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그리운 세월

03. 첫눈

오늘의 쉼터 2015. 8. 29. 12:07

03. 첫눈

 

 

찬바람이 어미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면서 필사적으로 바둥대는

갈색의 나뭇잎을 사정없이 흔들어대고,

그 바람에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허공에 안타까이 몸을 날려 버리는 숱한 낙엽들의 아우성이,

가슴 속에서 아스락 바스락 슬픔의 고통으로 남겨진다.

생명으로 남지 못하고 그저 진실의 몸부림에 겨울로 흡수되는 그 아픔이 슬픔의 결정체가 되어

영민의 눈가에 몇방울 맺혀졌다.

교정에는 무엇이 그리 기쁜지 마구 뛰어노는 아이들이 그저 물에 담구어진채 놓여진

수채화 물감처럼 마냥 번져나간다.

영민은 자신이 그들의 사이에 낄 수없다는 사실이 서글프지만,

그래도 자신의 공간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이처럼 간직할 수 있다는 자체가 다행이라고 생각도 되었다.

금세 오신다던 엄마는 종내 오시지 않았고,

영민은 매일 동네 어귀에서 엄마가 오시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풀이죽어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리고 점차 영민은 엄마가 다시는 자기를 찾으려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눈물이 나려고 한다.

왜 하느님은 엄마가 오지 못하게 하실까?

아버지....

영민은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무런 생활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계셨을 때는 마음이 든든했었다.

이제는 저 먼 하늘나라에 계시겠지만 언제나 영민은 아버지를 생각한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데 눈앞에 하얀 손수건이 보였다.

손수건에서 향기보다는 느낌이 더 배어나온다.

영민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경이 그런 영민을 보고서 안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자, 닦아."


그러나 영민은 그 손수건을 받아 들지 않았다.


"가!"


영민은 오히려 화난 양 윤경에게 소리친다.

항상 이렇게 나타나는 윤경이 별로 달갑지 않아서였다.

자신이 눈물을 흘릴 때면 어디서인지 어김없이 나타나는

윤경에게 영민은 숱한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고영민, 왜 그래?"


윤경이 놀라는 눈치다.

하지만 영민은 대답없이 그자리를 떠난다.

갑자기 확하고 자신만의 세계가 깨어진 허망감이 든다.

그리고 현실은 너무나 빨리 자신에게 달려드는 것이다.

윤경이가 따라왔고 영민은 걸음을 빨리 했다.

옆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노래가 귓가를 스친다.


"산중 호걸이라 하여 임금님의 생신날,

학생입장하여 남산꼭대기 음악회가 열렸다.

토끼는 춤추고 여우는 말놀이 지가 지가지가 지이가...."


영민은 그 노래를 뒤로 하고 재빨리 교실안으로 들어간다.

윤경이 그를 바싹 뒤쫓다가 교실에 이르자 포기한 듯이 걸음을 늦춘다.

아이들의 눈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5교시는 영민이 좋아하는 국어시간이다.

다른 시간은 그저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지만,

국어시간만 오면 영민은 정신을 바싹 차리고 수업에 열중한다.

계소응이라는 무척 이상한 이름을 가진 담임선생님의 국어 수업은 때로는

예상치도 모르게 흐르기도 했는데,

바로 그점이 영민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주었다.

계선생님은 국어책을 펴지도 않고 그저 시 한 수를 외웠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시지만 영민은 그 시를 누구보다도 잘알고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즐겨 읊으시던 시였기 때문이다.


"누구 시인지 아는 사람?"


선생님이 이렇게 질문하자 몇 애가 손을 들었다.

영민도 손을 들려고 하다가 그 행위가 창피하게 느껴져서 그저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다.


"진윤경, 대답해 봐요."


항상 그렇듯이 제일 먼저 불러지는 애가 윤경이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김소월이요."


어쩐지 우쭐거림이 그 대답에 포함되어있다고 느끼는 것은

아마 영민이 그렇게 생각해서일 것이다.


"그럼 김소월에 대해 아는 사람?"


아무도 손을 드는 아이가 없었다.

하긴 그의 시에 대해서도 모르는데 시인에 대해 안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영민이 손을 올리려다가 멈칫 당황해서 그대로 손을 내려버린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그것을 본 선생님이 영민을 지적했다.


"고영민!"


그 소리에 영민의 몸이 까맣게 지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모든 애들이 전부 자기를 쳐다보았고 영민은 마치 머리속에서

무언가가 앵앵 거리며 날아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어지러움. 현기증.


"고영민."


선생님이 다시 영민을 호명하는데도 영민은 일어설 줄 모르고

그대로 앉아 쩔쩔매고 있었고 다른 아이들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윤경의 안타까와하는 눈길이 영민의 눈에 보였다.

영민이 일어선 것은 아마 그 윤경이의 시선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월은."


다른 아이들 처럼 '김소월'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서정적인 시를 썼고, 해방전 서정시인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일본 유학계통인 최남선, 주요한, 김억 등과 같은 시대의 시인입니다.

그의 시는 너무나 깨끗하고 순수해서 '북에는 소월, 남에는 영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순수시인의 대표라고 일컬어집니다.

'진달래꽃'은 개벽에 실린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놀라고 있으나 영민은 그것을 알아차릴 만큼 정신이 맑지 못했다.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 쳤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아서 주저 앉고만 싶었다.

노랑 현기증이 다시 밀려온다.


"잘했어."


선생님의 칭찬의 말이 영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럼 다른 그의 작품도 아니?"


"초혼을 두번째로 꼽습니다."


선생님의 미소가 왜 마냥 아득하게만 느껴질까?


"외울 수 있니?"


아버지가 머리에 뱅글뱅글 떠올랐다.

아버지는 산등성이에서 그 시를 영민에게 낭송해 주곤 했다.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누군가가 울고 있다.

무엇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는가.

그래, 영민은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이 피터지게 울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불러대고 있는 것이다.

목이 터질 정도로 엄마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는 엄마를 말이다....

마지막 두시간이 특활시간이었는데 계선생님이 영민을 불렀다.


"영민이는 오늘부터 문예반에 들도록 하지."


영민은 아무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영민이 놀란 것은 윤경도 문예부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쩔 수없이 약 10명 남짓한 문예부에서 윤경과 마주보고 있어야만 했따.


"영민이는 어떻게 그렇게 시를 잘알지?"


계선생님이 이렇게 물었지만 영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동안 대답을 기다리던 선생님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서야

영민은 그 난처한 질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톰소여의 모험'이란 책을 읽고 있는 중에

윤경은 슬그머니 영민의 옆에 다가와 앉았다.


"뭐하니, 고영민?"


윤경이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고 영민은 못들은 체 책에만 몰두하는 척 했다.

그러자 윤경이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서 영민의 앞에 내밀었고

뭔가하고 힐끗 보았던 영민은 갑자기 불에 덴 듯이 가슴이 확확 달아올라서 견딜수가 없었다.

영민은 남이 볼세라 수첩을 옆으로 밀었고 윤경의 미소가 영민의 옆얼굴에 가까이 닿아 있는 듯 했다.

기러기가 끼룩끼룩 울면서 날아가고,

동짓날 팥죽에 떠있는 새알처럼 허여멀건한 보름달이

아직 때가 이른 데 동녘 하늘에서 실 미소짓고 있다.

혜진이는 청소당번이래서 좀 늦는가 보다.

날이 추워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영민은 교실 주위를 배회하다가

자기에게로 걸어오는 소녀를 보고는 그자리에 턱 멈추어 섰다.


"고영민!"


영민은 아까 특활시간에 있었던 일때문에 괜스리 얼굴이 붉어져 당황한다.

그는 일부러 윤경을 외면하기 위해 창문가에서 창밖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윤경이 그냥 지나칠 리는 없었다.


"동생 기다리니?"


영민은 아무 말도 안한다.

그저 그림같이 날아가는 하늘에 기러기들을 볼 뿐이었다.

기러기 무리 중에 힘이 들어선지 약간은 뒤떨어져서 날고 있는 기러기를 보며,

영민은 그것이 꼭 자기같다고 생각한다.

엄마 아빠 기러기가 모두 앞으로 가버리고 자기는 축 처진 채로

안간 힘을 쓰고 엄마 아빠를 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기러기는 끼룩끼룩하고 울어서 기러기야."


영민은 자신도 모르게 옛날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며 이렇게 중얼댔고

윤경이 무슨 소리인가 귀를 기울인다.


"기럭기럭하고 울잖아. 가족들이 다 날아가는데 자신만 갈 수없자,

기다려 기다려 하고 기럭기럭 우는 거야."


영민의 말이 서러워 윤경은 그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때 둘사이를 가르면서 조그만 노래가 들렸다.


"기러기러기러 기러 기러기들이 찬서리 맞으면서 어디로들 가나요.

고단한 날개 쉬어가라고 갈대들이 손을 저어 기러기를 부르네."


"혜진아!"


어린 혜진이가 손이 시려운지 호호 손을 불어가면서 둘사이에 끼어들었다.


"끝났니?"


영민이가 묻자 혜진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윤경이를 쳐다본다.


"윤경언니지?"


"너는 고영민 동생이구나."


혜진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너 과자줄까?"


과자를 준다는 말에 혜진이의 눈이 반짝 뜨인다.

윤경이 과자를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영민이 혜진이의 손을 나꾸어 챘다.


"가자, 혜진아."


윤경이가 막 과자를 꺼내는데 영민이 혜진이의 손을 와락 잡아당겼다.

그러니 혜진이의 눈이 윤경이의 과자든 손에 머물러있었고,

영민은 그런 혜진이를 끌다시피 데리고 간다.

윤경이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빨리 어둑해진 산길을 걷는데 혜진이가 아쉬운 듯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오빠, 왜 그랬어. 그거 양과자든데."


민은 얼굴이 벌개져서 씩씩댔다.


"우리가 거지냐. 그런 것 받아 먹게."


혜진이가 그런 영민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쳐다본다.


"저번에 카스테라도 받았잖아."


하긴 그랬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더욱더 수치스럽게 느껴졌던가.

아마 그 수첩때문일 것이다.

윤경이가 쓴 그 글씨때문일 것이다.

톰소여의 모험에서 나오는 그 글귀를 흉내내서 쓴 그 글귀.

'고영민, 나 너 좋아해'라는 그 글귀.

그때문에 수치심이 온통 그의 온몸에서 꾸역꾸역 밀려 나왔었던 것이다.

냇물에서 차가운 바람이 쌩하는 소리를 내며 불어왔고, 혜진은 추워서 손을 호호 불었다.

영민이 그런 혜진이의 손을 잡아주자, 혜진이가 깜짝 놀란다.



"오빠, 오빠손이 왜 이리 뜨거워?"


영민이 아직도 그 특활시간에 있었던 일때문에 온몸이 뜨거워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빠, 저 별좀 봐."


하늘에는 날이 아직 완전히 어둡지도 않은데

성급히 나온 별들이 자신의 찬란함을 뽐내면서 빛나고 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셋 나 셋."


"별 넷 나 넷 별 다섯 나 다섯 별 여섯 나 여섯."


영민의 말을 받아서 혜진이가 이어갔다.

영민은 별을 헤면서도 엄마를 생각한다.

저별들은 저 높은 하늘에서 이 세상 곳곳을 볼 수 있겠지.

아, 저 별들은 엄마를 볼 수있을 거야. 얼마나 좋을까.

하늘 높은 곳에서 누구든 볼 수있는 저 별들은 말이야.

영민의 머리에서 윤경의 생각이 빠져나가고 대신 엄마의 생각이 머리가득 그려진다.

낮이 짧았고 혜진이가 청소당번이기 때문에 둘이 늦어도 큰어머니는 눈만 흘겼을 뿐

꾸중을 하지는 않았다.

아니 아마 오만철씨가 옆에 있기 때문에 혼을 안냈는지도 모른다.


"들어와 밥먹어라."


오만철씨가 이렇게 말하는데 큰어머니가 대뜸 소리쳤다.


"영민이는 빵 배급타서 먹었지."


영민이 우물쭈물 대답한다.

아주 작은 소리로.


"네."


영민은 큰어머니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알고 있다.

그때 혜진이 그런 말을 한 제 엄마가 밉다는 듯이 쳐다보고 말했다.


"그건 점심 배급이잖아, 엄마."


그러나 영민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잘알고 있다.


"야, 애들이랑 놀아야겠네."


영민은 짐짓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면서 밖으로 터덜터덜 걸어나갔다.

그의 뒷머리에는 혜진의 안타까와하는 눈빛이 아주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솔직히 영민은 함께 놀 아이들이 없다.

그가 다른 곳에서 이사왔다는 이유만으로 애들은 영민을 놀이에 끼워주지 않았다.

방금까지 '다방구'를 하던 아이들이 날이 어두워지자 술래잡기로 놀이를 바꾸었다.


"야도!"

 

"야도!"


아이들이 집찍는 소리가 들려오고 허기진 영민에게는 그 소리가 아무런 의미없이 들렸다.

영민은 검은 물이 흐르는 뚝방에 걸터앉았다.

배속에서는 꼬르륵 꼬르륵 소리가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들려왔다.

물위를 하염없이 보니 검은 수면위에 별이 몇개 머물고 있다.

흐르는 검은 시냇물에 비치는 하늘의 별들은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따다가 물에 뿌려놓은 것 같았다.

그 흐르는 별위로 엄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슬픈 뒷모습을 보이며 엄마는 '영민아, 곧 돌아올께'라고 속삭인다.


"엄마!"


영민은 후닥 손을 내밀어 소리쳐 보지만 일렁 달그림자가 엄마의 모습을 후닥 지워버리고 말았다.

영민은 마침내 소리를 내어 울어본다.

남의 집에 들어온 후로 마음놓고 울지도 못했기에 한번 터진 그의 울음소리는

마냥 뚝방을 타고 한없이 울려퍼졌다.

울고 있는 중에 인기척을 느끼고서는 영민은 울음을 꾹 삼켜 버린다.

등뒤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언제부터일까?

영민은 고개를 돌린다.


"오빠아!"


"혜진이?"


언제부터 혜진이가 서있었을까?

영민은 재빨리 자신의 눈물을 옷소매로 닦았다.

혜진이 주춤 영민의 옆에 앉았다.


"엄마는 나빠!"


혜진이가 눈물젖은 눈으로 입을 삐죽 내밀자 영민이 혜진의 말을 막는다.


"그런 말하면 못써, 혜진아."


"맞는 말이지 뭐야."


혜진이는 영민의 등뒤에서 얼마나 흐느꼈는지 목이 다 쉬어 있었다.

영민이 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 노래할까?"


둘다 목이 쉬어서 말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따러가면 아가가 혼자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영민의 눈에 다시 이슬이 맺힌다.

아까는 서러움의 눈물 지금은 그리움의 눈물인 것이다.

무언가 바시락대는 소리에 영민은 눈을 살며시 뜬다.

아직도 새벽인 것 같은데 밖이 훤했다.

어떤 신비스런 느낌이 영민의 머리에 스르르 파고든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영민은 바시락거리는 소리가 뭔가 알기위해 귀를 기울였다.

무언가가 판자벽을 갉아대고 있다.


'아하, 새앙쥐구나.'


영민이 마침내 그 소리를 알아채고는 새앙쥐를 쫓아버리기 위해 판자벽을 퉁하고 손으로 쳤다.

그런데 뭔가가 푸턱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응? 영민은 비로소 윗몸을 일으켰다.

아직 혜진은 정신없이 자고 있었고,

영민은 뚫어진 창문사이로 보석같이 빛나는 하얀 물체를 보고는 탄성을 지른다.


"야, 눈이야!"


마치 하얀 보석을 갈아서 소복히 쌓아놓은 것처럼,

눈은 소담스럽게 쌓여서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혜진아! 혜진아!"


영민은 마치 큰소리를 내면 눈이 날아가기라도 할까봐

조용히 조심스럽게 혜진이를 깨운다.


"눈이 왔어. 첫눈이 왔어."


무엇이 기쁜지 마음이 마구 날아갈 것만 같다.

눈이 왔다는 사실.

그것은 아마 무언가 아주 기쁜 소식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게 하지 않는가.

혜진이가 눈을 부비며 일어났고, 영민은 조심스럽게 방문쪽으로 다가갔다.

그 기대감이 흐르르 사라질까 두렵다는 표정으로.

방문을 여니 눈이 확 쏟아져서 방안으로 밀려들어온다.

그것은 마치 솜사탕이 풀풀 날아다니다가 한꺼번에 방안으로 밀려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세상은 그 눈에 덮여 모두가 흰색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어느새 뛰어나온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동네를 뛰어 다녔다.

등교길에 혜진이는 그래도 제 엄마가 뜨게질을 해서 만든 벙어리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영민은 그저 맨손으로 다 떨어져서 너덜대는 가방을 들고는 손을 호호 불고는 학교로 향한다.

너무 오래되어서 무릎이 맹꽁이 배처럼 불룩 튀어나온 갈색바지가,

무릎만이 변색되어 흰색처럼 되어있고,

엉덩이는 덕지덕지 다른 헝겊으로 기워놓아, 볼상 사나왔지만,

그래도 영민은 눈이 왔다는 사실이 좋아서 그저 손을 호호불면서 열심히 학교에 간다.

주머니가 없는 바지였기에 영민은 가끔 손이 너무 시려우면

가방을 양다리사이에 끼어놓고 두손을 목에다 대고 어깨를 한껏 움추리곤 했다.

그러면 몸의 온기가 어느 정도 언 손을 녹혀주었다.

학교로 들어서는데 벌써 당번이 조개탄을 타려고 양동이를 들고 뛰고 있다.

늦게가면 다른 반이 다 타가서 찌꺼기만 남기 때문이다.

어떤 부지런한 반의 연통에는 벌써 누런 코같은 색깔의 검고 누런 연기가 폭폭 뿜어나오고 있다.

영민이 눈을 즐기면서 반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영민의 뒷통수를 때렸다.


어헛.

영민이 놀라서 소리치고 혜진이가 부리나케 뒤를 돌아본다.


"야, 고영민, 한방 맞았지."


윤경이가 낄낄대면서 손을 흔든다.

혜진은 윤경의 손에 끼어있는 빨간 장갑을 부러운 듯이 쳐다보았다.


손가락 장갑.

벙어리 장갑과는 다르게 손가락 장갑은 손가락 다섯개가 모두 각각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진 것으로 아주 비싼 것이다.

특히 윤경이가 끼고 있는 장갑은 손바닥과 손등에는 가죽을 댄 것인데 보기에도 아주 예쁘게 보였다.

다시 눈덩이가 날아오자 영민이가 폴짝 뛰어서 그것을 피했다.


"혜진아, 너도 던져봐."


윤경이가 소리쳤고,

혜진이는 그말을 듣고 눈을 뭉쳐서 힘없이 던지는 시늉을 한다.


"이런 바보, 세게 던져야지."


윤경이가 놀렸고 혜진이는 이번에는 눈덩이를 냅다 던졌다.

하지만 윤경이를 맞추지는 못했다.

혜진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영민에게 눈을 던져보았지만 영민은 어림없다는 듯이 피했다.

그러다가 영민은 이런 행동이 수치스럽게 느껴졌는지 혜진이를 끌었다.


"조회늦겠다. 빨리 가자."


뒤에서 눈덩이를 몇개 더 던지던 윤경이 그들이 반으로 향하자 재빨리 뒤따라왔다.

수업은 첫눈때문에 도무지 되지가 않았다.

아이들이 공부는 하지 않고 자꾸 창밖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계선생님은 이럴 바에는 차라리 밖에 나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는지

아이들에게 체육시간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눈오는 날 체육은 그대로 눈싸움과 노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교실을 나가자마자 벌써 성급한 아이들은 눈덩이를 뭉쳐서 던지기 시작했고,

교정 곳곳에는 영민네 반보다 먼저 나온 반 아이들이 눈싸움을 하거나 눈사람을 만들기에 열을 올렸다.

아이들은 저마다 구멍이 났지만 그래도 벙어리 장갑이라도 끼고 눈을 뭉치거나 만지고 있었지만,

영민은 다떨어진 벙어리장갑조차도 없는 참이라

그저 두손을 양겨드랑이 사이에 낀 채로 눈위를 거닐기만 했다.

흰눈이 오던 날은 얼마나 아름다왔던가?

한때 아버지와 엄마가 있을 때에는

흰눈이 오면 철만난 강아지마냥 깡총깡총 뛰면서 좋아하지 않았던가.

아버지의 껄껄대는 웃음소리,

그리고 엄마의 미소속에 영민은 그저 하늘을 날아갈 듯이 흰눈속에서 파묻혀 놀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는 체온때문에 손에 닿자마자 눈물이 되고 마는 작은 눈발처럼,

그때 그 시절은 사르르 사그러져 버리고,

영민만이 혼자 덩그마니 이 세상에 남아있는 것이다.


흑.

눈길에 길잃은 철새처럼 말이다.

영민이 슬픔때문에 조금 쿨럭대며 구석에 있자,

그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윤경이가 영민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이번에는 눈을 던지지 않았다.

영민은 괜시리 얼굴이 붉어져서 윤경을 외면하는데 그의 눈앞에 뭔가가 드밀어진다.


응?


"받아, 고영민. 첫눈 오는 날 네게 이걸 꼭 주고 싶었어."


털장갑.

손가락 다섯개가 들어갈 수 있는 귀한 장갑.

검은 색 털이 마치 지금이라도 검은 빛을 뿜어내며 일어설 것 같은 그런 것.

보통 아이들이 낄 수도 없는 그런 장갑.

영민은 침을 꿀꺽하고 삼킨다.

추운 날인데도 불구하고 침이 이렇게 삼켜지는 것으로 봐선 아마도

그 장갑에 대한 유혹이 컸던 모양이다.


"받아, 어서."


윤경이 조금은 당당하게 말했다.

영민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다는 생각때문이던가.

하지만 윤경의 속마음은 초조했다.

영민이 그것을 거절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때문이다.

영민은 자신의 손이 떨린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은 추위때문일 것이다.

영민은 아주 천천히 손을 내밀어 장갑으로 손을 가져갔고 윤경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하지만 영민의 손은 더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아니 다음 순간 영민의 손이 장갑을 탁 뿌리친다.


"너, 내가 거진줄 아니?"


검은 장갑이 팩하는 소리를 내며 눈바닥에 꼬꾸라지고 윤경의 얼굴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이 바보! 병신! 고영민 너는 병신이야!"

윤경이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데 영민은 그대로 뒤돌아서 버린다.

눈이 하염없이 희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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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변소청소  (0) 2015.08.29
02. 술래  (0) 2015.08.29
01. 마법의 물  (0) 2015.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