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슬픈 세월
모든 것이 잠든 창백한 겨울 밤에 미친 듯이 달려드는 고독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가슴을 밟고 허적허적 걸어오는 못된 망녕의 히히덕거림과도 같이 울쑥불쑥 솟아나는 그 고통을 참지 못해,
어디론가 무작정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있는가.
반짝이던 별들도 그 단조로운 반짝임에 지쳐 모두 사라져 버리고, 텅빈 밤하늘에는 오직 아득한 검은 구덩이가,
마치 끝없는 심연의 구렁텅이처럼 자신을 빨아들일 것 같은 그 헛헛함에 울어 버린 적이 있는가.
그것이 독일의 밤하늘이다.
누군가가 보듬고 싶어서 두손을 벌려봐도 안기는 것은 차가운 공기일 뿐.
윤경은 그 절절한 고통을 참지 못해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흑흑 흐느껴 운다.
검은 고딕식 건물의 앞에는 마치 유럽식 유령의 빈그림자인 양, 가스등이 흐드넉 검은 공간에 서있다.
그리고 가스등에서는 마치 병든 영혼을 잡아 먹으려고 달려드는 히드라의 소리같은 바람새는 소리가 식식하고 들린다.
향수병은 수천개의 가시를 지닌 헬무쓰다.
그것이 몸속 신경을 돌아다니며 움찔움찔댈 때면,
신경은 그 수천개의 가시에 찔려 피를 토해대며 까르륵 까르륵 비명을 질러댄다.
그 아픔은 마치 수백억의 전류가 몸속에서 파르르 팟팟 파르르 팟팟하고 깨지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어슴프레 보이는 허여무레한 선술집이 마치 한국의 선술집의 분위기와도 닮아서 그저 허위적허위적 들어선다.
느끼한 모습의 게르만인들이 침을 뱉는 듯한 어조로 대화를 나누고 있고,
윤경은 추위를 견딜 수 없어서 얘거마이스터를 시켰다.
달콤한 리커가 목줄을 자극하고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마치 수백년 묵은 독일의 신화를 흐느껴 들려준다.
모든 것은 환영이다.
아니 다른 것은 현실일지 몰라도 윤경이 느끼는 모든 것은 환영일 뿐이다.
모든 환영은 빙글빙글 돌아가며 윤경을 심하게 비웃고 있다.
애거마이스터의 독한 술기운이 얼굴에 머물다가 머리로 솟아 오른다.
어디선가 돼지비게의 메스꺼움이 느껴진다.
독일 선술집과 돼지비게. 어쩐지 잘 어울리는 느끼한 한쌍의 단어같다.
느끼함. 메스꺼움.
"쿨럭쿨럭."
기침을 심하게 해보지만 가슴은 시원해 지지 않았다.
추운 곳에서 갑자기 더운 곳으로 들어와서 폐에 무리가 왔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술기운이 확하고 돌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심하게 기침을 해대니 옆에 있던 붉은 코의 신사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고,
윤경은 기침을 참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록 기침은 더욱 심해져서 고통스럽게 기침을 계속해댄다.
"헉헉!"
기침을 하다간 힘이 들어서 헉헉대다가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감지했다.
아니 이상하다기 보다는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이다.
그리고 거리감.
왜 그들의 눈동자가 영민의 눈동자와 닮아 보일까.
입가에 무언가가 흘러 내렸다.
손으로 문지르니 새빨간 아픔이 묻어 나온다.
피?
다시 피가 나오고 있다.
객혈.
요즘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객혈이 또 시작된 것이다.
윤경은 피를 닦으려고 휴지를 찾다가
무언가 극심한 압박으로 가슴을 누르는 통에 그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서 무너져 버린다.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영민의 얼굴이 달콤하게 나타났다.
세상이 온통 광란의 도가니로 일렁대고 있다.
날마다 계속되는 학생데모와 시국을 걱정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참여,
그리고 그것을 폭력으로 막으려는 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이 적법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자유를 옭아매고 있고,
유신체제는 이제 나라 곳곳에 최류탄이라는 매운 맛으로 흔적을 진하게 남겨 놓고 있다.
김포공항.
손여화는 안절부절하며 탑승자들이 빠져 나오는 자동문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간절한 마음과 불안한 생각을 가지고. 가끔 공항 내에서 무미건조한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고,
손여화는 혹시나 무엇이 잘못되지는 않았나 해서, 방송이 나올 때마다 귀를 기울인다.
옆에서 경호원겸 운전기사인 이씨가 소리친다.
"저깁니다. 사모님."
아! 갑자기 손여화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빨간 코트에 거의 허물어질 듯이 나오고 있는 윤경은 그 파리한 얼굴이 금새라도 부서질 듯이 아리했다.
그 모습이 손여화의 가슴을 천만갈래로 찢어 놓는다.
"윤경아!"
차마 큰소리로도 부르지 못한다.
행여 큰소리를 치면 그나마 간신히 걸어나오고 있는 윤경이 무너져 버릴까 걱정이 되서였다.
윤경을 감싸고 있는 빨간 코트는 마치 그녀의 온몸에서 울컥울컥 솟아나오는
생생한 핏자국같은 느낌이 들어서 손여화는 마냥 눈물만 흘려댄다.
끊임없이 쿨럭대는 기침.
사람들이 그 기침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주위에서 물러난다.
손여화가 사람들이 비켜난 장소에서 윤경을 마치 어린애를 보듬듯이 껴안았다.
"엄마!"
윤경의 말이 마치 손톱을 세워서 맨 가슴을 쫙하고 할퀴고 지나가는 듯한 아픔을 준다.
"그래. 고생했다."
겨우 한 계절도 견디지 못하고 윤경은 이렇게 허물어져서 온 것이다.
폐병이라는 위중한 병을 안고 말이다.
아니 그 몸의 병보다 더 심한 것이 마음의 병인지도 모른다.
절대로 치유되지 않을 그 깊숙한 마음의 병.
그것은 불씨다.
없었을 때에는 절대로 일지 않지만, 일단 생기면 무엇이든 태울 수 있는 그런 불씨였다.
일단 심어진 불씨는 마음 한 곳에 가만히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에 발화되어서 온 마음을 태우고, 몸을 태우고, 그리고 정신까지 태운 후에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다.
폐병이라는 것은 공기로 전염되기 때문에 격리가 불가피하고,
또한 치료의 효과를 위해서라도 격리하자는 전문의의 충고에 따라 윤경은 마산에 있는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그녀가 요양원으로 갈 때, 손여화는 마치 윤경이 죽음의 길로 가는 양 슬피 울면서 넋을 잃었다.
진평산씨도 여자가 재수없게 운다고 아내를 질타했지만 마음 속으로 불안감이 한없이 솟아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윤경은 사회의 밖으로 밀려나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접근하기를 꺼리는 그 사악한 병마에 발목을 잡혀서 이제 격리라는 감옥으로 들어선 것이다.
개학과 동시에 터져나온 지식인들의 시국선언문이 학생데모를 절정으로 이끌어 갔다.
이제 경찰과 학생들은 데모라는 허울좋은 이름하에 서로가 죽일듯이 정면으로 싸우는 것이다.
유신철폐와 유신수호를 위해.
혜진은 최류탄의 매운 맛이 채 가시지도 않은 교정을 거닐었다.
막 봄의 훈풍이 꽃샘 바람에 섞이어 이상한 기후를 연출해 내고 있다.
혜진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장현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비록 못배웠기는 하지만 누구보다도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다.
든든하고 믿음직한 그의 행동과 순진하기 짝이 없는 마음씨가 그저 혜진의 가슴에 훈훈하게 다가온다.
개강을 하고 난 후에 진호가 몇 번 혜진을 찾아왔지만 혜진은 그를 쌀쌀맞게 대했다.
더이상 그런 관계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진호의 뻔뻔스러운 얼굴이 한없이 혐오스러웠다.
그러니 진호도 다시 혜진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둘의 관계는 더욱 편해진 것 같았다.
신촌의 도로가에 경찰들이 무작정 학생들을 검문해댔고, 학생들은 그런 경찰들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였다.
학생과 경찰의 대치는 끝없는 순환이었고, 가끔은 정면 충돌의 양상도 보였다.
마포쪽을 바라보고 있는 '선화랑'.
혜진은 따끈한 보리차를 두손으로 감싸잡고 홀짝대다가
막 다방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검정 싱글 차림의 청년에게 손짓을 했다.
"장현씨, 여기야."
장현은 약간 추운지 손을 비비며 미소를 함뿍 머금는다.
"와 하메 왔노?"
"뭐 별 일도 없고 해서. 춥지?"
장현이 혜진의 앞에 털썩 앉는다.
그의 코가 꽃샘 추위에 벌겋다.
"쬐메 춥네."
혜진이 이렇게 말하는 장현의 손을 스스럼없이 자기 손으로 감싸 잡았다.
장현이 화들짝 놀란다.
"뭐꼬? 와 이라노?"
장현이 손을 빼려고 하다가 혜진의 생글거리는 얼굴을 보고 그저 가만히 있었고
장현의 차가운 손의 감촉이 찌르르 혜진의 가슴까지 다가온다.
다방에서 나오는데 혜진이 장현의 팔을 끼면서 말했다.
"나 오늘 장현씨 집에 가도 돼?"
"뭐라꼬? 우리 집에?"
"응, 한번 장현씨가 어떻게 사나 보고 싶어서 그래."
"안된다."
"왜에?"
혜진이 약간은 응석받힌 목소리로 묻는다.
장현이 속으로 중림동 판자집에 어떻게 혜진을 데려갈 수 있겠냐고 생각한다.
"괜찮아, 장현씨. 나 장현씨가 잘 살지 못한다는 거 다 알아."
장현이 그 말을 듣고는 가슴이 뭉클해 온다.
자신은 혜진에게 잘보이려고 꼬박 꼬박 양복에다 멋을 부리고 나왔는데,
혜진은 이미 장현이 못산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라믄 욕하믄 안된다."
"호호호, 바보. 욕은 왜 해?"
혜진이 좋아서 깔깔댔다.
정말로 형편없는 집이었다.
문앞 텃마루에 걸터 앉아서 혜진은 긴 숨을 내쉰다.
거기까지 간 것이 힘이 들어서이다.
장현은 그런 혜진의 눈치를 자꾸 보았지만 혜진은 힘이 드는지 헉헉댈 뿐이었다.
텃마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솥과 냄비가 까만 끄을음이 오른 채로 뒹굴고 있고,
연탄 몇장과 함께 너저분한 그릇, 양동이들.
혜진이 다가가 냄비를 집어드니 장현이 기겁을 한다.
"안 씻것다."
하지만 혜진은 이미 뚜껑을 연 상태다.
지저분하게 라면 몇 올이 말라붙어 있다.
혜진은 냄비 등속을 가지고 수도가로 간다.
"와 이카노?"
장현이 말리는데 혜진은 양동이에 냄비와 그릇들을 쏟아 넣고 물을 틀었다.
싸늘한 물줄기가 쏟아져 나온다.
"물이 찹다."
장현은 어쩔줄 모르고 있는데 혜진이 그 찬물에 손을 담가 수세미로 그것을 닦기 시작했다.
우선 부엌살림을 정리하고 방으로 들어가니 방도 가관이었다.
개지도 않은 이불을 보고 장현이 허겁지겁 옆으로 개켜서 밀어놓는다.
꼬질꼬질한 빨래감이 구석에 쳐박혀 있고 휴지조각들도 어지럽다.
혜진은 그것을 보고 쯧쯧 혀를 차더니 방을 치우기 시작한다.
"내가 해도 된다."
장현이 자꾸만 말리다가 혜진의 손을 막지 못하니 그저 포기하고 옆에 서있었다.
혜진은 방을 치우다가 의외로 방안에 책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는 놀랐다.
"책이 많네. 이거 장현씨가 보는 거야?"
장현이 보기에는 어려운 책도 많았다.
"어데? 울 행님이 보는 기다."
혜진이 그말을 듣고는 깜짝 놀란다.
"형님이 계셔?"
"하모."
여태껏 가족사항을 물어보지 않았었다.
그저 막연히 혼자 산다고 느꼈을 뿐이다.
"그럼 형님은 일나가셨어?'
"아이다. 핵교갔다 아이가."
"학교? 그럼 곧 오시겠네?"
그렇잖아도 그것이 걱정이었다.
영민이 곧 돌아올 건데 혜진은 이렇게 있었고,
아직 장현은 혜진에 대해서 영민에게 한마디의 말도 없었던 것이다.
혜진은 집안을 대충 정리한 다음에 저녁을 준비하려고 하는데 집안에는 라면 뿐이 없었다.
"장현씨, 시장이 어디야?"
"와? 그냥 라면 묵자."
"하 참. 시장이 어디냐니까?"
장현이 어색하게 대꾸하자 혜진이 달랑 나선다.
장현이 그것을 보고 허겁지겁 그녀를 따라 나섰다.
여자의 행복은 이런 작은 것이다.
누구를 위해 맛난 것을 준비하고 살림을 사는 재미.
혜진은 어색하게 뒤따르는 장현에게 장바구니를 들렸다.
그의 당황해하는 모습이 우스워서 깔깔댄다.
그들은 마치 신혼부부가 처음 장보러 간 것같은 느낌으로 시장을 돌아다녔다.
밥을 짓고 찌게를 올려 놓는데 문간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장현이 텃마루에 걸터앉아 혜진의 밥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벌떡 일어섰다.
"행님 오나?"
혜진이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확 달아 오른다.
외간 남자의 집에 찾아와서 밥짓고 찌게를 끓이는 모습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현의 가족을 처음으로 뵌다는 긴장감에 더욱 가슴이 뛰는 것이다.
영민이 안으로 들어오다가 한 여자가 밥을 짓고 장현이 그것을 들여다 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의아해 한다.
"누구야?"
장현이 쩔쩔맨다.
"행님아, 내가 벌써부텀 말할라꼬 했는데 말이다....."
하긴 영민은 요즘 장현의 행동이 좀 이상한 데가 있긴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자를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집이 누추한데. 연락이라도 하고 올 것이지."
영민도 치우지도 않은 집꼬라지가 창피하기도 했다.
"마 그렇게 됐다 안카나."
여자는 아직도 등을 돌린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고,
영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뒷모습이 어쩐지 아련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영민이 이렇게 말하자 여자가 비로소 몸을 돌린다.
그리고는....
헉! 흡!
무언가 머리 속에서 툭하고 끊어지는 느낌.
온몸의 감각들이 모두 활동을 멈추고, 세상마저도 침묵한 채 어떤 한 곳으로 뭉텅 빠져드는 느낌.
너무나 기다렸고 너무나 감추어 왔기에 너무나 생소해지는 느낌.
그리고 세월의 강을 격했기에 어찌 보면 너무나 생경스러운 감정이 한꺼번에 소용돌이 친다.
누군가가 흑흑대고 울고 있다.
피끓는 소리로 오장이 끊어지도록 오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감정이 그러는 것이다.
반이 뚝 끊어져 버린 그리운 세월에 대한 감정.
아득한 동심의 기억이 맹렬한 기세로 혜진에게 달려들어서는 그녀를 함몰시켰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
아니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조차 기억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감각이, 감정이, 생각이, 이성이 몸을 떠난 것같이, 혜진은 실어증에 걸려 그저 벌벌벌벌 떨고만 있다.
"혜진이?"
영민도 감정이 격해졌는지 이렇게 확인하듯 불러본다.
아닐 수도 있다는 의구심때문에.
장현은 무엇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두 사람의 얼굴만 살피는데
혜진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다.
"오빠! 오빠아!"
그 소리와 함께 갑자기 봇물이 터지듯이 꽉 막혀 있던 감정의 물이 송두리채 터져 버렸다.
마치 모든 것을 한입에 삼키려고 달려드는 흉포한 파도와도 같이.
"오빠. 오빠아!"
영민도 견디지 못하고 불쑥 혜진의 두손을 잡아 버린다.
"그래. 너로구나. 바로 너 혜진이구나."
영민의 눈에도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어찌 세월은 이리도 슬픈 것인지.
감정은 타오르는 불꽃이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태울 수있고,
그 반짝임이 황홀한 아름다움으로 빛나지만 언젠가는 식어질 수 밖에 없는 감각의 유희다.
그렇게 찬란히 빛나던 불꽃이라도 한 순간에 검은 여운을 남긴 채로 스러져 가는 것이 불꽃인 것이다.
그렇게 엄청나게 터져 버렸던 감정이 잦아들며 혜진은 다시 영민을 바라본다.
"어디 갔었어? 꼭 돌아 온다고 했잖아."
영민은 그 말에 대꾸도 못하고 그저 혜진의 손을 꼭 잡고 있을 뿐이었다.
감정만 그대로 남은 채 몸이 훌쩍 커버린 두 사람은 처음 격한 감정이 사그러들자, 어색한 감정이 남아 침묵한다.
그때까지도 어정쩡하게 서있던 장현이 생각나서 영민이 그를 보며 말한다.
"장현아. 어릴 때 헤어진 내 동생이야."
장현은 아직도 어리둥절해서 그대로 서있었고, 영민이 둘에게 말한다.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자."
선 채로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도 긴 사연이었다.
영민이 방으로 들어가자 장현이 영민을 따라 들어가다가,
혜진이 아직도 감정을 추스리지 못해서 서있는 것을 보고 고개짓을 한다.
"뭐하노, 혜진씨. 들어와라 안카나."
혜진이 그제서야 몸을 움직인다.
세월은 살아있는 것이다.
때로는 자신의 뒤로 흘러간 세월이 회색의 재만을 남긴 채 죽어져 굳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의 감정이 녹아 내릴 때 과거의 세월도 그 녹는 감정과 함께 녹아 내려서,
세월과 똑같이 감동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장현과 혜진은 그저 굳어져 죽어 버렸던 그 슬픈 세월의 긴 이야기를 듣고 있다.
감정이 벅차 오르고 슬픔이 가득하면 셋은 숨죽여 울어버렸다.
그 긴 저녁이 자꾸만 더 길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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