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그리운 세월

23. 우는 바다

오늘의 쉼터 2015. 8. 30. 13:23

23. 우는 바다

 

갓 튼 목화솜 덩이 안에 푹하고 누워본 적이 있는가?

뭉게구름처럼 몽실몽실 기분좋고 푹신한 솜이 온몸을 폭삭 싸버리고,

사방에서 느껴지는 그 안락하고 편안함에 마음까지도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푸근함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병든 병아리를 두손으로 담아본 적이 있는가?

빽 삐약되며 가끔 가다 구슬픈 듯 삐약되는 그 솜털 보송한 노랑 병아리를

두손으로 가만히 보듬어 본 적이 있는가.

행여 조금이라도 세게 쥐면 다치지 않을까,

행여 조금이라도 힘을 빼면 병아리가 두손에서 떨어져서 다치지나 않을까,

그렇게 조심하며 병아리를 쳐다보는 어린 아이의 눈망울을 느낀 적이 있는가.

그녀는 병든 병아리였다.

금새라도 흐륵 자신의 숨을 접고 남아 있는 이들에게 한껏 가슴의 상처만을 남기고 떠나는 그런 존재.

영민은 오랫동안, 세상이 끝나는 것같이 오랫동안 윤경을 가슴에 안고 있다.

그녀의 숨결이 새끈새끈 가슴으로 밀려온다.

"어디 갔었어, 고영민, 도대체 어디 갔다 이제야 온 거야?"

윤경은 하염없이 이 말만 중얼댄다.

그녀의 병든 몸이 마치 깃털보다도 가벼웠다.

영민은 윤경이 자신의 품에 그렇게 무너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자신을 기억하는지 조차도 의심스러웠으니까.

쿨럭쿨럭.

간간히 해대는 기침에는 객혈이 스며 나온다.

영민은 윤경의 입가에 흐르는 그 붉은 피를 마치 성스러운 성수라도 대는 양 조심스럽게 닦아본다.

마치 힘을 주면 그녀가 상처라도 입을까 주의하며.

"괜찮아?"

윤경은 비로소 기침을 잠시 멈추고는 영민을 다시 바라본다.

"정말 영민이 맞아?"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 눈치다.

하긴 영민이 그 오랜 세월을 지나 이곳까지 찾아올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리라.

윤경은 하염없이 영민의 품을 파고 든다.

마치 에미의 품을 찾는 아직 눈못뜬 강아지처럼.

이제 불씨가 얼마 남지 않았는지 감정만이 앞서서 나타난다.

영민은 그런 윤경을 그냥 가만히 안고만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버렸으면.

얼마나 지났을까.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건다.

"여기 있었군요. 한참 찾았어요."

간호원의 말이었다.

그 말때문에 영민이 후다닥 윤경을 안은 손을 풀었고

윤경은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자신의 얼굴을 때리는 듯한 허전함을 느꼈다.

"약드셔야 합니다."

간호원이 원망스럽지만 할 수없는 일이었다.

병실로 들어서니 의사가 윤경을 꾸짖는다.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그러다가 옆에 영민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다문다.

밖에 너무 오랫동안 있어서인지 윤경의 얼굴이 더욱 파리해졌다.

의사가 몇가지 주의를 주고는 병실밖으로 나가고 영민은 침대맡에 있는 의자에 앉는다.

"아, 자꾸 잠이 오네."

윤경이 눈을 뜨려고 갖은 노력을 하는데

그녀의 눈은 마치 천근의 추를 달아놓은 듯이 내리깔리기만 한다.

"나 자는 동안 어디 가지 않을 거지?"

"그럼."

영민이 다짐하듯 대답한다.

"나 자꾸 영민이가 내 곁에서 멀리 떠날 것 같은 느낌이야.

잠들었다 깨면 이것이 오래 꾼 꿈인 양 영민이는 사라져 버리고, 나는 홀로 남을 것만 같아."

"바보같이. 나 어디 가지 않아. 꼭 네 옆에 있을께."

"정.. 말.. 이.. 지...."

윤경이 약에 취했는지 아니면 잠에 취했는지 해롱해롱 잠속으로 빠져 들어버렸다.

장현의 긴장하는 얼굴 표정을 보면서 혜진은 약간은 불안한 목소리로 묻는다.

"무슨 일 있어, 장현씨?"

"아이다."

장현은 혜진의 얼굴을 약간 회피한다.

그러니 혜진이 그가 무언가 불안해 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요새 나타난 혜진의 감정과 무관하지는 않다는 마음에 죄책감이 인다.

"뭣때문에 그래요?"

갑자기 존대말이 나왔고, 그 바람에 더욱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아이라 카이."

장현이 분위기를 바꾸려는듯이 얼굴 표정을 고치면서 무언가를 꺼낸다.

"혜진씨, 나 말이다. 선물 하나 샀다."

"선물? 뭔데?"

장현의 손이 약간 떨리고 있다.

혜진은 그것을 심상찮게 쳐다본다.

내미는 것은 조그만 상자였다.

혜진이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으니 작은 보석 상자가 나타났다.

장현이 입술을 혀로 축인다.

아마 긴장하고 있는 것 같다.

"께알라 봐라."

뚜껑을 여니 작은 상자 안이 갑갑했다는 듯이 찬란한 빛을 발하는 반지가 하나 들어있다.

갑자기 혜진이 헉하고 숨을 멈춘다.

보통 때면 아무렇지도 않게 받을 수 있는 선물이었다.

하지만 왜그런지 받고 싶지가 않다.

"장현씨. 나 이런 것 받을 수 없어요."

대뜸 이렇게 말해놓고 그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후회가 든다.

장현이 그 말을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와?"

그의 눈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고, 아니면 분노로 길길이 뛸 것도 같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직 부모님에게 이야기 하지도 않았어요."

장현이 이상하다는 듯 혜진을 노려본다.

그게 선물이랑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런 것은 나중에 일이 결정된 뒤에 하는 거에요."

혜진이 이렇게 궁색한 말을 늘어놓고,

장현은 그녀가 자신의 선물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해서 어쩔 줄 몰랐다.

"비싸지요. 이런 거?"

"아이다. 그저 헐은 거 하나 샀데이."

그의 말 속에 허전함과 섭섭함이 묻어났다.

장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반지를 그냥 집어서 주머니 속에 넣어보지만

그 허전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헤어지고 난 후에 장현은 혜진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원망하지는 않는다.

원래가 그런 인생이니 원망할 그 무엇도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자신이 반지를 산 것은 어떤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산 것이 아니었다.

무슨 언약이나 약속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에 그 희미함이 싫어서 영민과 혜진에게 자신의 마음을 다짐하기 위해 산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참하게 될 줄이야.

혜진도 자신의 행동이 너무나 심했다고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그런 마음이 생긴 것은 왠일인지 몰랐다.

왜 이럴까.

어째서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버린 것일까.

그것은 바로 영민때문이다.

혜진은 자신이 그 옛날부터 영민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안 것이다.

그렇기에 여태껏 그렇게 방황해 왔던 것이다.

혜진은 다른 생각을 한다.

장현의 행동이다.

그의 행동에서 혜진은 어떤 쫓기는 짐승에게서 느낄 수 있는 조급함을 느꼈다.

왜일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혜진은 이렇게 생각하다가 다음에 만날 때는 좀 마음을 풀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영민은 거의 삼일 동안 마산에 머물다 돌아왔다.

혜진은 거의 건성으로 윤경의 안부를 물었지만, 왠지 속마음이 쓰렸다.

화제가 부담스러워 질 것 같아서 영민은 윤경에 대한 이야기를 자제했고,

오히려 그것이 혜진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오빠, 혹시 장현씨 말이야."

"왜? 장현이가 어때서?"

그저 지나가는 말로 묻는다.

"좀 이상한 것 같아. 뭔가 불안해 하고 있는 것 같아."

"네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거겠지."

"아니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뭔가 느껴진다고."

"그래? 그럼 내가 한번 알아보지 뭐."

그렇게 불안해 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험한 인생을 살아왔는데 불안할 것이 뭣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렇게 말해야지 혜진이 안심할 것 같아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김치찌게를 끓여서 저녁을 먹고 있는 중에 영민은 무심코 장현의 얼굴을 보았는데,

장현은 밥을 먹지 않고 무언가를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다.

"밥 안먹고 뭐하니?"

"응? 으응."

그의 얼굴이 왜 그렇게 허탈해 보일까.

"무슨 일있냐?"

영민도 그의 얼굴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감지했다.

"아이다, 암 것도."

영민이 그를 노려본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장현의 얼굴에는 무언가 쫓기는 듯한 표정이 나타난다.

여태까지 없었던 그 이상한 표정.

모든 것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장현이나 영민의 인생이었는데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걸까.

"뭔데 그래, 임마."

"아이다 카이."

장현이 모르는 척 숟가락을 들고는 김치찌게를 후적후적 한다.

하지만 정작으로 떠서 입에다 넣지는 않는다.

"장현아. 너는 내 친형제보다도 더욱 귀한 내 동생이다. 우리는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살아 남았어."

장현이 고개를 든다.

그의 표정이 더욱 허망해 진 것 같다.

"행님아, 우리 어데 외국에라도 나가서 살믄 안되겠나?"

"외국? 왜?"

장현이 숟가락을 아예 놓아버리고 천장을 쳐다본다.

"혜진이 때문에 그러니?"

그런 점도 있었다.

아니 그것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여태까지는 살면 살고 죽으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살았는데,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고 그렇게 살았는데,

혜진을 만난 다음부터는 인생관이 바뀌었다.

이상한 것은 자신이 영민을 미워하지도 혜진을 미워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장현은 둘이 잘되는 것을 축복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렇구나. 너 혜진이 때문에 그렇구나."

장현이 고개를 젓지만 금세라도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질 것 같다.

"장현아, 혜진이 말이야. 내게는 너와 똑같이 피를 나눈 형제와 같애.

내가 혜진이를 절대로 다르게 생각하지 않아. 넌 나를 알잖아."

그렇다.

장현은 영민을 잘안다.

같은 뱃속에서 난 형제보다도 더욱 둘은 서로를 잘알고 있다.

그런데 마음이 왜 이럴까.

"행님아, 실은 그게 아니고...."

"그럼 뭔데?"

장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검은 그림자를 느끼고 있다.

김익주를 살해한 다음부터 강하게 다가오는 그 검은 그림자를.

보통 때같으면 장현은 그것을 정면으로 부딪혀 싸울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장현에게는 혜진이라는 부담이 있었다.

아니 혜진을 두고 그대로 간다는 것은 도저히 견디지 못할 엄청난 고통이었다.

"말해 봐라. 어떤 것이건 우리 사이에 못말할 것이 없잖아."

하기는 그렇다.

둘은 서로의 생명을 주고 받은 사이 아니겠는가.

장현이 마침내 입을 연다.

자신이 김익주를 살해했다는 것을.

아아아, 영민은 가슴이 덜컥하고 내려 앉는다.

요즘 신문에 대서 특필되어 나오는 그 사건의 주범이 장현인 것이다.

장현이 청부폭력을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청부 살인까지 저지를 줄은 몰랐다.

"누구야, 그 일을 맡긴 사람이?"

"마영달이라꼬 하더라."

마영달이라면 본명은 아닐 것이다.

그 세계에서 쓰는 별명일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장현이 경찰에 잡히게 된다면 마영달이라는 사내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지금 정계에서는 이 김익주 피살사건을 가지고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다.

야당은 여당의 한 짓이라고 성토하고 있고, 여당은 야당의 고육지책이라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밝혀지면 엄청난 소용돌이가 몰아 칠 것이다.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그것을 이용하려고 장현을 희생물로 삼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장현아,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어디 여행이라도 가자."

"여행이라꼬? 어데로?"

"아무 데나 가는 거야. 여기 말고 다른 곳."

"와 좋겠네. 가자 그라믄."

영민과 장현은 즉석에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학교는 휴교령이 발령되어서 휴교했고, 사회는 유신이라는 험악한 기운에 마구 휘저어 지고 있다.

장현과 영민은 바다쪽을 택했다.

운다 운다, 바다가 운다.

그 슬픔 참지 못해 온몸으로 울어 버린다.

그 극심한 세월의 고통을 한없이 목메어 운다.

영민과 장현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산더미같이 큰 파도가 마치 육지 전체를 삼키려는 듯이 와구마구 달려오다가

중간에서 허리가 동강나 신음을 하며 바위에 부딪힌다.

"행님아, 나 말이다."

파도소리가 장현의 목소리를 아구아구 잡아 먹는다.

파도를 응시하는 장현의 눈동자가 먼 수평선보다도 더 아련했다.

"나, 혜진이 보다도 행님이 더 좋다."

장현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아마 파도가 그의 목소리를 중간중간 잡아 먹어서일 것이다.

"장현아, 정말 우리 둘이서 어디 외국에 나가서 살까?"

영민도 먼 수평선만을 바라보며 말한다.

"행님아, 저 수평선을 보니 어무이 생각이 난다."

그렇다.

영민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수평선을 보는데 엄마 생각이 날까.

영민을 떠난 엄마, 장현을 떠난 엄마.

왠지 눈물이 난다.

"행님아, 파도가 참 곱제?"

뜻없는 말을 하고 있다.

영민이 가만히 장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장현이 부스럭 안주머니를 뒤져서 무언가를 꺼냈다.

영민이 무어냐고 눈짓으로 묻는다.

"반지다. 영민 행님, 너 하거라."

반지?

아. 영민은 그 반지의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혜진에게 주려고 산 것이리라.

그런데 마음을 바꾸어서 영민에게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혜진씨에게 줄라꼬 샀는데, 안받는다 카더라."

영민은 반지를 장현의 손에서 받아든다.

바보같은 기집애.

영민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입술을 깨물다가 반지를 잡고는 멀리 바다로 집어 던진다.

"어, 어? 행님아?"

장현이 깜짝 놀라는데 영민이 장현의 손을 꼭 잡았다.

"나는 말이다, 장현아.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해."

"행님아."

장현이 그만 울어 버린다.

영민도 파도소리를 핑계삼아 그대로 울어버렸다.

김익주사건은 아무런 진전도 없이 그저 풍문만 무성하게 떠돌았지만

경찰에서는 단서 하나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장현과 영민은 조그만 어촌에서 민박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영민은 불현듯 윤경의 걱정을 한다.

"고영민, 내게서 떠나지마. 나는 영원히 네곁에 있고 싶어."

그녀의 말이 생생하게 귓가에 들려왔다.

영민은 그녀가 위중하다는 사실을 잘알고 있다.

하지만 장현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생각같아서는 지금에라도 윤경에게 달려가고 싶다.

하지만 장현을 생각해야만 했다.

이대로 어촌에 묻혀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장현을 살리기 위해서는 무슨 짓인들 해야만 한다.

이제 영민과 장현은 뗄레야 뗄 수 없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더욱 정이 깊은 사이였다.

영민은 무슨 수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선 외국에라도 나가 잠적해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방문이 드륵하고 열린다.

장현이 개다리 소반에 푸성귀 김치와 꽁보리밥을 들고 들어온다.

"밥 묵자."

영민은 영 밥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장현은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아니면 잊어 버렸는지 밥을 마구 입에 퍼넣었다.

왠지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어떻게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지.

"장현아, 네겐 미안한데 말이야."

"와?"

"마산에 잠간 다녀와야만 해."

"마산에?"

"응. 만날 사람이 있어."

"행님아, 나 괘안타. 걱정말고 갔다오이레이."

영민은 습관적으로 밥을 퍼서는 입안으로 가져갔다.

마틀거리는 꽁보리 밥이 마치 이빨에 안씹히려고 도망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꽃잎보다 더 붉은 것은 내 마음, 하늘보다 더 푸른 것은 네 마음.

윤경은 시를 읽다가 책을 내려 놓고 머리 맡에 놓여진 직사각형의 상자를 잡아서 바라본다.

그 어린 시절 이후로 꼭 간직하고 있었던 영민의 것이다.

그는 올 것이다.

그래서 이 만년필의 잉크를 넣을 것이다.

자신의 빈 마음을 채워주듯이 이 만년필에 잉크를 채울 것이다.

그래서 포만감에 찬 잉크는 자신의 욕정을 채우고는 끄륵끄륵 하품을 하면서

환상의 잠에 빠져들 것이다.

윤경은 그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몸에 영민의 잉크를 채우기 위해.

병실 밖에서 손여화의 작은 흐느낌이 들린다.

윤경도 잘알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운명의 신은 자신에게 어느 한도의 시간을 부여하고는 가장 행복에 겨운 순간에

자신의 시계를 거두어 갈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운명은 마치 파도에 쓸려 나가는 모래톱처럼 아슬아슬하게 서있다가는

마침내는 한스러운 추억만을 가슴에 새긴 채로 스르륵 스러질 것이다.

윤경은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앉았다.

이제 병실이라기 보다는 침실이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 병실에 있는 것이 안되어 보였든지

진평산씨는 이태리에서 가장 좋은 화장대를 사다가 병실을 꾸며놓았다.

화장대는 로코코 양식으로 마치 서구 귀족적인 자태로 윤경을 비쳐주고 있다.

윤경은 그 앞에 앉아서 화장을 한다.

최대한 곱게.

그가 오면 자신의 아름다움에 함빡 반하게끔.

손여화가 들어온다.

슬픔이 가득 담긴 두눈에는 그래도 윤경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려고 한다.

윤경이 대신 웃음을 함빡 지어 보인다.

그 모습이 더 슬퍼 보여 손여화가 기어코 눈물을 떨구었다.

"엄마, 나 부탁이 있어."

손여화가 눈물을 황급히 닦으며 대답한다.

"무슨 부탁?"

"나 돈이 필요해."

"돈? 얼마나?"

또 슬퍼질 것 같다.

죽는 마당에 무슨 돈이 필요한 것일까?

"많이. 아주 많이. 나 시집갈 때 쓰려고 모아둔 돈 있지. 그거 다."

손여화가 참지 못하고 흐드득 흐느껴 울어 버렸다.

손여화도 진평산도 그 돈의 용도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했다.

어차피 윤경에게 쓸 돈이었다.

그런데 그 돈을 제 때에 쓰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기는 했다.

의사의 말로는 이제 한달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하게 내버려 두라고 한다.

확실히 손여화가 그렇게 부인을 하려고 해도 윤경의 눈아래에는

거무죽죽 죽음의 그림자가 강하게 드리우고 있었다.

하얀 병실.

주검과도 같은 고요속에 윤경은 기다리고 있다.

그가 안오면 죽을 수도 없다.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문이 열리면 영민이 신랑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꼭 껴안아 주고 자신을 이 고통에서 풀어줄 것이다.

기다림이란 초조하기는 해도 좋은 것이다.

누구를 기다린다는 그 기대감만으로도 행복할 수가 있으니 말이다.

왜 이렇게 잠이 오는지 모르겠다.

자꾸만 참으려고 해도 눈은 자꾸만 감긴다.

이젠 기침이 나오지가 않았다.

기침도 죽음의 문턱에서는 도망을 치는 모양이다.

아, 왜 안올까?

할 말이 많은데.

윤경은 눈을 감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을 한다.

눈을 감으면 그가 오는 것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윤경은 무언가가 어른어른 하다가 사라지는 희미한 물체를 보았다.

바로 자신의 영혼을 데리러 온 사자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진다.

비가 오려나?

창문쪽으로 다가가는데 후두둑 뭔가가 쏟아져 내린다.

비가 마치 신들린 고수의 미친 장고짓처럼 투두둑 투두둑 세상을 짓두두려댄다.

그 소리가 마치 윤경의 영혼을 부르는 초혼곡인 양 서글프다.

문이 끼익하고 환상처럼 열린다.

윤경이 창문밖을 보다가 돌아 섰다.

거기에 그렇게도 기다리던 영민이 마치 꿈처럼 서있었다.

"고영민, 어디 갔다 왔어. 기다렸잖아."

윤경이 이렇게 말해 보는데 영민 대신 간호원 한명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기다림이란 이렇게도 가슴 아픈 것일까.

영민은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벌써 병실을 들어서는데 윤경이 거의 일어서지 못하는 파리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며칠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악화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윤경은 금세 바람에 꺽어질 꽃한송이처럼 나약한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윤경아, 나야. 나왔어. 고영민이 왔다고."

윤경이 잠을 자는 줄 알았는데

그 감은 눈 아래로 엄청난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입가에는 미소가 어린다.

"고영민, 나 말이야. 네가 돌아올 줄 알았어."

"그럼. 돌아오지. 일이 있어서 조금 늦었어."

"아무 말 안해도 돼. 그냥 내 옆에 있어줘."

영민이 윤경의 옆에 앉아서 그녀의 손을 꼬옥 잡는다.

그녀의 손에 힘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

마치 껍질만 남은 것 같이.

"고영민, 네게 부탁이 하나 있어."

"뭔데?"

윤경이 비로소 눈을 뜬다.

그 눈동자에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담겨있다.

"꼭 들어준다고 약속해 줘."

"그럼. 들어주고 말고."

그렇게 다짐하는 그녀가 안타까왔다.

"나 좀 일으켜줘."

영민이 윤경을 일으키려고 그녀를 안는데 그녀가 영민을 두팔로 감싼다.

흡! 영민이 몸이 흑하고 뜨거워진다.

한참을 그렇게 둘은 껴안고 있었다.

영민의 팔에 기댄 윤경이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말한다.

"나 말이야, 고영민."

".................."

"나 좀 데리고 어디 좀 떠나줘. 멀리.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으로. 응?"

"그, 그건...."

이렇게 약한 몸으로 여행은 무리였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어떡하겠는가?

"꼭 들어준다고 했잖아."

윤경이 곧 울 것같은 표정에 영민이 황급히 승락한다.

"그래. 가자고."

"나 말이야. 너랑 단둘이 살고 싶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영민이 윤경을 감싼 손에 힘을 지그시 넣었다.

아, 왜 이토록 인생은 괴로운 것일까.

윤경은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영민이 어디론가 달아날까봐 필사적으로 영민의 몸을 억지로 잡고 걸었다.

"내가 안을까?"

영민이 이렇게 묻자 윤경이 배시시 웃는다.

"안돼. 남들이 보잖아."

윤경이 비틀대며 병실을 나서자 간호원과 의사가 놀라서 황급히 달려온다.

그런데 그 앞을 손여화가 막아섰다.

"아니, 사모님?"

손여화가 눈물을 뿌리면서 의사에게 말한다.

"가도록 해 주세요. 어차피 갈 걸...."

둘은 무어가 그리 기쁜지 병실 밖에 손여화가 있는지도 모르고 둘만의 세상으로 떠나고 있다.

의사가 벤치에 앉아 있는 진평산씨를 쳐다본다.

진평산씨는 그저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비가 억수로 퍼부어댔다.

마치 마지막 가는 생명을 슬퍼하는 듯이.

병원 앞에 부르지도 않았는데 택시가 한대 멈추어져 있고

윤경과 영민이 나오자 운전기사가 부지런히 달려와 문을 열어준다.

어디로 가는지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는데도 택시는 폭우속을 뚫고 부웅하고 출발을 했고,

그것을 뒤에서 지켜보는 손여화가 참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진평산씨가 황급히 아내를 부축했다.

영민은 윤경의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세고 있다.

그것은 마치 옛날에 잃어 버렸던 숨소리다.

여자의 숨소리라기 보다는 바로 여인의 숨소리.

그것은 잠결에 들었던 엄마의 심장소리와도 같은 소리다.

윤경이 자꾸만 영민의 품으로 파고 들었고,

영민은 행여 그 애처로운 여자를 잃을까봐 꼬옥 그녀를 품고 있다.

차는 무심하게 폭우속을 뚫고 달려간다.

영원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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