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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37

오늘의 쉼터 2015. 6. 13. 13:55

그녀의 시간표 37 

 

 

 

적들의 감시는 철통같았다.

나는 감금당했고, 이러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어찌하든 빠져나가야 하는데,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화장실을 핑계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내가 화장실에 갈 때면 꼭 누군가는 동행하여 따라붙었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나는 적들에게 2차를 가자고 부추겼다.

그들은 그러자며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순간, 나는 냅다 도망을 쳤다.

 

“서! 거기 안 서! 너 잡히면 죽는다!”

 

팀장을 비롯하여 우르르 내 뒤를 쫓아왔으나 죽기 살기로 도망을 쳤고,

서둘러 약속장소로 향했다.

 

무려 두 시간 가까이 늦었다. 그녀를 찾았으나 역시 보이지 않았다.

 

적들의 방해공작으로 그녀와의 데이트가 또다시 무산이 되고 만 것이다.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었고, 문득 자전거 체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놈들, 언제고 본때를 보여주리라. 주먹을 으드득 움켜쥐는데,

다가온 종업원이 찾으시는 분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몽타주에 대해 제법 소상하게 설명해주었다.

 

“제 가슴을 잘 보세요.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아름다운 한 여자가 보일 겁니다.

저의 유일한 사랑이죠. 이 여자, 보셨나요?”

 

종업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칵테일 잔 두 개가 놓여 있는 테이블을 손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녀가 없었다.

 

“나 지금 농담하고 싶은 기분 아닙니다.”

 

사납게 이맛살을 좁히자,

당황한 종업원이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때 한 여자가 비틀거리며 종업원의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였다.

 

“조금… 늦었네요.”

 

알코올 내음을 푹푹 풍기며 그녀가 내게 눈인사를 했다.

볼이 발그스름한 게 열병에라도 걸린 사람 같았다.

 

“적들에게 포로로 잡히는 바람에…

당신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끝내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어요.”

 

“늦게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정말이에요…”

 

말하고, 그녀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아, 얼마나 나를 보고 싶었으면… 감동의 물결,

바로 그랬다.

테이블에 앉아 쉴 새 없이 와인 잔을 부딪혔다.

그녀의 눈동자는 한껏 풀어져 있었고,

우리는 제법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난 이브예요. 뱀의 유혹도 없었는데 스스로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 아시겠어요?”

 

“그랬군요. 어쩐지 미모가 범상치 않더라고요.”

 

“난 뱀이 좋아요. 뱀은 끊임없이 날 유혹해요.”

 

“뱀은 프로예요. 혀는 갈라졌고, 생식기는 두 개죠.

피부는 매끄럽고, 귀가 없으니 다른 사람의 잔소리 따위 신경 쓰지도 않아요.

사지가 없으니 온몸으로 사랑을 나누죠. 사랑의 화신이에요.”

 

“아, 머리 아파요. 많이 마셨나 봐요. 우리… 그만 가요.”

 

“어디로?”

 

…호텔이오. 본능적으로 감이 잡혔다.

이 여자, 내게 모든 것을 맡기려고 작정했구나.

이럴 때 회피하면 사랑은 초라해진다.

그녀를 부축하여 밖으로 나가는데,

쫓아온 종업원이 그녀의 차가 지하주차장에 있음을 귀띔했다.

 

그녀를 조수석에 태우고 차를 몰아 차도로 나왔다.

한 뼘이나 쌓인 눈(雪)에 어둠이 반사되고 있었다.

도심에서 흔하디 흔한 것이 호텔이었다.

더 짙은 어둠에 시선을 맞추며, 어느 호텔로 가야 할지 고민했다.

생각해보면, 태어나서 지금처럼 고민이 심각했던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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