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개방서생

제8장 무풍신룡(武風神龍)의 한(恨)

오늘의 쉼터 2016. 5. 31. 10:11

제8장 무풍신룡(武風神龍)의 한(恨)

 

강호가 격동(激動)에 휩싸였다.

장강어옹 일행이 불귀해(不歸海)에서 생존해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신비이객(神秘二客) 중의 분광월아도(分光月牙刀)가 희생되었긴 하지만,

어쨌든 이 사건은 강호 뿐만이 아니라 중원천지를 술렁이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 불귀해는 허상(虛像)이다. 그 곳은 사신(死神)만이 광란하는 죽음의 해역일 뿐….

- 동해무성도 없고, 십칠 인의 고수들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수장(水葬)되었음이 분명하다.

- 그런 사해(死海)에서 침몰한 만보선을 찾는다는 것은 스스로 목숨을 내버리는 어리석은 짓이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으며, 내용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 사이 세월도 끊임없이 흘러 살랑살랑 봄바람이 처녀들의 방심을 흔드는가 하면,

어느 새 작열하는 태양 아래 물 소리 싱그러운 계절이 와 있고…

만산(滿山)이 홍엽(紅葉)으로 물들기 무섭게 소록히 흰 눈 쌓이는 겨울 밤이 초가지붕을 덮었다.

누군가 세월을 유수(流水)에 비유했던가?

해가 세 번을 바뀌었으니, 삼 년(年).


호남(湖南)에 위치한 악양성(岳陽城).

경치가 수려하고 명승고적(名勝古蹟)이 산재한 이 곳은 중원 오대호(五大湖) 중 

그 규모와 경관이 으뜸인 동정호(洞庭湖)를 끼고 있어,

사시사철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니 어찌 풍류(風流)가 빠질 손가?

성내엔 호남 뿐만 아니라 중원각지의 풍류객들 입에 오르내리는 주루(酒樓)가 있었으니….

옥봉루(玉鳳樓)!

옥봉(玉鳳)이란 기명(妓名)을 지닌 여주인은 소문에 의하면 홀몸에 미색이 뛰어난 중년여인이라 하였다.

옥봉루는 항상 주객(酒客)들로 만원을 이루었고,

금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래 위층 할 것 없이 발 들여놓을 틈도 없었다.

특히 이층은 다양한 복색(服色)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경장 차림에 병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무림인이 분명한 이들 중 유난히 시선을 끄는 노인이 있었다.

두 가닥 긴 수염에 넉넉한 풍채,

상당히 위엄 있어 보이는 그는 바로 장강어옹(長江漁翁) 차비운(車飛雲)이었다.

양자강 일대를 주름잡는 고수로, 지난 삼 년 동안 세인들의 화제 대상이 되었던 인물.

그를 향해 무림인들은 앞다투어 목청을 높였다.

"소문대로 불귀해의 전설이란 모두가 헛것이었단 말씀입니까?"

차비운은 점잖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노부가 직접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렇네. 소문은 절대로 과장된 것이 아니지."

"그렇다면 이제까지 불귀해를 찾아 떠난 무림인들은 어찌 되었다고 생각하시오?"

차비운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가 물고기 밥이 되었겠지.

천하에 노부의 대귀선(大龜船) 말고 불귀해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배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이 때, 한 여인이 계단을 사뿐사뿐 밟고 올라오며 옥음(玉音)을 흘렸다.

"천녀가 대협께 한 말씀 여쭈어도 되겠사와요?"

초생달처럼 상큼 휘어진 아미(蛾眉)에 간장을 녹일 듯 갸름한 눈매,

그리고 오똑 솟은 콧날하며 앵두 같은 입술 사이로 고르게 반짝이는 치아….

아, 가늘고 긴 목과 불룩한 젓가슴…

개미처럼 잘룩한 허리에 아래로 굴곡을 이루고  있는 커다란 둔부는

아름답기보다는 살인(殺人) 무기(武器)에 더 가까워 보였다.

처녀의 풋풋한 아름다움과 별개인 농염(濃艶)한 아름다움.

익을 대로 익어 터질 것 같은 그녀의 몸매는 차비운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뉘신지…?"

중인들의 시선 역시 차비운과 별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앞다투어 길을 내주며 대답했다.

"옥봉루의 주인이지요."

"옥봉은 천금을 준다 해도 마음이 끌리지 않으면 오지 않는데, 스스로 찾아오다니…."

"장강어옹이 참말 부럽소이다."

옥봉은 환한 미소를 흘리며 살짝 허리를 굽혔다.

"미천한 몸이 장강의 영웅을 뵙게 되다니, 삼생(三生)의 영광이옵니다."

차비운의 입이 헤, 벌어졌다.

"어서 자리에 앉으시오."

옥봉은 그가 권하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눈웃음을 쳐 댔다.

"옥봉루에 초행이시죠?"

"그렇소. 지난 삼 년 간 장원에만 묻혀 지냈으니까."

"어쩜 그러실 수가… 갑갑하지 않으셨나요?"

그녀의 교태는 유혹의 도를 넘어 뇌쇄적이었다.

이에 차비운은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다.

"허허허허… 앞으로는 이 곳을 자주 찾아와야겠소."

"천녀가 들은 소문에 의하면, 절정고수들과 동반했었다던데… 실인가요?"

그녀의 물음에 차비운은 자랑스런 표정을 지었다.

"설산신니(雪山神尼), 무산괴마(巫山怪魔), 천도탈혼(天賭奪魂), 진천패도(震天覇刀)…."

옥봉이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내저었다.

"그만하세요. 천녀가 궁금한 건  왜 한 사람만이 돌아오지 못했냐는 거예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중인들 중의 누군가가 소리쳤다.

"아, 분광월아도(分光月牙刀)!"

순간, 옥봉의 눈동자에 예리한 섬광이 스쳐 갔다.

그녀는 차비운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다시 달콤한 음성으로 유혹했다.

"천녀의 궁금증을 어서 풀어 주시와요."

차비운은 얼른 정색을 하며 얼버무렸다.

"불귀해의 소용돌이가 워낙 흉폭한 데다, 그는 바다에 익숙하지 못한 터라…."

이 때 돌연, 분노에 찬 대갈일성(大喝一聲)이 터져 나왔다.

"더러운 입, 닥쳐라!"

그 냉랭한 외침은 마치 구유명부(九幽冥府)에서 들려 오는 듯 중인들의 가슴을 섬칫하게 했다.

외침을 터뜨린 이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던 백의서생이었다.

눈같이 흰 유복(儒服)에 허리에 장검을 찬 그는

영준하다기보다는 아름답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만큼 잘생긴 얼굴에 가득 살기를 띠고 있었다.

차비운은 흠칫 놀랐으나, 이내 신색을 회복하였다.

"무풍신룡(武風神龍), 네놈은 관을 봐야만 눈물을 흘리겠구나."

무풍신룡은 씹어먹을 듯 이를 가는 차비운에게 조소(嘲笑)를 보냈다.

"지난 삼 년 동안 꼬리를  감추고 있더니만, 기어나온 걸 보니 믿는 게 생긴 모양이군."

차비운은 많은 무림인들이, 더구나 옥봉이 보는 앞에서 이런 수모를 당하자 눈에 핏발이 섰다.

"주둥아리가 달렸다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네놈의 사부인 만통자(萬通子)라 할지라도 노부에게 이토록 무례하지는 못할 것이다."

무풍신룡이 코웃음쳤다.

"흥! 당시에  다른 고수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벌써 물고기 밥이 되었을 텐데… 안 그런가?"

차비운은 분통이 터져 당장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으나,

상대는 신비이객(神秘二客) 중의 일 인이 아닌가?

그는 말 못하는 탁자에게 화풀이를 했다.

우지직-!

그가 주먹을 내려치자, 단목(檀木)으로 된 두꺼운 탁자가 서너 조각으로 나누어져 주저앉았다.

하지만 무풍신룡은 입가의 조소(嘲笑)를 지우지 않았다.

"남을 등쳐 먹는 수법에 비해 무공은 크게 떨어지는구려."

입씨름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음을 깨달은 차비운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분광월아도의 죽음은 결코 노부의 책임이 아니다.

그만한 사리판단도 하지 못하고 날뛰다니… 따끔하게 가르쳐 주마."

싸움 구경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달려가는 것이 무림인들의 생리 아니던가?

중인들은 저마다 관전하기 좋은 위치로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

무풍신룡의 표정도 엄숙하게 변했다.

"당신이 사욕(私慾)에 눈이 멀어 천망(天網)의 일부를 빼돌리지 않았더라면,

어찌 그가 불귀해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겠는가?"

차비운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관절 네놈은 분광월아도와 어떤 관계냐? 마치 남편 잃은 계집 마냥…."

일순, 무풍신룡의 양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목을 바쳐랏!"

그는 고함을 쳐 차비운의 말을 끊어 버리며 검을 날렸다.

쉐엑- 쉑-!

쾌검(快劍).

무풍신룡의 손속은 섬전과도 같아, 관전하는 무림인들마저 오싹 몸을 떨었다.

그러니 당사자인 차비운이야 어떻겠는가?

기겁을 하여 몸을 날렸으나 오른쪽 소맷자락이 싹뚝 잘려 나간 뒤였다.

차비운은 급히 두 자쯤 되어 보이는 죽간(竹竿)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일반 낚싯대의 형태와 어딘가 달라 보였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같으니!

네놈이 노부의 죽간십팔절(竹竿十八絶)을 모두 받아 낸다면, 노부가 스스로 목을 바치겠다."

다음 순간, 죽간이 갑작스럽게 기음을 토해 냈다.

타카칵-!

동시에 다섯 자가 넘을 듯한 긴 낚싯줄이 죽간에서 튀어나왔다.

줄 끝에 달린 낚싯바늘은 극독이 칠해져 있는 듯, 검푸르게 색이 변해 있었다.

차비운의 얼굴 가득 음침한 미소가 번졌다.

'흐흐흐흐…

지난 삼 년 동안 내가 고심참담(故心慘憺) 연마한 무공을 이리 빨리 써먹게 될 줄 몰랐구나.'

그는 자리에서 발을 떼지 않은 채 죽간을 휘둘렀다.

"죽간약파(竹竿掠波)-!"

파르르르륵-!

낚싯줄이 휘돌아 뒤통수의 뇌호혈(腦戶穴)을 노리자,

무풍신룡은 고개를 살짝 숙여 피하며 검기를 뿌려 댔다.

"신룡출운(神龍出雲)-!"

한데, 그 순간 양 옆에서 소리 없이 두 줄기 도기(刀氣)가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무풍신룡은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경실색했다.

차비운의 내조자가 주루 내에 있었다니….

그는 급히 검을 거두며 무풍미리보법(無風迷離步法)을 펼쳤다.

삭- 삭-!

두 자루 대두도(大頭刀)가 간발의 차이로 양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옷깃만을 베였을 뿐이긴 하지만, 그가 언제 이런 봉변을 당한 적이 있었던가?

무풍신룡의 얼굴에 가득 노기가 떠올랐다.

"독룡출동(毒龍出洞)- 견룡재전(見龍在田)-!"

그가 연속으로 절초를 펼치자, 검기가 좌우로 날카롭게 쏘아졌다.

"허엇!"

합공해 왔던 두 명의 흑의인(黑衣人)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그 순간, 목이 뜨겁게 달아오름을 느꼈다.

참기 어려운 듯 그들의 입에서 비명을 토해졌다.

"으윽!"

"큭!"

핏물은 비명이 토해진 다음에 뿜어져 나왔으니….

중원의 이름난 쾌검수(快劍手)들 중 그와 비교될 자,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분노에 차 공격에 치중한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차비운같이 노련한 고수가 어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손가?

"죽간심혈(竹竿尋穴)-!"

그 순간, 검푸른 낚싯바늘이 가슴의 유근혈(乳根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아앗!"

무풍신룡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지만 단순히 당황해서만은 아니었다.

분노, 수치…….

하나 고수들의 대결에서 냉정을  잃음은 종종 목숨마저 잃는 실수를 범하기 마련 아닌가.

무풍신룡은 하체를 꼿꼿이 세운  채 상체만을 뒤로 눕히는 철판교(鐵板橋) 수법으로 낚싯바늘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낚싯줄이 휘어져 날아들었기에 그만 살짝 왼쪽 어깨를 스치우고 말았으니….

차비운은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이제 네놈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지옥야차부의 무사를 두 명이나 죽여 노부가 직접 손쓸 필요조차 없었지만…."

지옥야차부(地獄夜叉府).

이들은 직업살수(職業殺手) 조직이었다.

이들이 강호에서 영업을 시작한 지는 불과 삼 년 남짓이지만,

간에 벌인 사건들은 실로 끔찍스럽고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넉넉한 보수만 주면 그 누구라도 살인하고, 또는 보호해 주는 지옥야차객(地獄夜叉客)들.

세인들은 살수를 가리켜 지옥객(地獄客), 호위수들을 가리켜 야차객(夜叉客)이라 불렀다.

만약 야차객이 보호하는 인물을 지옥객이 노린다면 어찌 될 것인가?

이렇듯 세인들은 지옥야차부에 대해 공포와 아울러 묘한 관심도 지니고 있었다.

확실한 것은 이 조직이 실수를 용납치 않으며, 자신들의 피해를 수십 배로 갚는다는 점이다.

일례로 지옥객이 공가장(孔家莊)의 장주를 살해하려다 실패한 적이 있었다.

다음 날, 청부를 맡은 지옥객은 목 없는 시체로 동정호에 떠올랐고…

공가장의 가솔(家率)  백여 명 모두가 관 속에 담기고 말았다.

뿐만 아니었다.

야차객 네 명이 중원제일전장(中原第一錢莊)의 호위를 한 적이 있었는데,

가 원인도 모르게 피살되고 만 것이다.

그로부터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아 네 명의 야차객은 전장의 금궤 안에서 목 없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지옥야차부는 전장 주인의 사인(死因)을 끝까지 추적하여 범인을 색출해 내었는데,

그는 구파일방 중의 하나인 점창파(點蒼派)의 제자였다.

지옥야차부는 당사자는 물론 점창파의 장문인과 호법들을 살해했다.

하지만 점창파는 보복하기는커녕 봉산(封山)을 하고 말았으니….

이후로 강호에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떠돌았다.

                                

- 지옥야차부는 일부러  지옥객이나 야차객을 하류고수로 고용한다.

- 실패하면 정예고수들을 파견한다. 이들이야말로 진짜 지옥야차객이다.


무풍신룡은 왼쪽 어깨로부터 시작해 빠르게 전신이 마비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이미 검을 휘두를 수 없을 만큼 마비된 그는 눈동자만을 굴려 시체로 변한 흑의인들을 내려다보았다.

'차가(車哥)가 악독하고 교활하다는 것을 짐작한 터지만, 야차객을 고용했을 줄이야.'

차비운은 냉소(冷笑)를 흘리며 죽간을 치켜들었다.

"만통자는 지옥야차객들의 손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게다.

그러니, 복수해 주리란 환상은 깨 버려라."

죽간이 약 오른 독사처럼 무풍신룡의 목을 찔러 갈 때.

"멈춰요!"

앙칼진 외침과 동시에, 번뜩 홍영(紅影)이 이들 사이를 가로 막았다.

날렵한 몸매와 섬세한 굴곡….

한 떨기 해당화인 양 아리따운 여인을 본 차비운은 기겁을 해 죽간을 거두어들였다.

"연화야, 어서 피…!"

그의 금지옥엽인 차연화(車蓮花)였다.

제사차 강호명화대회(江湖名花大會)에서 강북화(江北花)로 선출된 미녀.

그녀는 부친을 향해 피를 토하듯 외쳤다.

"아버님, 무풍신룡을 살려 주세요!"

짤막한 외침이었지만 너무도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음을 중인들이 어찌 눈치 못 채겠는가.

차비운의 얼굴이 수치와 분노로 흉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못된 것! 냉큼 비키지 못하겠느냐!"

차연화의 추수 같은 눈망울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괴었다.

"안 돼요. 차라리 절 먼저 죽여 주세요."

그녀가 비켜 서기는커녕 무릎 꿇고 앉아  버리자, 차비운은 눈에 살광(殺光)을 띄웠다.

"집안 망신을 시켜도 정도가 있지, 애비 말을 거역하는 네년 먼저 죽여 버리겠다."

그는 죽간으로 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하나, 굶주린 호랑이도 제 새끼만은 잡아먹지 않는다 하지 않던가?

죽간은 차연화의 천령개(天靈蓋) 바로 위에서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친 듯 정지했다.

부르르…!

죽간을 움켜진 차비운의 손이 경련을 일으켰다.

차연화는 눈물 젖은 얼굴을 들어 부친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이미 생사를 도외시한 듯 추호도 두려움을 보이지 않았다.

무풍신룡은 내심 그녀에게 크게 감동을 했다.

'지독한 독이로군. 일 갑자에 달하는 공력과 태음기공(太陰氣功)으로조차 억제할 수 없다니…

어쨌든 여기서 우물거리다간 순진한 차낭자마저 곤경에 처하겠다.'

그는 마음을 사려 먹고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날렸다.

퍽-!

무풍신룡의 몸이 창문을 부수며 땅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그는 공력을 십분의 일도 사용할 수 없었지만, 신법을 펼치는 동작이 놀랍도록 날렵했다.

독이 하체까지는 퍼지지 않아 두 다리를 사용하는 데는 별 지장을 받지 않은 덕이었다

쉬익- 쉭-!

차비운은 바람을 가르며 달아나는 그의 뒷모습을 차가운 시선으로 주시할 뿐,

전혀 추적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입가엔 냉랭한 비웃음이 흐르고 있었다.

"네놈이 노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고통만 더해질 뿐이다."

그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려 슬쩍 구석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얼굴에 핏기라곤 발견할 수 없는 백면(白面)의 두 중년인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을 제외하곤 별다른 특징을 발견할 수 없는 그들은

비운의 시선이 와 닿자,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하나, 그 움직임에서 불도 얼려 버릴 듯 싶은 냉기(冷氣)가 흘렀다.

백면중년인들이 주루를 내려가기 무섭게, 차연화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저들이 누군가요?"

차비운은 냉소를 머금었다.

"지옥객도 야차객도 아닌, 지옥야차객이지."

순간, 차화연은 자지러지게 놀라 비명에 더 가까운 외침을 터뜨렸다.

"안 돼!"

그녀는 지옥야차객들의 뒤를 쫓으려 했다.

하지만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느 새 차비운의 오른손이 그녀의 완맥을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있었다.

"아버님, 제발 그를…"

그녀가 울며 애원했으나, 차비운은 야비한 미소를 띄운 얼굴로 창 밖 먼 곳을 응시할 뿐이었다.


무풍신룡은 바람처럼 악양성의 외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의 호흡은 고수답지 않게 상당히 거칠어져 있었다.

"헉… 허억…!"

독 바른 낚싯바늘이 스쳐 간 어깨엔 방울방울 핏물이 조금씩 흘러 나왔으나,

독기운은  퍼질 대로 퍼져 안색이  검푸르게 변해 있었다.

'장강어옹, 그 자의 간악함을 삼 년 전에 알아차렸으면서도 주의를 게을리하는 실수를 범하다니… 

단 한 번의 경솔함으로 목숨을 잃게 되었구나.'

이제는 경공을 펼칠 힘도 없어 질질 끌듯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몸의 감각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고, 의식도 점점 더 몽롱해져 갔다.

저벅- 저벅-!

등 뒤로부터 발자국 소리가 무풍신룡의 가슴을 사납게 짓눌러 왔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묵중한 음향(音響).

공력을 실어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려는 것으로, 살객(殺客)들이 이용하는 수법 아닌가?

무풍신룡은 전신의 털이란 털은  모조리 곤두서는 듯한 공포에 휩싸였다.

절망에 빠진 그의 시선은 이미 저승길을 더듬고 있었다.

'냉공자, 당신의 원한을 갚지도 못하고 세상을 뜨게 되었군요.

제 곧 당신을 만나러 갈 테니, 그 신비스런 미소로 맞이해 주세요.'

어느덧 그의 눈앞에 두 개의 인영(人影)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듯한 그들은 음산한 눈빛으로 바라만 볼 뿐, 손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백면중년인,

아니 지옥야차객들은 그를  어떤 방법으로 처치해야 
강호인들이 크게 두려움을 느낄 것인지를 생각하는 중인 듯했다.

만두 속을 다지듯 난도질쳐 만통자(萬通子)에게 보내려는 걸까?

아니면 분근착골(分筋 骨)의 고통을 못 이겨

끔찍한 형상으로 세상을 떠난 그의  시신을 악양 성문 앞에  내걸어 구경시키려는 걸까?

두 명의 지옥야차객.

그들은 유령 같은 신법으로  무풍신룡의 좌우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광의 살기가 눈에서 일렁였다.

"그대… 들은…?"

무풍신룡은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상대의 신분을 물었다.

웃었다.

지옥야차객은 죽음의 미소를 무풍신룡에게 보내 주고 있었다.

스스슥-!

지옥야차객의 신형이 떠올랐다.

살수를 전개하려는 자세로 보여졌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가?

강호의 신비이객 중 일 인이 아니던가?

만만하게 당할 무풍신룡이 아니었다.

그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 바람에 독상은 더욱 깊숙이 침투해 들었다.

그렇지만 그건 차후의 문제였다.

당장은 죽음으로 다가오는 지옥야차객들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지옥수라(地獄修羅)-!"

벽력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혼미한 중에서도 무풍신룡은 몸을 빙글 돌렸다.

사문의 신법을 전개하며 본능적으로 쌍장을 휘둘렀다.

전력을 다한 필살의 일격이었다.

우르릉-!

굉음이 장심을 통해  발산되었다. 그러나 평소의 공력에는 어림없는 일 장이었다.

"욱!"

지옥야차객들은 중상자에게 마음놓고 공격을 가해 오다 기습을 당하고 말았다.

그들의 입술을 비집고 피가 흘렀다.

"흐흐… 그래도 이름값은 하겠다는 건가?"

"무풍신룡, 발악하는군."

이제 더 이상의 반격을 가할 수 있는 힘은 모조리 소멸되었다.

독은 이미 무풍신룡의 체내 깊숙이 침투하여 그를 괴롭혔다.

서서히 칠공으로부터 핏물이 새어 나왔다.

지옥야차객들의 살수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죽은 목숨이었다.

갑자기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광월아도!

무심하고 냉정한 표정의 사내. 그는 자신이 끝내 여인인 줄 모르고 떠나갔다.

신비이객(神秘二客)!

강호인들이 자신들에게 붙여 줬던 명예로운 호칭이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강호를 주유하고 싶었거늘….

공포마저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이 땅바닥을 향해 기울어지고 있는 것조차 못 느끼고 있었다.

다시 죽음의 그림자, 지옥야차객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이 쥐고 있는 병장기가 번쩍 빛을 발했다.

지옥의 손짓인 양. 바로 그 때였다.

무풍신룡은 본 듯했다.

옥수임풍(玉樹臨風),

보기 드물게 준수한 청년이 자신을 애처로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그의 눈빛은 찬란했고, 미소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청년은 바로 지옥야차들의 뒤편에서 나타났다.

환상(幻想)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