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그리운 세월

01. 마법의 물

오늘의 쉼터 2015. 8. 29. 11:31

그리운 세월


01. 마법의 물

 

황혼은 여러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
황금색 벌판을 아득히 덮을 수 있는 포근한 날개.
냇물에 닿았다가 포르릉 떠오르는 탄력있는 날개.
그리고 뚝방의 사면으로 비스듬히 미끌어지다가 대지에 안주하여

밤을 받아들이는 고요한 날개들을 ....
멀리서 기차소리가 덜그럭거리며 긴 다리를 몽롱한 여음에 취해 건널 때,
그 소리의 아득함에 정신을 빼놓으며, 얼뚱한 눈망울만 굴리던 황소 한 마리가,
문득 황혼의 서러움에 젖어 '음-머'하고 긴 울음을 토해 놓는다.
한낮의 따가운 햇살이 좋아 마냥 나뭇가지에 앉아 졸기만 하던 고추 잠자리들의 퇴색한 날개가,

깊어가는 가을 바람에 스르르륵 녹아 내릴 듯이 너울거리고,

어디선지 이른 풀벌레 소리가 쓰르륵 쓰르륵 황혼에 춤을 추어댄다.
황혼과 갈바람에 일렁이는 누렇게 익은 벌판의 벼이삭들은 금방이라도 탈탈 털면

손으로 부벼서 입안에 넣어 뽀드득 뽀드득 먹을 만도 한데,

벌판 한가운데 서있는 허수아비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눈을 부릅뜨고 시위를 하듯이 몸을 일렁인다.
벌판 뒤에 불쑥 솟아오른 뒷산의 산그림자가 마냥 길어만 지고,
뚝방 위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어느덧 다 사라졌을 때,
아이들이 놀다 그려놓은 땅위에 땅따먹기 그림들이 침침한 황혼이 지면서 그 의미를 잃어갈 때,

냇물 반대편에는 호롱불들이 눈을 비비면서 세상에 등장한다.
영민은 아이들이 다 떠난 뚝방에 홀로 앉아,
황혼빛이 회색으로 변해 스러져 가는 냇물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강 저편에서 끼룩대는 새소리가 왠지 가슴을 저며대는 것 처럼 아려온다.
영민은 아이들이 놀다가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돌더미에서

거의 네모나게 생긴 작은 돌 하나를 주워들었다.
땅따먹기를 할 때 말로 쓰여졌던 것일게다.
그는 그 말을 이미 보이지도 않는 땅바닥 그림 위에 놓고는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서 튀겨 보았다.
그저 의미도 없는 행동일 뿐.

하지만 그는 하염없이 쓸데없는 짓을 한다.
그러다가 어둠에 묻혀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그만 눈물을 주루룩 흘려 버렸다.
등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마치 엄마가 불러주었던 노래 소리같았기 때문이다.
엄마야 누나야 가앙변 사알자.

들에는 반짝이는 그음 모랫빛,

뒤인문 밖에는 ... ....
영민은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눈물을 닦아 버린 후

다시 몸을 돌려 강물쪽으로 앉아 하늘을 바라다 본다.
아득히 높아만 보이는 먼 하늘에는 이제 막 빛을 발하기 시작한 달빛을 받으며

기러기 한 마리가 하염없이 날아만 간다.
무리도 없이.

길을 잃었는가?
영민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언제쯤 오시려나?
내일쯤이면 맛난 것 잔뜩 사들고 오시려나?
영민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인다.
그를 못견디게 하는 것은 배고픔이 아니었다.
그가 못견디는 것은 다만 엄마가 안오신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이 영민의 가슴 속에서 절절 울려대서 그를 슬프게 만드는 것이다.
영민은 고개를 두 무릎 사이에 푹 파묻었다.
그 바람에 그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와락 떨어졌고,
그것이 서러워선지 영민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고인다.
그의 귀에 그저 처량한 물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마치 아득히 꺼져가는 자장가 소리처럼 들려왔다.
뚝방의 왼쪽으로는 어둠에 가려져 침침해져 가는 논들이 새르륵 새르륵 바람소리를 내고,
오른쪽으로는 검은 물줄기가 번들거리는 달빛을 받아 희번득한 눈을 뜨고 영민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모두 떠난 뚝방에서 영민은 입술을 꼭 깨물며 무서움을 참으려 노력하다가,
벌떡 일어서서 후다닥 뛰어갔다.
누군가가 뚝방의 끝쪽에서 허여멀건한 모습으로 다가와서,
그 긴손을 뻗어 영민의 뒷덜미를 움켜 잡을 것 같은 느낌때문에 영민은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렸다.
긴 다리를 건널 때까지도 영민은 무서움에 빠져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빨리 가야한다는 생각 뿐이 없었다.
하지만 다리를 건넌 후에,
그의 가슴에는 허전함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이 절절히 차오른다.
집이 없는 것이다.

엄마가 있는 집.
그 포근한 엄마 품같은 안식처가 이제는 없다는 생각이 퍼득 든 것이다.
그저 무서움때문에 달아나 버렸던 엄마의 생각이 다시 영민의 머리속에 들어서면서,

영민은 두눈이 뜨거워지는 것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집 안을 살피니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이미 모두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영민은 그저 주눅이 든 강아지 마냥 빌빌거리며 다 허물어져 가는 작은 골방으로 다가간다.
창호지가 아닌 신문지를 덕지덕지 발라놓은 문에는

어디서 주워 달았는지 자그마한 손고리가 녹을 뿜으며 달려 있다.
문옆에 벽에는 구멍이 나고 닿아빠진 키가 걸려있고,
그 위쪽으로 아무 판자든지 대충 이어놓은 지붕이 뒤틀리고 비틀린 채로 덮혀있다.
그리고 달빛을 받으며 낮은 지붕 위에 올려져 있던 걸레조각이며,
병부스러기 쓰레기 등속들이 금방 고약한 냄새를 풍겨댈 것 같았다.
다 허물어진 판자로 엮어진 담 아래에는 어디서 주워왔는지 쓸모도 없는 잡동사니들이

가득 늘어져 있고,
그 너머로는 코가 닿을 듯이 마주 붙어있는 허름한 옆집이 내다 보인다.
그 집도 영민이 지금 서있는 집과 전혀 나을 것도 없이 다 쓰러져 가는 하꼬방 집이었다.

아니 비단 이 두집만 닮은 것이 아니라, 이 동네에 모든 집들이 다 이렇다.

손바닥만한 땅떼기에 이쪽 저쪽에서 주워온 나무판자,

사과상자, 브로크, 돌들을 이용해서 아무렇게나 얼기설기 만들어지니 집들.
문이 없으면 그저 가마니떼기를 주워와서

문위 대문에다 박아 걸어두면 그것이 문이 되는 그런 집들이었다.
배가 뽈록 튀어 나오고, 얼굴에는 때국이 꼬질꼬질 끼어있고,
버짐이 마치 분장처럼 얼굴에 퍼져 있는 아이들이 아무 데나 싸놓은 오물이 어디에나 널려있고,
곳곳에서는 술취한 어른들이 방뇨한 흔적에서 나는 지린내가 동네 전체에 배어있다.
영민이 살그머니 문을 여는데 그 소리에 맞추어서 저쪽 방에서 덜컹 문이 열리고,
영민은 그 소리에 가슴이 덜렁 내려 앉으며 정신마저도 아득해 지는 것 같았다.


"누구냐? 영민이냐?"


"예."


영민의 대답은 거의 들리지도 않을 듯 조그맣다.
"어린 놈이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 거냐?"
쇳소리처럼 날카로운 여자의 톤높은 목소리가 그대로 영민의 가슴에 들이 박힌다.
영민은 고개를 숙이고 그저 문고리만을 잡고 있다.
여자의 꾸지람은 독하게 계속되었지만 영민은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져만 있다.


"이제 그만 하구료."


굵직한 목소리가 여인의 말을 막았고,
그러자 여인의 독품은 화살은 남자에게로 돌아갔다.

 
"당신이 저런 애비 에미없는 놈을 맡은 게 잘못이란 말이에요."


남자가 으흠하고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리고,

영민은 슬그머니 방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여인의 말소리를 뚫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밥은 먹었느냐?"
밥을 먹을 데가 없지 않은가?

누가 밥을 준단 말인가?
그러나 영민은 곧대로 말할 수가 없어서 그저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네, 큰아버지."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여인이 더 악을 바락바락 써댄다.


"아니, 저런 호로아들놈이 어디서 무엇을 훔쳐 먹었는 갑네!"


여인은 자신의 말에 더욱 악이 받쳐서 소리치고,
그것을 막으려는 듯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여 들어가 자거라. 내일은 학교 가야지."


영민은 대답도 못하고 그저 방으로 스며들 듯이 들어섰고,
여인의 악다구니는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었다.
영민이 그저 웅크리고 있는 중에 배에서는 먹을 것을 달라고 꼬르륵 쪼르륵 소리가 요란하다.
그 소리는 너무나 크게 들려 마치 좁은 방안이 꼬르륵 소리로만 가득차는 것 같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그는 얼른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하지만 눈물은 어김없이 눈자위로 흘러 내린다.
약해지면 안돼.

엄마가 올 때까지 참아야만 해.
영민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하며 입술을 꼭 깨문다.
그때 그의 코에 어떤 냄새가 맡아졌다.


응?
영민이 놀라 눈을 뜨니 그의 눈 앞에 어스름한 물체가 보인다.


"오빠, 배고프지? 이거 먹어."


흑.
왜 눈물이 날까?
작은 혜진의 손에 들려져서 영민에게 내밀어지는 작은 감자 두 알에

영민은 기어이 참지 못하고 울어버리고 말았다.


"먹어, 오빠."


혜진이 영민의 손에 그것을 쥐어 주었고,
영민은 아직도 남아있는 따스한 감자의 온기를 느낀다.
감자 두 알로 허기진 배를 채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아무 것도 먹지 않았던 것보다는 한결 배속이 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영민은 손가락에 묻은 감자부스러기를 입에 넣고 쫄쫄 빨다가 혜진을 쳐다본다.


"오빠, 우리 엄마 너무 미워하지마."


미워해?
누구를?
영민이 아무 말도 없이 벌러덩 자리에 드러 누워 버렸다.
꼬질꼬질 더러운 이불은 한번도 솜을 켠 일이 없는지

그대로 이곳 저곳에 솜이 뭉쳐서 울룩불룩했다.


"자자."


뚫어진 창문 신문지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고 있다.


"오빠가 이야기 하나 해줄까?"


혜진이 앉은 채 영민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옛날 어느 숲 속에 요정이 하나 살았습니다.

요정은 숲속에서 즐겁고 평화스럽게 잘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조용한 숲속이 갑자기 시끄러워진 것이에요.

요정들은 놀라서 모두 숨어 버리고, 짐승들도 모두다 달아나 버렸어요.

풀벌레들도 풀밑으로 숨고 새들은 모두가 하늘 멀리로 날아가 버렸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몇사람이 말을 타고 나타났어요.
손에는 활을 잡고 등에는 화살통을 멘 사람들은 바로 사냥을 나온 이웃 나라의 왕자님 일행이었어요.

다른 요정들이 무서워서 모두 숨어 버렸는데도

이 요정은 몰래 이 왕자님 일행을 지켜보았답니다.

그런데 맨 앞에서 사냥을 하는 왕자님을 본 순간

요정은 가슴이 멈추는 것 같아서 그대로 하얗게 얼어 버렸어요.
요정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가슴은 심하게 뛰어댔어요.
왜냐하면 왕자님의 모습은 생전 처음 보는 멋진 것이었기 때문이었어요.
요정은 자신도 모르게 왕자님이 사냥하는 모습을 보려고 몰래 따라 다녔어요.
그날부터 요정은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고는 왕자님의 성근처를 배회했어요.
하지만 왕자님의 앞에 나설 수는 없었답니다.

왜냐하면 요정은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때부터 요정은 자신이 사람이 아닌 것을 너무나 슬퍼했고,
그래서 자신이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바랬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요정이 사람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도 요정은 포기하지 않고 매일 매일 간절히 하늘에 기도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요정의 소망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아주 오랫동안 이렇게 요정은 기도했어요.

어느 날이었어요.
왕자님의 나라가 시끌법적해 졌답니다.

왜냐고요?

바로 왕자님이 왕자비를 간택한다고 했기 때문이에요.

요정은 그말을 듣고는 가슴이 갈가리 찢겨지는 것 같았어요.
여태까지 기도한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때 요정의 머리에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바로 바위산에 살고 있는 마녀가 생각난 거에요.
요정들이 무서워서 절대로 가까이 가지 않는 바위산에는
요정들의 영혼을 잡고서 소원을 이루어주는 아주 흉악한 마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요정이 일단 마녀를 생각하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어요.
오로지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만 믿은 거에요.

요정은 무작정 바위산을 향해 달렸답니다.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에요.
세상이 캄캄하게 변하고 하늘에는 온통 번개가 와르릉 쿵쾅대고 있었어요.
검은 구름이 마치 악마의 형상으로 변해갔고,

세상은 온통 마녀의 손아귀에서 쥐어져 있는 듯한 험악한 모습이 되었어요.

마녀가 하늘을 향해 깔깔깔 웃어댔고,
요정은 무서워 부들부들 떨어대면서도 자신의 소원을 말했습니다.
"사람이 되고 싶다고? 이히히히!"
마녀의 깔깔 웃어대는 커다란 입으로

요정은 그대로 삼켜질 것 같다는 생각에 마냥 덜덜 떨고만 있었어요.
마녀는 온갖 추악한 것들을 섞어서 약을 만들었어요.

약은 마치 펄펄 끓어오르는 지옥의 진흙탕처럼 끓어 올랐지요.

마녀는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답니다.


"이 약은 한 모금을 마시면 사람이 되고,

두 모금을 마시면 아름답게 변하지. 히히히.
만약 인간이 한 모금을 마시면 사랑하게 되고,

두 모금을 마시면 영원히 네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히히히히"


마녀는 그 길다란 손톱으로 요정을 가르키며 낄낄댔어요.
"자, 이제 네가 나에게 약속을 해줘야 해.


네가 죽은 후에 네 영혼은 내 것이라고. 이히히히."


요정은 너무도 무서웠지만 왕자님의 모습이 떠올라서 마녀에게 약속을 했어요.
영혼을 주겠다고.
바람이 몹시도 부는 날 밤에 마침내 요정은 한송이 꽃처럼 다시 피어났어요.
온몸이 갈가리 찢길 것 같은 아픔을 이겨내고는,
온 몸의 피부가 모두 생으로 벗겨지는 듯한 아픔을 겪고 난 후,
요정은 한 명의 여인으로 다시 태어났답니다.
요정은 새록새록 갓 피어난 어린 아이의 살결같은 자신의 피부를 만져 보았어요.

꿈이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요정은 이제 한명의 인간이 된 것이었어요.
요정은 너무나 기뻐서 눈물을 흘렸답니다.
그녀는 이제 너무나 가슴이 부풀어서 미칠 것만 같았어요.
왕자님을 만날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던 것이에요.
하지만 그 마음은 금방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왕자님을 아무 때나 만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왕자님을 만나기 위해 영원히 살 수 있는 요정의 몸을 벗고 인간이 되었는데,
정말로 왕자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어요.
그래서 그녀는 날마다 눈물만 흘리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드디어 왕자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왔어요.
왕자님이 다시 사냥을 하려고 요정이 있는 숲속에 들어온 거에요.
여인이 된 요정은 왕자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오자

가슴이 너무나 뛰어서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어요.
그녀는 마법의 물을 한 모금 더 마셨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왕자님이 노루를 쫓다 그만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요정의 집까지 왔어요.
그리고는 심한 갈증때문에 물이나 한잔 얻어 마실까하고 요정의 집으로 들어왔다가

그만 요정을 보고는 딱 얼어 붙었어요.
여태까지 자신이 본 어떤 여인도 이렇게 아름답지는 못했기 때문이에요.
왕자님은 입이 얼어붙어서 말도 하지 못한 채로 여인만은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요정은 그때 왕자님에게 물 한잔을 드렸습니다.
바로 마법의 물이었어요.

인간이 한 모금을 마시면 사랑에 빠지는 그 물을 말이에요.

벌써 요정에게 마음을 빼앗긴 왕자님은 마법의 물을 마시고는

더욱 더 요정에게 흠뻑 빠지고 말았습니다.
요정은 왕자님을 위해 정성껏 요리를 만들고 집을 가꾸었어요.
요정에게 반한 왕자님은 모든 것을 잊은 채 요정의 집에서 매일매일을 즐겁게 지냈습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날들이 그저 하염없이 지나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왕자님이 갑자기 자신이 두고 온 성을 기억했어요.
그리고 자신이 왕자비와 결혼하기로 되어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거예요.
그 생각이 나자 왕자님은 안절부절했고,

그것을 알아챈 요정은 허겁지겁 왕자님에게 다시 한 번 마법의 물을 마시게 했어요.
인간이 두 모금을 마시면 영원히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마녀의 말을 기억하면서 말이에요.
왕자님은 모든 것을 다 잊고서 요정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요정은 마녀의 마법에 정말로 신기해 하면서도

자신이 마녀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사실에 두려워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왕자님이 무엇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어요.
요정이 무언가 하고 다가가 보니, 그것은 한송이 아주 예쁜 꽃이었어요.
왠일일까요?

요정은 왕자님이 꽃에 취해 있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어요.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왕자님이 취해있다는 사실에 질투를 느낀 거지요.
요정은 자신의 아름다움이 시들어 간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자신이 꽃보다 아름다와져서

왕자님의 마음을 꽃에게 빼앗기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했을 거에요.
그녀는 더 아름다와지기 위해 마법의 물을 한 모금 더 마셨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쿠당탕 소리가 나면서 번개가 쳤어요.
그리고 그녀는 목구멍뿐 아니라 온몸에 극심한 아픔을 느꼈어요.
요정은 마법의 물을 두 모금까지 마셔야 된다는 것을 알았지,
더 마시면 안된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어요.
왕자님은 점점 추해져 가는 요정에게 마음이 떠나갔어요.
이제는 더 이상 왕자님은 요정을 사랑하지도 않고,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답니다.
요정은 왕자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자신의 얼굴을 점점 추해져 갔어요.

정은 그때 마녀의 말을 기억했어요.
인간이 마법의 물 두 모금을 마시면 네 곁에 영원히 있겠다고 했으니,
세 모금을 마신다면 정말로 영원히 안 떠날 거라는 생각이 든 거에요.
요정의 몸은 점점 이상하게 변해 갔어요.
온몸에서 피부가 마치 비늘이 벗겨지듯이 벗겨지고 있었답니다.
요정은 마지막 소원으로 하늘에 대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왕자님을 사랑한다고.

왕자님이 떠나지 못하게 해달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왕자님의 마음은 이미 돌아서 버렸어요.
참다못한 요정은 왕자님이 자는 틈에 마법의 물을 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왕자님의 입에다 마법의 물을 흘려 넣었답니다.


"하느님. 왕자님의 마음을 돌려주세요."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며 왕자님의 입에다 마법의 물을 흘려 넣었고,
왕자님은 잠결에 입으로 흘러 들어오는 마법의 물을 마셨습니다.
물이 왕자님의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갑자기 마법의 물이 시뻘건 불이 되어 왕자님의 배속을 태웠습니다.


아악! 아악!
왕자님은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놀라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요정이 까무라치게 놀라 왕자님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왕자님의 몸에서는 불길이 솟아올랐고,

왕자님은 불길에 싸여서 펄펄 뛰었습니다.
요정은 왕자님이 지르는 비명에 그대로 가슴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왕자님은 시뻘건 불덩이가 되어 타들어갔고,
요정은 그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자신의 두눈을 손가락으로 찔렀습니다.
그녀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 내렸고,
그녀의 손은 너무나 심한 고통으로 피부가 허물이 벗겨지듯이 문들어 졌습니다.

마침내 왕자님은 하나의 불이 되어 타올랐고,

그것을 보고 고통을 참지 못해서 온몸을 자신의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대는 요정이 너무나 측은해서,
하느님이 그녀가 쓰고 있는 사람의 탈을 벗게 했답니다.
사람의 탈을 벗은 요정은 한마리 나비가 되었어요.
그리고 그녀는 불이 되어 타고 있는 왕자님에게 달려들었어요.
활활타는 불은 나비가 된 요정의 온몸을 태워버렸답니다.
자신의 온 몸을 태워서 왕자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 후에도 나비들은 불만 일면 불로 날아들어서 사람들은 이들을 불나비라고 불렀습니다.
혜진의 눈에 눈물이 방울져 굴러내린다.
너무도 슬퍼서 가슴에 무언가가 콱하고 막힌 것 같은 느낌이다.


"이제 그만 자자."


영민이 이렇게 말했는데도 혜진은 마냥 쿨쩍거린다.
혜진의 쿨쩍거리는 소리를 마치 자장가처럼 들으며 영민의 눈으로 잠이 쏟아져 내린다.
혜진은 마치 자신이 그 불쌍한 요정이 된 양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떠돌고 있고,

들판 저쪽에서는 왕자님이 백마를 타고 떠나고 있다.
혜진은 그 왕자님이 떠난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프고 견딜 수 없어서 마냥 울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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