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아, 불귀해(不歸海)
망망대해(茫茫大海).
사방은 온통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짙푸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맑은 하늘과 잔잔한 바다….
그 사이를 자로 긋듯 가른 수평선(水平線)에 흑점이 나타났다.
대귀선(大龜船)!
차츰 형태를 드러낸 그것은 거북 형태의 거대한 선박(船舶)이었다.
더욱 특이한 점은, 돛이 달려 있지 않고 선체에 무엇을 칠했는지 거울처럼 물빛을 반사했다.
대귀선의 선상에 두 인영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낡은 의복에 피로가 역력해 보이는 소년과
눈처럼 흰 유복(儒服)자락을 표표히 휘날리며 먼 바다를 응시하는 소년.
이들의 표정과 용모 또한 극히 대조적이었다.
평범한 얼굴에 감정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표정과
백옥같이 곱고 깨끗한 얼굴에 살풋 미소를 띄운 이들은, 바로 냉한웅과 무풍신룡이었다.
무풍신룡이 불쑥 입을 열었다.
"사람이라면 감정이 있기 마련인데, 냉형은 언제까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거요?"
"……."
"중원을 벗어난 지가 열흘이 넘었는데,
그 동안 냉형이 입을 연것은 단지 세 번에 불과하오. 정말 답답하군요."
냉한웅은 내심 크게 놀랐다.
'내게 왜 이렇게 관심을 갖는 걸까? 혹시 눈치를…….'
그는 매우 불안했으나 무표정하게 굳어 버린 얼굴이라, 추호도 그런 기색이 드러나지 않았다.
"냉형은 아직도 소제를 경계하고 계시오?"
"……."
이 때, 물찬 제비같이 맵시 있는 여인의 모습이 이들 곁으로 다가왔다.
차연화,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얼굴은 햇살을 받아 더욱 밝게 빛났다.
순간, 무풍신룡은 다른 미소를 떠올렸다.
'분광월아도의 미소!
그것에 비한다면 저 여인의 미소는 얼마나 천한 것인가?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러나 무지한 여심(女心)은 즐겁기만 했다.
"냉소협은 상대하기가 너무 까다로워요. 그렇지 않나요, 하소협?"
무풍신룡은 냉한웅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그렇지 않아요. 냉형은 겉으로만 무뚝뚝할 뿐이지,
실상 매우 정감(情感)이 풍부한 분이오."
냉한웅이 등을 돌려 자리를 뜨자, 그는 더욱 큰 음성으로 외쳤다.
"소제는 느껴 알고 있습니다!"
냉한웅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분광월아도가 아닌 그로서 이 방법밖에 무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휴!"
무풍신룡이 쓸쓸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탄식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향긋한 내음이 그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소녀가 보기엔 소협께서 더 정감이 풍부하신 것 같아요."
무풍신룡의 입가에 곤혹스런 미소가 흘렀다.
"글쎄… 요."
"소녀는 이제서야 소협을 만나게 된 것이 무척 안타까워요.
하지만 아직 늦지는 않았다고 믿어요."
의미심장한 그녀의 말에 가슴이 뜨끔해진 무풍신룡은 화제를 돌렸다.
"이 선박…은 매우 훌륭하군요.
낭자의 부친께서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실로 존경을 금할 길 없습니다."
일순, 차연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명문(名門)의 자녀답게 예의를 잃지 않았다.
"아버님은 이 선박을 제작하시느라 이십 년이 넘게 노심초사(勞心焦思)하셨지요.
불귀해가 사해(死海)라 할지라도, 우릴 어쩌지 못할 거예요."
"대체 어떤 특징이 있기에 그토록 자신하는 겁니까?"
무풍신룡의 의혹 어린 시선에 차연화는 신이 나 종달새처럼 재잘거렸다.
"대귀선은
일반 선박과 다른 점이 무려 일흔두 가지에 달하지요.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점은 천망(天網)……."
차연화의 해맑은 눈빛이 바다로 향한 채 더 이상 말을 않자,
무풍신룡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천망…?"
차연화도 '장군멍군'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다시 화제를 끌어 왔다.
"이런 재미없는 얘기는 그만하지요. 소협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어요."
그녀의 옥음(玉音)은 떨리듯 흘러 나왔고, 꿈에 취한 듯 영롱한 눈빛은 물결 따라 넘실거렸다.
자신을 향한 순정(純情)이 그녀의 눈에서, 입에서…
아니, 전신 가득 넘쳐흐르자 무풍신룡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이 몸도 낭자처럼 연모(戀慕)의 정(情)을 그에게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
냉한웅은
선실 구석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한 곳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엔 천도탈혼(天賭奪魂) 방문웅(方文雄), 무산괴마(巫山怪魔) 여량(呂凉),
진천패도(震天覇刀) 피천웅(皮天雄), 탈혼비마(奪魂飛魔) 손학위(孫學爲)가 도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인원들은 구경하느라 그들 주위를 에워싸 냉한웅은 등짝들밖엔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냉한웅은 결과를 알고 있었다.
한 판이 끝날 때쯤이면 으레 방문웅의 웃음소리가 선실 안에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냉한웅의 관심은 도박이나 방문웅의 신기에 달한 도박술에 있지 않았다.
눈은 독사 같은 세모꼴에 굽어진 매부리코,
그리고 얄팍한 입술등 음침한 기운이 가득 흐르는 사파(邪派)의 거두(巨頭) 피천웅에게 호감을 느껴서였다.
지난 열흘 간 그가 잃은 은자(銀子)는 족히 천 냥을 넘었는데, 늘 싱글벙글 웃기만 하였다.
다른 이들은 그보다 훨씬 적게 잃고도 분해 하였으나, 그만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아무리 재화(財貨)가 많아도 그렇지, 저 사람은 나보다도 더 어리숙하군.'
세상 어떤 인물이 거듭거듭 손해를 입으면서도 웃어넘길 수 있겠는가?
이런 면에서 피천웅이 얼마나 대단한 배포를 지녔는지 알 수 있을것이다.
냉한웅의 호감은 피천웅의 어리숙함과 많은 재물에 있었다.
만일 그가 명석한 두뇌를 지녔더라면 이런 것들보다는 피천웅의 사람됨에 더 호감을 느꼈으리라.
이때, 선실의 문이 사납게 열리며 차연화가 뛰어들었다.
"바다… 가 이상해… 요."
순간, 차비운이 선실 밖으로 몸을 날리며 외쳤다.
"불귀해!"
이 말을 들은 중인들의 안색이 일시에 확 바뀌었으나,
한 사람… 냉한웅만은 무표정 그대로였다.
중인들이 앞다투어 뛰쳐나갔으나, 방문웅만은 자리에서 옴싹달싹도 하지 않았다.
그는 기분이 몹시 상한 듯 큰 소리로 투덜댔다.
"도박을 중도에서 포기하는 것은 노부의 규칙에 어긋난다. 돌아와라."
하지만 그의 외침은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제기랄!"
잔뜩 인상을 우그러뜨린 채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선실 구석에 꽂혔다.
"소협은 왜 남아 있소?"
"……."
그는 냉한웅이 입을 꾹 다문 채 텅 빈 눈빛만을 던지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소협과 상대하다간 내 숨통이 막혀 죽겠소."
방문웅이 중얼거리며 나가 버리자, 냉한웅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실상 그는 기진맥진한 상태라, 말은커녕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겨웠던 것이다.
하지만 밖에서 들려 온 소리에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물살이 너무 강해 배가 뒤집히겠다!"
"어서 천망(天網)을 칠 준비를 해라!"
설산신니와 차비운의 다급한 음성이었다.
냉한웅은 부시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냉한웅의 이목(耳目)에 와 닿는 것이라곤 지척을 분간키 어려울 만큼 짙은 해무(海霧),
그리고 대귀선 주위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해류(海流)의 노호(怒號)뿐!
"여기… 가 불귀해… 인가요?"
차연화의 입술이 두려움으로 가늘게 떨리자, 무풍신룡이 얼른 대답했다.
"불귀해가 틀림없는 것 같소이다."
아, 전설의 불귀해!
수많은 신비를 간직한 그 곳에 지금 와 있는 것이다.
대귀선의 고수들은 흥분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때, 하늘이 순식간에 검게 변했다.
아니나 다를까?
쿠르릉- 쾅-!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빗줄기가 폭포수(瀑布水)처럼 쏟아져 내렸다.
해류도 더욱 거칠어져 대귀선의 선상을 넘나들 만큼 거대한 파도로 변하자,
고수들의 눈빛에서 흥분은 사라지고 두려움만이 가득 자리를 잡았다.
"아니? 이거 큰일이군!"
"어옹, 방법이 없겠소?"
차비운은 걱정 말라는 듯 빙그레 웃어 보이며 두 팔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어디선가 기음(奇音)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위잉- 위이이잉-!
사일악이 재빨리 선박의 후미를 가리켰다.
"저길 보시오."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린 중인들의 입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탄성이 튀어나왔다.
"오……!"
"정말 멋지군!"
선박의 후미로부터 비단처럼 얇고 투명한 막이 포물선을 그리며 밀려 오고 있었다.
그것이 선상을 삼분의 일쯤 덮었을 때,
차연화가 발을 굴러 일학충천(一鶴沖天)의 경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차앗-!"
그녀는 앙칼진 기합 소리를 내지르며 검을 휘둘러 중앙에 우뚝 서 있는 망대를 베어 냈다.
다음 순간, 설산신니가 쌍장을 휘둘렀다.
펑-!
검에 절단되어 아래로 떨어지던 망대가 장력에 휘말려 바다로 날아갔다.
동시에 차연화의 교구가 허공에서 빙글 회전한 후, 가볍게 내려섰고…
한 동작인 듯 잽싸고 자연스럽게 연결된 수순(手順)으로
미리 약속해 두지 않고는 행할 수 없는 절묘한 배합이었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다른 고수들은 어리둥절해 할 뿐이었다.
이때, 무풍신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망이란 게 바로 저것이었군. 선상을 완전히 덮기 위해 망대를 제거했고… 정말 대단해."
"이토록 기이막측한 장치가 되어 있었다니…."
중인들의 얼굴에 경탄의 빛이 가득하자, 차비운은 흐뭇한 표정으로 턱수염을 내리쓸었다.
쿠르릉- 쾅-!
쏴아… 쏴아아……!
바다가 광란(狂亂)의 몸부림을 쳐 댔지만,
대귀선에 타고 있는 고수들은 더 이상 여파를 받지 않았다.
하나, 고수(高手)는커녕 하수(下手)조차 못 되는 냉한웅은…?
파리해진 안색의 그는 토하기 위해 아직 천망에 덮이지 않는 선수(船首) 쪽으로 비틀비틀 다가갔다.
기관을 조정하는 차비운의 안색이 침중하게 변했다.
"불귀해의 소용돌이가 예상보다 거세구나. 하늘마저도 이 모양이니…."
차연화가 부친의 염려를 덜어 주기 위해 방긋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천망이 완전히 덮였으니, 설사 배가 뒤집어지더라도 걱정 없잖아요?"
"……."
차비운의 얼굴에서 좀처럼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자, 설산신니가 물었다.
"어디에 이상이 생긴 건가?"
"아, 그런 건 없습니다."
차비운은 부정하였으나, 표정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콰광-!
무엇에 부딪친 듯 엄청난 폭음과 함께 대귀선이 우측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이어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돌았다.
"앗!"
"이… 게……?"
강호를 주름잡던 뛰어난 무공도 전혀 도움이 안 되었다.
고수들의 몸이 너 나 할 것 없이 바닥에 마구 나뒹굴었다.
자연 앞에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
그들은 차츰 의식을 잃어 갔다.
끼륵-
끼르르륵-!
검푸른 물결을 가르는 갈매기의 울음이 퍽이나 상쾌하다.
여인의 속살처럼 보드라운 햇빛을 슬쩍슬쩍 퉁겨 내는 잔잔한 수면(水面).
그 위를 기이한 모양의 거선(巨船)이 맴돌고 있었다.
대귀선(大龜船)!
이 선박에는 많은 중원의 고수들이 타고 있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조용했다.
간밤의 폭풍우와 불귀해의 광란 속에 모두가 생사(生死)를 달리한 것일까?
이때, 설산신니가 가느다란 신음을 흘리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으……!"
두통(頭痛)을 느낀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태양혈(太陽穴)을 짚으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모두가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무산괴마, 무풍신룡, 천도탈혼, 백운신검, 진천패도, 탈혼비마, 독군, 하남일장, 강북화,
그리고 수공(水功)에 있어 따를 자 없다는 장강어옹까지도….
"무서운 용권풍(龍拳風 : 소용돌이)이었다.
노신이 이들보다 심후한 내공을 지녔기에 먼저 깨어난 게야."
아직 충격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비틀비틀 일어선 그녀는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 흥분된 음성을 토해 냈다.
"아, 불귀해! 그렇다면 여기에…."
그녀는 황급히 몸을 날려 뱃전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시야에 들어온 것이라곤 끝없는 수평선(水平線)뿐.
얇고 투명한 천망(天網)을 통해 사방을 바라보는 설산신니의 눈빛이 차츰 암담하게 변해 갔다.
이때, 문득 발 아래쪽이 질퍽임을 느꼈다.
내려다보니, 선상이 바닷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천망이 씌어져 설사 배가 뒤집혔었다 해도 이런 일은 없을 텐데…?'
의혹 어린 눈으로 천망을 살피던 그녀는
선미 부분에 어린아이 하나가 드나들 만한 크기의 작은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 때문에 해수(海水)가 들어온 것이로군.
도검으로도 훼손 안 되는 천망이 찢겨지다니…."
설산신니가 신음 비슷하게 웅얼거리고 있을 때, 여량의 외침이 들려 왔다.
"기니(奇尼),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불귀해는 단지 사해(死海)일 뿐이었네."
그녀가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자, 여량도 어깨가 축 쳐졌다.
"그렇다면 동해무성이나 만보선, 십칠 인의 고수들, 천마존까지 모두 수장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보아야겠지."
이들이 대화를 주고받을 때, 중인들이 선실 밖으로 분분히 뛰쳐나와 상황을 살폈다.
그들의 얼굴엔 한결같이 실망의 기색이 떠올랐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을 수가… 작은 섬조차도 보이지 않잖아?"
하나, 그 실망감마저 오래 가지 않았다.
"어? 분광월아도가 어디로 갔지?"
천도탈혼 방문웅의 음성은 중인들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인물은 무풍신룡이었다.
순간, 그는 바다제비 마냥 낮게 몸을 날려 선박 곳곳을 샅샅이 뒤져 나갔다.
다른 고수들도 흩어져 배 안을 돌아봤지만, 그 어디에도 냉한웅은 없었다.
다시 한자리에 모인 이들이 문제 해결의 열쇠를 찾느라 고심할 때,
차연화가 찢겨진 천망을 가리켰다.
"저 곳만이 대귀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예요."
백운신검 나인걸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작은 구멍으로 어떻게…?"
"그는 몸집이 작은 편이죠.
배가 기울어질 때 퉁겨져 머리부터 구멍 밖으로 빠져 날아갔다면, 충분한 크기가 아니겠어요?"
방문웅도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으로 철썩! 자신의 무릎을 쳤다.
"분광월아도가 선미 쪽으로 가고 있는 걸 보았소이다. 아마도 그 때…."
무풍신룡은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죽일 듯 차비운을 노려봤다.
"어옹, 어째서 천망이 찢겨 나간 것이오?"
노기와 슬픔이 뒤섞인, 정녕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눈빛이었다.
설산신니도 무엇을 느낀 듯 날카롭게 소리쳤다.
"천망은 노신이 묘강(苗疆)에서만 생식하는
철갑지주의 괴사(怪絲)를 설산(雪山) 천년빙옥수(千年氷玉水)에 구십구 일 간 적시고,
설광(雪光)으로 구백구십 일을 말려 만든 것이다.
절대로 찢어질 수가 없다."
"……."
차비운이 얼굴을 붉힐 뿐 대답을 않자, 방문웅이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막이 있는 것 같군. 어서 털어놓으시오."
중인들이 차비운을 살인자처럼 몰아세우자, 보다 못한 차연화가 나섰다.
"저의 아버님께선 대귀선을 만드느라 천금(千金)과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을 바쳤습니다.
어이해 중죄인(重罪人) 취급하시는 겁니까?"
진천패도 피천웅의 입가에 싸늘한 살기가 감돌았다.
"그 천금은 노부와 방형이 대준 것이다.
대귀선을 건조하는 계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졌는데, 이런 변괴(變怪)가 생기다니…."
차연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버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차비운은 고개를 푹 떨구며 더듬거렸다.
"내… 불찰이… 다. 천망의 끝부… 분이 모자라 다른 것으로 대치 … 시킨 것이 그만…."
순간, 무풍신룡이 이를 갈았다.
"기니(奇尼)께서 천망을 모자라게 주셨을 리가 없소. 분명 당신이 일부를 빼돌렸을 거요."
"닥쳐라!"
차비운도 노갈을 터뜨리며 무풍신룡을 노려보았다.
무풍신룡이 두 눈에서 살광(殺光)을 폭사했다.
"당신의 검은 심장을 도려 내어 냉형의 영전(靈前)에 바칠 것이오."
"노부가 너 같은 애송이를 두려워했다면, 대귀선을 만들기 이전에 강호를 떠났을 것이다."
차비운도 섬칫한 살기를 내뿜으며 분수아미자(分水蛾眉刺)를 뽑아 들었다.
중인들은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헷갈려 하면서도 한편 의아해 했다.
'무풍신룡이 분광월아도와 함께 신비이객(神秘二客)으로 불리우긴 하지만,
친형제나 사형제간도 아닌 그가 왜 저토록 격분한 걸까?'
"으음…
으으……!"
냉한웅은 휘황찬란한 광채에 휩싸인 채 계속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그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활처럼 굽어진 기형(奇形)의 도(刀)만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갑자기 냉한웅의 몸이 꿈틀거렸다.
그는 잠시 후, 힘겹게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성한 데가 없는 듯 전신이 욱씬거림을 느끼며 사방을 둘러보던 그가 다시 신음을 뱉어 냈다.
"으……!"
눈부심 때문이었다.
빛의
근원을 살피던 그는 천장과 바닥에 용안(龍眼)만한 야명주가
각각 세
개씩 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신이 있는 곳이 석동(石洞) 안임도….
철썩- 철썩-!
파도 소리가 귀에 와 닿자, 그는 놀라 음향이 들려 온 곳을 바라보았다.
불과 일 장도 채 떨어지지 않은 발치까지 바닷물이 밀려 왔다 쓸려 가곤 했다.
그제서야 지난 일이 떠올랐다.
흔들림에 속이 뒤집혀 토하려 선미 쪽으로 갔을 때, 엄청난 폭음과 함께 배가 기울어졌다.
그때, 자신의 몸이 어디론가 날아갔는데….
"거참, 괴이하구나."
지금쯤 바닷물 속의 고기밥이 되어 있어야 할 자신의 몸이 아닌가?
문득 아래편의 바닷물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째서 파도가 더 이상 다가들지 않는 걸까?'
머리가 둔한 그였지만, 이것이 지형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란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밀물의 높이가 그가 선 키보다도 높았다.
하지만 일 장쯤 앞에 접근하기 무섭게 도로 물러가곤 했으니까.
"……?"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일다경(一茶頃) 가량이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그가 히죽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야명주의 광채!
그것이 비치는 곳엔 더 이상 밀물이 스며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 이것은 말로만 듣던 피수주(避水珠)가 분명하구나.'
냉한웅은 내심 감탄을 하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길고 널찍한 통로 어디에도 거미줄 하나 발견할 수 없을 만큼 깨끗했는데,
이도 야명주의 빛 때문인 듯싶었다.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십여 장쯤 걸어가자,
반월형의
석문(石門)이 나타났다.
<불귀해저(不歸海低)
천존비동(天尊秘洞)>
청강석(靑鋼石)에 세 치 깊이로 새겨진 글자는 용봉(龍鳳)이 어우러져 춤추는 듯했다.
천자문을 삼 년 만에 뗀 냉한웅의 학문이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읽는 정도는 그다지 불편이 없었다.
"여기에 불귀해의 보물이 숨겨져 있다니…."
그가 석문의 글씨를 어루만져 보고 있을 때.
우르르릉-!
멀리서 천둥이 울리는 듯한 음향과 함께 석문이 옆으로 밀려났다.
"으악!"
냉한웅은 놀라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주위에 누군가 있었더라면, 결코 이런 예민한 반응를 보이지 않았으리라.
어쨌거나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냉한웅은 두려움 반 호기심 반인 심정으로 문 안에 들어섰다.
순간, 냉한웅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마치 황성(皇城)을 옮겨다 놓은 듯 엄청나게 넓고 화려한 대전(大殿)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두 아름이 넘는 굵은 대리석 기둥 열두 개가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거울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진 천장에는 은하수처럼 수많은 야명주들이 박혀 있어,
넓이가 수십 장에 달하는 내부를 대낮처럼 밝혀 주었다.
대전 내부 이 곳 저 곳을 기웃거리던 냉한웅은 세 개의 석상(石像) 앞에 멈춰 섰다.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인 양 의미 깊은 불소(佛笑).우측의 석상은 불타(佛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사악한 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귀소(鬼笑).
중앙의 석상은 아수라파천귀(阿修羅破天鬼)였는데,
그 표정의 섬세함은 경탄보다 더 큰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모골이 송연해진 냉한웅은 얼른 좌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헉!"
그는 질식할 것만 같은 압박감에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금시라도 자신의 혼백을 앗아 갈 듯한 마소(魔笑).
'이럴게 잘생긴 남자가 과연 세상에 있을까?'
좌측의 석상은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석상들의 미소는 하나같이 심상치 않았으나, 냉한웅은 다른 데 신경을 쏟았다.
석상들의 아랫부분에 나 있는 통로.
그 곳은 장정 한 사람이 드나들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또한 각각 금빛 찬란한 글자가 양각(陽刻)되어 있었다.
<정존부(正尊府)>
<사존부(邪尊府)>
<마존부(魔尊府)>
냉한웅은
경이로운 시선으로 삼존부(三尊府)의 입구를 살피었다.
불타의 정존부에서는 당장이라도 자신을 부드럽게 감싸 줄 듯 온화한 기류가 느껴졌다.
아수라파천귀의 사존부에서는 그의 가슴을 얼려 버릴 듯 지독히도 음산한 기류가 뿜어져 나왔다.
마존(魔尊)의 마존부로부터 느껴지는 살기.
죽음의 냄새가 짙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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