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그리운 세월

18. 회색의 나라

오늘의 쉼터 2015. 8. 30. 10:30

18. 회색의 나라

 

어차피 죽었던 목숨이었다.

청계천변의 쓰레기와 함께 그 너저분한 삶이 묻혀버렸을 그런 헛된 인생이었다.

고통과 간난의 연속에서 그저 버렸어야만 할 그런 목숨이었다.

만약 그때 영민이 도와주지만 않았던들,

지금 장현은 여기에 서있지 못하고 그대로 쓰레기장에 파묻혀서 푹푹 썩어

구더기가 뜯어 먹는 그런 쓰레기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 남았다.

무슨 할 일이 있어선가.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살아있기에 살 때까지 살아야 한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장현은 천천히 검은 가죽 장갑을 낀다.

돈을 벌어야만 한다.

이 개같은 세상에서 그래도 살아가려면 돈을 벌어야만 한다.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자에게 복수를 해 주기 위해서라면 돈은 꼭 필요한 것이다.

그들의 검은 돈과 장현이 벌려고 하는 검은 돈과의 차이점은 없었다.  

장현은 영민의 깊은 눈동자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공부를 하기 원하는 지도.

그래. 그를 공부시키기 위해서도 돈을 벌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돈을 벌건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장현에게 이제 법은 더 이상 소용이 없는 것이다.

법이란 장현 부류의 인간들에게는 오히려 보호가 아니라 소외였다.

그들이 해준 만큼 똑같이 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법이다.

바로 장현의 법인 것이다.  

미로형으로 되어 있는 영등포 뒷골목의 샛길.

장현의 큰 몸집이 막아서면 뒤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그런 좁은 길이다.

기다리던 사내들이 오고 있다.

장현의 온몸에서 살기가 후득 끓어 오른다.

온몸의 핏줄이란 핏줄은 모두 아우성을 치지만 장현은 그 아우성을 지그시 눌러 참는다.

생존을 위한 본능으로 배워온 흥분을 가라앉히는 방법.

흥분하면 사는 확률이 줄어든다.

최대한 감정을 억제해야만 한다.

냉정하게.  

첫번째 청부이기에 심장의 고동이 뛰는 것이다.

그들이 고단자들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론 그들은 한명을 상대하기도 벅찬 상대들이다.

하지만 골목길이고 또 한명은 가벼운 부상을 당하고 있는 중이다.

영등포 구역의 대빵 조주형과 그 보디가드 마두.

누가 감히 그들에게 이런 식으로 덤벼들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그들의 구역 한복판에서.

조주형은 노량진파와의 충돌에서 조금 다친 상태다.

그러니 장현은 우선 마두를 때려 눕히면 되었다.  

땅거미가 으스스 지고 있다.

오래되어 낡은 담벼락에 길게 석양의 여운이 머문다.

장현은 전혀 서두르지 않고 그들의 앞으로 나선다.

떡 버티고 서니 길이 꽉 막혀 버린다.

장현은 안다.

그들이 자신의 구역 한복판에서 자신들을 노리고 나타난 단 한명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만약에 밀린다면 보스자리를 내놓아야만 한다.

다른 식구들이 다 다른 곳으로 흩어질테니 말이다.  

"뭐야, 새끼!"  

마두가 조주형을 막아서며 장현을 경계하며 으르렁댄다.

그의 얼굴이 정말로 말의 대가리를 닮았다.

길쭉한 머리하고 벌름거리는 코.  

"뭐하는 놈이냐?"  

역시 조주형답게 말소리가 의젓하다.

하긴 자신의 구역 한복판에서 의젓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냐마는.  

장현은 한마디 대꾸도 없다.

말을 아끼면서 그들의 헛점을 노려야 한다.

말을 한다는 것은 이미 싸움의 기를 잃었기 때문이다.

장현이 스륵 앞으로 다가서자 마두가 그저 막은 상대는 아니다라는 것을 파악했는지,

기선을 제압하려고 장현의 면상을 노리며 오른 주먹을 날렸다.

팽하는 소리가 피하는 장현의 앞으로 지나갔는데, 그 위력을 장현은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잘못맞으면 턱주가리가 으드득 부서질 만한 위력.

역시 마두였다.  

서두르지 말라.

장현은 자신에게 이렇게 타이른다.

마두가 첫번 공격이 빗나가자 기마자세를 취하며 이빨을 우두둑 깨문다.

역시 태권의 실력자다운 모습이다.

그의 자세는 하나의 헛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영등포 보스의 보디가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싸움은 역시 배운 싸움보다 천성적인 싸움꾼이 최고였다.

일렁이는 파도 위에 놓여진 작은 나무 잎사귀처럼

일렁일렁 파도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최고의 막싸움꾼의 기교였다.  

아하차.  

춤사위에 온몸이 일렁이듯 장현이 앞으로 곧장 그 기마자세를 부수려는 듯 돌진해 들어간다.

마두가 그 무모한 시도에 씨익 미소를 보이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마두의 번개같은 앞차기가 훅하고 곧추 뻗어왔다.

앞으로 달려드는 상대에게 가장 심한 공격.

맞으면 기둥이라도 두동강이 날 정도의 위력을 가진 마두의 앞차기.

그때 갑자기 장현이 몸이 움찔 마두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응?  

마두가 어리둥절하는 찰라, 갑자기 마두의 아랫도리가 끊어지는 충격을 받고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어느새 장현의 발이 그의 낭심을 정확하게 틀어박은 것이다.

앞차기의 헛점은 바로 중심이다.

하지만 그것을 빠져서 들어가려면 정확도와 민첩성, 그리고 과감성이 필요했다.

장현은 천성적으로 그것을 다 구비했던 것이다.

마두가 앞차기를 시도한 순간

그의 몸이 주르륵 땅으로 미끄러지며 바로 그의 사타구니를 올려 찬 것이다.

이런 수법은 처음 보는 과감한 것이었다.

상대방의 공격 앞에서 자신의 몸을 땅바닥에 눕힌다는 행위는 바로 자살행위다.

하지만 그것이 전혀 뜻밖이었기에 마두가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장현은 시간을 두지 않으려고 바로 달려드는 조주형을 보며 몸을 붕 띄었다.

바로 조주형의 어퍼컷이 훅하고 다가온다.

반발을 간신히 뒤로 물렸다.

역시 영등포의 오야붕같는 민첩함과 상황판단이었다.

하지만 장현은 천성이 싸움꾼이다.

뒤로 물르면서 장현의 왼발이 텅빈 옆구리에 꽂힌다.

하지만 조주형도 만만치는 않은 자였다.

텅비었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그의 오른 손이 턱하고 장현의 발을 막아내 버린다.

하지만 그 한번의 공수에 벌써 승부는 판가름이 나버렸다.

조주형은 자신이 장현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파악한다.

장현은 한마리 상처입은 범이다.

이제 죽기를 각오하고 행하는 광란의 몸부림이다.

온몸이 그저 본능적인 살상기운으로 흐득흐득 떨어대는,

마치 건드리기만 해도 스스로 폭발해 버리는 폭발물이었다.

조주형의 얼굴에 공포의 빛이 어린다.  

"뭘 원해?"  

장현은 눈을 가늘게 떴고,

조주형은 자신이 평생 싸움을 해왔지만 이런 공포심은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앞에 있는 자는 지옥에서 온 악귀같은 느낌이었다.  

"떠나겠어. 영등포의 패권은 깨끗이 있겠다. 고향으로 내려가겠어."  

이것을 원하는 것일 거다.

조주형도 판단은 빠른 사내였다.

장현이 그말을 듣고 눈을 감는다.

어차피 노량진파들이 원하는 것이 이것인데 구태어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장현의 명치 끝에 뭔가가 쑤셔박혔다.  

으헉!  

"이 새끼!"  

조주형의 발길질이 명치의 고통을 참지 못해 구부린 장현의 면상에 정확하게 들이 박힌다.  

푸어헉!  

이빨을 앙다물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빨이 몽창 날아갔을 것이다.

조주형이 몸이 쓰러진 장현의 몸위로 덮쳐온다.

끝내기를 하려는 듯 온몸의 힘으로 장현을 밟아서 박살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장현은 악귀였다.

싸움만 아는 지독한 독종이다.

그는 싸움에서 죽음을 빠져 나왔고 싸움에서 살았던 자다.

장현은 핏줄기 때문에 거의 앞도 안보이는 상태에서 허공으로 발길질을 날린다.

이것은 본능적 기운이다.

무언가가 발에 턱하고 걸린다.

조주형의 몸 한부분 어딘가가 장현의 발길에 걸린 것이다.

있는 힘껏 냅다 걷어찬다.

조주형이 중심을 잡지 못해 공중에서 허둥댔다.

그것이 끝이다.

장현의 몸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닥에서 허공으로 박차오르며

그의 면상을 왼발로 거세게 찍어버렸다.  

으헉!  

거의 비명도 안지르고 무너지는 것을 몸을 날려서 발쪽을 찌끈 발아버렸다.  

아히갸하!  

이 정도면 평생을 불구로 지낼 것이다.

장현은 헉헉대며 간신히 몸을 추스렸다.

이제는 사라져야 한다.

한 패들이 몰려오기 전에.

역시 조주형은 한 조직의 보스로써 손색이 없었다.

부상당한 몸으로 그렇게 싸울 수가 있다니.  

영민이 책을 보다가 이상한 신음소리를 듣고 놀라 방바닥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것은 영민의 그 징한 삶에서 익히 들어왔던 소리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혹독한 부상에서 오는 신음이다.

방문을 벌컥 열었다.

장현이 악귀같은 얼굴로 만신창이가 된 채 신음을 내뿜다가 영민을 보고는 씩 웃는다.  

"장현아!"  

"헤헤, 헉헉. 행님아. 헉.... 내 쬐매 다쳤고마."  

"무슨 일이야, 임마. 왠일이냐고?"  

영민이 그를 부축하고 방으로 들어오는데 장현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무너져 버린다.

영민이 상처를 닦을 물을 가지고 오려고 부랴부랴 밖으로 뛰쳐 나갔다.  

장현은 뺑코의 앞에서 불만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본다.  

"행님, 계산이 틀린다 아입니꺼."  

"야, 장현아. 우리 식구도 먹여야하고 비용도 필요하잖아."  

하긴 맞기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너무 심하지 않은가.  

"행님, 자꼬 이러케 할꺼문 나 막살놓을라요."  

뺑코가 장현을 기분나쁘다는 투로 노려보며 묻는다.  

"그럼, 얼마를 원해?"  

"아, 딱 까놓고 말하믄 5는 묵어야재."  

뺑코가 재빨리 머리를 굴린다.

이런 실력자를 그냥 놓아버리는 것은 바보가 하는 짓이다.  

"그럼 6대 4로 하자."  

6대 4.

7대 3보다는 조금 낫지만 그래도 죽어라 싸운 것은 장현이지 않는가.

그러나 그래도 돈이 필요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주이소 마."  

장현은 불만스럽게 말했는데 아직 그의 얼굴에는 조주형에게 당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노량진 애들이 고맙다고 전해달란다."  

그건 장현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는 말이다.

자신은 일만 하고 돈만 받으면 된다.

일시키는 사람이 누구건 감사를 표하건 아무런 상관도 없다.  

"일거리 또 있습니꺼?"  

"하나있는데 좀 신통치 않은 거라서...."  

뺑코가 눙을 치는데 장현은 팽 돌아선다.  

"그라믄 안할랍니다."  

뺑코가 그 소리에 황급히 말한다.  

"야, 임마. 뭐가 그리 급하냐."  

뺑코는 다시 장현을 잡았고 일은 또 시작되었다.  

사실 뺑코는 장현이 조주형을 잡을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노량진파들이 영등포에 가서 떡이 된 이유도 마두와 조주형이라는 거물이 두명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현은 그 두 거물을 그대로 잠재웠고,

그 덕분에 뺑코도 이 세계에서 신임을 받게 되었다.

역시 마영달이 사람을 보긴 제대로 본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뺑코는 실 웃음을 입가에 흘린다.  

가을이 깊어가면 익는 것은 계절이 아니라 그리움이다.

가을이 깊을 수록 익는 것은 과실이 아니라 아픔이었다.

괜히 모든 것이 아픔과 그리움과 눈물로 변해 살포시 눈가에 머물다간

이내 눈물방울로 화해 굴러 떨어지는 것이 가을의 감상이다.  

윤경은 가을 잎 하나를 주워 코끝에 대어 본다.

아득한 그리움의 냄새가 그저 속절없이 그녀의 감정의 골 사이로 깊숙히 파고 들고,

그녀는 그 아련한 향기에 취한 채로 멀뚱히 높은 하늘만 올려다 보았다.

그녀의 반코트에 가을이 흠씬 묻어난다.

갈색 여운이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  

다음 학기에 복학을 해야 한다.

벌써 그 일 이후로 생의 환멸을 느껴 휴학을 한지 두해가 지났다.

집에서는 왜 복학을 하지 않느냐고 난리를 치지만,

윤경은 그 정념에 찌든 세상으로 자신의 몸을 던지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좋은 기억만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세월은 흐른다.

절대로 뒤로 돌아갈 수가 없다.

하지만 윤경의 가슴 속에서는 그 세월이 빙빙도는 소용돌이처럼 느껴지고 있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 세월이 뱅돌아 다시 올 것만 같았다.  

엄마의 말을 생각해 본다.

그렇도록 가슴아프게 고통을 받고 있자, 엄마는 이런 제안을 했다.  

'유학을 갔다 오는 게 어떻겠니?'라고.

좋은 생각일지도 모른다.

유학.

그 아련한 동심의 세계를 마음속에 꽁꽁 품은 채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훌쩍 도망을 가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세계에 숨어서 새로운 생을 한번 다시 시작해 보는 것이다.

이왕 이루지 못할 희망은 그대로 가슴에다 꼭꼭 숨겨둔 채로. 훌훌 떠나는 것도 좋은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아무도 모르게.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모든 것을 가슴속에 켜켜로 쌓아두고는, 마음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자폐성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

그래. 죽은 것이다.

과거는 몽땅 사라진 것이다.

그 죽은 껍질을 잡고 몸부림치는 일은 헛된 짓이다.  

들었던 낙엽을 허공에 띄워본다.

과거의 모든 것을 안고 가라고 말이다.

가을 잎은 허울럭 너울럭 허공을 날며 무엇이 그 리 안타까운지 안간 힘을 쓰다가 도로 한켠에 푹 처박혀 버린다.

윤경은 그 모습이 슬퍼서 눈물짓지만, 낙엽은 그대로 바람에 쓸려서 세월 속으로 도망쳐 버린다.

그래. 가는 거다.

윤경은 이렇게 속으로 소리쳐 본다.  

회색의 하늘 아래 회색 비행기가 회색의 운명을 안고 활주로를 달린다.

이상하게 달리는 느낌은 회색이 아닌 것이 신기했다.

어디로 가나?

이대로 훌쩍 떠난다면 등뒤에 남은 것들은 내 것이 아닌데....  

윤경은 눈물을 쿨쩍거려본다.

비행기가 제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앞대가리를 곧추 들었다.

그리고 텅하는 빈공상태의 느낌.

이것이 갈잎이 나무에서 떨어질 때의 그 허전한 고통일 것이다.

모든 것을 버려둔 채로 혼자 이 세상에서 고립되어지는 그 고적감.  

엄마가 공항에서 한없이 눈물 흘리던 모습이 생각나서 슬퍼진다.

무어가 그리 슬픈지 엄마는 심하게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 진평산씨는 그저 혀만 끌끌 찼던 것이다.  

독일. 회색의 하늘.

마치 비행기를 타기 전에 김포공항의 하늘이 그대로 여기까지 연이어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이다.

왠지 텁텁한 느낌이 든다.

이곳이 바로 독일이다.

딱딱하기 보다는 텁텁한 느낌.

가슴이 답답해 온다.

공기가 굉장한 무게를 지니고 윤경을 압박해 온다.

헉! 숨을 멈추어 본다.

하지만 프랭크푸르트의 하늘은 맑아지지 않는다.  

폐쇄적 마음을 다 버리지도 않고 독일로 온 것이 잘못이었다.

차라리 온화한 스페인이나 미국으로 갈 걸 하는 후회심이 인다.

기후부터 윤경을 못살게 군다.

그 암담한 폐쇄성.

이런 기후가 독일사람에게 폐쇄와 호전을 강요한 것 같다.

잔뜩 찌푸린 하늘 안이 마치 어떤 답답한 우리에 갇힌 듯한 느낌이다.

그렇기에 독일인들은 이 울타리를 벗어나려고

철학을 하고 호전적인 기운을 기르고 그리고 남을 침략하기 좋아하는가 보다.  

이런 기후는 윤경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언어도 윤경을 억누르기는 마찬가지다.

언제나 강한 액센트로 내뱉는 듯한 발음들.

그 언어의 강직성이 마치 흉기처럼 윤경의 가슴을 난도질하고 있다.

아,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할까.  

그녀에게 더 심하게 고통스러운 것이 바로 그 지긋지긋한 향수병이었다.

무언가 가슴에 대롱대롱 달린채로 영내 떨어지지 않으면 숨이 막히는 것 같아 가슴을 부여잡고 캑캑 기침을 해댄다.

하지만 그 무엇은 종내 떨어지지 않고 낄낄대는데 그 실체가 바로 향수병이란 괴물이었다.

무언가 허전하면서도 답답한 느낌.

가슴에 구멍이 뻥뚫려 그곳으로 독일의 혹한이 슝슝 통과하고 있는데도 시원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답답했다.

어디론가 미치도록 가고픈 충동이 일지만 갈 곳도 없었다.

흐흐흑.  

프랭크푸르트 역전.

우중충한 옷을 입은 독일인들은, 거의가 난민처럼 보였다.

이 난민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독일의 여행객들이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우글우글 웅성웅성 떠들어대고,

윤경은 그 여행객들이 우글대는 가운데로 풍겨오는 고기수프 냄새를 맡는다.

철제 골조의 지붕이 왠지 미적감각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들의 견고한 민족성을 말해주는 것 같다.

윤경은 벽에 큼지막하게 붙어있는 기차의 노선표를 노려보았다.

함부르크, 뒤셀도르프, 뮌헨, 파리, 롬, 모스크바 등등의 글씨가 현란하게 느껴진다.

국내 뿐 아니라 유럽 각지를 아무런 저항없이 통과할 수 있는 그 기차들의 노선표가 심한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윤경은 그 중의 한 목적지가 써있는 노선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블라디보스톡.'

블라디보스톡이면 바로 우리나라 위에 있는 소련의 도시였다.  

아! 윤경은 갑자기 그것을 집어 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것은 달콤한 유혹이다.

수많은 세월을 기차를 타고 넘어가는 것이다.

굉장히 긴 여행.

소련의 전체를 횡단하는 침대 기차.

원초적 광야와 설원을 통과하는 외로운 여행.

흑. 떠나고 싶다.

그 광활한 소련의 동토를 저만큼 가로질러 한국의 근처에서 그 냄새를 맡고 싶었다.  

쿨럭쿨럭.

윤경은 심한 기침을 해댔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 향수병이 윤경의 폐에 깃들었는지 이렇듯 심한 기침을 해대곤 한다.

그리웠다.

고국의 그 기운이 절절히 그리웠다.

거리, 복장, 사람들, 기후, 음식....  

느끼한 독일의 음식이 윤경을 못견디게 만들었다.

회색빛 암울한 독일의 기후가 윤경을 병들게 한다.

강한 발음의 인간성이 연약한 윤경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다.

아, 그리운 것은 이런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의 삶 자체인 것이다.

그것이 그리운 거다.

인간 냄새나는, 그대로 비벼댈 수 있고, 그 대로 부딪힐 수 있는 그런 인간적인 정이 그리운 것이다.  

흑흑.

윤경은 기침을 심하게 하다가 그저 울어버린다.

회색빛 하늘이 너울대고 있다.

누구도 정을 주거나 받지 않는다.

그저 떠돌뿐이다.

윤경은 다시 기침을 하다가 견딜 수 없어서 거친 벽쪽으로 다가가 몸을 기댄다.

마치 흑사병에 병든 유럽거지 모양으로 그녀는 벽쪽에 웅크리고 앉아서 다시 기침을 해댄다.

무언가 울컥하고 치밀었다.

손으로 닦으니 빨간 루즈가 묻어 나온다.

그런데 루즈보다는 양이 많았다.  

응? 객혈이었다.

처음으로 하는 객혈.

그 시뻘건 핏속에 누군가가 증오의 모습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다.

윤경은 선뜩 그를 부르지 못한다.

그것은 신앙이다.

가슴 깊이 새겨진 신앙.

윤경의 기침이 점점 더 심해졌다.

  

'소설방 > 그리운 세월'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 달이 지는 밤  (0) 2015.08.30
19. 잔인한 운명  (0) 2015.08.30
17. 까치밥  (0) 2015.08.30
16. 부서지는 별  (0) 2015.08.30
15. 길  (0) 2015.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