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그녀의 시간표

그녀의 시간표 43

오늘의 쉼터 2015. 6. 13. 16:25

그녀의 시간표 43

 

 

 

청진기를 벽에 대고 옆방의 동태를 살폈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그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희한하게도 그들은 상대방의 존재에 대해 놀라워하거나 당황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뭐야? 내가 문자를 보낸 걸 다들 눈치 챈 거야?

뭐, 어쨌거나 상관없다.

금사장과 홍지연의 계약이 무효임을 선포하는 것이 나로선 중요하니까.

 

좀더 시간이 지나고 조금 늦게 금사장이 나타났다.

잠시 후 그녀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제 슬슬 내가 나설 차례였다.

아자, 속으로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 느닷없이 멜로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징글벨 징글벨 징그으르벨. 아, 짜증나라.

하필이면 이때 전화벨이 울릴 게 뭐람.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얼른 휴대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마명태, 쾌걸조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아직 모르지?

내 그리로 곧 갈 테니까, 만나서 얘기해줄게.”

 

쌍둥이 중 한 놈이었다.

아아, 이를 어쩌지? 다행히 옆방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보는 눈들이 많은데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재빨리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쌍둥이가 문 앞을 지키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선언이고 뭐고 당장은 살아남아야 한다.

뒤도 안 돌아보고 비상계단 쪽을 향해 줄행랑을 쳤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문이란 문은 모조리 걸어 잠갔다.

그제야 그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 대신 그녀가 곤욕을 치르게 되는 건 아닐까?

불길한 예감은 다음날 고스란히 현실로 드러났다.

 

아직 사위가 어둠으로 진득한데,

수상쩍은 무리들이 요란하게 대문을 두들겨댔다.

집은 한옥 구조였고, 방문을 열고 나가 빗장이 걸린 대문 앞에 서서 조심스레 물었다.

 

“누…누구세요?”

 

“마명태씨 맞죠? 경찰입니다. 문 좀 엽시다.”

 

경찰이 왜…? 신분증을 확인하고서야 빗장을 풀어주었다.

그 순간 쏜살같이 들이닥친 두 사내가 내 몸을 제압했고,

다른 두 사내가 급히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번연히 방주인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그들은 구둣발로 여기저기 방안을 들쑤시고 다녔다.

야구방망이, 자전거체인, 한쪽만 남은 가죽장갑이 방바닥에 던져졌고,

곧이어 사직서와 러브레터, 그리고 그녀의 시간표가 발견되었다.

 

“러브레터를 보니 간절한 사랑이 결국 분노로 바뀌었다는 걸 알겠군.

사직서는 저주로 가득 찼는걸. 어라,

그녀의 시간표? 너 보통 놈이 아니구나.

아주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는걸. 마명태, 널 홍지연 살해혐의로 체포한다.”

 

“지연씨… 살해혐의요?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래요?”

 

“인정하지 못하겠다 이거야? 범행현장인 강변호텔 711호실,

 예약해놓고 넌 왜 거기에 없었지? 710호실에 모여 카드게임을 하기로 했는데

홍지연과 너만 안 왔다며? 아니지.

넌 잔머리를 굴려 홍지연을 옆방으로 불러냈고, 거기서 강간이 이뤄졌어.

너의 휴대폰 벨소리와 같은 멜로디소리가 들렸다고 동료들이 이미 증언했어.

강간 후 넌 뒷감당이 걱정됐겠지.

그래서 그녀의 목에 밧줄을 매달아 교살한 거야.

자살로 꾸몄으나, 우리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들은 아니지.

 

마명태, 솔직히 너 변태지? 자전거체인, 야구방망이, 가죽장갑…

너, 이래야 흥분되는 거 맞지? 근데 말이지, 청진기는 어디에 쓴 거야?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했던 거야?

어쨌거나 여기서 발견된 가죽장갑의 다른 한쪽이 청진기와 함께 현장에서 발견됐어.

체모와 정액, 수많은 지문도 발견됐지. 이래도 아니라고 발뺌할래?”

 

형사의 얘기대로라면 내가 그녀를 죽인 게 맞는데…

아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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