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개방서생

개방서생 (제3권) 제1장 소월선부(小月仙附)

오늘의 쉼터 2016. 6. 1. 08:55

제1장 소월선부(小月仙附)

 

묵옥(墨玉)으로 된 제단(祭壇).

바닥엔 눈부신 광채를 발하는 백옥(白玉)이 깔려 대조적인 조화를 이루었다.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제단 중앙에 놓인 오금향로(烏金香爐)와 

다섯 개의 단향목(檀香木) 위패(位牌)였다.

<천기자(天機子)>
<귀곡자(鬼谷子)>
<마운자(魔雲子)>
<무성자(武聖子)>
<영령자(靈靈子)>

순간, 냉한웅의 몸이 얼어붙은 듯 경직되었다.

'운몽오우(雲夢五友)…!'

십대겁란을 예언했던 동해무성의 다섯 사부, 바로 그들이 아닌가?

하나, 정사마천궁주의 신분으로 무릎을 꿇을 수는 없는 일.

냉한웅은 묵묵히 위패들을 주시하며 마음 속으로나마 예를 올렸다.

월녀개는 그의 경건한 태도를 보자, 뭔가 사연이 있음을 눈치챘다.

몹시 궁금하였으나, 그녀는 입을 다문 채 슬쩍 자리를 피해 주었다.

냉한웅은 홀로 남은 후에도 일다경(一茶頃) 가량 그 자세로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또 얼마의 시각이 흘렀을까?

홀연 그의 입에서 탄성이 튀어 나왔다.

"아, 역시 그랬었군!"

그는 이제까지 깨우치지 못하고 있었던 비학(秘學)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게도 연결이 안 되던 난제(難題)들.

그 해답이 바로 이 곳에 있음을 직감한 그는 제단에 바짝 접근하였다.

"운몽(雲夢)과의 인연이라…."

냉한웅은 중얼거리며 오금향로부터 살폈다.

천존비동에서도 천마존의 안배가 향로에 있었지 않은가?

그는 향로의 양 귀를 움켜쥐고 좌우로 돌려보았다.

하나, 꼼짝도 안 했다.

스르르…!

잡아당긴 순간, 향로가 미끄러지듯 밀려오며 그 자리에 깨알같이 새겨진 글자들이 드러났다.

<운몽조화멸겁인(雲夢造化滅劫印)>

아래엔 비학(秘學)의 귀결이 적혀 있었다.

<세존인 석가모니는 쌍수(雙樹) 사이에서 입적을 했다.

이 때 동서남북으로 각기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는데,

나무 가운데 어떤 것은 울창하고 어떤 것은 시들했다.

그리하여 이를 가리켜 사고사영(四枯四榮)이라고 했으며,

불경에서 풀이하는데 따르면 다음과 같은 뜻이 된다.

동쪽의 쌍수는 상(常)과 무상(無常)을 의미하며, 서쪽의 쌍수는 아(我)와 무아(無我)를 의미한다.

그리고 남쪽의 쌍수는 낙(樂)과 무락(無樂)을 의미하며, 북방의 쌍수는 정(淨)을 드러내는 것이다.

앙상하게 비틀어진 나무는 세상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 바

무상(無常), 무락(無樂), 무아(無我), 무정(無淨)을 나타냄이라.

다시 말해, 석가여래는 바로 이와 같은 여덟 경계의 사이에서 입적을 한 것이니…

그 뜻은 곧 앙상하게 마른 것도 아니요, 무성한 것도 아니며,

공허한 것도 아니고, 실상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시작된 귀결을 일단 머리 속에 넣었다.

하지만 너무도 심오하여 뜻이 이해되기는커녕 생각하면 할수록 어지럽기만 했다.

이 때 밖으로부터 월녀개의 질겁을 한 음성이 들려 왔다.

"대(大)… 협(俠)…."

호칭도 당신에서 대협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도 당황한 듯싶었다.

냉한웅은 재빨리 손을 내밀어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 바닥을 휩쓸었다.

파파팟-!

순간 뽀오얀 돌가루가 안개처럼 일며 그 자리가 거울처럼 매끈하게 변했다.

그는 오금향로를 제자리로 밀어 놓으며 중얼거렸다.

"운몽과 인연 있는 자, 당금 천하에 냉한웅 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월녀개가 있는 밖으로 몸을 날리기까지의 과정은 한 동작인 듯 자연스러웠다.

월녀개가 몸서리치고 있었다.

사체(死體).

몇 구의 시신이 물 위에 떠 있었는데, 그 형상이 냉한웅조차 미간을 찌푸릴 만큼 끔찍스러웠다.

물에 퉁퉁 불고 식인어들에게 살점을 뜯겼는지 곳곳이 찢겨지고 패여져 허연 뼈가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냉한웅은 양 팔을 쭉 내뻗었다가 안으로 거두어 들였다.

찰나, 월녀개의 달처럼 동그란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접인신공(接引神功)!"

사체들이 마치 무형의 그물에 걸려든 고기처럼 동시에 수면을 떠나 허공에 치솟았다가

움푹 패인 구덩이 속에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냉한웅은 다시 소맷자락을 휘저었다.

그러자 이번엔 주변의 크고 작은 암석들이 자석에 끌리듯 날아와 구덩이를 메웠다.

작업을 끝낸 그는 월녀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놀란 마음을 달래 주려 입술을 벌렸으나, 아무런 말도 토해 내지 못했다.

월녀개가 넋나간 듯 물줄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름다워라. 이런 곳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는지 빙글빙글 춤추듯 돌며 노래를 불렀다.

꽃 아래 한 독 술을 놓고, 이 몸 홀로 마시노라.
잔 들자 이윽고 달이 떠올라, 그림자까지 모두 세 사람일세.
달이 술은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만 나를 따라 마셔도,
달과 그림자 데리고서, 함께 즐기는 이 기쁨이여.
내 노래하면 달도 거니는 듯, 내 춤을 추면 그림자도 따른다.

깨이면 함께 즐기는 것을, 취하면 모두 흔적이 없이,
길이 이 정을 서로 맺어, 후일 은하에서 또 만나기를 기약하리.

냉한웅은 어이가 없다 못해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젠장 지금 이 곳을 벗어나려 안달해도 모자라는 상황인데…

앉아서 소변 보는 족속들은 똑똑하거나 미련하거나 모두가 거기서 거기라니까.'

일순, 그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물줄기는 석벽 중간에 나 있는 구멍으로부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시신들은 물줄기를 타고 떠내려 온 것이다.

그러니 구멍은 밖의 수로(水路)와 연결되어 있음이 확실치 않은가?

천안공(天眼功)으로 안력을 돋구니 구멍의 크기와 위치가 확연히 들어왔다.

구멍은 황소가 드나들어도 넉넉할 만큼 컸다.

높이는 오십여 장쯤으로,

무상보리신공(無上菩提神功)과 능공허도의 경공을 펼치면

월녀개를 안고도 충분히 도달할 자신이 있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그는 히죽 웃었다.

"그토록이나 마음에 들면 소걸군과 함께 와 이 곳에 은거하거라."

월녀개는 양 볼을 붉히며 수줍게 몸을 꼬았다.

"아이잉, 짓궂으셔."

냉한웅은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산란스러웠다.

'으악! 월녀개가 이런 교태도 부릴 줄 알다니… 추추귀개에게 얘기하면 절대로 안 믿을 거야.'

한데 충격받을 일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저… 대협을 숙부(叔父)라 부르면 안 될… 까요?"

조심스러운 음성이긴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승낙받아 놓은 거나 마찬가지처럼 보였다.

냉한웅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마음대로 하거라. 네가 언젠 뭐 허락받고 행동했느냐?"

월녀개는 어린아이처럼 깡충깡충 뛰며 기뻐했다.

"내게도 숙부가 생겼다. 숙부, 월녀개의 숙부니이임."

냉한웅의 표정이 다시 냉막하게 변해 있었지만 그녀는 아랑곳 않고 쫑알거렸다.

"숙부의 겉모습은 무뚝뚝하고 차갑지만 따뜻한 가슴을 지닌 분인 줄 눈치챘었죠.

아, 소걸군도 여기에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강호명화대회에서 제일화로 뽑힌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비밀스럽고 아름다운 곳까지 알고 있으니… 월녀개를 다시 보게 될 거야."

냉한웅은 꿈 속을 헤매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내심 혀를 찼다.

"정신 차려. 저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야만 이 곳을 벗어날 수 있다."

그는 차가운 음성으로 월녀개의 환상을 깨려 했다.

하지만 월녀개의 귀엔 노랫소리로 밖엔 안 들리는 듯했다.

"소걸군의 소(少)자와 월녀개의 월(月)자를 합쳐…

그래, 이 곳을 소월선부(少月仙府)라 불러야겠어요."

"으악…!"

"큭!"

폐부를 짓이기는 듯한 비명들이 허공을 할퀴었다.

괴이막측한 기형(奇形)의 병기(兵器).

이리의 송곳니처럼 생긴 톱날이 검신(劍身)에 돋아난 이것은

피에 굶주린 듯 인육(人肉)을 난도질해 댔다.

이 괴병기는 황금혈랑(黃金血狼)의 수중에 들어 있었다.

파천혈랑교주인 그가 지닌 무기라면 두말 할 것도 없이 파천혈륜(破天血輪)일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높은 무공에 천하기병까지 지녔으니, 그 누가 상대할 것인가?

중원의 절정고수들조차도 변변히 겨뤄 보지도 못하고 피를 뿌렸다.

강남검보라 일컫는 백운보(白雲堡)보주 백운신검(白雲神劍)과 소림 속가제자인

하남일장(河南一掌). 이들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강호칠기 중의 일 인인 설산신니(雪山神尼)마저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파천혈륜의 독랄하기 짝이 없는 검기에 허리가 양단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황금혈랑의 살기는 조금도 수그러들 줄 몰랐다.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사대혈랑의 혈채(血債)를 갚으려면 아직 멀었다!"

자신이 가장 총애하던 수하들의 죽음은 그를 완전히 야수로 만들어 놓았다.

이제 남은 상대는 단 한 명, 진천패도(震天覇刀) 피천웅(皮天雄)뿐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닌가?

그보다 배분이나 명성이 훨씬 높은 설산신니마저도 처참한 죽음을 당했는데,

상처 하나 없이 버티고 있다니….

이 때 몇 줄기 인영(人影)이 미세한 파공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사 인(人)이었다.

그 중 두 명은 이리 가죽을 뒤집어쓴 혈랑이고,

다른 두 명은 장강어옹(長江漁翁) 차비운(車飛雲)과 

사도오종(邪道五宗) 중의 한 명인 혈풍상괴(血風商怪) 전무(田武)였다.

혈랑들은 황망히 황금혈랑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쌍마(雙魔)가 교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이어, 그들은 앞다투어 보고를 했다.

"우리가 들어온 곳이 무너져 막혀 있습니다. 다른 출구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 동굴 안은 빠져 나가지 못한 무림인들로 들끓고 있으니

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든다면…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황금혈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육로로 온 것이냐? 타고 온 배는 어찌하고…?"

이번엔 전무가 굽실거리며 대답했다.

"천장이 무너지는 바람에…  바위들이 덮쳐 저희만 간신히 피했습니다."

황금혈랑은 묵묵히 서 있는 차비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대귀선은 어디에 있느냐?"

차비운은 품에서 한 장의 비도(秘圖)를 꺼내 펼쳤다.

"지금 우리가 위치한 곳이 여기외다.

세 번째 통로를 따라 백여 리 가량 더 진입하면…."

찰나, 황금혈랑의 우수(右手)가 번뜩였다.

팔이 쭉 늘어나 비도를 낚아채 가는 쾌속절륜한 통비금나수법(通臂擒拿手法).

"아앗! 교주!"

차비운의 입에서 당황한 외침이 터져 나왔을 때는 이미 황금혈랑의 손으로 비도가 넘어간 후였다.

파천혈랑교주가 이런 시기에 손을 쓰리라 생각지 못했던 그는

찌 처신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어째서… 이런…?"

그 순간, 파천혈륜이 섬광(閃光)을 날렸다.

"괘씸한 것, 죽어랏!"

차비운은 본능적으로 몸을 뒹굴었다.

무림인이라면 수치스러워 가장 쓰기를 꺼려하는 뇌려타곤 수법이었다.

하나, 파천혈륜이 노린 것은 그가 아니었다.

퍼퍽-!

끔찍스런 음향!

전무의 천령개(天靈蓋)가 둘로 나누어지며 핏물이 세차게 치솟았다.

"왜…?"

전무의 입에서 비명 대신 튀어나온 말이었다.

영혼이 저승 문턱을 넘어선 후에도 얼굴의 두 눈은 부릅떠져 있었다.

아마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의문과 공포 때문이리라.

황금혈랑은 장소성을 터뜨렸다.

"쿠우우… 네놈들의 잔꾀로 인해 본교의 대업(大業)이 물거품으로 변해 버렸다."

차비운은 '살았다!' 싶었던 순간 다시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지자 아연실색을 했다.

"교주, 고정하시고 제 말 좀 들어 보십시오. 천망을 틀림없이 넘겨 드릴 터이니…."

하나 황금혈랑의  광기로 이글거리는 눈알은 더욱 짙게 다가들었다.

"듣기 싫다. 네놈들이 고루대교와 불사천마교의 지시에 따라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니라면,

절대로 이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

"절대… 로 아니… 외다.

우리가 파… 놓은 함정이라면 어찌… 하여 지금 이 자리에 있겠… 소이까?"

차비운은 목까지 차오른 공포감으로 인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어쨌든 간에 본교의 최정예고수들 모두가 이 동굴 안에서 목숨을 잃었다.

모든 게 네놈들 책임이다."

살기 찬 황금혈랑의 외침은 이미 그의 목숨이 물건너 간거나 마찬가지임을 드러냈다.

차비운은 역시 상황 판단이 빨랐다.

쉬익-!

그의 신형은 황금혈랑의 외침이 떨어지기 무섭게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죽간이 늘어나 황금혈랑 가슴팍에 있는 중정혈(中庭穴)을 노렸다.

암암리에 전신의 내력을 끌어모아 두었던 터라,

이 일련의 움직임은 전광석화(電光石火)와도 같았다.

하지만 황금혈랑의 혈랑백변신법(血狼百變身法)은

유령처럼 그 자리에 한 자락 잔영만을 남겨 두었을 뿐이었다.

"어리석은 놈!"

냉소와 함께 파천혈륜이 기이하게 오므려졌다.

활처럼 휘어져 반원으로 변한 순간,

파천혈륜의 검신(劍身)이 퉁겨지듯 원래의 모양으로 되돌아가며 부챗살 같은 검기를 폭사했다.

"파천혈랑아(破天血狼牙)-!"

카라라락-!

고막을 들쑤시는 기음과 더불어 파천혈륜의 낭아(狼牙)가 차비운의 허리를 스쳐 지나갔다.

차비운이 등허리가 섬뜩해짐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주르륵…!

무엇인가가 뭉클뭉클 자신의 허리로부터 빠져 나와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챈 순간, 그는 폭풍처럼 밀어닥치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아아아악…!"

혼백을 씹어발기는 듯한 귀곡성!

참으로 잔혹절묘(殘酷絶妙)한 수법이었다.

미처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베어 내어 공포와 고통을 동시에 느끼며 죽어 가게 하는….

불귀해의 비밀을 알아 낼 야심으로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바쳐

귀선(大龜船)을 제조한 장강어옹 차비운.

천망의 일부를 빼돌려 만든 호신의(護身衣)도 파천혈륜의 예리함엔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자신의 생명을 지켜 줄 것으로 굳게 믿었던 천망으로 인해

오히려 누구보다도 더욱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였으니….

아마도 차비운의 혼백은 한이 맺혀 구천지하를 헤매게 될 것이다.

핏덩이로 화한 차비운의 시신.

허리 어림에는 찢겨져 나간 천망이 파르르 습기 찬 바람에 떨고 있었다.

황금혈랑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깝구나. 천망의(天網衣)를 입은 줄 알았더라면 목을 베는 건데…."

이 때 냉막한 음성이 그의 귀 속을 파고들었다.

"본존의 수고를 덜어 주어 고맙구나."

"……!"

고개 돌려 바라본 황금혈랑은 내심 크게 당황했다.

십 장도 채 못 되는 가까운 거리에 섭선(摺扇)을 든 흑의미청년이 서 있었다.

'이토록 가깝게 접근할 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하다니….'

더구나 이제 겨우 약관(弱冠)을 갓 넘어선 듯한 애송이가 아닌가?

황금혈랑은 수치와 분노 어린 악성을 뱉어 냈다.

"너는 누구길래 어린 것이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리느냐?"

순간 흑의미청년, 냉한웅의 눈에 살기가 스쳐 갔다.

"너야말로 입조심하거라. 입은 단명(短命)을 재촉하는 문이 될 수도 있다."

상대의 기도(氣道)에 위압감을 느낀 황금혈랑의 몸이 일순 굳어졌다.

'신광이 안으로 갈무리된 것으로 보아 내공이 반박귀진(返撲歸眞)에 달한 것이 틀림없다.'

무공이 귀진완박(歸眞完璞)의 경지에 도달하여

이젠 천하에 자신의 적수를 찾기 어려운 그에게 있어, 이러한 두려움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었다.

'손바닥이 백옥같이 하얗게 보이는데, 

중원 무림에서 수백 년 동안 그 누구도 연성한 적이 없다는 현옥통진(玄玉通眞)을 연성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본 교주가 평생 처음 맞이한 최강의 적이 될 것이다.'

황금혈랑은 전신의 공력을 끌어모으며 상대의 동태를 예의 주시했다.

냉한웅은 그가 안중(眼中)에 없다는 듯 여유 있게 섭선을 펼쳤다.

차르륵-!

백옥(白玉)의 부챗살이 가볍게 마찰하는 음향이 상쾌하게 들렸다.

순간, 진천패도(震天覇刀) 피천웅(皮天雄)이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으며 감격에 겨운 음성을 토해 냈다.

"천존선(天尊扇)! 천마존의 현신을 수하 앙축(仰祝)하오이다."

그의 몸이 격렬하게 떨었다.

하나, 냉한웅의 표정은 변화 없이 담담하기만 했다.

"천살령주(天殺令主)는 마존령을 받으라."

섭선 전면에 아수라파천귀(阿修羅破天鬼)의 형상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명을 내리옵소서."

피천웅의 음성도 낮고 무겁게 변했다.

하나 내심엔 격동의 물결이 격렬히 일고 있었다.

냉한웅은 별일 아닌 듯 가볍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묘강쌍마를 없애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묘강필마(苗彊筆魔)와 그의 동생인 묘강곤마(苗彊棍魔)가 병기를 휘둘렀다.

그들도 흑의미청년의 존재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터라

암리에 기습을 가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츠츠츳-!

쉭- 쉭익-!

필(筆)과 곤(棍)… 두 가지 병기가 기음을 일으킨 순간,

피천웅의 입에서 웅후한 폭갈이 터졌다.

"염라반선수(閻羅反禪手)-!"

이어 피천웅의 묵광(墨光) 번뜩이는 쌍수(雙手)가 병기들에 맞부딪쳐 갔다.

"피해라!"

황금혈랑의 다급한 외침이 토해졌다.

하지만 전력을 다해 공격을 가한 묘강쌍마는 앞으로 나아가는 기세를 멈출 수가 없었다.

콰광-!

천리묵혈동이 폭발할 때처럼 가공한 굉음이 이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동시에 묘강쌍마의 입에서 폐부가 으스러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굉음 속에 파묻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방으로 퉁겨 흩어지는 핏덩이들마저 굉음 속에 파묻힐 수는 없었다.

온몸이 찢겨지고 으스러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인 두 구의 사체!

피천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솜씨가 줄었군. 너무 오랫동안 안 쓴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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