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그리운 세월

19. 잔인한 운명

오늘의 쉼터 2015. 8. 30. 10:36

19. 잔인한 운명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은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실제로 자신의 행동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선상을 벗어날 수 없이 헤매이고 있다.

처음 진호와 같이 여관에 있었던 날,

그가 했던 그 이상야릇한 말이 그에 대한 엄청난 혐오감으로 다가왔을 때,

혜진은 그와 더이상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몸은 점점 더 그를 가까이 하게 되었고,

그 타성으로 혜진은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

혜진은 그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으로 자신을 그에게 집어 던지고 있는 것이다.

매일 그렇게 지내니까 자연히 둘은 캠퍼스에서 알려지게 되었고,

다른 학생들이 그렇게 본다는 사실 하나때문에라도 혜진은

그 속박 안으로 더욱 깊이 몸을 담그는 것이었다.

겨울이 오려나 보다.

겨울은 이상스럽게도 하늘보다는 땅에서 부터 먼저 느껴온다.

이미 정기를 잃은 풀들이 누렇게 말라가고, 땅은 그 비옥함을 잃은 채로 투실투실 척박해진다.

그리고 그 뒤로 싸늘하게 밀려드는 냉기.

헉!

혜진은 그 계절의 잔인성에 숨을 한번 멈추어 본다.

춥다.

아니, 아직 날씨는 그리 춥지는 않지만 마음이 못견디게 추운 것이다.

떨어지는 낙엽에 눈물이 고인다.

혜진은 자신이 왜 이렇게 심한 슬픔을 느끼는지 잘알고 있다.

그것은 어제 다녀왔던 산부인과에서 받은 판정때문이었다.

임신 3개월.

어쩐단 말인가?

그저 정없이 맡겨놓은 몸이 그만 다른 생명을 잉태해 버린 것이다.

혜진은 이미 말라빠져 죽어져 있는 마른 잔디를 한웅큼 손으로 잡아본다.

늙은 노파의 듬성듬성한 머리가 뿌리채 뽑히듯이 힘없이 스르르 뽑혀 나온다.

이미 생명을 잃은 탓이기 때문일까?

혜진은 진호에게 말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쉽게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가슴이 답답해 온다.

말하면 무엇할 것인가?

그는 또 '책임질 수 있어'라고 말할 것이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건조한 말투로 말이다.

혜진은 그 의미보다는 그 음성의 건조함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 생각해 본다.

처음 만날 때는 그렇게 부드럽고 정감있던 사람이, 하룻밤을 같이 지낸 다음에 확 변해 버린 것이다.

그저 동물적인 욕구를 만족하기 위해 낄낄대는 저속한 짐승처럼 보일 뿐이었다.

하늘을 올려다 본다.

누군가 자애로운 눈빛으로 혜진을 내려다 본다는 착각이 든다.

아, 그 눈빛은 혜진의 과거에, 그 불타는 화염속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그리고 까마득한 과거의 추억속으로 영영 도망쳐 버린 그런 눈빛이었다.

그때 이후로 혜진은 그런 눈빛을 어느 누구에게도 발견할 수 없었다.

자신이 진호를 본 순간 그 눈빛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 추억속의 눈빛은 이미 이 세상에서 볼 수없는 그런 것이다.

말해야 한다.

그대로 지나칠 수는 없지 않은가.

혜진은 어느 새 눈가로 흘러내린 눈물을 닦으며 일어섰다.

진호는 근처 당구장에 있을 것이 뻔했다.

자신을 찾아 당구장 안으로 들어오는 혜진을 보는 순간 진호는 인상을 썼다.

"왜? 당구장엔 오지 말랬잖아."

그가 일부러 크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환멸스럽다.

혜진은 그를 노려보면서 입을 연다.

"할 말이 있어요."

"지금? 당구치고 있잖아."

"기다릴께요. 빈터에 있겠어요."

혜진은 진호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횅하고 등을 돌린다.

그의 당황스러운 표정이 보이는 듯 했다.

음악소리가 그리 크지 않은 '빈터'는 약간 스산한 분위기를 내고 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여태까지 진호와 수없이 이곳에 왔는데도 이런 느낌이 들지는 않았었다.

아무래도 오늘 기분이 많이 상해 있어서일 것이다.

커피를 홀짝여도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혜진은 마치 그것이 습관적인 동작인 양 커피를 홀짝이고 있다.

한참 후에야 진호가 잔뜩 부어오른 얼굴로 나타났다.

하지만 혜진은 개의치 않는다.

그런 얼굴을 한 두번 본 것이 아니니까.

그는 항상 당구에 진 날이면 기분이 나빠서 얼굴이 벌개져 있다.

그리고 그 탓을 이번에는 혜진에게 돌릴 것이다.

진호가 털썩 혜진의 앞에 주저 앉는다.

이미 예의라고는 조금도 생각치 않는 그런 모습이다.

"무슨 말이야?"

혜진의 마음이 이상스럽게 담담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주저했는데, 이제는 아주 당당해진 것이다.

왜일까?

"나 어제 산부인과에 갔었어요."

"뭐?"

그 말에서 벌써 진호가 하얗게 질렸다.

진호의 얼굴이 그렇게 질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 혜진은 그가 질리는 표정을 즐기고 있다.

"3개월이래요."

자신이 뱉어놓는 말이 아무런 감정이 섞여 있지 않다는 것이 또 신기했다.

"저, 저, 정말이야?"

그의 말소리가 저 정도로 떨리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혜진의 기분이 좋은 것일까.

"그래요. 정말이에요."

진호가 허덕이고 있다.

왜 저렇게 당황할까?

아빠가 되는 것이, 아니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너무나 뜻밖이어서 그럴까.

갑자기 온 세상이 말을 잊은 양 침묵이 흐른다.

그 조용한 노래소리도 이제는 사라진 것 같다.

그러다가 한 가수가 악을 쓰듯이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마침내 진호가 입을 연다.

"떼!"

단 한마디.

너무나 흉칙한 단 한마디가 아주 흉악한 흉기가 되어 혜진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 버린다.

이정도로는 예견하지 못했다.

그저 '책임질께'라는 무책임한 한마디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아주 단호하게 그 잔인한 소리를 뇌까리는 것이다.

혜진의 입가에 실 비웃음이 흐른다.

그를 놀려주고 싶은 것일까?

아니다.

혜진은 그 잔혹한 운명을 한번 놀려주고 싶었다.

"아니요. 난 낳을 거에요."

"학교는? 어떻게 먹여 살리려고? 누가 책임지려고?"

진호가 소리치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그를 힐끗힐끗 쳐다보지만

이미 진호는 이성을 잃은 것 같다.

혜진은 여전히 그에게 비웃음을 흘려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아! 앉으라구!"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진호선배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하니까요."

"앉아 보라니까!"

그러나 혜진은 그대로 돌아서서 나가 버리고 진호가 그냥 멍하니 그대로 굳어져 버린다.

혜진은 다방문을 나서면서 자신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것을 그대로 둔 채

그의 잔인한 말을 되뇌어 보았다.

손창석 선생이 허겁지겁 들어오는 통에 장현이 훅하고 긴장을 했다가 손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긴장을 푼다.

손선생은 무엇이 바쁜지 헐떡거렸다.

"장현아, 형 어디있니?"

"안에예. 와 그럼니꺼?"

손선생이 후다닥 방을 열었고 영민이 책을 보다가 손선생의 얼굴을 보고는 긴장의 빛을 띈다.

"영민아, 됐다. 너 대검에 합격했다고."

손선생의 손에 합격증서가 들려있다.

가슴에 뭔가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치민다.

"자식, 너 해낼 줄 알았다."

손선생이 영민의 등을 토닥이고 영민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얼마나 원했던 것인가.

"이제 대학 입시만 남았다. 어때 자신있지?"

손선생이 영민의 손을 꼭 잡았고 영민은 그저 감정이 격해져서 어쩔 줄 모르고 천장만 쳐다본다.

"행님, 우리 이럴께 아니라 어디가서 파띠라도 하면 안되겠나?"

영민과 손선생이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장현은 자신이 성공한 양 기뻤다.

한사코 손선생을 안만나겠다고 우기던 영민에게 손선생에게 연락을 취한 것은 장현이었다.

손선생은 부랴부랴 영민을 만났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었다.

그리고 이제 대검 합격증을 받아 든 것이다.

겨울밤이 밀려온다.

장현이 트림을 꺼억하고 하자 돼지 갈비 냄새가 확 흘려진다.

손선생은 다른 학생들 때문에 일찍 가버리고, 영민과 장현은 오랫만에 산보를 한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포식을 한 탓인지 시원하게 느껴졌다.

"장현아, 만약에 말이야."

"뭐꼬?"

"만약에 대학에 붙어도 등록금이 비쌀텐데...."

"행님, 무신 말을 그케 하노. 나가 그만한 돈은 있다 안카나."

영민은 장현의 말을 듣지만 그래도 걱정이었다.

또한 장현이 하는 일도 걱정이다.

그것은 영민도 눈치채고 있는 주먹청부였고 ,

엄연한 범법이기에 잘못하면 경찰에 잡힐 수도 있는 것이다.

"행님. 내 말이다. 걱정 하나도 말거라. 내는 장현인기라. 누도 날 어쩔 수 없는 장현인기라."

그것은 안다.

장현이 천성적인 싸움꾼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영민이 걱정하는 것은 그것보다는 다른 것이었다.

장현이 서둘러 뺑코를 만난 것은 아무래도 영민이 대학에 입학하려면 돈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등록금 뿐만 아니라 그래도 번듯한 옷가지 하나라도 마련해야 하지 않겠는가.

뺑코가 기다렸다는 듯이 장현을 맞는다.

일거리가 있다는 말이다.

"어서와라. 기다리고 있었다."

장현은 말을 아꼈다.

어차피 뺑코를 신임하지 않는 터였으니 말이다.

"일있슴니꺼?"

"그래. 일은 별일은 아닌데 돈이 크단 말이야."

돈이 크다는 말에 혹하는 생각이 든다.

"뭔 일인교?"

"간단한 거야. 그저 여자애 하나 손봐주면 돼."

"가시나요?"

"그래. 아마 임신한 여자인 모양인데 남자 친구가 떼라는 것을 안떼려는 모양이야."

장현의 기분이 팍 상해 버린다.

아무리 청부지만 여자를 건드리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안할랍니더."

뺑코가 의외라는 듯이 놀란다.

"아니, 왜?"

"내사마 주먹꾼이지 야바위꾼은 아닝기라요."

"임마 돈이 얼만데."

"그라도 안할랍니더."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자기도 태어나서 그렇게 어렵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을 떼다니.

"우리 애들을 시키면 되는데 이놈들이 사고를 저지를까봐 그래."

하긴 그놈들이면 여자 하나 완전히 병신 만들어 놓을 것이다.

그러면 일을 시킨 그 여자의 남자친구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고, 돈도 받기 힘들지도 모른다.

렇기에 안전한 장현을 시키려는 것이다.

"다른 일 없슴니꺼?"

"하참, 자식. 되게 빼고 그러네. 그럼 이렇게 하자. 그저 손만 조금 봐주고 너 6 나 4를 먹도록 하자고."

군침이 도는 말이다.

그러면 쉽게 영민의 등록금과 비용을 마련할 수가 있다.

하지만....

"안할랍니더. 일있으면 연락하이소마."

"야, 야 임마."

장현은 그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고

뺑코는 어이가 없는지 뒤에서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뺑코와는 손을 씻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인간이 잘기도 했지만, 일도 역시 크지는 않아서 괜히 땀을 흘려놓고도 대가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장현은 마영달을 생각한다.

그라면 큰 일을 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조무라기 뺑코와는 상대가 안되니까.

장현은 마영달을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마음먹고는 발을 옮긴다.

결정을 하려면 빨리 해야만 한다.

그리고 앞으로 영민의 대학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지 않은가.

마영달은 유도 유단자라서 그런지 한눈에 위압감을 주는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보다도 더욱 점잖아진 느낌이고 위압감은 한층 더 심했다.

하지만 장현은 그런 그의 앞에서 눈썹도 까닥하지 않고 쳐다보고만 있다 .

"오랜 만이군, 장현군."

깍듯이 손을 내밀고 장현은 그의 두툼한 손을 마주 잡았다.

인물은 인물을 알아보는 법이다.

장현은 그와 처음 맞딱뜨렸을 때를 기억한다.

아마 마영달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네를 보면 그때의 생각이 잊혀지지가 않네. 허허허."

마영달이 담배를 깊숙히 빨았다가 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누구라도 죽이고 싶었다.

바로 영민이 철거반들에게 당한 날이었다.

장현은 누구든지 걸리면 죽일 것이라고 증오심을 온몸에 가득 품은 채로,

발광난 개처럼 용산일대를 헤매고 다녔었다.

그때 검은 양복의 그를 만난 것이다.

워낙 덩지가 좋은 이유도 있었지만,

장현의 증오심을 폭발시킨 것은 그들의 잘빼입은 양복과 썬글라스,

그리고 멋진 승용차가 장현으로 하여금 그 들이 바로 그 '가진 자'라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들은 마치 법을 집행하는 집행자들 처럼 보였다.

그리고 장현이 증오하는 자들이 그런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었다.

다짜고짜로 그의 앞으로 달려드니 그의 보디가드인 듯한 사내 두명이 그를 급히 막아선다.

오른쪽에 있는 놈에게 냅다 발길로 복부를 꽂아 버렸다.

쉿소리가 얼마나 빠른 느낌을 주었는지 맞은 자가 그대로 서있는 것 처럼 보이다가 푹하고 꼬꾸라졌다.

마영달이 손을 저어 말리지만 않았더라도 장현은 그와 정면으로 한판 붙었을 것이다.

마영달이 손짓하니 한 사내가 봉투를 하나 가져왔고, 마영달은 그것을 장현에게 건넨다.

불룩한 것이 꽤 들어있을 터였다.

"난 처음으로 그렇게 막무가내인 놈을 보았어. 허허허. 그리고 그 빠르기가 마치 거친 산짐승같더군."

장현은 봉투를 받아 안주머니에 넣는다.

마영달이 '산짐승'이란 말이 자기에게 잘 들어맞는 말이란 생각을 하며.

그렇다.

장현은 본능적인 산짐승이었다.

생명보존을 위해 온갖 싸움질을 획득한 흉포한 산짐승.

"뺑코에게 이야기 다 전해 들었네. 돈이 필요한 것 같더구만. 그리고 이제는 거기서 손빼게.

자네같은 사람이 뺑코의 일을 받고 있을 수는 없지. 나랑 한번 일해보자구."

아마 마영달이 뺑코에게 장현을 보낸 것은 장현을 시험해 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조주형을 보냈더군. 노량진 애들이 그 덕분에 수월해졌고."

마영달이 다시 담배를 깊숙히 빤다.

빨간 불꽃이 파르르 떨다가 재가 되어 사그러졌다.

그리고 연기가 푸륵.

"?달 행님요. 지는 말입니더. 혼자서 일한다 아님니꺼."

"안다. 알고 있단 말일세."

현은 누구의 아래에서 일하는 것이 딱 질색이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거물밖에는 없었다.

"일이 있으믄 불러주이소."

장현이 고개를 까닥하며 인사를 했고, 마영달이 미소를 보낸다.

"내 곧 연락함세."

썬글라스를 낀 사내들이 장현이 나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다.

드디어 시험날이 왔다.

아침부터 꾸무리하던 날이 드디어 눈발이 비치기 시작했고,

영민은 일찍 부터 시험에 대비하느라고 시험장에 나갔다.

장현은 마지막으로 뺑코에게 인사나 하려고 사무실로 향했다.

눈이 점점 많이 내렸고 장현은 눈오는 날의 설움을 떠올린다.

세상에 피붙이 하나 없는 거지에게 눈오는 날은 그야말로 고통이었다.

살갗도 가리기 어려운 넝마옷을 두른 어린 거지에게 왜 그다지 눈송이는 차갑게 느껴졌던지....

사무실쪽으로 가기 위해 골목을 도는데 어디선가 다급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당신들은 누구세요?"

거의 갈라지는 음성이 아마 극심한 공포에서 나오는 것일 거다.

위험에 처한 사람의 본능적인 비명.

장현은 못본 척 지나치려고 했다.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괜히 끼어들어 봐야 골치 아픈 일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자들의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야, 고년 되게 시끄럽게 구네. 한 방 먹여."

"아악!"

찢어지는 비명소리.

아마 한방 거세게 맞은 것 같았다.

장현이 이를 지그시 문다.

사내의 목소리는 바로 뺑코의 수하들의 것이었다.

말하자면 뺑코가 저번에 장현에게 사주한 일을 지금 이들이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장현은 거의 신음에 가까운 여자의 비명이

마치 자신이 청계천 다리 밑에서 당했던 그 상황같은 생각이 퍼뜩 든다.

그 단속반에 대한 엄청난 무력감.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암담한 위기감.

"야, 벗겨. 이왕이면 질펀하게 놀아보자구."

그 목소리도 억양도 똑같았다.

완전히 무력화된 약한 짐승을 갖고 놀리는 듯한 비아냥거림.

그리고 야비함.

장현이 견디지 못하고 후다닥 그쪽으로 뛴다.

"엇!"

사내들이 누가 뛰어들자 놀라서 손을 멈추었다가 그것이 장현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입가에 미소를 띈다.

너도 한번 놀아보라는 뜻이다.

장현의 얼굴이 분노로 벌겋게 달아오른다.

"야, 문디새끼들아. 꺼져!"

목소리가 커지자 사내들이 어리둥절해서 하던 행동을 멈춘다.

눈바닥에 쓰러진 여자는 이미 혼절했거나 아니면 공포와 고통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옷은 거의 다 찢겨진 채.

만약에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그녀는 이 짐승같은 놈들에게 욕을 당하고 버려져서

추위에 얼어죽을 지도 모른다.

장현이 소리를 친다.

"꺼져뿌라, 문디 새끼들!"

사내들이 흠칫하면서 빙글거린다.

"왜 그래. 재미 좀 본다는데."

곰보가 빈정대지만 감히 덤벼들지는 못했다.

장현의 솜씨는 두려워 할만한 것이다.

"꺼지라캤다!"

장현이 분노를 참지 못해서 그대로 몸을 날렸고

곰보가 황망중에 몸을 굽혀 간신히 장현을 피하는데 장현의 발이 그대로 날아서 벽을 뚫어 버린다.

"야, 간다. 간다고."

사내들이 그 무지막지한 힘에 놀라서 그대로 줄행랑을 놓아 버리고 다른 사내들도 후다닥 도망을

쳐 버렸다.

장현은 쓰러져 있는 여자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레 묻는다.

"괜찮는교?"

여자가 억지로 고개를 들어서 말하는데 장현은 헉하고 숨을 멈추어 버린다.

"살려주세요."

간신히 대답하는 여자의 말에 장현은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

말이 얼어붙었는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여자가 다시 말한다.

"살려주세요."

"일어날 수 있능교?"

장현이 여자를 우선 일으켜 세우려 하는데 여자가 배를 움켜쥐고 비명을 질렀다.

"아악!"

그대로 땅바닥으로 쓰러지는 것은 장현이 황급히 부축을 한다.

장현은 안다.

여자가 굉장한 내상을 입었다는 것을.

하긴 남자의 사정없는 주먹이 배에 꽂혔으니 그 상처가 클 것이었다.

"업히소마."

장현이 등을 디밀자 여자가 간신히 손을 뻗는데 장현이 후다닥 그녀를 업고는 앞으로 뛴다.

여자는 배가 너무나 아픈지 그대로 엉거주춤하게 웅크리고만 있고,

그때문에 장현의 업은 모습이 이상하게만 보였다.

하지만 장현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뛰고 있다.

머리 속에는 빨리 병원을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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