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그리운 세월

04. 변소청소

오늘의 쉼터 2015. 8. 29. 12:14

04. 변소청소

 

 

나는 영원한 나그네다.
이 세상 어느 곳도 내집이 될 수없다.
나는 누구와 어울릴 수도 없다.
누가 떠들고 즐겁더라도 나는 그들과 상관없는 방랑자일 뿐이다.
세월이 나를 밀어내도 나는 세월에 휩싸이지 아니한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나는 영원한 나그네다.

영민은 이 시를 한번 외워본다.

아버지가 한탄조로 외우던 이 시.
영민은 교실쪽으로 걷다가 걸음을 멈춘다.
체육시간에 교실에 들어가는 것은 묵시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때 윤경이 멍하니 있다가 후다닥 눈바닥에 떨어진 장갑을 집어서 주머니에 넣는 것이 보였다.

그애의 눈에 눈물이 보인건지 아니면 아침 햇살이 그애의 뺨에서 반사되어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왜 저애는 영민에게 그렇게 열성으로 다가오려 하는 것일까.
그리고 영민은 왜 저애에게 그토록 심한 수치감을 느끼는 것일까.
영민이 그 이유를 알 수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윤경이의 손에 눈덩이가 들려있다.
그것은 마치 꿈속에서 일어난 일인 것 같았다.
윤경이 눈덩이를 영민에게 던졌고 영민은 그것이 마치 꿈같아서 그대로 피하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
퍽!
눈덩이는 그대로 영민의 얼굴에서 악하는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나서 사방으로 튀었다.

윤경이의 놀라는 얼굴.
그리고 옆에서 다른 아이들이 그것을 보고 깔깔깔깔 웃어댄다.
그러다가 다른 아이가 눈덩이를 영민에게 던졌고, 다른 아이들이 합세했다.
그래, 눈싸움은 이런 식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것이 영민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을까.
영민에게는 그들이 마치 한통속이 되어 자신에게 가해를 한다고 느껴졌다.
눈덩이가 영민의 얼굴이며 머리며 몸에 맞아 산산히 부서져 갔다.
윤경은 그대로 얼어붙은 듯이 굳어져서 영민을 바라보고만 있었고,
영민은 그 꽁꽁 언손으로 이를 물며 눈을 뭉친다.
손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시렸지만 그까짓 것 참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던지는 눈덩이가 점점 많아지고 있을 때 영민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 속에 서있는 윤경을 노려보았다.
'그래, 너도 마찬가지야. 다른 아이들 처럼 나를 비웃고 있는 거야.
그러면서 너는 나를 위해주는 양 하는 거지.'
다른 모든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윤경이의 얼굴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눈덩이를 어깨높이로 올렸다.
'그래, 가식적인 얼굴아. 사라져라. 없어지라고.'
영민이 있는 힘껏 눈덩이를 던졌고 쌩하는 소리가 바람을 가르며 들려왔다.
그리고 퍽하는 소리와 함께 윤경이 헉하고 쓰러지는 모습이 마치 환각과도 같이 보인다.
단 한방이었는데 윤경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들이 손을 멈추고 윤경을 쳐다본다.
약간 먼거리인데도 영민의 눈에 윤경의 피가 하얀 눈밭에,
마치 강한 색상의 서양화같이 부각되어 보였다.
아이들이 소리치는 것이 환청처럼 흐느적댔다.
"선생님, 윤경이 피나요."
"선생님! 선생님!"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분명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영민은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다.
"고영민이가 그랬어요."
"예, 쟤가 그랬어요."
계선생님이 윤경을 안아들었고,
윤경의 코에서는 코피가 뚝뚝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다.
그때 영민의 옆을 스쳐가는 윤경이 왜 영민을 보고 미소짓는지 영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계선생님은 눈싸움에 대한 벌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경각심을 높인다는 의미에서 영민에게 일주일간 변소청소를 시켰다.
아이들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변소청소는 체벌보다는 나았지만 벌중에는 고약한 것이다.
윤경은 그날 내내 교실로 돌아오지 않았고,
윤경이의 빈 자리를 쳐다보는 영민의 가슴에는 왠지 커다란 바람 구멍이 난듯이 찬바람이

싸아하고 몰아쳤다.
데데하게 옅은 파란색으로 칠해진 '5-3'반 변소 대문 앞에 걸레를 가져다 놓았다.
보통 여름철이면 냄새가 아주 고약할 터이지만, 마침 겨울이래서 냄새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영민은 동태짝처럼 얼어버린 대걸레를 녹히기 위해
뜨거운 물을 얻으려 양호실 옆으로 가다가 언뜻 양호실 안을 기웃거려 본다.
아마 하얀 천으로 가려진 저 안쪽에 윤경이가 누워있을 것이다.
코피를 흘리면서 말이다.

영민은 혹시라도 안쪽이 보일까 해서 까치발을 해서는 안을 들여다 보았지만 하얀천은 너무나 높았다.
그는 한참 그렇게 기웃대다가 포기하고는 다시 양동이를 들고는 터덜터덜 걸어갔다.
뜨거운 물에서는 김이 마치 기차화통처럼 피어오르고, 영민은 동태짝같은 대걸레를 물속에 푸욱

담궜다.
걸레가 쩍쩍하는 비명소리를 지르는 것 같다.
변소문을 여니 잘못 겨냥되어 쌓여진 오물이 이곳 저곳에 묻어있고,
가끔 뒤를 닦은 후에 던져진 신문지도 그대로 언 채로 오물에 붙어 있다.
변소벽에는 낙서들이 마치 무허가 점집의 부적처럼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다.
영민은 걸레를 짠 후에 남은 더운 물을 조금씩 오물에 부었다.
한꺼번에 많이 부으면 오물이 녹기도 전에 더운 물이 다 없어질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하니 오물이 녹기 시작했고, 영민은 남은 물로 그것을 씻어 버렸다.

오물은 흘러덩 미끌어져 변소안으로 떨어졌고, 이제는 걸레로 물기를 훔쳐내기만 하면 된다.
영민이 변소밖에 세워둔 걸레를 잡으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걸레를 건네준다.
응?
영민이 고개를 빼서 보니 환한 웃음이 영민의 가슴에 가득찬다.
"고영민!"
윤경이 코에는 흰 솜이 끼워져 있고, 그 반쯤에 핏물이 배어나와 있었다.
입술 부근에는 입술이 터졌는지 반창고가 붙여져 있다.
"윤경아."
"춥지 않아, 고영민?"
갑자기 왜 눈물이 핑 돌까?

대걸레를 건네주는 윤경이를 보자 영민은 그만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떨군다.
"고영민, 이 바보. 왜 울어."
윤경이의 목소리에도 눈물이 뚝뚝 스며 있었다.
윤경이가 돕자 변소청소가 한결 수월해졌다.
아니 영민의 마음이 가벼워졌기에 청소가 수월하게 느껴진 것이다.
대걸레를 짜고나서 물을 완전히 버리고 난 후 영민이 대걸레를 잡자 윤경이 달랑 양동이를 들었다.
"이건 내가 갖고 갈께."
영민이 그저 고개만 끄덕거린다.
둘이 변소를 나서면서 윤경이 말한다.
"고영민, 나 아까 너 봤다."
영민은 무슨 말인지 몰라 그저 앞만 보고 걷는다.
"아까 양호실에서 말이야."
영민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자신의 속내를 들켰기에 수치감이 몰려온다.
영민은 못들은 척 딴청을 떨며 걸음을 빨리 했다.
"야, 고영민, 같이 가."
윤경이 부지런히 따라왔다.
청소검사를 받고 나오는데 윤경이가 영민에게 다시 장갑을 내민다.
"너, 안받으면 화낼거야."
영민은 장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할 수없이 장갑을 받아들었고,
그제서야 윤경이의 얼굴이 환하게 펴진다.
"끼어봐."
하지만 영민은 그저 장갑을 책가방에 집어 넣었고 윤경이도 더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는데 혜진이가 기다리고 있다가 쪼르르 달려온다.
"오빠, 끝났어?"
"혜진아, 너 먼저 가라고 했잖아."
"그래도 혼자 가려니 심심해서 기다렸어. 응? 윤경언니."
혜진이가 영민이 뒤에 있는 윤경이를 보고 놀란다.
"안녕, 혜진아."
윤경이가 혜진이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서 혜진이의 벙어리장갑 낀 손을 잡는다.
"혜진아, 우리 떡볶기 먹을까?"
혜진이가 그말을 듣고 좋아서 깡총 뛴다.
"어디서?"
"학교 앞 가게에서."
"언니, 돈 있어?"
윤경이가 혜진이의 손을 끌었고

영민은 이제 그리 심하게 거부하지 않은 채 그저 둘의 뒤를 따랐다.
떡볶기는 하나에 1원,
바가지과자나 고구마과자는 1원에 4개였다.
떡볶기가 마치 성깔있는 남자의 얼굴같이 붉은 빛으로 피유피유 소리를 내며 끓어 오르고
윤경이와 혜진이는 화로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윤경이가 내는 십원짜리 지폐의 파란 빛이 주인아줌마에게 기꺼이 긴의자의 가장자리를 내어주게

만들었다.
혜진은 냉큼 꼬챙이로 떡볶기를 집어서 입으로 가져 가려다가 생각난 듯이 영민을 쳐다본다.
"오빠, 어서 먹어."
"그래, 고영민, 어서 먹어. 혜진이는 3개 나도 3개 고영민 너는 4개야."
혜진이가 눈을 말똥말똥거리면서 맞장구를 친다.
"그래, 오빠는 남자니까 많이 먹어야지."
영민이 자리에 앉자 혜진이가 못참겠다는 듯이 한입을 물다가 뜨겁고 매워서 눈물을 찔끔댔다.
"아이 매워."
윤경도 하나를 입에 물었고, 영민은 말없이 그저 떡볶기의 꼬챙이만 잡았다.
멀리서 까만 지프차가 한동안 서있었다는 것을 영민이 그제서야 깨닫는다.
"혜진아, 늦으면 안되니 빨리 가자."
윤경이 아쉬운 듯이 바라보는데 혜진이가 손을 흔든다.
"언니, 안녕. 내일 봐."
"그래, 안녕. 고영민 잘가."
영민은 대답없이 그저 혜진이만을 이끈다.
"야, 고영민. 잘가라고."
윤경이가 소리치자 영민이 돌아서더니 어색하게 미소를 보내곤 이어서 다시 돌아섰다.
먼발치에서 윤경이가 까만 지프차에 오르는 것이 보였다.
새나라 자동차가 동네에 들어오기만 해도 아이들이 줄줄 따라다니는데,
지프차를 타고 학교에 올 정도면 윤경이네는 아마도 대단한 부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혜진이는 아무 것도 모르고 깡총깡총 뛰면서 앞서가다가 홱 뒤돌아 선다.
"오빠, 윤경언니 예쁘지?"
영민은 대답없이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난 말이야, 오빠. 우리 학교에서 윤경이언니가 제일 예쁘더라."
영민은 아직도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눈송이를 손으로 받아본다.
눈송이는 손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버리고 그 아스라함에 취해 영민은 괜스레 얼굴을 붉힌다.
뚝방에서 보는 냇물은 마치 다른 세상 같이 보인다.
물이 얼지 않은 곳으로는 졸졸졸 물이 흘러가지만,
나머지는 모두 눈이 소복히 쌓여 있어서 마치 버섯나라에 온 느낌을 주는 것이다.
정말로 모든 것의 위에는 눈들이 소담스럽게 쌓여 있었기에,
그것은 마치 동화의 한장면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냇물의 막힌 가장자리로 아이들이 얼음지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영민이나 혜진은 절대로 뚝방아래로 내려가 냇물가에 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뚝방아래에는 불량스러운 아이들이 어슬렁거렸기 때문이다.
겨울이 오면서 아이들의 놀이는 완전히 틀려졌다.
땅이 젖거나 얼었기 때문에 땅에다 금을 긋고 하는 땅따먹기 놀이등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로 눈이나 얼음 위에서 하는 놀이와 다방구, 술래잡기, 집지키기 등을 하고 놀았다.
동네에 들어서는데 영민의 발앞으로 깡통이 날아왔다.
아이들이 깡통차기를 하다가 영민의 앞으로 그 깡통이 굴러온 것이다.
"야, 울보. 이리로 차!"
한 아이가 영민을 보고 소리쳤다.
울보?
영민이 소리친 아이를 노려보는데 아이들이 와하고 웃어댄다.
아이들에게는 이것도 하나의 유희였다.

한명을 바보로 만들어서 놀려대는 것.
영민은 아무말 없이 깡통을 비켜 지나가는데 혜진이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야, 왜 울 오빠가 울보냐, 빙신아!"
"뭐, 병신?"
아이들이 그말을 듣고 다시 깔깔대고 웃었고, 그 아이가 그때문에 약이 올랐다.
"야, 울보. 겁장이. 도망가냐?"
영민이 다시 아무말 없이 그냥 가자, 혜진이가 영민의 뒤를 따르며 악을 쓴다.
"바보, 병닭, 쪼다같은 놈!"
후다닥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기에 영민이 뒤돌아보는데 눈앞에 별이 번쩍한다.
억!

영민은 그대로 눈바닥에 나동그래졌고 아이들이 몰려와 빙둘러 싼다.
싸움구경을 하려는 것이다.
"이 새끼야, 나쁜 새끼야!"
혜진이가 악을 쓰면서 그 애에게 덤벼들자,
그 애는 혜진이의 얼굴을 험하게 주먹으로 갈겼다.
헉!
하늘이 노랗게 변하면서 혜진이도 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혜진은 그 자리에서 다시 발딱 일어섰다.
"미친놈! 썅놈! 개새끼!"
다시 주먹이 날아오고 혜진이가 다시 처박힌다.
그러나 혜진은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악을 쓰면서 그 애에게로 덤벼들었고,
그애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혜진의 날카로운 손톱이 그애의 얼굴을 확 긁어버렸다.
"아이야."
애가 비명을 지르는데 혜진이는 놓치지 않고 그애의 팔뚝을 잡아 있는 힘껏 물어 뜯었다.
"아아악!"
애가 비명을 지르며 울어댔고, 혜진이가 앙칼지게 아이를 노려본다.
"나쁜 새끼!"
아이는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고 팔뚝에 피자국이 날 정도로 물어뜯겨서 죽어라고 울어댔고,
혜진이는 빙둘러 서있는 아이들을 노려본다.
아이들이 멈칫하는데 혜진이는 영민에게 뛰어갔다.
"오빠, 괜찮아?"
영민의 코에서는 아직도 핏줄기가 간간히 비쳤고 정신도 좀 아득한 것 같았다.
"빨리 가자, 오빠."
혜진이 울먹이는데 영민은 씩 웃음을 보인다.
하지만 아직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집으로 들어서자 큰어머니가 혜진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라서 달려왔다.
"아니, 혜진아. 얼굴이 이게 뭐야."
혜진이의 볼이 퉁퉁 부은 것을 보고 혜진엄마가 기겁을 했다.
"누구야? 어떤 놈이야?"
소리치다가 혜진엄마는 영민에게 분노의 눈길을 보냈다.
"이런 병신같은 놈. 동생이 맞고 들어왔는데 너는 뭐했니?"
혜진이가 놀라서 제 엄마를 가로막았다.
"오빠도 코피났어."
하지만 혜진이가 막아도 소용없었다.
혜진엄마의 큰 손이 사정없이 영민에게 날아들었고,

영민은 속절없이 몸을 웅크리고 있는 수밖에는 없었다.
등짝으로 머리로 온몸으로 사정없이 손찌검이 날아들고,
영민은 마치 자신이 고치에 들은 누에같다는 생각을 하며 웅크리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두부장수의 외침소리와 딸랑딸랑 종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그 딸랑딸랑 종소리에서 아주 진한 그리움이 배어있다.
그것은 어미소를 찾는 송아지의 슬픈 미소와 꼭 닮아있는 것이다.
영민은 그 소리가 너무도 흐느적댄다고 느끼고는 그 감겨오는 소리를 떼려는 듯이 손을 흔들어본다.
하지만 손은 흔들어지지 않고 그저 마음만이 간절할 뿐이다.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저 두부장사가 끌고가는 송아지를 빼앗아야만 한다.
영민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는 일어나려고 안간 힘을 쓰는데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을 떠본다.

하늘이 날아다니고 있다.
아니 영민 자신이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누런 세상을 둥둥 떠다니고 있다.
아름다운 느낌이다.

푸근하다.

그대로 아롱아롱 노랑 불빛으로 사라지고 싶다.
"두부사려!"
두부장수의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오지만

영민은 그저 가물가물 누런 세상으로 사라지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
그 누런 세상은 끊임없이 영민을 유혹하고, 영민은 그 유혹에 이길 만한 힘이 없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꾸 소리친다.
누구지?
엄마?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엄마의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영민은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는 아지못할 강력한 힘에 의해 누런 세상에서 하염없이 추락해 버린다.
헉!
영민이 가까스로 눈을 떴고, 밖에서는 두부장수의 방울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머리가 빙글빙글 돈다.
간혹 그 빙글빙글 도는 머리는 골수를 쪼개버릴 듯이 아파왔다.
온몸이 그저 더덜더덜 떨린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갑자기 혜진이의 생각이 난다.
"혜진아!"
영민은 거의 움직일 수도 없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그리고 옆에서 죽은 듯이 누워있는 혜진이를 흔든다.
"혜진아, 혜진아."
하지만 혜진이는 아무런 소리도 없이 축늘어져 버렸고,
혜진이의 입에서 침이 주루룩 흘러 나왔다.

정신이 화닥 든다.
"안돼, 혜진아."
그런 힘이 생긴다는 것이 신기했다.

영민은 후다닥 혜진이를 끌어 안는다.
혜진이의 몸이 마치 풀죽은 배추처럼 축 늘어졌다.
"안돼, 혜진아!"
영민은 죽자사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칠거리면서 자꾸만 손에서 빠져나가는 혜진을 움켜잡고는 문쪽으로 허적허적 기다시피 간다.
그 짧은 거리가 마치 영겁의 세월처럼 길게만 느껴진다.
마침내 방문에 다달은 영민이 문이 깨져라고 밀어제꼈다.
싸늘한 공기가 방에 막혀 있다가 후다닥 방으로 들어서며 영민의 뺨을 거세게 때렸다.
혜진을 죽을 힘을 다해 방밖으로 밀어내다가

영민은 무언가가 뒷머리를 강하게 치는 것 같아서 그대로 널브러져 버리고 만다.
멀리서 사람들이 뛰어오는 것이 보이는 것도 같고,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김치국을 먹여.'
'마당에 눕혀놓아야돼.'
이런 소리들이 마치 어떤 형상인 듯이 찌익찌익 늘어져서 들려왔다.
그리고 영민은 까무룩 정신을 잃는다.
윤경은 조회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 영민의 빈자리를 보면서 가슴이 덜렁 내려앉았다.

여태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석 한번 하지 않았기에 걱정이 되는 것이다.
윤경은 조회시간 내내 영민이 늦게라도 뛰어올까봐 창문밖만을 바라보았고,
그래도 종내 영민이 나타나지 않자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진윤경!"
계선생님이 몇번 주의를 주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이

윤경은 수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내내 창밖만을 바라보았고,
계선생님도 포기했는지 이제 주의를 주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윤경은 그대로 도시락을 책상에 놓은 채로 멍하니 창밖만을 바라본다.

윤경의 가방에는 다른 도시락이 들어있다.
영민을 주려고 엄마를 졸라서 하나 더 싸온 것인데 정작 영민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왠일일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윤경은 기어이 도시락 뚜껑을 열지도 않고 점심시간을 그대로 보내버리고 말았다.
음악시간에 선생님은 다가오는 성탄절을 위해서 아이들에게 '흰눈 사이로'라는 노래를 가르쳤다.
이미 곡조에 익숙해 있었던 아이들인지라 금세 아이들은 그 노래를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윤경은 노래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있기만 했다.
그 노래가 귀에 전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례시간에 선생님이 윤경에게 말했다.
"반장, 오늘 영민이가 결석했는데 선생님이랑 같이 집에 가볼까?"
분명히 윤경이의 마음을 알고서 하는 말이었다.

윤경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선생님이 윤경을 학교앞에서 기다렸고, 윤경은 운전기사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돌아왔다.
"가자."
선생님은 짧막하게 이렇게 말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계선생님이 산길을 걷다가 혼자말을 했다.
"참, 아까운 놈인데."
윤경은 선생님의 얼굴만을 바라보았지만 선생님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윤경이도 선생님이 왜 그런다는 것을 잘안다.
영민이 전학온 후에 그의 생활기록부를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제 아버지를 닮았나봐."
아버지?

윤경이가 다시 선생님을 쳐다보지만 선생님은 말없이 앞만 보고 걷는다.
뚝방을 지나면서 냇물 반대편에 철거민촌이 그 초라한 몰골을 여지없이 보여주었고,
윤경은 저런 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뚝방근처에서 놀던 아이들이 계선생님을 보고 아는 체 인사를 했고,
불량한 아이들은 혹시 벌을 받을까 슬그머니 사라졌다.
철거민촌에 들어서자 벌써 생활고에 찌든 사람들의 악다구니들이 들려왔다.
그저 아무렇게나 지어진 판자집과 하꼬방집들.
어떨 때는 어디서 주워왔는지 깨진 브로크로 담장이랍시고 세워놓았는데 어설프기가 그지 없었다.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연탄재가 온갖 쓰레기들과 어울려 좁은 길 주변에 듬성듬성 쌓여있다.
판자 담장의 위에는 무언지 모르지만 쓰지도 못할 것 같은 헝겊조각들이 걸려있어

마치 무당집을 연상하게 했다.
계선생님은 주위에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서 간신히 영민네 집을 찾을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오두막집은 문을 밀자 삐어꺽 하는 비명을 질러댄다.
윤경은 가슴을 졸이며 선생님의 뒤에서 선생님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계십니까?"
선생님은 약간은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고, 안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누구세요?"
여자 하나가 부엌에서 나오다 계선생님을 보고 흠칫 한다.
아무래도 이런 곳에 올 사람이 아니란 것을 첫눈에 알아챘기 때문이다.
"저는 영민이 담임선생되는 사람입니다."
"아이고, 선생님."
혜진엄마는 후다닥 물묻은 손을 몸빼 바지에 닦으면서 고개를 숙인다.
"영민이가 오늘 학교에 안나왔더군요."
"아이고, 큰일날 뻔했어요. 선생님.

연탄가스를 마시고 제 동생이랑 거의 다 죽어있는 것을 간신히 살렸구만이라요."
그말을 듣자마자 윤경이의 가슴이 덜컹하고 내려 앉아 버렸다.
"좀 볼 수있을까요?"
"아이고, 그러문입죠, 선생님."
혜진엄마가 부랴부랴 방으로 인도한다.
방문을 열자 마치 죽은 시체마냥 두애가 하얗게 질린 채로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윤경이 주루룩 눈물을 흘리는데 누구도 듣지 않는 혜진엄마의 넋두리가

중얼중얼 들렸다.
"처음에는 죽는 줄만 알았다고요."
윤경은 그저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죽은 듯이 누워있는 영민을 바라보면서 눈물만 짓고 있었다. 
  

 

 

 

 

'소설방 > 그리운 세월' 카테고리의 다른 글

06. 첫발  (0) 2015.08.29
05. 그대 마음에 별이 보일 때  (0) 2015.08.29
03. 첫눈  (0) 2015.08.29
02. 술래  (0) 2015.08.29
01. 마법의 물  (0) 2015.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