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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35

오늘의 쉼터 2015. 6. 13. 13:37

그녀의 시간표 35 

 

 

 

머리카락도 옷도 백설처럼 하얗다.

겉모습으로 보아 어느 심심 산골짝에 박혀 도를 닦다가 이윽고 깨달음을 얻어

하산한 도인이 아니겠는가 여겨졌다.

하지만 잠시의 착각 혹은 착시현상이었다. 사주팔자 운운한 인간은 포커의 달인 팀장이었다.

 

“웬 폭설이람. 스노체인도 없는데…”

 

 

달인이 머리와 옷에 묻은 눈(雪)을 툭툭 손으로 털어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꼴을 보아하니 여직원들에게 당했군.

조만간 이런 일이 발생하리라 짐작했네만, 생각보다 빠르네. 그 연유를 알려줘?”

 

내 눈에는 팀장이 진짜 달인처럼, 아니 도인처럼 보였다.

부리나케 팀장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이 회사에는 전설 같은 러브스토리가 전해내려와…”

 

노씨 성을 가진 여직원이 있었다.

이 여자는 일곱 살 연하인 서른의 조팀장, 일명 쾌걸조에게 연정을 품었다.

쾌걸조는 사장의 인척이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실용상식사전에서 인척을 찾아보면

 ‘사주의 DNA와 상당히 엇비슷하여,

실력에 상관없이 출셋길이 훤히 뚫려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전에서 보장하듯이 쾌걸조는 앞날이 창창했다.

거기에 외국 유학파였고 외모도 남달리 출중했다.

여직원들은 입만 벌렸다 하면 쾌걸조를 조잘거렸고,

하루에 한 번 그를 보지 못하면 눈에 가시가 돋는다며 탄식했다.

출퇴근시간이면, 그를 먼발치에서라도 보기 위해 몰려든

 여직원들로 통로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쾌걸조, 그는 홍지연을 사모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여자를 향한 도끼질은 열 번이면 충분하다 했거늘,

홍지연은 찍어도 찍어도 어째 끄떡없었다.

실패의 원인을 심사숙고해보면 사사건건 쾌걸조의 도끼질을 방해하고 나서는 노대리가 원흉이었다.

노대리의 지뢰밭을 피해 홍지연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쾌걸조는 숨을 쉴 때마다 생각했다.

 

그렇게 나날이 고민을 쌓아가던 어느 날,

쾌걸조에게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홍지연을 생각했는데 묘하게 노대리의 얼굴이 겹쳐왔고,

홍지연에게 전화를 했는데 확인해보면 노대리의 휴대폰번호였다.

귀신에 홀린 것일까?

어느 날 쾌걸조는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노대리를 불러내 술을 마시며

자신이 겪고 있는 고충에 대해 조언을 부탁했다.

하지만 위험했다.

적과의 동침마저 아름답게 포장시키는 묘약이 바로 술이었다.

 

“노대리의 배가 보름달처럼 커지니까,

쾌걸조도 더는 버티지 못하더군.

그 친구, 결혼식장에서 한바탕 난리를 쳤지 뭐야.

회사에 마법사가 취직한 게 틀림없다나 뭐라나…”

 

나중에 여직원들이 떼거리로 몰려가 유부녀가 된 노대리에게 결혼에의 비법을 캐물었다.

노대리는 가만히 쾌걸조의 찢어진 양복 소매를 그녀들 앞에 내어놓았다.

 

“글쎄 그걸 보며 매일 주문을 외웠대. 쾌걸조가 홍지연을 떠올릴 때 대신

자기 얼굴을 클로즈업시켜 달라고. 그 친구, 안됐지만 1년 전 뺑소니에 치여 죽었어.

엄청난 유산에 보너스로 보험금까지…

사자후를 터뜨리며 웃는 과부를 여러 사람이 목격했다더군.”

 

세월이 흐르면서 논픽션에 픽션이 뒤섞였다.

회사 최고 인기남의 찢어진 옷가지에 소원을 빌면 반드시 성취된다!

전설은 변질되었지만, 어쨌거나 여직원들은 의심없이 믿고 있었다.

 

“그러니까, 순전히 자기들 잘 먹고 잘살기 위해 내 옷을 찢어간 거다, 이거 아닙니까?”

 

발끈 화가 치미는데, 마침내 휴대폰에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징글벨 징글벨 징그으르벨… 아, 징글맞은 이놈의 벨소리!

신경질적으로 발신자 번호를 확인했다.

아, 이… 이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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