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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38

오늘의 쉼터 2015. 6. 13. 14:02

그녀의 시간표 38 

 

 

 

 

 

호텔, 참으로 많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선뜻 결정이 어려웠다.

이곳저곳 전전하며 장단점을 꼼꼼히 따져보다가 결국 한강변의 한 호텔을 점찍었다.

지금은 눈이 그쳤다지만, 새벽녘에 다시 눈이 내릴 것이라고 라디오는 장담하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눈 내리는 강변풍경… 캬, 생각만으로도 절로 군침이 돌았다.

 

“지연씨, 우리 저기 갈 건데… 괜찮죠?”

 

잠시 차를 멈추고,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크르렁 크르렁 그녀가 코 고는 소리로 대답했는데,

이로써 정당한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 합의가 도출되었다.

하지만 여자에겐 직감이라는 레이더가 있다.

아무리 잠이 깊어도 레이더는 결코 작동을 멈추지 않는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챘는지 그녀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죠?”

 

“저기 가기로 합의했잖아요. 기억하죠?”

 

시치미를 떼며 천연덕스레 앞 유리 저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도로 건너편으로 호텔의 네온사인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보았는가, 그리고 부끄러운가?

그녀의 시선이 얼른 아래로 떨어졌다.

앞으로의 여정을 기꺼이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

뭐 그런 신호였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다.

갑자기 그녀가 헛구역질을 했고, 그야말로 순식간에 차안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시큼한 냄새가 사정없이 코끝을 찔렀다.

 

“아, 역겨워! 명태씨, 이 냄새 도저히 못 참겠어요.”

 

그녀가 소프라노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요, 내 탓이 아닙니다. 조금만 참아요. 금방 닦아낼게요.”

 

“이런 지저분한 일까지 하게 하다니… 나, 나쁜 여자죠?”

 

“신의 섭리죠. 예쁜 여자들은 다들 그렇더라고요.”

 

“이 차 비싼 건데, 냄새가 오래 가면 어쩌죠?”

 

“십년 할부면 나도 이런 차 살 수 있어요. 내가 차 바꿔줄게요.”

 

“지금, 프러포즈하는 거예요?”

 

“프러포즈는 이미 했는데, 기억을 못하시나 보네요?”

 

“기억해요…”

 

그녀가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정색한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지배인님한테 얘기 들었어요.

더는 관심 갖지 말아요. 나, 위험한 여자예요… 당신, 위험할 수 있어요…”

 

“안 그래도 다들 날 못 잡아먹어서 난리죠.”

 

“나란 여자, 왜 이렇게 살까요? 앞이 안 보여요. 깜깜해요.”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답니다.

연애가 재밌는 건 상대방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래요.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당신도 역시…”

 

그녀가 불현듯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더니 살그머니 눈까풀을 내렸다.

찬바람이 스민 것처럼 갑자기 온몸이 오슬오슬 떨렸다.

서둘러 따뜻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도로를 따라 차를 움직였다.

 

새벽녘, 라디오에서 약속한 것처럼 다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유리에 부딪힌 눈발이 비명을 지르며 미끄러졌다.

그 바람에 곤하게 자던 그녀가 부스스 눈을 떴다.

 

“아, 머리 아파. 술이 너무 과했나봐, 머리가 도는 것 같아요.”

 

“밤새 호텔을 뱅글뱅글 돌았는데, 당연히 어지러울 수밖에요.”

 

“왜요? 강제로라도 호텔에 데려갈 듯 눈빛이 벌겋던데…”

 

“나, 그렇게 짐승 같은 놈 아닙니다.”

 

그 순간 그녀의 입술이 느닷없이 내 입술을 덮쳐왔다.

사랑은… 비밀이다. 비로소 촉촉하고 시큼하고 달콤한 비밀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비밀은 비밀이 아니었다. 회사에 출근하고 나서,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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