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그리운 세월

05. 그대 마음에 별이 보일 때

오늘의 쉼터 2015. 8. 29. 12:28

05. 그대 마음에 별이 보일 때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는 말은 방학이 가까와 왔다는 말과 똑같다.

이제 방학이 되면 약 2달 동안 영민과 떨어져 있어야만 한다.

윤경은 손에 들고 있는 하얀 봉투를 쉴 새없이 만지작댔다.

일부러 멀리 화신백화점까지 나가 구해온 것이다.

영민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문방구에서 아무 것이나 사기 싫었기 때문이다.

영민이 교실로 들어오는데 얼굴빛이 마치 얼음장처럼 창백하다.

그날 이후로 부쩍 몸이 안좋아진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다.

윤경은 창백하고 여윈 영민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아파 얼굴을 찡그리다가

영민의 눈과 마주치자 그저 씩하고 미소를 보내본다.

영민도 따라 웃는데 그 미소에는 슬픔이 한가득 고여있다.

저애는 왜 저렇게 슬픈 눈빛을 가지고 있을까?

윤경은 그것이 마음아파 오히려 미소만 더욱 함박 지어보인다.

영민이 무언가를 윤경의 책상에 슬쩍 놓고는 바삐 가버리고

윤경은 책상위에 놓은 것을 보고는 가슴이 두근거려 미칠 것만 같았다.

그것은 펴보지 않아도 크리스마스 카드일 것이다.

윤경은 누가 볼세라 재빨리 봉투를 집어서 아래로 숨긴다.

까칠한 갱지의 감촉이 마치 사정없이 터버린 영민의 손등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점심시간에 교실 모퉁이에서 아무도 모르게 봉투를 열어본다.

봉투안에는 거친 도화지를 잘라서 만든 카드가 한장 들어있다.

달속으로 빨려들 듯이 날아가는 기러기 딱 한마리.

텅빈 마당에 서있는 외로운 눈사람 하나.

윤경은 그것이 주는 그 절절한 슬픔에 그저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한참 동안 그것을 쳐다보다 윤경은 반으로 접은 카드의 안쪽을 본다.

글 한 구절.

'영원히 행복하길 빌어.... 영민.'

흑.

그 글이 왜 마냥 섧게만 느껴질까?

종례가 끝나고 교실을 나서는데 영민에게 윤경이가 하얀 봉투를 건넨다.

봉투는 얼마나 만지작거렸든지 모퉁이가 닳아 있었다.

그러나 영민은 봉투를 받아 그저 책가방안에 집어 넣는다.

약간은 서운한 느낌.

하긴 저번에도 그랬잖은가.

선물로 준 검은 장갑을 영민이 끼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몇번이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영민이 화를 낼까봐 물어보지 못했었다.

"고영민, 너 크리스마스때 시간있니?"

영민이 왜냐는 듯이 윤경을 쳐다보았다.

"응, 우리 집에서 파티가 있어."

파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종내 잡혀 오질 않았다.

영민의 머리에는 파티하면 그저 떡과 과자를 잔뜩 쌓아 놓은 것과

기름이 좌르르 흐르는 쌀밥에 고기국 따위만 떠오를 뿐이었다.

영민은 허기를 느낀다.

하지만 그 허기를 표현해 낼만큼 뻔뻔스럽지가 못했다.

"혜진이도 데리고 와."

윤경은 영민이 승락을 안하자 바로 이렇게 말했다.

혜진이?

그래, 혜진이가 아주 좋아할 거야.

영민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데 윤경은 그것이 승락의 표신줄 알고 얼굴을 밝게 편다.

굴뚝 청소부가 학교 강당에서 단체로 보았던

무성영화에서 나오는 찰리 채플린의 콧수염같은 솔을 어깨에 메고 손으로는 징을 울리며 지나갔다.

징 -.

그 징의 울림소리가 좋아서 아이들이 와하고 따라가면

굴뚝 청소부는 가끔 돌아서서 아이들에게 징징소리를 울려주고 아이들은 푸하하 웃어버린다.

그 까만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숯깜댕이가 너무나도 우스워 보였기 때문이다.

굴뚝 청소부는 철거민촌을 징을 울리며 지나갔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굴뚝 청소를 할 만큼 여유있는 철거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굴뚝 청소부는 집이 근처인지 징징 소리를 울리며 지나간다.

영민은 그 굴뚝 청소부의 뒷모습에서 강한 슬픔을 느낀다.

마치 버림받은 자에게서나 나올 것 같은 그런 비애를 말이다.

영민이 고개를 돌려 집으로 들어서려는데 이번에는 넝마주이가 커다란 망태를 메고 지나간다.

그의 어깨에는 광목천이 마치 상이군인의 붕대마냥 어지럽게 메어져 있다.

넝마주이는 한손에 들고 있는 큰 집게를 쩍쩍 소리를 내게 하면서 지나갔고,

아이들이 어느 새 한명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하긴 문둥이 다음으로 무서워하는 것이 이 넝마주이였으니 아이들이 도망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큰어머니가 왠일인지 싱글싱글 웃음을 보인다.

영민은 그런 미소를 보이는 큰어머니가 무서웠다.

금세라도 마음이 변해 빗자루 몽댕이가 날아올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영민에게 말을 건넨다.

"영민아 너 봉투 붙여보지 않을래."

그러고보니 큰어머니의 손에는 커다란 신문뭉치와 풀자루가 들려있다.

영민은 뭔지는 모르지만 얻어 맞지는 않는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신문지는 봉투를 만들게끔 잘라져 있기에,

풀을 붙여 두 가장자리에 붙이고는 찢어지지 않게 손으로 꾹꾹 눌러놓으면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봉투는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싸주는 데 쓰이는 것이다.

얼마나 만들었을까?

제법 봉투가 쌓였고 영민은 허기때문에 노랗게 현기증을 느꼈다.

혜진은 제 아버지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가 않았고, 영민은 배가 고파서 배를 움켜 잡아 본다.

하지만 먹을 것은 아무데도 없었다.

큰어머니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식사시간이 훨씬 넘었는데도 풀죽하나 들어오지 않았다.

영민은 헉헉대며 봉투를 붙이다가 가만 바가지에 담겨진 풀을 쳐다본다.

배가 너무 고팠다.

그는 쓰윽 그 풀을 찍어서 혓바닥에 대본다.

풋풋한 냄새가 났지만 그래도 미끈덩 먹을만 했다.

영민은 조금 찍어서 다시 입안에 넣어보았다.

마치 풀떼죽처럼 미끈덩거리면서도 먹을만 했다.

그리고 일단 입안에 무언가가 들어가자 시장기가 맹렬한 기세로 몰려든다.

영민은 참지 못하고 한번 더 찍어 먹어본다.

까칠하긴 했지만 그래도 시장기를 채워볼 만은 했다.

영민은 큰어머니가 들어오나 눈치를 봐가며 풀을 한손으로 떠서는 후룩 입으로 빨아먹었다.

그리고 재빨리 봉투를 붙이는 척 한다.

다시 한입, 또 한입.

봉투를 붙이면서 영민은 틈틈이 풀을 먹다가 풀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을 보고는 흠칫 놀라서 먹기를 멈춘다.

이제는 풀이 줄어든 것이 들켜 혼날까봐 영민은 허겁지겁 봉투를 붙인다. 한

참을 그렇게 봉투를 붙이는데 배속이 이상했다.

속이 뒤틀리는 것 같고 진땀이 나왔다.

영민은 기어 참아보려고 했지만 배속이 어떤 꼬챙이로 후벼파는 듯이 아프고 온몸이 후들후들 떨려온다.

으허헉! 견딜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신음이 나왔다.

영민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방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뛰쳐 나왔다.

"아니, 뭐야? 왜그래?"

큰어머니가 밖에 있다가 놀라서 소리치는데

영민은 그 소리를 듣지도 못한 채로 그대로 판자벽으로 달려갔다.

우엑!

참을 수없을 만큼 엄청난 구역질이 올라왔다.

하늘이 노래지고 눈앞에는 검은 머리를 가진 아롱다롱한 올챙이 비슷한 것들이 뱅글뱅글 돌아다녔다.

극심한 현기증과 함께 다시 구토가 치솟았다.

우엑!

영민은 자신이 토해놓은 허연 풀죽을 보면서 헉헉댄다.

그것은 마치 회반죽을 해 놓은 것처럼 번들거렸다.

그러나 토하면 편해질 줄 알았는데 배속이 점점 꼬이면서 온몸이 버들버들 떨려왔다.

서있을 힘이 없다.

세상이 가물가물 돌아간다.

그때 누군가가 황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오빠!"

혜진이?

영민의 눈에 허여멀건한 모습으로 혜진이가 뛰어오고 있고,

그 옆에는 새끼줄에 꿴 구공탄 두개를 들고 오는 오만철씨가 보인다.

영민은 그것을 보면서 스르르 앞으로 허물어졌다.

오만철씨는 그저 축늘어져 버린 영민을 방에 안아다 눕히고 거칠게 말아진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가끔 담배 알갱이가 입안으로 들어가는지 그는 퇘퇘거려가며 씨부렁댔다.

"미련한 곰퉁이 같은 놈.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약품이 들어간 풀을 먹는 놈이 어디있냐."

혜진이 엉엉대며 울고만 있는데 혜진엄마의 퉁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어쩐지 풀이 조금밖에 안남았다 했다. 저렇게 어른을 속이는 놈은 죽어도 싸다, 싸!"

혜진이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제 엄마를 노려본다.

"엄만 나빠! 미워!"

"이년이!"

"영민오빠, 눈 좀 떠봐, 응."

혜진이의 목소리가 거의 애원에 가깝지만 영민은 미동도 없었다.

"그대로 둬라. 제가 죽으면 그게 제 운명인 게지 뭐, 쯧!"

오만철씨는 이렇게 말하면서 혀를 찼다.

하긴 그랬다.

다죽어가도 병원에 갈 형편이 안되었으니,

병에 걸리거나 무엇이 잘못되면 그저 하늘에 목숨을 맡긴 채로 하늘이나 쳐다보고 있을 도리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잘못되면 하늘을 원망하면 끝이다.

그렇게 죽어나가는 아이들이 이 철거민 촌에는 한둘이 아니니까 말이다.

혜진은 손을 모아본다.

누군가가 영민오빠를 살려줄 분이 계실 거다.

"하느님! 우리 영민오빠 살려주세요. 예?"

하느님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다만 학교에서 그렇게 기도하면 하느님이 기도를 들어준다고 배웠다.

그리고 지금 할 수있는 방법이라곤 이 방법뿐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영민은 움직이지도 않는다.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한줄기 바람처럼 코에서 숨이 걷히면 그도 스르륵 하늘나라로 가고 말 것이다.

"영민오빠, 오빠가 죽으면 나도 같이 죽어버릴 거야."

혜진은 영민의 축늘어진 손을 꼬옥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방안에 켜둔 호롱불이 마냥 파르르 파르르 떨어댄다.

마치 영민이 마지막 남은 숨처럼....

바람이 불고 있다.

찢어진 문풍지를 통해 바람이 호롱불을 끄려고 낄낄대며 다가선다.

그것은 사악한 힘을 가진 악마이다.

"안돼, 바람아. 그러지 마."

혜진이 안타까와 소리를 치지만 호롱불은 파르르 파르르 떨어대며 곧 꺼질 듯이 사그러든다.

사그러드는 호롱불이 안간 힘을 쓰면서 만들어내는 방안의 그림자가 마치 음험한 예언인 양 마냥 길고 검게만 보인다.

혜진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후다닥 달려가 호롱불을 두손으로 감쌌다.

이것이 꺼지면 영민오빠의 숨도 멎을 것 같다는 생각에 혜진은 안간 힘을 쓴다.

손에 그을음이 묻어 꺼멓게 되고, 가끔씩 불이 후루룩 타올라서 손바닥을 태워도 혜진은 불이 꺼질세라 그것을 마냥 감싼다.

"오빠, 죽지마. 내가 지켜줄께. 제발 죽지마."

혜진은 필사적으로 이렇게 외친다.

그러나 겨울밤의 바람소리는 스산하게 혜진의 애절한 외침을 깔깔대며 잡아 먹어 버렸다.

모든 것이 캄캄했다.

바로 이곳이 죽으면 오는 곳이다.

그런데 영민오빠는 어디에 있지?

왜 아무도 없는 거야.

아무도 보이지가 않잖아.

혜진은 손을 허우적거려 본다.

하지만 발밑에도 허공에도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오빠!"

혜진은 소리소리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어찌된 일일까?

호롱불은 꺼져있었고 온기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새벽의 침침한 빛이 천천히 밤의 색깔을 걷어내고 있다.

밤새 호롱불을 지키다가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그런데 호롱불의 차가움이 섬뜻하게 혜진의 가슴을 얼린다.

빠는?

혜진은 이제야 생각이 났는지 후다닥 영민에게로 다가갔다.

영민은 죽은 듯이 누워있다.

혼기가 빠져 나간 것처럼.

숨쉬는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혜진은 허덕 겁이 나서 영민의 손을 급히 잡았다.

따뜻하다.

아, 안도감.

혜진은 비로소 영민의 숨소리를 듣는다.

쌕쌕하는 고른 숨소리가 마치 기차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혜진은 영민의 손을 끌어 자신의 가슴에 꼬옥 안는다.

혜진의 작은 눈에는 눈물 방울이 스르르 솟아 올랐다가 뺨으로 흘러 내렸다.

24일 월요일.

혜진은 방학식 날이기에 학교에 가야만 한다.

방학숙제와 성적표를 받아와야만 한다.

"명은 긴 놈이야."

아버지의 중얼거림을 뒤로 하고 혜진은 혼자서 뚝방을 따라 학교로 간다.

영민은 잠에 취해서 정신없이 자고 있지만, 그래도 살아난 것은 확실했다.

혜진은 자기 반에 들어가기 전에 교무실로 쭈볏거리고 가서는 계선생님을 만났다.

그리고는 영민이 아프다는 말을 하고 그의 방학숙제와 성적표를 받았다.

계선생님은 영민에 대해 무척 걱정을 했다.

방학식이 시작되었고, 교장선생님의 아주 길고긴 훈시가 아이들이 추워서 동동 구르는데도 계속되었고,

윤경은 방학식 내내 영민이 왜 안보일까만을 생각하고 있다.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는 걸로 봐서는 곧 눈이라도 펄펄 날릴 것 같았다.

방학식과 종례가 끝나자 마자 윤경은 바삐 3학년 2반으로 뛰어갔다.

다행히 혜진이네 반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윤경은 혜진이가 보여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그래도 불길한 느낌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마침내 종례가 끝나고 혜진이 힘없이 걸어나오다가 윤경을 보고는 우뚝 걸음을 멈춘다.

윤경은 혜진의 핏기없는 얼굴에서 아득한 불안감을 느꼈고,

혜진은 윤경을 보자 어젯밤의 일이 다시 생각나서 눈물을 떨군다.

"왜 그래, 혜진아?"

윤경이의 가슴이 무너져 내리며 윤경은 황급히 이렇게 물었다.

"오빠가 아파."

"어디가? 어떻게?"

혜진은 그 일을 이야기하려다가 수치스러워 그만 입을 다물고 만다.

먹을 것이 없어서 공업용 풀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어린 혜진에게는 정말로 창피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제 많이 낫어."

혜진이는 이렇게 말할 뿐이다.

윤경이 약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때 혜진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더 이상 말을 하면 창피스러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기 때문이었다.

"언니, 울 오빠 성적표 보여줄까?"

혜진이가 영민의 성적표를 꺼내는데 윤경의 얼굴이 확 달아 오른다.

마치 영민의 비밀을 보는 것 같은 느낌때문이다.

혜진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울 오빠 공부 잘한다. 자 봐, 언니."

윤경은 머뭇머뭇 그것을 흘끗 들여다본다.

얼굴이 빨개졌다.

"우리 오빠는 또 이야기도 잘해. 한번 얘기하면 어떨 때는 너무나 슬퍼서 눈물이 막 나."

그러나 혜진의 이런 자랑이 더이상 윤경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윤경은 그저 영민의 성적표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학교를 나오면서 윤경은 다시금 혜진에게 다짐한다.

"내일 오빠 꼭 데리고 와야 해. 알았지, 혜진아."

"그러엄."

혜진은 자신이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윤경은 주머니를 뒤져 '누가' 몇개를 혜진이에게 쥐어 준다.

하얀 비닐에 싸여진 누가는 보통 아이들은 만져보지도 못하는 귀한 것이었다.

"언니, 나 빨리 가서 오빠 돌봐야돼."

혜진은 누가를 누덕누덕 기운 바지 호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발걸음을 빨리했고,

윤경은 혜진이 안보일 때까지 서서 손을 흔들었다.

혜진이가 깡총거리며 가는 것이 마치 눈밭으로 영원히 사라지는 점같이 보였다.

25일 아침.

윤경이가 그렇게 기다리던 눈이 펑펑 내렸다.

눈을 이토록 기다린 이유는 먼저 눈에서의 사건도 그랬지만 어쩐지 영민의 분위기가 눈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분위기가 너무도 좋았기에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기를 바랬던 것이다.

오후 3시.

초대받은 몇아이들이 도착했다.

윤경은 아빠가 윤경이 친구라고 선택한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애들에게는 이상한 분위기가 번져 나온다.

마치 아이가 아닌 어른들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

그리고 답답함.

윤경은 그것이 싫은 것이다.

나팔이 달린 축음기에서는 베토벤의 'Song of Joy'가 웅장하게 흘러 나왔다.

초대받은 아이들은 그 노래를 따라서 웅얼대고 있다.

식탁에 차려진 양과자와 고급 빵, 케이크. 미군부대에서나 흘러 나왔을 법한 각종 모양의 초콜렛들.

이런 것들은 아주 절제된 행동에 의해 조심하는 아이들의 깨끗한 손에 의해 집혀져 입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숨막힐 듯한 답답감.

윤경은 자신이 느끼는 이 갑갑함이 영민이 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안다.

윤경은 초조해 했다.

혹시 아픈 것이 아닐까?

아니면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긴 집까지 멀기는 한데....

아빠가 함박 웃음을 띠면서 큰소리로 유쾌하게 말했다.

"자, 다 왔으면 파티를 시작해야지, 윤경아."

아이들이 박수를 친다.

축음기에서는 헨델의 메시야가 걸려지고, 음식이 나오고 조그맣게 낄낄대는 아이들의 음성이 귀에 거슬린다.

엄마가 윤경에게 다가온다.

"윤경아, 왜그래? 어디 아프니?"

윤경이 고개를 저으면서 창밖만을 바라본다.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아직 안 온 애가 있니?"

눈물이 맺힌다.

"조금 있으면 올거야. 길이 너무 미끄러워서 늦는 걸거야."

위로하는 엄마의 말에 더욱 슬픔을 느낀다.

오후 5시.

영 틀린 것이다.

이렇게 늦을 리가 없었다.

윤경의 마음은 그대로 텅비어져 갔다.

이미 겨울의 저녁은 검은 색채로 번들대고 있다.

윤경은 그저 멍하니 창밖만을 바라다 보고, 분위기가 이상했는지 아이들이 수근댄다.

"자, 선물 교환 시간이에요."

윤경은 그래도 자기가 영민에게 선물을 먼저 준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그 선물을 생각한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까만 만년필에 이름까지 새겨 넣었다.

'영민에게. 윤경이가.'라고 말이다.

응?

밖에서 누군가의 인기척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윤경은 후다닥 밖으로 나간다.

눈이 온 정원이 미끄러져서 넘어졌고 윤경은 다시 일어서서는 문쪽으로 달렸다.

소리가 들렸다.

"오빠, 춥다. 들어가자."

흑!

왜 윤경의 가슴이 왈칵 무너지면서 눈물이 솟는가?

"혜진아, 그냥 가자. 여기는 우리가 올 데가 아니야."

영민의 소리.

윤경은 와들와들 떨면서 문고리를 잡는다.

그리고는 주춤주춤 문을 열었다.

놀라는 얼굴 둘.

꾀죄죄한 얼굴과 모습.

영민의 얼굴이 충충한 회색빛의 눈발에 비쳐 한결 어두워 보였다.

"고영민!"

하늘이 우는가, 아니면 세상이 우는가?

하늘은 자신의 눈물을 보이기가 두려워 아주 아름다운 눈으로 이 땅위에 뿌려대는지도 모른다.

"고영민, 들어와."

말소리에 눈물이 젖어있다.

영민과 혜진이가 어색하게 미소짓는다.

"들어와."

말소리가 헛헛하다.

영민이 혜진을 데리고 할 수없이 들어왔다.

윤경의 얼굴을 본 후에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민과 혜진이가 안으로 들어오자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어떤 아이들은 노골적인 불쾌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하긴 꾀죄죄한데다가 더러웠으니 말이다.

윤경아빠도 불만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얘들은 누구냐?"

"우리 반 친구에요, 아빠. 고영민, 우리 아빠야."

영민이 어색하게 인사를 했는데 윤경아빠가 인사도 받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윤경의 마음이 쾡하고 뚫어져 버렸다.

윤경이 엄마가 다가왔다.

"이런 몸이 꽁꽁 얼었네, 이리와서 몸좀 녹히렴."

혜진이 그제서야 밝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영민은 고개만 숙였고 그의 얼굴에 역력히 나타난 후회스런 표정을 윤경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윤경아빠의 반응과는 정반대로 윤경이 엄마는 영민을 좋아했다.

하지만 영민과 혜진의 등장으로 파티는 영 깨져버렸고, 아이들이 하나 둘씩 가버렸다.

윤경아빠는 종내 거실로 나오지 않았고,

혜진만이 천진스럽게 생전 처음 보는 양과자를 입안에다 한가득 넣고는 우물거리고 있다.

약간 여유가 생겼는지 영민은 주위를 둘러본다.

아주 잘꾸며진 집안 분위기가 주눅이 들만도 한데, 이상하게 담담했다.

영민은 한쪽 벽에 세워진 커다란 책꽂이에 책들을 훑어 본다.

아주 두꺼운 금장의 책들이 마치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는 양 뽐내며 꽂혀있다.

그런데 그 많은 책들 중에 한권의 책이 그의 눈에 어떤 무시무시한 무기인 양 쏜살같이 달려든 다.

흑!

영민은 아주 허술하게 보이는 그 책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는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고 영민은 그 책을 잡아야 한다는 마음 뿐이었다.

그래.

바로 그책이었다.

두꺼운 각대기로 앞뒷장을 해댄 아주 조잡한 책.

갱지로 너덜너덜한 그 책이 바로 거기에 꽂혀 있는 것이다.

영민은 책장을 넘겨본다.

어떤 글자는 조판과정에서 활자가 없었는지 글자의 크기가 다른 글자보다 큰 것도 있었다.

'그대 마음에 별이 보일 때.'

바로 그 시집의 제목이다.

영민은 책을 펼치지 않고도 그 시를 외울 수가 있었다.

'그대 마음에 별이 보일 때, 눈물로 보낸 그 숱한 세월이, 아득한 과거의 이슬되어 사라지고, ...'

로 시작되는 그 시.

영민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다.

그는 눈을 감았다 뜬 다음에 저자의 이름을 입안에서 되뇌어 본다.

'고상순.'

흑!

그 아늑하고 포근했던 시절이 미소를 지으면서 영민에게 스르륵 다가오고 있었다.

  

'소설방 > 그리운 세월' 카테고리의 다른 글

07. 빈자리  (0) 2015.08.29
06. 첫발  (0) 2015.08.29
04. 변소청소  (0) 2015.08.29
03. 첫눈  (0) 2015.08.29
02. 술래  (0) 2015.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