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개방서생

제6장 천존비동(天尊秘洞)

오늘의 쉼터 2016. 5. 31. 08:24

제6장 천존비동(天尊秘洞)

 

냉한웅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마존부로 향했다.

죽음의 길을 제대로 찾았다는 생각에서인지

그의 표정은 침착하며 추호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나, 입구 안으로 막 한 발을 내딛었을 때.

"악!"

냉한웅은 비명을 내질렀다.

갑자기 시뻘건 기류가 상하좌우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다.

다음 순간, 냉한웅은 심신이 날 듯 가벼워짐을 느꼈다.

혈무(血霧)는 그가  마존부의 통로를 지나는  동안에도 계속 그의 전신을 감쌌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의 체내로 스며들고 있었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랄까?

천 근(斤) 쇳덩이 같던 육신이 새털처럼 가벼워지자,

냉한웅의 심정은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석실  앞에 도달한 그는 공포에 질려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진홍색(眞紅色) 의복을 걸친

아홉명의 노인들이 석실 안 좌대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유명을 달리한 듯 꼼짝 않고 있었다.

슬금슬금 다가간 냉한웅은 그들이  숨을 쉬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다.

'어떻게 이런 자세로 죽음을 당했을까? 그것도 아홉 명이 똑같이...'

노인들은 시체로 변했지만 하나같이 위엄과 풍채가 대단했다.

만일 냉한웅이 약간이라도 명석했다면,

그들의 의복과 육체가 부패하지 않았음을 의심했으리라.

냉한웅은 그들의 무릎 위에 놓인 책자로 시선을 돌렸다.

한 명에 한 권씩, 모두 아홉 권이었다.


<수라혈경(修羅血經)>

<사인예(死刃銳)>

<현마비급(玄魔秘 )>

<패천마라강(覇天魔羅 )>

<지마록(地魔錄)>

<악령파천신공(惡靈破天神功)>

<광폭마심수(狂暴魔心手)>

<섬강폭혈도법(閃剛瀑血刀法)>

<미혼색심비록(迷魂色心秘錄)>


아, 하나같이 가공할 마공(魔功)들.

이 중의 한 가지만이라도 연성한다면 당금강호 무림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쉽지 않으리라.

하지만 냉한웅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였다.

그에겐 오로지 영령천의(靈靈天醫)를 찾고자 하는 일념뿐이었다.

'열일곱 명의 고수들이 동해무성을 찾아 불귀해로 왔다고 했으니, 여덟 명이 더 있겠군.'

냉한웅은 몸을 돌려 마존부를 신속하게 벗어났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몇 가지 변화가 있음을 느꼈다.

몸이 가벼워졌을 뿐만 아니라 안개가 낀 듯 항시 흐릿하던 머리속마저 맑아진 듯했다.

그는 사존부로 들어갔다.

흑무(黑霧).

그 곳 통로에서는 거무스레한 기류가 뿜어져 나왔는데,

마존부에서보다 더욱 몸이 가벼워진 듯 느껴졌다.

통로의 끝에 같은 모양의 석실이 있었으며,

좌대에 아홉 명의 노인이 앉은 채 죽어 있는 것까지도 똑같았다.

의복 색깔이 먹처럼 검다는 것만 빼놓고...

오랫동안 숫자를 세고 난 냉한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이게 어찌 된 노릇이지?

분명히 열일곱 명의 고수들이 왔다고 들었는데…?"

멍청하게도 그는 무풍신룡이 얘기한 십칠 인만을 떠올릴 뿐,

다른 변수(變數)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그가 노인들의 무릎에 한 권씩 놓여 있는 책자를 들어 읽기 시작했다.


<음시귀환술(陰屍鬼喚術)>

<사령비천유혼공(死靈飛天幽魂功)>

<아수라혈사록(阿修羅血死錄)>

<부골독무전(腐骨毒霧箭)>

<강시무(彊屍霧)>

<섭혼제심대법(攝魂制心大法)>

<사왕비급(邪王秘 )>

<만겁탈혼살(萬劫奪魂殺)>

<음령염황술(陰靈炎黃術)>


얼마나 지독한 사공(邪功)들인지 명칭만 보아도 알 만했다.

"이 곳에도 내게 필요한 것은 없구나. 영령천의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냉한웅은 실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사존부를 나섰다.

더 이상 선택할 여지가 없어진 그는 곧장 정존부 입구로 뛰어들었다.

이번엔 백무(白霧)였다.

눈처럼 새하얀 연기가 칠공(七孔)을 통해 들어와 전신에 퍼지자, 
마치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석실에 도달한 그의 두 눈이 휘둥그래 떠졌다.

무려 열여섯 명이나 되는 백의노인들이 좌대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마존부나 사존부에서 보았던 노인들보다 용모가 단정했고, 고아한 기품마저 엿보였다.

또한 석실 안엔  청량한 기류가 계속 맴돌고 있어,

혹시 선계(仙界)에 들어오지 않았나 착각할 지경이었다.

'열여섯… 그렇다면 다른 한 명은……?'

어쨌든 이들이야말로 틀림없이 무풍신룡이 얘기했던

십칠 인의 고수라 생각한 냉한웅은 물을 본 고기처럼 달려갔다.

다음 순간, 그의 표정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크윽!"

살가죽이 갈가리 찢겨 벗겨져 나가고, 뼈 마디마디가 모조리 퉁겨져 나가는 듯한….

그것과 죽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면 세상 어느 누구라도 두말 없이 죽음을 택하리라.

냉한웅은 자신의 몸을 쥐어뜯으며 뒹굴었다.

그는 당장 혀를 깨물어 죽고 싶었으나, 너무도 억울해 그럴 수 없었다.

영령천의가 눈앞에 있을지 모르잖는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데…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초절한 인내력과 아집을 지닌 그는 마치 상처 입은 벌레 마냥 느릿느릿 기어 더 가까이 다가갔다.

목전의 열여섯 명 중에서 영령천의를 찾으려는 필사의 몸부림이었다.

하나, 사람의 체력엔 한계가 있는 법.

"으으……!"

냉한웅의 손끝이 허공을 몇 번 더듬다가 맥없이 떨어졌다.

바로 백의노인들 앞에서….

이 때, 홀연.

우웅웅……!

괴이한 음향과 함께  석실 벽이 갈라졌다.

그리고 환영(幻影)처럼 세 명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동시에 나타났으나, 인상이나 분위기가 실낱만큼도 비슷한 데가 없었다.

눈부시게 흰 학창의(鶴 衣)를 입은 노인.

선풍도골이란 말 그대로였다.

표정은 봄볕처럼 부드러웠으며, 눈빛은 샘물처럼 맑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인중은 덕망을,

우뚝 솟은 콧날 아래 굳게 다문 입술은 성품의 강직함을 느끼게 했다.

먹물 처럼 짙은 흑의를 입은 노인.

전신에 사악한 기운이 감도는 그는 무엇이 그리도 못마땅한지 눈썹이 팔(八)자를 그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두 눈에서는 음랭한 광채가 야수(野獸) 마냥 번뜩였다.

인상 역시 양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광대뼈에 코는 갈고리를 연상케 할 만큼 구부러졌고, 

입꼬리는 허공으로 치켜져 있어 매우 신경질적인 성격임을 느끼게 했다.

핏물에 배인 듯 짙은 홍의를 입은 노인.

두 눈에서 폭사되는 살광(殺光), 입가에 어린 살기(殺氣) 등 등골이 오싹하리만큼 

차가운 인상이나 젊었을 때의 준수함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아마도 강호 여인들의 눈물 깨나 짜게 만들었으리라.

하지만 은은히 풍기는 위엄과 기도는 태산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이들 삼 인(人)의 내력이 뭐길래, 함께 정존부에 나타난 걸까?

흑의노인이 입술을 달싹여 한기 어린 음성을 흘렸다.

"실망이외다. 겨우 이런 잡물(雜物)이 들어오다니…."

다음 순간, 백의노인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그러나 이 아이의 의지는 참으로 경탄할 만하오이다."

그의 음성은 인상처럼 부드러웠다.

홍의노인이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이 아이가 무성(武星)께서 예언한 후계자(後繼者)가 틀림없소이까?"

"그것은 모르겠으나 제일 먼저 마존부로 들어선 것으로 미루어, 
우리와 인연이 있음은 확실하오이다.

만약 이 아이가 정존부나 사존부를 가장 먼저 선택했더라면, 혈맥이 터져 죽었을 것이오."

백의노인의 대답에 홍의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존부의 혈무(血霧)가 천년주과(千年珠果), 공청석유(孔淸石乳),

구엽설향영지초(九葉雪香靈芝草)로 이루어졌기에…

이 아이가 극음(極陰)의 흑무와 극양(極陽)의 백무를 견딜 수 있었지요."

흑의노인은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냉한웅을 바라보았다.

"흑무는 한음설심과(寒陰雪深果)와 천년하수오(千年何首烏), 그리고 빙령초(氷靈草)의 정화인데…."

백의노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  백무도 구엽지령초(九葉地靈草)에

만년삼왕(萬年三王)과 철피화룡(鐵皮火龍)의 내단을 혼합하여 만든 것이니,

흑무에 비해 결코 덜 귀하지 않소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이름들인가?

천고(千古)에 다시 없는 영물(靈物)들, 그것이 몽땅 한 소년의 몸 속에 들어가 버리다니….

만약 무림인들이 이 소리를 들었다면 상당수가 배 아파 복통을 일으키거나, 분통이 터져 병이 났으리라.

홍의노인이 재촉했다.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기다렸소이다. 어서 살펴보시오."

백의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냉한웅의 옷을 하나도 남김없이 벗겼다.

냉한웅의 근골을 주물러 본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짐작대로 별로 좋은 편은 못 되는군."

그가 중얼거리자, 흑의노인이 화가 난 음성으로 외쳤다.

"어디 좋은 편이 못 될 정도요?

노부가 이 갑자(甲子)를 넘기고도 삼십 년을 더 살아왔지만,

이처럼 형편없는 약골(弱骨)은 처음 보오이다."

"하지만 음양천옥관(陰陽天玉棺)에 사십구 일 간 넣어 놓으면 근골이 완전히 바뀌게 될 것이오."

백의노인이 달랬지만 흑의노인의 노기(怒氣)는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녀석을 천존비동(天尊秘洞)의 주인으로 만들어야 하다니…."

홍의노인도 의혹 어린 눈빛으로 냉한웅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잘못 짚은 게 아닐까요?"

"……."

이때, 계속해서 주의 깊게 냉한웅을 맥을 짚어 본 백의노인의 표정이 싹 변했다.

놀람과 의심, 그리고 흥분….

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휩떠졌다.

"이… 이럴 수가……?"

흑의노인과 홍의노인도 눈을 휘둥그래 떴다.

"무슨 일이오이까?"

백의노인은 감격에 겨워 외쳤다.

"음양태령절맥(陰陽太靈絶脈)이오.

무성께서 이 몸의 목숨을 오래토록 보존시키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구나!"

그의 노안(老眼)에 금시 그렁그렁한 물기가 어렸다.

흑의노인과 홍의노인의 표정들 역시 그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들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렇지만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

아니, 입을 벌리긴 했으나 격동에 겨워 소리를 내뱉지 못하고 있는 것만이 차이일 뿐이었다.

백의노인은 마치 신 들린 사람 마냥 냉한웅을 껴안고

자신들이 나타났던 석벽 안으로 몸을 날렸다.

흑의노인과 홍인노인도 그림자처럼 그의 따랐다.

자연 그대로에 인공(人工)을 약간 가미한 듯 신비롭기 그지없는 형태의 지하 광장.

정중앙에는 수정처럼 투명한 관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괴이하게도 뚜껑 윗부분은 불덩이처럼 시뻘겋고,

밑바닥은 설산의 빙석(氷石)처럼 희다 못해 파란빛이 감돌고 있었다.

백의노인은 관 안에 조심스레 냉한웅의 몸을 눕혔다.

홍의노인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그 절증을 완치시킬 수 있단 말이오?"

백의노인은 자신 있게 미소지어 보었다.

"음양천옥관(陰陽天玉棺)과 노부의 일월금침대법(日月金針大法), 
그리고 무성과 마존이 남긴 진신정혈(眞身精血)이 있으니…

이보다 더한 절증이라 하더라도 문제없소이다."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그의 눈에서 신념의 광채가 폭사되었다.

"사십구 일… 이제 사십구 일만 지나면…."

흑의노인과 홍의노인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지나면… 어찌 된단 말이오?"

어느 새 백의노인의 표정이 엄숙하게 변해 있었다.

"불세제일(不世第一)이자 고금유일(古今唯一)!

즉 전설의 검선(劍仙)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오!"


삘릴릴리… 삘리……!

천상(天上)의 선음(仙音)인가?

아름다운 음률이 천지를 포근하게 감싸며 맴돌았다.

하늘에 나는 새, 숲 속 동물들과 물 속의 고기들이 음률을 쫓아 춤을 추었고…

초목(草木)들까지도 도취된 듯 흐느적거리며 향기를 폴폴 날렸다.

다음 순간, 갑작스럽게 천음(天音)이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

우웅… 우히잉…!

광음(狂音).

귀신의 호곡성(號哭聲)인 양 천지간에 메아리치는 음률은 모든 생명체를 발광케 했다.

그리고 점점 더 광폭해지더니, 천지를 무너뜨려 버릴 듯 사면팔방으로 휘몰아쳐 갔다.

콰르릉- 꽝-!

한 줄기 거센 빛살이 어둠을 꿰뚫고 날아와 뇌리(腦裏)에 박혔다.

"헉!"

냉한웅은 가쁜 숨을 토해 내며 눈을 떴다.

꿈이었던가?

몽롱한 의식 속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 듯한 느낌.

아직 살아 있음이 신기하게 생각된 그는 자신을 살펴보다 깜짝 놀랐다.

청석으로 만들어진 연화좌대(蓮花座臺)에 가부좌(跏趺坐) 자세로 앉아 있었다.

입고 있던 남루한 의복 또한 청의경장 차림으로 바뀌어져 있지 않은가?

하지만 냉한웅이 아직 발견 못한 것이 또 있었다.

아, 옥골선풍(玉骨仙風)!

작은 점 하나 발견할 수 없고, 백옥처럼 윤기가 흐르는 피부….

세상 어느 미녀가 이토록 곱고 깨끗할 수 있을까?

검미(劍眉)에 지혜와 영기(靈氣)가 번뜩이는 성목(星目).

오똑 솟은 콧날은 장부의 기상을 여실히 드러냈고,

단아한 입술은 세상에 이보다 더 부드러운 것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체구 또한 열네 살 소년의 몸이라곤 그 누구도 믿지 않을 만큼 건장한 청년의 것처럼 변해 있었다.

천하제일의 미장부(美丈夫)!

그를 달빛이라 하다면, 석년에 준수한 용모로 중원천지에 이름을 떨쳤던 반안(潘安)이나

송옥(松玉) 같은 이는 반딧불빛 정도에 불과하리라.

그러니 비룡서생 남궁진악이 당금무림의 후기지수 중 제일의 미남이라 불리우긴 하나, 말해 뭣하랴?

거울이 없어 자신의 용모를 보지 못한 냉한웅이었으나,

다른 변화는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치 몸이 공기로 변한 양 무게를 전혀 느낄 수가 없었고,

청량한 기운만이 사지백해(四肢百骸)를 감도는….

혼수상태에서 들은 음률도 선명하게 기억되어 떠올랐다.

문득 냉한웅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유선곡(遊仙谷)의 절심단혼곡(切心斷魂曲)!"

다음 순간, 그는 움찔 놀랐다.

'음률에 문외한인 내가 어떻게 곡명을?

귀신에게 홀린 것인가?

니면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냉한웅의 눈에 접혀져 있는 한 장의 서찰이 보였다.

모든 것이 궁금하던 터라 다급히 펼쳐 보니, 간단한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입동(入洞)을 환영하오. 사대비고(四大秘庫)로 가시오.>


냉한웅의 머리는 즉각 결론을 내렸다.

'이 비동에는 고인(高人)이 생존해 있으며,

그는 냉모(冷某)에게 우호적이긴 하나 시험을 하려 한다.

그의 말에 따를 경우, 득은 있을지언정 별다른 해는 입지 않을 것이다.'

그가 정말 태검장의 한심이 냉한웅이란 말인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냉한웅이 감격의 외침을 토해 냈다.

"영령천의, 그분의 구원의 손길이 닿았구나!"

하지만 그는 곧 의문에 빠졌다.

'영령천의는 동해무성과 동시대(同時代)의 이인이다.

의술과 무공이 뛰어나다곤 하나, 인간이 어떻게 사 갑자가 넘도록 살 수 있을까?'

냉한웅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몸을 일으켜 네 칸의 석실이 있는 곳으로 접근하였다.

석실마다 입구 위쪽에 명칭이 새겨져 있었다.


<천문고(天文庫)>

<지무고(地武庫)>

<인독고(人毒庫)>

<황보고(黃寶庫)>


냉한웅은 전혀 거리낌없이  천문고(天文庫)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곳은 방원  십 장 정도의 넓이로, 전혀 석실이란 느낌이 들지 않게 꾸며져 있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천장의 야광주들이 천리화통(千里火筒)보다도 밝게 비추어 주었다.

입구 부분을 제외한 사면의 벽에는 족히 만여 권에 달할 듯싶은 서적들이 빼곡이 꽂혀 있었다.

냉한웅은 일찍이 이렇게 많은 책자들을 대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입가에 호감 어린 미소가 번졌다.

'누구의 안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정성이 하늘에 닿을 듯싶구나.'

냉한웅의 시선은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과도 같이 빠르게 책자들의 표지를 훑었다.

시(詩), 서(書), 화(畵)로 시작하여  행기문(五行奇門)…

또는 팔괘하락(八卦河洛) 등의 신산지학(神算之學)과 일반 잡학(雜學)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갑골문(甲骨文)으로 쓰여진 고서(古書)며 기서(奇書),

천축불경(天竺佛經) 등 학자(學者)들이 평생을 두고 구하려 애쓰는 서적들도 상당수 있었다.


<천의신술(天醫神術)>

냉한웅이 가장 먼저  뽑아 든 책자는 의서(醫書)였다.

영령천의서(靈靈天醫書)라 적혀 있는….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책장을 넘기며 읽어 갔다.

 

<노부는 이 한 권에 모든 의술을 담았다.

후반부에는 각종 희귀한 절맥(絶脈)에 관해 기록하였으니….>


냉한웅의 손이 대충 건너뛰어 의서 뒤편을 펼쳤다.

그는 오음절맥에 관한 부분을 살폈지만,

자신의 상세와는 거리가 멀자 계속해 책장을 넘겼다.

순간, 그의 눈동자가 예리한 광채를 발했다.

음양태령절맥(陰陽太靈絶脈).


<이 절증은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의서(醫書)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노부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음양태령절맥을 지니고 태어난 이를 본 적이 없으며,

소문으로조차 들은 적이 없다.

천년신맥(千年神脈)이라 일컫는 태양신맥(太陽神脈)과 태음신맥(太陰神脈),

모두를 지닌 이가 정말 존재할까?

태양신맥을 지닌 이는 노부가 직접 만나 완치시킨 적이 있었는데, 
그의 기억력이나 판단력 등 지혜(知慧)는

오음절맥을 지닌 이조차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만약 음양태령절맥을 지닌 자가 정말 있어,

양대신맥 모두를 치료한다면 그의 총명함은 천인(天人)에 달하리라.

음양태령절맥을 치료하려면 환자와 시술자, 모두 삼 갑자(甲子) 이상의 공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일월금침대법(日月金針大法)을 사용해야 한다.

이 금침지술을 터득한 이는 천하에 노부 하나뿐이니,

노부 외 그 누가 음양태령절맥을 완치시킬 수 있으리요.

하나 음양태령절맥은 전설에 불과할 뿐이라, 능력이 있어도 사용치 못하니… 심히 안타깝구나.>


일순, 냉한웅의 몸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역시… 영령천의는 생존해 있었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어찌…!"

나직한 중얼거림이었지만 벅찬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운 듯,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잠시 마음을 다스린 후, 손을 뻗어 다른 책자를 집어 들었다.


<기관건축총해(機關建築總解)>

이백여 년 전에 기관지학(機關之學)으로 명성을 떨쳤던 귀진자(鬼陣子)가 저술한 책자였다.

내용이 매우 난해하기 짝이 없어,

이 방면에 뛰어난 장인(匠人)이라 할지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냉한웅은 겨우 향 두어 개비 탈 시각이 흘렀을 때, 책장을 덮었다.

동시에, 그의 얼굴엔 엷은 미소가 피어 올랐다.

마소(魔笑)….

더구나 용모가 일신(一新)한 그였으니, 그 신비로움을 어찌 말로 표현하랴!

만약 거울이 있어 그가 이 순간, 자신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면 넋이 나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냉한웅은 기관건축총해를 원래의 자리에 꽂아 놓기 무섭게, 밖으로 나갔다.

서찰에 쓰여진 대로 나머지 세 개의 석실을 두루 살펴보려는 걸까?

아니었다.

그는 곧장 자신이 앉아 있던 연화좌대(蓮花座臺)로 가 털썩 올라앉았다.

이어 그는 몸을 빙글 회전시켰다.

위잉-!

기계음과 함께 좌대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하자,

냉한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짐작대로 천존비동은 귀진자의 솜씨였군.'

총기(聰氣)가 범인(凡人)에도 못 미쳐 멍청한 놈이라 멸시와 놀림을 받았던 그가 이렇게 변하다니…!

좌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냉한웅이 전에 보았던 삼존부(三尊府) 입구 앞이었다.

그는 아수라파천귀 석상에 자리한 사존부로 들어섰다.

이번에는 흑무가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석실 안에는 변함없이 아홉 명의 흑의노인들이 좌대에 앉아 있었다.

흑의노인들의 얼굴을 세밀히 관찰한 냉한웅은

그들의 굳은 표정에 한 가닥씩 각기 다른 감정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사(邪)가 극(極)에 이르면 불(佛)로 변화한다.

칠정육욕(七情六欲)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런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구나.'

그는 흑의노인들의 뒤로 돌아가 감추어지듯 중앙 좌대 뒤편에 박혀 있는

흑(黑), 백(白), 홍(紅), 세 개의 금강석(金剛石)들을 바라보았다.

"모든 기관을 귀진자가 설계했다면…

삼존부의 중심이 되는 궁문(宮門)이 사존부이며, 궁문을 여는 열쇠가 바로 이 보석들의 중심점이다."

그는 자신 있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세 개의 금강석들이 한 점(點)으로 만나는 부분을 오른손 엄지로 눌렀다.

우르르릉-!

톱니 쇠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음향이 귀청을 두드리듯 요란하게 석실 안에 울려 퍼졌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석벽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순간, 단향이 짙게 풍겨 나오며 우아하기 그지없는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은 왕(王)자가 이마에 새겨진 호피(虎皮)들로 빈틈없이 깔려져 있었고,

운석(雲石)으로 이루어진 벽은 어찌나 매끈하게 다듬었는지 거울처럼 얼굴을 비추었다.

"어? 이게 누구…?"

석벽에 비추인 자신의 모습을 본 냉한웅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자신 외엔 아무도 없지 않은가?

그는 너무도 믿어지지 않아 낼름 혀를 내밀거나 눈썹을 찡그리는 

여러 가지 표정을 지어 보고 나서야 흥분된 기색을 띠었다.

"후후후… 남궁진악은 강호무림에서 자기가 제일 준수한 줄 알고 있지.

그 자가 내 모습을 보면 얼굴을 들고 다니기가 부끄러워질 것이다."

벽에는 상당히 오래 된 것으로 보이는 서화(書畵)가 걸려 있었으며,

진귀한 골동품들이 빈 자리들을 격조 있게 메워 한참 동안이나 그의 시선을 잡아 두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냉한웅의 시선을 끈 것은 제단(祭壇)이었다.

제단에는 두 개의 위패(位牌) 외에 세 아름이 넘는 커다란 청동(靑銅) 향로(香爐)가 놓여 있었는데,

끊임없이 정신을 맑게 하는 향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두 개의 위패는 핏빛처럼 짙은 홍판(紅板)에 먹으로 글씨를 쓴 것이었다.

냉한웅은 어딘가 모르게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위패를 넋 나간 듯 바라보았다.

<동해무성(東海武聖) 사마궁(司馬宮)>

<천마존(天魔尊) 독고기(獨孤奇)>

사 갑자 전에 중원천지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신비인(神秘人) 동해무성과

그로부터 약 일 갑자 뒤, 마도(魔道)와 사도(邪道)를 외길로 이어 놓았던 귀재(鬼才) 천마존!

문득 냉한웅은 이들에 관해 두려움과 경의를 표하던 무림인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천하를 한 손에 움켜쥔들 무슨 소용인가? 결국 한 줌의 재로 변하고 만 것을….'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상념에 잠겨 있던 냉한웅이 갑자기 제단에 바짝 다가섰다.

제단이 지나치게 넓게 만들어져 있음을 수상하게 여긴 것이었다.

기관을 작동시킬 만한 그 무엇을 찾기 위해 위패를 살피고 제단 곳곳을 더듬어 봤지만,

별다른 것을 발견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청동 향로뿐… 좌우로 돌려 보고 밀어도 봤지만, 꿈쩍도 안 했다.

"에잇!"

성질이 난 냉한웅은 자신도 모르게 양 팔로 청동 향로를 번쩍 치켜올렸다.

그 순간, 청동 향로가 놓여 있던 자리로부터 강렬한 광채가 폭사됐다.

칠채(七彩).

무지개와 같은 빛깔이었다.

이어 제단 위에 빛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인영이 자태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