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명부사혼전(冥府死魂殿)
휘이익-!
냉한웅이 짧은 휘파람을 불자, 별실의 창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한 인영이 스며들었다.
"천살령주이옵니다."
패천군 뇌웅이었다.
냉한웅은 예전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가 지시를 내렸다.
"이 곳 매화림은 예측할 수 없는 적들이 곳곳에 매복해 있소.
천살령을 내려 그들 중 반항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단토록 하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매화원(梅花院)에서 귀빈 대우를 받고 있는 자에 대해 알아 냈소?"
뇌웅은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매화원은 안에서 잠그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호원무사들 따위를 처리하는 거야 대수로울 것 없지만…."
이 때, 미풍이 일며 또 하나의 인영이 그의 곁에 내려섰다.
"천신령의 만통자이옵니다."
바쁘게 돌아다닌 듯 상기된 표정의 그는 정중히 읍(揖)한 후 보고를 시작했다.
"수하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지금 매화원에 기거하고 있는 인물은 천축승(天竺僧)이라 합니다."
일순, 냉한웅의 눈빛이 흔들렸다.
"……."
"또한 이 곳의 귀빈은 천하 미녀들 중 원하는 여인을 마음대로 선택해 즐길 수 있다고 합니다."
"미녀들을 납치해 온다는 뜻이군.
강호명화대회에서 뽑혔던 여인들이 실종된 사건도 이 곳과 무관하지 않을 게요."
"수하도 그렇게 짐작하고 있습니다. 한데 천축승은 정말 간 큰 작자인 듯 싶습니다."
"대체 누구를 선택했기에…?"
"평성왕(平城王) 주붕원(朱朋元)의 단 하나뿐인 금지옥엽을 요구했습니다."
"뭣? 그 중 놈이 감히 황족(皇族)인 소연군주(素蓮君主)를…!"
냉한웅의 얼굴 근육이 푸들푸들 떨렸다.
이런 모습을 처음 본 만통자는 두려움과 함께 짙은 의혹이 일었다.
'천존께서 감정을 자제 못할 정도로 소연군주와 깊은 사이였다면, 천신령의 정보망이 놓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색다른 사연이 얽혀있단 뜻인데… 그것이 뭘까?'
쩍하면 입맛이라고…
은밀한 정보를 캐내는 일에 평생을 바쳐 온 만통자의 추리력은 천하에 따를 자가 없을 듯 예리하였다.
하나 자신이 신처럼 여기는 냉한웅이 천한 신분으로
대국사(大國寺)에서 소연군주(素蓮君主) 주예영(朱豫英)을 만나게 된 사연을 어찌 짐작인들 하겠는가?
냉한웅은 애써 음성을 가라앉혀 물었다.
"호위위사들의 어설픈 무공으론 막을 수가 없을 텐데… 지금 어찌 되었소?"
"어제
삼경(三更) 무렵, 궁 안에 침입해 납치해 간 모양입니다.
지금
성내(城內)가 발칵 뒤집어 졌습니다."
냉한웅의 두 눈에서 살광(殺光)이 폭사되었다.
"천살령주, 명을 다시 내리겠소. 이 곳에 있는 자들은 눈에 띄는 대로 모조리 주살하시오!"
그는 말을 마친 순간, 빙글 몸을 돌려 별실을 나섰다.
문 밖에는 이미 서너 명의 사체(死體)가 나자빠져 있었다.
그의 신형이 미친 듯 매화원을 향해 질주했다.
'주예영… 만약 그대의 몸이 더럽혀졌다면… 아… 안 돼!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잠깐 사이에 석조건물(石造建物) 앞에 도착한 그는 일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거석(巨石)을 칼로 벤 듯 매끈하게 다듬어 둥굴게 쌓아올린 매화원은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작은 창문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환락의 장소라기보다는 수옥(囚獄)처럼 느껴지는 묘한 생김새였다.
이 때 석벽의 일부가 뒤로 밀려나 통로가 생기며, 그 안으로부터 대갈(大喝)이 터져 나왔다.
"웬 놈이 감히 금구(禁區)에서 어슬렁 거리느냐?"
이어 두 명의 금의청년이 뛰쳐나와 검을 겨누었다.
'좋은 기회를 놓쳤군.'
냉한웅은 내심 쓴 입맛을 다셨다.
석벽은 청년들이 나온 즉시 원래의 형태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금의청년 중 하나가 검끝으로 냉한웅의 옷자락을 툭 건드리며 물었다.
"내부인(內部人)이 아닌 자가 여긴 무슨 일로 왔느냐?"
순간, 냉한웅의 우수가 광원(光圓)을 그렸다.
"네놈들을 죽이러 왔다!"
마극혈강경(魔極血 經)의 폭뢰수(爆雷手).
수검(手劍)의 위력이 진검(眞劍)을 사용하는 것 못지않게 날카로웠다.
금의청년들의 무공은 일류고수들과 차이가 나긴 하지만, 그리 뒤지는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미처 느낄 사이없이 두 개의 머리가 동시에 목에서 분리되었다.
식도(食道)가 끊긴 입에서 무슨 비명이 나올 것인가?
냉한웅은 머리 잃은 몸이 허공에 붓질을 하듯 핏물을 뿌리며 쓰러지는 광경을 담담히 지켜보았다.
"이젠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석벽에 다시 통로가 생기며 세 명의 장발괴인이 뛰쳐 나왔다.
"어린 놈이 빨리 뒈지지 못해 안달이 났구나."
장발괴인들 중 가운데 있는 자가 까마귀 울부짖는 듯 고함쳤다.
냉한웅은 실망했다는 듯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대단한 고수들이 있는 줄 알았더니… 육혈(六血)이군."
그가 코앞에 버티고 있는 혈귀(血鬼) 음상군(陰相君), 혈전(血電) 손진악(孫震岳),
혈리(血狸) 맹환(孟幻)에게 큰 소리를 쳤으나 내심 조급했다.
일선(一仙), 이제(二帝), 삼옹(三翁), 사패(四覇), 오마(五魔), 칠기(七奇), 팔군(八君)과 더불어
현 무림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육혈(六血).
그들 개개인 모두 사도오종보다 무공이 최소한 두 단계 이상 높았다.
'육혈이 모두 모이기 전에 해치워야 한다.'
그는 천존선을 펼쳐 들었다.
"마존령(魔尊令)을 받들지 않는 자에겐 죽음뿐이다."
혈귀, 혈리, 혈전의 얼굴에 당황과 공포의 빛이 어렸다.
"헉! 천존선…!"
하나, 일순간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병기를 뽑아 들며 냉음을 터뜨렸다.
"정사마천궁주가 애송이란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이야말로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태산이 크게 울며 움직여서 알아보니 쥐 한 마리 뿐이로군."
"때를 아는 자는 영웅이라 했다. 정사마천궁 따위가 뭐 그리 대수인가."
오히려 놀림을 당한 냉한웅은 분기탱천하여 냉갈(冷喝)을 터뜨렸다.
"쥐새끼 같은 놈들이 정녕 때를 모르고 날뛰는구나!"
동시에 천존선이 칼날 같은 암경을 일으켰다.
쉬윙- 위윙-!
경력을 동반한 기류가 세 갈래로 나누어지자, 혈귀 음상군은 쇄겸도(鎖鎌刀)를 마주 휘둘러 부딪쳐 갔다.
혈전 손진악의 협인장창(狹刃長槍)과 혈리 맹환의 상문봉(喪門棒)도 피하려 들지 않았다.
콰광-!
수천 근 화약이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 여파로 인해 두 걸음 물러난 냉한웅의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짐작했던 것보다도 더욱 강하구나.
쌍수합공(雙手合攻)의 수법을 전개하지 않으면 빨리 끝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겁(劫)-멸(滅)-!"
우수(右手)의 천존선(天尊扇)이 칠 초 선법 중 천존광폭겁(天尊狂爆劫)을,
좌수(左手)가 잔양수라지(殘陽修羅指)의 뇌멸(雷滅) 수법을 동시에 펼친 것이다.
순간 방원 십 장 이내가 짙은 안개 같은 흙먼지에 휩싸였고
그 안으로부터 연신 가공할 폭음이 울려 퍼졌다.
흙먼지가 어느 정도 가라앉아 깊은 내공을 지니지 않은 사람이라도 확인할 만큼 시야가 트였을 땐,
그 자리에 냉한웅만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창자가 찢기는 고통을 느끼며 죽어 가는 삼혈(三血)을 무심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래도 본 궁(宮)을 적대시한 너의 어리석음을 후회하지 않겠느냐?"
혈귀가 가까스로 입술을 움직였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본 전(殿)을 당할 수는 없을 게다."
냉한웅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失笑)를 흘렸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까지 발악을 하다니, 미쳤다고 밖엔 볼 수 없군.
그토록 막강한 조직이라면 본 궁이 두려워 정체를 밝히지 못할 것도 없겠지?"
그의 격장지계(激將之計)에 혈귀의 흐릿해진 동공이 부르르 떨었다.
"명(冥)… 부(府)… 사혼(死魂)… 전(殿)…."
또 하나의 겁난이 도래하고 있었다.
냉한웅은 매화원을 구석구석 살폈지만
밖에서 석벽으로 된 문을 열 수 있는 장치 같은 건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안에서 기관을 작동하기 전엔 방법이 없겠구나.'
이 때 문득 벌집처럼 손가락만한 크기의 둥근 구멍이 무수히 나 있는 석벽 윗쪽에 시선이 가 닿았다.
'환기구(換氣口)인 듯싶은데….'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형을 날렸다.
한 마리 거미처럼 석벽에 달라붙은 그는 귀를 구멍에 대고 천리지청술(千里地聽術)을 펼쳤다.
귀에 익은 여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하나 그것은 예전에 대국사에서 냉한웅이 꿈결처럼 들었던 감미롭고 여유 있은 음성이 아니었다.
"아… 안… 돼!"
무엇이 안 된다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소연군주임은 확실했다.
사내의 걸찍한 음성이 냉한웅의 가슴에 노화(怒火)를 질러 댔다.
"귀여운 것! 이 부처님의 솜씨를 한 번 보고나면 제발 떠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할 게다.
나중에 후회말고 어서 이리 오너라."
냉한웅의 심정은 안도(安堵)와 초조(初潮), 두 가지 감정이 뒤얽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아직은 당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곧 당하게 될 낌새이니….'
순간, 그의 두 손 손가락이 석벽을 파고들었다.
이어 그의 신형도 따라 조금씩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유중강(柔中强) 강중유(强中柔).
강함과 부드러움을 함께 지니고 있는 무상보리신공(無上菩提神功).
분자결(分字訣)과 탄자결(彈字訣)을 번갈아 사용,
두께를 짐작할 수 없는 석벽을 녹이듯 조금씩 조금씩 부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매화원 내부는 자금성(紫禁城) 내 황제가 기거하는 곳보다도 더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방(房).
그 곳은 분명 실내였으나 실내가 아니었다.
바닥엔 녹색 잔디가 두툼한 융단처럼 깔려 있고
각종 진귀한 화초와 과실나무가 탐스런 열매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대체 어디로부터 햇살을 받아들인 걸까?
아마도 천장을 개폐(開閉)시키는 기관이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한가운데에는 수정(水晶)처럼 맑은 연못이 있었으며
그 위에는 정자(亭子)와 이어진 반월(半月) 모양의 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정자 안에는 홍비단(紅緋緞)으로 만든 두툼한 보료가 깔려 있었다.
양 볼이 축 쳐진 뚱보화상이 벌거벗은 몸을 드러낸 채 보료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생전에 극락의 구경을 시켜 주려는데, 왜 그리 앙탈을 부리느냐?"
음성에 짜증이 실려 있었다.
다음 순간, 그의 육중한 살덩이가 둥실 허공에 떠올라 소연군주를 향해 날았다.
"어멋!"
소연군주가 황망히 몸을 움츠렸다.
뚱보화상은 가랭이 사이에 달린 거대한 물건을 그녀의 눈앞에 갖다 댔다.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즐거움을 맛보여 주마.
하나 원주의 말에 의하면 납치되 온 미녀들에게 실혼단(失魂丹)을 먹여
이 곳에서 있었던 일을 까마득히 잊게 한다더군.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민첩하게 소연군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놔 줘. 제발…!"
소연군주의 비명이 풍악 소리로 들리는지, 그는 더욱 즐거워했다.
"으흐흐흐… 팔팔 뛰는 생선이 더 맛이 있지.
이 부처님께선 앙탈부리는 계집을 더욱 좋아하느니라."
그의 솥뚜껑 같은 손이 덥썩 소연군주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찌이익-!
소연군주의 궁장이 걸레처럼 몸에서 찢겨 나갔다.
뚱보화상의 입 안 가득 군침이 고였고
입술 밖으로 새어 나온 그것은 소연군주의 흰사슴(白鹿) 같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소연군주는 전신에 오싹 소름이 일었다.
"악!"
그녀는 힘을 다해 발버둥쳤으나,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뚱보화상은 대소(大笑)를 터뜨리며 속옷마저 사정없이 잡아뜯었다.
순간, 수밀도처럼 탐스러운 두 개의 육봉(肉峰)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는가?
"으흑흑…!"
소연군주가 절망과 수치심에 울음을 터뜨렸지만,
이는 뚱보화상의 음욕(陰慾)만을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으흐, 거참 맛있게 생겼군."
뚱보화상이 게걸스럽게 침을 줄줄 흘리는 입으로 유두(乳頭)를 삼키려는 찰나….
펑-!
공기와 강력한 기류가 충돌하는 듯한 굉음과 엄청난 양의 석분(石粉)이 실내를 휘감돌았다.
동시에 한 인영(人影)이 날아들며 천존선이 무지개 같은 광원(光圓)을 그렸다.
"천존파황무(天尊破荒霧)-!"
순간, 뚱보화상의 거구(巨軀)가 바람개비처럼 고속회전을 하여 가볍게 방원 밖으로 벗어났다.
실로 놀라운 반응과 기이하기 짝이 없는 신법이었다.
냉한웅도 어느 정도 예측했던 일이지만 내심 크게 놀랐다.
'우웃! 이 정도일 줄은….'
하지만 뚱보화상은 그의 암수(暗手)에서마저 벗어날 수는 없었다.
소리가 없고(無音), 형태가 없으며(無形), 흔적이 남지 않는다(無痕)하여
삼무지(三無指)라고도 불리우는 잔양수라지(殘陽修羅指).
우수(右手)의 천존선이 휘둘러짐과 거의 동시에 좌수가 섬전(閃電)과 같은 지풍을 쏘아 댄 것이다.
"끼아악!"
마치 괴수의 울음을 연상케 하는 비명….
냉한웅은 뚱보화상의 이마 한복판인 신정혈(神庭穴)에서
세차게 뿜어져 나온 혈전(血箭)을 덮쳤으나 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금의(錦衣)가 혈의(血衣)로 변하도록 내버려두며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갈수록 상대하기 어려운 적을 맞이하게 되는군.
급습(急襲)을 가하지 않았더라면 힘겨운 대결을 벌였을 것이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소연군주의 눈동자가 꿈을 꾸는 듯 영롱한 색채를 띠었다.
'어쩜 저토록 잘 생겼을까?'
하체만을 겨우 가린 자신의 행색마저도 깨닫지 못한 채 정신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고개 돌린 냉한의 시선과 마주쳤다.
순간, 냉한웅의 양 볼에 홍운(紅雲)이 띄워졌다.
"군주, 의복을…."
계면쩍은 듯 떠오른 미소!
신비롭기까지 한 표정은 소연군주의 혼백을 완전히 앗아가 버리고 말았으니….
"아…!"
앵두 같은 입술을 비집고 신음과 같은 탄성이 흘러 나왔다.
그녀가 넋 나간 듯 시선을 떼지 않자, 냉한웅은 전신이 화끈 달아올랐다.
'발가벗은 소연군주는 부끄러움을 타지 않는데, 왜 옷 몇 겹 껴입은 내가 부끄러워지는 거지?'
뜨거운 시선을 견디기 어려워진 냉한웅은 몸을 돌려 이 곳 저 곳을 살폈다.
"문을 여는 장치가 있을 텐데…."
위쪽에 이미 커다란 구멍을 내놓았는데, 무슨 문이 필요하단 말인가?
황동(黃銅)으로 만든 고리를 발견한 그는 주저없이 잡아당겼다.
우웅-!
미약한 기관음과 함께 빠른 속도로 일부 석벽이 밀려나며
실외의 바람과 저녁노을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니, 하나가 더 들어와 있었다.
남루한 차림새에 술 취한 듯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있는 노인.
"천신령의 귀수신투이옵니다."
"……."
냉한웅은 자신이 소연군주를 겁탈하려다 들키기라도 한 양 당황해했다.
하지만 귀수신투(鬼手神偸) 왕한상(王漢湘)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말만 늘어놓았다.
"천살령주를 비롯한 삼십육 명의 살수(殺手)들이 매화림에 매복해 있던 자들을 모조리 주살했습니다.
그리고 천축승(天竺僧)이 이 곳에 오기 전까지
대국사(大國寺)에 은밀히 머물고 있었음을 알아 내었습니다. 뒷일을 하명(下命)해 주십시오."
냉한웅은 흘낏 뒤돌아보았다.
그는 소연군주가 어느 새 옷을 걸친 것을 보고는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옷입는 동작 한 가지는 가히 고수라 할 수 있겠군.'
찢겨진 옷이라고는 하나, 워낙 품이 넉넉하게 만들어진 궁장이라 살을 가리기엔 충분했다.
"소연군주를 다른 이들의 눈에 안 띄게 궁까지 모셔다 드리도록 하오."
"속하, 명에 따르겠습니다."
깊숙이 허리를 꺾었던 귀수신투 왕한상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냉한웅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냉한웅은 밤바람에 몸을 싣고 있었다.
교교한 달빛과 풀벌레 울음….
부영산(浮影山)은 세속을 떠난 운치가 있어 좋았다.
일순, 흑영(黑影)이 야조처럼 대국사의 담을 넘어 날았다.
대웅전(大雄殿) 앞마당에 내려선 그는 온세상이 떠나갈 듯 고함을 쳤다.
"대국사 주지(住持)는 냉큼 나와 죄를 고하라!"
냉막한 인상의 흑의중년인이었다.
냉한웅이 왜 다시 예전의 정사마천궁주의 모습으로 변용(變容)한 걸까?
땡- 땡- 땡-!
종소리가 다급하게 밤의 적막(寂寞)을 깨뜨렸다.
절간 곳곳에서 승려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째서 야심한 시각에 종을 울린 거야?"
"아함, 낸들 아나."
이들이 연방 하품을 하고 눈을 비비는 등 불만의 기색들을 들어낼 때 홀연….
"으하하하하…!"
대웅전의 기와가 일시에 흔들릴 만큼 웅후한 내력이 실린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승려들은 그제서야 대웅전 앞 석불(石佛)에 걸터 앉은 흑의중년인을 발견하고 노기를 띄웠다.
"시주께선 누구기에 이토록 무례하오?"
황의노승(黃衣老僧)의 물음에 냉한웅은 피마저 얼려 버릴 듯한 냉소를 흘렸다.
"정사마천궁주!"
순간, 절간이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소란스러워졌다.
"저 살성(殺星)이 왜 하필 밤중에 나타난 거야?"
"무슨 화를 당하기 전에 주지… 주지스님을…."
승려들이 우왕좌왕 어찌할 바를 모르자, 황의노승의 백미(白眉)가 꿈틀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 본사를 방문한 의도를 알려 주시면 주지스님을 모셔 오겠소."
수양이 깊어 보이는 황의노승을 자세히 주시하던 냉한웅이 코웃음쳤다.
"이제 보니… 주지의 사제인 법인(法仁)이로군. 어서 법운(法雲)을 데려 오너라."
이 때 무리 중에서 위맹하게 보이는 두 명의 승려가 앞으로 나섰다.
"시주의 방약무인(傍若無人)한 태도를 더 이상 두고볼 수 없구려."
"계속 양보만 한다면 대국사엔 인물이 없는 줄 알 테니… 묵과할 수 없소."
냉한웅은 그들의 호기가 제법이라 생각해 은근히 관심을 기울였다.
"너희의 항렬이 어찌 되기에 감히 나서느냐?"
두 승려는 주저 않고 대꾸했다.
"십팔대 제자인 명지(明志)요."
"명오(明悟)외다."
순간 냉한웅은 등 뒤로부터 인기척을 느꼈으나, 모르는 척 내버려 두었다.
펑펑-!
두 줄기 장력이 뒤통수의 뇌호혈(腦戶穴)과 척추에 격중되었다.
하나 냉한웅은 충격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싱긋 웃으며 돌아섰다.
"쥐새끼 같은 놈들, 너희부터 염라곡에 보내 주마."
"그… 금강불괴지체(金剛不壞之體)!"
암습을 가했던 승려들이 겁에 질린 외침을 토했다.
그들은 냉한웅이 우수(右手)를 치켜들기가 무섭게 신형을 날렸다.
하지만 그들이 오 장도 채 달아나기 전에 엄청난 기류에 휘말렸다.
"천뢰지굉(天雷之宏)-!"
장법(掌法)이 아니라, 장강(掌 )으로 벽력과 같은 굉음을 내며
닿는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리는 천존경혼장(天尊驚魂掌).
도망치던 두 승려의 육신이 난도질을 당한 듯 찢겨져 핏물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져 날았다.
"아악!"
"크으으…!"
하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온 곳은 이를 본 승려 무리였다.
암습을 가한 승려들은 비명지를 사이도 없이 죽어 갔고,
대신 공포에 질린 승려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으니….
닭 잡는데 소 잡는 칼 쓰는 격이랄까?
하나, 대국사에서 모욕을 당했던 일이 뼈 속 깊이 새겨진 냉한웅에겐 이도 모자란 듯 느껴졌다.
그는 명지와 명오가 성난 황소처럼 덮쳐 오자, 망설임 없이 일 장을 날렸다.
천뢰지굉.
명지와 명오의 종말도 조금 전의 두 승려와 다를 바가 없었다.
법인대사가 천천히 걸어나와 냉한웅의 맞은편에 섰다.
"빈승이 시주의 적수가 못 됨은 아나, 어쩔 수 없구려.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시겠소이까?"
일말의 호감이나마 느꼈던 명지, 명오마저 처참하게 죽여 버린 뒤라, 냉한웅의 마음도 전과 같지 않았다.
더구나 수양 깊은 법인대사가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며 사정을 하고 있지 않은가?
"화상들의 목숨을 더 이상 빼앗지 말아 달라는 뜻이라면 들어 주겠소.
하지만 주지인 법운의 죄는 너무도 커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소."
법인대사는 안도감 섞인 탄식을 흘려 냈다.
'그만해도 다행이다. 사형과 나의 목숨을 바쳐 본사 오백여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구층 불탑을 쌓은들 어찌 이보다 더 큰 공덕이 되리오.'
이 때였다.
"어느 방면의 고인이 소림하원(少林下院)을 이토록 업수히 여기시는 거요?"
대국사 주지이며 당금 소림 장문인의 사제인 법운대사(法雲大師)였다.
노기등등한 표정의 그가 선장(禪杖)을 들어 바닥을 찍자, 그 진동이 냉한웅의 발바닥까지 전해졌다.
냉한웅도 법운대사에겐 남다른 감정이 있지 않은가?
'음험사악하기 짝이 없는 늙은 중 놈,
과거 너에게서 받은 모욕은 당시 본존의 신분이 보잘것 없었을 뿐만 아니라
행동 또한 어벙벙해서 그렇다쳐도…
소연군주를 천축승에게 바친 죄는 천 번을 죽어도 용서받지 못하리라.'
좀처럼 냉정을 잃치 않던 그도 노기를 억누르지 못해 고함을 쳤다.
"이 곳이 소림본원(少林本院)이라 해도 본존의 안중에 없다.
네놈이 숭산(崇山) 소림사(少林寺)를 들먹여 기세를 꺾으려 들다니, 참 가소롭구나."
법운대사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가 생전 누구에게 '놈'이란 소릴 들었겠는가?
더구나 오백여 제자와 사제 앞에서 들었으니….
"본사에 무슨 악감정이 있는지부터 밝혀 보아라."
그 역시 생전 처음 외인(外人)에게 말을 놓아 소리쳤다.
냉한웅은 기다렸다는 듯 품에서 손바닥만한 천 조각을 꺼내 보여 주었다.
소연군주의 궁장….
향기로운 체취(體臭)를 간직하기 위해 그녀 모르게 한 조각 슬쩍해 두었던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노기로 붉어진 법운대사의 안색이 갑자기 밀랍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그… 그건…."
냉한웅의 음성이 쩌렁쩌렁 절간을 울렸다.
"이 곳은 부처를 섬기는 절이다. 그래도 네놈이 모른다고 거짓말 하려느냐?"
법운대사는 땅이 꺼져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본사 오백여 제자를 구하기 위해서 부득이한 일…."
이 때 괴이한 음성이 들려 와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법운, 변명할 필요 없수다. 우리 형제가 처리하겠수다."
어법(語法)에는 맞았으나 음운(音韻)이 무척 괴이하였다.
이어 두 줄기 홍영(紅影)이 법운대사와 냉한웅의 사이를 가르듯 내려섰다.
홍의가사를 걸친 두 명의 천축승이었다.
"신독국(身毒國 : 인도) 승려가 아닌가?"
"어떻게 본사에…?"
이들이 나타나자, 운집한 승려들이 저마다 쑤근댐은 물론 법운대사마저 크게 낭패한 기색을 띄었다.
냉한웅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호안(虎顔)에 팔자수염을 기른 천축승이 입을 열었다.
"매화원을 들려 온 것 같은데… 그 곳에서 가비랍(可非拉)을 보지 못했느냐?"
중원말이 그리 서툰 편도 아닌데 천축어(天竺語)를 사용한 것은
대국사 승려들이 알아들음을 꺼려서인 듯싶었다.
냉한웅도 천축어로 대꾸했다.
소연군주에 관한 불미스러운 소문이 나도는 것을 꺼려 했기 때문이다.
"아, 그 비계덩이 중 말인가? 본존이 몸을 가볍게 해 주기 위해 여러 토막으로 나누었지."
냉한웅의 빈정거림이 떨어지자, 천축승들의 안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마른 장작깨비 마냥 길고 홀쭉한 천축승이 염불을 외우듯 중얼거렸다.
"막내 사제, 너의 복수는 야답우(夜榻宇)와 부잔유(浮盞乳)가 해 주겠다."
야답우와 부잔유의 눈빛이 섬뜩한 살기를 띄운 순간, 두 줄기 적광(赤光)이 냉한웅의 전신을 덮었다.
콰르릉-!
하나,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들린 곳은 종루였다.
냉한웅의 신형이 설핏 사라지고 그대로 통과한 장력이 종루의 네 기둥을 박살내 무너뜨린 것이다.
하지만 냉한웅의 심장도 쿵! 내려앉는 듯했다.
그가 알고 있는 장법들 중 어느 것도 이처럼 빠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마치 섬광(閃光)과 같군. 대나이신법(大羅理身法)이 아닌 어떤 신법으로 피할 수 있는 건가?'
천축(天竺) 밀교(密敎)의 비전신법으로 천축승의 공세를 피해 내다니…
피차간에 참으로 웃지 못할 일이었다.
천축 무공을 시험해 보고 싶어진 그는 전력을 다해 신형을 날렸다.
"섯거라!"
천축승들의 신법은 냉한웅이 매화원에서 본 것과 같았다.
바람개비처럼 고속 회전을 하는….
그 동작은 쾌속하기 그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냉한웅이 등 뒤로 쳐 낸 장풍마저 가볍게 흩어 버렸다.
허공에서의 움직임은 대나이신법에 뒤지지만 속도에서 결코 뒤지지 않았다.
더구나 강기( 氣)를 분산시켜 쳐 내는 묘용까지 지니고 있어 더 나은 신법이란 느낌마저 들게 했다.
'참으로 대단하다. 장력이나 보통 무기론 상대하기 어렵겠구나.'
사실 천존선은 보검과 같은 예리함이나 강도(强度)는 없어, 무기로선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글과 그림을 나타내게 하는 신묘한 기능과 천마존의 신물이란 이유 때문에
상대에게 공포심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냉한웅은 장력이나 지풍, 또는 수검(手劍) 수법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그림자인 양 따라붙는 두 명의 천축승을 좀처럼 떨칠 수가 없었다.
그를 더욱 불편하게 하는 것은 대국사의 승려들이었다.
'스치기만 해도 목숨을 잃을 텐데… 하는 짓이 영락없는 철부지들이로군.'
승려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절세고수들의 접전을 보기 위해 기를 쓰고 따라다녔다.
냉한웅이 지붕 위로 날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절반 이상이 죽거나 불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우득- 우드득-!
이 때 뼈마디가 퉁겨지는 듯한 음향을 일으키며
야탑우와 부잔유의 홍색 가사가 부풀어올라 둥근 호박처럼 변해 갔다.
이어 그들은 폭갈을 터뜨렸다.
"천수극라폭(千手剋羅爆)-!"
"천수극라멸(千手剋羅滅)-!"
순간, 야공(夜空)이 장영(掌影)으로 뒤덮였다.
달빛마저 새어 들어오지 못할 만큼 냉한웅의 시야는 온통 암흑뿐이었다.
냉한웅의 전신은 은은한 백광(白光)으로 감싸여 있었다.
불문의 무상신공인 무상보리신공(無上菩提神功).
그러나 수중에서 쏘아진 것은 파천혈륜의 짙은 혈광(血光)이었다.
"혈참(血斬)-!"
일섬(一閃) 혈룡(血龍)으로 화(化)한 이기어검강(以氣御劍 )이
무변중만변(無變中萬變)의 검기를 뿌려 대자, 기음(奇音)이 속출하며 암흑을 찢어 댔다.
캬캬칵- 캬라라락-!
다음 순간, 냉한웅을 향해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과 단말마의 비명들….
하나 그의 호신강기도 천수극라(千手剋羅)의 암경(暗勁)에 결코 가볍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윽!"
냉한웅은 목구멍까지 치민 비릿한 액체를 꿀꺽 삼키며 노려보았다.
무너진 지붕과 함께 아래로 추락한 두 명의 천축승.
그들의 육신은 네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검기의 여파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파괴되어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승려들은 공포에 질려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냉한웅은 담담한 표정을 지었으나, 마음은 천축승들의 장영(掌影)에 가리워진 듯 어둡기만 했다.
'파천혈륜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과연 내가 이길 수 있었을까?'
문득, 냉한웅의 시선이 법운대사에게로 돌려졌다.
"말해라."
마른 나무토막이 소리를 내듯 지극히 건조한 음성이었다.
일말의 인성(人性)도 느껴지지 않는 시선과 음성에 법운대사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이… 미 알고 있지… 않소?"
그가 겨우 대답을 토해 냈으나, 냉한웅은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말해라."
법운대사의 안면이 지옥의 형벌을 맛보는 듯 일그러졌다.
그는 가득 핏발이 선 눈으로 대국사 승려들을 둘러봤다.
의혹 어린 시선들이 자신에게 모아진 것을 본 그는 비탄에 젖은 음성으로 외쳤다.
"결코 말할 수 없소! 이 몸이 천 조각 만 조각 나 십팔층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냉한웅이 잔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다면 본존이 대신 말해 주지.
대국사 주지인 법운은 중원 무림을 삼키기 위해 밀파된 천축승을 자신의 방에 숨겨 주었다."
하지만 그가 소연군주를 납치하도록 도와 주었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이 때 법인대사가 나섰다.
"사형, 그게 사실입니까?"
그는 법운을 주지라 부르지 않았다.
사형제간의 애절함을 그대로 드러낸 부름이었다.
하지만 법운대사는 대답도 없이 우장(右掌)을 빠르게 치켜들었다.
퍽-!
우장은 자신의 백회혈(百會穴)을 내리쳤고, 이어 육신이 서서히 기울었다.
그의 입술에선 비명 대신에 미약하게 불호가 흘러 나왔다.
"아미타불…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랴."
승려들은 자신의 눈과 귀가 믿어지지 않아 넋 나간 듯 바라만 보고 있었고,
그 중 일부만이 경악에 찬 외침을 토해 냈다.
"주지님…!"
순간, 냉한웅의 신형이 번뜩였다.
법운대사 얼굴의 하관(下關), 지창(地倉), 침향(浸香),정혈(井穴),
그리고 백회혈 뒤 일 촌 오 푼 거리에 있는 후정혈(後頂穴)을 찍은 다음…
강간(强間), 뇌호(腦戶), 풍부(風府), 아문(阜門), 대추(大椎), 도도(陶道) 등
독맥(督脈) 삼십육 대혈을 순차적으로 문지르는 그의 손속은 보는 이들의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영령천의(靈靈天醫)의 천의신술(天醫神術).
하나 이 또한 임시방편의 구명수법(求命手法)일 뿐이었다.
신기하게도 뿜어져 나오던 핏줄기가 멈춰지고 법운대사의 눈이 다시 떠졌다.
냉한웅은 그의 상체를 일으켜 앉힌 후 다급히 물었다.
한 마디 대답이 아쉬운 터라 말투도 변했다.
"대사, 천축승들을 파견한 곳이 어디요? 그들이 어째서 대국사에 머문 것이오?"
"……."
초점 잃은 눈으로 멀거니 바라만 볼 뿐, 법운대사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이 때 청아한 음성이 냉한웅의 등 뒤에서 들려 왔다.
"아미타불… 사부님께선 그만 속세의 번뇌(煩惱)를 떨치고 해탈(解脫) 하옵소서.
어찌 그리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옵니까?"
뒤돌아본 냉한웅의 눈동자에 이채(異彩)가 스쳤다.
지학(志學)에도 이르지 않은 듯 앳된 얼굴의 승려.
그의 총명함이 깃든 눈빛이 눈물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사 년 전 냉한웅이 대국사를 찾았을 때, 유일하게 친절을 베풀었던 소사미(少沙彌).
누군지 한눈에 알아본 냉한웅의 입술이 뭔가를 얘기할 듯 가늘게 달싹였다.
하지만 소리는 입 안에서 도로 삼켜지고 말았다.
승려는 법운대사의 앞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제자 청진(淸眞)에게 피안(彼岸)이란 마음(心)이며,
마음은 곧 갖춤(備)이라 일러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그만…."
법운대사의 두 눈에서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피눈물… 그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들은 천축이사(天竺二寺) 중 하나인 극라습찰(剋羅拾刹)에서 파견한 삼존불(三尊佛)이오.
천승(賤僧)은 겁란을 늦추기 위해서… 으욱…!"
그의 입에서 주먹만한 핏덩이가 토해지고 백회혈에서도 멎었던 핏물이 더욱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하나 꼿꼿이 앉은 자세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으며
얼굴엔 추호의 고통도 느끼지 못한 듯 평온함마저 감돌았다.
고승(高僧) 법운은 이렇게 원적(圓寂)한 것이다.
냉한웅은 묵묵히 등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승려들이 일제히 읊어 대는 불경(佛經) 소리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청진의 가늘게 떨리는 음성이 냉한웅의 가슴 속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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