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그리운 세월

06. 첫발

오늘의 쉼터 2015. 8. 29. 13:23

06. 첫발

 

 

바람이 불면 지는 것은 낙엽이 아니라 내 마음입니다.
아침이 오면 깨지는 것은 여명이 아니라 아픔에 지친 내 사랑이랍니다.
그대와 나의 마음

그대와 나의 사랑
얽히?히 엮어가자던 그 맹서는
옛상처의 아픔으로 잊혀져 버리고 빛바랜 사진첩에 꽂혀있는

잊혀진 낡은 추억처럼 그렇게 세월만을 지키고 있답니다.


익숙한 운율로 윤경엄마는 시 한수를 암송했고,

영민은 그저 멍하니 서있는 채로 그것을 듣고 있다.


"그렇게 잘된 시는 아니지만, 때론 남에게는 별 것아닌 시가,

어떤 사람에게는 가슴 깊은 상처나 감상을 남기거든.

그런데 너는 이 시인을 아니?"


영민은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그저 그 책만을 들고 덩그마니 서있을 뿐이다.


"우리 엄마는 문학소녀였대."


윤경이가 끼어들었고, 영민은 아직도 그대로 멍하니 서있기만 한다.

그 눈에는 어떤 엄청난 세월이 스며 있다.


"네가 소월의 시를 줄줄 외운다고 들었다."


윤경엄마의 눈빛에는 자애로움이 흐른다.

그것은 먼 옛날부터 엄마라는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신의 은총일지도 모른다.

오래 전에 영민엄마의 눈가에 흘렀던 그런 똑같은 자애로움.


문학소녀.

그러니까 이 시집이 여기에 있는 거다.

그렇게 잘된 시는 아닐지라도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세계를 지니고 있는 책.

하긴, 책이 아주 귀한 그 시절에는 이런 조잡한 류로 만들어진 책들이

문학한다는 사람들의 소장품으로 애호되고 있다는 아버지의 말이 생각난다.

모더니스트인 박인환이나 김경림에 속하지도 않았고,

서정파인 조지훈, 박목월에 끼지도 않았으며,

생명파인 서정주나 김남조의 부류에도 어울리지 못했던,

독특한 시세계를 구사했던 아버지.

영민은 그 시집을 안타까이 바라보다가 책장에 다시 꽂아 넣었다.

영민과 혜진이 선물과 과자 등속을 한아름 갖고 돌아간 후에

윤경엄마는 윤경을 찬찬히 바라보며 말한다.


"네가 좋아할 만한 아이로구나."


엄마의 눈동자속에 아주 깊숙한 그리움이 어린다.

그것은 오래전에 이미 가슴속으로 밀어놓았던 그런 그리움이었다.


"윤경아,

사람은 말이다.

 때로는 자신이 원했던 길과는 전혀 다른 길로 가게될 수도 있단다.

또 다른 어떤 환경들이 자신이 원하는 길과는 전혀 다른 길로 이끌기도 하지.

어떤 사람은 문학을 하다가 금전에 맛을 들여 문학의 길을 포기하고,

어떤 사람은 순수를 지향하다가 사회와 타협하고 순수를 버리곤 하지.

하지만 말이다. 네가 지금 생각하는 것,

네가 지금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그 길이 순수한 길이야.

아무 것도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


엄마의 얼굴에 아주 진한 외로움이 서리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손여화는 그때에 했던 자신의 결정이 중년이 된 지금에 와서

아주 잘못되었다고 후회가 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해방전에 일본 유학생 계열인 서정파시인들의 영향을 받아

그녀는 문학인들과 깊은 교류를 나누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 좌파계통의 카프(Kapf)계통의 문학인들과 교류를 하면서,

손여화는 순수 서정시가 아닌 이념시를 알게 되었다.

좌우파에 대한 공방이 혼란스러웠고,

마침내 우파가 득세를 하자 좌파의 몰락이 이어졌다.

그때 손여화는 좌파시인과 열렬한 사랑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손여화는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환상과 현실은 엄연히 다른 선상에 있는 줄타기였다.

윤경엄마는 고개를 힘없이 저어본다.

그때 그가 주춤, 아니 그나마도 손을 끝까지 올리지도 못한 채,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장면이 마치 영화의 한장면처럼 떠오른다.

그는 울지 않았었다.

아니 오히려 웃고 있었다.

한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해서 오열하는 자신을

그는 오히려 웃어 주고 있었던 거다.

나중에 모든 것이 떠나가고 세월이 흐른 후에,

손여화는 자신에게 남겨진 그의 손때가 묻은 단하나의 물건이

바로 이 시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좌파시인의 물건은 어디서곤 용공시되었기에 가지고 있을 수도 읽을 수도 없었던 것이고,

또 손여화자신이 과거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그의 물건을 깨끗이 정리한 이유도 있었다.

그때 이 시집이 어떤 연유에서인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마,

그것이 그의 직접적인 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고상순은 좌파시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가 그 시집을 소중히 간직했던 것은

그가 고상순과의 우정을 값어치있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손여화는 고상순을 단 한번 만나본 적이 있다.

그 치열한 전투속에서 좌파인들이 쫓길 때,

거의 짐승같은 몰골로 산속을 헤매고 돌아다닐 때,

손여화도 자신의 애인 옆에서 그와 함께 우파에게 쫓겼다.

그것은 간절한 도주였고, 생사의 기로에 있었던 극한상황이었다.

누구도 좌파를 숨겨주지 않았고,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보인다는 것은 바로 우파의 숙청과 연결되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도움이 없는 처절한 도주길에서 그를 만났었다.


고상순.

그 깊은 우수를 입은 사람.

그 악다구니의 상황에서 손여화는 그를 그렇게 생각했다.

우수를 옷처럼 입은 사람이라고.

모두가 자신들을 배격할 때에 고상순은 어디서 구해왔는지

먹을 것과 돈과 그리고 약간의 식량들을 그들에게 내밀었었다.

보기에도 그는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아 보였는데 그것을 구하는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좌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바로

용공분자로 몰리는 상황인데도 그는 그 산속까지 그들을 찾아와서 그것을 전해준 것이다.

그때 그가 고상순에게 한 말을 아직도 손여화는 귀가 쩡쩡할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고형. 내 꼭 살아있으리다. 고형을 생각하며 이 하늘 아래 어딘가에 꼭 살아있으리라."

그들의 굳게 잡은 두손이 마냥 뜨거워 보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후 세월이 그들을 망각시키게 만들었지 않은가?

왜 갑자기 그때의 생각이 나는 걸까.

이미 까맣게 추억 저편으로 흘러가 버린 과거를 말이다.

그 애가 이 시집을 잡아서 그런 걸까?

윤경엄마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다.

그 조그만 애에게서는 아주 자욱한 우수가 배어 나왔기 때문이다.

그때 고상순에게서 느꼈던 그 깊은 우수를 말이다.


왜일까?

그 애에게서 부터 그때의 감상이 맹렬하게 일어나는 것은.

윤경엄마는 그저 눈을 감고 소파에 머리를 기댄다.

아주 혼곤한 잠이 몰려드는 것 같았다.

과거를 잊고 살았던 그 세월이 갑자기 커다란 풍랑이 되어 그녀를 거세게 몰아쳤다.

영민은 큰어머니가 아주 다정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다.

저런 눈길을 보내는 것은 큰어머니가 무슨 계획이 있어서 라는 생각이 퍼뜩 든다.

하루도 구박을 받지 않고 지낸 적이 없었던 영민에게 저런 눈길은 오히려 더 불안했다.


"영민아, 너 배고프지?"


이것도 또한 심상찮은 말이다.

그리고 영민의 앞에 개다리 소반이 놓여졌고,

그 위에는 보리밥 한그릇과 김치 한사발이 시장기를 돋군다.

영민은 침을 삼킨다.

먹는다는 유혹을 참아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서 먹어라."


큰어머니는 영민에게 숟가락을 쥐어준다.

다 우그러진 양은 숟가락이 볼품없이 영민의 손에서 불안한 듯 떨고 있다.

보리밥 한숟가락을 떠본다.

드드 밥알이 흩어지지만 매일 죽만 먹고 있는 처지에 보리밥은 진수성찬이다.

입에다 넣어본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떨어질 호통에 눈을 감는다.

으적으적 씹는데 커다란 보리밥알이 입안에서 제대로 씹어지지 않고 마틀마틀 돌아다녔다.

아직도 벼락은 떨어지지 않고 영민은 다시 용기를 내서 밥을 떠먹는다.

그때 그것을 보면서 큰어머니가 입가에 미소를 띤다.


"영민아, 너 일하지 않을래. 밥도 주고 재워주기도 한대. 잘하면 월급도 주고."


그것이 큰어머니의 의도였다.

다던 엄마는 결국 오지 않고 이제 엄마가 주고간 돈도 다 바닥이 난 시점에서

더이상 혹덩이를 달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영민은 아무렇게나 밥을 꾸역꾸역 삼키면서 웃음을 보인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이다.

하지만 울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 모든 것은 끝이다.

엄마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영민 혼자뿐이 아니던가.


"어때, 영민아."


영민은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여기에 남아 있어보았자 별 수가 있을 턱이 없다.

배만 곯을 뿐이다.


"그래, 잘 생각했다. 여기 있어봤자 서로 굶는 것 뿐이 더 되겠니."


큰어머니가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1월의 바람은 뺨을 얼어 터지게 만들려고 혹독하게 다가온다.

영민은 시린 손을 입으로 호호 불며 엉엉 울고 있는 혜진이를 달랜다.


"혜진아, 곧 돌아올께. 방학이 끝나면 학교가야잖아."


영민은 자신이 이곳에 못돌아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피붙이도 없는 이곳에 어떻게 다시 올 수있겠는가.


"정말이지, 오빠. 약속하는 거지."


혜진이 새끼 손가락을 내민다.

울먹이는 혜진의 표정이 너무나 슬프다.

영민은 짐짓 하늘만을 올려다 본다.


"그래, 영민이는 아주 가는 것이 아니야, 혜진아."


혜진엄마가 거들었다.


"정말이지, 꼭이야, 돌아오는 거야."


수십번도 넘게 다짐을 하고 약속을 받는다.

영민은 그런 혜진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몇번이고 새끼 손가락을 걸어준다.

그리고는 혜진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이게 뭐야, 오빠?"


혜진이 이렇게 묻는데 영민의 목소리가 파들 떨렸다.


"윤경이에게 전해줘."


그말이 아주 불길하게만 느껴져서 혜진이 소리친다.


"싫어!"


하지만 영민이는 기어코 혜진이의 손에 그것을 들려주고 만다.


"가자, 영민아. 이러다간 늦겠다."


큰어머니의 말이 퍽이나 야속하게 들려온다.

혜진이 다시 흐느끼고 영민이 손을 다 들지도 못하고서 반만 든 채로 손을 조금 흔들어 본다.


"안녕, 혜진아. 곧 돌아올께."


하늘이 마냥 차게만 느껴지고 회색빛의 음울함은 그대로 통곡의 눈물을 뿌려댈 것만 같았다.

갑자기 혜진이 어디론가 후다닥 달려가고 영민은 혜진이 슬픔을 이기지 못해서 그러는 줄알고

걸음을 옮긴다.

혜진은 죽자사자 달렸다.

뛰어야만 한다.

이것이 영민을 보는 마지막인 것 같은 느낌때문에 혜진은 죽어라고 뛰었다.

무언가를 해야한다.

영민이 가버리기 전에, 영원히 가버리기 전에 할 수있는 일은 해야만 한다.

혜진은 윤경에게 말하면 영민을 막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윤경이는 부자니까 혹시 영민이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윤경이 말하면 영민이 마음을 돌릴 것이다.

가지 않으면 그뿐 아니던가.

발밑이 미끄러워 혜진은 몇번이고 빙판길에 넘어지면서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안타까운 마음이 혜진의 마음을 그대로 녹여 버릴 듯했다.


"오빠, 안돼. 가면 안돼."


혜진은 쉴 새없이 이렇게 중얼대며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렸다.

찬바람이 쌩하고 혜진의 볼따구를 얼려놓고 스쳐가도 혜진은 전혀 추운 줄을 모르고

땀을 흘릴 정도로 뛴다.

저만치 윤경의 집이 보이고 혜진은 숨이 막혀서 헉헉댔다.

문을 죽어라고 두드렸다.

얼어붙은 손이 철대문에 닿으니 살점이 쩍쩍 붙어 나갈 것 같은데도

혜진은 멈추지 않고 문을 있는 힘껏 두드린다.


"윤경언니! 윤경언니이!"


윤경이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서 밖으로 뛰어나오고 엉엉 울고 있는 혜진이의

모습을 보고 허덕 놀란다.


"언니, 영민 오빠가 떠나."


떠나?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간다고. 다신 안온단 말이야."


뭔가 귓가에서 앵앵 소리를 내며 돌고있다.

윤경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에 그대로 서있을 따름이다.


"빨리, 언니. 빨리!"


혜진이 윤경의 손을 잡아끌자 비로소 윤경의 정신이 후다닥 들면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혜진이 바싹 뒤쫓다가 힘이 들어 흐드득 숨을 가쁘게 쉬어댄다.

마구 달리면서도 윤경은 그가 떠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왜 떠나는 걸까.

아니 왜 떠나야만 하는 걸까.

윤경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영민이 떠난다는 사실때문에 죽어라 뛰었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혜진은 영민이 떠나면 더이상 볼 수없다고 말했지 않았던가.

다리를 건너는데 차디찬 바람이 비명을 지르면서 윤경의 온몸을 덮어싼다.

그리고 멀리서 초라한 몰골의 버스 한대가 터덜대며 오고있다.


흑!

윤경은 그 순간 어떤 불길한 예감에 발을 우뚝 멈춘다.

버스가 다가왔다.

마치 저 먼 세월의 뒤안길에서 서서히 현실로 달려오듯이.

윤경은 숨을 멈추고 그 버스를 마치 어떤 운명의 손길인 양 노려보고 있다.

마침내 버스는 운명처럼 다가왔고,

창문에 진흙이 튀어서 뿌연 채로 안도 제대로 안보이는 버스의 안에서

영민의 서글픈 눈동자가 정확하게 윤경에게 각인되어진다.


"안돼! 고영민. 안돼!"


혜진이 뒤늦게 뛰어와서는 하얗게 질려버린다.

버스는 툴툴대며 비포장도로를 어설프게 지나갔고

혜진은 그 버스의 뒤를 보면서 악을 써본다.


"오빠! 영민 오빠!"


하지만 한겨울의 바람은 둘의 외침을 고스란히 얼려놓고 사라졌다.

윤경은 혜진이가 내미는 것을 받아 들고는 멍청하게 서있다.

마치 눈보라에 얼어붙은 눈사람처럼.

윤경은 펴보지 않아도 그 신문지 봉투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안다.

그것은 검은 털장갑과 만년필이다.

바로 영민에게 선물로 주었던 그것들.

새까만 털이 윤기가 도는 그런 털장갑과 자신이 금장까지 입혀 주었던 그 만년필.


"오빠는 일하러 간거야."


혜진이 밑도 끝도 없이 울먹인다.


"이제 오지 않을 거야. 우리 집에는 항상 먹을 게 없거든."


헛헛한 느낌이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다.

이 나라에는 수없이 많은 집들이 굶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리고 그나마 입이라도 줄이려고 아이들은 공장으로 팔려가고 있었다.


안돼.

안된다고.

윤경이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고 혜진은 그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윤경엄마는 딸애의 절절한 요구를 듣고는 그저 천장만을 쳐다본다.

그래, 그 시절에는 자신도 이렇게 요구할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한숨을 쉬어본다.

눈물이 범벅이 된 채로 흐느끼는 딸애의 가슴을 이해할 만도 하다.


"그래, 윤경아. 엄마가 알아보마."


비로소 윤경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영민은 도시의 한가운데서 정신이 나간듯이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그것은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엄청난 물결이다.

그저 변두리에만 살던 영민에게 큰 도로, 많은 차들, 네온사인들, 가게들,

지나가는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그저 다른 세계에 버려진 이방인처럼 느끼게 했다.

앞서가던 사내가 멀뚱해져서 서있는 영민을 소리쳐 부른다.


"야, 이놈아, 빨리 와. 머뭇대면 길잃어 버린다."


영민이 흐득 몸을 떨면서 남자를 따른다.

명멸하는 온갖 색깔의 네온사인 사이로 자신은 이제 하나의 빛이 되어 스르르 사라져 버린다.

혜진의 우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고, 윤경이 자신이 돌려준 장갑과 만년필을 받고는

어떤 표정이 될까를 상상해본다.

슬퍼할 지 모른다.

그래. 슬퍼할 것이다.

그리고는 영민을 찾을 지도 모른다.

영민은 금세라도 뒤에서 '고영민'하고 달려올 것 같은 윤경이의 모습을 찾아보지만

길에는 무심한 사람들만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아니, 아닐 것이다.

윤경은 지금은 슬퍼하지만 잠시 후면 모든 것을 잊을 것이다.

그래서 영민은 이 세상에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세상 귀퉁이에서 살아갈 것이다.


'월드컵'이라고 써있는 빨갛고 파란색이 현란하게 깜박이는 네온사인이 있는 골목길을 들어선다.

커다란 입간판에는 흑백사진으로 출연진들의 사진들이 붙어있다.

이상한 복장의 남자가 입간판 옆에서 지나가는 행인을 불러대고 있고,

꽤많은 사람들이 '극장식 나이트 클럽'이라고 써있는 곳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간다.

영민은 고개를 세차게 저어 본다.

자신은 아무 것도 없는 곳에 홀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와중에 혼자인 것이다.

자신의 자리가 없는 그 처량함.

바람이 분다.

도시의 황량한 바람이 속절없이 영민의 텅빈 가슴을 잔인하게 때려댔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어딘가 엄마의 얼굴이 보인 듯도 하다.


흑!

갑자기 엄마가 보고싶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엄마는 어디에 있을까?

영민의 눈에 인파 사이로 뒤돌아보는 엄마의 모습이 보일까봐 두리번거려 본다.

하지만 자신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조차도 없었다.

무교동의 골목길을 돌아 판자가 다 떨어져 가는 아주 낡은 일본식 2층 건물로 남자는 들어갔고,

영민은 세월의 무게에 치인 채로 헉헉대며 그를 따랐다.

갑자기 다가오는 침침한 어둠이 영민을 훅하고 삼켜버렸고,

영민은 까만 단절을 남겨놓은 채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건물 내의 조그만 방에서 일하는 사람은 3명이었다.

쉿쉿하는 풀무질소리가 마치 어릴 때 대장간에서 나는 것과도 같이 새어나왔고,

검게 그을은 도가니 위에 찬란히 빛나는 물체가 응글응글 끓고 있다.

두명이 그 빛나는 물체를 세공하기 위해 작은 도구들을 손에 들고 있었고,

보조원인 듯한 조그만 아이가 무언가를 나른다.

모든 것은 영민이 몰랐던 음침한 세계에 휩싸여 있고,

마치 어떤 사악한 힘인 양 영민에게 이를 드러내며 낄낄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영민은 그 잔인함에 가슴이 베어져 그저 헉헉대고 신음했다.

방의 안쪽에 달린 조그만 문으로 남자는 영민을 안내했고,

그 안에는 작은 눈을 빛내며 입술을 앙다문 여자가 앉아 있다가 영민을 노려본다.


"이 애예요, 김씨?"


"예, 사모님."


김씨는 무엇이 미안한지 자꾸만 손을 비벼댔다.


"음. 영리하게는 생겼구만. 이름이 뭐냐?"


영민은 거의 주눅이 들어 나오지도 않는 말로 간신히 자신의 이름 석자만을 말했다.


"수고했어요, 김씨."


여자는 김씨에게 봉투 하나를 건넸고, 김씨는 그것을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받아 넣는다.

영민은 그 둘 사이에서 자신의 값이 치루어지는 것을 아무런 감정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어차피 이런 것이다.

팔려지는 것은 정신이 아니라 육신일 뿐이리라.

하는 일은 아주 간단한 것이다.

금은을 세공하는 기술자들의 옆에서 그들이 하라는 대로 일을 도우면 되는 것이다.

작은 손풀무를 가져다 주기도 하고, 길게 녹여서 연필 심처럼 된 금속을 판에 맞혀 잘라 주기도 했다.

영민은 너무나 좁아 갑갑한 작업실에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일을 했다.

그 컴컴한 작업실의 분위기가 하루하루 익숙해져 갔다.

다다미 방은 시멘트바닥보다는 덜 차가왔지만, 항상 위풍이 세서 영민의 손가락을 얼려 놓았다.

이제 얼마 후면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할 것이다.

러면 아이들은 종종걸음으로 학교에 갈 것이고,

영민의 빈자리는 봄방학이 될 때까지 텅비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학년이 끝나고 다음 학년으로 올라갈 때면,

영민의 자리는 치워지고,

그 치워진 빈자리와도 같이 영민을 기억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을 것이다.

브로지를 만드는 일은 공이 많이 들었다.

세공을 하는 기술자들이 공이 많이 드는 일을 할 때에는 신경이 날카로와서인지 화를 많이 냈다.

기술자들이 화가 나면 영민은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로 있다.

언제든지 주먹이 날아오기 때문에 그것을 쳐다보면서 맞으면 수치심이 몰려들기 때문이었다.

점심에 손가락 굵기 비슷한 우동이 나왔다.

이런 겨울에 먹는 것이 있다는 자체가 다행한 일이다.

아마 철거민촌의 사람들 중 상당수가 굶을 것이다.

혜진이도 굶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 왜 혜진이가 보고 싶을까?

배가 고플 때면 항상 무언가 먹을 것을 구해왔던 혜진이가 갑자기 생각나서 영민은 눈물이 났다.

흑하고 숨을 멈추는데 주인여자가 쯧쯧댄다.


"이 놈이 재수없게 밥상머리에서 찔찔 짜!"


눈물을 남들이 안보이게 닦고는 다시 우동줄기를 쫄쫄 빤다.

우동을 집는 젓가락 든 손이 추위에 터져서 피자국이 비쳤다.

영민은 그것을 보고서 엄마를 생각한다.

손이 터지는 겨울철이면 엄마는 영민이에게 글리세린을 발라주곤 했다.

가끔 구루모도 발랐지만 손이 터진데는 글리세린이 특효였다.

영민은 그 생각을 하다가 다시 눈물을 흘린다.

그것을 보고 주인여자의 군밤이 기어코 날아들었다.

다다미 방에서 누덕누덕 기운 솜이 뭉친 이불을 덮고 영민은 눈을 감았다.

그대로 엄마, 아버지, 윤경이, 혜진이의 얼굴이 눈앞에서 나타났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영민을 툭 친다.


"자니?"


영민은 평소에 자신에게 불량하게 대했던 철성이라는 것을 알고 그대로 눈을 감고 있다.


"야, 영민아. 우리 여기서 도망치지 않을래?"


도망?

가능하다면 이 시간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나, 아줌마가 어디 돈숨겨두는지 안다."


흑! 굉장한 유혹이 영민에게 다가왔다.

그렇지 않아도 공장일은 너무나 영민을 지치게 했다.


"그거 슬쩍해서 너랑 나랑 도망치는 거야. 어디라도 갈 수 있어."


혜진이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래, 그 돈을 훔치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윤경이도 다시 볼 수있고....


"금도 어디있는지 알고 말이야."


세공하는 집에서 금붙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금과 돈.

굉장한 유혹이었다.

돈만 있으면 학교도 다시 갈 수있을 거다.

자신의 빈자리가 보이는 듯하다.

혜진과 윤경의 모습이 떠오른다.

호호호 웃고 있다.

그래, 돈만 있다면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야.

영민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아직 영민은 누구의 것을 훔친 것도 그렇게 결심하지도 않았는데도 온몸이 온통 떨어대고 있다.

아버지의 얼굴과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으흐흐흐. 영민은 이를 물고 있다.

누군가가 이놈하면서 소리칠 것 같다.

철성이가 옆에서 은근히 유혹한다.


"돈갖고 멀리 가면 돼."

영민은 눈을 꼭 감고 있다가 까무룩 잠이 들어 버렸다.

꿈속에서 영민은 남의 돈을 도둑질하고,

그것을 비웃으며 손가락질을 하는 윤경과 혜진의 모습에 쫓기다가

그만 흐드덕 잠에서 깨고 말았다.

한기가 몰려들었고 영민은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까지 뒤집어 쓴 채로 몸을 웅크렸다.

마치 자신이 현실로 도둑질을 했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몰려들어 자신을 도둑놈이라고 욕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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