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십대겁난(十大劫亂)
그들은 용(龍) 문양이 새겨진 두 개의 보좌에 근엄하게 앉아 있었다.
동해무성의 위패가 놓여 있는 좌측에 자리잡은 인물은 청삼(靑衫) 차림에
눈처럼 흰 턱수염을 무릎까지 덮은 노인이었다.
눈매가 부드럽고 입술에 윤이 흐르는 모습이 금세라도 말을 뱉어 낼 듯싶었다.
그리고 천마존의 위패가 놓여 있는 우측에 자리잡은 인물은 봉안(鳳眼)과 태산준봉처럼 우뚝 솟은 콧날,
한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 등 준미(俊美)하면서도 강직한 인상의 금의(錦衣)중년인이었다.
냉한웅은 숙연해짐을 느꼈지만 고개를 숙이진 않았다.
그는 빛이 뿜어져 나오는 구멍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 때, 차곡히 쌓인 세 권의 책자와 한 통의 서찰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냉한웅은 서찰을 먼저 집어 들어 펼쳤다.
<그대가 천존부(天尊府)에 올 줄 알고 있었노라.
천존부의 비급 세 권에 수록된 무학은 정존부의 열여섯 권과 사존부,
마존부의 각 아홉 권에 수록된 무학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것이다.>
냉한웅은
어안이 벙벙했다.
세 권의 수록된 무학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정(正), 사(邪), 마(魔), 서른네 권에 실린 방대한 무학들마저 이토록 업수이 여긴단 말인가?
<노부의
사부는 모두 다섯 분으로, 스스로 운몽오우(雲夢五友)라 칭했다.
그분들은 강호에 명호가 전혀 안 알려진 무명이인(無名異人)이었으나,
가진 바 무공과 학문은 중원천지를 뒤덮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운몽오우의 능력이 이토록 크나, 염려하는 것이 있었으니….
서장일궁(西藏一宮),
천축이사(天竺二寺),
묘강삼교(苗彊三敎),
대막사문(大漠四門).
이들은 새외 변방과 관외 지역에 웅거하는 조직들이었다.
그들이 저마다 세력을 키우며 호시탐탐 중원을 칠 기회를 노리고 있음을 아는 운몽오우 역시
그들을 암암리에 감시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운몽오우 중 천문(天文) 및 신산지학(神算之學)에 가장 뛰어난 천기자(天機子)가 밤하늘을 살피다
전대미문의 대혈겁을 예고하는 징조(徵兆)를 발견하였다.
그분은 이를 십대겁란(十大劫亂)이라 칭했으니,
대란(大亂)이 새외십문(塞外十門)으로 인해 일어남을 가리킨 것이었다.
운몽오우는 그들의 무공을 견식해 본 터라, 침식(寢食)을 거를 만큼 근심에 휩싸였다.
천기자는 조(兆 : 거북의 등껍질을 구어 생긴 균열로 길흉을 알아 내는 점술)를 보아
대란이 삼 갑자 이후에나 일어날 것을 알아 냈으며,
새외십문의 극성이 될 천고(千古)의 기재(奇才)도 그 즈음에 태어난다는 것을 알아 냈다.
대란(大亂)에 대비키 위한 준비에 넉넉한 시일이 있음을 안 운몽오우는
불귀해의 해저(海底)에 천존비동을 만들기 시작했다.>
냉한웅은
그제서야 사건의 전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운몽오우의 제자인 동해무성이 중원의 구파일방을 굴복시키고 비급들을 가져간 것은,
수치를 안겨 주어 더욱 분발케 하려는 의도 외에도 여러 가지 숨은 뜻이 있었구나."
<천기자의
예언대로라면 이 글을 읽는 그대도 새외십문과 관련이 있으리라.
또한 십대겁란에 휘말려 운명이 바뀌어질 기재이리라.
천기자는
그대가 음양태령절맥을 지니고 태어날 것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점괘에조차 승패(勝敗)가 나오지 않은 암흑의 대란을 과연 그대가
막아 낼 수 있을는지….>
냉한웅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새외십문과 관계 있다니…
그러나 전혀 생각나지 않아! 태검장에 들어가기 이전의 생활이….'
그는 기억해 내려 손에 움켜진 서찰이 짓이겨지는 것조차 모른 채 생각을 거듭했으나,
태검장의 뼈아픈 기억만이 세세히 떠오를 뿐이었다.
"총기가 천인(天人)에 달한 지금도 기억해 낼 수 없으니, 하늘의 뜻이랄밖에 없구나."
그는 탄식을 내뱉으며 비급들을 집어 들었다.
<천극음양경(天極陰陽經)>
<마극혈강경(魔極血 經)>
<사극염라경(邪極閻羅經)>
삼극경(三極經).
이 중 천극음양경은 동해무성이 남긴 것이었고, 나머지는 마황(魔皇)과 사황(邪皇)의 비급이었다.
냉한웅은 마황과 사황의 비급을 제단 위에 내려놓고 천극음양경을 펼쳤다.
<천극오행심법(天極五行心法).
태초(太初)에 모든 사물(事物)이 정리되어 있지 않아, 이를 혼돈(混沌)이라 하였다.
이것에 속한 모든 것이 휘감기며 하나를 이루었으니, 태극(太極)이라….
여기서 뜨겁고 밝은 것을 양(陽)이요, 차갑고 어두운 것을 음(陰)이라 하여 나누었다.
양이 위로 올라가 천(天)이 되고, 음이 아래로 향하여 지(地)가 되었으며…
이 천지 사이에 음양(陰陽)의 정기(精氣)를 지니고 태어난 것이 바로 인(人)이다.
천(天)에서 가장 뜨거운 것이 화(火)를 이루고, 그 중 차갑고 어두운 것이 금(金)을 이루었다.
지(地)에서는 가장 차가운 것이 수(水)를, 뜨거운 것이 목(木)을 이루었다.
인(人)은 뜨겁고 차가운 것을 조화(造化)시켜 중토(中土)를 이루니, 이것이 바로 오행(五行)이니라.>
이어
심법의 구결이 적혀 있었는데,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고금제일의 내공심법이니만큼
연성의 결과에 따라 얻게 되는 효과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만약
오 성(成)을 익히면 내공이 노화순청(爐火純靑)에 이르고,
팔
성(成)이면 오부조원(五府朝元), 삼화취정(三花聚頂)에…
그리고 십이 성(成) 대성하면 천강지체(天鋼之體)의 몸이 되어 만독(萬毒)이 불침한다.
무상보리신공(無上菩提神功).
달마대선사(達磨大禪師)가 남긴 세수(洗髓)와 역근(易筋) 편에 있는 가장 고강한 신공으로,
유중강(柔中强) 강중유(强中柔)… 강함과 부드러움을 함께 지니고 있어 공수(攻守) 모두 가능하다.
상대의 공력을 나누어 받음으로써 충격을 크게 줄이는 분자결(分字訣).
상대의 공력을 되돌려 보내 역공을 취할 수 있는 탄자결(彈字訣).
이것은 상대의 공력이 강할수록 반탄력이 강해지는 묘용(妙用)도 있었다.
항마수미신장(降魔須彌神掌).
동자배불(童子拜佛),
복마앙불(伏魔仰佛),
항마불광(降魔佛光),
수미단열(須彌斷熱).
사 초(招) 칠십이 식(式)의 이 장법 역시 강유(强柔)를 겸한 절학(絶學)으로,
십이 성에 달하면 마기(魔氣)를 제압하는 신력(神力)이 생긴다.
반야보리검법(般若菩提劍法).
신검합일(身劍合一)의 탕마보리(蕩魔菩提),
이기어검강(以氣御劍 )인 보리무상(菩提無上),
무형어검강(無形御劍 )인 무상범천(無上汎天).
삼 초(招) 모두가 절정의 검도이나, 마지막 초식인 무형어검강이야말로
전설의 검신(劍神)이 펼쳤다는 진정한 무상검도(無上劍道)인 것이다.
대나이신법(大羅理身法).
천축(天竺) 밀교(密敎)의 비전신법이나, 그 심오막측함은 중원의 그 어느 신법과도 비교될 수 없다.>
천극음양경에는 운몽오우(雲夢五友)의 무공 외에 동해무성 본인이 만들어 낸 한 가지 신공이 적혀 있었다.
<천극음양패겁공(天極陰陽覇劫功).
정도(正道) 무학의 패도적인 수법만을 모아 창안하였으나,
그 어떤 사공(邪功)도 이보다 더 패도적이지는 못하리라.>
천극음양패겁공은
동해무성의 호언 이상으로 공포스러운 무공이었다.
냉한웅은 섬칫한 심정으로 천극음양경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마극혈강경(魔極血鋼經)을 집어 들었다.
마경(魔經)의 첫 장을 장식한 것은 음공(陰功)이었다.
팔십여 년 전, 흔적 없이 자취를 감춘 혈살방(血殺幇) 방주 혈살신마(血殺神魔)의 독문수법.
<혈살한빙공(血殺寒氷功).
만년한빙(萬年寒氷)에서 나오는 극음(極陰)의 기운을 흡수하여 연마하는 마공으로,
이 강기(鋼氣)에 격중되면 공력이 심후해 얼어 죽지 않더라도 한독(寒毒)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혈살검법(血殺劍法).
전 삼 초(招)로 이루어진 검법으로, 이것을 제대로 받아 낸 무림인은 오직 천마존뿐이다.
서른여섯 개(個) 방위를 동시에 노릴 수 있는 혈살(血殺).
중원제일의 쾌검초(快劍招)라 불리울 만큼 빠르기 그지없는 혈섬(血閃).
보리무상(菩提無上)과 같이 이기어검강을 형성하나, 무변중만변(無變中萬變)…
변화 속에 변화가 있어 그 위력은 오히려 한 단계 위인 혈참(血斬).
석년에 천마존조차도 혈참에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으니…
만약 천마존이 혈살신마를 가벼이 보고 전력을 다하지 않았더라면,
이 초식에 의해 어떤 낭패를 당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 외에도 참륙혈마장(斬戮血魔掌), 만겁혈황지(萬劫血荒指), 폭뢰수(爆雷手),
천마패겁혈공(天魔覇劫血功)과 같이 다양한 종류의 무공이 수록되어 있었다.
냉한웅은 마극혈강경의 무학이 천극음양경의 것들에 비해 떨어지기는 하나,
크게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의 장점을 지닌 것을 깨닫고 내심 놀랐다.
'혈살방이 한때 중원을 제패했던 것은 세력의 웅대함에 기댄 것이 아니라 혈살방주의 진재실학 때문이었구나!'
마경의 내용을 모두 기억한 그는 쉴 틈 없이 사극염라경(邪極閻羅經)으로 바꾸어 들었다.
<잔인귀염공(殘忍鬼閻功).
사공(邪功)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것으로 소문난 이것은,
백여 년 전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배교(拜敎)의 비전절학이다.
그렇다면 잔인교(殘忍敎) 교주였던 잔인사황(殘忍邪皇)이 배교의 후인(後人)이었단 말인가?
잔인귀염공은 내적으론 극열(極熱)의 양강지기(陽强之氣)를 지니고 있으나,
외적으론 음한지기가 표면을 덮고 있어 상대가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묘용이 있다.
또한 양강지기의 위력은 중원의 그 어떤 양공(陽功)도 비교하지 못할 만큼 대단하여,
천마존을 제외한 상대 모두가 숯처럼 검게 타 버리거나 아예 한 줌의 재로 변하였다.
그리고 무상보리신공(無上菩提神功)의
천강지체에는 못 미치나,
십이
성(成) 대성하면 도검(刀劍)에도 상하지 않는 사령강체(邪靈鋼體)가
된다.
다시 말하면 금강불괴지체(金剛不壞之體)를 연성하는 호신신공이기도 하니…
공수(攻守) 양면으로 무상보리신공과 비교할 경우, 공격(攻擊)에 있어서는 오히려 더 효과적이다.
잔혼도법(殘魂刀法).
혈살검법과 마찬가지로 전 삼 초(招)로 이루어졌으며,
첫 초식인 잔혼(殘魂)도 혈살(血殺)과 같이 서른여섯 개(個) 방위를 동시에 노릴 수 있다.
하나 검(劍)이 베고 가르는데 비해, 도(刀)는 찍고 쪼개는 것이었으니…
잔혼이 위맹함에 있어선 단연 앞서는 것이다.
두
번째 초식인 파혼(破魂)은 도(刀)의 특성인 강맹을 위주로 해,
스쳐
지나는 곳에 동강나지 않는 것이 없다.
이 도초(刀招)는 도강(刀 )을 형성해야만 사용할 수 있으며, 어떠한 호신강기라도 파괴할 수 있다.
마지막 초식인 잔폭(殘爆)을 완전히 익힌 사람을 가리켜 도신(刀神)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도강(刀鋼)을 펼쳐 무려 삼백육십 개(個) 방위를 엄밀히 방어하고,
같의 수의 방위를 동시에 공격할 수도 있다면 그 누가 이를 막으랴?
하지만 잔폭을 십이 성(成) 펼치려면 근골(筋骨)과 오성(悟性)이 상지상(上之上)이어야 한다.
또한 임독(任督)과 양맥(陽脈)이 타통되어야 함은 물론, 삼 갑자 이상의 공력이 필요하다.
이런 조건을 모두 구비한 이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잔인사황도 결국 육 성(成)에 머물고 말았다.
잔양수라지(殘陽修羅指).
소리가 없고(無音), 형태가 없으며(無形), 흔적이 남지 않는다(無痕) 하여 삼무지(三無指)라고도 불리운다.
이 지법은 세 초식으로 나누어져 있다.
빠름을 위주로 하는 섬전지(閃電指).
다수의 적을 사용할 때의 수법으로,
열 개의 손가락에서 동시에 지풍(指風)을 날릴 수 있는 연환지(連幻指).
파괴력을 위주로 한 뇌멸지(雷滅指).
이는 호신강기를 파괴할 때 가장 효과적이다.
사극무형강(邪極無形 ).
무색투명한 강기(鋼氣).
잔인사황의 무공 중에서 가장 강맹한 것으로, 그 살상력은 잔인귀염공(殘忍鬼閻功)을 능가한다.
또한 무상보리신공(無上菩提神功)의 탄자결(彈字訣)처럼 상대의 공력을 되돌려 보낼 수도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무리 심한 상처를 입어도 숨만 붙어 있다면 빠르게 치유가 되어 살아난다는 점이다.
하지만 완벽히 연성하려면 임독(任督)과 양맥(陽脈)의 타통은 물론,
사 갑자를 상회하는 공력이 필요하다.
잔인사황도 간신히 오 성(成)에 이르렀을 뿐으로,
만약 팔 성(成)에만 달했더라면 천마존에게 패하지 않았으리라.>
이 밖에도 다양한 사공(邪功)과 사술(邪術)들이 수록되었는데…
<탈심고루음부공(奪心
賜陰腐功),
구유마라공(九幽魔羅功),
혈사잔음강(血邪殘陰 ),
백골수라빙혼무(白骨修羅氷魂舞),
천령호혼강시대법(天靈呼魂彊屍大法).>
그야말로
사도무학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었다.
냉한웅의 얼굴에 의혹의 기색이 떠올랐다.
'천극음양경은 동해무성, 마극혈강경은 혈살신마,
그리고 사극염라경은 잔인사황이 수록했다. 그렇다면 천마존은…?'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등을 돌렸다.
순간, 그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삼극경(三極經)에만 정신을 쏟은 사이, 주위에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정(正),
사(邪), 마(魔), 삼존부의 갈라 놓았던 석벽이 비켜 나…
정존부의
십육 명과 사존부, 마존부, 각 아홉 명씩…
도합 세른네 명의 인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냉한웅은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혈살신마와 잔인사황은 천마존의 양 팔과 같은 존재들이니,
결코 저들 무리에 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천마존도….'
음양태령절맥을 치료해 천인(天人)과 같은 총기를 지니게 된 그였으니, 틀린 판단은 아니리라.
하지만 신도 실수를 한다는데, 인간의 판단이 완벽할 수 있을까?
냉한웅은 자신 있는 걸음으로 다시 청동 향로에 다가갔다.
그는 끊임없이 향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 향로 속에 오른손을 깊이 쑤셔 넣었다.
음양태령절맥이
완치되려면 삼 갑자가 넘는 공력을 지녀야 함을
영령천의(靈靈天醫)의
의서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냉한웅은 거침없이 뜨거운 잿가루에 손을 파묻었던 것이다.
다음 순간, 냉한웅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감돌았다.
하나, 손을 데이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향로의 삼분의 이는 모래로 채워졌고, 향초(香草)는 모래 위에 덮여 있었다.
모래 속 깊숙이 파고든 냉한웅의 손에 한 권의 책이 쥐어졌다.
'천마존, 정말 괴팍한 인물이로군. 그러나 재미있는 장난이야.'
<사마천존경(邪魔天尊經)>
책자의
표지를 바라보는 냉한웅의 두 눈에 호기심이 가득 어렸다.
'혈살신마와 잔인사황을 제압한 무공이란 어떤 걸까?'
그는 서둘러 책장을 넘겼다.
<천존멸겁강(天尊滅劫
).
천마존은 오 성의 천존멸겁강으로, 혈살신마의 혈살한빙공(血殺寒氷功)과
잔인사황의 잔인귀염공(殘忍鬼閻功)을 제압했다고 했다.
동해무성이 만든 천극음양패겁공(天極陰陽覇劫功)에 비해 한 치도 뒤지지 않는 절학이었다.
염라천존수(閻羅天尊手).
양 손이 핏빛으로 물들면 태산도 꿰뚫는다는 수도법(手刀法)으로, 도검은 물론 호신강기도 파괴할 수가 있다.
잔인사황의 사극무형강(邪極無形 )도 이것에 의해 깨진 바가 있었다.
당시 그가 오 성(成)밖엔 연성 못했던 탓도 있긴 했으나,
그 정도 호신강기로도 도검(刀劍)에 상해를 입지 않을 만큼 사극무형강의 위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니 염라천존수의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 아니겠는가?
천마존은 이 무공을 단 두 번 사용했는데…
한번은 잔인사황을 상대할 때고,
다른 한 번은 그에게 반기를 든 지옥대혈제(地獄大血帝)를 처치하기 위해서였다.
천존경혼장(天尊驚魂掌).
삼 초식인 이것은 장법(掌法)이 아니라 장강(掌鋼)이다.
명칭 그대로 벽력과 같은 굉음을 내며 닿는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리는 천뢰지굉(天雷之宏).
백여 장이나 떨어진 생물까지도 격살(擊殺)할 수 있는 천절멸겁(天絶滅劫).
그리고 천마존이 한 번도 실전에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천폭파황(天爆破荒).>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그러나 이 초식이 염라천존수로부터 펼쳐지는 장강이니만큼
그 위력이 앞의 두 초식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임은 물론, 염라천존수보다 더욱 파괴적일 것이 분명했다.
이 밖에도 천고광절(千古廣絶)의 무학들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그중 특히 냉한웅의 관심을 끈 것은 칠 초(招)의 선법(扇法)이었다.
<천존유섬단(天尊幽閃斷),
천존패혈류(天尊覇血流),
천존마극참(天尊魔極斬),
천존지옥결(天尊地獄決),
천존염라멸(天尊閻羅滅),
천존파황무(天尊破荒霧),
천존광폭겁(天尊狂爆劫).>
천존칠선(天尊七扇)이란
명칭이 붙여진 이 무공은 참으로 신비로웠다.
<선초(扇招)로써
지법, 장법, 검법, 도법 등 그 무엇으로든 펼칠 수
있으니…
고금(古今)을 통틀어도 이러한 절학은 또 없으리라.>
사마천존경(邪魔天尊經)을 다 읽은 냉한웅은 시선을 다시 제단으로 향하였다.
동해무성과 천마존의 모습을 다시 보고자 함이었다.
순간, 그는 놀람과 아쉬움이 섞인 외침을 토해 냈다.
"아니…?"
동해무성과 천마존의 형상을 절묘하게 그려 냈던 빛은 어느 새 사라지고,
그 자리엔 네모난 금합 한 개만이 덩그라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팍-!
금합의 뚜껑을 여니, 소음과 함께 한랭한 기운이 흘러 나왔다.
안에는 한 통의 서찰과 섭선(摺扇)이 들어 있었다.
한랭한 기운은 만년빙옥(萬年氷玉)을 깎아 만든 섭선의 살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천에는 산수화(山水畵)와 참선(參禪)하는 부처의 모습이 금실로 수놓아져 있었는데…
비단도 아니요, 짐승의 털은 더욱 아닌 알 수 없는 것이었으나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질겼다.
불타(佛陀)의 좌상(坐像), 그것은 정존부의 석상을 그린 것이었다.
서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본존(本尊)은
천하를 굴복시키고자 불귀해(不歸海)를 찾았으나,
동해무성은
이마저 예측하고 안배를 해 놓았으니…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또한 그대를 위하여 안배를 해 놓았으니, 삼존부(三尊府), 사대비고(四大秘庫)가 그것이다.
본존 역시 그대를 위해 몇 가지 안배를 해 놓았다.
하지만 동해무성의 행위에 감명을 받아서가 아니라 본존의 분신(分身)을 찾고 싶어서이다.
그대에게 천마존의 신물인 천존선(天尊扇)을 주겠노라.
이 섭선은 마존령(魔尊令)으로도 불리운다.
공력의 주입 정도에 따라 전면에 수놓아진 불타(佛陀)의 모습이 마존(魔尊)과
아수라파천귀(阿修羅破天鬼)로 바뀌어지기 때문이다.
후면에는 본존의 뜻을 거역하는 자에 대한 징벌을 적어 놓았으니, 적절하게 사용토록 하라.
본존에게는 네 가지 규칙이 있다.
첫째, 마존령을 모독하는 자는 그 누구라도 형벌을 가한다.
둘째, 천마존의 명을 거역하거나 대항하는 자는 즉시 멸(滅)한다.
셋째, 색(色)을 즐기되 정(情)을 주어서는 안 된다.
넷째, 천마존에게는 존장(尊長)이 없으니… 어떠한 신분에 있는 자라도 하대하라.>
냉한웅은
천존선을 펼친 후, 약간의 공력을 주입시켰다.
순간, 눈부시게 흰 백옥선이 시커멓게 변해 갔다.
동시에 불타의 형태도 아수라파천귀로… 더욱 공력을 가하니,
이번엔 마존의 얼굴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짝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준수한 그것은 마존부(魔尊府) 석상의 모습이었지만,
어찌 보면 냉한웅의 얼굴과 흡사했다.
혼을 앗아 가는 듯한 마소(魔笑)는 더욱…!
냉한웅은 공력을 풀며 후면을 살폈다.
거기에는 산뜻하게 먹물로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면사(免死)>
그가
다시 공력을 주입시키니, 글씨들이 계속 바뀌었다.
<단이(斷耳)…
귀를 자르라.>
<절비(絶鼻)… 코를 없애라.>
<참수(斬手)… 손목을 자르라.>
<알목(軋目)… 눈알을 뽑아 버리라.>
<사분(四分)… 앞의 네 가지 형벌을 모두 가하라.>
죽음을
대신하는 형벌이란 것이 죽음보다 별로 나을 게 없었다.
하나,
냉한웅은 천마존의 성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맹세하노니, 이후 강호에서 천마존의 뜻을 거슬리는 자!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오.'
냉한웅은 고개를 돌려 흘낏 삼존부(三尊府)
서른네 명의 고수들 무릎에 놓인 비급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뿐이었다.
삼극경(三極經)과 사마천존경(邪魔天尊經),
이 네 권의 책만을 집어 든 그는 미련 없이 천문고(天文庫)를 떠났다.
냉한웅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지무고(地武庫)였다.
광장(廣場)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넓은 석실로,
한 구석엔 옥같이 맑은 샘물이 솟아올라 장기간 무공을 수련하기에 적당해 보였다.
또한 천 권도 넘을 듯 다양한 무서(武書)들이 꽂혀 있는 서가(書架)가 있었으며,
석벽 곳곳에 십팔반무기(十八班武器) 및 각종 기형병기(奇形兵器)들과 암기(暗器)들이
상당수 걸려 있었다.
다음은 인독고(人毒庫)였다.
여기엔 동해무성의 다섯 분 사부,
즉 운몽오우(雲夢五友) 중의 한 분인 독성자(毒聖子)가 수록한 독경(毒經) 외에
천하의 독(毒)들을 모두 모아 놓은 듯 무수한 약병(藥甁)들로 채워져 있었다.
독경에는 살아 있는 독물(毒物)을 다루는 활독편(活毒編)과
독의 살포와
해독(解毒) 및 응용 방법들, 그리고 무영지독(無影之毒),
산공독(散功毒),
일적봉후(一滴封喉), 칠보단장(七步斷腸) 등 독에
관한 모든 것이 적혀 있었다.
또한 독공(毒功), 독을 이용한 무공들이 적혀 있었는데…
이것들은 살상력에 있어 어떤 사공이나 마공보다도 더 효과적이었다.
마지막 비고(秘庫)인 황보고(黃寶庫)는 휘황찬란한 보광(寶光)으로 채워져 있었다.
금강석(金剛石), 야명주(夜明珠), 호박(琥珀), 비취(翡翠), 마노(瑪瑙), 진주(眞珠) 등
불귀해에서 침몰되었다는 만보선(萬寶船)의 보물들이었다.
냉한웅은 작은 산처럼 쌓여 있는 보물들을 대하자, 흥미가 싹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모두가 빛나는 돌덩이들 아닌가? 지니고 다니기에 거추장스러운 물건들일 뿐이야.'
이 때, 갑자기 그의 눈에 이채(異彩)가 스쳐 갔다.
오색영롱한 빛을 뿜어 내는 수만 가지 보물들 중에 유독 초라해 보이는 기물(奇物)!
그것은 한 자루 퉁소(簫)였다.
'어째서 저것만은 화려함 속에서 동떨어져 있는가?'
윤기 잃고 퇴색된 퉁소는 일견하기에도 지독히 볼품이 없었다.
그는 퉁소를 집어 들며 속삭였다.
"천존비동이 나의 운명을 바꾸었듯, 너 또한 나에 의해 고귀하게 변할 것이다."
그가 퉁소를 입으로 가져가자, 선음(仙音)인 양 청아하고 감미로운 음률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삘릴리리……!
유선곡(遊仙曲)이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들었던….
하나, 그는 곧 퉁소를 든 손을 힘없이 떨구었다.
그의 무심한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 곡이 나의 신분내력을 밝혀 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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