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개방서생

제4장 장강어옹(長江漁翁) 차비운(車飛雲).

오늘의 쉼터 2016. 5. 31. 08:17

제4장 장강어옹(長江漁翁) 차비운(車飛雲).



양자강 어귀에 있는 그의 장원에서는 지금 조촐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여러 명의 인물들이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정면에 자리한 혈색 좋은 금의인(錦衣人)이 바로 차비운이었다.


곁에는 날아갈 듯 맵시 있는 여인이 붙어 앉아 애교를 떨고 있었다.


바로 차비운의 삼녀(三女) 중 차녀(次女)인 차연화(車蓮花)였다.


제사차 강호명화대회(江湖名花大會)에서 강북화(江北花)로 선출된 미녀.


그녀는 문무(文武)에 뛰어난 재녀(才女)이기도 했다.


맞은편 자리에는 수염이 덥수룩한 장한이 쏟아 붓듯 술병을 바닥내고 있었다.


산악을 방불케 하는 거구에 형형한 안광…….


한눈에도 대단한 고수임을 알 수 있는 그는


백운보(白雲堡) 보주인 백운신검(白雲神劍) 나인걸(羅人傑)이었다.


그 외에 사파(邪派)의 거두인 진천패도(震天覇刀) 피천웅(皮天雄),


소림사(少林寺) 속가제자인 하남일장(河南一掌) 손무(孫繆),


천중사기(天中四奇)중 일 인인 천도탈혼(天賭奪魂) 방문웅(方文雄),


그리고 나이를 짐작키 어려운 노파(老婆)가 이들 틈에 끼여 있었다.


이 때, 노파의 주름진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어떤 쥐새끼들이 노신(老身)의 흥을 깨느냐?


일시에 다른 고수들의 안색이 확 변하며 주위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휙- 휙-!


파공성과 함께 몇 개의 인영(人影)이 야조(夜鳥)처럼 담을 넘었다.


이들 야행인(夜行人)들은 모두가 뛰어난 경공을 지닌 듯 새털처럼 가볍게 내려섰다.


성미 급한 나인걸(羅人傑)이 금시라도 장검을 뽑을 듯 채비를 갖추며 호통을 쳤다.


"어떤 놈들이기에 이토록 무례하느냐?"


야행인들 중 백의서생이 청아한 음성을 토해 냈다.


"나보주(羅堡主), 너무 흥분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결코 나쁜 뜻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장강어옹 측의 이목이 모두 그에게 집중됐다.


"으음……!"


나직한 묘음(妙音)이 그 누구의 입에선가 새어 나왔다.


차연화, 그녀의 방심(芳心)이 흔들린 것이다.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강호에 있었다니…


미남으로 소문난 태검장의 비룡서생조차 비교가 안 될 정도로구나.'


차비운은 예리한 눈빛으로 불청객들을 훑어보았다.


강남녹림맹주(江南綠林盟主)인 탈혼비마(奪魂飛魔) 손학위(孫學爲)와 


백독곡주(百毒谷主)인 독군(毒君) 사일악(史一惡)은 별로 두려운 상대가 못 되었다.


그러나 무산괴마(巫山怪魔) 여량(呂凉)에게 시선이 닿자, 안색이 싹 변했다.


'저 노마두까지……!'


여량이 으시시한 미소를 흘렸다.


"왜 노부를 보고 놀라느냐? 노부가 모르고 있는 무슨 죄라도 지은 거냐?"


다음 순간, 마른 나뭇가지들이 마찰을 일으키는 듯 껄끄러운 음성이 여량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여가(呂哥)! 네가 감히 노신 앞에서 주둥아리를 함부로 나불거리다니……."


여량에게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이가 당금무림에 몇이나 될 것인가?


분노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여량의 입에서 경악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기니(奇尼)! 설산신니(雪山神尼)!"


무풍신룡의 사부인 기걸 만통자와 함께 칠기(七奇)에 속한 노파.


그녀는 사실 오마(五魔)보다도 한 배분 높은 신분이었다.


여량은 원망의 눈초리로 무풍신룡을 째려봤다.


'이 놈아, 저 할멈이 있다는 얘기는 왜 쏙 빼놓았느냐?'


무풍신룡은 그의 시선을 슬쩍 외면하며 설산신니에게 말을 걸었다.


"설산에 은거하시는 노선배님을 이런 장소에서 뵙게 되다니, 정말 뜻밖입니다."


설산신니는 칼날같이 예리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어린 것이 뭘 안다고 노신을 아는 척하느냐?"


무풍신룡은 정중히 읍(揖)을 했다.


"소생의 사부께서 자주 노선배님에 관한 얘기를 들려 주셨지요. 
그래서 약간은 알고 있습니다."


"네 사부가 누구냐?"


"노선배님과 같이 칠기 중의 한 분인 기걸 만통자……."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설산신니의 눈꼬리가 쭉 치켜졌다.


"그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늙은이에게 너처럼 잘생긴 제자가 있었던가?"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하나, 설산신니는 냉랭하게 코웃음쳤다.


"흥! 노신의 이목을 속이려 들다니… 너는 필시 계집……."


순간, 무풍신룡이 대경실색하여 말을 막았다.


"노선배님, 우리가 온 목적을 짐작하셨겠지요?"


그의 속셈을 설산신니가 어찌 모르랴?


하지만 일부러 밝혀야 할 필요도 없었기에 슬쩍 넘어가 주었다.


"너희 네 명이 우릴 겁주려 했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내심 크게 당황했다.


뜻밖에도 무풍신룡과 여량, 손학위와 사일악까지 동시에 묘한 미소를 띄우는 것이 아닌가?


"설마… 더 강한 응원군을……?"


무풍신룡의 고개가 얄밉도록 끄덕여졌다.


"물론이지요. 만통자의 제자가 상대의 전력조차 파악 못하고 방문했겠습니까?"


불쑥 차연화가 끼여들었다.


"당신들이 본장에 뛰어든 목적이 뭔가요?"


무풍신룡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우리도 끼여 주시오."


"……."


이미 짐작하고 있었긴 했지만,


그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자 장강어옹 측은 너 나 할 것 없이 침중한 기색을 보였다.


설산신니의 음성이 카랑카랑하게 밤공기를 흔들었다.


"거절한다면 어쩔 텐가?"


"그렇다면 응원군을 부를 수밖에 없지요. 그는 강할 뿐만 아니라 잔혹합니다."


총기(聰氣) 넘치는 차연화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들이 아니라 그라면… 겨우 한 명이군요?"


그녀가 부드럽게  정곡을 찔렀지만, 무풍신룡은 가볍게 웃어넘겼다.


"하지만 충분하오. 이틀 전에 부영산 절봉에서 북해칠혼살을 지옥으로 보낸 당사자니까."


순간, 장강어옹 측에서 경악의 외침들이 튀어나왔다.


"아니?"


"그럼 분광월아도가 왔단 말인가?"


그들도 낙양 부영산의 참사에 관한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이때, 활짝 정문을 열어젖히며 한 소년이 걸어 들어왔다.


무표정한 얼굴에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양 무심(無心)한 시선…….


그는 너무도 침착하고 당당했다.


더욱이 그의 허리에서 달빛을 반사하는 도신(刀身)은 살기를 머금은 듯 중인들의 가슴에 와 닿았으니……!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저리도 허약해 보이는 애송이가 신비이객(神秘二客) 중의 분광월아도라니…….'


'다른 고수들은 경공을 펼쳐 담을 넘어왔거늘, 대단한 기개로다.'


사고(思考).


사람들의 이것은 때로 실수를 유발케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 경우였다.


사실 냉한웅은 경공을 펼칠 줄 몰라 그냥 정문을 열고 들어온 것뿐이었다.


하나, 그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중인들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


차연화가 그의 침묵을 깨려 짤랑짤랑한 교성을 토해 냈다.


"당신의 방문을 환영해요."


"……."


"조금 전에 오신 다른 분들과 동행이신가요?"


그녀의 질문에는 다른 의도가 있었으나,


냉한웅의 머리는 그러한 것을 간파할 만큼 명석하지가 못했다.


"……."


보다 못한 설산신니가 나섰다.


하지만 그녀도 북해칠혼살의 무공을 아는지라 다소 굽힌 말씨였다.


"그대가 분광월아도인가?"


냉한웅은 가슴이 뜨끔했으나, 담담히 대답했다.


"남들이 그렇다 하오."


설산신니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기가 질렸다.


'노신의 면전에서 이토록 흔들림 없을 수가…


태양혈이 밋밋하고 안광이 갈무리된 것으로 미루어,


내공이 노화순청(爐火純靑)에 이른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생각은 차비운도 다를 바가 없었다.


'저렇듯 어린 나이에 내공이 화경(化境)에 접어들었다니…


후기지수들 중 공력이 제일 높다는 비룡서생도 그의 발꿈치밖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몰라 입만 반쯤  벌린 채 서 있는 그에게 설산신니의 음성이 들려 왔다.


"어옹, 현명한 판단을 내리도록 하게."


차연화도 부친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길게 다퉈 봤자 서로에게 이익이 없어요.


다른 무림인들마저 비린내 맡고 오기 전에 함께 떠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대세가 확실하게 상대편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차비운은 씁쓰레한 표정으로 외쳤다.


"승락하겠소이다. 귀찮은 일이 더 발생하기 전에 떠나도록 합시다."


그가 손짓을 하자, 장내의 인물들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풍신룡은 득의의 미소를 흘리며 냉한웅에게로 다가왔다.


"냉형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풀렸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 함께 마차를 타고 오면서 냉한웅의 성(性)을 알아 냈던 것이다.


하나, 냉한웅에 대해 그가 아는 것이라곤 그게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