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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42

오늘의 쉼터 2015. 6. 13. 16:16

그녀의 시간표 42

 

 

 

 

 

억지요 협박이요 강짜였다.

어딘지 모르는 도로 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데,

홀연히 나타난 그녀의 차가 휙 지나치며 나를 픽업해갔다.

경험 있는 이들은 알겠지만,

술 취한 인간과의 정상적인 대화를 기대한다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발상이다.

나 역시 애초부터 할 말이란 게 있을 리 없었다.

나는 횡설수설했고, 취기를 무기로 나의 음흉함을 마음껏 발휘했다.

제법 오랫동안 실랑이가 벌어졌다.

급기야 지친 표정의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후회할 거예요. 날 원망하게 될 거라고요…”

 

“당신이나 날 원망하지 말아요.”

 

섹스와 술의 상관관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는가?

적당한 음주는 최음제로 역할하지만,

과음은 실제적인 섹스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더욱이 음주의 부작용 중 하나가 기억상실이다.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떴는데, 온몸이 쑤시고 저리며 도통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의사는 아니지만, 나는 근육통을 의심했다.

급작스런 근육통은 아마도 그녀와의 격렬한 운동이 원인일 것이다.

예부터 운동으로 뭉친 근육은 운동으로 풀어줘야 하는 법이다.

치료를 위해 나는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찾았다.

 

그런데 당연히 곁에 있어야 할 그녀가 웬일로 보이지 않았다.

설마 꿈? 순간 모든 현실에 물음표가 찍혀졌다.

머리를 쥐어짜며 기억을 리플레이 시켰지만 안타깝게도 떠오르는 영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젠장, 필름이 끊긴 것이다.

아아, 이런 억울한 일이! 다시 머리를 쥐어뜯는데, 문득 조그마한 메모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잊으세요… 잊으세요.’

 

이미 다 잊었는데, 뭘 더 잊으라는 건가?

하지만 잠시 후, 내 입에서 파안대소가 터졌다.

잊으라면서 증거품은 왜 남겼을까?

메모지는 그녀와의 하룻밤을 증명해주는 훌륭한 물증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 즉시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옆방을 예약했고,

지금의 방 역시 하루 더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관계자 모두에게 일일이 문자메시지를 보내어 이 방에서의 소집을 명령했다.

팀원에게는 금사장을, 금사장에게는 그녀를, 그녀에게는 나의 휴대폰 번호를 남겼다.

얽히고설킨 관계, 오늘 나는 한꺼번에 모든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들은 각기 정해진 시간에 맞춰 이곳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들어오고, 비로소 나는 등장하게 될 것이다.

다른 이들은 피라미였고, 오로지 금사장이 타깃이었다.

그녀를 대신하여 나는 금사장에게 선언할 것이다.

 

“계약녀 홍지연은 계약남 금사장을 속이고 그 동안 수차례 다른 남정네들과 정을 통하였소.

바로 저들이 증거품인 홍지연의 상대남들이오.

당연한 결과겠지만, 이제 금사장과 홍지연의 계약은 자동 파기되었고,

모든 권리와 의무와 책임이 사라졌음을 선언하는 바이오.”

 

팀장과 팀원들은 당황해할 것이고, 금사장은 치를 떨 것이다.

물론 그녀 역시 적잖은 상처를 입을 것이다.

하지만 금사장을 떨쳐내기 위해선 그만한 희생쯤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다고 과연 금사장이 떨어져 나갈까? 모르는 말씀이시다.

자고로 이 땅의 남자들에게 여자란 개인재산에 다름이 아니다.

쪼갤 수도 없는 것이 여자인데, 공동재산으로 등록이 가능하겠는가?

금사장 역시 자존심이 허락지 않을 것이다.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는 끝났다.

비록 혼자였지만, 나는 여러 번 리허설까지 끝마쳤다.

시계를 보니 카운터다운이 시작됐다.

낮에 잠깐 외출하여 사왔던 청진기를 챙겨들고, 나는 서둘러 옆방으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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