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그리운 세월

02. 술래

오늘의 쉼터 2015. 8. 29. 11:40

02. 술래

 

 

  뚝방을 지나 작은 오솔길을 지나면서 영민은 여태 주눅이 들어서 오그라진 몸을 조금 펴본다.

그의 몇발짝 앞에는 영민이 큰아버지라고 부르는 오만철씨가 터덜터덜 걸어가며,

거의 다타 끝부분만 남은 담배를 아까운 듯이 빨아댔다.

영민은 며칠전 엄마의 손을 잡고 이곳을 찾아온 때가 생각나서 다시 엄마생각에 코끝이 찡해졌다.

처음 이 철거민촌을 찾았을 때, 오만철의 처는 엄마와 영민을 호들갑을 떨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민의 아버지와 오만철이 의형제를 맺은 사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마도 영민 엄마가 내미는 돈때문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훌쩍 떠나갔고,

엄마가 떠난 텅빈 공간에서 영민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눈물을 손등으로 몰래 훔쳐야만 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이 아주 창피하게 느껴져서 이렇게 몰래 울었던 것이다.

오만철의 처는 영민 엄마가 눈에서 사라지자마자 아주 노골적으로 영민을 못마땅하게 노려보았으며,

오만철은 그런 처가 한심스럽게 느껴졌지만 그저 혀만 차고 있을 뿐이었다.

영민은 오만철을 따라 산길을 걸으면서 온갖 꽃들이 피어있는 산길을 보면서 아버지를 기억해본다.

사업과 돈과는 거의 무관하셨던 아버지는 산행을 즐겼고, 마침내 아버지는 험한 산의 절벽에서

실족해서 돌아가셨다.

영민은 아버지의 시신이 놓여있던 침대와 넋이 나간채

그저 흐느끼고만 있었던 엄마의 모습이 마치 저 산에 핀 아득한 느낌의 들꽃같다는 생각을 한다.

영안실.

그 음울한 분위기.

그 회색빛의 방안에 놓여있었던 흰색 침대.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영민에게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해주셨던 아버지.

그런데 그 아버지가 그 하얀침대의 위에서 영혼이 떠난 채로 굳어져서 누워계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귀에 환청같이 들렸던 엄마의 흐느낌 소리.

그것은 까무룩 까무룩 그의 영혼을 빼앗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산을 넘자 바로 학교가 나타났고 영민은 학교가 보이자 재빨리 옷소매로 눈물을 훔친다.

어느새 엄마와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저기가 네가 다닐 학교다."

오만철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저 지나가는 말투로.

영민은 그런 오만철씨의 말에 상관없이 자신의 감정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5-3'란 표말이 붙은 교실로 영민은 들어갔고,

모든 반아이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통에 얼굴이 빨개졌다.

선생님은 영민을 교단앞에 세우고는 소개를 했다.

"이번에 전학온 고영민이에요. 모두 친하게 지내도록 해요."

영민은 선생님이 자신을 소개하는데도 그저 고개만 숙인채로 굳어진 듯이 서있었다.

"저기 종철이 옆자리가 비었네. 저리로 가서 앉도록 해요."

영민은 거의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그쪽으로 가다가 그만 책상에 부딪히고 말았다.

까르르!

아이들이 한꺼번에 웃어댔고, 그때문에 영민의 얼굴이 더 붉어져 버렸다.

그는 일어서려다가 자신이 부딪혔던 책상에 앉아있던 애의 시선과 마주쳤다.

눈동자가 맑았고 미소를 띠고 있다.

영민은 후다닥 일어서서는 재빨리 종철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교실이 다시 조용해졌고 영민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아침 4시간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채 후딱 지나가 버렸다.

따르르 딸딸 종이 울리고, 아이들은 점심시간이 즐거워서 아우성을 쳐댔다.

도시락을 꺼내는 아이들의 모습이 마치 영민에게는 현실 저쪽에서 일어나는 일인 양 느껴진다.

교실안은 순식간에 김치냄새로 가득찼고,

도시락을 못싸온 애들은 양호실 옆으로 부지런히 달려간다.

양호실 옆에 거칠게 만들어진 수돗가에서 양호선생의 지휘를 받으며 몇명의 아이들이 옥수수 빵을

나누어 주고 있다.

옥수수로 만들어진 빵.

입안에서는 다소 거칠게 느껴지지만 배를 부르게 할 수는 있는 것.

영민의 입속에 침이 고인다.

하지만 영민은 그나마도 얻어먹을 수 없었다.

전학온 날이기에 누구도 자신의 가난과 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가 없기 때문이다.

영민은 허적허적 수돗가로 걸어가 물을 숨이 막힐 정도로 마셔댔다.

갈증보다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그리고는 그래도 배가 고파서 빵 나누어주는 곳을 물끄머니 바라본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얼굴이 화끈하며 황급히 시선을 떨구었다.

그애였다.

처음 교실에서 책상에 부딪혔을 때 영민에게 화사한 미소를 보여주었던 애.

영민이 얼굴이 뜨거워진 것을 감추며 등을 돌리는데 그애가 영민을 아는지 소리친다.

"고영민!"

하지만 영민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저 우뚝 서있기만 했다.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5학년 3반 고영민!"

힐끗 쳐다보니 그애가 다가오고 있는데 그애의 하얀 손에는 빵 한 덩이가 쥐어있다.

갑자기 수치감이 밀려들었다.

무엇이 창피한 것인가?

가난하다는 것이?

그는 후다닥 앞을 보고는 총알같이 튀어 달아났다.

그의 등뒤에서 '5학년 3반 고영민'이라는 소리가 마치 흉기처럼 영민의 등을 노리고 달려드는 듯했다.

그는 무작정 앞으로 달리기만 했다.

땀이 비질비질 배어나오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마지막 시간에 그저 앉아 있는데도 다리가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 같다.

하지만 영민은 이를 악물고 참는다.

참는 것이 아이들 앞에서 창피해지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종례가 끝나고 영민은 아이들에 묻혀서 교실을 빠져나왔다.

앉아있는 것보다 누워 있는 것이 조금 편했다.

혜진이 오후반이기에 영민은 몇시간을 더 기다려야만 한다.

하긴 집에 먼저 간다고 해도 할 일이 없으니 혜진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늘에 실구름이 하영청 흘러가고, 높이 솟아있는 미류나무에는 참새들이 까불어대고 있다.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영민의 눈이 스르르 감겼고 깜빡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엄마는 왜 안오실까?

며칠 있으면 온다고 했는데....

영민의 눈에 눈물자욱이 한없이 길게 이어진다.

영민은 깜박 잠이 들었다가 인기척에 후다닥 일어났다.

갑자기 윗몸을 일으키니 노랑 현기증이 마치 불이 일듯이 팟팟하고 인다.

그리고 그 노랑 불빛 안으로 한 얼굴이 마냥 웃고 있었다.

"고영민, 뭐하니?"

전혀 요즈음 아이들같이 생기지 않는 여자애.

영민이 아는 아이들은 모두가 얼굴에 버짐이 두서너군데씩 피어있고,

손과 발은 때국에 절어 꾀죄죄 했고,

머리는 막지어진 제비집처럼 부스스 헝클어져 있었다.

그리고 더덕더덕 기운 옷을 입고는 헤 웃을 때는 누런 이빨이 보이는 그런 아이들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앞에서 웃고 있는 애는 마치 갓 지어낸 하얀 쌀밥처럼 뽀얀 살결에,

머리는 가지런히 빗어 땋았고 옷은 마치 동화에서나 나오는 듯한 옷을 입었다.

"아까 왜 도망갔니?"

이렇게 말하면서 여자애는 스스럼없이 영민의 옆에 앉는다.

영민은 흘끗 그애를 옆눈으로 보다가 시선을 하늘에 고정시킨다.

"진윤경이야, 나는..."

영민은 자꾸 하늘이 자신에게로 가까이 다가온다는 느낌에 눈을 깜박거려본다.

그것은 아주 지독한 현기증이 밀려오는 것이다.

눈동자를 어느 한곳에 고정시킬 수도 없게끔 다가오는 아주 지독한 아찔함.

"자, 이것 먹어."

윤경이 무엇을 먹으라고 하는 순간 영민은 잠시 창피함을 잊고

윤경이가 내미는 것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수치심.

뭔지 모르지만 굴욕적인 느낌이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나마 보았던 윤경이의 손에 있던 것은 쉽사리 영민의 머리속에 지워지지 않았다.

윤경의 손에 있었던 것은 빵이었다.

그리고 거친 옥수수빵이 아니라, 왠만해서는 구하기도 힘든 카스테라였다.

전학오기 전 학교에서 가장 부자라는 영길이가 가져왔던 그 카스테라라는 빵.

그때 영길이는 으스대면서 반아이들에게 그 빵을 자랑했고

아이들은 갖은 짓을 해서 영길이에 마음에 들어 빵을 손톱만큼씩 얻어먹었었다.

그런데 그렇게 얻기 힘든 카스테라가 통째로 영민에게 내밀어진 것이다.

하지만 영민은 머뭇대면서 손을 내밀지 않는다.

윤경이가 기다리다 못해 카스테라를 영민의 얼굴앞에 드민다.

"괜찮아, 먹어."

영민이 주저주저 손을 내밀다가 자신의 손이 윤경의 손에 비해 너무나 더럽다는 데에

다시 치욕감을 느낀다.

그때 윤경이가 그 마음을 알았는지 재빨리 그의 손에 빵을 쥐어주었고,

영민은 천천히 입에다 그것을 물어본다.

향긋한 향기가 입앗에 가득찼다.

그리고는 영민은 일단 입에 빵을 물자 허겁지겁 빵을 씹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는지 먹는 것을 멈추고는 윤경을 쳐다보았다.

윤경은 그저 하늘가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고 영민은 재빨리 남은 빵을 주머니에 꼬깃꼬깃 집어넣었다.

윤경은 파란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다.

이름모를 새가 끼욱끼욱 울면서 날아가고 있다.

"어디로 가고 있을까?"

윤경은 혼자말처럼 중얼댔고, 영민이 그것을 같이 보고 있다가 무심코 대꾸한다.

"대택."

"응?"

윤경이 놀라서 영민의 얼굴을 쳐다보자 영민이 깜짝 놀라 입을 황급히 다문다.

"대택?"

영민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그대로 다른 곳만을 쳐다보고 있다.

새들이 털을 벗는 곳.

세상의 온갖 새들이 모두 이곳에서 묵은 털을 벗고 새털로 갈아 입는다는 곳.

그 아래에는 쥐와 새가 같이 묵는 동굴이 있고, 모든 현실을 잊어버릴 수 있는 곳.

영민은 이름도 모를 산꼭대기에서 땀을 식히는 사이에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그곳을 기억하고 있다.

영혼이 새롭게 되는 세상의 끝에 있는 곳이 대택이라고 말씀하셨던 아버지.

아버지를 생각하자 영민의 두눈가에 눈물이 주욱 흘러내린다.

"아니, 고영민, 너 우니?"

윤경이 깜짝 놀라서 소리치고, 영민이 후다닥 정신이 든다.

옷소매로 허겁지겁 눈가를 닦아내는데 눈앞에 윤경의 손이 다가왔다.

영민은 자신이 잠시 현실을 잊고 아버지를 생각하다가 눈물을 흘렸다는 데에 심한 당혹감을 느끼는데,

윤경이의 손수건이 영민의 눈자위에 눌러진다.

"닦아."

영민이 후다닥 얼굴을 치운다.

하지만 윤경은 영민에게 한사코 손수건을 건넸다.

손수건을 받아드는 영민의 손이 약간은 떨렸고, 손수건에서는 향기가 풍겨나온다.

아스라이 부서지는 가을 향이.

영민이 그것을 받아들고 눈물을 닦아내자 영민의 얼굴에 묻어있던 때가 하얀 손수건에 묻어났다.

영민은 손수건이 더러워지자 미안했고 그 더러운 것을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윤경은 그것에 개의치 않다는 듯이 영민에게 손수건을 되돌려 받는다.

코스모스가 빙둘러 수놓아진 손수건의 가장자리에 듬뿍 영민의 때가 묻어나 있다.

"대택이 어딘데?"

윤경이 손수건을 집어 넣으며 이렇게 물었지만 영민은 기어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열면 아버지의 영상이 다시 잡혀질 것 같기 때문이었다.

신기하게도 아무말도 없이 앉아만 있는데도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파아란 가을하늘이 황금빛 햇살을 마구 교정에 쏟아부었고,

그 황금빛 햇살에 물든 고추잠자리 몇마리가 철조망 끝에 날개를 늘어뜨리고 명상에 잠겨있었다.

잠자리 날개 가장자리는 마치 오래되어서 부서진 책상 모퉁이 처럼 너덜거렸다.

아마 늦가을의 무게가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곧 겨울이 오게되면 그 마지막 남은 날개조차도 부스러져 버리고,

잠자리들은 세상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리라.

그리고 세상은 온통 잠자리의 날개짓을 닮은 눈송이로 가득찰 것이다.

따르릉 딸딸. 따르릉 딸딸.

마지막 시간의 종이 울리고 영민의 상상은 모두 다 현실로 초점이 맞춰졌다.

아이들이 부지런히 나오는 것이 보이고,

그중에서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있는 혜진이의 모습이 보였다.

"오빠!"

혜진이는 윤경이가 옆에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바삐 영민에게 뛰어왔다.

혜진의 손에는 거친 옥수수빵 반덩이가 들려져 있었다.

아마 급식을 받고 반은 영민을 위해 먹지않고 남겨둔 것이리라.

혜진은 급히 영민에게 다가와서 빵을 내밀었다.

"배고프지, 오빠?"

영민은 때가 꼬질꼬질 낀 손으로 자신에게 내밀어지는 빵을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바라다 보고만 있다.

옆에 있는 윤경이에게 보이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눈치가 이상했든지 혜진이가 빵을 내밀다가 고개를 들어 윤경이를 보았다.

"안녕."

윤경이 스스럼없이 인사를 하는데 혜진이의 얼굴이 빨갛게 물든다.

윤경이의 외모에 비해 형편없이 더러운 자신의 모습때문이던가.

영민이 그런 혜진이의 태도에 대뜸 말했다.

"가자, 혜진아."

혜진이 자신의 손에 든 빵을 거두면서 영민의 뒤를 따랐고,

영민은 뜨거워진 얼굴을 숨기려고 마구 앞으로 걸어갔다.

철조망이 뚫어진 곳을 통해 영민과 혜진이 거짓말처럼 빠져 나갔고,

윤경은 그저 그들의 뒷모습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좁은 길을 지나치자마자 영민이 주머니를 부스럭거려 카스테라 부스러기를 꺼냈다.

남은 카스테라는 영민의 호주머니에서 온통 다 찌그러져 있었다.

"혜진아, 이거 먹어."

혜진이 다 찌그러진 카스테라를 보고 눈이 휘둥그래진다.

"야, 카스테라네."

혜진이 그것을 받아들고는 허겁지겁 입에다 집어 넣는다.

입안에서 향긋한 바닐라 향이 스르륵 혀끝에 녹아든다.

영민은 마구 좋아하는 혜진이의 얼굴을 보자 자신도 좋아서 웃으면서도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때 혜진이 아직도 손에 들고 있던 거친 옥수수빵을 영민에게 내밀었다.

"오빠도 이거 먹어."

영민은 혜진이 건네주는 빵을 잡아서 우걱우걱 입안에 우겨넣었다.

시장기가 갑자기 더 심하게 밀려왔다.

빵을 허겁지겁 먹다보니 목이 메었다.

영민은 캑캑대며 개울가로 달려가서 개울물의 가장자리에서 물을 손으로 떠먹었다.

혜진이 옆으로 다가와서는 저도 손으로 물을 떠먹는다.

"야, 시원하다."

영민이 이렇게 말하면서 냇가에 자리를 골라 주저 앉았다.

혜진이도 쪼르르 달려와 영민의 옆에 앉는다.

"오빠, 그 언니 어떻게 알았어?"

"누구?"

"아까 그 언니 말이야."

"아, 그 애. 진윤경이라는 애. 같은 반이야."

가을 하늘에 윤경이의 얼굴이 스르륵 새겨진다.

왜 그애의 눈동자는 그렇게 강렬하게 영민의 가슴에 새겨질까?

"그래에. 그런데 오빠, 그 언니 누군지 알아?"

누군지 어떻게 알겠는가.

처음 간 학교인데.

"그 언니네 되게 부자래."

부자?

"그 언니네 아버지가 무지 높은 사람이래서 교장선생님도 쩔쩔맨대."

혜진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확실하게 잡혀오지가 않지만,

그 의미는 아마도 저 파란 가을하늘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산길 가장자리에는 머리가 벗겨진 아저씨의 반들거리는 대머리처럼,

머리가 툭불거져 나온 도토리들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다.

영민은 그것을 주워서 혜진에게 하나를 주고 자신도 하나를 집는다.

도토리는 이미 영글어져서 모자처럼 생긴 받침이 툭하고 떨어져 나갔다.

영민은 그 반들거리는 도토리를 입에다 물고는 깨물었다.

딱하고 깍지가 깨어졌고, 영민은 그것을 입에서 꺼내 깍지를 깐 다음에 혜진에게 넘겨준다.

혜진은 아직도 다 없어지지 않은 속껍질을 손으로 벗겨내다가 그대로 입에다 넣어서는

으드득하고 씹어본다.

"아이 텁텁해."

영민도 하나를 까서 입안에 넣고 씹었다.

씁쓸텁털한 맛이 입안에 침을 말려버렸다.

그러나 그 아리한 맛은 배고픔보다는 참기가 더 쉬웠기에, 영민은 도토리를 계속 주워먹는다.

"오빠, 우리 딸기 찾아볼까?"

도토리와는 달리 딸기는 산으로 조금 더 들어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길근처의 딸기는 이미 익기도 전에 애들이 다따먹었기 때문이다.

작은 산이지만 혜진이가 올라가기에는 조금 험했다.

영민은 혜진이의 손을 잡아 끌면서 허덕허덕 산길을 오른다.

이렇게 산길을 오를 때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영민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산에 데리고 다녔던 아버지는 영민이가 산길을 오르지 못해 허덕일 때

이렇게 손을 잡아서 끌어주곤 했었다.

그러다가 그것도 힘들어서 걷지 못할 때면, 아버지는 달랑 영민이를 안아 등에다 업고 가곤 했었다.

아버지의 등의 따사함이 아직도 영민의 뺨에 남아있는데 아버지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시는 것이다.

이 없었다.

보통 때는 지천으로 깔려 있는 것이 산딸기인데, 어쩌면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영민은 혜진이에게 알갱이가 툭툭 불거진 새빨간 산딸기를 한손가득 따주고 싶었는데,

하나도 찾을 수 없자 시무룩해 졌다.

그러나 혜진이는 무엇이 좋은지 산비탈을 깡총깡총 뛰며 뛰어 다녔다.

노을이 밀려오고 있다.

멀리 아득한 산등성이에서 시작된 노을은 아주 짙은 황금색으로 빛났다.

영민은 그 노을을 보면서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지그시 눌러본다.

무언가 가슴 속에서 툭 가슴을 풀어헤치며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득한 그리움이 영민의 가슴에서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혜진이 영민의 그런 모습을 보고서 눈물을 흘린다.

"오빠, 또 엄마 생각하지?"

그말에 영민은 그만 주루룩 눈물을 흘려 버린다.

어느 샌가 감정이 목구멍의 울대를 부여잡고 있었다.

저녁은 마치 자신의 힘을 세상에 강요하기라도 하듯이 모든 것을 밀어내며 어둠을 심는다.

영민은 이미 어둑어둑해진 산길을 혜진이의 손을 잡고 허둥지둥 내려왔다.

늦가을의 저녁은 시작했는 듯 하더니 벌써 밤에 밀려 멀리로 달아나 버리고,

산길은 때가 이른지 모르고 나온 반달에 의해 희미하게 밝혀졌다.

영민은 너무 늦었기에 혼날까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뚝방을 지나는데 혜진이가 무서운지 영민에게 바싹 달라 붙었고,

시꺼먼 냇물이 으스스하게 달빛을 반사해내고 있다.

"오빠, 무서워."

영민이 비로소 혜진이의 손을 잡아주었고,

혜진은 아직도 등뒤에서 시꺼먼 무언가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같아 무서워 죽을 것만 같아서

영민의 손을 놓칠세라 꼭 잡고 부지런히 영민을 따랐다.

냇물 반대편에서 어두침침한 등불이 띄엄띄엄 켜져있다.

긴다리를 지나고 무허가 판자촌 동네로 들어서자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의 부산한 움직임이

눈에 띤다.

영민도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는지 걸음을 늦추었고 혜진이의 꼭 잡고 있던 손도 놓았다.

밤은 아이들의 술래잡기 공간이다.

술래는 약간 기분나쁜 음성으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열번 외쳐댔다.

백을 셀 때까지 아이들이 다 숨어야 했는데, 백을 세면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에,

'하나, 둘 ...'하고 세는 것보다 '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열번을 하고 찾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영민은 그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하는 소리가 마치 영민이는 영원한 술래라고 소리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영민은 방문앞에서 버티고 서있는 큰어머니의 무서운 얼굴과 마주쳐야만 했다.

혜진이가 총알처럼 튀어나가 자기엄마를 막아섰지만

큰어머니의 손에 우악스럽게 들려있던 싸리빗자루가 냅다 영민에게 날아왔다.

"이 못된 놈이 어딜 쏘다니는 거야! 어린 혜진이까지 꼬여서!"

등짝이 화드닥 불이 붙는 듯이 화닥거렸고, 영민은 그 아픔에 못이겨 바닥에 주저 앉아 버린다.

"이런 나쁜 호로아들 녀석!"

빗자루가 사정없이 영민에게 날아왔고, 영민은 그대로 머리를 감싼채로 죽은 듯이 엎어져 있다.

혜진이가 악을 쓰면서 제엄마에게 매달렸지만 혜진엄마는 제 성에 못이겨서 마구 빗자루를 날려댔다.

영민은 빗자루로 흠씬 두들겨 맞으면서 어디선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리가 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은 술래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아주 암담한 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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