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그리운 세월

09. 불타버린 동심

오늘의 쉼터 2015. 8. 29. 13:35

09. 불타버린 동심

 

하늘은 가없는 높이를 가지고 점점 푸르러 가고,

산들바람은 기대감에 부푼 마음을 슬쩍 휘저어 붕붕 띄어 놓았다.

하양 나비가 마냥 날개를 펄럭이며 하얗게 세상을 물들이는데,

하늘을 나는 민들레 홀씨들도 나비의 그 새하얌을 시샘이라도 하듯이 앞다투어 허공에 떠다녔다.

타닥타닥

줄넘기에 열중해 있는 여자아이들의 노래소리가 동네에 가득찬다.

"삼육은 열여덜, 더얼덜, 더얼덜."

줄안으로 들어올 아이가 기회를 잡지 못하고 주춤대자,

줄을 돌리는 아이들의 '더얼덜'소리가 마냥 길어져만 간다.

마침내 아이가 들어갔고, 줄을 돌리는 아이들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꼬마야, 꼬마야, 인사를 하여라, 꼬마야, 꼬마야, 뒤를 돌아라,...,

꼬마야, 꼬마야, 만세를 불러라, 꼬마야, 꼬마야, 자알 가거라,...."

혜진은 아이들이 노는 곳을 일부러 피해 멀리 둘러간다.

자신을 놀이에 끼워주지 않는 아이들의 눈초리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니 아이들이 자신을 끼워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혜진이는 그들의 놀이에 끼어들만한 마음적 여유가 없었다.

벌써 2년이란 세월이 훌렁 지나갔지만, 영민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그렇게 조바심이 날 정도로 지루했는데,

그런 혜진의 마음과는 달리 세월은 흘러 벌써 두번의 차가운 겨울이 지나가 버린 것이다.

야속하게도 윤경은 영민을 잊었는지 자신의 학업에만 열중해서 좋은 여학교에 들어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렇게 잊혀져 가는 것이다.

심이란 아스라한 봄날에 일었던 아지랑이처럼 아롱다롱 아름답게 나타났다가는

따가운 햇살이 비치면 속절없이 스르르 스르르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세상은 텅빈 공간에서 그저 헛도는 기억의 틀만을 남겨 놓은 채로 그렇게 세월속에 묻혀지는 것이다.

기억이란 마법의 양탄자처럼 신비롭기 짝이 없다.

한때 온몸으로 받아들인 영상이,

마치 조그만 구멍으로 빨려 들어오는 햇살과도 같이 모여져서 한곳으로 집중된 다음에,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기록이 되었다가,

그것을 촉발시키는 요인이 작용하면 불현듯 흐드덕하고 머리에 나타나는 것이다.

까마득히 잊혀져서 흔적도 안남았던 기억이,

흐르륵 긴잠을 깨듯이 그렇게 깨어나서 완전히 생생한 영상으로 맺혀지는 수도 있다.

혜진은 찬찬히 영민을 기억해 본다.

하지만 그 기억은 완전히 연결되지 않고 이제는 점점이 끊어져서 그저 단편단편을 기억할 뿐이다.

안타까왔다.

왜 정확하게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일까.

이렇게 세월이 흐르면, 이런 단편의 기억들 마저도 사라져 버리고,

혜진은 영민을 영원히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혜진을 슬프게 만든다.

하지만 어릴 때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할 수 없는 것과도 같이 어릴 때의 기억도 영원히 기억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영민에 대해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가 한 이야기였다.

요정과 왕자님의 사랑이야기 말이다.

그리고 혜진은 언제나 그것에 대해 꿈을 꾼다.

꿈에서 영민은 항상 왕자님이었고 혜진은 요정이 되어서 언제나 되풀이 되는 그 동화로 살아가는 것이다.

혜진은 꿈을 꾼다.

아주 파아랗게 깔려있는 초원에서 혜진은 하얀 날개를 단 요정이 되어 꽃밭을 날아 다니고 있다.

요정은 날개를 저으며 이 숲, 저 언덕에 한껏 피어있는 예쁜 꽃들을 방문한다.

숲의 정령이며 꽃의 요정들이 혜진에게 화창한 노래로 인사를 하고 혜진도 까르르 웃으며 그들에게 환희의 답을 한다.

말발굽소리.

정령이며 요정들이 후르륵 자신의 은신처로 숨어들고 산새들과 풀벌레가 말발굽을 피해 부산히 도망친다.

요정들과 정령들은 그 무례한 침입자가 겁이 나서 자신의 은신처에서 그저 눈만 내놓고 쳐다보고 있는데,

혜진은 말위에 있는 왕자를 보다가 가슴이 턱하고 멈추어 버린다.

아! 무언가가 화르르 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니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기도 했다.

그리고 온 정신이 마치 연기를 타고 붕붕 날아다니는 것 같다.

그는 바로 영민이었다.

그렇게도 기다렸던 영민이 말을 타고 숲속에 나타난 것이다.

혜진은 마녀를 찾는다.

해골 골짝에서도 제일 험한 곳에 사는 마녀는 쭈그러진 매부리코 끝에 검은 사마귀가 흉칙스럽게 붙어있고,

검은 모자의 꼭대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검은 옷이 치렁치렁 더러운 땅바닥을 쓸어대고,

그 쭈글쭈글한 얼굴을 보면서 혜진은 그대로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은 공포심을 느꼈다.

갑자기 천둥 번개가 꾸당탕 꿍꽝하고 쳤고, 그 음산한 빛을 받고 마녀는 깔깔깔 목젖을 보이며 웃어 제낀다.

혜진은 그만 그 웃음이 너무나 무서워서 귀를 막고 눈을 꼭 감아 버렸다.

화르륵 화르륵!

어디선가 불이 세상을 태울 듯이 활활 타오르고,

아직 인간이 되기 전인데도 혜진은 그 엄청난 불길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면서 타죽어가고 있는 왕자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놀라서 비명을 고래고래 질러본다.

아아악, 아아악!

혜진은 왕자를 불속에서 꺼내려고 죽어라고 불쪽으로 달려가고 혜진의 뒤에서는 깔깔대는 마녀의 웃음소리,

그리고 번개 천둥소리가 온 세상을 깨뜨리려는 듯이 울려댄다.

헉헉, 허허헉!

혜진은 온통 땀으로 뒤범벅이 된 채 불 앞에 우뚝섰고,

불속에서는 왕자님의 온몸이 불에 타 흐륵흐륵 살덩이가 마치 밀랍처럼 녹아 내렸다.

안돼, 안돼!

혜진은 악을 쓰는데, 그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고,

왕자님의 몸이 불속에서 그저 불덩이로 변해 새빨갛게 타버린다.

안돼!

혜진이 그 안타깝고 찢어지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와작 불속으로 뛰어 드는데

퍽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응?

혜진은 후다닥 윗몸을 일으켰다.

너무나 강렬한 꿈이었기에 혜진은 아직도 자신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별이 안갔다.

무의식중에 이마에 손이 올라가는데 이마에 땀이 주루루 흘러 내렸다.

휴 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어 본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밖이 아주 밝게 느껴졌다.

분명히 밤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갑자기 왱왱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혜진이 후다닥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보니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웅성웅성대고 있었고,

하늘은 마치 지구 최후의 날이 온듯이 벌겋게 달구어져 타고 있다.

혜진은 불나는 곳에 눈을 돌리다가 헉하고 숨을 멈춘다.

바로 자신이 살았던 철거민촌에서 불길이 솟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자신과 영민이 함께 있었던 그곳이 불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꿈의 연장인 것 같았다.

그 불속에서 영민이 타고 있는 것이다.

손을 휘저으며 몸부림을 치는 영민은 바로 혜진과 영민의 기억의 환영이다.

그리고 그 환한 불꽃은 혜진의 영혼을 부르는 사악한 마녀의 주문과도 같이 흐르럭흐르럭 계속되었다.

혜진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옮긴다.

주춤 마녀의 사악한 낄낄거림이 다가온다.

혜진은 천천히 걷다가 급기야는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아하, 탄다, 세상이 탄다, 영민과 혜진의 추억이 탄다.

누군가가 이렇게 노래하는 것 같다.

땅을 치는 사람들, 악을 써대는 어른들, 울부짖는 아이들,

다 떨어진 세간을 하나라도 더 건지려고 악다구니를 써대는 여인네들,

허망한 눈빛으로 불의 혓바닥만을 세고 있는 노인네들,

온통 벌겋게 타고 있는 판자집과 허공에 마구 날려대는 탄 재들.

으흑! 으흑!

혜진의 몸속에서 무언가가 끼룩끼룩 울고 있다.

그 화염지옥의 한가운데서 영민이 혜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혜진은 손을 내밀어 영민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 손앞에는 화드득 화드득 화귀의 입김이 새빨간 불꽃으로 혜진에게 달려들었다.

오빠! 오빠!

혜진은 불에 타고 있는 영민의 영상을 잡으려고 달려드는데 누군가가 혜진을 와락 잡았다.

"얘, 위험해."

옆에 있던 어른 하나가 혜진을 후다닥 끌어 잡았다.

"죽을려고 환장했냐?"

혜진은 마냥 몸부림치는데 불이 화다닥 영민의 영상을 잡아 삼켰고,

혜진은 그저 손만 내저으며 눈물을 뿌린다.

화마가 분탕질치고 지나간 자리는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온통 검은 것만이 뚝방에 덩그라니 남았고,

울부짖던 동네사람들도 이제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눈물조차 흘리지 않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

바람이 불고 탄재가 바람에 날려 하늘로 자욱히 올라간다.

미처 불을 피하지 못해 아이를 잃은 어떤 부모의 끊임없는 통곡이 마냥 한스럽기만 하다.

이제 모든 것은 가버린 것이다.

남아있는 것은 어디고 없었다.

혹시라도 하는 마지막 남은 희망도,

마치 쨍쨍대던 굿이 끝난 뒤에 사그러지는 관중들의 호기심과도 같이 사르르 사라지고 만 것이다.

혜진은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가 내뱉아 본다.

그 한숨과 함께 밤새 불탔던 영민의 영상이 훅하고 날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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