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양귀비 꽃
밤은 소리도 없이 하냥 깊어만 가고, 들창밖으로 달이 활짝 웃고 있다.
달이 밝아서 인지 잠이 전혀 오지 않았다.
영민은 몇 번이나 잠을 청해 보았지만, 감정이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장현이 옆에서 뒤치락거리다가 묻는다.
"와? 잠이 안오나?"
"응. 너도 안잤니?"
"옹야. 잠이 하나도 안오네."
장현도 일어나 앉았다.
"장현아, 혜진이 말이다. 참 심성이 고운 애다. 잘 대해 줘라."
장현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왜 그런지 모르게.
학생데모가 절정으로 치닫고 시민들도 그에 호응하기 시작한 5월 초.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 도서관 2층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영민은 데모대가 진행하는 모습을 일별했다.
아아, 그것은 항거이다 푸르죽죽한 젊은 피로 바친 배반의 세월에 대한 저항이다.
수없이 많은 꽃은 져도 줄기는 남는 것 수없이 많은 줄기가 잘리워도 뿌리는 남는 것
그 뿌리조차 뽑힌다면 한 알의 씨가 되어 다시 항거의 장을 준비할
아아, 그것은 피끓는 젊음의 고뇌어린 몸짓어어라.
영민은 이렇게 쓰다가 연필을 놓고서 주머니를 뒤적거려 메모지 한 장을 꺼낸다.
향기가 날 듯이 느껴지는 예쁜 메모지에 또박또박 적혀 있는 주소 한 줄이
어쩐지 불만스러운 감정의 표현처럼 너무도 정갈하게 써있다.
바로 혜진이 건네준 윤경의 주소였다.
영민은 혜진에게 윤경의 안부를 물었을 때
혜진이 보여주었던 그 이상야릇한 표정을 떠올리다간 이내 주소로 눈길을 돌린다.
마산 요양원.
왜 요양원에 있을까?
영민의 가슴이 아파온다.
혜진의 말로는 윤경의 건강이 무척이나 안좋다고 한다.
얼마나 아프면 요양원에 입원을 하고 있을까.
영민이 다시 밖을 내려다 본다.
데모대가 교정밖 진출을 시도하고 있고, 경찰이 필사적으로 그것을 막고 있다.
아, 잔인한 달 사월이 갔는데도 왜 이렇게 사회는 어지러운 것일까.
갑자기 도서관이 소란스러워졌다.
데모대 중 몇명이 도서실로 쳐들어온 것이다.
"학우들이여. 여기서 공부만 하고 있을 터인가?
저 밖에는 독재 유신의 정권이 우리를 목조르고 있는데, 언제까지나 학우들은 외면할 작정인가?"
선동적인 목소리를 한 한 학생의 외침소리와 함께 같이 들어온 학생들이 노래를 한다.
'학우들은 동참하라, 좋다 좋아. 같이 죽고 같이 산다 좋다 좋아.....'
한 학생이 그들에게 분노어린 고함을 쳐댄다.
"야, 나가. 공부 좀 하자고."
연일 계속되는 데모때문에 공부에 방해를 받은 학구파 한 명이 이렇게 소리친 것이다.
하지만 시위자들의 무언의 압력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다.
영민은 오늘 공부는 글렀다고 생각하면서 주섬주섬 책가방을 쌌다.
하긴 그냥 있어도 마산 요양원에 대한 생각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에
공부에 정신을 쏟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영민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들은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그런 줄 알고 소리친다.
"좋습니다. 이렇게 동참하십시다."
영민은 그들의 생각에 기가막혀 씩 웃으며 그냥 도서실을 빠져 나가고 한명이 무안한지 소리친다.
"여, 여봐요."
하지만 그것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데모대는 완전히 스크럼을 짜고 경찰과 극한적인 대립을 하고 있고,
영민은 그 샛길로 빠져 나가면서 그들의 무모함과 피끓는 젊음에 함께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없음을 새삼 확인한다.
그들은 모를 것이다.
오로지 살기 위해 쓰레기를 뒤지고, 남에게 구걸을 하고, 먹이를 위해 주먹을 휘두르는
밑바닥 인생들을.
그들이 원하는 것은 거대한 것이지만 소시민들은 그렇게 큰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편안하게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없이 사는 것이 큰 바람인 것이다.
약간은 차가운 5월 비의 상쾌함이 오히려 더 온화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영민은 자신의 몸속에서 누군가가 5월 여행을 계획하라고 은밀히 속삭이는 것 같은 유혹을 받는다.
그래. 한번 가보는 거다.
윤경이 자신을 잊었을 지는 몰라도, 그 까마득한 과거의 일점으로 사라져 버렸던 추억인지는 몰라도,
한번 보고 싶은 것이 영민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 숱한 버림받은 세월을 지나면서 그렇게도 못잊어 했던 그 옛날이,
바로 윤경이때문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안다.
그래. 잊었을 것이다.
윤경은 그 오랜 과거에 조그맣고 초라한 가난뱅이 영민을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잠간 동안의 추억을 못잊어서 이렇게 그녀의 앞에 나타나는 것이 정말로 우스운 일인지
잘 알지만,
그래도 그때의 추억에 대한 아픈 상처를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가 있다면,
아무리 헛된 일이라도 그렇게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허허허 웃고 그대로 물러 나오면 그뿐이다.
수치스러울 것도 잃을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 후가 두려운 것이다.
자신이 견뎌내야할 그 아픔이 두려웠다.
하지만 이 도리밖에는 더 없지 않은가.
장현은 마영달이 준 이름을 머리에 새겨 넣었다.
요번 일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이 하나도 없이
그저 장현과 마영달 단둘만의 만남이다.
마영달은 위엄있고 힘있는 어조로 장현에게 말했다.
"하기 싫으면 안해도 좋네. 이건 강요가 아니니까."
장현은 그를 싸늘한 눈초리로 노려본다.
이번 일은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의 일은 어떤 집회, 정당, 또는 개인을 노려서 그 일을 성사되지 못하게 손을 봐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영달이 은밀히 장현만을 불러서 일을 시키는 것이다.
그래. 어차피 이런 인생이 아니었던가.
혜진의 얼굴과 동시에 영민의 얼굴이 떠오른다.
왠지 무척이나 가슴이 답답해 온다.
그 답답함을 이기려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의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은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어야 하지 않았던가.
침묵이 흐르고 있다.
아주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으로 달려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마영달은 재촉하지 않는다.
그는 알고 있다.
이런 일은 재촉이 독약이라는 사실을.
마침내 장현은 결정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앙다문다.
마영달도 그의 결정을 잘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김익주.
장현은 그 이름을 한번 더 되뇌인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내가 영영 자신의 손아귀에서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현은 그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건 아니건 그것을 따지고 싶지 않았다.
장현이 지금 생각하는 것은 영민과 혜진과의 그 관계였다.
영민은 그렇지 않았지만 혜진의 마음은 그 후에는 조금 거리감이 있었다.
영민과 만난 다음 혜진의 마음에 이상한 공백이 있다는 사실이 장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에이, 제길.'
장현은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려본다.
어쩌지 못하는 일이었다.
아마 그렇기에 자신이 이 일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하긴 이 청부가 마지막에는 살인청부까지 가게 되어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에 일찍 택한 것이다.
장현은 돈이 필요했다.
어쨌건 간에 돈이 필요한 것이다.
영민을 생각한다.
입학하고도 좋은 옷 하나 못입혔다.
한번은 양복 한벌을 맞추어 주기 위해 나섰다가 영민에게 혼난 적도 있다.
자신이 양복을 맞추어 입었을 때도 영민은 미소를 지으며 잘어울린다고 이야기했으면서도
정작 영민의 옷을 맞추러 갔을 때 그는 다짜고짜 화를 냈던 것이다.
혜진의 얼굴도 떠오른다.
영민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 행복해 하는 모습.
그 얼굴 표정에서 장현은 혜진이 얼마나 영민을 기다리고 살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장현은 그 표정에서 질투심이 아니라 안타까움을 느꼈다.
영민에게도 혜진에게도 어떤 질투심이나 증오심이 아닌 안타까움을 느끼는 이유는
장현이 둘을 모두 사랑하기 때문이다.
다시 김익주를 생각해야만 한다.
그가 누구건 장현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여태껏 그래왔지 않은가.
그들은 금력과 권력을 내세워 약하고 서러운 사람들의 생을 능멸해 왔지 않은가.
장현과 영민과 같은 밑바닥 인생의 삶을 더러운 벌레들의 것처럼 하찮게 여겨오지 않았던가.
장현은 장갑을 낀다.
마영달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꼭 없애고 확인까지 하라는 그의 주문.
약간 긴장이 된다.
여태껏 싸움은 그저 장난질에 불과한 것이다.
살인이라는 것에 비하면 말이다.
장현은 눈을 감고서 마음을 가라앉힌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었다.
그저 썩은 통나무에 도끼질을 하는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그들이 장현이나 영민의 목숨을 무심하게 여겼듯이 장현도 그들의 목숨을 하찮게 여겨야만 한다.
밤이 사악한 악마의 주문과도 같이 스르르 다가온다.
그것은 일종의 악마적 마력이었다.
밤이면 어느 정도 선악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어디선가 흘러다니던 망령의 유혹이 문득문득 고개를 든다.
그 유혹은 돌아다니다 장현의 머리 위에 머문 채로 끼득끼득 장현을 부추긴다.
그래. 죽여라.
그래서 우리 망령들의 희생물을 좀 만들어 다오.
끼끼끼.
가슴에 품은 재크나이프를 다시 만져 본다.
그 차가운 느낌에 섬뜩 가슴이 베일 듯도 하다.
장현은 전신주에 기대어 담배갑을 꺼내 담배 한개비를 빼어 물었다.
하지만 불을 붙이지는 않는다.
마영달이 하는 식으로 한번 해보았을 뿐이다.
한참을 담배필터만 씹었다.
이윽고 마음의 준비가 된 것 같다.
장현은 담배를 그대로 뱉지 않고 담배갑속에 다시 집어 넣었다.
항상 사건의 장소에는 담배를 찾는 형사들이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담은 높지만 장현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무용지물이다.
생존하기 위해 갖은 짓을 다하고 살 때 익혀 두었던 생존의 본능은 어떤 벽이라도 강한 거부감을 준다.
그래서 벽만 나타나면 훌쩍 뛰어넘고픈 충동에
장현은 아무리 높은 담이라도 기를 쓰고 뛰어 넘었던 기억이 있었다.
정원에 사뿐이 내려 앉는다.
조용했다.
그것은 마치 위대한 주검에의 초대인 것 같이 느껴졌다.
사악한 망령들이 곧 벌어진 주검의 유희를 위해 이런 죽음보다도 더한 고요의 장을 마련해 놓은 것 같다.
장현은 재빨리 마영달이 말해 주었던 뒷편의 서재쪽으로 돌아갔다.
마영달은 이 살인을 준비하기 위해 철두철미하게 조사한 것 같았다.
뒤로 돌아가니 서재에 창문이 환기를 위해 반은 열려져 있고,
안에서 담배냄새가 은은하게 밖으로 스며나온다.
아마 김익주는 골초인 모양이었다.
창문이 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장현같이 거한은 들어가지도 못할 뻔 했다.
하긴 장현의 몸집을 고려해서 마영달이 그쪽 창문을 일러주었을 것이다.
장현은 이미 이성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세한 숨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의 청각이 쫑긋 소리를 찾는다.
거실을 가로질러 안방으로 다가갔다.
모든 사람이 다 자고 있을 시간이니 소리가 날 리가 없는데도 안방에서는 아주 작은 소리가 새어 나온다.
장현은 극도로 주의를 기울여 소리를 감청한다.
"안돼요, 의원님."
앳띈 여자의 거절하는 소리.
하지만 그것은 거절보다는 의무적인 소리같이 느껴진다.
약간 우는 소리.
아마 그것도 어떤 가식적인 소리같이 들리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굵직한 음성으로 달래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
그리고 침묵.
거친 숨소리.
장현은 눈을 감는다.
그대로 안방에서 끝내려 했는데 이렇게 되면 조금 시간이 걸려야 할 것 같았다.
한바탕의 정사가 끝났는지 교성이 작게 들렸고 장현은 재빨리 다시 서재로 돌아갔다.
정사가 끝나면 찾는 것은 담배일 것이다.
그리고 마영달의 말에 김익주는 꼭 서재에서만 담배를 피운다고 했다.
김익주의 습관을 하나하나 일러주던 장현은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뒷풀이가 있는지 시간이 조금 길어지고 장현은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아마 김익주는 생각보다는 정력가인 것 같았다.
마침내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여자가 자기 방쪽으로 뛰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는 포만감에 차서 느엿느엿 김익주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는 모습으로
아직 정액 냄새를 풍기며 서재로 들어선다.
방금 전의 정사를 생각하며 담배를 빼어 물려는 순간
장현의 억센 손가락이 그의 목줄기를 와락 거머잡았다.
으헉!
너무나 놀라서 김익주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
아니 그게 아니라 장현의 손가락이 굵은 쇠못처럼 그의 목줄기를 파고 들었기 때문에
찍소리도 낼 수 없었으리라.
순간적으로 장현의 쇠덩이같은 무릎이 김익주의 명치위로 와닥 올려 꽂혀 버린다.
으흐흑!
장이 파열되었을 것이다.
김익주는 그대로 스르르 무너진다.
하지만 장현이 거머잡은 목줄기를 놓치는 않는다.
장파열 정도로 죽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숨통을 끊어 놓아야만 한다.
마영달의 주문이 그것이었으니까.
김익주가 몇번 버둥대다가 심한 오물 냄새를 풍기며 축늘어진다.
아마 마지막으로 참지 못해 뒤를 갈긴 것일게다.
그게 끝이었다.
장현은 완전히 쭉 뻗은 김익주를 보고 속으로 중얼댄다.
'자식, 제 손녀뻘의 여자나 갖고 놀면 이꼴이 되지.'
서재의 문을 안으로 잠근 후에 창문을 통해 빠져 나갔다.
담을 넘고 어둠속으로 빨려 들면서
장현은 약간의 오물이 묻은 가죽 장갑을 벗어서 근처 쓰레기통 속으로 쑤셔 버렸다.
그 사건이 보도된 것은 다음 날 점심 때 쯤 호외를 통해서였다.
호외의 제목은 이렇게 적혀 있다.
[유신반대를 주도했던 재야인사 김익주씨 피살.]
장현은 큰 제목만을 읽은 다음 그대로 무심히 호외를 구겨서 던져 버렸다.
마영달을 찾으니 마영달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았다.
"수고했네. 역시 자네를 믿었네."
그의 손에 누런 봉투가 들려있고 장현은 그것을 받아든다.
"얼마간 쉬고 있게. 내 연락함세."
장현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봉투를 받아들고는 자리를 빠져 나온다.
하늘가를 쳐다본다.
혜진이 웃고 있는 듯하다.
그 웃는 얼굴에 슬픈 미소가 어리는 듯 해서 기분이 언잖아 진다.
괜히 장현의 눈에 눈물이 나올 듯해서 그저 하늘만 쳐다본다.
왠지 불안한 마음이 깊어만 갔다.
비개인 5월 하늘 아래에는 꽃망울이 다른 때보다 몹시도 크게 보이고
앞으로 찾아들 녹음의 계절을 간절히 기대하는 신록들의 우짖음이 바람에 실려 우렁차게 일렁인다.
윤경은 간절한 마음으로 먼 하늘을 올려다 본다.
저렇듯 파란 하늘을 두손으로 떠서 가슴에 담았다가,
언젠가 자신의 앞에 그 찬란한 모습으로 나타날 님을 위해 고이 간직해 두고 싶었다.
쿨럭쿨럭.
윤경은 기침을 심하게 해본다.
마치 일부러 그렇게 하는 듯이.
가슴에 꽁꽁 매달려 있는 그 처절한 그리움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말이 요양원이지 이곳은 감옥과 다름이 없었다.
도저히 어찌해 볼 수없는 이 갇혀진 곳에서는 그저 할 수있는 일이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것 뿐이 없었다.
그러니 날마다 하냥 그리움만 깊어가고, 그 깊이를 참지 못해 이렇게 기침을 해대는 것이다.
갇혀있는 작은 새.
천형이라고 부르는 폐병에 의해 사회와 격리된 채로 한번 제대로 날아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스러지는 약한 새.
윤경은 흘러 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둔다.
이곳에 있는 환자들 대부분이 그렇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 않는다.
눈물을 닦는다는 것은 아직도 마음속에 어떤 자존심이 남아있어서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자존심 하나 남아있지 않은 그런 사람들이다.
더 이상 숨길 어떤 마음도 남아있지 않기에 그저 흐르는 눈물이 남에게 보여도 수치스러워 하지 않는다.
해바라기.
병든 자들의 유희 중에 하나다.
해바라기를 하면서 병든 자들은 있지도 이루어질 수도 없는 꿈을 만들어 간다.
한없이 커져가는 세상 속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들을 느끼며,
그들은 자신들을 마치 인형극의 퍼펫처럼 작게 만들어서,
까르르 깔깔 까르르 깔깔 이 세상을 웃어 대는 것이다.
윤경의 눈에 까까머리를 한 아이 하나가 나타났다.
"진윤경."
그 애는 그때 그 모습으로 윤경을 부른다.
하지만 윤경은 안다.
그 애가 한번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 애에게 아마 진윤경은 이름이 아니라 의미였을 거라는 행복한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지금 그애는 어디에서 진윤경이를 까맣게 잊고 살아갈 것이다.
양귀비 꽃이 처연하게 피어서 굽어져 있다.
그 빨간 꽃잎이 마치 윤경이 금방 토해놓은 객혈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그 아리아리한 몸매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처럼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양귀비 꽃.
얼마나 절개가 굳으면 한 장소만을 사랑할까.
다른 꽃들은 옮겨심어도 죽지 않는데,
양귀비 꽃은 뿌리만 살짝 옮겨져도 그 실절을 슬퍼하여 죽어버린다.
아, 그 고집스러운 삶이여.
그 애증스러운 집착이여.
윤경은 다시 한번 기침을 쿨럭쿨럭하다가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낸다.
양귀비 꽃보다도 더욱 짙은 선홍빛의 피가
하이얀 손등에 마치 강렬한 고호의 그림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부각되어 나타난다.
윤경은 그 양귀비 꽃보다도 더욱 짙은 붉은 피를 가진 자신이,
장소에 애증을 갖고 집착하는 양귀비 꽃들보다도 더욱 심한 집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장소를 옮기면 죽어 버리는 양귀비 꽃들처럼
윤경은 독일이라는 곳으로 자신의 몸을 옮기고는 죽음을 전염받았을 것이다.
다시 손등에 묻은 빨간 핏자국을 바라본다.
그것은 집착이었다.
과거와 추억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강한 집착.
영원히 없앨 수 없는 그 잔인한 편집광적인 집착.
윤경은 해를 바라며 하염없이 꿈을 꾼다.
파란 하늘에서 이름모를 영혼들이 바람을 타고 그녀의 손등위로 내려온다.
작은 영혼들.
아픔들.
그 들은 모두 빨간 옷을 입고 윤경의 손등에서 피빛으로 춤을 추어댄다.
마치 세상 끝날에 올 시바의 춤처럼 그들은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아하, 춤을 춘다.
모든 것이 죽음의 춤을 추고 있다.
갈 수없는 세월의 아픔을 온몸으로 표현하면서 윤경의 눈앞에서 몸부림치며 춤을 추고 있다.
누군가가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느낌에,
아니 어떤 강렬한 불기둥같은 힘이 자신의 상상안으로 그대로 뚫고 들어오는 느낌 때문에,
윤경은 그 뜨거움을 참지 못해 번쩍 고개를 든다.
응?
검은 작업복의 청년이 해를 막고 서서는 자신을 이글이글 노려보고 있다.
마치 자신을 태우고 그 강력한 열로 윤경까지 녹이려는 듯이.
그 표정은 정말로 이상하다.
상당히 익숙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정말로 어색한 것이다.
모든 것이 돌아가고 있다.
세상이 마치 회전목마처럼 돌아간다.
윤경은 그 돌아가는 어지럼에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눈을 감지 않으면 모든 것이 그 소용돌이 속에 모두 함몰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작업복의 청년은 그대로 눈감은 중에도 보였고,
윤경은 자신이 마치 폐병이 아니라 학질에 걸린 것처럼 온몸을 심하게 떨어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가슴은 그대로 심하게 고동쳐서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이 숨이 가빠온다.
윤경은 하늘에다 대고 소리친다.
'아, 이게 꿈이라면 깨지 말아다오.'
하지만 소리는 절대로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그저 부들부들 떨고만 있다.
'오, 하느님. 이게 꿈이라면 저를 이 자리에서 죽게 만드소서.'
윤경은 속으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한다.
아득히 저 멀리 꿈결속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윤경. 나야. 나 기억해?"
그 소리는 분명히 꿈은 아니었다.
그래. 내가 너를 어찌 잊을 수 있니.
그렇게 꿈속에서도 그려왔는데.
윤경의 눈에서 엄청나게 많은 눈물이 순식간에 화르륵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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