숭이 흉내를 냈다.
"끽끼익… 주인님께서 먹여만 주신다면 평생이라도… 끼익…!"
비구니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물러가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설마, 팽낭자도 저렇게 변해 버리진 않았겠지?'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선방 안을 맴돌았다.
실내는 별 장식이 없었으나, 먼지 한 점 발견하기 어려울 만큼이나 깨끗했다.
향 한 개비 탈 만큼의 시각이 흘렀을까?
콩콩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사르르 열렸다.
순간, 냉한웅은 호흡을 멈췄다.
"흡!"
비구니(比丘尼),
그녀의 용모는 냉한웅이 여지껏 본 어느 미인들 중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다.
천하의 어여쁨은 모두가 그녀의 소유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 절륜한 미모를 뭐라 표현할 수가 있을까?
경국지색(傾國之色), 화용월태(花容月態) 따위의
미인을 표현하는 말들은 오히려 그녀를 욕되게 할 뿐이었다.
소연군주 같은 절세미녀조차도 비교가 안 될 정도였으니….
특히 그녀의 두 눈(目)!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순결한 것들의 정화인 듯싶었다.
영롱한 그 눈빛을 대하면 자신이 통째로 흡수되어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삼켜 버리고 싶은 충동을 일게 하는 조그만 입술이 살짝 석류와 같은 이빨을 드러냈다.
"일기를 찾아오셨다고요?"
그제서야 흠칫 냉한웅은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다.
하지만 말투는 여전히 건방졌다.
"미(美)의 정화(精華)라 할 수 있군.
그러나 애석하게도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아.
이것은 음양교합(陰陽交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
비구니의 짜증스런 음성이 그의 말을 끊었다.
"밀니는 시주께 일기를 찾아오셨느냐고 물었소이다."
하나, 냉한웅은 계속 딴청을 부렸다.
"소생은 소걸군이라 하오. 중원의 강호인들은 신기묘산이라 부르고…."
또 시작이었다.
한 번 입을 열면 닫혀지지 않은 고질병(痼疾病).
이상스럽게도 소걸군으로 화신하면 냉한웅 자신조차 말리기 어려웠다.
비구니는 혜지가 번뜩이는 눈망울로 그를 주시하였다.
"밀니는 천봉(天鳳)이라 하오이다."
더 이상 묻지 않음은, 소걸군이 백일기의 친구가 아님을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천봉밀니… 법명도 참으로 아름답구려. 하하하…!"
그가 황제라도 된 양 거드름을 피우자, 천봉밀니는 은근히 밉살맞은 생각이 들었다.
곤경에 빠뜨리기로 작정한 천봉밀니는 화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일기와 절친한 사이라고요?"
"물론이오. 소생의 여인을 그 친구에게 맡길 정도였으니까."
"당신이 팽낭자를 일기에게 맡겼다고요?"
소걸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팽낭자는 틀림없는 내 여인이니, 돌려받아야만 하겠소."
천봉밀니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자신의 죄를 뉘우친 건가요?"
"죄라니? 소걸군은 여지껏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소이다."
냉한웅이 당당하게 대꾸하자, 천봉밀니는 얼굴 가득 노기를 띠었다.
"당신은 정말 뻔뻔스럽기 짝이 없군요.
팽낭자는 악랄한 점혈법(點穴法)에 의해 산송장처럼 변해 있었어요. 그게 당신의 짓 아닌가요?"
일순, 냉한웅의 신형이 휘청였다.
곧 자세를 꼿꼿이 세웠지만 창백해진 안색은 감출 수가 없었다.
"……."
그는 격랑(激浪)처럼 가슴에 부딪치는 회한(悔恨)을 억누르느라 입을 열지 못했다.
천봉밀니는 반쯤 넋 나간 표정으로 서 있는 그에게 결정타(決定打)를 먹였다.
"정사마천궁주! 당신 같은 악한에게 팽낭자를 돌려줄 수 없어요."
냉한웅의 전신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그걸 어… 떻게…?"
천봉밀니는 배시시 웃었다.
얄밉도록 사랑스런 모습이었다.
그녀가 무슨 방법으로 소걸군이 정사마천궁주임을 알아 냈단 말인가?
충격은 오히려 냉한웅의 정신을 일깨웠다.
어느 새 그의 얼굴에 소걸군 특유의 장난기 어린 표정이 물결쳤다.
"거참, 재미있는 생각이군.
소걸군은 이제까지 이토록 장난 잘 치는 상대를 만난 적이 없었소. 이히히히…!"
천봉밀니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자신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난 상황에서도 우겨 대다니…
관을 보기 전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내군.'
그러나 냉한웅의 내심은 대해에서 폭풍을 만난 일엽편주 마냥 흔들리고 있었다.
뒤가 구린 그는 재빨리 화제를 바꿔 큰소리쳐 댔다.
"백일기는 뭐하는 거야?
친구가 수천 리 길을 달려왔는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천봉밀니는 냉한웅의 불룩한 가슴을 보며 중얼거렸다.
"일기는 중원에 갔어요."
냉한웅은 그녀의 시선이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무슨 일로…?"
"……."
그녀가 질문에 대답 없이 계속 자신의 가슴만을 바라보자,
냉한웅은 야릇한 느낌과 놀림을 당하는 듯한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당신은 출가한 여인의 몸으로 어찌 외간 남자의 품을 그리도 살피는 거요?"
천봉밀니가 피식 실소를 흘렸다.
"본인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으면서…
천봉은 범인(凡人)의 것과 다른 눈을 지니고 태어났어요.
어릴 적에 천안통(天眼通)이라 불린 적도 있지요."
확실히 그녀의 눈빛은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품안의 파천혈륜을 본의 아니게 보았단 뜻인데…."
결국 냉한웅이 맥 빠진 음성을 내뱉고 말자, 천봉밀니는 까르르 교소를 터뜨렸다.
그녀의 화용(花容)에 어린 웃음은 갈수록 신비를 더해 주었다.
냉한웅은 심중에 쌓인 번민과 갈등이 일시에 해소된 듯 느껴졌다.
하나,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뼛골마저 녹일 듯 하체로부터 솟는 엄청난 열류가 전신을 휘감았다.
가슴은 가슴대로 마구 울렁였다.
눈빛도 점차 흐려져 가기 시작했고….
이를 지켜보는 천봉밀니의 얼굴이 득의(得意)의 표정을 지었다.
'정사마천궁주도 별게 아니로군.'
다음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지워졌다.
냉한웅이 정기 어린 눈빛을 번뜩이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탈혼분심소공(奪魂分心笑功)을 구 성(成)에 이르도록 익히다니… 정말 대단하오."
그가 입까지 열어 비꼬아 대자, 천봉밀니는 아연실색했다.
더구나 명칭과 수위의 정도까지 알아 내다니…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뜻밖의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녀에게 냉한웅도 미소지어 보였다.
"우리 이제 서로 한 번씩 놀랐으니, 비긴 셈 아니오?"
불가사의(不可思議)의 마소(魔笑).
"……."
이번엔 천봉밀니의 눈빛이 점차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백일기가 중원으로 무엇을 찾아나선 거요?"
하지만 천봉밀니는 뜨거운 눈빛으로만 바라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냉한웅이 다시 한 번 미소지어 보이자, 드디어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하나, 새어 나온 것은 촉촉한 신음뿐이었다.
"아하…!"
그녀는 깊은 나락에 빠져드는 듯했지만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때, 냉한웅의 음성이 그녀의 고고한 자존심을 긁어 댔다.
"탈혼분심소공이 천하제일의 미공(美功)이긴 하나, 어찌 나의 선천적인 미소에 비할까?"
퍼뜩 정신을 차린 천봉밀니가 앙징맞게시리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소리쳤다.
"소걸군, 아니 정사마천궁주!
당신의 재주가 천지를 덮을 수 있다 해도, 으시댈 자격은 없어요."
앉아 소변 보는 동물의 소견머리가 얼마나 좁은데,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까?
얼마나 약이 올랐는지 두 개의 육봉마저 발끈 솟았다가 내려앉길 반복했다.
그녀의 외침을 들은 순간, 냉한웅의 가슴도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
"그… 건 무슨 뜻… 이오?"
말을 더듬는 그를 향해 천봉밀니는 파천혈륜보다 더 예리한 설검(舌劍)을 휘둘러 댔다.
"자신의 손으로 팽낭자를 죽이고서… 그래도 할 말이 있나요?"
"그럴 리가? 나는 그저 의식만 잃게 하려…."
"흥! 당신이 천하에서 아무도 풀 수 없는 독문수법을 사용한 것이 죽이려는 의도가 아니고 뭐예요?"
"설마… 정말로…?"
"솔직하게 가르쳐 주죠.
우리 보리밀사(菩提蜜寺)의 해혈(解穴) 수법이야말로 천하제일이에요.
당신의 수법쯤이야… 흥!"
냉한웅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지연이 살아만 있다면, 그녀의 발바닥을 혀를 핥으라 해도 사양 안 할 것이다.'
이런 변화를 눈치챈 천봉밀니는 비장의 절초를 사용해 설검(舌劍)의 위력을 높였다.
"당신은 너무도 여인을 몰라요.
특히 처녀들은 누군가에 의해 보호받고 위안받기를 위하죠.
그리고 더할 수 없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꿈을 남몰래 간직하고 키워 가지요.
하지만 그것이 파괴될 때는 죽음을 택하는 극단의 방법으로 고통을 벗어나기도 한답니다."
상대의 숨통을 단숨에 끊는 천하제일의 살초(殺招)!
냉한웅의 두 눈이 붉은 핏발이 섰다.
그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드디어 설검이 그의 심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팽낭자의 죽음을 확인시켜 줄까요?"
냉한웅의 신형이 휘청휘청 뒤로 물러섰다.
"지… 연…."
천봉밀니는 그의 심장을 조각조각 내 버리려는 듯 설검을 마구 휘저었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해 온 이의 손에 죽임 당한 여인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까요?"
냉한웅은 자신의 가슴을 마구 쥐어뜯었다.
"으흐흐… 그대를 내 손으로… 나도 곧 뒤따라가리다."
순간, 천봉밀니의 앙칼진 외침과 함께 백색 기류가 그의 심장 한복판을 강타했다.
"밀니가 당신의 소원을 풀어 드리겠어요!"
펑-!
가죽 공 터지는 폭음이 일었으나, 냉한웅은 한 마디 비명도 토해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양쪽 입가로부터 주르르 비릿한 선혈이 흘러내렸다.
냉한웅은 허공을 향해 울부짖었다.
"좋아, 좋아! 이 정도론 고통이 덜어지지 않아. 더 세게 쳐 주시오!"
천봉밀니는 경악했다.
'금강불괴지체이긴 하나, 결국은 살과 피로 이루어진 육신일 뿐이다.
한 자 두께 철판도 파괴하는 쇄혼파심장(碎魂破心掌)을 견디다니….'
천봉밀니는 삼 성(成)의 내력을 더해 사납게 후려쳤다.
무게가 실린 장력에 격중된 냉한웅이 둔중한 음향과 함께 퉁겨 나갔다.
문짝까지 부수며 방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그는 울컥 어린아이 주먹만한 핏덩이를 토해 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비명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런 냉한웅을 천봉밀니는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
투명하리만큼 깨끗한 눈동자엔 알 수 없는 감정이 물결쳐 흘렀다.
냉한웅은 휘청이며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삼 장은 허락해야 숨이 끊어지겠군. 그래도 팽낭자의 마음엔 보답 못할 듯싶소."
천봉밀니는 박속처럼 새하얀 이를 드러내 미소를 지었다.
하나, 탈혼분심소공은 아니었다.
"소문과 달리 당신은 너무도 순진하군요. 팽낭자가 당신을 용서할지도 모르겠어요."
'죽은 지연의 혼이 용서할 거란 말인가?'
비탄에 젖은 냉한웅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 순간 만 근 철퇴(鐵槌)로 후려치는 듯 끔찍스런 충격이 와 닿았다.
쾅-!
이건 완전히 폭발음이었다.
냉한웅은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혼절해 버렸다.
피화살을 뿜어 내며 공중에 붕 떠오른 신형이 한 바퀴 뒤집혀 그대로 지면에 처박혔다.
그러나 냉한웅의 호신신공은 참으로 놀라웠다.
진기를 끌어모으지 않아도 반사적으로 충격에 대응하는 묘용이 있었으니….
다시 말해, 정신을 잃어도 호신진기가 자연 발생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충격은 오히려 잃은 의식을 되돌아오게 했다.
그는 지옥의 형벌을 받는 듯 뼈 마디마디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견디며 입술을 움직였다.
"정말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소?"
말을 하려고 입을 열 때마다 굵은 핏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천봉밀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냉소를 흘렸다.
"그랬지요."
순간, 냉한웅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그렇다… 가 아니고…?'
한 줄기 기이한 한류(寒流)가 단전(丹田)을 빠져 나와
빠른 속도로 십이중루(十二重樓)를 따라 돌기 시작했다.
사극무형강(邪極無形 ).
잔인사황의 무공 중에서 가장 강맹한 것으로, 그 살상력은 잔인귀염공(殘忍鬼閻功)을 능가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놀라운 묘용이 있으니,
아무리 심한 상처를 입어도 숨만 붙어 있다면 빠르게 치유가 되어 살아난다는 점이다.
그는 운공을 하며 동시에 입술을 움직였다.
"팽낭자가 자결할 때 백일기는 무엇을 하였소?
여인을 제 몸보다 더 아끼는 자가 어찌 그리 내버려둘 수가 있었단 말이오?"
천봉밀니는 득의에 찬 시선을 던졌다.
"일기는 할 일이 너무도 많아요.
보리밀사의 정박심오(精博深奧)한 무학과 천봉밀니(天鳳密尼)의 탈혼분심소공을
중원에서 시험해 볼 작정이니까요."
체내의 한류가 용이 꿈틀거리듯 등줄기를 따라 올라가는 독맥(督脈)을 지난 다음,
몸의 전면 가슴 부위를 곧바로 내려오는 임맥(任脈)마저 순조로이 통과해 다시 단전(丹田)으로 돌아왔다.
냉한웅은 일부러 힘겨운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천봉, 이것으로 나를 제압했다고 생각하오?"
천봉밀니는 귀엽게 생긋 웃었다.
"물론이지요. 당신은 밀니의 도움 없인 살아나지조차 못할 만큼 중상을 입었잖아요."
갑자기 냉한웅의 음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착각이외다."
뭔가 심상치 않은 변화를 느낀 천봉밀니가 눈망울을 데르륵 굴렸다.
"그건 무슨 뜻이지요?"
조금 전 냉한웅도 이렇게 묻지 않았던가?
찰나, 냉한웅이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방금 전의 죽어 가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그대가 천안(天眼)을 지녔다고? 제발 웃기려 하지 좀 마시오."
냉한웅은 너무 놀라 입만 벌린 채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계속 이죽거렸다.
"내가 파천혈륜을 지녔다고 해서 정사마천궁주로 짐작한 것뿐, 다른 아무런 중거도 없지요?"
천봉밀니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이로 인해 당신이 정사마천궁주임이 더욱 확실해졌어요.
그가 아니라면 어찌 밀니의 삼 장을 몸으로 받고도 무사할 수 있겠어요?"
냉한웅은 자신의 가슴을 탁탁 두드렸다.
"내가 파천혈륜을 지닌 것은 알아 냈어도,
대귀선의 천망으로 만든 호신의를 입었다는 건 모르고 있었군.
그러고도 무슨 얼어 죽을 천안(天眼)?"
그가 천망의(天網衣)를 입었음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보의는 장력의 충격을 크게 감소시켜 주는 효능을 지녔지, 완전히 해소해 줄 수는 없었다.
천봉밀니가 누구인가?
공력이 삼 갑자에 이르고 무학 역시 신비경에 이른 고수 중의 고수가 아닌가?
금강불괴지체를 지닌 냉한웅이 아닌, 일반 고수가 입고 있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삼 장이 아니라 단 일 장에 심맥이 끊겨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미처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
"천망도 정사마천궁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냉한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부인하다가는 오히려 의심을 살 위험이 있었으므로….
"자세히도 알고 있군요."
"그렇다면 당신이 정사마천궁주가 아니라 해도, 그와는 깊은 관련이 있겠군요?"
"글쎄올시다."
냉한웅은 다시 모호한 대답으로 얼버무렸다.
"조금 전에 흘린 그 많은 피는 어찌 된 거죠?"
핵심에서 벗어난 질문에 냉한웅은 김새는 느낌이었다.
'제기랄, 별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묻는군. 이래서 계집들 턱엔 수염이 안 나는 모양이야.'
속으로는 이렇게 성(性) 차별적인 욕설을 퍼부었지만, 전혀 내색 않고 말을 꾸며 대었다.
"소걸군의 별호가 신기묘산이오.
이는 속임수에도 능하다는 의미이니, 까짓 피 좀 흘려 보이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소."
그럼 여지껏 속임수에 놀아나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해 댔다는 건가?
천봉밀니는 분노에 찬 일갈을 터뜨렸다.
"어쨌든 이 곳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욧!"
천봉밀니가 손뼉을 딱딱 두 번 쳤을 뿐이었다.
홀연, 기다렸다는 듯이 희끄무레한 인영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늙고 젊은 수십여 명의 비구니들이었다.
그녀들은 냉한웅을 가운데 두고 둥굴게 둘러쌌다.
천봉밀니는 준엄하게 꾸짖었다.
"당신이 소걸군이든, 정사마천궁주이든, 또 다른 누구이든 상관없소.
여인을 학대하고 능멸한 죄는 능치처참을 해도 모자랄 대죄예요."
냉한웅은 장난기 어린 표정을 흔적 없이 지웠다.
"천봉, 당신은 끝까지 솔직하지 못하군요.
중원무림을 삼키는데 가장 큰 방해가 되는 인물을 처치하려 한다고 왜 말 못하오?"
그리고 준엄히 꾸짖기까지 했다.
"부처님이 가로되 색신(色身)은 무상(無相)이요, 무상(無相)이 곧 고달픔이라 했소.
적을 제압하는 것은 어럽지 않으나 자기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탐(貪), 진(瞋), 치(癡)의 삼독(三毒)이라는 대적을 극복하는 것은 비할 데 없이 어려운 법이외다.
하나…
천봉!
그대는
이 갑자가 넘게 불문에 몸을 담았지 않은가?
어이하여 아직도 삼독의 구덩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천봉밀니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극악한 자 같으니!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구나."
진심인 듯 느껴졌다.
일순 냉한웅의 표정에 곤혹의 기색이 어렸다.
그는 처량한 음색으로 중얼거렸다.
"누가 날 이해하겠는가? 나 자신조차도 후회하는 일을…."
천봉밀니 역시 그의 진심을 느낀 듯 눈가에 미미한 경련이 일었다.
"당신,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나요?"
하지만 곧 살기 띤 표정으로 바뀌었다.
"진심이라 해도, 당신이 지은 죄는 절대로 용서 못해요."
냉한웅도 코웃음쳤다.
"흥! 당신은 용서 못해도 팽낭자는 틀림없이 용서해 줄 거요."
천봉밀니는 더 이상 상대할 필요도 없다는 듯 싹 고개를 돌렸다.
"염환원무(閻幻圓舞)-!"
그녀의 외침이 떨어지자, 둥근 원이 반으로 갈라지며 각기 반대방향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서서히… 갑자기 빠르게, 더욱 서서히….
원무를 추듯 두 개의 고리가 좌우로 빙글빙글 돌았으며,
때로는 전후(前後)를 오가기도 했다.
하나, 냉한웅은 새외천무경을 달달 외운 터였다.
'보리밀사(菩提蜜寺)의 염환무절진(閻幻舞絶陣)은
소림의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에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이 진은 상생상극(相生相剋)의 원리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니,
중극(中極)이 교차하는 때를 택해 파해하여야 하며…
그 속도는 상대의 움직임보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아야 한다.'
냉한웅은 곧장 중부(中孚)를 딛고 기제(旣濟)로 옮겨 갔다.
창-!
어느 새 꺼내 뽑아 든 파천혈륜이 청량한 금속성(金屬聲)을 일으켰다.
"잔폭(殘爆)-!"
도강(刀 )을 펼쳐 무려 삼백육십 개(個) 방위를 엄밀히 방어하고,
같의 수의 방위를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잔혼도법(殘魂刀法) 최후의 초식.
이 초식을 완전히 익힌 이를 가리켜 도신(刀神)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거라 했던가?
"으아악…!"
야적을 찢는 단말마의 비명이 폭죽 터지듯 사방에 흩뿌려졌다.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나뒹구는 보리밀사의 비구니들.
그녀들의 가슴과 허리, 목 등에서 시뻘건 핏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천봉밀니는 악몽을 꾸고 있는 듯 느껴졌다.
제자들이 일시에 처참한 죽음을 당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자가 염환원무의 파진법(破陣法)을 어떻게…?'
염환무절진은 보리밀사의 비진(秘陣)으로 중원은커녕
천축에서조차 견식한 이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 공세의 형태로 변화하기 직전, 정확히 급소(急所)에 뛰어들다니….
이는 신산기문지학(神算奇門之學)에 능통하다 해도 도저히 설명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보리밀사 창건 이래 경험한 적이 없는 참극을 본 그녀는 이성을 잃었다.
"이 악마, 죽여 버리겠다!"
천봉밀니는 사납게 외치며 염환원무에 합세했다.
그러자 살아남은 비구니들도 흩트러진 진을 바로잡아 다시 맹공을 가했다.
두 개의 고리를 지녔던 대염환원무(大閻幻圓舞)가 고리 한 개만의 소염환원무(小閻幻圓舞)로 바뀌었다.
하지만 천봉밀니가 가세하자, 그 위력이 오히려 배가되었다.
파해법을 꿰뚫고 있는 냉한웅은
귀신 뺨치고도 남을 만치 신묘한 대나이신법을 펼쳐 제 집 드나들 듯했다.
츠츠츠츠-!
그의 신형이 번뜩일 적마다 파천혈륜의 검기가 목숨을 앗아 갔다.
"윽!"
"아아악……!"
생을 마감하는 부르짖음이 구슬을 꿰듯 이어졌다.
천봉밀니도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저 자는 틀림없이 정사마천궁주다.
그렇다 해도, 소문보다 무공이 훨씬 더 고강하지 않은가!'
후회하는 사이에 또 한 명의 제자가 나뒹굴자, 두 눈에 불꽃이 일었다.
'불문의 비구니들에게까지 이런 독수를 쓰다니…'
그녀의 흑진주 같던 눈동자가 차츰 짙은 녹광(綠光)을 띠기 시작했다.
냉한웅은 무공을 예측키 어려운 천봉밀니만을 교묘히 피해 가며 살수를 썼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경계를 소흘히 하지 않았던 터라, 즉각 이런 변화를 발견했다.
'녹풍와선기(綠風渦仙氣)! 저것을 시전할 경우, 공력이 반 이상 소실될 텐데….'
녹풍와선기는 보리밀사의 무학 중 가장 패도적인 위력을 지녔다.
그러나 무림인에게 있어 공력은 목숨과도 같은 것 아닌가?
이런 이유로 인해 목숨이 경각에 달한 위기가 아니면 사용치 않는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수법이었다.
냉한웅이 내심 긴장하고 있을 때.
휘익- 휙휙-!
무수한 파공성이 일며 인영(人影)들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흑의복면인들과 다색(多色) 의복을 걸친 인물들로서 그들의 수가 이백도 넘을 듯했다.
객사 앞, 백여 장에 달하는 드넓은 공터가 꽉 찬 듯 느껴질 정도였다.
불사천마교와 고루대교,
만신각의 인물들이 동시에 나타나자 냉한웅은 두려움보다 의혹이 앞섰다.
'사전에 이미 약속되어 있었단 말인가? 내가 이 곳에 올 줄은 어찌 알고…?'
내심 놀라기는 천봉밀니가 더했다.
'이 자들은 본사에 지봉밀니(地鳳蜜尼)와 인봉밀니(人鳳蜜尼)가 없는 걸 알고 침입한 게 틀림없다.
이 난국을 무사히 넘길 수가 있을까?'
불쑥 흑의복면인이 나섰다.
"불사천마교 부교주인 불사일마(不死一魔)다."
다음엔 금고루가 나섰다.
"고루대교 부교주인 강시혈제(彊屍血帝)다."
마지막으로 현란한 의복의 노인이 나서자, 곁에 시립해 있던 중년인이 외쳤다.
"만신각주(卍神閣主)시다. 경배(敬拜)하라."
하나, 칠십여 명쯤 되는 울긋불긋한 차림새의 인물들만 잽싸게 무릎을 꿇었을 뿐이었다.
만신각에선 삼대각주의 지위가 가장 높았으며, 그 중 첫째가 만신각주였다.
냉한웅도 히죽 웃어 보이며 외쳤다.
"신기묘산 소걸군이시다. 바닥에 엎드려 기어라."
다음 순간, 만신각주의 코웃음이 뒤따랐다.
"정사마천궁주이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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